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어찌어찌해서 점심은 간신히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은 그냥 시그리드의 연구실에서 먹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만약 밖에서 먹으려고 했다간 점심때와 비슷한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세연. 숙소는 정했어?”
“신세 좀 질게.”
“…그렇게 대뜸 말하면 승낙하고 싶다가도 안 하게 된다고.”
“부탁할게요.”
“정말이지, 혹시 이 도시에 올 때부터 이럴 생각으로 온 것 아냐?”
“어머, 들켰네?”
“…이럴 때만 여자답게 말하지. 더 얄미워.”
“뭐 어때, 친구 사이에. 며칠 좀 재워줘.”
“이것 봐, 아무리 친구라도 남녀라고. 그렇게 함부로 부탁하고 들어줄 상황이 아니란 말이야.”
“자는 동안에 덮칠 생각이었어?”
“아니야! 하아, 좀 주변 이목이라는 걸 생각해 보라고. 한창 나이…는 아니지만, 나이차도 그다지 나지 않는 남녀가 한 방에서 생활하는 걸 보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마법사들이 언제는 다른 사람한테 신경 쓰는 부류였어?”
“…널 말로 설득하려고 한 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렇다고 실력 행사로 나갈 수도 없고….”
“실력으로도 밀리잖아. 완력이든, 마법이든.”
마지막 한 마디가 꽤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돌아가는 내내 시그리드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좀 적당히 놀릴 걸 그랬나. 하지만 이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상대는 시그리드가 거의 유일하다보니, 멈추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7년 만에 보는 사이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계속 뚱해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불편하다. 역시 사과해야겠지.
“시그리드, 아까 했던 말은 미안해.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들뜨는 바람에 말이 막 나왔어.”
듣는 둥 마는 둥, 시그리드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책을 펴 읽기 시작했다. 연구용 자료서 같은데, 실제로는 책을 읽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기, 그만 화 좀 풀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기분 나쁘게 해서 미안해.”
그래도 여전히 반응이 없다. 내 말이 들리기는 하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꿈쩍도 안 한다. 아무래도 이 이상 미안하다며 달라붙었다간 도리어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그만두고 소파에 앉았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 소파에 앉은 채로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30분쯤 지났을까.
“잠깐 좀 따라와 봐.”
“응?”
“잠깐이면 되니까, 같이 가자.”
“어디 가는데?”
“그건 묻지 말고. 위험한 일 아니니까 걱정 마.”
석상처럼 앉아있던 시그리드는 일어나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기분 나빠서 토라져있던 사람이 어디 가자고 끌고 가면 불안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여기서 그런 말을 했다간 진짜로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 성격이 나쁜 녀석도 아니니까 큰일 나지야 않겠지.
다시 판자를 타고 내려가는데, 이번에는 1층 로비로 안 나가고 로비 반대편의 지하통로로 들어갔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탑 지하에는 분명히…….
“오랜만이니까, 대련 좀 해보자.”
“뭐? 갑자기 웬 대련이야?”
“자그마치 7년만이잖아.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해져서 그래.”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대련을 가장한 화풀이로 생각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시그리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는 사람이 저녁 만드는 거다.”
“…….”
생각해보니까, 헤어질 때의 저 녀석 요리 솜씨는 말 그대로 ‘먹고 죽지 않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할 줄 아는 요리는 단 하나, 팬케이크. 설마 그 동안 전혀 발전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지금 내 앞에서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건데 크게 나아지지는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그 말은, 아까 30분 동안 꼼짝도 안 했던 것은 이 구실을 생각하기 위했던 것이렷다…?”
“어라, 들켰네?”
얄밉게 웃는 면상에 한방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 한편, 가슴 속에 응어리를 남겨두지 않는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분명 탑은 마법과 각종 연구를 하기 위한 최고의 환경을 갖춘 곳이지만, 그만큼 폐쇄적이기에 탑에서 생활하면 할수록 고집쟁이가 되어간다. 마법사가 어린아이 같다는 것은, 아이처럼 쉽게 화를 내고 쉽게 풀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반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법사는 자신의 연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멀쩡한 사람을 불구로 만들 수도,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나이든 마법사들일수록 탑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성격과 그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몇 년 씩이나 탑에서 생활한 시그리드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좋아, 그럼 어디 해볼까. 7년간 탑에서 수련한 성과를 보여 주시지요.”
====================================================================================================== 그럭저럭 이어지고 있는 챕터1, 제 4편입니다. 간신히 급전개를 막으면서 늘려가고는 있습니다만, 점점 무리가 되어가는 군요. 이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챕터1 클라이막스에 진입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 1편 1편 올라가는 분량도 적은 주제에 더 길게 늘이지도 못하다니, 역시 능력이 안 되는 군요. 대체 인기 소설가 분들은 어떻게 그 분량을 다 쓰는 걸까요. 특히 이x도 씨, 존경해버릴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