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실험 결과도 신통치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의 결과와 비교한다면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원하는 수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아직 목표 수치의 60% 정도이니, 자극을 2배 더 높이면 될 것도 같다. 자극에 대한 재료의 내성도 생각보다 강한 것 같으니, 하루 이틀 정도의 추가 자극 상승은 견딜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다음번 실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수께끼였던 그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더 이상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 받고 두려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만 자고 좀 일어나지.”
아침 먹을 시간이 지나도록 시그리드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어느 샌가 이불은 머리 위까지 올라간 채 온 몸에 둘둘 감겨 있어서 꼭 무슨 애벌레 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설마 이 녀석, 깨웠더니 정말 애벌레처럼 꾸물꾸물 움직이지는 않겠지? 아니, 그건 그렇고. 어제 몇 시에 잤다고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거야? 일어나라고 흔들거나 툭툭 치면 ‘우웅’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니고, 피곤해질 일이라고는 대련뿐이었을 텐데. 이 녀석 원래 아침잠이 많았던가?
내버려두고 혼자 나가서 아침 먹는 것도 왠지 좀 그렇고 해서, 시그리드의 연구실 책장에 있는 책들을 꺼내보면서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는 내용이라도 다시 보면 느낌이 달라지니까. 그런데, 과연 어젯밤에 느껴졌던 그 이상한 기운은 무슨 연구에서 생겨난 걸까. 탑에 설치된 영력 차단막조차 완전히 막지 못할 정도라면 상당한 수준을 넘어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탑에서 누가 어떤 연구를 하는지 기록하는 것도 아니니,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연구 재료와 물품으로 찾아보려고 해도, 마법 분야에서는 수상해 보이는 것들이 넘쳐나니 그걸로 찾아볼 수도 없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쯤 되자, 느릿느릿 시그리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일어나기 전에 몸에 말린 이불 때문에 이리저리 굴러다녀야만 했고, 그 모습이 왠지 재미있어서 그냥 쳐다만 봤다. 이불에서 빠져나온 시그리드는 당연히 곱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늦잠 잔 사람한테 원망 받을 이유는 없지.
“잘 잤어?”
“…잘 자긴 했는데, 좀 깨워주면 안 돼? 벌써 점심시간이잖아.”
“지금 너한테는 식사보다 수면이 더 중요할 것 같아서. 어제도 이맘때까지 계속 잤던 것 같은데?”
“말했잖아, 어제는 날 밝을 무렵이 돼서야 잠들었다고. 그러니 실제로 잠잔 시간은 6시간 정도였단 말이야.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잖아. 잠도 너무 많이 자면 오히려 몸에 안 좋다고.”
“그거 늦잠꾸러기들이 항상 하는 변명의 발전형 같은데?”
내 말 한마디에 시그리드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유야 어쨌든 늦잠을 잔 건 사실이니 부인할 수는 없겠지. 그건 그렇고, 아침을 걸렀을 테니 많이 배고프겠네. 뭣 좀 만들어줄까.
“배고플 텐데, 뭐 먹을래?”
“요리해주게?”
우와, 갑자기 초롱초롱해지는 저 눈빛, 의식적으로 억누르고는 있지만 헤실헤실 풀려가는 입 근육. 엉덩이에 꼬리라도 꽂아놓으면 엄청난 기세로 흔들릴 듯한 느낌인걸. 어제도 느낀 거지만, 이 녀석은 다른 사람이 해주는 요리라면 무조건 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스파게티는 어제 저녁에 먹었으니 연속해서 먹기에는 좀 그렇고, 뭐 먹고 싶은 거 따로 있어?”
“음……, 혹시 오믈렛라이스라는 요리 알아?”
어머나? 오믈렛라이스를 알아? 별일이네, 이쪽 동네에서는 잘 모를 텐데.
“잘 알지, 좋아하는 요리이기도 하고. 그걸로 해줄게.”
“와아, 고마워. 역시 여행 다닌 곳이 많아서 그런지 할 줄 아는 요리도 많네.”
“…기껏해야 스파게티랑 오믈렛라이스 두 가지거든, 어제부터 쳐도? 그나저나, 오믈렛라이스를 만들려면 쌀하고 달걀이 필수인데…… 감자랑 당근 같은 채소류는 어제 있는 거 봤고, 고기도 아직 남아있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시그리드는 비행 판자를 들고 연구실 문을 나섰다. 정말 배가 고프긴 꽤나 고픈 모양이다, 저렇게 서둘러서 나가는 걸 보면. …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세수도 안 했잖아. 게다가 저 녀석이 서두르는 통에 나도 어젯밤의 그 기운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깜빡 잊었고. 뭐, 식사하면서 얘기해도 별로 상관없으니까 괜찮겠지. 아직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느긋하게 요리 준비를 하고 잠시 기다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뭔가 싶어 쳐다보니, 머리가 산발이 된 시그리드가 달걀과 쌀을 손에 든 채 들어오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빨리 날아다녔으면 머리가 저 모양이 된 거야?
“자, 여기!”
“…수고했어, 이제 세수하고 머리 좀 빗어.”
웬 마법사가 머리를 산발하고 눈에 눈곱이 낀 채 들이닥쳐 달걀과 쌀을 사러 왔다고 했을 때 과연 식료품점 주인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도 안 가거니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시그리드, 탑의 체면은 네가 있는 대로 다 깎아내리는 것 같다. 애초에 마법사란 사람들이 남의 평판에 그다지 신경 안 쓰는 사람들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막 행동해도 되는 건지 심히 걱정스럽다.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요리를 하고 있자니, 어느 샌가 말쑥해진 시그리드가 부엌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앉아서 기다리라고.”
“그건 아는데, 냄새가 너무 좋아서.”
…배가 고프긴 어지간히 고픈가 보다. 요리를 하는 중에도 등 뒤에서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이 느껴지고, 흘끗 돌아보면 시그리드가 내 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오믈렛라이스겠지만, 누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면 눈이 안 마주치더라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이 기분 나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1초라도 빨리 요리를 완성해야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오믈렛라이스입니다.”
“오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릇이 탁자에 놓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수저를 들고 ‘달려드는’ 시그리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냥감을 포착하고 덮치는 맹수였다. 거기다 숨도 안 쉬고 엄청난 기세로 먹고 있어……. 아니나 다를까, 목이 막혀서 컥컥대기에 얼른 물을 건네줬다.
“후아, 고마워. 그런데 세연은 안 먹어?”
“여기 있잖아. 그건 그렇고, 오믈렛라이스는 어디서 알게 된 거야? 좀처럼 보기 힘든 요리일 텐데.”
시그리드의 질문에 내 앞에 놓인 오믈렛라이스를 한번 가리켜 보이고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분명히 오믈렛라이스가 흔한 음식은 아니고, 내 기억으로는 이 도시에 그 요리를 해주는 가게는 없었다.
“아, 작년까지만 해도 있었어. 그런데 다른 곳에 사는 딸이 같이 살자고 부른다면서 가게 정리하고 떠났거든.”
“호오, 그랬구나. 단골이었나 보네.”
“뭐, 그렇지. 위치가 바로 탑 앞이었거든. 멀리 나갈 필요 없어서 좋았어.”
…그러면 그렇지. 마법사들이 귀찮은 걸 싫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속성이고, 때문에 탑 근방에 있는 음식점은 당연히 매상이 좋다. 게다가 마법사들이 요리를 잘 할 리도 없고, 설령 요리를 잘 하는 마법사라고 해도 준비나 설거지가 귀찮아서 나가서 먹게 된다. 한술 더 떠, 마법사들은 음식의 맛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거의 매번 식사를 밖에서 해결한다고 해도, 돌아다니기가 귀찮다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적당 적당히 주문해서 먹으니 어느 집이 요리를 잘하고 어느 집은 어떤 요리가 특기인지 알 리가 없다. 아마도 주인이 딸에게 갔다는 그 가게는 오믈렛라이스라는 독특한 메뉴 때문에 기억에 남았던 거겠지.
“그래서, 그 집 요리는 맛있었어?”
“글쎄? 메뉴는 오믈렛라이스 딱 하나였고, 양은 대략 1.5인분, 가격은 0.7인분 정도라서 애용했지.”
“…….”
=================================================================================================== 이걸로 다시 비축분 Zero 입니다. (...) 대충 10편 정도에서 챕터1이 끝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좀더 늘어나거나, 각 편의 분량이 좀 늘어날 수도 있겠군요. 이번 편은 쓰다보니 이전에 올린 부분과 어긋나는 부분이 발생, 그 부분 해결하느라 진땀 뺐습니다 --;
듣자하니 코드 기아스(다들 코드 기어스라고 하시는데, 영제가 Code Geass이므로 코드 기아스가 맞습니다.)가 22화에 엄청난 전개로 나가버리는 통에 완전 파국 예감이라고 하더군요. 뭐, 아예 보질 않으니 어찌 되든 상관은 없습니다. -_-a 슈발리에는 주말 감상으로 미뤄졌고, 요새는 타입문넷에서 죠죠의 기묘한 모험 5부를 보고 있습니다.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은근히 팬이 많은 게 이해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