서울에 외계 착륙선이 낙하하고 지크프리트가 적을 격퇴한 다음날, 모든 신문과 방송은 지크프리트의 재등장을 톱뉴스로 다뤘다. 기사에서는 뉴욕과 리우데자네이루가 파괴될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가 서울에서 나타났다는 점이 중점적으로 부각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비밀리에 검투사 로봇이나 그 로봇을 만든 집단과 접촉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왜 1시간 가까이 늦게 나타났느냐고 반박했고, 정부는 검투사 로봇과의 연관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대통령에겐 안 된 일이지만, 그 발표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전투가 벌어졌던 여의도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지크프리트의 검이 틀어박히고 충돌까지 했던 63빌딩은 중심구조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철거가 결정되었고, 많은 건물들이 보수와 조사 명목으로 폐쇄되었다. 거기다 부서진 로봇과 착륙선 잔해 처리를 이유로 여의도에 대한 출입 자체가 봉쇄되는 바람에 여의도에 직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실업자 또는 무급 휴가자가 되었다.
지크프리트에게 파괴된 로봇은 대형 트레일러에 실린 채 인천에서 대형 화물선으로 옮겨져 미국으로 보내졌다. 애초에 한국에서는 연구할 설비도 없기 때문에 빨리 빨리 넘겨주는 편이 서로에게 좋았다. 다행히 지크프리트가 토막을 쳐놓다시피 한 덕분에 운반하는데 큰 곤란은 없었다.
《그래도 살아간다》 - 8. 구원은 없다
세환은 전투 다음날부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오전에 2시간, 오후에 4시간, 저녁에 3시간. 세환은 첫 전투가 있기 전까지 해왔던 것처럼 식사와 수면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트레이닝을 하길 원했지만 세환의 몸 상태를 고려한 브룬힐데가 그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의도 전투 이후 세환은 오직 한가지 목표만을 세웠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적을 격파하는 것. 그것을 위해 세환은 브룬힐데에게 방패를 타원형으로 변형시키라고 지시했고, 또한 공격 동작보다 체술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가상 적기는 이제 무기 대신 유도와 각종 격투기를 구사하는 방식으로 변경됐고, 세환은 빠르게 적응했다. 여기에는 세환이 브룬힐데에게 나노머신의 신경 접속 기능을 응용하도록 지시한 덕이 컸다.
"신경 접속 기능이 있다면, 인체 내의 호르몬 생성 기관에 연결된 신경도 접속 가능하겠지?"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러면 됐어. 나노머신의 양은 신경 접속에 필요한 양 이상 주입되었다고 했지? 남는 분량은 호르몬 생성 기관을 조정하는데 써. 아드레날린 같은, 운동이나 감각에 관련된 호르몬의 분비량을 늘리도록."
세환의 말대로 한다면 반응 속도나 운동 능력은 분명히 비약적으로 향상되겠지만 그만큼 육체의 부담이 커지게 된다. 안 그래도 신경 접속의 부작용 때문에 몸이 망가져가고 있는 세환에게는 타격이 더 클 것이다.
「마스터, 그렇게 되면 마스터의 육체에 큰 부담이 걸리게 됩니다. 나노머신에 의한 피해는 치료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상관없어, 때려잡을 수만 있으면. 그리고 어차피 몇달이랬더라... 두 달이랬나? 모선이 지구에 도착하는 게. 그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세환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브룬힐데는 그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르몬 분비량이 많아지며 세환의 반응 속도는 오랜 세월 수련을 거듭한 무술가 이상으로 빨라졌지만 몸은 점점 망가져가고 있었다. 시력은 마이너스에 가까워지고, 이제는 한쪽 청력마저 약해지고 있었지만 세환은 나노머신을 이용한 신경계 조정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20XX년 12월 중순, 백악관 집무실.
지난 2주간 부통령과 외무장관은 러시아, 중국과 의견 조정을 거치느라 피를 말리는 심정이었다. 지구에 접근 중인 모선에 대한 정보를 말했을 때에는 양쪽 다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세계 최강대국을 자처하는 미국이 다른 나라, 그것도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 협조를 요청해왔다는 사실에 한번쯤 튕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예상하는 공격 규모, 그리고 그 수준으로도 격파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 결과까지 제공하자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야 자신들, 정확히는 인류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실감하게 된 것이다. 계획은 그때부터 빠르게 수립되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영상통신장비를 이용해 3국의 지도자가 계획을 확정짓는 자리였다.
"제어장치는 잘 도착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지금쯤이면 한창 조정중이겠지요.』
"다행이군요. 중국 쪽은 어떻습니까?"
『이쪽도 순조롭소. 다만 장비 체계가 좀 다르다보니 거기에 맞추느라 기술자들이 고생인 모양이오.』
"기술자들에게는 안 된 일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제 한번 들렀더니 다들 얼굴이 시체같더군요. 일이 끝나면 이번에 고생한 사람들에게 영웅 훈장이라도 줘야지 싶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이 분위기를 풀고 싶었는지 나름대로 농 섞인 말을 꺼냈지만, 그 말은 중국 주석에 의해 단칼에 잘려나갔다.
『그런 말은 '저것'부터 확실하게 깨놓고 나서 합시다.』
중국 주석의 표정은 여간 불쾌해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는 하지만 수시로 으르렁 대는 미국에서 군사 장비를 제공받아 사용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화난 표정의 중국 주석을 보고 러시아 대통령은 입을 다물었고, 미국 부통령이 말을 받았다.
"예, 그럼 계획을 확인하도록 하지요. 우선, 지난 번에 제공해드린 제어장치를 장착하고 조정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열흘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오.』
러시아 대통령의 대답에 이은 중국 주석의 말에 미국 부통령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미국의 관련 분야 전문가들은 3국의 무기 체계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조정을 거쳐야하고, 모든 장치를 조정하려면 최소한 8~9일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열흘이라고 한 것은 여유를 잡고 말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최소 예상 조정기간을 이틀이나 앞당길 수 있다는 중국 주석의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주석, 너무 호기부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건 자존심 세워서 경쟁할 일이 아닙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모자랄 일입니다."
『내가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우리를 너무 얕보고 계시는구만. 우리 중국의 기술자들은 다른 나라 기술자들처럼 게으르지 않소이다. 그 정도는 일도 아니오.』
"일이 잘못되면 중국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위험해진단 말입니다."
『중국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감히 우릴 뭘로 보는 거요!』
버럭 소리를 지르는 중국 주석의 모습에 미국 부통령도 순간 마주 고함을 칠 뻔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중국이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면 그만인 것이다. 부통령도 이번 일이 인류의 존망과 연결되는 일만 아니었다면 그랬겠지만, 불행히도 얼렁뚱땅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좋습니다. 그래도 우리와 러시아의 조정에 열흘 정도는 걸릴 듯 하군요."
부통령은 '빨리 한다고 좋을 것 없다'는 말을 빙 돌려 말해봤지만 중국 주석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쳐든 채 부통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또 한번 울컥 했지만 스크린 바로 옆에 서있던 비서실장이 눈치를 줘서 겨우 참을 수 있었다.
"그러니 최소한 크리스마스는 되어야 준비가 끝날 것 같군요. 그리고 각 미사일의 제어는 각국의 우주사령부나 관제센터에서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효율을 따진다면 제어를 한 나라로 완전히 몰아주거나, 각자 미사일을 제어한다면 그 자료를 실시간 링크하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그 얘기가 나오자마자 국무장관이 보안 문제를 들먹이며 길길이 날뛰었고, 부통령 자신도 3국의 미사일 제어 시스템을 실시간 링크하는 것은 여러모로 찜찜했기에 없었던 일로 했다. 그리고 제어를 한 나라로 몰아주는 것은, 어느 나라로 몰아주기로 하더라도 다른 두 나라가 가만 있지 않을 게 뻔했기에 역시 포기. 결국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쓰게 되었다.
『발사예정일은 그대로겠군요.』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표일 말인데, 일주일 후에 있을 다음 화상 회의 때 정했으면 합니다. 괜찮겠지요?"
『상관없습니다. 다만 발표한 후의 혼란이 걱정이군요.』
"어차피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회의 때 뵙지요.』
"예, 일주일 후에 뵙겠습니다."
『...흠.』
러시아와 중국에 연결된 화상 통신이 차례로 끊어진 다음 부통령은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러시아 대통령은 상당히 협조적인데 비해 중국 주석은 인류의 미래가 걸린 일에 자국의 자존심만 내세우고 있어서 정말 어이가 없었다. 아마 자신의 직위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중국 주석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면 달려들어 드잡이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부통령은 잠시 가만히 앉아있다가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에는 계획을 공표할 시기에 관한 회의가 있었다.
20XX년 12월 24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현지시각 밤 10시, 한국시각 다음날 오전 5시.
크리스마스 이브, 예루살렘 전역에 비상이 걸리며 피난 경보가 발령되었다. 약 20분 후, 밤하늘 한쪽 구석에 거대한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눈에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다른 이를 밀치며 도망치려는 사람. 착륙선은 그 모든 행동을 무시하며 예루살렘에 낙하했다.
이스라엘 총리는 착륙선이 낙하했다는 보고를 받고나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군의 전투력을 믿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반쯤 체념한 것에 가까웠다. 검투사 로봇─지크프리트─이 나타나 외계 로봇을 쓰러트리면 좋고, 아니면 핵을 날릴 뿐. 이스라엘 총리에게는 선택지가 그 둘 밖에 없었고, 사실 그것은 지구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총리는 지크프리트가 나타나 전투를 시작했을 때에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다.
"제법 빠른데..."
세환은 적기의 공격을 피해내며 중얼거렸다.
지크프리트의 외형은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대형 라운드 실드는 타원형으로 변형되었고, 오른팔에만 장착되어 있던 니들 건이 왼팔에도 장비되었다. 그리고 팔꿈치와 무릎 부분에 추가 장갑이 장착되고 숄더 아머와 대퇴부를 비롯한 기체 각부에는 보조 스러스터가 추가되어 있었다. 기동성과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스러스터의 힘을 빌릴 생각으로 장착한 것이다. 그런데 적기는 그런 지크프리트의 공격을 손쉽게, 까지는 아니지만 피하며 반격까지 해왔다.
"이건 어때!"
세환은 거리를 벌리며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니들 건을 발사했다. 한순간에 20발의 니들 다트가 쏘아져 나갔지만 놀랍게도 적기는 들고 있던 타워 실드로 전부 막아냈다. 순간 어이가 없어진 세환은 멍하니 혼잣말을 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속도에 반응할 수가 있어?"
「적기는 니들 건이 발사되기 전에 방어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마스터가 양팔을 앞으로 뻗는 것을 보고 원거리 공격이 있을 거라 판단한 듯 합니다.」
"썩을 놈, 머리 잘 돌아가잖아?"
전투용 AI이니 그 정도 판단력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을 것이다. 세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타워 실드를 들고 있어서 방어력도 상당하고, 그 주제에 반응 속도도 제법 빠르고, 게다가 무기는 장창이라 지크프리트가 불리했다.
"문제는 저놈의 타워 실드인가... 핫!"
세환은 오른손의 장검을 등뒤로 힘껏 당기고는 왼팔의 니들 건으로 적기를 겨누며 달려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왼팔의 방패로 동체를 가리며 돌격했을 테지만 지금 지크프리트는 방어보다는 공격에 치중하도록 개량되어 있었다. 돌진해오는 지크프리트를 본 적기는 창을 들어올려 공격하려 했지만 세환은 적기가 창을 들어올리자 마자 니들건을 발사했다. 타격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격 타이밍을 뺏기 위한 견제. 예상대로 적기는 창을 내리며 실드로 니들 다트를 막아냈고, 다음 순간 지크프리트는 타워 실드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세환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충돌했다.
"타아아아아앗!"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지크프리트의 방패와 적기의 타워 실드가 부딪쳤다. 하지만 세환의 의도와는 다르게 적기는 겨우 몇걸음 뒤로 밀렸을 뿐, 지크프리트의 돌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세환은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 위해 메인 스러스터를 작동시킬 생각을 했다. 그 때 브룬힐데가 외쳤다.
「마스터! 왼쪽!」
"크허억!"
방패끼리 충돌해서 힘겨루기에 들어가 있던 그 잠깐동안, 적기는 창대를 짧게 잡고는 타워 실드 옆으로 몸을 슬쩍 내밀어 지크프리트의 옆구리를 찔렀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받은 세환은 주춤거렸고, 그 틈에 창을 뽑아낸 적기는 이번엔 타워 실드를 휘둘렀다.
콰앙 하는, 공기마저 떨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타워 실드가 지크프리트를 후려쳤지만 세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지크프리트에 가해진 충격이 콕핏에까지 전해져 순간 숨이 막혔던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숨을 쉬었을 때에는 적기에서 20미터 넘게 떨어진 곳으로 나가떨어진 뒤였다.
"크으... 저 자식이..."
「투창입니다!」
브룬힐데의 경고에 세환은 적기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창이 세환의 눈에 들어왔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세환은 지크프리트를 옆으로 굴렸다. 옆구리에 생긴 창상이 통증을 일으켰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지크프리트의 뒤편에 창이 꽂히며 집을 부수고 흙먼지를 피워올렸다.
"위험했다... 하지만 이걸로...!"
적기의 장비는 분명 창과 방패였다. 그 중 하나인 창을 방금 던졌으니, 이젠 방패 뿐이리라. 방어만 계속하다간 틈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쓰러트리는 건 시간 문제다. 세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을 바라보았고, 또 한번 전신을 뒤흔드는 충격과 함께 수십미터를 나가 떨어졌다.
"컥, 크허, 으으... 또 실드에 맞았나?"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세환은 앞을 보고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적기가 등 뒤에서 반으로 접힌 창을 꺼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접힌 창을 휘둘러 완전한 형태로 만드는 모습을 보며 세환은 중얼거렸다.
"저거 말고 또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냐... 망할."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환은 지크프리트를 일으켜 세운 다음, 다시 한번 적기에게 돌격시켰다. 이번엔 메인 스러스터까지 이용한 고속 돌격. 적기도 피하지 않고 타워 실드로 맞받아냈고, 또 한번의 굉음과 함께 두 기체의 방패가 충돌했다.
충돌한 직후, 세환은 메인 스러스터의 방향을 바꿔 뛰어 올랐다. 방금 전까지 지크프리트가 서 있던 자리를 창날이 찔러들어왔고, 그 위로 떠오른 세환은 힘껏 검을 내리쳤다.
"이런!"
좋은 기회였지만 적기의 AI는 역시 녹록지 않았다. 타워 실드를 그대로 들어올려 실드의 옆면으로 검로를 막은 것이다. 거기에 이어 지크프리트를 향해 창을 찔렀다. 세환은 지크프리트의 전신에 부착한 보조 스러스터를 이용해 동체를 틀어 창날을 피해내는 동시에 창대를 옆구리에 끼웠다. 그리고 그대로 착지.
창을 잡힌 채 방패 뒤에 숨어있는 적기의 모습에, 세환은 씨익 웃고는 그대로 무릎을 끌어올려 타워 실드를 찍었다. 그러자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타워 실드가 우그러 들었다. 의외의 상황에 적기가 한걸음 물러선 것을 확인한 세환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내딛으며 양 무릎을 번갈아가며 타워 실드를 찍었고 그 때마다 실드는 조금씩 형태를 잃어갔다. 양 팔꿈치와 무릎에 장착된 추가 장갑에는 '파일 벙커(Pilebunker)'가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콰아아앙────────
다섯번째의 가격으로 타워 실드에 구멍이 뚫렸다.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적기는 창을 놓고 물러서며 실드를 휘둘렀지만, 세환은 창대를 쥔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자 마자 보조 스러스터의 역분사로 물러섰기에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적기가 놓고 물러선 창을 왼손에 든 세환은 재차 돌격, 적기의 코앞에서 왼쪽으로 한바퀴 돌며 길게 잡은 창대를 옆으로 휘둘렀다. 이번에도 팔과 동체에 장착된 보조 스러스터를 이용했기에 위력은 본래의 몇배에 달할 터. 그 공격을 적기는 받아낼 생각을 못하고 뛰어올라 피했고, 세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검을 찔러올렸다.
"하아앗!"
목을 향해 찔러들어오는 지크프리트의 장검에 적기는 타워 실드를 움직여 막으려고 했지만 동작이 늦었다. 검날이 실드의 옆면을 긁으며 불꽃을 튀겨 올렸고, 검의 첨단부는 그대로 적기의 목을 관통했다.
쿠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적기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세환은 들고 있던 적기의 창을 거꾸로 쥐고는 쓰러진 적기의 명치 부분을 힘껏 찔렀다. 창은 그대로 적기의 에너지 수신 장치를 관통하며 지면에 꽂혔다. 창을 놓고 물러서던 세환은 문득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브룬힐데, '통곡의 벽'이란 게 여기 어디에 있는지 표시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저곳입니다.」
시야 한 구석에 나타난 마크를 따라 시선을 돌리던 세환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까 적기가 던진 창이 박살낸 건물─이라고 생각했던 구조물─이 통곡의 벽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진짜로 통곡하게 생겼구만."
예루살렘 전투에서 통곡의 벽이 파괴된 일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노와 슬픔을 감추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통곡의 벽은 외국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와닿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만의 유적'이라고 할까.
스위스 시간으로 다음해 1월 1일, 미국과 러시아, 중국의 지도자가 합동 연설을 가졌다.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행해진 이 연설에서, 3국의 지도자들은 외계 로봇의 모선이 접근하고 있으며, 모선을 막기 위해 다량의 핵미사일을 발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격파 가능성에 대해서는 함구했지만 발표한 내용만으로도 전세계가 경악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세계가 아직 연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150발의 핵미사일이 모선을 향해 발사되었다. 군사 위성을 이용한 궤도 수정 장치가 장착된 미사일들은 하나 하나가 20메가톤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 미사일이 우주 공간을 가르기 시작한지 닷새 후, 모선이 미사일의 센서에 포착되었다. 정확히는 별빛을 가리는 모선의 그림자가. 미사일들은 그 그림자의 중앙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미사일이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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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투가 벌어졌던 여의도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지크프리트의 검이 틀어박히고 충돌까지 했던 63빌딩은 중심구조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철거가 결정되었고, 많은 건물들이 보수와 조사 명목으로 폐쇄되었다. 거기다 부서진 로봇과 착륙선 잔해 처리를 이유로 여의도에 대한 출입 자체가 봉쇄되는 바람에 여의도에 직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실업자 또는 무급 휴가자가 되었다.
지크프리트에게 파괴된 로봇은 대형 트레일러에 실린 채 인천에서 대형 화물선으로 옮겨져 미국으로 보내졌다. 애초에 한국에서는 연구할 설비도 없기 때문에 빨리 빨리 넘겨주는 편이 서로에게 좋았다. 다행히 지크프리트가 토막을 쳐놓다시피 한 덕분에 운반하는데 큰 곤란은 없었다.
《그래도 살아간다》 - 8. 구원은 없다
세환은 전투 다음날부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오전에 2시간, 오후에 4시간, 저녁에 3시간. 세환은 첫 전투가 있기 전까지 해왔던 것처럼 식사와 수면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트레이닝을 하길 원했지만 세환의 몸 상태를 고려한 브룬힐데가 그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의도 전투 이후 세환은 오직 한가지 목표만을 세웠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적을 격파하는 것. 그것을 위해 세환은 브룬힐데에게 방패를 타원형으로 변형시키라고 지시했고, 또한 공격 동작보다 체술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가상 적기는 이제 무기 대신 유도와 각종 격투기를 구사하는 방식으로 변경됐고, 세환은 빠르게 적응했다. 여기에는 세환이 브룬힐데에게 나노머신의 신경 접속 기능을 응용하도록 지시한 덕이 컸다.
"신경 접속 기능이 있다면, 인체 내의 호르몬 생성 기관에 연결된 신경도 접속 가능하겠지?"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러면 됐어. 나노머신의 양은 신경 접속에 필요한 양 이상 주입되었다고 했지? 남는 분량은 호르몬 생성 기관을 조정하는데 써. 아드레날린 같은, 운동이나 감각에 관련된 호르몬의 분비량을 늘리도록."
세환의 말대로 한다면 반응 속도나 운동 능력은 분명히 비약적으로 향상되겠지만 그만큼 육체의 부담이 커지게 된다. 안 그래도 신경 접속의 부작용 때문에 몸이 망가져가고 있는 세환에게는 타격이 더 클 것이다.
「마스터, 그렇게 되면 마스터의 육체에 큰 부담이 걸리게 됩니다. 나노머신에 의한 피해는 치료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상관없어, 때려잡을 수만 있으면. 그리고 어차피 몇달이랬더라... 두 달이랬나? 모선이 지구에 도착하는 게. 그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세환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브룬힐데는 그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르몬 분비량이 많아지며 세환의 반응 속도는 오랜 세월 수련을 거듭한 무술가 이상으로 빨라졌지만 몸은 점점 망가져가고 있었다. 시력은 마이너스에 가까워지고, 이제는 한쪽 청력마저 약해지고 있었지만 세환은 나노머신을 이용한 신경계 조정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20XX년 12월 중순, 백악관 집무실.
지난 2주간 부통령과 외무장관은 러시아, 중국과 의견 조정을 거치느라 피를 말리는 심정이었다. 지구에 접근 중인 모선에 대한 정보를 말했을 때에는 양쪽 다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세계 최강대국을 자처하는 미국이 다른 나라, 그것도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 협조를 요청해왔다는 사실에 한번쯤 튕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예상하는 공격 규모, 그리고 그 수준으로도 격파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 결과까지 제공하자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야 자신들, 정확히는 인류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실감하게 된 것이다. 계획은 그때부터 빠르게 수립되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영상통신장비를 이용해 3국의 지도자가 계획을 확정짓는 자리였다.
"제어장치는 잘 도착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지금쯤이면 한창 조정중이겠지요.』
"다행이군요. 중국 쪽은 어떻습니까?"
『이쪽도 순조롭소. 다만 장비 체계가 좀 다르다보니 거기에 맞추느라 기술자들이 고생인 모양이오.』
"기술자들에게는 안 된 일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제 한번 들렀더니 다들 얼굴이 시체같더군요. 일이 끝나면 이번에 고생한 사람들에게 영웅 훈장이라도 줘야지 싶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이 분위기를 풀고 싶었는지 나름대로 농 섞인 말을 꺼냈지만, 그 말은 중국 주석에 의해 단칼에 잘려나갔다.
『그런 말은 '저것'부터 확실하게 깨놓고 나서 합시다.』
중국 주석의 표정은 여간 불쾌해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는 하지만 수시로 으르렁 대는 미국에서 군사 장비를 제공받아 사용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화난 표정의 중국 주석을 보고 러시아 대통령은 입을 다물었고, 미국 부통령이 말을 받았다.
"예, 그럼 계획을 확인하도록 하지요. 우선, 지난 번에 제공해드린 제어장치를 장착하고 조정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열흘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오.』
러시아 대통령의 대답에 이은 중국 주석의 말에 미국 부통령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미국의 관련 분야 전문가들은 3국의 무기 체계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조정을 거쳐야하고, 모든 장치를 조정하려면 최소한 8~9일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열흘이라고 한 것은 여유를 잡고 말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최소 예상 조정기간을 이틀이나 앞당길 수 있다는 중국 주석의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주석, 너무 호기부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건 자존심 세워서 경쟁할 일이 아닙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모자랄 일입니다."
『내가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우리를 너무 얕보고 계시는구만. 우리 중국의 기술자들은 다른 나라 기술자들처럼 게으르지 않소이다. 그 정도는 일도 아니오.』
"일이 잘못되면 중국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위험해진단 말입니다."
『중국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감히 우릴 뭘로 보는 거요!』
버럭 소리를 지르는 중국 주석의 모습에 미국 부통령도 순간 마주 고함을 칠 뻔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중국이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면 그만인 것이다. 부통령도 이번 일이 인류의 존망과 연결되는 일만 아니었다면 그랬겠지만, 불행히도 얼렁뚱땅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좋습니다. 그래도 우리와 러시아의 조정에 열흘 정도는 걸릴 듯 하군요."
부통령은 '빨리 한다고 좋을 것 없다'는 말을 빙 돌려 말해봤지만 중국 주석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쳐든 채 부통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또 한번 울컥 했지만 스크린 바로 옆에 서있던 비서실장이 눈치를 줘서 겨우 참을 수 있었다.
"그러니 최소한 크리스마스는 되어야 준비가 끝날 것 같군요. 그리고 각 미사일의 제어는 각국의 우주사령부나 관제센터에서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효율을 따진다면 제어를 한 나라로 완전히 몰아주거나, 각자 미사일을 제어한다면 그 자료를 실시간 링크하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그 얘기가 나오자마자 국무장관이 보안 문제를 들먹이며 길길이 날뛰었고, 부통령 자신도 3국의 미사일 제어 시스템을 실시간 링크하는 것은 여러모로 찜찜했기에 없었던 일로 했다. 그리고 제어를 한 나라로 몰아주는 것은, 어느 나라로 몰아주기로 하더라도 다른 두 나라가 가만 있지 않을 게 뻔했기에 역시 포기. 결국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쓰게 되었다.
『발사예정일은 그대로겠군요.』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표일 말인데, 일주일 후에 있을 다음 화상 회의 때 정했으면 합니다. 괜찮겠지요?"
『상관없습니다. 다만 발표한 후의 혼란이 걱정이군요.』
"어차피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회의 때 뵙지요.』
"예, 일주일 후에 뵙겠습니다."
『...흠.』
러시아와 중국에 연결된 화상 통신이 차례로 끊어진 다음 부통령은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러시아 대통령은 상당히 협조적인데 비해 중국 주석은 인류의 미래가 걸린 일에 자국의 자존심만 내세우고 있어서 정말 어이가 없었다. 아마 자신의 직위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중국 주석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면 달려들어 드잡이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부통령은 잠시 가만히 앉아있다가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에는 계획을 공표할 시기에 관한 회의가 있었다.
20XX년 12월 24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현지시각 밤 10시, 한국시각 다음날 오전 5시.
크리스마스 이브, 예루살렘 전역에 비상이 걸리며 피난 경보가 발령되었다. 약 20분 후, 밤하늘 한쪽 구석에 거대한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눈에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다른 이를 밀치며 도망치려는 사람. 착륙선은 그 모든 행동을 무시하며 예루살렘에 낙하했다.
이스라엘 총리는 착륙선이 낙하했다는 보고를 받고나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군의 전투력을 믿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반쯤 체념한 것에 가까웠다. 검투사 로봇─지크프리트─이 나타나 외계 로봇을 쓰러트리면 좋고, 아니면 핵을 날릴 뿐. 이스라엘 총리에게는 선택지가 그 둘 밖에 없었고, 사실 그것은 지구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총리는 지크프리트가 나타나 전투를 시작했을 때에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다.
"제법 빠른데..."
세환은 적기의 공격을 피해내며 중얼거렸다.
지크프리트의 외형은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대형 라운드 실드는 타원형으로 변형되었고, 오른팔에만 장착되어 있던 니들 건이 왼팔에도 장비되었다. 그리고 팔꿈치와 무릎 부분에 추가 장갑이 장착되고 숄더 아머와 대퇴부를 비롯한 기체 각부에는 보조 스러스터가 추가되어 있었다. 기동성과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스러스터의 힘을 빌릴 생각으로 장착한 것이다. 그런데 적기는 그런 지크프리트의 공격을 손쉽게, 까지는 아니지만 피하며 반격까지 해왔다.
"이건 어때!"
세환은 거리를 벌리며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니들 건을 발사했다. 한순간에 20발의 니들 다트가 쏘아져 나갔지만 놀랍게도 적기는 들고 있던 타워 실드로 전부 막아냈다. 순간 어이가 없어진 세환은 멍하니 혼잣말을 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속도에 반응할 수가 있어?"
「적기는 니들 건이 발사되기 전에 방어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마스터가 양팔을 앞으로 뻗는 것을 보고 원거리 공격이 있을 거라 판단한 듯 합니다.」
"썩을 놈, 머리 잘 돌아가잖아?"
전투용 AI이니 그 정도 판단력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을 것이다. 세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타워 실드를 들고 있어서 방어력도 상당하고, 그 주제에 반응 속도도 제법 빠르고, 게다가 무기는 장창이라 지크프리트가 불리했다.
"문제는 저놈의 타워 실드인가... 핫!"
세환은 오른손의 장검을 등뒤로 힘껏 당기고는 왼팔의 니들 건으로 적기를 겨누며 달려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왼팔의 방패로 동체를 가리며 돌격했을 테지만 지금 지크프리트는 방어보다는 공격에 치중하도록 개량되어 있었다. 돌진해오는 지크프리트를 본 적기는 창을 들어올려 공격하려 했지만 세환은 적기가 창을 들어올리자 마자 니들건을 발사했다. 타격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격 타이밍을 뺏기 위한 견제. 예상대로 적기는 창을 내리며 실드로 니들 다트를 막아냈고, 다음 순간 지크프리트는 타워 실드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세환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충돌했다.
"타아아아아앗!"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지크프리트의 방패와 적기의 타워 실드가 부딪쳤다. 하지만 세환의 의도와는 다르게 적기는 겨우 몇걸음 뒤로 밀렸을 뿐, 지크프리트의 돌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세환은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 위해 메인 스러스터를 작동시킬 생각을 했다. 그 때 브룬힐데가 외쳤다.
「마스터! 왼쪽!」
"크허억!"
방패끼리 충돌해서 힘겨루기에 들어가 있던 그 잠깐동안, 적기는 창대를 짧게 잡고는 타워 실드 옆으로 몸을 슬쩍 내밀어 지크프리트의 옆구리를 찔렀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받은 세환은 주춤거렸고, 그 틈에 창을 뽑아낸 적기는 이번엔 타워 실드를 휘둘렀다.
콰앙 하는, 공기마저 떨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타워 실드가 지크프리트를 후려쳤지만 세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지크프리트에 가해진 충격이 콕핏에까지 전해져 순간 숨이 막혔던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숨을 쉬었을 때에는 적기에서 20미터 넘게 떨어진 곳으로 나가떨어진 뒤였다.
"크으... 저 자식이..."
「투창입니다!」
브룬힐데의 경고에 세환은 적기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창이 세환의 눈에 들어왔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세환은 지크프리트를 옆으로 굴렸다. 옆구리에 생긴 창상이 통증을 일으켰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지크프리트의 뒤편에 창이 꽂히며 집을 부수고 흙먼지를 피워올렸다.
"위험했다... 하지만 이걸로...!"
적기의 장비는 분명 창과 방패였다. 그 중 하나인 창을 방금 던졌으니, 이젠 방패 뿐이리라. 방어만 계속하다간 틈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쓰러트리는 건 시간 문제다. 세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을 바라보았고, 또 한번 전신을 뒤흔드는 충격과 함께 수십미터를 나가 떨어졌다.
"컥, 크허, 으으... 또 실드에 맞았나?"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세환은 앞을 보고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적기가 등 뒤에서 반으로 접힌 창을 꺼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접힌 창을 휘둘러 완전한 형태로 만드는 모습을 보며 세환은 중얼거렸다.
"저거 말고 또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냐... 망할."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환은 지크프리트를 일으켜 세운 다음, 다시 한번 적기에게 돌격시켰다. 이번엔 메인 스러스터까지 이용한 고속 돌격. 적기도 피하지 않고 타워 실드로 맞받아냈고, 또 한번의 굉음과 함께 두 기체의 방패가 충돌했다.
충돌한 직후, 세환은 메인 스러스터의 방향을 바꿔 뛰어 올랐다. 방금 전까지 지크프리트가 서 있던 자리를 창날이 찔러들어왔고, 그 위로 떠오른 세환은 힘껏 검을 내리쳤다.
"이런!"
좋은 기회였지만 적기의 AI는 역시 녹록지 않았다. 타워 실드를 그대로 들어올려 실드의 옆면으로 검로를 막은 것이다. 거기에 이어 지크프리트를 향해 창을 찔렀다. 세환은 지크프리트의 전신에 부착한 보조 스러스터를 이용해 동체를 틀어 창날을 피해내는 동시에 창대를 옆구리에 끼웠다. 그리고 그대로 착지.
창을 잡힌 채 방패 뒤에 숨어있는 적기의 모습에, 세환은 씨익 웃고는 그대로 무릎을 끌어올려 타워 실드를 찍었다. 그러자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타워 실드가 우그러 들었다. 의외의 상황에 적기가 한걸음 물러선 것을 확인한 세환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내딛으며 양 무릎을 번갈아가며 타워 실드를 찍었고 그 때마다 실드는 조금씩 형태를 잃어갔다. 양 팔꿈치와 무릎에 장착된 추가 장갑에는 '파일 벙커(Pilebunker)'가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콰아아앙────────
다섯번째의 가격으로 타워 실드에 구멍이 뚫렸다.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적기는 창을 놓고 물러서며 실드를 휘둘렀지만, 세환은 창대를 쥔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자 마자 보조 스러스터의 역분사로 물러섰기에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적기가 놓고 물러선 창을 왼손에 든 세환은 재차 돌격, 적기의 코앞에서 왼쪽으로 한바퀴 돌며 길게 잡은 창대를 옆으로 휘둘렀다. 이번에도 팔과 동체에 장착된 보조 스러스터를 이용했기에 위력은 본래의 몇배에 달할 터. 그 공격을 적기는 받아낼 생각을 못하고 뛰어올라 피했고, 세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검을 찔러올렸다.
"하아앗!"
목을 향해 찔러들어오는 지크프리트의 장검에 적기는 타워 실드를 움직여 막으려고 했지만 동작이 늦었다. 검날이 실드의 옆면을 긁으며 불꽃을 튀겨 올렸고, 검의 첨단부는 그대로 적기의 목을 관통했다.
쿠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적기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세환은 들고 있던 적기의 창을 거꾸로 쥐고는 쓰러진 적기의 명치 부분을 힘껏 찔렀다. 창은 그대로 적기의 에너지 수신 장치를 관통하며 지면에 꽂혔다. 창을 놓고 물러서던 세환은 문득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브룬힐데, '통곡의 벽'이란 게 여기 어디에 있는지 표시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저곳입니다.」
시야 한 구석에 나타난 마크를 따라 시선을 돌리던 세환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까 적기가 던진 창이 박살낸 건물─이라고 생각했던 구조물─이 통곡의 벽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진짜로 통곡하게 생겼구만."
예루살렘 전투에서 통곡의 벽이 파괴된 일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노와 슬픔을 감추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통곡의 벽은 외국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와닿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만의 유적'이라고 할까.
스위스 시간으로 다음해 1월 1일, 미국과 러시아, 중국의 지도자가 합동 연설을 가졌다.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행해진 이 연설에서, 3국의 지도자들은 외계 로봇의 모선이 접근하고 있으며, 모선을 막기 위해 다량의 핵미사일을 발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격파 가능성에 대해서는 함구했지만 발표한 내용만으로도 전세계가 경악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세계가 아직 연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150발의 핵미사일이 모선을 향해 발사되었다. 군사 위성을 이용한 궤도 수정 장치가 장착된 미사일들은 하나 하나가 20메가톤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 미사일이 우주 공간을 가르기 시작한지 닷새 후, 모선이 미사일의 센서에 포착되었다. 정확히는 별빛을 가리는 모선의 그림자가. 미사일들은 그 그림자의 중앙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미사일이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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