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도서관을 나온 세환은 느린 걸음으로 교내를 돌아다녔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보니 어느샌가 소속 단과대 건물 앞까지 와 있었다. 잠시 건물을 올려다보던 세환은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려 했지만, 그런 세환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이세환! 너 거기 서! 꼼짝 말고 거기 있어!"

쩌렁쩌렁 울리는 진석의 목소리를 들은 세환은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지만 곧 표정을 굳히고는 걸음을 빨리 했다. 하지만 몸의 균형을 잡는 것도 일일이 신경을 쓰며 움직여야 하는 세환이 펄펄 날아오다시피 하는 진석을 따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세환은 채 10m도 못 가고 진석에게 따라잡혔다.

"야, 임마! 너 대체 어떻게 된 자식이야! 갑자기 연락이 뚝 끊기고 안 보이면 사람이 얼마나 불안해지는 줄 알아?!"

진석은 큰소리로 외치며 손바닥을 휘둘러 세환의 뒤통수를 때렸다. 단순히 장난삼아 친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 세환의 몸 상태로는 버티기 힘든 충격이었고, 덕분에 세환은 크게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야, 야. 괜찮아? 내가 너무 세게 쳤나? 그렇게 힘 많이 안 줬는데... 몸이라도 안 좋아? 아니, 역시 내가 너무 세게 쳤나?"

진석은 당황해서 세환을 부축했다. 평상시 하던 대로 반가워서 쳤을 뿐인데 이렇게 쓰러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석이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넌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서 문제야. 좀 고쳐. 그리고 이세환, 우리 연락 좀 하고 살자, 응?"

세환이 진석의 부축을 받으며 뒤를 돌아보자, 한쪽 눈을 치켜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우의 모습이 있었다. 민우가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포커 페이스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지간히 화가 난 듯 싶었다.

"아, 뭐... 그게 여러가지로 좀 바빠서 말이야."

세환은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했지만, 민우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좀' 바빴다는 녀석이 보름이 넘도록 전화 한통에 문자 한건 없냐? 설마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 내가 속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일단 좀 같이 가자."

말을 마친 민우는 세환의 곁에 서더니 팔짱을 끼고는 걷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세환을 부축하고 있던 진석도 똑같이 행동했기에 세환은 형사들에게 연행되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끌려갔다.




"일어선다! 일어서! 일어섰어!"

"만세! 해냈다! 과학의 승리야!"

"이제 철야 끝이다! 발 뻗고 잘 수 있어!"

반 광란상태에 가까운 연구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재생된 로봇이 두 다리로 완전히 일어섰다. 제어는 완벽해 보였다. 재생시설에 마련된 조종실에서는 한 청년이 원격조종장치를 조작하고 있었다. 두개의 레버와 각각 레버에 세개씩 달린 버튼, 그리고 발치에 있는 페달 네개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청년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휴우... 겨우 일으켰다..."

청년은 사실 군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연구원도 아니었다. 유명한 로봇 시뮬레이션 게임의 미국내 전국 리그전에서 준우승한 경력 덕분에 스카웃된 민간인으로, 지금 사용되는 조종장치도 바로 그 게임의 입력장치를 개조한 것이었다. 담당팀으로서는 우승자를 영입하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우승자가 샌프란시스코에 로봇이 나타났을 때 현장에서 희생된 탓에 준우승자를 데려오게 된 것이다.
청년은 착용하고 있는 헤드셋을 통해 국방성에 있는 박사에게 말을 걸었다.

"일으키는 건 성공했어요. 그런데 무기는 어떻게 잡죠? 그런 조작은 게임에 없는데요."

『응? 아아, 그거 말인가. 무기는 거기 우리 연구원들이 알아서 장착해줄 테니 걱정 안 해도 되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천장이 열리면서 출격이 가능해지니까 그렇게 알고 있게나.』

"그래요? 다행이네요."

청년이 한숨섞인 대답을 하면서 몸을 시트에 깊이 누이는 동안, 연구원들은 거대한 검과 방패를 로봇에 장착하느라 분주했다. 방패는 왼팔등에 고정하면 그만이었지만 검은 오른손에 '쥐어'줘야 했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막판에 또 고생을 해야 했다.
무기 장착이 끝나자 연구원들은 서둘러 로봇 주변에서 벗어났고, 잠시후 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설의 천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3중으로 막혀있던 천장이 완전히 개방되자 파란 하늘이 보였다.

『자, 그럼 부탁하네. 알버트.』

"하는 데까지 해보죠. 실제 로봇이랑 게임이랑 얼마나 똑같을지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알버트라고 불린 청년은 조종간을 움직여 스러스터 가동 모드로 들어갔다. 그러자 굉음과 함께 로봇의 등에 장착된 스러스터가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고, 잠시 후 빠른 속도로 시설을 벗어나 날아올랐다.

"히야, 이거 제법 재미있네. 어디 보자..."

알버트는 실제 로봇을 조종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들떴는지 허공에 기체를 멈춰 세워놓고는 이런저런 동작들을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대통령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고, 박사는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만 긁고 있었다. 결국 나선 것은 국방성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양복입은 남자였다.

『이봐, 그런 건 좀 나중에 해. 지금 당장 뉴욕이 박살나고 있다고!』

"응? 그런데 아저씬 누구?"

『아직 30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아저씨라는 실례되는 말을 했다는 사실은 덮어두겠다. 그러니 얼른 뉴욕에 가서 녀석을...』

"아, 아. 알았어요, 알았어. 거 젊다는 사람이 되게 보채네. 그렇게 살다간 평생 결혼도 못하고 혼자서 늙어 죽을지도 몰라요?"

『뭐가 어...』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버트는 헤드셋을 오프(off)로 해놓고는 로봇을 움직여 뉴욕으로 날아가게 했다. 속도계 같은 것도 없고, 실제로 타고 있는 것도 아니라 체감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아 알버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로봇의 비행 속도는 지구상의 어떤 항공기보다도 빨랐다.
알버트의 기체는 발진한지 30분이 채 안 되어 뉴욕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카메라에 잡혔고, 그제야 슬슬 알버트는 실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착지할 만한 곳을 찾아보던 알버트는 갑자기 눈앞에 푸르스름한 막이 퍼지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뭐, 뭐야 이건! 문제 생긴 거 아니에요?"

그 때 고해상도 카메라를 가진 정찰위성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박사가 통신망 개방 신호를 보냈고, 연구원들이 손짓을 하자 알버트는 헤드셋을 다시 켰다. 그러자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말게. 광학병기를 막는 방어막이 작동한 거야. 적 로봇이 레이저인지 빔인지를 쏜 걸 자동으로 막았단 얘기지.』

그 말을 들은 알버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출격한 전투기 편대가 순식간에 전멸당했다는 얘기를 떠올린 것이다. 아마 그 전투기들도 지금 공격에 당한 것 같은데, 왜 그리 맥없이 떨어진 건지 이상하게 생각됐다.

"그런 거 있었으면 전투기들한테도 달아주지 그랬어요?"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네. 회수한 로봇에 달려있던 것들 중에서 비교적 온전한 것만 모아서 재생한 거거든. 일단 지금 상황을 보니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구만 그래.』

"테스트도 제대로 안 한 겁니까? 뭐 이래!"

『상황이 상황이잖나. 그럼 잘 부탁하네, 알버트.』

어이가 없어진 알버트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려는데 이번엔 박사가 먼저 통신을 꺼버렸다. 알버트는 한숨을 내쉬며 로봇을 착륙시키기 시작했다. 뉴욕은 온통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어서 마땅한 착륙 장소가 없었고, 결국 알버트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적 로봇 근처 아무데나 내려놓기로 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로봇이 땅에 내려서자, 적기는 로봇을 바라보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 모습을 본 알버트는 조금 긴장했다. 일단 적기의 무기부터가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맙소사, 양손에 메이스(Mace)를 하나씩 쥐고 있다니.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적기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메이스를 한 손에 하나씩 두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제대로 한방 맞으면 팔다리 정도는 그대로 부러질 것 같았다. 왼팔에 달린 방패도 과연 제대로 역할을 할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 함부로 다가가기도 어려웠다. 알버트가 우물쭈물하고 있자니 갑자기 모니터가 붉게 점멸하며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뭡니까, 이번엔 또?!"

알버트가 당황해서 외치자 주변의 연구원들이 각자 기기에 달려들어 로봇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을 급조하느라 파일럿이 로봇의 상황을 파악하도록 만들 틈이 없었고, 결국 조종계와 점검계를 분리해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점검 기기들을 열심히 두드리던 연구원들은 모니터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 이거 뭐야!"

"알버트, 털어! 털어내!"

"그런 모션은 없어! 뛰어! 제자리에서 펄쩍 펄쩍!"

알버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연구원들이 저리 난리를 피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연구원들은 제대로 된 설명은커녕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만 계속 쏟아내듯 말했고, 결국 알버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뭡니까! 알아듣게 설명을 해요, 설명을!"

"거미 로봇들이 우리 로봇에 기어올라서 관절부를 공격하고 있다고!"

그랬다. 알버트가 머뭇거린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거미 로봇들이 달라붙기에는 충분했고, 다리부터 기어오른 거미 로봇들이 무릎이나 허리, 어깨와 같은 관절부를 찌르고 찢어대자 경보가 울린 것이다.

"이, 이거 어떻게 해요?! 털어내는 동작은 입력돼 있지 않잖아요!"

동작을 패턴화해서 입력하고 일정한 조작에 의해 구현하는 방식은 비교적 간단하게 실용화할 수 있지만, 대응 행동이 마련되지 않은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개발팀에서는 검과 방패의 사용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를 모아 패턴화했지만, 정작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예상하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이기도 했다.

"제자리에서 뛰어 봐! 펄쩍 펄쩍! 그러면 떨어질 수도 있어!"

급한 김에 알버트는 그 말대로 해봤다. 점프 커맨드를 입력하자 로봇은 제자리에서 뛰어 올랐다가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착지했고, 알버트가 그 동작을 두번 반복한 다음에야 경보가 멈췄다. 알버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턱없이 일렀다. 모니터가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치직 거리는 화면으로 변한 것이다.

"이건 또 뭐에요! 설마 아까 그 거미들한테 카메라가 당한 거에요?"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해."

알버트의 다급한 물음에 대답하는 연구원의 어조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알버트는 그 점이 의아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그 어조가 침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기가 메이스를 휘둘러서 로봇의 머리를 날려버렸어."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연구원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국방성 긴급회의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대통령은 코 앞에서 깍지 낀 손에 이마를 기댔다. 옆에서 지켜보던 보좌관은 대통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꺼멓게 변해버린 것을 보고 실신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대통령의 의식은 멀쩡했다. 대통령 본인은 차라리 졸도하는 편이 속 편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화면을 바라보던 박사가 고개를 돌려 대통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렇게 일이 돌아갈 줄은 생각도 못 했군요..."

여전히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박사를 보며, 대통령은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박사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한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매력만점의 유혹을 억누르며 대통령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박사님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사실 저걸 재생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니까요. 제가 너무 큰 걸 기대했을 뿐이죠."

화면에는 머리가 없어진 채 이리저리 칼을 휘두르는 재생 로봇과, 눈먼 칼을 받아내거나 피하면서 메이스로 조금씩 확실하게 상대를 부숴가는 적 로봇이 비춰지고 있었다. 방패는 벌써 고철이 되어 있었고, 왼팔도 꺾여서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대통령은 기회가 있다면 재생 로봇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지금뿐이라고 생각했다.

"보좌관."

"예, 말씀하십시오."

"국방장관에게 작전을 허가한다고 하시오. 그리고 직위를 부통령에게 인계할 준비를 해주시오."




그로부터 10분 후.
양 다리마저 부서진 재생 로봇을 쓰러트린 적기는 발길을 돌리려다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빛 덩어리 몇개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적기는 레이저를 발사했지만 전부를 파괴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잠시 후, 뉴욕은 섬광에 휩싸였다.




"잠깐, 너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진석과 함께 세환을 끌고 가던 민우는 문득 자신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사실 둘이 함께 세환을 붙잡고 가고 있기는 했지만 진석이 이끄는 방향으로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우는 지금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민우의 물음에 진석은 뭘 새삼스레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프집."

진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우는 세환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번개같이 진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듣는 사람이 걱정할 만큼 강렬한 타격음이 났지만, 진석은 아픔보다는 맞았다는 사실 자체에 더 화가 나는 듯 했다.

"뭐야, 갑자기 왜 때려!"

"네녀석 머리엔 술 밖에 없냐? 먹고 싶더라도 좀 참아. 일단은 커피숍으로 가자."

세환도 이대로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였기 때문에 잠자코 민우를 따랐다. 사실 세환도 술은 꺼려졌다. 지금 상태라면 술을 마시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짓을 할지 짐작도 안 가기 때문이었다.
셋 은 학교 근처의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주문한 커피가 각자 앞에 놓이긴 했지만 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진석은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세환을 노려보았고, 민우는 특유의 포커 페이스로 세환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따금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결코 차분한 마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둘의 시선을 받고 있는 세환은 그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진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유나 좀 알자. 도대체 뭣 때문에 보름이 넘게 소식이 없었어? 전화도 없고, 문자도 씹고. 게다가 개학했는데 강의도 안 들어오고.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진땀뺐는 줄 알아? 다행히 발표 조는 우리랑 같은 조로 편성해놔서 넘어갔지만, 계속 안 나오면 나중에 중간시험도 힘들텐데."

진석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세환은 그냥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참다 못한 진석이 폭발하려는 찰나, 민우가 진석을 제지하며 말했다.

"너, 뭔가 큰일 있었어? 그것도 해결할 수 없는 수준으로."

민우의 말에 세환은 움찔했고, 그걸 본 진석이 외쳤다.

"뭐? 야, 너 사채라도 쓴 거야?! 도대체 뭘 한...!"

진석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민우는 황급히 진석의 입을 막고는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들 눈살을 조금 찌푸리기는 했지만 별 탈 없이 넘어갔고, 한숨돌린 민우는 진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넌 그냥 입 닥치고 가만히 듣고만 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야."

"야, 하지만..."

"시끄러. 조용히 해, 민폐덩어리. 계속 나서면 강의 내용 안 보여준다."

한방에 진석을 잠재운 민우는 다시 세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세환은 여전히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방금 자신이 한 말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민우는 알 수 있었다.

"연락도 없고, 강의에도 안 나오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 많이 했다. 그런데 학교에는 나오는 걸 보면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너 지금 상태를 보니 가방도 없고, 옷도 대충 입고 있고. 부모님은 모르시냐?"

민우의 말을 흘려듣고 있던 세환은 마지막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그리고 그 기색을 민우는 놓치지 않았다.

"너...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응? 좀 말해봐. 자세히는 아니라도 괜찮으니 대강 상황만이라도."

세환은 시선을 돌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 행동이 완전한 거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미안해... 말해주기가 좀 그런 상황이라서. 지금 나 혼자 살고 있어."

뜻박의 말에 진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민우는 그런 진석을 달래서 앉힌 다음 세환을 바라보았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다. 상황이 안 좋아서 학교... 강의에도 못 나갈 것 같아. 교수님들께는 너희들이 잘 좀 말씀드려줘. 아무래도 이번 학기는 포기해야할 것 같아."

진석과 민우가 생각하기에, 세환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학교에 나와서 배회할 시간은 있으면서 수업에 들어갈 수는 없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민우는 일단 세환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다그치면 되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그러면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부탁?"

민우의 말에 세환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전까진 거의 추궁에 가깝더니, 이젠 부탁이라고 하니 어리둥절할 만도 했다. 사실 지금도 진드기처럼 달라붙어서 캐물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진지하게 그 '부탁'을 말했다.

"수업에 나올 수 없다면, 적어도 휴학계라도 내라. 그게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서로에게라... 그건 그렇구나. 적어도 너희들한테 거짓말을 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오늘은 시간이 좀 그렇고... 내일 휴학계 낼게."

"교수님들께는 내가 말씀드릴게. 집안 사정 때문이라고 하면 되겠지?"

민우의 그 말에 세환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탁할게."

"그래, 그러면 우린 가볼게."

"나도 여기 더 있을 이유 없으니까, 같이 나가자."

민우와 세환이 일어서자 진석도 어쩔 수 없이 일어서야 했다. 진석의 표정으로 봐서는 지금 상황에 수긍 못하는 눈치였지만, 그럭저럭 마무리되어가는 듯한 상황에 한마디 더 했다가 괜히 판이 깨질 것 같다는 생각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디보자, 계산은..."

"됐어, 진석이 녀석이 다 낼 테니까."

"뭐? 야, 왜 내가 다 뒤집어 써야 되는데?"

"아까 커피숍 소란스럽게 한 대가라고 생각해. 좀 자중하라는 충고도 더했다."




친구들과 헤어진 다음, 세환은 방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전화를 찾은 것이었다. 배터리를 연결하고 전원을 올렸지만 열흘이 넘게 방치되어 있던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모두 방전되어 있었고, 부랴부랴 충전기를 찾아서 본체에 직접 연결하고 나서야 전원을 올릴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조작해서 문자 메시지와 수신 전화를 확인하던 세환은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60여건, 받지 않은 수신 전화는 100건이 넘었다. 세환은 꽤 긴 시간동안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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