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드의 말을 듣고 탑 내부에서 느꼈던 감각을 되살려봤지만, 나는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착각한 게 아닐까?
“난 잘 모르겠는데. 확실한 거야?”
“당연하지,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하루 종일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묘한 기운이 풍겼다 사라졌다 한다는 뜻이야?”
“그래. 그것도 대부분 자정 무렵이던데. 낮에는 별 이상 없는 것 같고.”
“원래 연구는 대개 밤중에 하잖아.”
“하긴 그래. 영력이라는 게 원래 해가 져야 활성화되니까.”
마법을 이루는, 공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인 영력(靈力)은 그 성질상 낮보다는 밤에 활발해지는 특징이 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연구를 한밤중에 주로 하는 편이다. 덕분에 연구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얼굴조차 보기 힘든 경우도 허다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새로 연구 시작했으니 건강은 완전히 뒷전일 텐데.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뭐 좀 먹여야겠다.
“그건 그렇고, 점심 먹으러 나가지 않을래? 시간도 그 쯤 된 것 같고.”
“응? 그냥 여기서 먹지?”
“연구한답시고 건강 망치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 나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으니까. 아프면 연구도 못 하잖아?”
“그건 그러네. 그럼 나가볼까.”
찻잔을 치우고 일어서는데, 시그리드가 소파 뒤편 벽에 기대어 세워진 널찍한 나무판자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밖에 나갈 거면서 저건 왜 들지?
“뭐해? 안 나갈 거야?”
“나가려고 준비하잖아, 지금.”
“그 나무판자는 뭔데?”
“탈 것.”
“…탈 것?”
“응. 양탄자 대신이야.”
…기가 막힌다. 희한하게 귀찮은 일 싫어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부유 마법(Levitation)을 걸어둘 양탄자가 없다고 나무판자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황당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시그리드는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여전히 어딘가 핀트가 안 맞는다니까.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가자.”
방문을 열고는 판자를 던져 허공에 띄우는 모습을 보자니, 한층 더 황당했다. 세상에 나무판자를 타고 다니는 마법사는 단 한 명뿐일 거다. 빗자루도 양탄자도 아니고 나무판자라니… 차라리 소파에 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말해봤더니 대답이 더 가관이다.
“소파는 문을 드나들기가 힘들잖아. 공간도 많이 필요하고. 게다가 만약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피눈물 나고. 여러모로 이 녀석이 딱이야.”
“예,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요.”
문을 닫고 판자가 아래쪽으로 내려가려는 참에, 시그리드 연구실 바로 위층, 그러니까 21층 5호실에서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음, 요새는 좀 잠잠하다 했지. 이것도 오랜만이네.”
“저 방은 누군데?”
“애던트라는 사람인데,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정도 많나 그래. 지금 하는 연구는 파란 장미를 만들어내는 거라던 걸.”
“파란 장미? 설마, 당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대가 이어져도 계속 파란색으로 피는 걸로?”
“응. 사람들이 다들 말려도 들은 척도 안 하더라고.”
“…저 사람도 사서 고생하는 부류구나.”
“저 사람‘도’ 라는 말이 어째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기분 탓이야, 기분 탓. 자, 그만 가자.”
이번 결과도 신통치 않았다. 이제는 꽤 진척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건만, 재료가 생각만큼 활발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재료를 입수하기 전 관찰했던 바로는 분명히 엄청난 결과를 낼만한 물건이었는데, 어째서일까. 연구실에 들여온 이후로는 제어는커녕 발현조차 못하고 있다.
답답해진 나는 연구일지를 덮고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분명 재료의 성능은 이제까지 본 어떤 것들보다도 우수하다. 연구 실험 방법도 관련된 거의 모든 연구서를 참조했다. 그런데도 진척은 없다. 재료를 들여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는 마당에 티끌만큼의 발전도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래도 이번 실험부터는 재료에 가해지는 자극을 높여봐야겠다. 지금까지는 재료의 안정적인 유지와 지속적인 연구를 우선해왔지만 더 이상 오래 끌면 재료에게도 위험하다. 지금 행하는 방식에서 재료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적은 부담이라도 오랫동안 가해지면 재료가 소모되고, 결국에는 파기에 이른다는 것이 사실이다. 차라리 단번에 결과를 뽑아내는 편이 재료에게도 좋을 것이다.
자극 수준은 지금까지 가해오던 수준의 150% 정도가 좋을 것 같다. 그 정도라면 제법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물론,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 더 올려봐야 할 것이다. 상한선 같은 것에 얽매이다가는 아무것도 안 될 테니까.
점심을 먹으러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어느 가게가 평판이 좋은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야 탑에 온 게 몇 년 만의 일이니 당연히 알 리 없고, 시그리드는 전형적인 은둔형이라 탑 바깥에 대해서는 열 살 먹은 어린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밖에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허공에 떠 있는 판자 위에 앉은 채 고민하고 있었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건 덤이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마법사들이 세상물정에 어두운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는 세연 너도 일단은 마법사잖아. 그거 결국엔 자기 흉보는 거다?”
“난 그래도 탑 안에 처박혀서 밖에서 전쟁이 나든 연쇄살인이 나든 신경 안 쓰는 수준은 아니야. 게다가 여행을 계속하다 보면 세상일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어. 언제 어디서 난처한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렇긴 하네. 그건 그렇고, 우리들 점심은 어디서 먹지?”
“나한테 묻지 마. 이 도시라면 시그리드가 더 오래 살았으니 나보다는 잘 알 것 아냐. 그러니 믿고 맡긴 건데….”
“아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마법사는 세상물정에 어둡다고. 믿은 사람 잘못이야.”
“알았으니 아무데나 가게 좀 골라. 배고픈 건 네가 더 심할 텐데?”
“혹시 잊었을지 몰라 말하는데, 밖에 나와서 점심 먹자고 한 건 세연 너야.”
아아, 어째서 이렇게 바보 같은 문답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정말이지 유치하다. 책임소재를 따지는 건 제발 이제 그만하고 싶어.
“됐으니까 제발 점심이나 먹자. 아까부터 사람들이 쳐다보는 거 모르겠어?”
그제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시그리드는 판자를 천천히 이동시키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행여 눈이 마주칠 새라 재빨리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대낮에 허공에 떠있는 판자 위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는 마법사 두 명이라면 더더욱 상관하고 싶지 않겠지.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있는 힘껏 달음박질쳐 도망치고 싶지 않을까?
“아, 저기 가자. 예전에 연구 재료를 가져오던 사람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저 가게 음식이 제법 맛있대.”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언제 들은 거야?”
“글쎄…, 한 반년 쯤 전?”
“…….”
=================================================================================================== 다시 글씨체와 글씨 크기가 변경되었습니다. 아예 아래아 한글 파일의 글씨 타입을 블로그 글씨 타입에 맞춰 변경했습니다. 이 편이 차라리 속편하군요.
작품 내에서 사용되는 관용적 표현은 가능한 지방색, 문화색을 띄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양권에서는 '식사하자'는 표현을 '밥먹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서양권에서는 어째서 식사를 하는 것이 밥(rice)을 먹는 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물론 이것은 기본적인 사전 지식만 알고 있으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만, 실제로 관용적 표현이라는 것은 민족과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동양권에서도 낯선 경우가 있습니다. 일본의 人參(にんじん) 飮(の)んで 首(くび) 括(くく)る.(인삼을 마시고 빚을 지고 목을 매어 죽는다.)라는 표현, 우리나라에선 굉장히 생소한 표현인데다 이해도 안 되죠. 솔직히 저도 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
아무튼,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익히 아는 관용적 표현의 사용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점 이해해주시고, 혹시라도 문화색이나 지방색이 들어간 관용적 표현이 사용된 걸 발견하시면 알려주세요. 즉시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