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사라지고 일주일이 흘렀다.
미국 대통령은 결국 뉴욕 괴멸, 자국 영토내 핵병기 사용, 성능 시험조차 거치지 않은 신병기의 무단 투입 및 해당 병기의 손실 등의 이유로 사임했고, 부통령이 남은 임기동안 대행을 맡게 되었다. 게다가 비밀리에 재생된 로봇이 실전에 투입되었다가 외계 로봇에게 격파된 사실이 기사화되면서 군사력에 기반한 미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는 세계 여론이 커지는 바람에 미국은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었다.
한편, 뉴욕이 사라지면서 월 스트리트 역시 증발했다. 물론 월 스트리트에서 수집했던 정보들은 다른 지역의 서버에 미리 백업을 해두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세계 금융의 중심지'라고까지 불리던 월 스트리트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전세계 금융계에 커다란 심리적인 충격을 주었다. 덕분에 뉴욕이 파괴된 다음날은 전세계 증시가 일제히 폭락, 두번째 대공황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상까지 돌았다. 다행히도 며칠 지나자 대부분의 금융 정보가 안전히 보관되어 지금 당장이라도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에 세환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휴학계를 내고 며칠 후, 세환은 학교에서 책만 읽는 것도 지겨워졌다. 매일같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보니 흥미있는 책들은 이미 다 읽어버렸고, 다른 책들은 손이 가질 않는 것들이었다. 어차피 수업도 안 나가는 마당에 굳이 학교에 있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세환은 작은 어깨 가방을 매고 여의도 시민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민 공원에 도착한 건 점심시간이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세환은 피곤한 느낌이 들어 근처 벤치에 앉았다. 지난번 출격 이후 생긴 평형감각 문제 때문에 걷는 내내 정신을 집중해야 하다보니 몸보다 정신이 먼저 지치는 일이 많았다. 한숨을 작게 내쉬며 벤치에 등을 기대던 세환은 문득, 브룬힐데가 지난 일주일간 단 한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룬힐데가 마지막으로 말을 건 때가 뉴욕에 적이 나타났을 때였고, 그 때 세환이 완강히 거부한 이후 브룬힐데는 설득은커녕 세환에게 말조차 걸지 않았다.
'그 녀석도 포기라는 걸 아나... 원칙대로만 행동하는 AI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꼭 사람 같단 말이야.'
어쨌든 잔소리꾼이 사라져서 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세환은 벤치에 길게 누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힐끗 쳐다보았지만 세환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망가진 인생 되는대로 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누워서 햇빛을 받고 있자니 슬슬 잠이 오는 듯... 했는데, 갑자기 머리맡 벤치를 탁탁 치는 느낌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크흠."
일어나서 그쪽을 보니, 어떤 할아버지 한분이 지팡이를 짚고 서 계셨다. 아까 그 치는 느낌은 지팡이로 벤치를 두들겨서 생긴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세환을 잠시 노려보시고는 벤치에 앉았고, 자리가 불편해진 세환은 얼른 일어서서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등뒤에서 요즘 것들 운운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신경써봤자 피곤해지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3시가 되어 있었다. 오늘 먹은 거라곤 아침에 학교 식당에서 먹은 백반이 전부였지만 요새는 식욕도 없어서 그리 배고픈 느낌도 없었다.
'슬슬 돌아가서 잠이나 잘까...'
화장실을 나오며 그런 생각을 하던 세환은 모퉁이를 돌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부딪힌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그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쓰... 누구야, 대체?'
인상을 찡그리며 맞은편을 본 세환은 순간 당황했다. 자기 앞에 넘어진 건 대여섯살쯤 된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넘어진 채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는 모습을 본 세환은 얼른 일어나 아이를 일으키며 물어보았다.
"괜찮니? 다친 데는 없어?"
아이는 옷을 탁탁 털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다... 오빠가 딴 생각하느라 앞을 못 봤네. 미안해."
"학생, 괜찮은가?"
세환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있으려니 아이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 부모님인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든 세환의 눈에 들어온 건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주변에 가족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미안하네, 애가 갑자기 뛰어들어서 좀 놀랬지? 뛰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 아이라서 어쩔 수 없구만."
"아, 아뇨, 피하지 못한 제가 잘못이죠. 그래도 안 다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세환과 할아버지가 서로 사과를 주거나 받거니 하는 동안, 아이는 세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 다칠 뻔 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그래. 조심해서 가게."
그렇게 인사를 하고 가려던 세환은 문득 손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고, 아까 그 아이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는 세환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어? 왜?"
영문을 모르는 세환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계속 손을 잡아 끌었고, 난처해진 세환은 아이의 할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할아버지도 아이를 말리려 하던 참이었다.
"민아야, 그만 해라. 오빠가 곤란해하지 않니. 자, 가자."
하지만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민아라는 아이는 계속 세환을 잡아당겼다. 결국 할아버지도 세환에게 눈짓으로 따라가 달라고 했고, 아무래도 아이를 뿌리치기가 내키지 않은 세환은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민아에게 이끌려 간 곳은 화장실 앞의 식수대 겸 세수대였다.
"여기는 왜?"
재차 묻는 세환을 내버려둔 채, 민아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고는 세환의 손을 흐르는 물에 갖다 댔다. 정확히는 넘어지면서 살갗이 벗겨져 생긴 상처였다. 민아는 수돗물에 상처를 씻어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피가 다 씻겨 내려간 듯하자 민아는 수도를 잠갔지만, 원래 방금 생긴 상처가 쉽게 피가 멎는 일은 없다. 당연히 다시 피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민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로 피를 닦아내려 했다.
"아니, 잠깐만. 좀 기다려볼래?"
민아를 잠시 말린 세환은 어깨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상처를 눌렀고, 다시 지갑에 넣어둔 일회용 반창고를 꺼내 붙였다. 예전에 자주 책에 손을 베이던 일 때문에 일회용 반창고를 지갑에 넣고 다니는 습관이 지금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자, 봐. 이젠 괜찮아. 걱정 마."
민아에게 반창고를 붙인 상처를 보여주던 세환은 그제야 민아도 손이 까져서 피가 맺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피가 나고 있다면 부딪힌 어린 아이도 다쳤을 텐데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했다고 자책하며 세환은 민아의 손에도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미안, 오빠가 미처 생각을 못했네. 아팠지?"
세환의 물음에 민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반창고를 살짝 문질렀다. 손에 붙어있는 촉감이 낯선 모양이었다. 뒤따라온 민아의 할아버지가 둘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한번 세환에게 사과했다.
"이거 자꾸 미안하네. 얘가 오지랖이 넓다고 할까, 남들 신경을 많이 써서 말이야."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아이에게 쓸 말이 아닐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세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 그럼 가볼게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세환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기로 했다. 생판 남이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에서 계속 끼어있는 것도 조금 이상했으니까. 인사를 끝내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 손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에도 민아였다. 손을 살짝 돌려 빼려고 해봤지만 꽉 잡고 있어서 좀처럼 빠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곤란한 생각에 민아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도 난처한 표정으로 민아를 떼어놓으려 했다.
"자, 자. 민아야. 오빠는 바빠요. 이제 '안녕' 해야지?"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민아는 세환의 손을 잡은 채 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한술 더떠 눈에는 살짝 눈물까지 고이는 것 같았다. 이쯤되자 할아버지는 당황했고, 결국 세환이 포기하고 같이 있기로 했다. 어차피 어디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크게 문제될 일도 없었다.
"그래, 알았어. 같이 놀까?"
자신의 말에 표정을 풀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아를 보며, 세환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버지니아 주 미국 국방성. 긴급 회의실.
회의의 주제는 이제 로봇의 노획과 그 분석 결과가 아닌, 지구에 접근중인 외계 모선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구 궤도에 도달할 때까지 길어야 4개월, 인류의 기술력으로 대책을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아니, 사실 각료들은 대책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 1대의 거대 로봇을 쓰러트리는 데에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모선을 막을 수 있을리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는 맥빠진 분위기, 정확히는 자포자기 분위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동 궤도 추정은 끝났다지만, 반드시 그 궤도로 진행한다는 법도 없지 않소."
"그러게 말이오. 애초에 우주선이니 궤도 수정이야 언제든 할 수 있을 테고."
"궤도 뿐만이겠소? 가속과 감속도 내키는대로 할 수 있으니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겠지. 저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다음달에라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얘기는 하지 맙시다. 안 그래도 우울한 마당에..."
"남은 석달 동안 뭘 하면서 지낼까... 세계 일주나 시도해볼까."
"아, 그거 나도 같이 갑시다."
"그런데 저기 빈 자리는 뭐요?"
"국방장관 자리요."
"그런데 왜 비어있소? 화장실이라도 간 거요?"
"소식 못 들으셨소? 일주일 전에 사직서 써놓고는 임명장 불태우고 잠적했다고 하던데."
이쯤 되면 대책이 아니라 집단 자살 안건이라도 나올 듯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아직 의욕이 남아있는 부통령이 각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현실도피는 이제 그만 합시다. 이제 좀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닙니까?"
하지만 부통령의 말에 다들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대책은 무슨 대책?'하는 느낌이었다. 부통령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까지 발버둥은 쳐봐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저들이 우리에게 한 행동을 보면 대화가 통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다가오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수를 내야겠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설마, 핵미사일을 쏴서 저걸 박살내자는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것 말고 방도가 있습니까?"
각료 중 한명이 비꼬는 기색으로 말을 받자 부통령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통령의 말을 받았던 각료는 부통령의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다.
"아니, 궤도 수정과 가속 감속도 자유자재일 녀석을 상대로 탄도 미사일을 쏘면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단 말입니까? 제정신입니까? 확실히 핵탄두가 장착되는 탄도 미사일의 속도는 무시무시하죠. 하지만 유도 기능이 없는 탄도 미사일은 발사 전에 입력된 목표 지점을 향해서만 맹목적으로 돌진할 뿐입니다. 발사 후 모선이 궤도를 조금만 수정해도 발사된 미사일들은 허공을 지나 우주 저 멀리 날아갈 거라고요! 그 후에는 우주 미아가 되든 어느 별의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든 하겠지만 거기까진 알 바 아니고, 어쨌든 쏴봤자 소용없단 말입니다!"
뚜껑이 열려버린 각료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부통령에게 말을 쏟아냈다. 말을 마치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씩씩 대고 있는데, 부통령은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지금 당장 쏘자고 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저 쪽에서 피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생각했고요. 그리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통령에게 화를 냈던 각료는 다시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부통령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뭔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부통령은 그런 각료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미사일을 정확하게 저 모선에 때려박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 시민 공원. 현지시각 오후 4시 경.
세환은 민아의 할아버지와 함께 벤치에 앉아있었다. 민아는 지금 세환의 허벅지를 베고 벤치에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세환을 끌면서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니더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세환은 민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넘기며 민아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애가 참 밝네요. 붙임성도 좋고. 귀염 많이 받겠어요."
하지만 그런 세환의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오히려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얼굴을 본 세환이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민아의 할아버지가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 고맙네, 학생. 원래 떼쓰는 애가 아닌데, 얘가 좀 그리웠던 모양이야."
"그리워...요?"
세환은 그 말에 고개를 돌리며 의문을 표했다. 뭘 그리워 한단 말일까 생각하던 세환은 민아의 부모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도 맞벌이 부부에다 직장일이 바빠서 할아버지가 데리고 나온 것이리라, 세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너무나도 안일한 생각이었다.
"민아 애비가 작년에 죽었거든..."
민아의 할아버지는 측은한 눈길로 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환은 자신이 얼마나 미련했는지를 통감했다. 세상에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직접 겪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단순하다니. 자신이 너무나 바보같았다.
"뇌출혈인가 그랬을 거야, 사인이. 야근을 매일같이 하던 애비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다가 쓰러지더군. 급히 구급차를 불렀지만 가는 도중에 숨을 거뒀다네. 그게 작년 4월이야."
세환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마음같아선 할아버지가 더 말씀하시지 않게 말리고 싶었지만 어쩐지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어서 그저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생이, 뭐랄까, 분위기 같은 게 민아 애비를 좀 닮았더군. 외모도 조금 호리호리한 게 비슷한가... 아마 얘도 그래서 자네한테 떼를 쓴 걸 게지."
얘기를 들은 세환은 할아버지의 '그리워서 그랬을 거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아는 자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비춰 보았던 것이다. 좀처럼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다는 아이가 세환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세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그런데 민아 어머님은..."
거기까지 말한 세환은 앗차 싶었다. 드라마나 TV의 사람 찾기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런 경우 정해진 패턴이 생각난 것이다. 세환은 뒤늦게 '그' 패턴을 떠올리고는 당황해버렸지만, 민아의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작년 겨울에 집을 나갔다네. 남편도 없는데 아이, 그것도 말 못하는 아이를 감당하긴 버거웠겠지."
그 말을 들은 세환은 자기도 모르게 민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던 것이다. 잠시 당황했던 세환은 곰곰히 오늘 하루를 되짚어보기 시작했고, 정말로 민아가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짓이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의사 소통이 되었기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환은 민아가 불쌍해지는 한편, 자신의 무신경함이 원망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아니, 아닐세.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는걸. 괜찮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서로 어떤 말을 해야할지 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세환은 자신의 무릎 위에서 민아가 꼬물거리는 것을 느꼈고, 내려다보니 민아가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민아는 눈을 비비며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자, 그럼 애도 깼고, 시간도 슬슬 되었으니 이만 가봐야겠네. 오늘 고마웠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민아의 손을 잡고 벤치를 뒤로 했다. 민아는 그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자꾸만 세환을 돌아보았다. 그 표정은 아쉬움 외에도 다른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세환은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이, 모르겠다."
결국 세환은 중얼거리며 벤치에서 일어서서 걸어갔다. 조금 걸음을 빨리 한 세환은 할아버지의 맞은 편쪽에서 민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댁까지 바래다 드려도 괜찮죠?"
세환의 말에 민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미소를 지었지만, 할아버지는 상당히 난처한 표정이었다. 하긴, 오늘 처음 만난 청년에게 손녀가 어리광을 부린 것도 미안한데 귀가까지 함께 하게 된다면 정말 면목없을 것이다. 하지만 늦게 들어간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게 된 세환에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걱정마세요. 늦게 들어가도 집에서 혼 안 나요. 그리고 이대로 헤어지자니 저도 영 찜찜하고."
"하지만 학생..."
"그리고 민아가 귀여워서 그런 것도 있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세환은 민아의 볼을 살짝 쓰다듬으며 말을 끝냈다. 민아는 정말 기분좋은 표정이었고, 세환과 민아를 번갈아바라보던 할아버지는 결국 포기하셨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은 난처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밝아보였다.
===================================================================
미국 대통령은 결국 뉴욕 괴멸, 자국 영토내 핵병기 사용, 성능 시험조차 거치지 않은 신병기의 무단 투입 및 해당 병기의 손실 등의 이유로 사임했고, 부통령이 남은 임기동안 대행을 맡게 되었다. 게다가 비밀리에 재생된 로봇이 실전에 투입되었다가 외계 로봇에게 격파된 사실이 기사화되면서 군사력에 기반한 미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는 세계 여론이 커지는 바람에 미국은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었다.
한편, 뉴욕이 사라지면서 월 스트리트 역시 증발했다. 물론 월 스트리트에서 수집했던 정보들은 다른 지역의 서버에 미리 백업을 해두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세계 금융의 중심지'라고까지 불리던 월 스트리트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전세계 금융계에 커다란 심리적인 충격을 주었다. 덕분에 뉴욕이 파괴된 다음날은 전세계 증시가 일제히 폭락, 두번째 대공황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상까지 돌았다. 다행히도 며칠 지나자 대부분의 금융 정보가 안전히 보관되어 지금 당장이라도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에 세환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휴학계를 내고 며칠 후, 세환은 학교에서 책만 읽는 것도 지겨워졌다. 매일같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보니 흥미있는 책들은 이미 다 읽어버렸고, 다른 책들은 손이 가질 않는 것들이었다. 어차피 수업도 안 나가는 마당에 굳이 학교에 있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세환은 작은 어깨 가방을 매고 여의도 시민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민 공원에 도착한 건 점심시간이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세환은 피곤한 느낌이 들어 근처 벤치에 앉았다. 지난번 출격 이후 생긴 평형감각 문제 때문에 걷는 내내 정신을 집중해야 하다보니 몸보다 정신이 먼저 지치는 일이 많았다. 한숨을 작게 내쉬며 벤치에 등을 기대던 세환은 문득, 브룬힐데가 지난 일주일간 단 한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룬힐데가 마지막으로 말을 건 때가 뉴욕에 적이 나타났을 때였고, 그 때 세환이 완강히 거부한 이후 브룬힐데는 설득은커녕 세환에게 말조차 걸지 않았다.
'그 녀석도 포기라는 걸 아나... 원칙대로만 행동하는 AI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꼭 사람 같단 말이야.'
어쨌든 잔소리꾼이 사라져서 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세환은 벤치에 길게 누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힐끗 쳐다보았지만 세환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망가진 인생 되는대로 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누워서 햇빛을 받고 있자니 슬슬 잠이 오는 듯... 했는데, 갑자기 머리맡 벤치를 탁탁 치는 느낌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크흠."
일어나서 그쪽을 보니, 어떤 할아버지 한분이 지팡이를 짚고 서 계셨다. 아까 그 치는 느낌은 지팡이로 벤치를 두들겨서 생긴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세환을 잠시 노려보시고는 벤치에 앉았고, 자리가 불편해진 세환은 얼른 일어서서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등뒤에서 요즘 것들 운운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신경써봤자 피곤해지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3시가 되어 있었다. 오늘 먹은 거라곤 아침에 학교 식당에서 먹은 백반이 전부였지만 요새는 식욕도 없어서 그리 배고픈 느낌도 없었다.
'슬슬 돌아가서 잠이나 잘까...'
화장실을 나오며 그런 생각을 하던 세환은 모퉁이를 돌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부딪힌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그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쓰... 누구야, 대체?'
인상을 찡그리며 맞은편을 본 세환은 순간 당황했다. 자기 앞에 넘어진 건 대여섯살쯤 된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넘어진 채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는 모습을 본 세환은 얼른 일어나 아이를 일으키며 물어보았다.
"괜찮니? 다친 데는 없어?"
아이는 옷을 탁탁 털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다... 오빠가 딴 생각하느라 앞을 못 봤네. 미안해."
"학생, 괜찮은가?"
세환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있으려니 아이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 부모님인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든 세환의 눈에 들어온 건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주변에 가족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미안하네, 애가 갑자기 뛰어들어서 좀 놀랬지? 뛰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 아이라서 어쩔 수 없구만."
"아, 아뇨, 피하지 못한 제가 잘못이죠. 그래도 안 다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세환과 할아버지가 서로 사과를 주거나 받거니 하는 동안, 아이는 세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 다칠 뻔 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그래. 조심해서 가게."
그렇게 인사를 하고 가려던 세환은 문득 손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고, 아까 그 아이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는 세환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어? 왜?"
영문을 모르는 세환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계속 손을 잡아 끌었고, 난처해진 세환은 아이의 할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할아버지도 아이를 말리려 하던 참이었다.
"민아야, 그만 해라. 오빠가 곤란해하지 않니. 자, 가자."
하지만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민아라는 아이는 계속 세환을 잡아당겼다. 결국 할아버지도 세환에게 눈짓으로 따라가 달라고 했고, 아무래도 아이를 뿌리치기가 내키지 않은 세환은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민아에게 이끌려 간 곳은 화장실 앞의 식수대 겸 세수대였다.
"여기는 왜?"
재차 묻는 세환을 내버려둔 채, 민아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고는 세환의 손을 흐르는 물에 갖다 댔다. 정확히는 넘어지면서 살갗이 벗겨져 생긴 상처였다. 민아는 수돗물에 상처를 씻어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피가 다 씻겨 내려간 듯하자 민아는 수도를 잠갔지만, 원래 방금 생긴 상처가 쉽게 피가 멎는 일은 없다. 당연히 다시 피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민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로 피를 닦아내려 했다.
"아니, 잠깐만. 좀 기다려볼래?"
민아를 잠시 말린 세환은 어깨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상처를 눌렀고, 다시 지갑에 넣어둔 일회용 반창고를 꺼내 붙였다. 예전에 자주 책에 손을 베이던 일 때문에 일회용 반창고를 지갑에 넣고 다니는 습관이 지금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자, 봐. 이젠 괜찮아. 걱정 마."
민아에게 반창고를 붙인 상처를 보여주던 세환은 그제야 민아도 손이 까져서 피가 맺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피가 나고 있다면 부딪힌 어린 아이도 다쳤을 텐데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했다고 자책하며 세환은 민아의 손에도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미안, 오빠가 미처 생각을 못했네. 아팠지?"
세환의 물음에 민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반창고를 살짝 문질렀다. 손에 붙어있는 촉감이 낯선 모양이었다. 뒤따라온 민아의 할아버지가 둘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한번 세환에게 사과했다.
"이거 자꾸 미안하네. 얘가 오지랖이 넓다고 할까, 남들 신경을 많이 써서 말이야."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아이에게 쓸 말이 아닐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세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 그럼 가볼게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세환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기로 했다. 생판 남이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에서 계속 끼어있는 것도 조금 이상했으니까. 인사를 끝내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 손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에도 민아였다. 손을 살짝 돌려 빼려고 해봤지만 꽉 잡고 있어서 좀처럼 빠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곤란한 생각에 민아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도 난처한 표정으로 민아를 떼어놓으려 했다.
"자, 자. 민아야. 오빠는 바빠요. 이제 '안녕' 해야지?"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민아는 세환의 손을 잡은 채 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한술 더떠 눈에는 살짝 눈물까지 고이는 것 같았다. 이쯤되자 할아버지는 당황했고, 결국 세환이 포기하고 같이 있기로 했다. 어차피 어디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크게 문제될 일도 없었다.
"그래, 알았어. 같이 놀까?"
자신의 말에 표정을 풀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아를 보며, 세환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버지니아 주 미국 국방성. 긴급 회의실.
회의의 주제는 이제 로봇의 노획과 그 분석 결과가 아닌, 지구에 접근중인 외계 모선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구 궤도에 도달할 때까지 길어야 4개월, 인류의 기술력으로 대책을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아니, 사실 각료들은 대책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 1대의 거대 로봇을 쓰러트리는 데에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모선을 막을 수 있을리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는 맥빠진 분위기, 정확히는 자포자기 분위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동 궤도 추정은 끝났다지만, 반드시 그 궤도로 진행한다는 법도 없지 않소."
"그러게 말이오. 애초에 우주선이니 궤도 수정이야 언제든 할 수 있을 테고."
"궤도 뿐만이겠소? 가속과 감속도 내키는대로 할 수 있으니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겠지. 저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다음달에라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얘기는 하지 맙시다. 안 그래도 우울한 마당에..."
"남은 석달 동안 뭘 하면서 지낼까... 세계 일주나 시도해볼까."
"아, 그거 나도 같이 갑시다."
"그런데 저기 빈 자리는 뭐요?"
"국방장관 자리요."
"그런데 왜 비어있소? 화장실이라도 간 거요?"
"소식 못 들으셨소? 일주일 전에 사직서 써놓고는 임명장 불태우고 잠적했다고 하던데."
이쯤 되면 대책이 아니라 집단 자살 안건이라도 나올 듯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아직 의욕이 남아있는 부통령이 각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현실도피는 이제 그만 합시다. 이제 좀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닙니까?"
하지만 부통령의 말에 다들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대책은 무슨 대책?'하는 느낌이었다. 부통령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까지 발버둥은 쳐봐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저들이 우리에게 한 행동을 보면 대화가 통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다가오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수를 내야겠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설마, 핵미사일을 쏴서 저걸 박살내자는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것 말고 방도가 있습니까?"
각료 중 한명이 비꼬는 기색으로 말을 받자 부통령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통령의 말을 받았던 각료는 부통령의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다.
"아니, 궤도 수정과 가속 감속도 자유자재일 녀석을 상대로 탄도 미사일을 쏘면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단 말입니까? 제정신입니까? 확실히 핵탄두가 장착되는 탄도 미사일의 속도는 무시무시하죠. 하지만 유도 기능이 없는 탄도 미사일은 발사 전에 입력된 목표 지점을 향해서만 맹목적으로 돌진할 뿐입니다. 발사 후 모선이 궤도를 조금만 수정해도 발사된 미사일들은 허공을 지나 우주 저 멀리 날아갈 거라고요! 그 후에는 우주 미아가 되든 어느 별의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든 하겠지만 거기까진 알 바 아니고, 어쨌든 쏴봤자 소용없단 말입니다!"
뚜껑이 열려버린 각료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부통령에게 말을 쏟아냈다. 말을 마치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씩씩 대고 있는데, 부통령은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지금 당장 쏘자고 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저 쪽에서 피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생각했고요. 그리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통령에게 화를 냈던 각료는 다시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부통령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뭔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부통령은 그런 각료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미사일을 정확하게 저 모선에 때려박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 시민 공원. 현지시각 오후 4시 경.
세환은 민아의 할아버지와 함께 벤치에 앉아있었다. 민아는 지금 세환의 허벅지를 베고 벤치에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세환을 끌면서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니더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세환은 민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넘기며 민아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애가 참 밝네요. 붙임성도 좋고. 귀염 많이 받겠어요."
하지만 그런 세환의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오히려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얼굴을 본 세환이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민아의 할아버지가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 고맙네, 학생. 원래 떼쓰는 애가 아닌데, 얘가 좀 그리웠던 모양이야."
"그리워...요?"
세환은 그 말에 고개를 돌리며 의문을 표했다. 뭘 그리워 한단 말일까 생각하던 세환은 민아의 부모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도 맞벌이 부부에다 직장일이 바빠서 할아버지가 데리고 나온 것이리라, 세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너무나도 안일한 생각이었다.
"민아 애비가 작년에 죽었거든..."
민아의 할아버지는 측은한 눈길로 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환은 자신이 얼마나 미련했는지를 통감했다. 세상에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직접 겪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단순하다니. 자신이 너무나 바보같았다.
"뇌출혈인가 그랬을 거야, 사인이. 야근을 매일같이 하던 애비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다가 쓰러지더군. 급히 구급차를 불렀지만 가는 도중에 숨을 거뒀다네. 그게 작년 4월이야."
세환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마음같아선 할아버지가 더 말씀하시지 않게 말리고 싶었지만 어쩐지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어서 그저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생이, 뭐랄까, 분위기 같은 게 민아 애비를 좀 닮았더군. 외모도 조금 호리호리한 게 비슷한가... 아마 얘도 그래서 자네한테 떼를 쓴 걸 게지."
얘기를 들은 세환은 할아버지의 '그리워서 그랬을 거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아는 자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비춰 보았던 것이다. 좀처럼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다는 아이가 세환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세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그런데 민아 어머님은..."
거기까지 말한 세환은 앗차 싶었다. 드라마나 TV의 사람 찾기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런 경우 정해진 패턴이 생각난 것이다. 세환은 뒤늦게 '그' 패턴을 떠올리고는 당황해버렸지만, 민아의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작년 겨울에 집을 나갔다네. 남편도 없는데 아이, 그것도 말 못하는 아이를 감당하긴 버거웠겠지."
그 말을 들은 세환은 자기도 모르게 민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던 것이다. 잠시 당황했던 세환은 곰곰히 오늘 하루를 되짚어보기 시작했고, 정말로 민아가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짓이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의사 소통이 되었기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환은 민아가 불쌍해지는 한편, 자신의 무신경함이 원망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아니, 아닐세.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는걸. 괜찮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서로 어떤 말을 해야할지 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세환은 자신의 무릎 위에서 민아가 꼬물거리는 것을 느꼈고, 내려다보니 민아가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민아는 눈을 비비며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자, 그럼 애도 깼고, 시간도 슬슬 되었으니 이만 가봐야겠네. 오늘 고마웠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민아의 손을 잡고 벤치를 뒤로 했다. 민아는 그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자꾸만 세환을 돌아보았다. 그 표정은 아쉬움 외에도 다른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세환은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이, 모르겠다."
결국 세환은 중얼거리며 벤치에서 일어서서 걸어갔다. 조금 걸음을 빨리 한 세환은 할아버지의 맞은 편쪽에서 민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댁까지 바래다 드려도 괜찮죠?"
세환의 말에 민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미소를 지었지만, 할아버지는 상당히 난처한 표정이었다. 하긴, 오늘 처음 만난 청년에게 손녀가 어리광을 부린 것도 미안한데 귀가까지 함께 하게 된다면 정말 면목없을 것이다. 하지만 늦게 들어간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게 된 세환에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걱정마세요. 늦게 들어가도 집에서 혼 안 나요. 그리고 이대로 헤어지자니 저도 영 찜찜하고."
"하지만 학생..."
"그리고 민아가 귀여워서 그런 것도 있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세환은 민아의 볼을 살짝 쓰다듬으며 말을 끝냈다. 민아는 정말 기분좋은 표정이었고, 세환과 민아를 번갈아바라보던 할아버지는 결국 포기하셨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은 난처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밝아보였다.
===================================================================
'몽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작소설] 그래도 살아간다 - 7. 도망칠 수 없다 - 05 (0) | 2008.12.27 |
---|---|
[자작소설] 그래도 살아간다 - 7. 도망칠 수 없다 - 04 (0) | 2008.12.25 |
[자작소설] 그래도 살아간다 - 7. 도망칠 수 없다 - 02 (0) | 2008.12.23 |
[자작소설] 그래도 살아간다 - 7. 도망칠 수 없다 - 01 (0) | 2008.12.20 |
[자작소설] 그래도 살아간다 - 6. 무의미하다 (0) | 2008.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