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세환이 민아네와 함께 도착한 곳은 어느 고층 아파트 단지였다. 아까 얘기를 들은 바로는 생활이 넉넉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곳은 왠만큼 사는 사람들이 살 법한 곳이어서 세환은 조금 의아해 했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민아의 할아버지는 아파트 건물 입구가 아닌 경비실로 향했던 것이다.

"오늘은 밤 근무라서 말이네, 민아를 집에 혼자 둘 수도 없으니 밤 근무 때에는 데리고 오지."

민아 할아버지는 근무를 교대한 다음 옷을 갈아입으며 세환에게 말했다. 확실히 아이를 혼자 재워두고 집을 나선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고, 부모가 모두 일을 나가서 아이들만 남은 집에서 불이 나 아이들이 목숨을 잃은 사고도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쪽이 안전했다.
옷을 다 갈아입은 민아 할아버지는 세환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고맙네. 이젠 그만 돌아가봐야 하지 않나?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텐데."

민아 할아버지의 말에 세환은 가슴이 쑤시는 느낌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한테 알려줄 만큼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세환은 애써 표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사실 저 지금 혼자 살아요. 부모님하곤 일이 있어서 떨어져 있거든요. 하루 정도 늦게 들어가도 되니까, 민아 잠들면 갈게요."

"하지만..."

"민아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세환은 웃으며 민아를 돌아보았고, 세환을 바라보던 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민아 할아버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럼 나야 고맙지."



몇시간 후, 세환은 어두워진 길을 걷고 있었다.
민아는 낮에 뛰어다니며 놀아서 피곤했는지 금방 꾸벅꾸벅 졸면서도 억지로 저녁 시간까지 버텼다. 그래도 역시 무리였는지 저녁을 먹고는 잠들었고, 세환은 그 모습을 본 다음에야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경비실을 나섰다.
모 처럼 기분이 좋았다. 상쾌하다든가 기쁘다든가 하는 그런 기분이 아닌, 말하자면 훈훈한 느낌이었다. 손을 잡아 끌던 민아의 모습을 떠올리던 세환은 문득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한달간 지어왔던 비틀린 웃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기분좋은 미소였다. 그 사실에 세환은 조금 곤혹스러운 느낌을 받으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기분 좋은 건 사실이니까."

중얼거리며 걷는 세환의 발걸음은 이전과 달리 가벼워 보였다.




버지니아 주 미국 국방성, 긴급 회의실.

지난번 회의에서 부통령이 제시한 방법에 대해 관련 분야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였다. 지금까지 나왔던 과학자들이 아닌 또다른 과학자가 나와 있었다.

"박사님, 어떻습니까. 가능할까요?"

부통령의 질문에 과학자는 목을 몇번 가다듬고 대답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가능합니다."

과학자의 대답에 회의실이 술렁였다. 죽는 줄만 알았는데 난데없이 구원의 손길이 내려온 듯한 기분에 각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부통령도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과학자는 헛기침을 몇번 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입니다. 실용성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치 확인과 유도에 시간차가 생기니까요. 무작정 멀리 쏘아보낼 수는 없습니다."

과학자의 말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모처럼 좋은 방법이 생겼다고 좋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시간차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전파도 오고 가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각료들의 표정이 잿빛으로 변했다. 시체처럼 변해버린 각료들을 보며 다시 과학자가 입을 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목표물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점입니다. 관측 결과 목표물은 지름 약 130km, 두께는 약 50km로 예상됩니다. 면적은 1만3천 제곱킬로미터를 넘는데, 뉴욕 시의 16배가 넘는 크기입니다. 어지간한 고속이 아니라면, 정중앙을 목표지점으로 삼아 유도하면 명중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망적인 말이긴 했지만, 각료들은 그것보다도 접근중인 모선의 규모에 경악했다. 뉴욕시 면적의 16배가 넘는다니,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크기였다.

"이건 사기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주가 어디더라..."

"로드 아일랜드 거요. 아마 3천2백 제곱킬로미터 쯤?"

"그 4배가 넘는구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요?"

"고향이라 그렇소."

현실 도피에 빠져드는 각료들의 모습을 보며 과학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 USA의 행정부가 맞기는 한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과학자에게 부통령이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명중시켜 파괴하려면 어느 정도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발사해야 좋겠습니까? 대강의 거리 정도는 계산해서 오셨겠죠?"

과학자는 고개를 살짝 떨구며 대답했다.

"그게, 면적이 면적인데다 재질을 알 수 없다 보니 제대로 된 테스트가 불가능했습니다. 일단 시뮬레이터 결과, 최소 20메가톤 위력의 핵탄두가 60발 이상 명중해야 완전한 파괴가 가능했습니다. 탄두당 폭발력이 증가할수록 탄두의 숫자는 줄어들었습니다만, 단순 계산으로 최소한 폭발력 1기가톤은 나와야겠더군요."

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룡의 멸종을 불러온 운석 충돌이 2기가톤의 위력을 냈다고 하는데, 그 절반이 넘는 위력을 내야 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목표물이 전혀 반격하지 않았을 경우입니다. 목표물에 어떠한 요격 방어 설비가 갖추어져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실행시에는 요격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발사체가 두배 이상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그 말은, 100발이 넘는 핵미사일을 날려야 안심할 수 있다는 얘기요?"

각료 한명이 덜덜 떨면서 과학자에게 질문했다. 지금 접근하고 있는 모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대인지 겨우 감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감'을 잡은 정도에 불과했다.

"아니요, 수십 수백발을 날려도 안심같은 건 절대로 못합니다. 최소 120발은 발사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침묵의 수준을 넘어서,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처음 이 생각을 떠올렸던 부통령마저 무지막지한 수치에 입을 다물었다. 20메가톤 이상의 핵미사일을 120발 이상 쏴야 격파 가능성이 보이는 수준이라니. 물론 미국의 핵보유량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었지만 상식 밖의 수준이라는 점은 여전했다. 게다가,

"그런데, 우리가 탄도 미사일을 세자릿수나 쏘는데 과연 러시아 쪽에서 조용히 있을까요...?"

그게 문제였다.




며칠 후, 세환은 다시 여의도 공원을 찾았다. 학교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도 지겨웠고, 마음 한켠에는 민아가 또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나 로리콘이었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던 세환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자신이 인정해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환은 애써 이상한 생각들을 지우려 노력하며 공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점심 무렵.

"아."

할아버지와 함께 있던 민아와 마주쳤다. 민아는 세환을 보자 활짝 웃더니 쪼르르 달려와서 손을 잡았고,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도 세환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또 보는구만, 학생. 잘 지냈나?"

"네. 할아버지도 건강하셨어요? 민아도 잘 지냈나 보네."

세환의 말에 민아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고, 할아버지도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뭐 별일 있나. 민아가 자꾸 여기 다시 오자고 해서 왔더니만 이렇게 만나는구만 그래. 학생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야."

할아버지의 말에 세환은 고개를 숙여 민아를 쳐다보았고, 눈이 마주친 민아는 부끄러웠는지 세환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본 세환은 살짝 웃으며 손을 뒤로 돌려 민아의 등을 토닥이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런데 운이 좋네요.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확실히 그랬다. 공원의 넓이도 상당한데 약속도 안 하고 무작정 나왔으니 사실상 마주칠 가능성이 없었는데도 이렇게 만난 것이다.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일상에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헌데, 오늘 괜찮겠나? 아무래도 얘가..."

끝을 흐리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세환은 민아를 돌아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을 보니 떼놓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애초에 떼놓을 생각이 별로 없기도 했고.

"시간이 남아서 여기 나온 거예요. 걱정 마세요."

세환은 민아의 손을 부드럽게 쥐며 대답했다.




20XX년 10월 중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현지시각 새벽 2시경.

NASA 에서 탐지한 착륙선은 약 30분 후 리우데자네이루 시내에 낙하할 것으로 예측되었고, 미국은 긴급 회선으로 브라질 정부에 위험을 통보했다. 브라질 정부는 긴급 대피령을 발령했지만 심야라는 점 때문에 대피는 지극히 느리게 진행되었고, 결국 인구의 90% 이상이 시내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착륙선이 리우데자네이루의 거대 예수상을 부수며 낙하했다.




착륙선 낙하 30분 전,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 공원. 현지시각 오후 2시경.

「마스터, 착륙선이 탐지되었습니다.」

한창 민아와 장난을 치던 세환은 갑자기 들려오는 브룬힐데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민아의 시선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어울렸다. 물론 속으로는 브룬힐데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알 바 아니라고 했잖아.'

「하지만 마스터, 마스터가 출격하시지 않으면 인류는 이번에도 핵을 써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피해가 엄청날 겁니다.」

'그래서, 나랑 상관없을 텐데? 그만 좀 닥치고 꺼져.'

「마스터...」

'닥치라고 했어. 내 신경 건드려서 너에게 좋을 것 없을 텐데.'

세환의 싸늘한 대꾸에 브룬힐데는 결국 통신을 끊었다. 성가신 일을 끝낸 세환은 한숨 돌리다 민아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데, 어쩐지 민아의 표정이 좀 안 좋았다.

'아, 속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나.'

아무래도 브룬힐데에게 차갑게 대하던 게 얼굴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민아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세환은 미소를 띠며 둘러댔다.

"오빠가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괜찮아, 괜찮아. 민아한테 화난 것도 아니고, 지금 어디 갈 것도 아니니까."

세환의 말에 민아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손을 내밀었고, 세환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제야 민아는 표정을 풀며 그 손을 잡아 끌었다.




그날 헤어질 무렵, 세환은 잠시 민아와 할아버지를 붙잡아두고는 근처의 편의점에 들어가 볼펜과 메모지를 하나씩 구입해서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었다.

"여기 제 핸드폰 번호에요. 혹시 무슨 급한 일 생기거나 민아가 조르거나 하면 전화하세요."

"응? 아니, 하지만 이제 겨우 두번 봤는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만일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연락할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어서 나쁠 거 없잖아요?"

사양하려던 민아의 할아버지는 결국 메모지를 받았다. 세환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바로 옆에서 간절하게 바라보는 민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였을 것이다. 민아 할아버지가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본 세환은 민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오늘은 이제 끝. 전화번호 줬으니까, 나중에 보고 싶으면 할아버지한테 전화해달라고 해. 알았지?"

민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세환도 마주 웃어준 다음 할아버지께도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봬요."

"그래, 잘 가게 학생. 그리고 신경 써줘서 고마워."

"뭘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그 날 밤, 방에 돌아와 라디오로 뉴스를 듣던 세환은 리우데자네이루에 낙하한 로봇과 착륙선이 핵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스에서는 약 2시간 동안 리우데자네이루를 파괴한 로봇이 브라질 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국에서 발사한 핵무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전했고, 더불어 지난 두번의 외계로봇 낙하에서 검투사 로봇─언론에서 지크프리트를 지칭하는 말─이 나타나지 않은 점에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지난 번 뉴욕에서 미국에서 출격시켰다가 허무하게 부서진 로봇이 검투사 로봇을 비밀리에 포획해서 개조했던 게 아니냐』
『미국에서 비밀리에 포획한 건 맞지만 지금 분해 연구 중이다』
『실은 착륙선에서 나오는 로봇과 한패였는데 그 동안 연극을 하다가 이제 연극할 필요가 없어져서 안 나오는 것 아니냐』

당사자인 세환가 듣기에는 코웃음만 나오는 추측들이었다. 아마 세환도 예전 같았으면 길길이 날뛰었을 내용도 제법 나왔지만, 지금 와서는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그냥 멍하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지껄여라, 바보들."

민아 덕분에 밝아졌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세환은 눈을 감았다.




20XX년 11월 중순, 버지니아 주 미국 국방성 긴급 회의실.

지난 한달 동안 미국 정부 각료들은 회의를 거듭했다. 일단 모선에 대한 공격방법은 불안하나마 확정되었고, 실행 능력 역시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세자릿수에 달하는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는데 다른 핵 보유국, 특히 러시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점이었다. 냉전 시대가 끝난지 벌써 수십년이 지났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의 주요 도시를 향해 겨눈 핵미사일들은 건재했고, 미국이 탄도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러시아는 그 미사일들이 자국에 떨어지기 전에 보복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미국의 미사일이 대기권에 재돌입하지 않고 우주로 날아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러시아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발사된 후일 테고, 그 중 하나라도 국방성에 떨어진다면 자동 보복 프로그램에 의해 미국에서 러시아를 향해 재보복 발사. 그렇게 되면 모선 격파 이전에 인류 자멸이다.
눈앞에 보이는 사상 최악의 멸망 시나리오에 행정부 각료들은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양해를 구하고 쏘자니 국가 기밀 누설이 걸리고, 그렇다고 그냥 쏘자니 자폭하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지난 한달 간의 회의는 온통 이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진전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러시아에 협력을 구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설마 저 녀석들하고 손 잡고 쏘자는 겁니까?"

"이대로는 그저 죽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격이니 어떻게든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다른 나라와 손을 잡습니까! 이적행위라고요, 이적행위!"

"아니, 인류가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걸린 문제에 지금 이적행위고 뭐고가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언젯적 사고방식이에요?"

"살아남은 다음도 대비를 해야할 거 아뇨! 당신 그러고도 대통령 대행이야!"

"당장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한테 10년후에 부자 만들어줄게 하면 고맙다고 할 것 같소! 그리고 갑자기 왜 반말이야!"

부통령과 신임 국무장관의 유치한 언쟁은 보다 못한 다른 각료들이 나선 다음에야 끝났지만 둘은 여전히 상대를 노려보며 씩씩 대고 있었다. 뉴욕 초토화 이전부터 회의에 참석해왔던 각료들은 할수만 있다면 사임한 전 대통령을 다시 불러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다못한 외무장관이 나섰다.

"저는 부통령 의견에 찬성합니다. 아무래도 러시아에 연락을 넣어서 협력을 요청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군요. 가능하면 중국에도 연락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군요. 지금은 러시아나 중국이나 만만찮게 위협적이니까요."

외무장관의 말에 국무장관이 한번 더 발작하려고 했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던 다른 각료들이 간신히 붙잡아 말릴 수 있었다. 부통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렇군요, 중국을 잊고 있었습니다. 일단 그쪽에도 통보를 해야겠지요. 외무장관은 러시아와 중국에 연락을 해서 모선에 대한 것과 현재 우리의 대응책을 전해주십시오. 협력을 원한다는 얘기도."

부통령이나 외무장관은, 의심을 피할 수 없다면 아예 탁 터놓고 얘기해서 한패로 끌어들이는 편이 낫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세 강대국이 함께 모선을 공격한다면 성공율도 조금은 올라갈 테고, 핵탄두 소모로 인한 전략 차원의 전력 감소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핵병기를 두자릿수 이상 보유하고 있는 시점에서 핵탄두가 좀 감소한다고 전력 감소같은 게 발생할 리 없지만.





며칠 후, 대한민국 서울.

한달동안 세환은 매주 한번씩 민아와 약속을 해서 여의도 공원에서 만났다. 민아는 세환에게서 아버지의 느낌을 받아서 좋아했고, 세환은 민아와 있을 때면 가라앉은 기분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민아 할아버지는 민아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신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날, 세환은 모처럼 민아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63빌딩에 놀러왔다. 생각 같아서는 민아를 데리고 S랜드같은 유원지라도 가고 싶었지만 저녁에는 민아 할아버지가 출근을 하셔야 해서 멀리 가는 건 무리였고, 도심의 L월드는 쓸데없이 가격만 비싸다는 느낌이 강해서 꺼려졌다. 결국 가까운 63빌딩에서 전망대와 수족관을 보기로 한 것이다.
민아는 수족관의 물고기와 거북이를 보며 신기해했고, 상어를 보고 놀라서 세환의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미는 모습에 세환과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세환과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민아의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가 세환에게 조용히 말했다.

"고맙네, 얘가 이렇게 신나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아니에요, 저도 재미있는데요 뭘."

세환은 할아버지의 감사에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그때였다.

「마스터.」

갑자기 들려온 브룬힐데의 통신에 세환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런 세환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민아가 쳐다보자 세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어보였지만, 브룬힐데의 통신은 계속 들려왔다.

「마스터, 꼭 들으셔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닥치라고 했지. 이젠 나랑 상관 없다고 몇번이나 말했어.'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릅니다. 예상 낙하 지점이 서울입니다.」

'뭐?'

민아의 손에 이끌리던 세환은 생각지도 못한 브룬힐데의 말에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민아가 세환의 손을 잡아 끌었지만 세환은 너무 놀라서 그 사실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이라고? 정확하게 어디?'

「그것까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대기권 돌입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궤도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이상 예상 낙하 지점을 좁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앞으로 약 30분 후에 낙하 완료됩니다.」

'쳇, 뭐야. 도망쳐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 이건가? 그럼 애써서 도망쳐봤...'

거기까지 생각한 세환은 자신의 손을 잡아 당기는 느낌에 아래를 바라보고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민아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민아는 세환의 표정이 시시각각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불안해서 손을 잡아당긴 것이지만, 세환은 이대로는 민아가 휘말린다는 사실에 사고가 완전히 정지했다.

'이런 제길, 어쩌지? 이, 일단 대피부터 해야하나. 그런데 어디로? 서울 어디에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재수 없으면 대피한 장소로 떨어질 수도 있잖아!'

당황한 가운데 세환은 먼저 서울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상 낙하 지점이 서울이라면 적어도 서울 중심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브룬힐데, 아까 30분 정도 남았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젠장, 그 시간 안에 빠져나갈 수 있을까.'

세환은 민아를 보며 애써 마주 웃어준 다음, 민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빨리 이곳에서, 서울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마땅히 설득할 만한 말은 없었지만 일단 얘기는 해야했기에 입을 여는 순간, 63빌딩 전체에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현재 빌딩 내에 계신 고객님들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업무상의 이유로 본 건물의 모든 영업을 현시간부로 종료하오니 고객님들께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세환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부드러운 말로 건물에서 나가달라고 하고 있지만, 이건 분명히 대피령의 일환이었다. 무사히 건물 밖으로 나간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피난 행렬이 이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전철이고 도로고 사람들로 미어 터지겠군. 빌어먹을.'

세환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인상을 있는대로 구겼지만 민아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표정을 풀었다. 아이한테 불안감을 심어줘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안내 방송에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지만 탑승구 앞에는 벌써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영화관, 수족관, 전망대, 기타 점포에서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나오면서 엘리베이터 입구는 완전히 장사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뛰어내려가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지만 그랬다간 정작 빌딩에서 나온 다음 힘이 빠져서 꼼짝 못할 수도 있었다.

"민아야, 오빠한테 업힐래?"

민아는 세환의 말에 활짝 웃으며 업혔고, 그 모습을 본 민아 할아버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환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더라도 만약 조금이라도 불안심리가 퍼지기 시작하면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다. 혼란으로 가득 찬 곳에서는 일행을 놓칠 가능성이 높았고, 흩어진 일행이 어른이라면 몰라도 어린 아이라면 혼자 힘으로 밖으로 빠져나와서 대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만약을 대비해서 업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세환은 초조한 심정으로 엘리베이터 차례를 기다렸지만, 눈앞의 사람들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결국 세환 일행이 빌딩에서 나온 것은 무려 20분이 지난 다음이었다.
빌딩에서 나오자 거리 곳곳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찰들이 사람들을 인도하려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격적인 대피령이 실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도로는 이미 승용차들로 꽉 차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고, 버스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서 이동하고 있었다. 하늘에 전투기와 탐조등만 없다 뿐이지, 이건 완전히 공습을 피해 빠져가나는 피난 행렬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리 다를 것도 없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민아가 세환의 어깨를 톡톡 쳤다.

"응? 왜 그래?"

고개를 돌려서 민아를 보던 세환은, 민아가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고 거대한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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