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 와, 들어 와. 아, 이미 들어왔나. 어디 보자, 정리는… 됐고, 일단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차라도 좀 내오지. 내가 차를 어디다 뒀더라….”
그야말로 허둥지둥, 아니 이 경우에는 부산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보는 사람이 정신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다. 이제 나이도 서른이 다 되어갈 테고, 마법에 손댄지도 10년이 넘었을 텐데…. 이렇게 허둥대서야 초보 마법사로 보이기 십상이잖아.
“됐어, 천천히 해도 돼. 어차피 시간이야 남아도니까. 그건 그렇고, 혹시 어제 술 마셨어?”
“아니, 요새는 술 안 마셔. 술만 마시면 다음날 아침이 괴로워서 말이야. 게다가 어째선지 술 한번 마시면 한동안 사람들이 다 피하는 것 같더라고. 어차피 몸에 좋지도 않은 거 아예 이참에 끊었지. 한 일주일 됐나?”
“…일주일 동안 안 마신 걸 갖고 끊었다고 말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는데.”
시그리드는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찬장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정리 좀 하고 살라니까, 귀찮다고 대충 쑤셔 넣으니 나중에 찾기가 어렵잖아. 기다리기만 해서는 저녁 시간은 되어야 차를 얻어마시게 될 것 같았다.
“됐어, 비켜 봐. 내가 찾아서 끓일게.”
“어? 아니야, 손님인데 부려먹으면 안 되지. 기다려 봐, 여기 어디에….”
“됐으니까 그냥 가서 앉아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리고 솔직히 차 맛있게 못 끓이잖아?”
“음… 그건 그런데….”
“알았으면 가서 얌전히 기다리세요, 그게 서로 편하니까.”
“…알았어.”
그래도 역시 미안한지, 시그리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응접실-겸 연구실-로 돌아갔다. 나 참, 그러니까 정리 좀 하고 살라고 했는데 여전히 엉망진창이네. 찻잔이랑 비커가 같은 찬장에 들어있는 건 또 뭐야? 아, 찻잎 여기 있… 아니다. 이건 해독초네. …이런 게 왜 찬장에 들어와 있는 거냐고.
“시그리드, 찻잔이랑 찻잎은 찾았는데 주전자가 없는 걸?”
“아, 그냥 가져와. 여기 대용량 비커 있으니까 거기다 끓이면 되지.”
“…깨끗이 씻은 거지, 그 비커?”
“그나저나 탑에는 어쩐 일이야? 등록만 하고는 그 후로는 한 번도 안 왔잖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까, 갑자기 시그리드 생각이 나길래. 그리고 만난 지도 한참 됐잖아?”
“하하, 그래. 한참 되긴 정말 한참 됐지. 난 그동안 세연이 날 잊은 건 아닌가 싶었다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인조 페어리(Fairy)를 만들겠다는 사람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아, 그 얘긴 그만 해. 그때 너한테 구박받은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건 그렇고, 어째 전혀 안 늙었네? 이제 30대 아냐?”
그러고 보니 시그리드는 이제 20대 후반이었지. 슬슬 아저씨 소리 들을 법도 하겠군. 그래서 내 외모가 신경 쓰이나 보다.
“여자한테 나이 묻는 건 실례야. 그런데 어젯밤에는 뭘 한 거야? 늦잠 잘 안 자는 편이었잖아?”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옛날 버릇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게 정말 존경스러워진다. 뭐, 요새도 늦잠은 안 자. 다만 요즘 새 연구를 시작해서 말이지, 그게 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물건이다 보니 날 샐 때까지 붙잡고 있게 되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시그리드는 몸을 소파에 깊숙이 묻…으려고 했지만 워낙 낡은 물건이다 보니 쿠션이 눌리는 티조차 안 났다. 재료구입 및 처리비라는 명목으로 날아가는 예산에서 조금만 빼면 방이 훨씬 사람 사는 느낌이 날 텐데. 아, 그렇게 하면 공금횡령이 되는 건가.
“뭘 시작했길래 그러는데?”
“기억매체.”
“기억매체?”
“그래, 기록이 아닌 기억매체. 기록이라는 것은 사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되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왜곡이 발생할 수 있잖아. 그러니 아예 사람의 기억을 담을 수 있는 매체를 만들려는 거야. 만약 이게 성공한다면 대형 도서관 같은 건 완전히 무의미해지겠지. 그런데… 역시 너무 어려워.”
“성공 가능성은 일단 제쳐두고, 성공한다면 그거 평지풍파 일어나겠네.”
“뭐? 아니 뭐, 그야 획기적인 물건이니 당연하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응? 그럼 무슨 말인데?”
호기심이 피곤함을 눌렀는지, 시그리드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성공했을 때의 여파는 생각도 안 해본 건가? 하긴 아직 성공할 수 있을지도 미심쩍은 상황이니, 성공한 후의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성공한다면, 물론 어마어마한 분량의 내용을 담을 수 있겠지?”
“그야 당연하지. 인간의 기억량은 이 세상의 어떤 도서관보다도 방대하다고. 다만 그걸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약간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꺼낼 수 있지.”
“바로 그게 문제야. 도서관도, 책도 의미가 없어져.”
“응,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 둔한 거냐, 아니면 멍청한 거냐? 아니, 마법사에게 멍청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 생각이 없는 것 아냐?
“도서관, 책, 각종 출판물.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 같아?”
“…아.”
그제야 시그리드는 뭔가 감이 오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번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표정이 참 변화무쌍하단 말이야.
“흐음, 하지만 이게 성공만 한다면 마법사들이 연구서를 방에 못 들여놔서 안달할 일은 없어질 텐데…. 그렇다고 만약 상용화에 들어간다면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실업자가 될 테고…. 으음, 이거 난감하네.”
“…고민거리를 안긴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성공할지 아닐지도 아직 불확실하지? 그러니 그런 고민은 성공한 다음에 해도 안 늦어.”
그 말을 하고는 난 다시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시그리드는 그런 내 모습을 한번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하고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래, 사실 난 시그리드의 연구가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성공을 바라지도 않는다. 지나치게 많은 지식과 정보는 그릇된 판단과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부족한 지식과 정보에서 잘못된 판단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지만, 인간이란 정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만하게 되어 결국에는 최악의 결정을 내린다. 나는 실제로 그런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고, 또 알고 있다. 어떠한 기술이든 인간의 손에 들어간 이상, 악용될 소지가 다분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악용될 소지가 다분해지는 걸 넘어서 대부분의 경우 악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동족을 희생시키는 걸 서슴지 않는 유일한 생물이니까.
차를 반쯤 마시고 다시 시그리드에게 말을 걸었다. 조용히 차만 마시니 뭔가 허전하네.
“같은 층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때?”
“글쎄? 알고 있겠지만 탑은 방음시설이 완벽하니까, 소음 문제로 마주칠 일은 없고. 식사도 다들 알아서 해결하고. 그러다 보니 서로 얼굴 볼 일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너무 삭막하게들 사는 거 같아.”
“아, 그러고 보니 정확히 몇 층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쪽의 어느 층에선가 묘한 느낌이 들곤 하던데.”
“묘한 느낌?”
“응, 묘한 느낌. 뭔가 그럴듯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기묘한 느낌이랄까.”
=================================================================================== 이번엔 메모장을 안 거치고 아래아 한글에서 바로 붙여넣어 봤습니다. 글씨가 조금 커지고 글씨체도 좀 다릅니다만, 귀찮아서 그냥 이대로 갑니다. (...)
시그리드의 생활상은 괴팍한 마법사들의 전형...이라고 할까요? 애초에 마법에 몸담은 인간들이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일 리 만무하겠습니다만. (상당한 편견 있음)
글 속에서 외모 묘사가 거의 안 될 것 같아서 여기서 밝힙니다. 세연은 어깨를 살짝 넘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입니다. 외모로 봤을 때 추정 나이는 20대 중반. (본인은 나이를 절대 안 밝힙니다.)
시그리드는 그냥 20대 후반의 꾀죄죄한 연구원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
오늘은 날씨가 아주 괴상망측하더군요. 오후 4시경에 학교에서 나오니 조금씩 눈이 내리더니, 교문을 지날 때 쯤에는 제법 내리는 상황. 사진관에 들러 아침에 찍은 증명사진을 찾아 나오니 어느새 눈이 그쳐있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데, 노량진 지날 무렵 창밖을 보니 거의 눈보라급. 안양역에서 내리니 거의 다 그치고 한두송이씩 내리는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