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바다다!"

"해변이다!"

"와아아~ 벌써부터 두근두근 거리네."

"준비도 다 됐고, 오늘은 신나게 놀아보자!"

터널을 빠져나온 버스 창문 너머로 바닷가가 보이자 여학생들은 잔뜩 들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사키는 머리를 한손으로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이 녀석들아, 몇번이나 말했지만 우리는 놀러온 게 아니다. 교육의 일환이란 말이다. 일단 첫날은 자유시간이다만 어디까지나 수업의 연장이라는 걸 잊지 마라."

"""""네에~."""""

대답은 했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못박혀 있었고, 사키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선생님."

"너라도 알아주니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만, 내 두통을 늘리는 원인 중 하나는 너이기도 하다. 한시우."

"네? 제가 뭘 어쨌는데요?"

"바로 그 태도가 문제라는 거다, 이 녀석아... 배려하는 듯 안 하는 듯 하니 종잡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저기, 저 원래 그런 건 둔하니까 알아듣게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됐다.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조금만 더 상대방을 신경써 주란 뜻이다."

사키의 말에 시우는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고, 사키는 그 모습에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시우의 태도는 성실한 학생 그 자체였고 여학생들을 대하는 자세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예상 이상으로 배려해주는 모습과 아무렇지도 않게 도움을 주는 모습, 거기다 자신의 행동이 당연하다는 마음가짐 덕에 여학생들의 호감도는 날이 갈수록 오르고 있는 반면 시우 자신의 자각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관리자 입장인 사키로서는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내렸나? 짐 빠트린 건 없는지 제대로 확인해라."

"""""네~."""""

"지금 너희들이 보고 있는 이곳이 오늘부터 사흘간 신세를 지게 될 카게츠장(花月裝)이다. 들뜬 건 이해한다만 부디 학생답게 행동하고 주의를 기울여라. 방 배치도는 다 받았겠지?"

"""""네~."""""

"점심 식사는 12시 30분 부터 1시간, 저녁 식사 시간은 7시부터 1시간이다. 늦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으니 기억해두도록."

"""""네~."""""

"혹시...라고 해도 분명히 다들 가겠지. 바다에 갈 사람은 별관에 탈의실이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갈아입고 가도록. 별관 탈의실에서 바다로도 갈 수 있고 온천으로도 갈 수 있다. 안내문에 다 적혀 있지? 모르겠으면 종업원들에게 물어보도록."

"""""네~."""""

무슨 말을 해도 생글생글 웃으며 재잘재잘 거리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뭔가 다른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사키는 뒤에서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던 여성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관 주인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올해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학생은..."

"아, 잠시만요. 한시우!"

"? 네."

"짐 들고 앞으로 나와라."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사키의 목소리에 시우는 자기 자리에서 대답했고, 사키는 시우를 앞으로 불러냈다. 대열 앞으로 나온 시우를 본 여관 주인은 여전히 편안한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아아, 이 학생이로군요. 착실한 느낌이네요."

"그 때문이랄까 오히려 더 피곤하게 만드는 녀석입니다만. 그럼 이 녀석 방 안내부터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따라오시겠어요?"

"에에, 시우만 안내해주는 거에요?"

"차별이다!"

"우리도 안내해 주세요."

"방 배치도에 시우 방이 안 나와있다 했더니 이래서 였구나..."

"그런데 어차피 물어보면 알려줄 테니 별로 상관없잖아?"

뒤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우는 여관 주인을 따라 들어갔고, 여주인은 몇번 복도를 돌고 나서 어떤 방 앞에 서더니 문을 열었다.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리고 온천 이용은 선생님들과 상의를 했는데, 아무래도 저녁 이후에, 10시 쯤에나 가능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여학생들이 많아서..."

"신경쓰지 마세요. 자기 전에 간단하게 씻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저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보단 낫죠."

시우의 대답을 들은 여주인은 시우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방금 전까지 지어보이던 미소와는 약간 느낌이 다른, 어쩐지 인자해보이는 느낌의 미소였다.

"상냥하시네요."

"그런가요? 그냥 귀찮아지는 게 싫은 것 뿐인데."

"어쩐지 야마모토 선생님 말씀을 이해할 것 같아요. 그럼 편히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이 돌아가자 시우는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갈아입을 속옷과 수영복, 한가할 때 방에서 읽을 책 한두권 정도가 전부였다. 몇분만에 짐 정리를 끝낸 시우는 방을 둘러보고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기숙사의 푹신하고 포근한 침대와는 다른, 딱딱하고 시원한 느낌도 기분 좋았다.

"아무래도 역시 난 침대보다는 방바닥 체질이란 말이야... 그건 그렇고, 왜 인솔 교사를 우리 선생님이 하는 거지? 보통 이럴 때에는 가장 앞 반의 담임이 인솔교사 하지 않던가?"

"지난 주 사건 수습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연 것은 사키였고, 시우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되물었다.

"지난 주라면, 그거요?"

"그래, 그거."

"그런데 그거 수습하고 A, B반 선생님들하고 무슨..."

"A반 담임은 아레나 관리 총괄을 맡고 있고 B반 담임은 교내 전산망 담당이거든. 덕분에 지난번 사태에 제대로 한방 먹은 거지. 지금쯤 아마 땀 뻘뻘 흘리며 업그레이드 중일 거다."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쩐 일이세요?"

"교사는 학생이 묵는 방에 와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아뇨, 그건 아니지만."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원작의 내용을 한번 되새겨보았다. 원작에서는 분명히 이치카와 치후유가 같은 방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둘이 교사와 학생 이전에 남매였으니 그나마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과 사키는 완전히 남남이니 같은 방을 쓸 리는 없었고, 실제로 사키는 자신의 짐을 가져오지 않은 듯했다.

"몇마디 주의만 주려고 온 거니까 신경쓰지 마라. 바로 옆이 내 방이고 그 옆으로 다른 교사들 방이니까 너무 소란피우지 마라."

"애초에 방 혼자 쓰는데 소란이란 게 일어날 리가 없지 않나요?"

자신의 말을 들은 시우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사키는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작게 내저었다. 어쩐지 누군가에 대한 연민마저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할지, 애들이 불쌍하다 해야할지... 됐다. 오늘은 자유행동이니 쉬어라."

사키가 문을 닫고 나간 후에도 시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은황은 시우에게 핑크빛 시절이 오려면 한참은 지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 그건 그렇고, 바다엘 갈까 말까... 여기까지 왔는데 안 가는 것도 좀 그렇고. 아, 맞다. 은황?"

[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바닷물이나 그런 거에 닿아도 괜찮아? 염분 때문에 안 좋다든가..."

그렇게 물어보며 시우는 원작의 상황을 한번 더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라우라는 허벅지에 있던 검은색 레그 밴드(슈바르체어 레겐의 대기 상태)를 하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원작에서도 하고 있었던가? 애니판에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 같긴 한데.'

[문제 없습니다. 대기 상태의 IS는 기본적인 생활에서 발생하는 충격이나 오염 가능성에 대해 100%에 가까운 저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0톤 이상의 압력 또는 충격, 2000℃ 이상의 온도에는 피해를 입습니다만 일상생활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하므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기 상태에도 어마어마한 방어력이네... 썩어도 준치라 이건가?"

[...의도는 알겠지만 생선에 비유하지 말아주십시오.]

"아, 미안. 기분 나빴어?"

[좋지는 않았습니다.]

"미안해. 앞으로 신경쓸게. 자, 그러면 바다에 한번 가 볼까... 금방 돌아오더라도 기왕지사 온 김에 한번쯤 가보긴 해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시우는 짐을 뒤적거리며 수영복을 꺼내서 갈아입기 시작했다.




"날씨 좋다~."

"물도 느낌 좋은데."

"자, 들어와, 들어와."

"아, 시우다."

여학생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갈아입고 벌써 반 이상 해변에 모여 있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여학생들이었지만 시우가 왔다는 말을 듣자 모두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개방된 장소에서 갑자기 무수한 시선에 노출된 시우는 당황해버렸다.

"호오, 생각보다 몸매 좋네."

"그건 IS 슈트 차림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근데 의외다. 복근이 있는걸?"

"그러게. 평소 분위기를 봐서는 어쩐지 안 어울리기도 해."

"그래도 배가 나온 것보다는 낫잖아?"

"그거야 당연하고."

속으로 괜히 온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우는 해변을 슥 둘러보았다. 비치 파라솔을 가져와서 그 아래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고, 물에 들어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해변에서 여러가지 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시우는 마땅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오긴 했는데 막상 할 것도 없고 있을 곳도 마땅찮네. 괜히 나왔나?'

"시우, 여기야, 여기."

그냥 돌아갈 생각까지 하고 있던 시우의 귀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쪽을 바라보자 파라솔의 그늘 밑에 앉아있는 리자와 사브리나, 나알리아가 보였다. 세명이 모두 다른 반인데 이런 곳에서 함께 있다니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시우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향했다. 발바닥에 닿는 모래들은 햇볕을 받아 뜨거웠다.

"여기서 다들 뭐해?"

"잠깐, 만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니? 그 전에 해야할 말이 있는 거 아니야?"

사브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곧게 폈고, 그 덕에 특정 부위가 강조되어 보였다. 나알리아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어쩔 줄 몰라 했고, 리자는 그냥 웃으면서-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압박감이 느껴지는 미소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시우는 세명이 입고 있는 수영복에 눈을 돌렸다.(제대로 말하자면 아까는 너무 바라보면 실례라는 생각에 자세히 보는 걸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사브리나는 노란색에 검은색 레이스가 붙은 비키니 수영복이었고, 나알리아는 새하얀 색, 리자는 머리카락과 맞춘 듯한 붉은색 수영복이었다.

"응... 다들 예쁘네. 잘 어울려."

시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고, 사브리나와 리자는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더이상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제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생각하던 시우는 나알리아가 손목에 회색 팔찌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나알리아, 며칠 전에 전용기 받았다면서? 축하해."

"응, 고마워."

시우는 교내에 퍼진 소문으로 나알리아가 전용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그 후에 나알리아를 직접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듣기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한달 전에 새로운 코어를 활성화시키는데 성공했고, 한달 동안 나알리아의 기본 신체 정보를 입력하고 프레임을 구성한 후에 지난 월요일에 나알리아에게 전달되었다고 했다.

"스쿨 졸업하면 국가대표는 따놓은 당상이겠네. 축하해."

"그러는 시우도 마찬가지 아니야?"

"응? 아니, 나는 아닐걸. 그보다는 내쪽은 여러가지 테스트 대상이 될 것 같은데."

"테스트 대상이라니?"

"일단은 유일하게 IS를 움직일 수 있는 남자니까. 여러모로 특이 케이스이니 연구대상 아니겠어? 지금이야 스쿨 학칙에 외부에서 관여 못한다는 게 있으니 다행이지만... 솔직히 졸업하면 무슨 꼴을 당할지 조금 걱정이야."

시우의 말을 들은 세명은 그렇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시우는 존재 자체가 특이 케이스였던 것이다. 지금은 IS 스쿨에 재학중이니 별 말이 없지만, 학생 신분을 벗어난 순간 엄청난 관심이 집중될 것이 뻔했다. 사회적 관심과 과학적 관심 모두. 어느쪽 관심이든 사생활은 물건너 갔다고 봐도 좋을 것이고, 때로는 -연구 등으로 인해-안전까지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우리나라로 귀화하지 않을래?"

"...어딜 가든 마찬가지일 거라고 보는데."

리자의 말에 시우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바로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리자는 잠시 생각해보고는 이해한 듯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브리나가 지나가는 투로 중얼거렸다.

"과학자나 연구원이라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강하니까. 어느 나라에서나 시우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을 거야. 차라리 자유국적증이라도 취득해보는 건 어때?"

"그게 무슨 애들 장난감이냐, 갖고 싶으면 갖게?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에 했을걸."

"하긴 그러네. 그건 그렇고, 시우. 부탁 좀 하나 해도 될까?"

"별로 상관없는데. 뭔데?"

"선 오일 좀 발라줘."

사브리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일 병을 집어들어서 시우에게 내밀었고, 시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손잡는 정도라면 별로 신경 안 쓰고 하지만 그 외의 신체접촉은 최대한 피하는 시우를 당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완전히 당황해버린 시우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나 그런 거 발라준 적도 없고, 아니 무엇보다 나 남자라고?"

"응, 알고 있어. 그러니까 발라달라고 하는 거야."

"아니... 제발 내 생각도 좀 해주라..."

결국 반쯤 울상이 되어버린 시우를 보다못한 리자가 오일 병을 받아들었다. 사브리나는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시우를 보고는 잠자코 엎드렸고, 리자는 오일을 발라주며 사브리나에게 속삭였다.

"재미있어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적당히 해. 시우 쟤, 은근히 여리다구."

"그래서 더 재미있잖아. 그리고 100% 장난은 아니었는걸?"

그렇게 대답하는 사브리나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말했던 대로 장난기로만 가득한 눈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너희들은 잠도 없냐!"

사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시우의 방문을 열어젖혔고,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기분을 좀 가라앉히고 말했다.

"하여간 도대체가... 지금 시간이 몇시인 줄 아냐. 1시가 넘었다, 1시가. 스쿨 기숙사였으면 취침시간이 지나도 진작에 지났을 시간이란 말이다. 제때 안 자면 내일...도 아니라 이제 오늘이군. 아무튼 일정에 쫓겨 피곤해지는 건 너희들이란 말이다. 자, 자. 얼른 방으로 돌아가서 자라."

"에~ 선생님 너무해요."

"그래요. 모처럼 놀러왔는데 이 정도는 좀 봐주세요."

"그러지 말고 선생님도 같이 하실래요?"

"오, 그거 재미있겠다. 같이 해요, 같이."

사키의 말을 들은 여학생들은 불평하던 것도 잠시, 이내 기력을 회복해서는 이제는 사키마저 끼어들여 놀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여학생들 건너편에서 사키를 마주 보던 시우는 곤란한 웃음을 띤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어쩐지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사키가 폭발했다.

"시끄럽다! 돌아가서 자라면 자! 남녀칠세 부동석도 모르냐!"

"언젯적 이야기에요, 그건?!"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선생님!"

"독재 타도! 자유를 달라!"

"오호라...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문득 시우의 눈에 사키의 이마 한구석에 혈관이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입꼬리도 한쪽만 올라간 표정은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좋아, 앞으로 30초 여유를 주겠다. 그때까지 시우 이외에 이 방에 남은 사람이 있다면 기상 직후, 아침 점심 저녁 식사 후, 취침 직전, 총 5번을 해변 왕복 달리기 30회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횡포다!"

"너무해!"

"25초 남았다. 그렇게 말할 여유가 있나?"

사키가 섬뜩해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여학생들은 다급해졌다. 방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게임말과 카드, 보드를 서둘러 게임 박스에 쓸어담고는 앞다퉈 방에서 나갔고, 몇초 후 시우의 방은 방금 전까지 북적댔다는 것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휑해 보였다.

"그러니 시우 너도 냉큼 자라. 일어나서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사키는 그렇게 말한 다음 문을 닫았고, 이부자리를 깔려고 일어서던 시우는 잔뜩 어질러져 있는 방안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자, 다들 모였나? 같은 방 쓰는 사람들 중에 빠진 사람은 없겠지?"

자기 전에 잔뜩 윽박 질러놓은 덕분인지 어떤지, 아침 집합에 늦게 나온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빠짐없이 집합한 것을 확인한 사키는 자신의 뒤편에 준비되어 있는 IS와 추가장비, 분석 장치들을 둘러보고는 다시 말했다.

"일정표를 봤다면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IS의 추가장비 시험운용, 그리고 그 데이터 수집이 예정되어 있다. 오늘 수집된 데이터를 활용해서 너희들의 전법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어떤 장비와 가장 상성이 좋은지를 판단하게 되니 다들 진지하게 임하도록. 자, 그럼 지금부터 각자 조별로 정해진 위치에 모여서 테스트를 실시한다. 흩어져."

사키의 말이 끝나자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꺼번에 자신의 조가 있을 자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꽤나 소란스럽고 복잡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었고, 사키의 앞에는 시우와 리자, 사브리나, 나알리아만 남아있었다. 전용기 보유자들은 별도로 테스트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자, 너희들은 이쪽이다. 전용기는 스쿨 소유가 아니다보니 우리쪽에서 함부로 추가장비를 제공하기도 그렇고, 기체와의 매칭 문제도 있어서 너희들 기체는 각자 본국에서 직접 사람들이 왔다."

"본국에서요?"

사키를 따라 걸어가던 시우는 그렇게 되물었고, 사키는 슬쩍 뒤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리고 시우 너한테는 꽤 반가운 사람이 와 있다."

그렇게 말하며 사키가 일행을 데려간 장소에는 네 팀의 IS 관리팀들이 각자 장비 장착과 데이터 분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우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시우의 누나 한시영이었다.

"누나!"

시우의 말에 함께 온 리자와 사브리나, 나알리아는 시영과 시우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시영은 고개를 들더니 시우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사키는 시우가 멋대로 소리친 것에 대해서 주의를 줄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났으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각자 모국의 팀으로 가서 시작해라."

사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우는 한국의 IS 관리팀에게로 달려갔고, 시영도 천천히 걸어나왔다. 시영의 몇걸음 앞에서 멈춰선 시우는 밝은 얼굴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누나. 누나가 올 줄은 몰랐는데."

"아, 은황 개발에는 나도 참여했으니까. 그리고 선생님한테 은황의 세컨드 폼 정보 확인하러 온다는 얘기 못 들었니?"

"응? 그 얘기 듣긴 했는데... 그래도 설마 누나가 올 줄은 몰랐지. 그것도 오늘 같은 날에."

"기왕이면 어차피 테스트를 해야 하는 날에 와서 확인하는 편이 일도 이중으로 할 필요없고 좋으니까."

"야, 시우. 네 누나만 찾고 우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냐?"

"이거 서운한데. 우리는 너하고 은황 보려고 여기까지 장비들 갖고 왔는데 말이야."

"아, 미안해요. 방인철 연구원님하고 조현준 연구원님도 오랜만에 뵙네요. ...그런데 혹시 방인철 연구원님, 살 찌셨어요?"

"..."

"오, 눈썰미 좋은데? 안 그래도 지금 댁에서 사모님하고 수영이한테 다이어트 하라고 쪼이는 중이랜다."

"역시?"

"그만 해, 이 녀석들아! 일 하자, 일!"

인철의 반응에 시우와 시영, 현준은 웃으면서 준비를 시작했다.




시영의 팀은 우선 은황을 전개시킨 다음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동안 세컨드 폼까지 진행되며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기에 데이터 전송도, 분석도 생각보다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흐음, 이렇게 진행됐나... 지금까지 봐왔던 녀석들과는 조금 다른걸."

"역시 파일럿이 남자라서 그런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여기서는 알아내기 어렵겠어. 외형 변화도 변화지만 본래 없던 무장까지 추가가 됐군. 게다가 에너지 관리 프로그램까지 변경될 줄이야... 음?"

"왜 그러세요?"

"야, 현준아. PCS, 네가 만든 거였지?"

"그럼요,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인걸요."

"그것도 변경됐는데? 와서 좀 봐라."

"어, 그래요? 어디 보자... 어라, 정말이네. ...우와? 이거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잖아! 프로그램 짜다 짜다 도저히 스피드와 무장 출력 둘 다는 못 하겠어서 하나만 했던 건데 이젠 둘 다 되는 거야?! 최고다!"

"원래는 그렇게 만들려던 거였냐..."

인철은 진절머리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고, 시우와 시영은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직후 시우의 눈에 시영이 조정 중인 은색의 장비가 들어왔다.

"그런데 누나, 그건 뭐야?"

"아, 이거? 은황의 새 무장이야."

"새로운 무장?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던데? 구미호만 있어도 거의 모든 거리에 대응할 수 있고."

시우의 말을 들은 시영은 웃으면서 은황에게서 나온 데이터에 맞춰 무장을 계속 조정했다.

"은황의 무장은 지금 삭풍도와 암 블레이드를 제외하면 모두 에너지 장비지?"

"어... 응, 그런데."

"은황에게 장착된 에너지 무장의 장점은 모두 소모한 다음에도 시간이 지나면 충전이 된다는 점이야. 하지만 그 충전이 단점이 될 수도 있어. 에너지가 바닥난 다음에는 일정 시간이 지나야만 다시 쓸 수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럴 때를 대비해서 암 머신건이 있잖아."

"암 머신건은 다가오는 적에게는 효과적이겠지만, 원거리에서 아군을 원호하는 상황에서 쓸모있는 물건은 아니지?"

"그건 그렇지."

"하지만 실탄계 무장은 탄환이 바닥나도 탄창만 교체해주면 즉시 쏠 수 있어. 단점은 탄환의 수량에 제한이 있다는 점이지만, IS의 확장영역을 활용하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지."

"그렇구나. 그러면 그걸 들고 시험사격을 해보면 되는 거구나."

"그렇긴 한데, 그 전에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구미호를 전개해서 이 앞에 내려놔 줄래?"

"어? 응, 알았어."

시우가 구미호를 새 무장의 옆에 내려놓자 시영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구미호의 각부분 덮개를 열고는 새 무장을 손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영의 손에 새로운 무장이 하나 하나 분해되기 시작했다. 시우는 당황해서 시영에게 질문했다.

"누, 누나? 뭐하는 거야? 그거 시험사격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아, 내가 깜빡하고 설명을 안 했구나. 이거 구미호의 또다른 변형 모드 중 하나가 될 거야. 실탄형 어설트 라이플 모드."

"따로 장비하는 게 아니었어?"

"응. 그런 의견도 나오긴 했는데, 복잡하게 무장 여러개 바꿔가며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구미호의 변형 모드 중 하나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와서."

"나중에 정비할 때 죽어나지 않을까...?"

모름지기 변형 능력을 가진 물건들은 구조 자체가 변형하지 않는 것들보다 약하게 설계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구미호는 IS가 들고 사용하는 무기이고, 형태가 한두개도 아니고 4개였는데 거기에 하나를 추가하고 있으니 나중에 오버홀이라도 하게 된다면 정비 담당들은 비명을 질러댈 게 뻔했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IS용 무장은 IS가 자신의 무장으로 인식하고 최적화만 끝마치면 대기 상태일 때 기체를 자체 정비, 자가 수복할 때 함께 진행하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고보니 그렇겠네. 그나저나 이제 진짜로 하울링 런처가 되는 느낌인데..."

"응? 뭐라고? 미안, 못 들었어."

"아니야, 신경쓰지 마. 혼잣말이었어."

"잠깐, 한시우. 이거 뭐냐?"

시영과 시우의 대화가 대충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번에는 현준이 데이터 분석 장비의 휴대용 스크린을 들고 오며 말했다. 시우는 왜 그러나 싶어 현준이 내미는 화면을 보았지만 프로그램에 문외한인 시우로서는 화면의 내용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조현준 연구원님. 이거 봐도 뭔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이거 말이야. 이거."

현준이 가리킨 것은 은황의 날짜별 데이터 변화 추이 그래프였고, 처음에는 완만하게 상승하던 그래프가 언젠가를 기점으로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그 날짜를 자세히 본 시우는 그 때가 은황에 쌍방향 뇌파 감응 프로그램을 설치한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날짜에 뭔가 일어날 게 없거든. 퍼스트 시프트가 된 것도 아니고, 세컨드 시프트는 더 나중인데 이 날부터 갑자기 데이터 변화가 폭증했어. 왜 그런지 넌 알고 있지?"

"네, 그게 실은..."

"잠시 주목!"

시우가 설명하려던 찰나, 사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시우의 눈에 들어온 사키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잔뜩 굳어있었고, 그 곁에는 임해학교에 함께 온 다른 교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지금 이순간부터 IS 스쿨의 교사들은 특수임무를 수행한다. 진행중이던 테스트들은 모두 중지하고, 학생들은 숙소로 돌아가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숙소 내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괜찮지만 절대 밖으로는 나오지 마라. 전용기 보유자들은 남아있고. 이상. 서둘러!"

의문을 품을 여지도 없이 재빠르게 내려진 지시와 독촉에 학생들은 뭐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고, 우치가네와 라팔 리바이브를 비롯, 테스트 가동을 위해 준비했던 모든 물품들이 숙소와 차량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사키는 시우와 전용기 보유자들이 있는 쪽, 정확히는 전용기의 관리 팀들을 향해서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도 죄송하지만 오늘 데이터 확인은 이만 중지해주셔야겠습니다. 전용기 보유자들도 임무에 필요합니다. 임무 성격상 더 이상 설명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각국에서 온 관리 팀들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사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은황의 구미호도 새로운 변형 장비의 장착이 끝났기에 한국 팀도 철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장비를 옮기는 시영을 보며 시우가 작게 말했다.

"저기, 누나."

"괜찮아. 큰일 아닐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선생님들도 있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으, 응..."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전화 꼭 하렴."

그렇게 말하며 시영은 인철, 현준과 함께 장비를 가지고 해변을 떠났고, 시우는 시영이 사라진 방향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 뒤로 다가온 사키는 시우의 정수리를 톡 하고 가볍게 치며 말했다.

"그렇게 시스콘 티를 내고 싶냐."

"네? 시스콘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됐다, 이 녀석. 왠지 네가 여자아이들에게 별로 관심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보다 따라와라.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할 말을 마친 사키는 성큼성큼 걸어나갔고, 뭐라고 반박하려던 시우는 기회를 놓치고 잠자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뒤따르기 시작한 리자와 나알리아, 사브리나의 표정은 상당히 묘했다.




숙소의 가장 안쪽, 대연회를 위해 마련된 다다미 방은 지금 임시로 IS 스쿨 교사들의 브리핑 룸이 되어 있었다. 빛을 가로막아 어두워진 방 한가운데에는 영상 투영장치가 준비되어 어떤 모습을 투영해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가 눈에 띄는 백색의 IS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시간 전, 하와이 근해에서 필드 테스트 중이던 미국의 3세대 군용 IS '홀리 저지먼트(Holy Judgement)'가 폭주를 개시, 미군의 저지를 뚫고 이탈했다. 위성 탐색 결과 현재 초음속 비행중이며, 방향은 서북서. 앞으로 약 1시간 후에 이곳 근해에 도달한다."

거기까지 말한 사키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방에 모인 사람들은 교사진 전원, 학생 중에서는 전용기를 보유한 시우 일행뿐이었다.

"시간 상으로나 무엇으로 보나 현재 이곳에 있는 우리가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고, 스쿨 상부에서도 그렇게 판단했다. 따라서 현재 이곳에 있는 교사들 중 IS를 보유한 교사는 전원 출격, 비보유자는 이곳에서 전황을 분석, 서포트한다. 그리고 전용기 보유자들은 현장 서포트 및 실전 경험 차원에서 동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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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실버리오 가스펠 사건 시기입니다만, 애초에 설정과 기본 스토리 라인만 따온 물건이라서 아예 다른 기체로 대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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