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력 444년 3월 25일.
레니핀 괴수 섬멸작전 발동. 작전 목적은 영식 피어와 루시퍼의 유인 및 여왕괴수 S-81의 격파. 기사단 120명을 10명씩 수송함에 분산 탑승시킨 다음, 수송함 네척을 중심으로 총 3개 분함대를 구성하여 S-81의 둥지 인근에 착륙한다. 3개 분함대의 대기권 돌입을 위해 AE 함대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둥지를 중심으로 반경 500km의 위성궤도에 존재하는 방어용 괴수를 격파, 또는 견제.
알파 분함대는 둥지 남쪽 100km, 베타 분함대는 30분의 시간차를 두고 둥지 북쪽 50km, 감마 분함대는 다시 30분의 시간차를 두고 둥지 상공에 바로 돌입. 영식과 마주치면 맞닥뜨린 팀은 둥지 파괴 및 여왕 격파에서 영식의 격파 혹은 견제로 임무 변경, 영식을 쓰러트리지 못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상이 작전명 '트라이던트'의 개요였다. 사실 작전이라고 부르기에는 엉성하기 그지없고, 실현가능성을 말하라면 입안자조차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런 작전이었다. 무엇보다 괴수의 방공망을 뚫지 못하면 시도조차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인류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레니핀 행성계는 피어시나이트 최대 생산지이고, 피어시나이트가 없으면 AB소드는 물론이고 각종 최신무기들에 필요한 부속들의 공급에도 큰 차질이 생긴다. 레니핀을 되찾지 못하면 단순히 행성계 하나를 넘겨주는데 끝나지 않고 인류 전체의 존망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이 점이 막대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레니핀을 탈환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지금도 프레이야가 탄 수송함의 스크린에는 최전선에서 괴수의 방공망을 뚫기 위해 쉴새없이 포화를 퍼붓는 AE 함대의 전함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현재 날짜는 3월 27일. 트라이던트 작전은 이미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있었다.
"아..."
스크린에 투영되던 AE 전함 중 또 한척이 괴수의 포격을 맞고 기우뚱 거렸다. 피탄한 곳이 동력로나 탄약고 같은 위험구역은 아니어서 당장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항행능력과 교전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확실했다. 브릿지 구획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제어을 잃은 AE 함은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또다른 AE 함과 부딪혔고, 잠시 후 두척 모두 또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두번째 함은 외부장갑 일부만 손상되었는지 곧 자세를 바로잡고 포격을 재개했지만, 첫번째 함은 포격 진형의 중심부로 떠내려갔다. 그대로 두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 판단했는지, 그보다 후방에 위치하고 있던 전함들이 포신을 일부 돌려 첫번째 함을 겨누고 발사했다.
"...제길."
전위에 생긴 구멍을 메우기 위해, 조금 뒤편에서 포격을 날리던 한 척이 전진해 자리를 잡았다. 포격은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었고 프레이야의 초조함 역시 더해갔지만 지금은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돌파구가 생길지, 그 돌파구로 무사히 돌입할 수 있을지, 영식과 상위괴수 무리를 뚫고 여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그리고 앤과 A-10의 생사마저도.
"네?! 그럴 리가 없어요!"
기사단 총동원령이 떨어진 직후, 프레이야는 중앙기사단 교육부 총장실로 쳐들어가 마일로에게 앤과 A-10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게 없는지 물어보았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불안해서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일로의 말을 듣고 프레이야는 차라리 묻지 말걸 하고 후회하게 되었다.
"믿든 말든 상관없다만, 거짓말은 아니야. 둘이 살던 파리나스 시(市)는 레니핀이 고립되기 전에 이미 괴수의 영향권에 들어갔어. 게다가 자밀기관과 차밀드 기관이 레니핀을 뒤덮기 전에 이미 앤과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고. 마음을 비워두는 게 좋을 거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프레이야는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려다 억지로 삼켰다. 자신이 말했다간 정말 사실이 될 것 같아 불안해진 것이다. 하지만 마일로는 가차없었다.
"사람은 언젠간 죽어. 게다가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죽어나가지.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냐."
"그런 건...!"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라고 외치려던 프레이야는 이어진 마일로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출동 준비나 확실히 해둬라. 가서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야. 활동 가능한 기사들은 전원 레니핀으로 출동이다."
현재 기사단의 총원은 약 800명. 그 중에서 임무 수행중이거나 부상으로 요양중, 단장처럼 중책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략 100명 조금 넘는 인원이 출동 가능했다. 그 인원을 행성 하나에 전부 투입한다는 것은 벨치스 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70년 사이에 벨치스 전이나 E-34 사건 같은 일이 없었다면 투입 가능한 인원은 두배 가까이 되었을 테지만, 이미 일어난 일과 그 결과에 한탄해봐야 어쩔 수 없었다.
"작전의 상세 개요와 개별 임무는 곧 하달될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라. 몸 상태 최상으로 만들어두는 거 잊지 말고."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방이 막히고 통로 단 하나만이 뚫려있는 공간. 창문조차 없어 빛 한줄기 들어오는 일 없는 그 공간은, 하지만 어째서인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천장에서 밝은 빛이 비춰지고 있어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면적으로 치면 축구장 절반 정도 되는, 제법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인간을 닮은, 하지만 결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좌대를 닮은 구조물 위에 앉은 채 등부분에 연결된 수많은 케이블같은 기관들을 통해 괴수들과 플랜트를 통제하고 있는 그것은 여왕괴수, S-81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있던 S-81은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살며시 눈을 떴고, 막 둥지 안으로 들어온 괴수 하나를 보았다. 백색의 공포, 피어였다.
피어는 S-81의 좌대 앞까지 다가오더니 마치 인간처럼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고, S-81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피어는 몸을 일으킨 다음 좌대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 원기둥형 구조물 중 하나로 다가갔다. 불투명한 유리같은 재질의 구조물에는 이따금 기포가 떠오르는 것을 보아 액체가 채워져 있는 것 같았고, 그 액체들 속에는 인간의 모습을 닮은 무언가가 잠겨 있었다.
피어는 액체에 잠긴 물체를 잠시 응시하다가 좌대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피어의 앞에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수조가 세워져 있었는데, 차이가 있다면 액체에 담겨진 인영(人影)이 피어의 앞에 있는 것보다 더 크다는 점이었다. 반대쪽 수조를 바라보던 피어가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그 때, 인영이 갑자기 진동하더니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것을 직접 본 피어는 물론, 케이블로 모든 정보를 직접 전달받고 있는 S-81도 고개를 돌려 의식을 집중했다. 잠시 후, 구조물에서 액체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인영이 바닥에 발을 디뎠다.
3월 29일, 드디어 괴수들의 위성궤도 방위선에 구멍이 뚫렸다. 돌입로가 확보되자 AE 함대는 한층 더 화력을 끌어올려 돌입로를 유지하며 3개 분함대의 대기권 강하를 엄호했고, 각 분함대는 빗발치는 포화를 피하고 받아내며 지상으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호위함 네일러스 피탄! 강하 시퀀스에는 지장 없음!"
"호위함 타르디아 격침! 수송함 질레인 피탄! 강하 자체는 지속하고 있습니다!"
"수송함 페일런 피탄! 겨, 격침!"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난 후, 알파 분함대는 호위함의 1/3과 수송함 한척을 잃고 지상에 내려설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하 완료는 작전의 끝이 아니었고, 오히려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분함대가 강하한 장소는 전함 포격이라면 둥지도 노릴 수 있는 장소였고, 괴수들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알파 분함대의 수송함에 탑승하고 있던 기사들은 AB 소드를 꺼내들며 서로를 마주 봤다. 작전은 기사들이 둥지를 노리고 돌진하여 여왕을 쓰러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그러자면 몰려드는 양산형 괴수들은 AE 지상군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양산형 괴수들을 기사들이 일일이 상대하다간 둥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서 정작 상대해야할 상위괴수들에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여왕이 쓰러지면 괴수들 간의 네트워크가 붕괴하며 제대로 된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격퇴가 쉬워진다는 점이었다. 지상군의 방패막이가 먼저 끝날지, 여왕이 먼저 쓰러질지의 시간 승부였다.
구웅 하는 진동음과 함께 수송함의 해치가 열리기 시작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레니핀의 대지는 이미 황량하게 변해있었고, 저편에서 괴수 무리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접근해오고 있었다. 테디베어 타입은 이미 지상군과 교전에 들어가 있었다.
"...좋아, 가자!"
이동 및 호위를 맡은 AE 소대 차량과 함께, 기사들이 둥지를 향해 출진했다.
알파 분함대가 강하에 성공하고 약 한시간 후, 감마 분함대도 둥지 상공까지 돌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작전 성공은 딱 거기까지였다. 둥지 상공의 고도 50km 지점에서부터 가해진 괴수들의 집중 대공 요격으로 호위함 세척과 수송함 한척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게다가 계속되는 대공 포화를 피하면서 내려오다보니 감마 팀의 강하 위치는 둥지에서 약 10km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기의 영식 중 하나가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알파 팀은 순조롭게 전진 중이지만 이동 속도가 예상의 70%. 베타 팀은 현재 영식 피어와 조우, 교전 중입니다. 피어가 끌고 온 괴수 무리 때문에 전진은 현재 거의 멈춘 상태. 영식 루시퍼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젠장,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구만."
단장급 중에서 유일하게 이번 작전에 참가한, 감마 팀의 리더를 맡은 다니엘은 부관의 보고에 얼굴을 찡그렸다. 알파 팀이 전진 중이라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착지 지점이 둥지에서 100km나 떨어진 곳인데다 이동 속도도 크게 떨어져서 도움은 바라지 않는 편이 좋았다. 베타 팀은 피어 때문에 발이 묶여 있으니 결국 둥지 공략은 사실상 감마 팀 단독으로 실행해야만 했다.
"하, 좋아. 까짓거 잘못되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 어디 한번 괴수들 피로 샤워 좀 해보자! 해치 열어!"
지시대로 해치가 열리며 2/3쯤 개방되었을 때, 다니엘은 아직 내려가고 있는 도중인 해치를 밟고 수송함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둘러 뒤따라 나오는 기사들 앞에서, 다니엘은 몰려드는 괴수 무리를 향해 AB 소드를 휘둘렀다.
레온하르트 고검류(古劍流), 주광기(朱光技) 염풍(炎風).
AB소드가 휘둘러진 궤도를 따라, 불을 휘감은 바람이 전방을 향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처음엔 선(線)에 가깝던 불의 바람은 전진하면서 두께를 늘려, 첫번째 괴수를 휘감을 때 쯤에는 높이 2m에 달하는 불꽃의 벽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불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검게 타 바스라진 괴수의 잔해 십여 기가 널브러져 있었지만 다니엘은 불만족스러운 듯 혀를 찼다.
"칫, 눈치가 빠른 놈들이군. 사거리가 넓지 않다는 걸 알고 물러섰나."
"단장님!"
"무모합니다! 이럴 때 단독 행동은..."
"나와서 무사하고, 무사하게 나왔으면 됐잖아. 그보다 정신차려. 골치아프게 생겼다. 이 놈들 영악해."
다니엘은 수송함에서 나온 다른 기사들의 외침을 반쯤 무시하면서도 지금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다니엘의 말과 눈앞의 상황을 조합해본 기사들은 표정을 굳히며 자세를 잡았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둥지까지 접근하는 건 예상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야 없지... 돌격!"
베타 팀은 문자 그대로 지옥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니, 구경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지옥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신세였다.
사실 강하를 완료할 때까지만 해도 베타 팀은 가장 성공적인 진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위함 손실은 단 두척, 수송함은 모두 무사히 착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20여분 후, 피어가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아악!"
"길버트! 이런 제길!"
"마이요, 엎드려!"
마스터 나이트 5명이 포함된 총 40명의 기사라면 아무리 못해도 피어와 동수를 이룰 수 있고, 좀더 객관적으로 보면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피어가 가동시기 14년에 달하는 경험 많은 괴수라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것도 고려하여 투입한 인원이기에 큰 변수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괴수들의 대응 방식이 문제였다.
"크헉!"
"라우디! 젠장, 왜 저 녀석이 여기 있는 거야?!"
"빌어먹을. 블루 비틀 행세냐, 저 자식!"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착실히 피어와 괴수들을 밀어붙이고 있던 베타 팀과 AE 지상군은 잠시 후 뜻밖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행방이 묘연했던 루시퍼가 갑자기 나타나 피어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거리에서 퍼부어진 입자빔 연속 공격에 의해 지상군은 사실상 전멸했고, 살아남은 군인들과 기사들은 1:1 전력에서도, 총 전력에서도 완전히 밀리게 되어 궁지에 빠졌다.
"...안 좋은데. 우리가 죽는 건 둘째치고, 이렇게 되면 계획이 완전히 뒤틀려."
베타 팀의 리더인 페릴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트라이던트 작전은 2기의 영식이 각각 따로 행동하는 것을 전제로 수립된 것이었다. 2개 팀이 영식 둘을 각각 상대하면서 발을 묶는 동안 나머지 한 팀이 둥지를 공략한다는 작전. 하지만 피어와 루시퍼가 함께 행동한다면 시간을 끄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3개 팀이 시간차를 두고 각개격파 당한다는 최악의 전개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운이 좋다면 마지막 팀이 둥지에 닿는 게 빠를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잖아?"
"...그래, 정해져 있지. 괜시리 머리 굴릴 필요 없나."
동료인 밀레이드의 응수에 페릴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피어와 루시퍼가 재차 공격준비를 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감마 팀에 속한 프레이야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다니엘을 지휘를 받으며 둥지로 접근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후방지원을 하면서 앤과 A-10을 찾고 싶었지만, 승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사를 후방으로 돌릴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프레이야가 앤을 찾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여왕을 쓰러트려야만 했다.
"핫!"
"차앗!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힘내!"
다니엘의 외침에 프레이야는 고개를 들었고, 둥지가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로 둥지에 접근했다는 것조차 신경쓸 수 없을 정도로 괴수들의 저항은 극심했다. 둥지에서 고개를 돌리던 프레이야는 다니엘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서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괴수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처음 감마 분함대 수송함에서 다니엘이 프레이야를 보았을 때, 반응이 참 대단했다. 1) 갑자기 몸을 경직시키더니 2) AB소드에 손을 얹고 3) 초상능력을 발현 직전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다니엘이 왜 그러는지 알 리가 없는 프레이야는 당연히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고─다만 검은 잡지 않았어도 만약을 대비해 기공은 끌어올렸고─, 한동안 그런 프레이야를 노려보던 다니엘은 무언가에 납득했는지 서서히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는 지나가면서 이런 말을 넌지시 건넸다.
"기대해보마, 꼬맹이."
다니엘은 프레이야를 보고는 순간적으로 프레이로 착각하고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프레이가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고도 전혀 착각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프레이야의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다르자 자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몇분 후에야 '프레이를 꼭 닮은 신참 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무리도 아닌 것이, 얘기는 들었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만난 것은 수송함에서 마주친 게 처음이었다.
프레이야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상급자에게 살기 섞인 위협을 받았다가 기대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얼떨떨했지만, 그래도 인정받았다는 점은 기분 좋았다. 다니엘도 프레이야가 작전에 참가한 기사들 중 제법 실력이 좋은 편에 들어간다는 걸 감지하고는 믿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함께 싸우고 있는 지금, 신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활약하는 프레이야의 모습을 보며 다니엘은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삐빗--
계속해서 괴수들을 베어넘기며 둥지로 접근하는 감마 팀 기사들의 고글이 일제히 경고음을 발했다. 새로운 상위괴수, 노심출력은 B클래스, 유전자 타입은────────
"해석 불가?!"
"뭐야, 이건? 새로운 타입이라도 출현했다는 거야?"
"다들 진정해! 분석 내용에는 신경 끄고 출현 위치만 신경 써!"
다니엘의 외침에 기사들 중 몇몇이 고글이 표시한 괴수의 위치, 둥지쪽 상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기사들을 향해 떨어져내려오고 있었다.
"저, 저 녀석! 그대로 내리꽂힐 생각인가!"
"피해! 흩어져라!"
"후방, 물러서! 상위괴수가 낙하해온다!"
기사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면서 괴수들의 추격에 대비했지만, 어째선지 괴수들은 추격해오기는커녕 간격을 벌리고 있었다. 그런 괴수들의 행동에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굉음과 진동을 동반하며 상위괴수가 떨어져 내려왔다. 낙하하면서 피어오른 흙먼지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기사들은 새로 나타난 상위괴수를 노려보았고, 기사들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괴수들은 새로 나타난 상위괴수의 뒤편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먼지가 걷히며 상위괴수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지에 가린 새로운 괴수의 실루엣은 피어와 비슷했고, 실제로 가장 먼저 먼지 밖으로 드러난 오른손은 여타 인간형 괴수들과 다를 바 없는 형태였다. 그래서 기사들은 이 상위괴수가 새로운 영식일 것이라고, 방금 전 고글의 유전자 패턴 분석 실패는 그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으며 드러난 괴수의 모습은 모두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뭐하자는 거야, 지금?"
"말도 안 돼..."
"이런 수준까지 발전한 거냐, 괴수 놈들...!"
"이젠 이런 짓까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기사에게서 빼앗은 듯한 DC코트. 손에 들고 있는 것 역시 기사에게서 빼앗은 AB 소드 두자루. 바람에 흔들리는 긴 갈색 머리카락과, 얼굴에 착용하고 있는 안경. 팔꿈치 바로 아래에서부터 괴수의 것으로 대체되어 있는 오른팔.
그리고, 양손에서 발현되고 있는 청색과 적색의 파동.(靑赤波)
"앤!"
과거 영식 크로스아이와 여왕 E-34를 쓰러트렸던 기사 앤 마이어가, 이제는 괴수의 편에 서서 기사들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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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질러버렸습니다 (...)
여왕 S-81에 의해 괴수로 반쯤 개조된 앤이 등장했습니다. 저번 화에서 피어에게 납치된 다음 오른팔의 기계 의수를 떼어내고 괴수 팔을 이식, 그리고 체내에 노심을 집어넣은 거죠. 그 덕분에 적파뿐만 아니라 청파까지 사용가능해진, 말하자면 완전체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물론 의료용 나노머신까지 제거한 건 아니라서 적파를 쓸 때마다 몸이 망가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미 반쯤 괴수인지라...
...그런데 제가 저질러놓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번의 영식 둘도 그렇고 (...)
사실 초기구상부터 앤이 괴수화되는 아이디어는 이미 있었습니다. 다만 최종보스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였는데... 글쎄요...
아, 다니엘은 이번화 쓰면서 급하게 추가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14년이나 지났는데 못해도 동부 단장은 되어 있겠죠. 드라이는... 원로원? -_-a
그럼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레니핀 괴수 섬멸작전 발동. 작전 목적은 영식 피어와 루시퍼의 유인 및 여왕괴수 S-81의 격파. 기사단 120명을 10명씩 수송함에 분산 탑승시킨 다음, 수송함 네척을 중심으로 총 3개 분함대를 구성하여 S-81의 둥지 인근에 착륙한다. 3개 분함대의 대기권 돌입을 위해 AE 함대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둥지를 중심으로 반경 500km의 위성궤도에 존재하는 방어용 괴수를 격파, 또는 견제.
알파 분함대는 둥지 남쪽 100km, 베타 분함대는 30분의 시간차를 두고 둥지 북쪽 50km, 감마 분함대는 다시 30분의 시간차를 두고 둥지 상공에 바로 돌입. 영식과 마주치면 맞닥뜨린 팀은 둥지 파괴 및 여왕 격파에서 영식의 격파 혹은 견제로 임무 변경, 영식을 쓰러트리지 못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상이 작전명 '트라이던트'의 개요였다. 사실 작전이라고 부르기에는 엉성하기 그지없고, 실현가능성을 말하라면 입안자조차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런 작전이었다. 무엇보다 괴수의 방공망을 뚫지 못하면 시도조차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인류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레니핀 행성계는 피어시나이트 최대 생산지이고, 피어시나이트가 없으면 AB소드는 물론이고 각종 최신무기들에 필요한 부속들의 공급에도 큰 차질이 생긴다. 레니핀을 되찾지 못하면 단순히 행성계 하나를 넘겨주는데 끝나지 않고 인류 전체의 존망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이 점이 막대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레니핀을 탈환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지금도 프레이야가 탄 수송함의 스크린에는 최전선에서 괴수의 방공망을 뚫기 위해 쉴새없이 포화를 퍼붓는 AE 함대의 전함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현재 날짜는 3월 27일. 트라이던트 작전은 이미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있었다.
"아..."
스크린에 투영되던 AE 전함 중 또 한척이 괴수의 포격을 맞고 기우뚱 거렸다. 피탄한 곳이 동력로나 탄약고 같은 위험구역은 아니어서 당장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항행능력과 교전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확실했다. 브릿지 구획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제어을 잃은 AE 함은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또다른 AE 함과 부딪혔고, 잠시 후 두척 모두 또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두번째 함은 외부장갑 일부만 손상되었는지 곧 자세를 바로잡고 포격을 재개했지만, 첫번째 함은 포격 진형의 중심부로 떠내려갔다. 그대로 두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 판단했는지, 그보다 후방에 위치하고 있던 전함들이 포신을 일부 돌려 첫번째 함을 겨누고 발사했다.
"...제길."
전위에 생긴 구멍을 메우기 위해, 조금 뒤편에서 포격을 날리던 한 척이 전진해 자리를 잡았다. 포격은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었고 프레이야의 초조함 역시 더해갔지만 지금은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돌파구가 생길지, 그 돌파구로 무사히 돌입할 수 있을지, 영식과 상위괴수 무리를 뚫고 여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그리고 앤과 A-10의 생사마저도.
"네?! 그럴 리가 없어요!"
기사단 총동원령이 떨어진 직후, 프레이야는 중앙기사단 교육부 총장실로 쳐들어가 마일로에게 앤과 A-10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게 없는지 물어보았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불안해서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일로의 말을 듣고 프레이야는 차라리 묻지 말걸 하고 후회하게 되었다.
"믿든 말든 상관없다만, 거짓말은 아니야. 둘이 살던 파리나스 시(市)는 레니핀이 고립되기 전에 이미 괴수의 영향권에 들어갔어. 게다가 자밀기관과 차밀드 기관이 레니핀을 뒤덮기 전에 이미 앤과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고. 마음을 비워두는 게 좋을 거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프레이야는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려다 억지로 삼켰다. 자신이 말했다간 정말 사실이 될 것 같아 불안해진 것이다. 하지만 마일로는 가차없었다.
"사람은 언젠간 죽어. 게다가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죽어나가지.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냐."
"그런 건...!"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라고 외치려던 프레이야는 이어진 마일로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출동 준비나 확실히 해둬라. 가서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야. 활동 가능한 기사들은 전원 레니핀으로 출동이다."
현재 기사단의 총원은 약 800명. 그 중에서 임무 수행중이거나 부상으로 요양중, 단장처럼 중책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략 100명 조금 넘는 인원이 출동 가능했다. 그 인원을 행성 하나에 전부 투입한다는 것은 벨치스 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70년 사이에 벨치스 전이나 E-34 사건 같은 일이 없었다면 투입 가능한 인원은 두배 가까이 되었을 테지만, 이미 일어난 일과 그 결과에 한탄해봐야 어쩔 수 없었다.
"작전의 상세 개요와 개별 임무는 곧 하달될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라. 몸 상태 최상으로 만들어두는 거 잊지 말고."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방이 막히고 통로 단 하나만이 뚫려있는 공간. 창문조차 없어 빛 한줄기 들어오는 일 없는 그 공간은, 하지만 어째서인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천장에서 밝은 빛이 비춰지고 있어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면적으로 치면 축구장 절반 정도 되는, 제법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인간을 닮은, 하지만 결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좌대를 닮은 구조물 위에 앉은 채 등부분에 연결된 수많은 케이블같은 기관들을 통해 괴수들과 플랜트를 통제하고 있는 그것은 여왕괴수, S-81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있던 S-81은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살며시 눈을 떴고, 막 둥지 안으로 들어온 괴수 하나를 보았다. 백색의 공포, 피어였다.
피어는 S-81의 좌대 앞까지 다가오더니 마치 인간처럼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고, S-81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피어는 몸을 일으킨 다음 좌대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 원기둥형 구조물 중 하나로 다가갔다. 불투명한 유리같은 재질의 구조물에는 이따금 기포가 떠오르는 것을 보아 액체가 채워져 있는 것 같았고, 그 액체들 속에는 인간의 모습을 닮은 무언가가 잠겨 있었다.
피어는 액체에 잠긴 물체를 잠시 응시하다가 좌대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피어의 앞에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수조가 세워져 있었는데, 차이가 있다면 액체에 담겨진 인영(人影)이 피어의 앞에 있는 것보다 더 크다는 점이었다. 반대쪽 수조를 바라보던 피어가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그 때, 인영이 갑자기 진동하더니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것을 직접 본 피어는 물론, 케이블로 모든 정보를 직접 전달받고 있는 S-81도 고개를 돌려 의식을 집중했다. 잠시 후, 구조물에서 액체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인영이 바닥에 발을 디뎠다.
3월 29일, 드디어 괴수들의 위성궤도 방위선에 구멍이 뚫렸다. 돌입로가 확보되자 AE 함대는 한층 더 화력을 끌어올려 돌입로를 유지하며 3개 분함대의 대기권 강하를 엄호했고, 각 분함대는 빗발치는 포화를 피하고 받아내며 지상으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호위함 네일러스 피탄! 강하 시퀀스에는 지장 없음!"
"호위함 타르디아 격침! 수송함 질레인 피탄! 강하 자체는 지속하고 있습니다!"
"수송함 페일런 피탄! 겨, 격침!"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난 후, 알파 분함대는 호위함의 1/3과 수송함 한척을 잃고 지상에 내려설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하 완료는 작전의 끝이 아니었고, 오히려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분함대가 강하한 장소는 전함 포격이라면 둥지도 노릴 수 있는 장소였고, 괴수들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알파 분함대의 수송함에 탑승하고 있던 기사들은 AB 소드를 꺼내들며 서로를 마주 봤다. 작전은 기사들이 둥지를 노리고 돌진하여 여왕을 쓰러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그러자면 몰려드는 양산형 괴수들은 AE 지상군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양산형 괴수들을 기사들이 일일이 상대하다간 둥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서 정작 상대해야할 상위괴수들에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여왕이 쓰러지면 괴수들 간의 네트워크가 붕괴하며 제대로 된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격퇴가 쉬워진다는 점이었다. 지상군의 방패막이가 먼저 끝날지, 여왕이 먼저 쓰러질지의 시간 승부였다.
구웅 하는 진동음과 함께 수송함의 해치가 열리기 시작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레니핀의 대지는 이미 황량하게 변해있었고, 저편에서 괴수 무리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접근해오고 있었다. 테디베어 타입은 이미 지상군과 교전에 들어가 있었다.
"...좋아, 가자!"
이동 및 호위를 맡은 AE 소대 차량과 함께, 기사들이 둥지를 향해 출진했다.
알파 분함대가 강하에 성공하고 약 한시간 후, 감마 분함대도 둥지 상공까지 돌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작전 성공은 딱 거기까지였다. 둥지 상공의 고도 50km 지점에서부터 가해진 괴수들의 집중 대공 요격으로 호위함 세척과 수송함 한척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게다가 계속되는 대공 포화를 피하면서 내려오다보니 감마 팀의 강하 위치는 둥지에서 약 10km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기의 영식 중 하나가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알파 팀은 순조롭게 전진 중이지만 이동 속도가 예상의 70%. 베타 팀은 현재 영식 피어와 조우, 교전 중입니다. 피어가 끌고 온 괴수 무리 때문에 전진은 현재 거의 멈춘 상태. 영식 루시퍼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젠장,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구만."
단장급 중에서 유일하게 이번 작전에 참가한, 감마 팀의 리더를 맡은 다니엘은 부관의 보고에 얼굴을 찡그렸다. 알파 팀이 전진 중이라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착지 지점이 둥지에서 100km나 떨어진 곳인데다 이동 속도도 크게 떨어져서 도움은 바라지 않는 편이 좋았다. 베타 팀은 피어 때문에 발이 묶여 있으니 결국 둥지 공략은 사실상 감마 팀 단독으로 실행해야만 했다.
"하, 좋아. 까짓거 잘못되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 어디 한번 괴수들 피로 샤워 좀 해보자! 해치 열어!"
지시대로 해치가 열리며 2/3쯤 개방되었을 때, 다니엘은 아직 내려가고 있는 도중인 해치를 밟고 수송함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둘러 뒤따라 나오는 기사들 앞에서, 다니엘은 몰려드는 괴수 무리를 향해 AB 소드를 휘둘렀다.
레온하르트 고검류(古劍流), 주광기(朱光技) 염풍(炎風).
AB소드가 휘둘러진 궤도를 따라, 불을 휘감은 바람이 전방을 향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처음엔 선(線)에 가깝던 불의 바람은 전진하면서 두께를 늘려, 첫번째 괴수를 휘감을 때 쯤에는 높이 2m에 달하는 불꽃의 벽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불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검게 타 바스라진 괴수의 잔해 십여 기가 널브러져 있었지만 다니엘은 불만족스러운 듯 혀를 찼다.
"칫, 눈치가 빠른 놈들이군. 사거리가 넓지 않다는 걸 알고 물러섰나."
"단장님!"
"무모합니다! 이럴 때 단독 행동은..."
"나와서 무사하고, 무사하게 나왔으면 됐잖아. 그보다 정신차려. 골치아프게 생겼다. 이 놈들 영악해."
다니엘은 수송함에서 나온 다른 기사들의 외침을 반쯤 무시하면서도 지금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다니엘의 말과 눈앞의 상황을 조합해본 기사들은 표정을 굳히며 자세를 잡았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둥지까지 접근하는 건 예상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야 없지... 돌격!"
베타 팀은 문자 그대로 지옥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니, 구경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지옥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신세였다.
사실 강하를 완료할 때까지만 해도 베타 팀은 가장 성공적인 진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위함 손실은 단 두척, 수송함은 모두 무사히 착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20여분 후, 피어가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아악!"
"길버트! 이런 제길!"
"마이요, 엎드려!"
마스터 나이트 5명이 포함된 총 40명의 기사라면 아무리 못해도 피어와 동수를 이룰 수 있고, 좀더 객관적으로 보면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피어가 가동시기 14년에 달하는 경험 많은 괴수라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것도 고려하여 투입한 인원이기에 큰 변수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괴수들의 대응 방식이 문제였다.
"크헉!"
"라우디! 젠장, 왜 저 녀석이 여기 있는 거야?!"
"빌어먹을. 블루 비틀 행세냐, 저 자식!"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착실히 피어와 괴수들을 밀어붙이고 있던 베타 팀과 AE 지상군은 잠시 후 뜻밖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행방이 묘연했던 루시퍼가 갑자기 나타나 피어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거리에서 퍼부어진 입자빔 연속 공격에 의해 지상군은 사실상 전멸했고, 살아남은 군인들과 기사들은 1:1 전력에서도, 총 전력에서도 완전히 밀리게 되어 궁지에 빠졌다.
"...안 좋은데. 우리가 죽는 건 둘째치고, 이렇게 되면 계획이 완전히 뒤틀려."
베타 팀의 리더인 페릴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트라이던트 작전은 2기의 영식이 각각 따로 행동하는 것을 전제로 수립된 것이었다. 2개 팀이 영식 둘을 각각 상대하면서 발을 묶는 동안 나머지 한 팀이 둥지를 공략한다는 작전. 하지만 피어와 루시퍼가 함께 행동한다면 시간을 끄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3개 팀이 시간차를 두고 각개격파 당한다는 최악의 전개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운이 좋다면 마지막 팀이 둥지에 닿는 게 빠를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잖아?"
"...그래, 정해져 있지. 괜시리 머리 굴릴 필요 없나."
동료인 밀레이드의 응수에 페릴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피어와 루시퍼가 재차 공격준비를 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감마 팀에 속한 프레이야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다니엘을 지휘를 받으며 둥지로 접근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후방지원을 하면서 앤과 A-10을 찾고 싶었지만, 승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사를 후방으로 돌릴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프레이야가 앤을 찾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여왕을 쓰러트려야만 했다.
"핫!"
"차앗!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힘내!"
다니엘의 외침에 프레이야는 고개를 들었고, 둥지가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로 둥지에 접근했다는 것조차 신경쓸 수 없을 정도로 괴수들의 저항은 극심했다. 둥지에서 고개를 돌리던 프레이야는 다니엘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서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괴수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처음 감마 분함대 수송함에서 다니엘이 프레이야를 보았을 때, 반응이 참 대단했다. 1) 갑자기 몸을 경직시키더니 2) AB소드에 손을 얹고 3) 초상능력을 발현 직전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다니엘이 왜 그러는지 알 리가 없는 프레이야는 당연히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고─다만 검은 잡지 않았어도 만약을 대비해 기공은 끌어올렸고─, 한동안 그런 프레이야를 노려보던 다니엘은 무언가에 납득했는지 서서히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는 지나가면서 이런 말을 넌지시 건넸다.
"기대해보마, 꼬맹이."
다니엘은 프레이야를 보고는 순간적으로 프레이로 착각하고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프레이가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고도 전혀 착각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프레이야의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다르자 자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몇분 후에야 '프레이를 꼭 닮은 신참 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무리도 아닌 것이, 얘기는 들었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만난 것은 수송함에서 마주친 게 처음이었다.
프레이야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상급자에게 살기 섞인 위협을 받았다가 기대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얼떨떨했지만, 그래도 인정받았다는 점은 기분 좋았다. 다니엘도 프레이야가 작전에 참가한 기사들 중 제법 실력이 좋은 편에 들어간다는 걸 감지하고는 믿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함께 싸우고 있는 지금, 신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활약하는 프레이야의 모습을 보며 다니엘은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삐빗--
계속해서 괴수들을 베어넘기며 둥지로 접근하는 감마 팀 기사들의 고글이 일제히 경고음을 발했다. 새로운 상위괴수, 노심출력은 B클래스, 유전자 타입은────────
"해석 불가?!"
"뭐야, 이건? 새로운 타입이라도 출현했다는 거야?"
"다들 진정해! 분석 내용에는 신경 끄고 출현 위치만 신경 써!"
다니엘의 외침에 기사들 중 몇몇이 고글이 표시한 괴수의 위치, 둥지쪽 상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기사들을 향해 떨어져내려오고 있었다.
"저, 저 녀석! 그대로 내리꽂힐 생각인가!"
"피해! 흩어져라!"
"후방, 물러서! 상위괴수가 낙하해온다!"
기사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면서 괴수들의 추격에 대비했지만, 어째선지 괴수들은 추격해오기는커녕 간격을 벌리고 있었다. 그런 괴수들의 행동에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굉음과 진동을 동반하며 상위괴수가 떨어져 내려왔다. 낙하하면서 피어오른 흙먼지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기사들은 새로 나타난 상위괴수를 노려보았고, 기사들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괴수들은 새로 나타난 상위괴수의 뒤편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먼지가 걷히며 상위괴수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지에 가린 새로운 괴수의 실루엣은 피어와 비슷했고, 실제로 가장 먼저 먼지 밖으로 드러난 오른손은 여타 인간형 괴수들과 다를 바 없는 형태였다. 그래서 기사들은 이 상위괴수가 새로운 영식일 것이라고, 방금 전 고글의 유전자 패턴 분석 실패는 그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으며 드러난 괴수의 모습은 모두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뭐하자는 거야, 지금?"
"말도 안 돼..."
"이런 수준까지 발전한 거냐, 괴수 놈들...!"
"이젠 이런 짓까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기사에게서 빼앗은 듯한 DC코트. 손에 들고 있는 것 역시 기사에게서 빼앗은 AB 소드 두자루. 바람에 흔들리는 긴 갈색 머리카락과, 얼굴에 착용하고 있는 안경. 팔꿈치 바로 아래에서부터 괴수의 것으로 대체되어 있는 오른팔.
그리고, 양손에서 발현되고 있는 청색과 적색의 파동.(靑赤波)
"앤!"
과거 영식 크로스아이와 여왕 E-34를 쓰러트렸던 기사 앤 마이어가, 이제는 괴수의 편에 서서 기사들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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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질러버렸습니다 (...)
여왕 S-81에 의해 괴수로 반쯤 개조된 앤이 등장했습니다. 저번 화에서 피어에게 납치된 다음 오른팔의 기계 의수를 떼어내고 괴수 팔을 이식, 그리고 체내에 노심을 집어넣은 거죠. 그 덕분에 적파뿐만 아니라 청파까지 사용가능해진, 말하자면 완전체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물론 의료용 나노머신까지 제거한 건 아니라서 적파를 쓸 때마다 몸이 망가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미 반쯤 괴수인지라...
...그런데 제가 저질러놓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번의 영식 둘도 그렇고 (...)
사실 초기구상부터 앤이 괴수화되는 아이디어는 이미 있었습니다. 다만 최종보스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였는데... 글쎄요...
아, 다니엘은 이번화 쓰면서 급하게 추가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14년이나 지났는데 못해도 동부 단장은 되어 있겠죠. 드라이는... 원로원? -_-a
그럼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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