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 다시 실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 실험부터는 자극의 강도를 2배로 높여갈 예정이다. 일단 오늘은 어제의 2배, 만약 오늘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내일은 다시 그 2배, 즉 어제의 4배로 높여갈 생각이다. 순간 자극의 수치는 점차 높아지지만, 낮은 강도의 자극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것보다는 재료가 받는 부담이 적을 것이다. 장비들을 위치로 옮긴 후, 재료에 걸린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연구실 밖으로 영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벽면과 천장, 바닥에까지 영력 차단 주문을 걸어두었다. 영력이 빠져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연구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고, 그 미세한 유출 때문에 실험이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봉인이 다 풀린 후 측정 장비와 자극 입력 장비의 연결을 마치고,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
나는 시그리드의 연구실 한편에 놓인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시각은 자정 무렵. 아까 낮에 시그리드가 말했을 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정말로 뭔가 기묘한 느낌이 풍겨오고 있었다. 참고로 내게 그런 말을 해줬던 사람은 지금 침대 옆 바닥에서 이불을 돌돌 몸에 만 채 자고 있다. 여자를 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다나. 도대체 내가 노숙을 얼마나 했는지 아느냐고 반론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모처럼 받는 호의를 무시하기도 미안해서 그냥 받아들였다. 그렇게 침대에 누운 게 약 2시간 전. 몇 년 만의 재회이니 밤새 술이라도 마셔볼까 했지만 시그리드가 ‘일단은’ 술 끊었다고 하고, 또 한동안 연구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아서 그냥 일찍 자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위쪽 어느 연구실에선가 느껴지는 특이한 느낌에 잠을 깬 것이다.
“…진짜였네, 게다가 이런 느낌은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 보는데.”
애초에 탑에는 마법사들의 연구가 서로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방음과 영력 차단 기능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폭발에 따른 진동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도 최소한도로 퍼지도록 제어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진리의 탑이다. 그런데 지금, 미약하지만 분명한 영력이 탑 어디선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느낌은 일반적인 영력에서 발산되는 것이 아니다. 열기도, 냉기도 없고, 바람의 시원함도, 대지의 포근함도 없다. 다른 표현을 찾자면…….
“…음산하네. 누가 네크로맨시(Necromancy)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크로맨시는 본래 강령술(降靈術)의 일종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죽은 자-즉 시체-를 다루는 술법을 뜻하게 되었다. 아마도 네크로맨서(Necromancer)라고 자칭하는 마법사들이 잠잠하다 싶으면 튀어나와 난리를 친 게 원인이 된 것 싶은데, 솔직히 자기 연구실에서 얌전히 영(靈)에 대해 연구하는 정통파 네크로맨서들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네크로맨시의 연구 특성상 시신이나 영을 주로 다루어야 하고, 또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영들은 상당수가 원한을 가진 악령이기 때문에 네크로맨서가 악인이 되는 경우가 다른 직종에 비해서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나저나, 어디서 어떤 연구를 하기에 이렇게 영력 차단막 밖으로 새어나올 정도지?
“한번 찾아볼까.”
시그리드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연구실 문으로 갔다. 문을 열어보니 수직 이동실은 여전히 1층에 있어서 부유 마법을 이용해서 올라가보기로 했다. 시그리드의 연구실에는 비행 판자-본인은 플라이트 보드(Flight Board)라고 부르고 있지만 누가 봐도 판자때기다-가 있지만, 역시 내가 먼저 그 물건에 올라타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서서히 올라가자 조금씩 그 특이한 영력의 느낌이 강해졌다. 게다가 이젠 왠지 모를 한기까지도 느껴지는 것이, 정말 네크로맨시는 아닌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한 10층 정도 올라왔을까, 조금씩이지만 짙어지던 영력의 느낌이 갑자기 사라졌다. 아무래도 오늘 연구는 이걸로 끝인 것 같은데…….
“…돌아가자.”
시그리드의 방으로 돌아가면서, 지금 내가 했던 행동이 평소 내가 하던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히 평소대로였으면 그냥 무시했을 텐데, 오늘은 어째서 찾아볼 생각을 한 걸까? 거기다 생각만으로 안 그치고 직접 찾으러 나서기까지 하고. 오랜만에 친한 사람을 만나서 감상적이라도 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꽤나 오랫동안 나와는 연관이 없는 말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인연 없을 말이니까.
방에 돌아와 보니, 시그리드는 여전히 쿨쿨 잘만 자고 있었다. 곤히 자는 모습이, 얼굴 낙서는 물론이고 우스꽝스러운 옷으로 갈아입힌대도 모를 것 같았다. 한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연구했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침대에 눕고 눈을 감았다.
…아파. 아니, 아프지 않아. 하지만 아픈 것도 같아.
추워. 왜 춥지? 아, 이것들 때문이구나. 이젠 신경도 안 쓰여.
졸려. 하지만 추워서 잘 수가 없어. 자고 싶은데. 그만 자게 해줘.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그만 내버려 둬.
누가 좀 도와줘. 쫓아내줘. 춥고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어. 쉴 수가 없어.
=================================================================================================== 이번 업로드 분량은 지금까지보다 조금 적습니다. 애초에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습니다만, 여기서 끊는 것이 그나마 적절할 것 같더군요. ...사실 이 뒤로 써둔 것도 기껏 서너줄 뿐이긴 합니다. -_-a 아, 그리고 혹시 지난번에 세연의 이미지는 마리엔을 참고했다는 말 때문에 오해가 있을까봐 다시 말하는데, 어디까지나 '참고'입니다. 세연은 마리엔처럼 활짝 웃는 일도 없고, 화장도 안 합니다. 머리도 짙은 갈색입니다. 검은 색이 아니에요.
덧/ 프롤로그 비공개로 돌렸습니다. 아무래도 프롤로그가 영 마음에 안 드네요. 쓸 때에도 찝찝했는데, 아무래도 전체 내용에서 따로 놀 것 같아서 아예 흑역사로 만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