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20XX년 11월 하순, 대한민국 서울. 현지시각 오후 5시경.

대피령이 발령되기 전, 이런 저런 루트로 착륙선의 예상 낙하 지점이 서울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일부 국회의원과 정부 고관들은 그 즉시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수도권을 벗어나라고 당부하는 한편 자신들도 공무 수행을 핑계삼아 서울을 벗어났다. 청와대에서 긴급 대피령을 발령하고 약 20분 후, 착륙선이 서울에서 육안으로 관측될 무렵 여의도 국회의사당에는 직원들만 남아있었다. 대통령은 이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다시 잡아올 수도 없는 일. 착륙선이 완전히 낙하했을 때, 그들은 이미 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다.




"이런 젠장!"

세환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아직 여의도도 채 벗어나지 못했는데 벌써 착륙선이 보인다면 서울을 벗어나기는 완전히 글렀다고 봐야 했다. 이대로는 로봇의 습격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핵폭발에 휘말리게 된다.
한편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붉게 빛나며 접근하고 있는 착륙선을 알아챘고, 그와 함께 불안감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점점 빨라지는 걸음, 옆사람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려는 사람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 착륙선이 다가옴에 따라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낮게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더욱 부추겼다.
모두들 낙하지점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속에서 세환은 민아를 업고 할아버지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제력을 잃으며 거리가 혼란스러워진 반면, 이동 속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승용차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나오면서 오히려 더 걸음은 느려졌고 그에 비례해 거리의 분위기는 점점 더 흉악해져갔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욕설, 고함. 세환들은 그것들을 무시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지만, 등에 업힌 민아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인 만큼 주위의 분위기에 민감했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할아버지도 있고, 오빠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세환은 민아를 안심시킬 생각으로 말했지만, 그 자신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믿음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민아는 세환의 얼굴을 보고 살짝 웃어서 도리어 세환을 안심하게 해주었다. 세환은 다시 앞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젠장, 젠장, 젠장! 서울을 벗어나는 건 무리라도 적어도 낙하지점에선 멀어져야 되는데!'

초조한 마음으로 걸어가던 세환은 대기가 떨리는 소리가 커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착륙선은 빠른 속도로 낙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이런 젠장! 이쪽이냐!"

아무리 봐도 여의도 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세환 일행이 있는 곳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각도와 방향은 분명히 이쪽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지른 세환은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세환의 외침에 다른 사람들 역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젠장, 저리 비켜!"

"엄마, 엄마아!"

"빨리, 빨리!"

"씨발, 앞에 어물쩡 거리는 거 누구야! 뒈질래!"

"현수야, 현수야!"

"에잇! 비키라니까!"

"꺄아악!"

"이 자식이! 너만 살면 다냐!"

"다들 진정하세요! 침착하게...!"

"썅! 짭새는 꺼져!"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을 밀치고 넘어트리며 앞으로 나가는 인파, 그 와중에 가족을 잃어버린 듯한 다급한목소리, 경찰의 필사적인 제지와 그를 매도하는 군중. 잠시나마 사태를 진정시키려던 경찰은 곧 포기하고 물러섰다. 단순히 통제를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이상 나섰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기세는 그만큼 흉흉하고또 절박했다.
그리고 몇분 후, 그들의 뒤편으로 굉음과 함께 착륙선이 낙하했다.




그 시각, 워싱턴 D.C의 백악관.

부통령은 집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상대는 한국의 대통령. 서로 영상통신까지 가능하도록 설비를 갖추어 놓았지만 한국 대통령은 지금 그걸 떠올릴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가능하겠습니까?』

부통령은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외계 로봇 때문에 핵을 이미 두번이나 썼고, 뉴욕에서 핵을 터뜨렸을 때에는 대통령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핵의 사용은 그만큼 부담이 큰 결정인데다, 이번엔 지난 번의 리우데자네이루와는 상황이 너무나 달랐다. 서울은 한 나라의 수도이고 인구도 리우데자네이루의 두배에 달한다. 그런 곳에서 핵이 터진다면 그 인적, 물적 피해는 기본이고 여론도 엄청나게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가능하기야 합니다만... 정말 괜찮겠습니까? 자국, 그것도 수도에 핵을 발사하는데..."

『어쩌겠습니까. 다른 무기는 통하지도 않고...』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평상시라면 외교적으로 상당한 결례가 될 행동이지만 부통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 대통령이 괴로운 심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당장이라도 가능하지만, 대피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얼마쯤 후에 공격하면 되겠습니까?"

『......』

수화기 너머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 한국 대통령은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라고 외치고 싶겠지만 그랬다가는 피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말려들게 될 것이고, 너무 시간을 오래 잡으면 피해 규모가 핵이 터지나 안 터지나 마찬가지인 수준이 될 것이다.
통화가 중단되었던 건 찰나였지만, 통화 중인 두 사람에게는 영원과도 같았다.

『1시간 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낮게 깔린, 신음소리와 같은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부통령은 나지막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로 통화하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통화가 끝난 뒤, 부통령은 앞에 있는 국무장관을 쳐다보았다. 국무장관은 외계 착륙선이 탐지되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백악관 집무실로 향했고, 부통령에게 핵공격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중에 한국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왔던 것이다.
국무장관을 한번 바라본 부통령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국 대통령이 핵공격을 요청했습니다. 1시간 후에 공격해달라는군요."

"1시간 후라... 1시간 후에 발사하라는 겁니까, 1시간 후에 터지게 하라는 겁니까?"

"글세요,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능한 발사 시각을 늦추고 싶은데, 지금 핵을 탑재한 잠수함 중 작전중인 함이 있습니까?"

"USS 네바다가 진주만 인근에서 작전 중입니다. 아마 발사 후 20분 정도 걸릴 겁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대충 50분 후에 발사하도록 하지요. 준비를 해주십시오."




착륙선은 착지 직전 역분사장치를 작동시키며 내려앉았다. 그 덕분에 지면의 충격은 약간의 진동 뿐이었지만 역분사장치에서 울려퍼진 굉음과, 분사장치에서 뿜어져 나온 플라즈마와 대기권을 돌파하며 달아오른 착륙선 표면의 고열 때문에 끓어오르는 아스팔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거리의 양상은 폭동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앞으로 달려나가려 하는 사람들 속에서 욕설과 고함, 비명과 울음소리가 난무했다. 그렇게 혼란에 빠진 인파의 뒤편에서 서서히 착륙선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구우웅 하는 낮은 기계음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그 소리가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그 소리가 끝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으면서 공포에 질린 얼굴로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거대한 입구가 완전히 열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잠시 후, 착륙선 내부에서 수십개의 붉은 빛이 떠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니,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고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비명과 함께 사람들의 이성은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앞 사람을 밀치고 쓰러진 사람을 짓밟으며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그들의 뒤편에선 붉은 눈의 악마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헉, 헉, 헉, 헉..."

세환은 민아 할아버지와 함께 도망치고 있었다. 혼자 뛰어도 모자랄 판에 민아까지 업고 있다보니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동안 지크프리트를 움직이며 쌓여온 신경 접속의 부작용들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아 할아버지에게 민아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젊은 사람이 업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 세환은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 저...!"

"사람 살려!"

"오지 마! 오지 마앗!"

"꺄아악!"

"엄마아아!"

뒷쪽에서 울리는 비명소리, 차라리 단말마에 가까운 그 소리에 섞여 기분 나쁜 소리들이 들려왔다. 세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거미형 로봇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을 터, 그 사정없는 공격에 약하디 약한 인간의 육신은 순식간에 걸레가 되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면 차라리 행운이리라. 세환은 몰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지가 찢겨지거나 몸을 관통당한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쓰러트려가며 거미형 로봇들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보! 빨리!"

"기다려요! 같... 아악!"

"엄마아!"

"여보! 안...!"

점점 가까워지는 비명소리와 기계음. 세환은 뱃속에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느낌을 받았다. 냉정함은 아니었다. 세환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급한 심정이었다. 오직 이곳을 벗어나는 것 하나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아챌 여유는 없었고, 그 때문에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아챈 것은 항상 세환의 심리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있던 브룬힐데 뿐이었다.

공포.

세환이 받은 느낌은 공포였다. 아마 그것을 알면 세환은 코웃음을 치거나, 민아가 죽는 게 무섭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포가 아니었다. 바로 인간이 가진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도 상관없다, 인간 따위 확 망해버리라지'라고 생각해왔지만 세환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버릴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세환의 공포는 바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차가운 감정도 있었다. 브룬힐데는 조용히 그 감정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30분 후, 진주만 인근 해저. USS 네바다.

미리 수신한 지령에 따라, 전략 핵잠수함 네바다는 핵미사일 발사 준비를 마쳤다. 지령에서는 발사 준비 후 20분간 대기 상태에 있을 것, 그리고 그 후 별도 지령이 없을 경우 발사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발사 과정과는 다른 상황에 함장 및 부함장 등 장교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들은 군인이었기에 그 이상의 의문은 품지 않았다. 이제 발사 예정 시간에 맞춰 미사일을 쏘아올릴 뿐이었다.




30분간 세환은 지옥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면서 건물이나 지하철 입구로 들어갔다. 아마 좁은 통로나 승강장, 계단 등이 거미 로봇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미 로봇은 강력한 동시에 크기도 작은 편이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면 거미 로봇도 어려움 없이 드나들 수 있었고, 건물과 지하철 역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더 이상 도망치지도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세환 일행에게는 그런 상황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거미 로봇들 중 상당수가 그 사람들을 쫓아 가면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습격당할 확률이 낮아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라 비명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콰아아앙────!!!!

돌연 들려온 폭음과 그에 뒤따르는 진동에 세환은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선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착륙선에서 나온 거대 로봇이 63빌딩을 파괴하고 있었다. 완전 근접 격투 전용인지, 별다른 무기가 없는 대신 손등에서 삐죽 튀어나온 대못 같은 것으로 빌딩을 가차없이 때려부수는 중이었다.

"뭐 하나! 빨리 도망쳐야지!"

걸음을 멈춘 세환의 팔을 민아 할아버지가 잡아 끌었고, 세환은 그제야 몸을 돌려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이제 슬슬 한계였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때맞춰 생긴 진동 때문에 균형을 잃은 세환은 그대로 넘어졌다.

"큭!"

다행히 앞으로 넘어진 덕에 민아가 다치는 것은 면했지만 쓰러져 있을 틈은 없었다. 서둘러 일어나려는 세환의 눈에 부축하기 위해 달려오는 민아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다음 순간,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민아 할아버지의 모습이 세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중량감 느껴지는 검은 몸체에 붉은 눈을 빛내는 거미 로봇이 서 있었다. 부릅 뜬 세환의 두 눈에 바닥에 퍼져나가는 붉은 피가 들어왔다.

"아, 아아, 아아아..."

의미없이 흘러나오는 소리. 그 소리를 들었는지 거미 로봇이 눈을 움직여 세환을 포착하고 방향을 틀었다. 세환은 서둘러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바로 다음 일어나는 일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세환에게 업혀있던 민아가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나가는 모습을.

콰직.

"!!!"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지를 수 없었다. 온몸이 굳어 있었다. 생각이 멈춰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성이 날아갔다. 민아는 가족이 아니었지만 세환은 지금 민아와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겹쳐보고 있었다. 뱃속에 감돌던 차가운 감정이 터져나가며 무섭게 끓어올랐다.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르는 복수심. 세환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것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세환은 무력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울부짖는, 하지만 무력한 한 명의 인간을 향해 거미 로봇이 달려들었다.

「마스터!」

다음 순간, 세환은 지크프리트의 콕핏 시트에 앉아있었다. 세환은 갑자기 바뀐 주변 환경에 당황했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곧 파악할 수 있었다. 거미 로봇에게 당하기 직전 브룬힐데가 강제 전송시킨 것이다. 강제 출격도 가능하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터. 몇분 전이라면 세환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빠른 손놀림으로 고정구를 착용하고 신경접속장치에 손을 올렸다.

"현장으로 이동.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마스터.」

브룬힐데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지크프리트의 것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세환은 눈앞에 보이는 적 로봇을 향해 돌진했다.




착륙선의 예상 낙하 지점이 서울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서울 소재의 각 TV 방송국은 방송국 건물 옥상에 무인 카메라를 설치하고 피난했다. 마지막까지 특종을 잡겠다는 일종의 집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집념은 지크프리트의 출현으로 보상받았다.

『여러분! 검투사 로봇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지난번 뉴욕과 리우데자네이루에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저 로봇이, 지금 대한민국 서울에 나타나 외계 로봇과 싸우고 있습니다!』

경기도 외곽의 임시 집무실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던 대통령은 뉴스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 그리고 왜 이제야 나타났나 하는 원망이 섞인 한숨이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비서실장, 백악관! 백악관 연결해!"




진주만 인근 해저, USS 네바다. 발사 예정 시각 10분 전.

발사 준비를 완전히 마친 채 대기 중이던 USS 네바다는 긴급 통신을 받았다. 발사 명령을 취소하며, 즉각 기지로 귀환하라는 지령. 네바다 호는 개방했던 탄도 미사일 발사구를 다시 닫은 뒤 함수를 돌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세환이 돌격해들어오자 적기는 충돌 직전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지크프리트의 옆구리에 주먹을 연속으로 꽂아넣었다. 손등에 달린 송곳같은 침이 지크프리트의 장갑을 종잇장처럼 뚫었지만, 세환은 아랑곳않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성을 반쯤 상실한 세환의 동작은 빈틈이 너무 많았고, 지크프리트는 점점 넝마가 되어갔다. 곳곳에서 튀는 불꽃과 셀 수 없이 뚫린 구멍이 기체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마스터, 진정하십시오!」

보다못한 브룬힐데가 세환을 만류했지만 세환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적기에게 달려들 뿐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63빌딩에 등을 대고 서 있던 적기가 공격을 피해내자 지크프리트의 검은 그대로 63빌딩을 3분의 1쯤 파고들었다. 세환이 검을 거칠게 뽑아내자 그 충격에 그나마 남아있던 빌딩의 유리창이 마저 깨져나갔다. 검을 뽑아내는 순간 등뒤에서 가해진 공격에 지크프리트는 균형을 잃고 빌딩에 부딪혔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이어지는 적기의 공격을 고스란히 맞았다.

"이익! 우아아아아아아앗!!"

세환은 오른쪽 어깨의 보조 스러스터를 가동시키며 그 추진력으로 지크프리트를 회전시켰다. 그에 맞춰 검을 뻗어 적기를 베려했지만 적기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이번엔 지크프리트에게 킥을 날렸다. 굉음과 함께 지크프리트가 다시 빌딩과 충돌했다.

"이 자시이이이이이익!!"

세환은 팔을 휘둘러 방패를 날렸다. 어차피 이번 적을 상대로는 거의 제구실을 못하는 방패였기에 차라리 떼어버리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별도 장비가 없는 적기는 방패를 막는 대신 옆으로 피했지만, 그 직후 지크프리트가 달려들어 적기를 끌어안았다. 클린치(clinch)였다. 적기의 동작이 지크프리트에 비해 가볍고 빨랐기 때문에 그 움직임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붙잡은 것이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기에는 장검의 검날이 너무 길었다. 세환이 머뭇거리는 사이, 적기의 주먹과 발, 팔꿈치와 무릎이 지크프리트에 꽂히기 시작했다.

"큭, 크헉!"

쉴새없이 가해지는 공격에 세환은 하마터면 적기를 놓을 뻔 했지만 간신히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맞는 가운데, 장검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양손목 안쪽에 내장되어 있던 단검을 사출시켜 잡았다.

"이제, 죽어랏!"

적기의 겨드랑이 밑으로 넣어 동체를 감싸고 있던 팔을 그대로 위로 올린다. 언뜻 봐서는 역도의 바벨(barbell)이라도 들어올리는 듯한 자세이지만 그 손에 쥐어진 것은 바벨이 아닌 단검. 그제야 위험을 알아챈 적기는 더욱 맹렬히 공격을 꽂아넣지만 이미 늦었다. 세환은 단검을 적기의 목 양편에 꽂아넣고는 손목을 눕히며 바깥쪽으로 돌렸고, 그 행동으로 적기는 목이 완전히 찢어지며 행동을 멈췄다.
세환은 팔을 풀고 단검을 되돌린 다음, 땅에 떨어진 장검을 집어들었다. 일반적으로 잡는 방향이 아닌 역수(逆手), 그것도 양손으로 검을 집어올린 세환은 그대로 적기를 내리찔렀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그렇게 적기를 완전히 해체하다시피 한 다음에야 세환은 지크프리트를 일으켜 착륙선으로 다가갔다. 에너지 전송 장치를 파괴해야할 차례. 세환은 착륙선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브룬힐데."

「예, 마스터. 말씀하십시오.」

"내가 전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했지?"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하신 적은 있습니다.」

"그 말 취소하겠어. 적어도 저 자식들과 싸울 이유는 찾은 것 같으니까."

브룬힐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환이 말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브룬힐데가 모니터링하고 있는 세환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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