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그래서, 이번 전적이 꽤 눈에 띈 덕에 견습 기간도 짧아질 것 같다. 좋다면 좋은 일이고, 안 좋다면 안 좋은 일이지."

우주력 441년, 상반기 토크 데이. 마일로는 총장실에서 프레이야 이야기로 앤과 통신중이었다. 프레이야가 상당히 좋은 전적을 쌓고 있다는 것은 교육생들의 성적이 보호자들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견습 내정이나 기간 단축 같은 사항은 엄밀히 따지면 대외비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알려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런가요, 꽤 어린 나이에 기사가 되겠네요.]

"견습기간도 안 거치고 바로 기사가 된 녀석이 그런 말이냐?"

[아하하, 그건 그렇네요.]

마일로의 타박에 앤은 멋쩍은 듯 웃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마일로의 표정은 굳어있는 채였다. 앤도 금방 마일로의 표정을 알아보고 웃음을 그쳤다.

"그런데... 최근 들어온 정보로는 레니핀에 A-10의 양산형 인형이 또 반입되었다고 하더구나. 2년 전 반입된 녀석들까지 포함하면 총 30기 정도라고 하던데, 혹시 들은 거 있냐?"

[아뇨, 전혀요. 아직까지 레니핀의 정부나 공공기관 쪽에서 접촉해온 일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전에 말씀하신 이후로 한달에 한번 정도 A-10에게 레니핀 행정부의 네트워크를 해킹하도록 시키고 있거든요. 그런데...]

"야, 잠깐. 그거 범죄잖아. 들키면 유치장 몇년 정도로는 안 끝난다고."

[괜찮아요,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말은 잘 한다..."

[아무튼, 해킹을 시키고 있는데 2년 전하고 몇달 전, DC라는 곳에서 극비 화물이 도착했다는 데이터가 있었어요. 역추적 당할 위험이 있어서 그 이상의 정보는 더 알아내지 못했지만,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아요.]

"흐음, DC라..."

마일로는 의자에 몸을 누이며 중얼거렸다. DC가 어느 곳을 의미하는 것인지만 알면 화물의 내용도 대강 짐작할 수 있겠지만, 어떤 명칭의 약자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마일로가 간단하게 떠올린 곳만 벌써 서너군데가 해당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른 사실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2년 전에 토르 공방이 돌 컴퍼니로 업체명을 변경했지. 약자를 쓰면 DC..."

[그랬어요? 묘하네요, 토르 자존심이 상당히 강해서 그렇게 쉽게 명칭을 바꾸진 않았을 텐데...]

"아, 그거. 안 그래도 그 때 토르가 공방에서 나왔다더라. 지금은 어디 소규모 인형 제조사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인형 제조는 취미삼아 하는 모양이던데."

[네? 아니, 왜요?]

"A-10의 양산형을 제공한 게 돌 컴퍼니가 맞다면, 아마 그것과 관련이 있겠지. 시기도 비슷하니까. 나머진 우리가 더 알아보마. 알려줘서 고맙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만 이거 회선 보안은 괜찮은 거냐? 이쪽은 그렇다 쳐도 네 쪽은 일반 회선이잖아."

[뭐, 오늘은 토크 데이니까 그 수많은 통신 내역을 감청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죠. 게다가 여기선 A-10이 방화벽 역할도 해주고 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리고 알아낸 거 있으면 나중에 저한테도 좀 알려주세요.]

"알았다. 토크 데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전해주지. 그럼, 이만 끊는다. 몸 관리 잘 해라."

[교관님이야말로 연세 생각해서 몸조심하세요.]

핏 하는 소리와 함께 앤의 모습이 사라지며 스크린이 검게 변했다. 잠시 그 상태의 스크린을 바라보던 마일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글쎄, 이젠 교관 아니라니깐..."




우주력 442년 11월, 제리아 행성. 기사교육부 5학년이 되어 견습기사 자격을 얻은 프레이야는 다른 견습기사들과 함께 제리아 행성에서 괴수 토벌에 참가하고 있었다.
견습기사직은 정식기사는 아니지만 기사에 준하는 실력을 갖추었다고 생각될 때 부여받는데, 통상 기사교육부 5학년이 되는 것과 동시에 받는다. 견습기간에 제한은 없지만 전투 중 사망하거나 정식기사로 임명받을 때까지의 기간이 평균적으로 2년 가량이고, 실력이 뛰어나거나 견습기간 중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견습기사의 경우 견습기간이 대폭 단축되는 일도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이지만 실제로 앤과 프레이는 아예 견습기사를 건너뛰고 교육생에서 곧장 정식 기사로 임명받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견습기사는 정식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 담당 기사가 배정되어 파견된다. 정확히는 기사가 파견될 때 적합하다고 판단된 견습기사를 선발하여 붙여주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견습기사쯤 되면.

"후퇴! 후퇴해!"

"사령부에 연락 넣어! 기사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보병이 먼저다! 전차는 대 괴수탄으로 견제해! 일단 접근을 늦춰!"

임무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벨치스같은 곳으로 보내지는 않고─애초에 그런 곳이 잘 생기지도 않고─, 교육생 시절에는 전투가 거의 끝나가는 지역으로 파견했다면, 견습기사가 되면 공방이 한창인 곳으로 보내 실질적인 전력으로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제리아 행성은 이곳저곳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프레이야가 담당기사, 동료 견습기사들과 함께 파견된 곳은 남방 사령부가 담당한 지역중 동부 최전선. 양산형 괴수들과 한창 전투중이던 AE 부대에서 구원요청이 들어와서 고속비행정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해당 부대는 괴수 무리와 교전 중, 무리에서 튀어나와 부대 한가운데로 돌입한 상위괴수에 의해 사실상 전멸 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당시 파악된 데이터에 따르면 그 상위괴수는 싱글넘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일반적으로 싱글넘버가 다른 상위괴수들을 인솔하는 역할인데 현재 출현한 상위괴수는 1기뿐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단독이라는 게 오히려 놈들의 자신감의 표현일지도 모르지."

견습기사들을 맡게 된 라이엔은 비행정 내부에서 잡담을 나누는 견습기사들에게 주의를 줬다. 그 말을 들은 견습기사들은 알았다고 대답하면서도 태평한 얼굴들이었고, 라이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개인의 실력은 대체로 현직기사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인 견습기사들이지만 전투중 손실률은 교육생, 견습기사, 현직기사 중에서 제일 높았다. 교육생은 실력은 낮지만 AE 부대의 호위─요즘은 공동 작전─ 덕분에 손실이 적고, 기사는 그 자신의 경험 덕분에 손실이 적은 반면 견습기사는 기사가 코앞이라는 생각에 마음도 해이해지고 AE 부대의 지원도 교육생 시절만큼 잘 받지 못해서 손실이 컸다. 방금 라이엔이 주의를 준 것은 조금이라도 긴장해서 생환률을 높이려는 생각이었지만, 지금 견습기사들의 태도를 보면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걱정스레 견습기사들을 둘러보던 라이엔은 한명이 유독 조용히 앉아있는 것을 알았다. 이따금 눈을 떴다가 다시 감고 하는 모습에 처음엔 자고 있나 생각했지만, 눈빛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뭘 하는 건가 싶은 라이엔은 그 견습기사에게 다가갔다.

"프레이야, 뭐하는 거냐?"

"아, 라이엔 교관님."

"이젠 그냥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돼. 견습까지 올라왔으면 사실상 기사 다 된 거니까. 그런데, 뭐 하고 있었어?"

라이엔의 말에 프레이야는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즘 들어 기공을 쓸 때 감이 어쩐지 좋아서 말이죠, 어쩌면 새로운 사용법 같은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리저리 시험해보는 중이었어요."

"이동 중에? 너도 알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 싸우러 가는 거다."

"알고 있어요. 만약 가는 도중에 찾아낼 수만 있으면 바로 시험해볼 수 있잖아요."

"...검증되지 않은 병기를 실전에 투입하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다는 거, 알고 있지? 더군다나 기공은 까다로워서 경맥이 뒤틀리거나 했다간 위험하다고. 그런 건 본부에 복귀하고 나서 해라."

"네에."

프레이야는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했고, 라이엔은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좀 차분해보인다고 생각했던 녀석마저 긴장감이라곤 없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곧 작전지역에 도착합니다. 모두 준비해주십시오.]

몇분 후, 비행정 기장이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견습기사들이 복장과 무장을 점검하는 사이에 라이엔은 기장에게 상황을 물었다.

"지금 여기서 전황을 확인할 수 있나?"

[통신은 워낙 복잡하게 명령이 오가고 있어서 도움이 안 되고, 레이더에는 아군과 괴수의 식별신호가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혼전 중인 모양입니다.]

"여유롭게 뛰어드는 건 힘들겠군. 일단 약간 뒤쪽에서 내려주고, 자네들은 우리 내리고 나면 부상병을 후송해주게. 위험하겠지만 부탁하겠네."

[말씀 안 하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기장과 얘기를 끝낸 라이엔은 견습기사들을 돌아봤다. 이제 좀 긴장이 되기 시작했는지 다들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라이엔은 다시 한번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입을 열었다.

"방금 들었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다. 계속 접근하면 내리기도 전에 격추될 수 있으니, 후방에서 내려서 최대한 빨리 전선에 합류 후 상위괴수를 우리가 맡아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 현재 확인된 건 싱글넘버로 추정되는 녀석 하나지만..."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비행정이 크게 흔들리더니 고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견습기사들은 파랗게 질렸고, 라이엔은 다급히 조종실에 무선을 넣었다.

"기장! 무슨 일인가! 기장! ...제길,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계속해서 통신을 시도해도 응답은 없고, 고도는 점점 떨어져서 곧 지면에 충돌할 정도가 되자 라이엔은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 있다간 비행정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고깃덩이가 될 것이 뻔했다.

"리드, 후방 해치를 부숴라! 그 다음 전부 뛰어내려! 난 조종실을 확인한 다음 합류하겠다!"

"옛!"

라이엔의 지시에 견습기사 중 한명인 리드가 해치 앞에 서더니 초상능력을 사용했다. 리드의 초상능력 '공진'은 목표의 진동 주파수를 파악한 다음 그에 맞는 진동파를 생성해 분쇄하는 능력으로, 지금처럼 주변에 아군이 많고 특정 대상만 파괴해야 하는 경우 상당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해치를 몇번 두들겨 주파수 확인을 끝낸 리드는 이윽고 왼손에 파동을 발생시키고는, 그대로 해치에 주먹을 날렸다.

"핫!"

리드의 주먹이 꽂힌 순간 해치는 그대로 분쇄되어 버렸고, 견습기사들은 해치가 있던 자리를 통해 차례차례 뛰어내렸다. 그동안 라이엔은 자신의 초상능력인 '절삭'을 써서 조종실 문을 가르고 들어갔다.

"...제길, 당한 거였나."

조종실은 2/3가 사라져 있었다. 계기판과 전방의 방풍유리는 깨끗이 없어졌고, 파일럿 시트에는 기장과 부기장의 유체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원거리에서 입자 빔에 저격당한 모양이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라이엔은 서둘러 비행정 후방으로 향했다. 뛰어내리는 것 자체는 외부에 노출된 조종실에서도 가능했지만, 그랬다간 추락중인 비행정에 부딪힐 위험이 있었다. 만약 재수없이 비행정과 지면 사이에 끼어버리기라도 했다간 웃음거리도 안 된다.
라이엔이 비행정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또다시 날아온 입자 빔이 비행정의 엔진을 꿰뚫었고, 공중에서 폭발에 떠밀린 라이엔은 그대로 지면에 내동댕이쳐졌다.

"크헉!"

DC 코트로 어느 정도 방어가 되었다고는 해도 충격은 상당했다. 아무래도 장시간 전투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말이지..."

AB 소드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던 라이엔은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보곤 어처구니가 없었다. 먼저 뛰어내린 견습기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상위괴수는 한마리가 아니었다. 숫자로만 따지면 견습기사 2명이 상위괴수 하나를 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77형 4마리에 2형 하나냐..."

싱글넘버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77형은 기사 이상의 성능을 발휘하는 상위괴수이다. 일단 대체로 2:1의 비율이니 견습기사들이 쉽사리 밀리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2형이었다.

"제기랄, 아직 대출금도 다 못 갚았는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견습기사들과 77형의 싸움에 2형이 끼어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2형은 라이엔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형의 전투력은 평균적으로 마스터 나이트와 거의 동등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베테랑에 속하는 라이엔이라면 1:1로 싸워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몸이 정상일 때의 얘기다.

"설마... 그걸 노린 건 아니겠지."

온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억지로 견뎌가며 라이엔은 2형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디스플레이 고글이 2형의 외관에서 확인되는 정보를 띄웠다. 전체적인 형태로 보았을 때 밸런스형, 무장은 손에 들고 있는 랜스와 검을 섞은 듯한 무기와 흉부의 입자 빔 발생기 2개였다. 근거리 위주에 원거리도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말그대로 전천후 타입이었다.

"젠장, 골치 아프겠... 윽?!"

고글에 떠오른 정보를 보고 투덜거리는 라이엔을 향해 2형이 달려들었다. 서둘러 AB소드를 들어 공격을 받기는 했지만 2형의 돌격력 때문에 몸이 튕겨나갔다.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 잡으려는 라이엔의 눈에 2형의 가슴 부분에 빛이 모이는 것이 보였다.
입자 빔이 막 발사되려는 찰나, 2형은 갑자기 무기를 한번 휘두르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 앞에는 단검 세자루가 두동강 난 채 떨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교관님?"

"그래, 덕분에 살았다. 그런데 너희들..."

월터가 염동 단검으로 2형을 공격해 입자 빔을 취소시킨 사이, 지면에 발을 디딘 라이엔의 오른편으로 프레이야가 달려왔다. 방금 전에 77형과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조금 의아해진 라이엔은 아까 두명이 있던 곳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는 다리가 무릎 위에서 잘려나가고 노심부에 단검이 꽂힌 77형이 쓰러져 있었다.

"과연, 이번에 견습 올라온 녀석들은 실력있는 녀석들이 많다더니 정말이었군. 이거 꽤 든든한걸."

라이엔의 말에 왼편에 와 있던 월터가 씨익 웃었고, 프레이야도 살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3:1이라고는 해도 상대는 현재 괴수들의 전력에서 영식 다음으로 강력한 종류였으니 신중하게 대응해야 했다. 프레이야의 움직임에 맞춰 월터도 반대쪽으로 원을 그리며 이동했고, 그렇게 2형을 가운데 두고 세명이 원형을 그리려던 때였다. 2형의 흉부에 다시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놈이!"

2형의 오른편에 있던 월터가 단검 세자루를 염동력으로 날렸고, 라이엔은 거의 바닥에 쓰러질만큼 몸을 낮추며 돌진했다. 2형의 왼편에 있던 프레이야는 기공으로 다리 힘을 강화한 다음 뛰어올라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세명의 예상은 빗나갔다. 2형이 땅을 박차며 입자 빔을 날린 것이다.
입자 빔 발사의 반동으로 2형은 빠르게 포위를 벗어났고, 덤으로 뛰어오르며 상체를 숙였기 때문에 입자 빔의 궤도는 정확하게 라이엔을 노리고 있었다. 라이엔은 서둘러 몸을 옆으로 굴렸지만 이미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행동이 반박자 늦고 말았다.

"우아아악!"

비명과 함께 라이엔의 왼팔이 입자 빔에 휘말려 증발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른쪽으로 피한 덕에 왼팔을 잃은 대신 오른팔과 AB 소드는 무사하다는 점이었지만, 이미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데다 왼팔까지 잃은 지금 라이엔의 전투력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프레이야가 고통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라이엔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으, 크윽... 저 빌어먹을 자식..."

프레이야가 보기에도 라이엔이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일단 피해 있으라고 말하려는데, 월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이야, 피해!"

고개를 돌려보니 2형이 무기를 겨눈 채 돌진해오고 있었다. 단순히 다리 힘만이 아니라 등부분에 내장된 스러스터까지 개방한 고속돌격이었다. 막을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프레이야는 라이엔을 밀치며 자신도 그 반동으로 몸을 날렸다. 2형이 라이엔과 트레이야의 사이를 지나간 직후, 고속돌격의 후폭풍이 두사람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월터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무기를 던졌다. 아까 입자 빔의 반동으로 이탈한 후, 월터와 프레이야가 쓰러트린 77형의 무장을 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단검을 막 날리려던 월터는 단검의 제어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날아든 무기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월터의 단검은 빗나갔고, 그 사이 2형은 아직 채 일어나지 못한 프레이야에게 달려들었다. 프레이야가 고개를 들었을 때, 2형은 어느새 프레이야의 머리 위에 와 있었다.

"크읏!"

프레이야는 재빨리 팔 다리를 기공으로 강화, 지면을 걷어차며 자리를 피했다. 그 직후 2형의 무기가 프레이야가 있던 자리에 내리 꽂히며 흙먼지를 피워올렸고, 그 흙먼지를 가르며 2형은 프레이야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자리를 피하고 2형이 다시 달려들 때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프레이야는 기공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월터! 보조해줘!"

사상병기에 가깝던 파동기에서 신체를 강화하는 강화기로 변형된 프레이야의 기공은, 순간출력은 파동기보다 떨어지지만 범용성에서는 청적파와 거의 동등한 수준에 있었다. 현재 청적파를 쓰는 사람이 앤 한명, 그것도 적파 한정에 AB 소드를 이용하지 않으면 거의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없는데 비해, 프레이야의 기공은 AB 소드가 없어도 그에 준하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시에 민첩성, 동체시력, 근력, 지구력 등 전반적인 신체능력의 향상까지 이끌어내고 있었다. 다만 단점이라면, 프레이야가 다룰 수 있는 기(氣)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장기전에 불리하다는 점이었다.
프레이야와 2형의 공방은 거의 잔상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월터는 미리 단검을 공중에 대기시켜 놨다가 프레이야가 밀리거나 2형에 빈틈이 보일 때만 재빨리 움직이는 정도였다. 그렇게 몇분이 지나자 프레이야의 속도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2형을 사실상 혼자서 상대하다보니 생각보다 빨리 한계가 온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프레이야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속도와 함께 근력과 반응속도도 저하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정면에서 받아내던 2형의 공격을 차츰 흘려내고 있었고, 그나마도 완전히 흘리지 못해 한두걸음씩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레이야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어이없게도 밀려나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린 것이다.

"프레이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기를 내리치는 2형을 향해, 월터가 공중에 대기시켜 놨던 단검을 한꺼번에 날렸다. 2형은 자신의 목과 양 어깨, 흉부를 노리고 날아든 4자루의 단검을 오른손의 무기와 왼팔 하박의 방어용 갑피로 쳐냈고, 프레이야는 그 사이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월터는 뜻하지 않은 반격을 받고 말았다.

"...어?"

갑자기 가슴에 느껴진 강한 충격에 나가 떨어지며, 월터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 월터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볼 수 있었고, 거기에는 방금 자신이 2형에게 날렸던 단검이 꽂혀 있었다. 그 직후, 월터의 의식이 사라졌다.




"아아아아아아앗!!"

월터가 쓰러진 것과 동시에, 프레이야는 2형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2형의 무기는 랜스의 형태를 한 검이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근접하면 사용하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2형은 무기를 휘두르는 대신 흉부의 입자 빔 생성기를 가동시켰다. 막 빛이 모이려는 순간, 2형의 흉부 중앙에 닿은 프레이야의 왼손에서 발경이 시전되었다. 방출된 기에 의해서 2형의 등부분이 터져나갔고, 빔을 만들기 위해 집속되던 입자들은 그대로 허공에 흩어졌다. 충격으로 2형이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것을 놓치지 않고, 프레이야는 뛰어 오르며 검을 휘둘렀다. 프레이야를 베기 위해 2형도 무기를 들었지만 프레이야가 조금 더 빨랐다. 2형의 무기는 프레이야의 DC코트 옆구리를 베었고, 프레이야의 검은 2형의 목을 베었다.

"허억... 허억... 허억..."

쓰러진 2형의 동체를 밟고 선 프레이야는 월터가 쓰러진 곳을 바라보았고,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돌렸다. 머리와 가슴에서 흘러 지면을 적신 피, 부자연스럽게 꺾인 목. 어떻게 봐도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잠시 후 프레이야는 77형을 상대하고 있던 동료들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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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와의 싸움에서 항상 사람은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베테랑 기사들이 바글바글했던 에덴 방어전에서도 항모 위에서 있었던 싸움에서 2명 정도 죽었죠. 뭐 피어 등장한 다음엔 말할 것도 없고...

...아린은 아예 논외. 그 쪽은 이미 이 세상이 아닙니다. (......)

원래는 이번 싸움에서 미유키도 보내버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애초에 등장시키기가 조금 애매해보여서 미유키는 뺐습니다. 동반자도 없이 혼자 죽어간 월터에게 묵념...

이 다음편부터 제가 쓰고 싶었던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잘 쓸 수 있을지는...

그럼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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