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7월 하순, IS 스쿨은 1학기 기말 시험을 끝내고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IS 관련 교육이 우선인 IS 스쿨의 특성상 이번 기말 시험에서도 일반 과목들은 대충 대충 넘어갔고, IS 관련 과목들만 상당히 학생들을 굴려먹었다. 게다가 한 학기 동안의 성과를 최종 확인한다는 점 때문에 이번에는 낙제점을 받은 사람들이 제법 나왔고 재시험에서마저 탈락한 학생들은 여름방학인데도 귀가(혹은 귀국)하지 못하고 교실에서 이른바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시우는 전과목에서 아슬아슬하게 낙제점을 넘기는 결과를 받아서 지금은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참이었다.
임해학교가 중단되어 돌아오고 다음주에 바로 일주일간 기말시험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으로부터 아직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물론 시험이라는 것 때문에 한동안은 그 때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렇게 한가한 상황이 되면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사건이 싫어도 떠오르는 것이 사람이었다. 몸서리쳐지는 그 기억들을 저편으로 밀어놓기 위해 시우는 은황을 불렀다.

"그런데 은황."

[네, 시우.]

"그 원 오프 어빌리티 말인데, 정확하게 어떤 효과가 있는 거야?"

[물리적으로 접촉한 상대 기체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입니다. 현재도 에너지 바이패스는 장갑 전체에 연결되어 있으며 원 오프 어빌리티 비활성화 시에는 마찬가지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어빌리티가 활성화되면 에너지 바이패스도 개방되어 장갑과 접촉한 상대에게서 에너지를 흡수합니다.]

"그러면 실드와 접촉하는 건 무효겠군."

[네. 상대와 직접 접촉해야만 합니다.]

"상대의 무장과 접촉하는 건? 본체에서 직접 무장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형태도 있잖아."

[말씀하신 경우라면 무장과 접촉해도 에너지 흡수가 가능합니다만, 그 경우 임의로 무장을 파기할 수 있기에 권장할만한 방법은 아닙니다. 또한 실탄형 무장의 경우 본체와 에너지 바이패스가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상대 기체의 에너지 흡수가 불가능합니다. 최대활용을 원하신다면 상대와 직접 접촉해야 합니다.]

"흐음... 손목이나 발목을 잡는 정도로도 돼? 스러스터를 붙잡는 건?"

[모두 가능합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것 참 쓰기 미묘한 능력이네."

[확실히 사용하기에는 부담이 많은 어빌리티입니다.]

은황의 근거리 무장이 충실하긴 하지만 시우의 주 전법은 분명히 원거리 사격전이었고, 실제로 시우는 접근전보다는 거리를 벌린 후 라이플로 사격하는 방식에서 더 안정감을 느꼈다. 게다가 접근전이 벌어지면 사격전 때와는 달리 생각과 몸이 따로 놀았고, 때때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때도 있었다. 임해학교에서, 해안가에서 홀리 저지먼트와 접근전을 벌였던 때처럼.

"......"

또 다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우는 자기도 모르게 그 상황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PCS를 발동할 때까지만 해도, 아니 적어도 그 상태에서 홀리 저지먼트에게 돌격할 때까지만 해도 시우는 상대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치고) 행동불능으로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접근전을 벌이던 도중, 시우는 무의식중에 자신이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몇번이나 미간, 목, 정수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삭풍도를 그 직전에야 간신히 비틀어 동체장갑을 두들겼던 것이다. 2주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우는 그때 그 생각만 하면 식은땀이 나고 소름이 끼쳤다.

"...머리나 좀 식히고 와야겠다."

더이상 그 생각을 했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시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머리를 비우려는 생각이었다. 외출 허가를 받고 교무실을 나오는 시우의 눈에 후지노와 스칼렛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 슈짱 안녕~"

"그래, 안녕."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후지노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는 스칼렛의 모습을 보며 시우는 저 둘은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라? 그러고보니 얘들은 집에 안 돌아가나? 후지노는 일본인이니 그렇다 쳐도 스칼렛은 미국이니 한번쯤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교무실에는 무슨 일이야? 혹시 귀국?"

"아니, 그건 아니야. 잠깐 나갔다 오려고 외출 허가 받았어."

"오오, 우리도 그러려고 온 건데. 그럼 같이 가자. 잠깐만 기다려. 금방 허가 받고 나올게."

"뭐? 자, 잠깐."

멋대로 동행을 결정하고 들어가려는 후지노와 스칼렛을 시우는 당황해서 불러 세웠다. 전의 경험을 되살려보건대 저 둘과 함께 나가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MAX에 도달할 것 같았다. 둘을 붙잡은 시우는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나 좀 봐주라. 방에 있기는 답답하고 바람 쐬러 나가는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혼자선 심심하잖아. 그러니까 같이 다니자."

"아니, 좀 봐주세요. 혼자 있고 싶다니까요?"

"하지만 이상하잖아. 혼자 있고 싶으면 왜 밖에 나가는 건데?"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후지노를 마주 보며 시우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유치한 표현이라도 써야 할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고독을 곱씹고 싶다는 거야."

"뭐야, 그게. 하드보일드 흉내?"

"대충 그런 거라고 이해해줘. 그럼 난 갈게. 둘이서 시간 잘 보내."

"잠깐, 시우?!"

말을 마친 시우가 그대로 교무실 앞을 떠나자 후지노가 붙잡으려 했지만, 스칼렛이 말려서 후지노도 더 시우를 부르지는 못했다. 몇마디 얘기를 나눴을 뿐인데 시우는 벌써 지친 느낌이었다.




"C-02, 아담이 에덴에서 나왔다. 수행(隨行)을 개시한다."

- HQ. 알았다. 경계레벨 D로 상향조정. 곧 01, 03, 04를 보내겠다. 놓치지 않도록 하라.

"라저. 수행 개시."




거리로 나온 시우는 아무 생각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길을 잃거나 할 정도로 정처없이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고 여차하면 은황의 도움을 받으면 되니 별 문제는 없었다. 서점에도 가보고, 게임 센터에도 가보고, 상점가도 돌아다녀 보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쉬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귀교 시간까지 2시간 정도인가... 은황, 여기서 학교까지 어느 정도 걸릴까?"

[1시간이면 도착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렇구나. 그러면 여기서 좀 앉아있다 가자."

[시우가 원하시는 대로.]

벤치에 앉은 시우는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낮도 길고 하늘이 맑아서 그런지 아직까지 햇살이 뜨거웠지만 이따금 바람이 불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벤치에 앉은 채 시우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원작에서는 학급 대항전에서 미등록 코어의 IS가 난입했지. 그 후에 학년별 토너먼트에서 라우라의 슈바르체어 레겐이 VT 시스템을 가동하는 일이 있었고, 임해학교에서는 실버리오 고스펠이 폭주했고... 하지만 매번 이치카의 영락백야 덕분에 큰 사고 없이 수습됐어. 하지만 여기선... 영락백야도 없고, 뱌쿠시키도 이치카도, 치후유도 없어. 타바네는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고... 그러고보면 실버리오 고스펠의 폭주는 타바네가 손을 쓴 것 같았는데, 여기선 어떻게 된 건지... 원작에서는 아카츠바키의 데뷔 무대를 만든답시고 타바네가 사고를 친 거였지만 여기선 호키도 없잖아? 그런데 대체 누가?'

거기까지 생각한 시우는 자신이 한가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토너먼트에 난입한 적기는 IS조차 아니었다는 사실을.

'...은황.'

'네, 시우.'

'한달쯤 전에 있었던 학년별 토너먼트 때 난입했던 그 무인기, IS가 아니라고 했지?'

'네. 절대로 IS는 아닙니다.'

'...그걸 만든 사람들이 이번 실버리오 고스펠 사건도 일으켰을 가능성... 어때?'

'가능성은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까지 수집된 정보에서 무인기 난입과 실버리오 고스펠 폭주를 연관지을 수 있는 물리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IS에 대한 적대 행동, 또는 IS에 대한 불신감 조성이 목적이라면 그 두 사건을 일으킨 측이 동일한 곳일 가능성은 상당히 높습니다.'

"하아... 정말이지, 혼란스러운 건 딱 질색인데 말이지. 좀 마음 편하게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거냐구."

시우는 몸을 뒤로 한껏 젖힌 채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달도 안 되어 큼지막한 사건이 두개나 터지고, 그게 결코 좋은 의도에서 벌인 일이 아니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내 생활 모토가 '케 세라 세라(Que sers sers)'라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어이, 거기 농간 부리고 있는 누군가 씨. 듣고 있어?"

'누구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혼잣말이야. 신경쓰지 마.'

은황의 말에 시우는 푸념을 늘어놓던 것도 그만 두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젖혔던 몸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대로 있으면 계속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시우는 이제 돌아가기로 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시우는 스쿨을 나설 때부터 느껴진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감각을 또 느꼈고, 지긋지긋하다는 심정으로 은황을 통해 한번 확인해보기로 했다. 단순한 착각이라고 확인되면 그것으로 좋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은황, 혹시 주변에 계속 날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도 있어?'

'반경 500m 내에 시우가 자리를 옮길 때 함께 이동하는 사람들이 4명 있습니다. 스쿨을 나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동하기 시작했고, 코어 반응은 없습니다.'

자신이 과민반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한번 물어본 것에 대한 은황의 대답은 완전히 의외의 내용이었고, 시우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굳히며 걷는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걸음이 갑자기 느려지면 오히려 의심을 살 거라고 생각한 시우는 다시 평소처럼걷기 시작했지만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위치는? 거리는?'

'시우의 좌측 전후방, 우측 전후방에 각각 1명씩 있습니다. 거리는 모두 300m 내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은황의 말에 시우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장하며 은황이 말한 방향을 보았지만 누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 (눈치챘나? ...아니, 그냥 시선이 향했을 뿐인가. 다행이군.)"

- HQ. C-04, 보고하라.

"C-04, 순조롭게 수행중. 아담은 계속 이동중이다."

- 알았다. 아담이 에덴으로 돌아갈 때까지 경계레벨 유지할 것. 임무 속행하라.

"라저. 임무 속행한다."




"안 보이네... 역시 찾아내는 건 안 되려나."

은황이 말한 감시자들을 찾으려고 둘러보던 시우는 결국 포기했다. 애초에 지금까지 자신의 눈을 속이고 따라 다녔다면 그렇게 쉽게 발견될 리도 없었다. 대신 시우는 은황에게 따져 묻기로 했다.

'은황, 혹시 예전에 외출했을 때에도 이랬어?'

'시우가 외출할 때에는 항상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이 최소 4명 있었습니다.'

최소라는 표현을 썼다는 말은 더 많을 때도 있었다는 뜻이지만 시우는 많을 때 몇명이었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거야?'

'우선 시우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왠지 그 대답 나올 것 같았어.'

'그리고, 그들로부터 적대행동은 탐지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시우를 따라 이동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얘기는 내가 밖에 나올 때마다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문제라고!'

'시우에게 위해가 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 때는 제가 시우를 지킵니다. 저는 오직 시우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은황의 말을 들은 시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반쯤 화풀이로 은황을 추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은황은 받아친다는 생각도 없었고, 자신의 의사를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시우, 심박과 맥박의 비정상적 상승을 확인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아무리 해가 없다고 해도 이건 기분 문제라고. 프라이버시 침해란 말이야. 물질적인 피해만 피해가 아니라고.'

'즉, 자신의 행위를 의도치 않게 노출했다는 점이 거슬린다는 뜻입니까?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노출되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꼭 도와줘.'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은황의 대답을 들으며 시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유사시에는 은황의 힘을 빌리면 될 테지만 누군가에게 감시, 혹은 관찰되고 있다는 것은 결코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스쿨로 돌아가고 싶었다.




스쿨로 돌아온 시우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던 중 사브리나와 마주쳤고, 사브리나는 시우를 보자마자 다가오더니 따져 묻듯이 말했다.

"아, 시우.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냥 바람 좀 쐬러 나갔다 왔는데... 그런데 왜?"

"나가면 나간다고 방 앞에 써붙이기라도 하든가. 노크해도 반응도 없고, 교내에 있나 해서 다 돌아봤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고."

"노크 해서 반응 없으면 없든가 자든가 바쁘든가 셋 중 하나잖아... 아니, 그런데 진짜 왜 그러는데?"

"시우 너, 한국에 돌아갈 거지? 언제 갈 거야?"

"다음 다음주에 갈 생각인데... 갑자기 그건 왜?"

"확실하지? 일정 바뀌는 건 아니지?"

"어... 그럴 것 같은데."

사브리나가 추궁하듯 묻자 시우는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대답했고, 사브리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난 다음주에 돌아올 테니까 한국에 같이 가자. 표는 내것 포함해서 세장 더 예약해놓고."

"뭐? 한국에는 왜 가려고? 아니, 다른 것보다 왜 내가 표를 준비해야 하는 거야? 거기다 왜 또 세장인데?"

"어머, 그러면 에스코트하는 사람이 그런 것도 안 해줄 생각이었어?"

"자기 멋대로 따라오는데 무슨 에스코트냐. 그리고 왜 세장이냐고?"

"어, 어쨌든. 그럼 약속했다. 나중에 봐~."

"야, 사브리나! ...하아, 완전히 불도저구만."

사브리나는 시우가 불러세우기도 전에 복도 저편으로 모습을 감췄고, 시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방으로 향했다. 저녁 자유시간이나 내일 사브리나에게 다시 얘기해볼 생각이었지만, 저녁에는 사브리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 사브리나의 방으로 찾아갔을 때, 시우는 자신이 한방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브리나의 룸 메이트에게서 사브리나는 어제 저녁 비행기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덧붙이자면 스쿨로 돌아오는 것은 다음주 토요일이라고 했다. 시우는 다음 다음주 월요일 비행기로 한국에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사브리나에게 상황을 묻고 표를 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하아, 정말 철두철미하다고 해야할지... 이거 꼼짝없이 준비해야 하게 생겼네."

시우는 투덜거리며 자금 사정을 확인했다. 앞으로 약 2주 동안 한푼도 안 쓴다면 어찌어찌 해서 4명의 편도 비행기 표(물론 이코노미 클래스)값은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세가 처량하다고 느낀 시우는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공식 발표는 없네. 뭐, 솔직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런 일을 대놓고 발표할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니까."

"그렇기야 하겠지. 사고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자기들 얼굴에 먹칠하는 꼴인데 그걸 동네방네 떠들어서야 정치놀음할 자격도 없지."

"그건 그렇고, 저쪽은 뒤처리하느라 바쁜 모양이더군. 미국이 꽤나 끈질기게 쫓고 있는 모양이야."

"당연하잖아. 아무래도 최신 병기를 테스트 도중에, 그것도 자기네 안마당에서 대낮에 크래킹 당해서 폭주 사고가 일어났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하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들 물건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그러고보니 그렇네. 완성은... 한달쯤 남았나?"

"예정대로라면."

"이거에 한해서는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




"세장 더 구해두라는 게 이런 뜻이었냐..."

7월 30일 월요일 아침, 사브리나와 함께 출발하기로 한 시우가 약속장소인 교문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교문 앞에 이미 '세명'이 먼저 와 있었다. 사브리나와 리자, 나알리아였다.

"어머, 이런 미소녀들이 함께 가주겠다는데 불만이야?"

시우의 맥빠진 느낌의 말을 들은 사브리나는 허리에 손을 짚고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 확실히 세명 다 미소녀 축에 들어가는 미모이긴 했지만, 이렇게 본인이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기분이 참 묘했다. 시우는 무의식중에 '예전'에 읽었던 만화책 등장인물을 떠올렸다. 자기 외모를 잘 써먹을 줄 알지만 하는 행동은 소악마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어쩐지 얄밉지만 싫지는 않은 캐릭터였다.

"아니... 그건 됐어. 그런데 말이야, 일단 다 간다 치고, 도착한 다음에 너희들 숙박은 어디서 할 거야? 혹시 한국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는데?"

"아니."

"없어."

차례대로 사브리나, 리자, 나알리아의 대답. 세명의 대답을 들은 시우는 머리를 감싸쥐고 싶어졌다. 여학생 세명을 여관에서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호텔에서 재우기에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시우의 표정을 보고 대강 짐작했는지, 리자가 걱정말라며 말했다.

"뭘 그렇게 고민을 해. 숙소는 이미 다 정해놨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 그런데 아는 사람은 없다며?"

"최근에 한명 생겼으니까."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리자의 모습을 보며 시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고, 마찬가지로 웃고 있는(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브리나와 어쩐지 눈을 피하는 나알리아의 모습을 보며 반쯤 확신했다.

"...우리 집?"

"응."

"즉답입니까?!"

"달리 갈 데도 없는걸."

"그러면 따라올 생각을 하지 말든가! 아니, 애초에 왜 같이 가려는 건데?"

시우의 물음에 셋은 얼굴을 마주보더니 다시 시우를 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호흡이었다.

"""상견례?"""

"그건 또 뭔 소린데!! 아니, 그리고 상견례라는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거야?!"

"한국에서는 결혼할 상대 집안과 만나는 일을 상견례라고 한다던데, 아니야?"

"맞긴 한데 갑자기 여기서 상견례 소리가 왜 나오냐고! 아, 잠깐. 그리고 상견례는 엄밀히 말하면 결혼할 사람들이 부모님을 동반해서 만나는 자리를 일컫는 말이야."

리자의 말에 발끈하던 시우는 자기도 모르게 리자의 어긋난 인식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세명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주제를 되돌렸다.

"그러니까 농담하지 말고. 어디서 잘 건데?"

"그러니까, 시우네 집이라니까?"

"...재워주고 싶어도 우선 방이 없어. 집도 넓지 않은 데다가 누나 방하고 내 방이 전부라고. 한명까진 어떻게 된다 쳐도 세명은 무리야."

결국 다른 곳에 보내는 것은 시우도 포기했다. 외국인 여학생들을 무작정 내치는 것도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30평도 안 되는 집에서 다섯명이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말똥말똥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자와 사브리나, 나알리아를 보며 시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고, 그럭저럭 결론을 하나 낼 수 있었다.

"두명이 방 하나에서 자는 건 상관없지? 참고로 말하자면 침대없는 방을 쓰게 될 수도 있어."

"난 상관없어."

"저번에 임해학교에서도 맨바닥에 담요 깔고 잤는데 뭘."

"나도 괜찮아."

"그래... 그럼 나중에 두말하기 없기다. 하아... 일단 출발하자. 이러다 비행기 시간에 늦을라."

출발도 하기 전에 기력을 반 넘게 소모한 것 같은 기분으로 시우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왼손 약지의 은황에서 위로하는 듯한 따스한 기운이 느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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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입니다. 그냥 하루에 한편씩 후다닥 올려버리고 끝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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