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지원을 해줄 필요까지야 있겠소?"
"그렇다고 해도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그쪽에서 별다른 요청이 없으니까요. 당분간은 관망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 물론 출동 준비는 다 갖춰놓은 상태에서 말이죠."
우주력 444년 3월, 리아드 행성 중앙기사단 원로원 회의실.
5일 전, 레니핀 행성에 여왕괴수 S-81이 낙하한 것이 확인된 후 기사단은 비상 체제를 발동하고 임무를 받지 않은 모든 기사들을 소집해서 대기시켰다. 그만큼 기사단에서는 이번 사태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사 파견에 대한 토론은 지지부진했다.
레니핀이 현재 연합 소속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하필 왜 이 시기에 떨어져가지곤..."
"그러게 말입니다, 여러 사람 골치아프게시리."
"그렇다고 해도 괴수가 '여기 오지 마' 한다고 안 올 녀석들도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고, S-81이 어떻게 절대방어선을 넘어왔는지는 확인됐습니까?"
원로원 의원 중 한명이 한 말에, 다른 의원들도 전부 고개를 돌렸다. 사실 가장 의문인 점이 바로 그점이었던 것이다. 레니핀의 위치는 절대방어선 안쪽도 한참 안쪽으로, 통상 항행으로는 고속함이 최대속력으로 날아도 절대방어선에서 5일 거리였다. 하지만 S-81은 방어선을 넘은 것은 물론, 그 중간에 단 한번도 탐지되지 않고 레니핀에 낙하한 것이다. 만약 정말로 방어선을 돌파한 거라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레니핀 정보부와 함께 자료를 분석해봤습니다. 이 건에 대해선 협조적이더군요."
의원들의 시선을 받은 기사단 정보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리에 있는 콘솔을 조작해서 회의실 중앙에 입체 영상을 띄웠다.
"S-81이 레니핀에 낙하하기 5시간 전부터의 영상입니다. 레니핀의 정찰 위성이 촬영한 영상이죠."
영상은 오래된 화물 우주선을 비추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낡은 모델로, 당장 폐선 처리를 해야할 수준인데다 한쪽 벽면은 항해중 파손된 듯 임시로 때운 흔적까지 있었다.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속재생된 영상에서 화물선은 코스를 바꾸지 않고 레니핀에 계속 접근하더니 이윽고 대기권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입사각은 무려 90도였다. 잠시 후, 위성 영상은 대기권에 돌입하던 화물선을 따라잡으며 줌인했다. 화면 가득 들어찬 화물선은 점차 부서져나가더니 이윽고 완전히 공중분해되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날리는 파편속에서 유독 셋만이, 마치 파편속을 뚫고 나오듯 튀어나왔다. 몇초 후, 영상은 흩어진 화물선의 파편들을 놓쳤고 정보부장은 거기서 영상을 정지시켰다.
"현재 분석한 바로는, 낡은 화물선에 침투해서 승무원들을 살해하고 우주선을 빼앗은 것 같습니다. 화물선의 소속 무역사에 알아본 바로는 원래 목적지가 레니핀이었다고 하더군요. 자동항행으로 설정된 상태에서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정보부장은 화면을 잠깐 되돌려, 화물선이 파괴되고 세개의 특이한 파편이 튀어나오는 부분에서 재생을 멈췄다.
"...바로 저 셋이 여왕괴수 S-81과 호위 영식으로 판단됩니다."
"영식이라고!"
"자, 잠깐! 셋이잖은가! 그렇다면 지금 영식이 둘이나 있단 소리인가!"
"이럴 때가 아니오! 지원 요청이 있든 없든 파견해야하오!"
영식이라는 정보부장의 말에 회의실은 패닉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14년전 E-34 사건 이후 영식이 출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 기사단에는 대 영식전의 경험을 가진 기사들이 굉장히 적었던 것이다. 제로 브레이커쯤 되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은퇴해서 현역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완전히 혼란에 빠진 의원들 속에서, 의장이 일어서며 외쳤다.
"다들 조용히 하시오!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소. 지금 이 회의가 원래 기사단의 대응책을 결정하자고 모인 것 아니오? 진정들 하시고 의견을 모아봅시다. 그런데, 정보부장."
"예, 의장님."
"아까 레니핀 정보부와 함께 분석을 했다고 했는데, 그쪽 반응은 어떤가? 영식이 있다는 건 레니핀에서도 이제 알고 있을 텐데."
"짐작은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S-81이 발산하는 여왕괴수 특유의 노심반응을 확인한 직후 대규모 폭격을 포함한 공습을 가했지만, 방어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부대가 전멸당했다고 하더군요. 여왕 혼자라면 방어만 했을 테지만 반격이 있었던 점과 그 위력을 보고 영식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헌데 아직까지도 지원 요청이 없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자만하고 있는 건지..."
비상 소집과 대기령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당장 출동명령이 나오지 않는 한 기사들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보내게 된다. 단지 기사단 부지에서 2시간 거리 밖으로 나가는 것만 금지될 뿐이다. 그리고 중앙 기사단은 학생들도 있다는 특성상 대부분의 편의시설도 부지 내에 갖춰져 있기 때문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불편할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심리적으로 갑갑할 뿐이었다.
"아~, 정말이지. 모처럼 시내 구경 좀 하러 갈까 했는데 대기령은 또 뭐람. 세일기간 다 지나가겠네."
미유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테이블에 엎드렸고, 프레이야는 그 모습을 보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두 사람은 기사단 부지 내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정식으로 기사가 되면 견습 시절까지 주어지던 하루 일과표는 사라지고 모든 걸 자율에 맡긴다. 자유시간도, 훈련도 본인 마음대로였다. 사실 완전 자율이라곤 하지만, 실력이 무뎌지면 그 대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훈련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미유키와 프레이야는 대련을 위한 훈련장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 프레이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뭐가?"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야. 무슨 일 있어?"
"아... 그게, 실은 레니핀에 가족이 있어서 말이야."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서 실패했다. 프레이야의 얼굴을 본 미유키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듣자 하니 그쪽도 상당한 전력을 갖고 있다던데, 쉽게 무너지지야 않겠지. 그리고 정 위험하면 도와달라고 하지 않겠어?"
"그야 그렇겠지만, 늦어질까봐 걱정이란 말이지..."
"이륙 중인 가디언 확인! 식별부호 G-42 부여합니다!"
"전 함대 포문 개방! 명령 기다리지 말고 쏴라!"
레니핀 행성 대기권내, 제5 괴수 플랜트 상공.
아무리 레니핀 행성군(軍)이 단일 행성군으로는 최대의 대 괴수 전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일단 플랜트가 가동되기 시작하면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초기판단 미스로 AMP 시리즈를 투입하지 않고 일반적인 침식 초기 대응수단인 공중폭격을 한 결과, 동원된 2개 함대가 깨끗이 전멸하고 플랜트 완성까지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되었다.
결국 S-81이 낙하하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괴수 플랜트는 확인된 것만 5개에 이르고 그 중 2개는 오로지 가디언 제조만 하고 있어 레니핀 군의 함대만으로는 대응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레니핀 상공에 떠오르는데 성공한 가디언은 총 27기. 앞으로 5기 정도만 더 떠오르면 레니핀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는 위기상황이었다.
"제니크 다운! 피라인 피격! 무장부 손상 30%!"
"실드 출력 70%로 하강! 에너지 부하가 너무 큽니다! 계속 하강중!"
"젠장, 지상군은 뭘 하고 있나! 저 빌어먹을 워킹 쉬림프 좀 치우라고 해!"
"8사단 손실률 60%, 14사단과 교대중입니다! 6사단은 연락두절!"
"카리안 다운! 아, G-42가 추락합니다! 성공입니다!"
사단 하나가 완전히 박살나고 함대가 반토막 나는 피해 끝에 또 하나의 가디언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기함 멜크루즈의 승조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함장은 아직도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좋아하긴 아직 일러! 남은 화력을 모두 플랜트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부상중인 또다른 가디언이 없는지 확인해! 가디언이 더 만들어지면 위험하다!"
함장의 말대로였다. 이번 가디언은 떠오르기 전에 격추시켰지만, 다음번 가디언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병력 손실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레니핀이 외부와 단절되지 않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함장의 명령에 따라 잔존 전함들은 플랜트에 화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계속되는 대공 포화에 피해는 점점 늘어만 갔다. 어찌어찌해서 플랜트의 1/3 정도를 파괴했을 때였다.
"가디언입니다! 식별부호 G-43 부여!"
"표적 변경! 가디언을 떨어트려라!"
플랜트에 폭우처럼 쏟아지던 공격이 방향을 바꾸어 가디언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위력은 처음 플랜트를 두들기던 때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고, 가디언의 실드는 차츰 깎여나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건재했다. 그렇게 가디언의 실드가 40% 가량 깎이고 고도는 5km에 이르렀을 때였다. 함장은 함대의 포화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냐고 외치기 직전, 오퍼레이터의 비명이 브릿지에 울렸다.
"노심반응 확인! 출력 A클래스! 여, 영식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멜크루즈의 바로 옆에 떠 있던 빌리아드가 폭발했다. 일점집중된 입자빔이 실드를 깨고 함의 동력로를 관통한 것이다. 함장은 급히 입자빔의 발사처를 카메라로 확인했고, 그 모습에 전율했다. 머리 양편에 뿔처럼 튀어나온 커다란 장식. 양 어깨와 고관절 부분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입자 응축기. 레니핀 함대의 대지 공격과 지상군의 포화에도 아랑곳않고 서 있는 검은 동체.
S랭크 영식, 루시퍼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젠장."
루시퍼의 가동시기가 16년이 넘는다는 사실도, 왜 여기에 루시퍼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다음 순간, 또 한번 발사된 입자빔이 멜크루즈의 함체를 꿰뚫고 브릿지를 날려버렸다.
"서두르세요! 이곳은 피난 권고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어서들 나오세요!"
"ID 카드만 지참하셔도 됩니다! 피난 생활 중에 필요한 물품들은 모두 정부에서 제공할테니 빨리요!"
"만차(滿車)! 출발합니다!"
"다 태웠으면 밍기적 대지 말고 빨리 차 빼! 거기! 한번 더 확인해서 아직 안 나온 사람 없나 알아 봐!"
앤과 A-10은 집에서 피난에 가져갈 물건들을 챙기고 있었다. 창문이 열려있다고는 하지만 거리에서 군인들이 피난민들을 인솔하며 외치는 소리는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똑똑하게 들려왔고, 그들의 목소리에 들어있는 감정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긴장, 그리고 두려움.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소문이란 무섭게 퍼지는 법이다. 가디언의 자밀기관, 차밀드 기관에 의해 레니핀이 고립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고, 실제로도 크게 틀리지 않은 생각이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군인들은 피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외에도 폭동 진압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마스터, 준비 끝나셨나요?"
"그래, 대강은."
피난을 떠날 때, 사람들은 보통 이런 저런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경향이 있다. 소중한 물건이라서 그러기도 하고, 나중에 언제 필요해질지 몰라서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은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앤과 A-10이 챙긴 것은 ID 카드와 옷가지 조금, 그리고 A-10의 전용 무장 트렁크가 전부였다. 다만 무장 트렁크의 부피가 크다보니 실질적인 짐은 앤이 들고 다니게 되었다.
"명색이 주인인데 말이지..."
"마스터가 대신 들어주신다면 저도 불만은 없어요. 그런데 이거 무게가 꽤 나가는데요?"
"...아니, 됐다. 그냥 가자."
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문으로 다가간 순간, A-10이 걸음을 멈췄다. 막 문을 열려던 앤은 의아한 표정으로 A-10을 보았다.
"무슨 일이야?"
"노심반응 확인. 상위괴수입니다. 노심 출력은 C클래스 1기, 그 외에 유사노심 탑재기 다수. AMP 시리즈는 아닙니다."
"젠장, 어느 틈에!"
다급히 문을 열어젖힌 앤의 눈앞에서, 군인 한명이 막 두동강나고 있었다. 77형이었다.
"마스터!"
위험을 감지한 A-10이 뒤에서 앤을 덮치듯 내리 누르더니, 곧장 들고있던 트렁크에서 대괴수용 머신건을 꺼내 연사했다. 77형은 한순간에 벌집이 되어 쓰러졌지만, 주변은 이미 날뛰는 괴수들로 인해 지옥도로 화(化)해 있었다.
"마스터, 서두르세요.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그래."
앤이 왕년에 최강 반열에 오른 기사였다고는 해도 지금은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했다. 몸 상태는 청적파는커녕 77형과의 1:1 싸움도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한들 AB소드가 없는 이상 괴수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앤은 곳곳에 쓰러져있는 시신들을 보며 입술을 깨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피난용 버스는 대부분 떠나거나 파괴되어 남은 건 한대 뿐이었고, 그나마도 접근해오는 괴수들 때문에 서둘러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막 문을 닫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려던 운전병은 그제야 다가오는 앤과 A-10을 보았고, 다시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빨리 오세요! 당장 떠나야 합니다!"
"알았어요! 금방 갈..."
앤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대답할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버스의 운전석을 짓밟으며, 새하얀 괴수가 서 있었다.
마치 새하얀 코트를 입은 것 같은 외양. 머리카락을 닮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후두부의 물체. 그리고 등 뒤에 전개된 날개를 연상시키는 일그러진 공간과 손에 들린 거대한 양날창이 괴수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피어...!"
앤의 중얼거림을 들었다는 듯이, 피어는 고개를 돌려 앤을 바라보더니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한순간 버스의 승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피어가 버스에서 내려오자마자 양산형 괴수들이 버스에 달려들었다. 승객들의 비명, 흩뿌려지는 시신과 피를 배경으로 피어가 앤을 향해 다가왔다. 그때, 피어의 왼쪽에서 무언가가 달려들어 하이킥을 먹였다. AMP 시리즈였다. 피난을 돕고 괴수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이곳에도 1기가 배치되었던 것이다.
불의의 공격이었지만 피어에게 타격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머리를 향해 들어온 발차기를 피어는 간단하게 막아냈고, 그대로 AMP의 다리를 붙잡고는 건물 쪽으로 집어던졌다. AMP가 건물에 틀어박히자 굉음과 함께 벽면이 무너졌다. 피어가 잠시 돌무더기를 바라보고 있자, 그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위기 상황으로 판단, 본부에 리미터 해제 요청. .............................. Roger. 리미터 해제. 전력 대응 개시."
다음순간 돌무더기가 튀어 올랐다. 유사노심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AMP가 자신을 덮고 있던 돌덩어리들을 날려버린 것이다. AMP는 돌무더기에서 나오자마자 피어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AMP의 외양은 이미 괴수에 가까운 형상으로 변해있었다. 피어에게 접근한 AMP는 쉬지않고 공격을 날렸다. 펀치, 하이킥, 엘보, 니킥, 박치기, 로우킥, 가능한 모든 공격을 피어에게 꽂아넣었다. 하지만 피어는 그 모든 공격을 왼손만으로 막고 피해냈다.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그 모습은 마치 어른이 아이의 장난을 받아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몇번의 공방이 더 진행된 후, 돌연 피어가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거기에 휘말리듯 AMP의 팔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사지를 잃고 무력하게 땅에 떨어진 AMP를 내려다보던 피어는 그대로 AMP의 머리를 걷어차 산산조각으로 부쉈고, 다시 몸을 돌려 A-10과 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스터, 코드를."
A-10은 피어가 다가오자 앤과 피어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노심의 리미터 해제 코드를 요청하는 것이다. 리미터를 해제하지 않고도 싱글넘버까지는 상대가 가능했지만 영식쯤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피어는 가동시기가 14년에 이르는 S랭크의 영식이었고, 방금 전의 모습을 보면 전투경험도 이전과는 비교도 못할만큼 늘은 듯 했다. 하지만 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14년 전 피어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모습, 프레이를 안고 사라진 그 뒷모습이 새삼 눈앞에 아른거렸다. 피어가 여기 있다면, 프레이는 어디 있는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마스터!"
피어가 점점 다가오는데도 앤이 아무 말이 없자 A-10은 다그치듯 외쳤고, 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피어가 상당히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미터 해제 코드를 말하기 위해 앤이 입을 여는 순간, 피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A-10도 앤의 정면에서 사라졌고, 앤은 의식을 잃었다.
S-81이 침식을 시작한지 8일이 지나자, 레니핀 정부는 자력 대응을 포기하고 AE와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했다. AMP 시리즈는 분명 기사를 제외하면 최강의 대 괴수 전력이었지만 영식, 그것도 2기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레니핀이 보유한 AMP의 1/3은 괴수의 공세를 막아내며, 1/3은 플랜트 공략에 투입했다가 파괴되었다. 그 중 절반은 피어와 루시퍼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AE는 레니핀의 지원 요청을 받자마자 가용한 모든 병력을 파견했지만, 중앙기사단의 대응은 달랐다. 레니핀에 '향후 100년간 피어시나이트 무상공급'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원로원에서는 레니핀이 지원을 요청하자 '이번 기회에 기사단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그것은 심지어 영식 2기가 확인된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식에 대한 위기의식과 기사단의 위상과 관련된 자존심은 별개였던 것이다. 결국 레니핀과 기사단의 협상 끝에 기사 파견 조건은 '향후 50년간 피어시나이트 무상 공급'으로 조정되었고, 그에 따라 기사단이 파견된 것은 침식이 시작된지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인원은 기사 10명에 견습기사 30명으로, 레니핀의 AMP 16기까지 포함하면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그리고, 그 인원 전부가 흑백의 영식들에 의해 전멸했다.
중앙기사단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별것 아닌 자존심과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영식의 존재를 경시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위기를 느낀 원로원은 기사단 총동원령을 내려, 임무가 없는 기사 전원을 소집해서 레니핀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때를 놓친 뒤였다. S-81이 침식을 시작한지 열닷새째 되는 날, 아직 중앙기사단의 1차 파견 인원들이 살아있을 무렵, 33기째의 가디언이 레니핀 상공에 떠올라 행성 전역을 외부와 단절시킨 것이다. 이제 추가 병력의 파견을 위해서는 당장 레니핀의 위성 궤도에 포진하고 있는 방어용 괴수들과 가디언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
레니핀은 본격적으로 지옥이 되었습니다. S랭크 영식이 둘이나 출현, 거기다 각각 근거리 원거리 전문. 고작해야 싱글넘버와 1:1이 가능한 수준의 양산형 인형들이 어찌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죠. 루시퍼라면 멀리서 입자빔으로 쓸어버릴테고, 피어라면 뭐... 보신대로...
그런데 확실히 이렇게 한계에 몰린 상황을 쓸 때, 왠지 모르게 글이 잘 써지더군요. 이것도 하루만에 다 쓴 거라... ...역시 변태인가 (...)
그럼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그쪽에서 별다른 요청이 없으니까요. 당분간은 관망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 물론 출동 준비는 다 갖춰놓은 상태에서 말이죠."
우주력 444년 3월, 리아드 행성 중앙기사단 원로원 회의실.
5일 전, 레니핀 행성에 여왕괴수 S-81이 낙하한 것이 확인된 후 기사단은 비상 체제를 발동하고 임무를 받지 않은 모든 기사들을 소집해서 대기시켰다. 그만큼 기사단에서는 이번 사태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사 파견에 대한 토론은 지지부진했다.
레니핀이 현재 연합 소속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하필 왜 이 시기에 떨어져가지곤..."
"그러게 말입니다, 여러 사람 골치아프게시리."
"그렇다고 해도 괴수가 '여기 오지 마' 한다고 안 올 녀석들도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고, S-81이 어떻게 절대방어선을 넘어왔는지는 확인됐습니까?"
원로원 의원 중 한명이 한 말에, 다른 의원들도 전부 고개를 돌렸다. 사실 가장 의문인 점이 바로 그점이었던 것이다. 레니핀의 위치는 절대방어선 안쪽도 한참 안쪽으로, 통상 항행으로는 고속함이 최대속력으로 날아도 절대방어선에서 5일 거리였다. 하지만 S-81은 방어선을 넘은 것은 물론, 그 중간에 단 한번도 탐지되지 않고 레니핀에 낙하한 것이다. 만약 정말로 방어선을 돌파한 거라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레니핀 정보부와 함께 자료를 분석해봤습니다. 이 건에 대해선 협조적이더군요."
의원들의 시선을 받은 기사단 정보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리에 있는 콘솔을 조작해서 회의실 중앙에 입체 영상을 띄웠다.
"S-81이 레니핀에 낙하하기 5시간 전부터의 영상입니다. 레니핀의 정찰 위성이 촬영한 영상이죠."
영상은 오래된 화물 우주선을 비추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낡은 모델로, 당장 폐선 처리를 해야할 수준인데다 한쪽 벽면은 항해중 파손된 듯 임시로 때운 흔적까지 있었다.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속재생된 영상에서 화물선은 코스를 바꾸지 않고 레니핀에 계속 접근하더니 이윽고 대기권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입사각은 무려 90도였다. 잠시 후, 위성 영상은 대기권에 돌입하던 화물선을 따라잡으며 줌인했다. 화면 가득 들어찬 화물선은 점차 부서져나가더니 이윽고 완전히 공중분해되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날리는 파편속에서 유독 셋만이, 마치 파편속을 뚫고 나오듯 튀어나왔다. 몇초 후, 영상은 흩어진 화물선의 파편들을 놓쳤고 정보부장은 거기서 영상을 정지시켰다.
"현재 분석한 바로는, 낡은 화물선에 침투해서 승무원들을 살해하고 우주선을 빼앗은 것 같습니다. 화물선의 소속 무역사에 알아본 바로는 원래 목적지가 레니핀이었다고 하더군요. 자동항행으로 설정된 상태에서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정보부장은 화면을 잠깐 되돌려, 화물선이 파괴되고 세개의 특이한 파편이 튀어나오는 부분에서 재생을 멈췄다.
"...바로 저 셋이 여왕괴수 S-81과 호위 영식으로 판단됩니다."
"영식이라고!"
"자, 잠깐! 셋이잖은가! 그렇다면 지금 영식이 둘이나 있단 소리인가!"
"이럴 때가 아니오! 지원 요청이 있든 없든 파견해야하오!"
영식이라는 정보부장의 말에 회의실은 패닉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14년전 E-34 사건 이후 영식이 출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 기사단에는 대 영식전의 경험을 가진 기사들이 굉장히 적었던 것이다. 제로 브레이커쯤 되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은퇴해서 현역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완전히 혼란에 빠진 의원들 속에서, 의장이 일어서며 외쳤다.
"다들 조용히 하시오!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소. 지금 이 회의가 원래 기사단의 대응책을 결정하자고 모인 것 아니오? 진정들 하시고 의견을 모아봅시다. 그런데, 정보부장."
"예, 의장님."
"아까 레니핀 정보부와 함께 분석을 했다고 했는데, 그쪽 반응은 어떤가? 영식이 있다는 건 레니핀에서도 이제 알고 있을 텐데."
"짐작은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S-81이 발산하는 여왕괴수 특유의 노심반응을 확인한 직후 대규모 폭격을 포함한 공습을 가했지만, 방어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부대가 전멸당했다고 하더군요. 여왕 혼자라면 방어만 했을 테지만 반격이 있었던 점과 그 위력을 보고 영식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헌데 아직까지도 지원 요청이 없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자만하고 있는 건지..."
비상 소집과 대기령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당장 출동명령이 나오지 않는 한 기사들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보내게 된다. 단지 기사단 부지에서 2시간 거리 밖으로 나가는 것만 금지될 뿐이다. 그리고 중앙 기사단은 학생들도 있다는 특성상 대부분의 편의시설도 부지 내에 갖춰져 있기 때문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불편할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심리적으로 갑갑할 뿐이었다.
"아~, 정말이지. 모처럼 시내 구경 좀 하러 갈까 했는데 대기령은 또 뭐람. 세일기간 다 지나가겠네."
미유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테이블에 엎드렸고, 프레이야는 그 모습을 보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두 사람은 기사단 부지 내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정식으로 기사가 되면 견습 시절까지 주어지던 하루 일과표는 사라지고 모든 걸 자율에 맡긴다. 자유시간도, 훈련도 본인 마음대로였다. 사실 완전 자율이라곤 하지만, 실력이 무뎌지면 그 대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훈련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미유키와 프레이야는 대련을 위한 훈련장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 프레이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뭐가?"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야. 무슨 일 있어?"
"아... 그게, 실은 레니핀에 가족이 있어서 말이야."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서 실패했다. 프레이야의 얼굴을 본 미유키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듣자 하니 그쪽도 상당한 전력을 갖고 있다던데, 쉽게 무너지지야 않겠지. 그리고 정 위험하면 도와달라고 하지 않겠어?"
"그야 그렇겠지만, 늦어질까봐 걱정이란 말이지..."
"이륙 중인 가디언 확인! 식별부호 G-42 부여합니다!"
"전 함대 포문 개방! 명령 기다리지 말고 쏴라!"
레니핀 행성 대기권내, 제5 괴수 플랜트 상공.
아무리 레니핀 행성군(軍)이 단일 행성군으로는 최대의 대 괴수 전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일단 플랜트가 가동되기 시작하면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초기판단 미스로 AMP 시리즈를 투입하지 않고 일반적인 침식 초기 대응수단인 공중폭격을 한 결과, 동원된 2개 함대가 깨끗이 전멸하고 플랜트 완성까지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되었다.
결국 S-81이 낙하하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괴수 플랜트는 확인된 것만 5개에 이르고 그 중 2개는 오로지 가디언 제조만 하고 있어 레니핀 군의 함대만으로는 대응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레니핀 상공에 떠오르는데 성공한 가디언은 총 27기. 앞으로 5기 정도만 더 떠오르면 레니핀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는 위기상황이었다.
"제니크 다운! 피라인 피격! 무장부 손상 30%!"
"실드 출력 70%로 하강! 에너지 부하가 너무 큽니다! 계속 하강중!"
"젠장, 지상군은 뭘 하고 있나! 저 빌어먹을 워킹 쉬림프 좀 치우라고 해!"
"8사단 손실률 60%, 14사단과 교대중입니다! 6사단은 연락두절!"
"카리안 다운! 아, G-42가 추락합니다! 성공입니다!"
사단 하나가 완전히 박살나고 함대가 반토막 나는 피해 끝에 또 하나의 가디언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기함 멜크루즈의 승조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함장은 아직도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좋아하긴 아직 일러! 남은 화력을 모두 플랜트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부상중인 또다른 가디언이 없는지 확인해! 가디언이 더 만들어지면 위험하다!"
함장의 말대로였다. 이번 가디언은 떠오르기 전에 격추시켰지만, 다음번 가디언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병력 손실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레니핀이 외부와 단절되지 않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함장의 명령에 따라 잔존 전함들은 플랜트에 화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계속되는 대공 포화에 피해는 점점 늘어만 갔다. 어찌어찌해서 플랜트의 1/3 정도를 파괴했을 때였다.
"가디언입니다! 식별부호 G-43 부여!"
"표적 변경! 가디언을 떨어트려라!"
플랜트에 폭우처럼 쏟아지던 공격이 방향을 바꾸어 가디언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위력은 처음 플랜트를 두들기던 때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고, 가디언의 실드는 차츰 깎여나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건재했다. 그렇게 가디언의 실드가 40% 가량 깎이고 고도는 5km에 이르렀을 때였다. 함장은 함대의 포화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냐고 외치기 직전, 오퍼레이터의 비명이 브릿지에 울렸다.
"노심반응 확인! 출력 A클래스! 여, 영식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멜크루즈의 바로 옆에 떠 있던 빌리아드가 폭발했다. 일점집중된 입자빔이 실드를 깨고 함의 동력로를 관통한 것이다. 함장은 급히 입자빔의 발사처를 카메라로 확인했고, 그 모습에 전율했다. 머리 양편에 뿔처럼 튀어나온 커다란 장식. 양 어깨와 고관절 부분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입자 응축기. 레니핀 함대의 대지 공격과 지상군의 포화에도 아랑곳않고 서 있는 검은 동체.
S랭크 영식, 루시퍼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젠장."
루시퍼의 가동시기가 16년이 넘는다는 사실도, 왜 여기에 루시퍼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다음 순간, 또 한번 발사된 입자빔이 멜크루즈의 함체를 꿰뚫고 브릿지를 날려버렸다.
"서두르세요! 이곳은 피난 권고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어서들 나오세요!"
"ID 카드만 지참하셔도 됩니다! 피난 생활 중에 필요한 물품들은 모두 정부에서 제공할테니 빨리요!"
"만차(滿車)! 출발합니다!"
"다 태웠으면 밍기적 대지 말고 빨리 차 빼! 거기! 한번 더 확인해서 아직 안 나온 사람 없나 알아 봐!"
앤과 A-10은 집에서 피난에 가져갈 물건들을 챙기고 있었다. 창문이 열려있다고는 하지만 거리에서 군인들이 피난민들을 인솔하며 외치는 소리는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똑똑하게 들려왔고, 그들의 목소리에 들어있는 감정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긴장, 그리고 두려움.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소문이란 무섭게 퍼지는 법이다. 가디언의 자밀기관, 차밀드 기관에 의해 레니핀이 고립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고, 실제로도 크게 틀리지 않은 생각이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군인들은 피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외에도 폭동 진압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마스터, 준비 끝나셨나요?"
"그래, 대강은."
피난을 떠날 때, 사람들은 보통 이런 저런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경향이 있다. 소중한 물건이라서 그러기도 하고, 나중에 언제 필요해질지 몰라서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은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앤과 A-10이 챙긴 것은 ID 카드와 옷가지 조금, 그리고 A-10의 전용 무장 트렁크가 전부였다. 다만 무장 트렁크의 부피가 크다보니 실질적인 짐은 앤이 들고 다니게 되었다.
"명색이 주인인데 말이지..."
"마스터가 대신 들어주신다면 저도 불만은 없어요. 그런데 이거 무게가 꽤 나가는데요?"
"...아니, 됐다. 그냥 가자."
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문으로 다가간 순간, A-10이 걸음을 멈췄다. 막 문을 열려던 앤은 의아한 표정으로 A-10을 보았다.
"무슨 일이야?"
"노심반응 확인. 상위괴수입니다. 노심 출력은 C클래스 1기, 그 외에 유사노심 탑재기 다수. AMP 시리즈는 아닙니다."
"젠장, 어느 틈에!"
다급히 문을 열어젖힌 앤의 눈앞에서, 군인 한명이 막 두동강나고 있었다. 77형이었다.
"마스터!"
위험을 감지한 A-10이 뒤에서 앤을 덮치듯 내리 누르더니, 곧장 들고있던 트렁크에서 대괴수용 머신건을 꺼내 연사했다. 77형은 한순간에 벌집이 되어 쓰러졌지만, 주변은 이미 날뛰는 괴수들로 인해 지옥도로 화(化)해 있었다.
"마스터, 서두르세요.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그래."
앤이 왕년에 최강 반열에 오른 기사였다고는 해도 지금은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했다. 몸 상태는 청적파는커녕 77형과의 1:1 싸움도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한들 AB소드가 없는 이상 괴수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앤은 곳곳에 쓰러져있는 시신들을 보며 입술을 깨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피난용 버스는 대부분 떠나거나 파괴되어 남은 건 한대 뿐이었고, 그나마도 접근해오는 괴수들 때문에 서둘러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막 문을 닫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려던 운전병은 그제야 다가오는 앤과 A-10을 보았고, 다시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빨리 오세요! 당장 떠나야 합니다!"
"알았어요! 금방 갈..."
앤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대답할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버스의 운전석을 짓밟으며, 새하얀 괴수가 서 있었다.
마치 새하얀 코트를 입은 것 같은 외양. 머리카락을 닮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후두부의 물체. 그리고 등 뒤에 전개된 날개를 연상시키는 일그러진 공간과 손에 들린 거대한 양날창이 괴수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피어...!"
앤의 중얼거림을 들었다는 듯이, 피어는 고개를 돌려 앤을 바라보더니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한순간 버스의 승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피어가 버스에서 내려오자마자 양산형 괴수들이 버스에 달려들었다. 승객들의 비명, 흩뿌려지는 시신과 피를 배경으로 피어가 앤을 향해 다가왔다. 그때, 피어의 왼쪽에서 무언가가 달려들어 하이킥을 먹였다. AMP 시리즈였다. 피난을 돕고 괴수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이곳에도 1기가 배치되었던 것이다.
불의의 공격이었지만 피어에게 타격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머리를 향해 들어온 발차기를 피어는 간단하게 막아냈고, 그대로 AMP의 다리를 붙잡고는 건물 쪽으로 집어던졌다. AMP가 건물에 틀어박히자 굉음과 함께 벽면이 무너졌다. 피어가 잠시 돌무더기를 바라보고 있자, 그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위기 상황으로 판단, 본부에 리미터 해제 요청. .............................. Roger. 리미터 해제. 전력 대응 개시."
다음순간 돌무더기가 튀어 올랐다. 유사노심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AMP가 자신을 덮고 있던 돌덩어리들을 날려버린 것이다. AMP는 돌무더기에서 나오자마자 피어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AMP의 외양은 이미 괴수에 가까운 형상으로 변해있었다. 피어에게 접근한 AMP는 쉬지않고 공격을 날렸다. 펀치, 하이킥, 엘보, 니킥, 박치기, 로우킥, 가능한 모든 공격을 피어에게 꽂아넣었다. 하지만 피어는 그 모든 공격을 왼손만으로 막고 피해냈다.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그 모습은 마치 어른이 아이의 장난을 받아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몇번의 공방이 더 진행된 후, 돌연 피어가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거기에 휘말리듯 AMP의 팔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사지를 잃고 무력하게 땅에 떨어진 AMP를 내려다보던 피어는 그대로 AMP의 머리를 걷어차 산산조각으로 부쉈고, 다시 몸을 돌려 A-10과 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스터, 코드를."
A-10은 피어가 다가오자 앤과 피어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노심의 리미터 해제 코드를 요청하는 것이다. 리미터를 해제하지 않고도 싱글넘버까지는 상대가 가능했지만 영식쯤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피어는 가동시기가 14년에 이르는 S랭크의 영식이었고, 방금 전의 모습을 보면 전투경험도 이전과는 비교도 못할만큼 늘은 듯 했다. 하지만 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14년 전 피어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모습, 프레이를 안고 사라진 그 뒷모습이 새삼 눈앞에 아른거렸다. 피어가 여기 있다면, 프레이는 어디 있는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마스터!"
피어가 점점 다가오는데도 앤이 아무 말이 없자 A-10은 다그치듯 외쳤고, 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피어가 상당히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미터 해제 코드를 말하기 위해 앤이 입을 여는 순간, 피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A-10도 앤의 정면에서 사라졌고, 앤은 의식을 잃었다.
S-81이 침식을 시작한지 8일이 지나자, 레니핀 정부는 자력 대응을 포기하고 AE와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했다. AMP 시리즈는 분명 기사를 제외하면 최강의 대 괴수 전력이었지만 영식, 그것도 2기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레니핀이 보유한 AMP의 1/3은 괴수의 공세를 막아내며, 1/3은 플랜트 공략에 투입했다가 파괴되었다. 그 중 절반은 피어와 루시퍼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AE는 레니핀의 지원 요청을 받자마자 가용한 모든 병력을 파견했지만, 중앙기사단의 대응은 달랐다. 레니핀에 '향후 100년간 피어시나이트 무상공급'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원로원에서는 레니핀이 지원을 요청하자 '이번 기회에 기사단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그것은 심지어 영식 2기가 확인된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식에 대한 위기의식과 기사단의 위상과 관련된 자존심은 별개였던 것이다. 결국 레니핀과 기사단의 협상 끝에 기사 파견 조건은 '향후 50년간 피어시나이트 무상 공급'으로 조정되었고, 그에 따라 기사단이 파견된 것은 침식이 시작된지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인원은 기사 10명에 견습기사 30명으로, 레니핀의 AMP 16기까지 포함하면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그리고, 그 인원 전부가 흑백의 영식들에 의해 전멸했다.
중앙기사단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별것 아닌 자존심과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영식의 존재를 경시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위기를 느낀 원로원은 기사단 총동원령을 내려, 임무가 없는 기사 전원을 소집해서 레니핀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때를 놓친 뒤였다. S-81이 침식을 시작한지 열닷새째 되는 날, 아직 중앙기사단의 1차 파견 인원들이 살아있을 무렵, 33기째의 가디언이 레니핀 상공에 떠올라 행성 전역을 외부와 단절시킨 것이다. 이제 추가 병력의 파견을 위해서는 당장 레니핀의 위성 궤도에 포진하고 있는 방어용 괴수들과 가디언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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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핀은 본격적으로 지옥이 되었습니다. S랭크 영식이 둘이나 출현, 거기다 각각 근거리 원거리 전문. 고작해야 싱글넘버와 1:1이 가능한 수준의 양산형 인형들이 어찌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죠. 루시퍼라면 멀리서 입자빔으로 쓸어버릴테고, 피어라면 뭐... 보신대로...
그런데 확실히 이렇게 한계에 몰린 상황을 쓸 때, 왠지 모르게 글이 잘 써지더군요. 이것도 하루만에 다 쓴 거라... ...역시 변태인가 (...)
그럼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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