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그런데, 괜찮은 건가요?"
"뭐가?"
우주력 443년, 리아드 중앙 우주공항. 한쌍의 남녀가 막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긴 금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성과 회색 머리에 안대를 한 초로의 남자로, 아무리 봐도 연인이나 가족은 아니었다. 짐은 그리 크지 않은 여행용 가방 하나씩이 전부였고, 거기에 더해 여성의 가방에는 기다란 파란색 막대기 같은 것이 하나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여성은 며칠 전 기사로 임명된 프레이야, 남성은 프레이야를 따라온 마일로였다.
"기사단 교육부 총장이 이렇게 가볍게 자리를 비우셔도 되냐구요."
"아, 그거? 괜찮아, 어차피 총장이라고 해봤자 하는 일은 자리 지키고 앉아서 서류에 도장찍는 일밖에 없는걸. 심심하니까 가끔 이렇게 기분전환이라도 해줘야지."
"기분전환이라는 말은 피곤에 찌든 사람들이 써야하지 않나요..."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마라."
대화 내용만 들어선 두 사람 사이에 30년에 가까운 나이차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친근하게 보였다. 사실 마일로의 그런 허물없는 태도 덕분에 교육생들 사이에서는 마일로에 대한 평가가 제법 괜찮았지만, 기사들 중에서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 물론 교육생들도 한동안 마일로와 가깝게 지내고 나면 그 성격에 질려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사람이 많았다.
프레이야는 어제부터 기사에 임명된 기념으로 주어지는 포상 휴가 중이었고, 휴가를 이용해서 오랜만에 앤을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거의 반년만에 만나는 거라 기대하면서 숙소를 나왔더니, 눈앞에 마일로가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총장님. 아침부터 여기는 웬일이세요?"
"누구 좀 만나려고."
"그럼 제가 가서 불러올까요? 누군데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자, 타라."
"네? 누구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거 너거든."
"......네?"
"얘기는 가면서 하자. 일단 타. 우주선 놓치면 안 되잖아?"
마일로는 그렇게 얘기하면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일단 공항까지는 같이 가야 할 모양이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못 찾고─'없는' 게 아니라 '못 찾은' 거다─ 해서 프레이야는 마일로의 차에 올라탔고, 곧 자신의 기억력을 저주했다.
마일로는 규정속도 이하로 운전하면서도 동승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잊었던 것이다.(사실 입단할 때 탔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기억하는 게 무리이긴 했다.)
"왜 그러냐? 얼굴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아뇨, 괜찮으니까 좀 서둘러 주세요."
"OK."
어차피 불안한 거라면 차라리 차를 타고 있는 시간이라도 줄이는 게 낫다는 생각에 프레이야는 마일로를 재촉했고, 그 덕에 공항에는 예상보다 10분 이상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며 한숨돌린 프레이야는 그제야 마일로의 용건이 뭔지 아직까지 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건을 물어보려고 돌아보니 마일로는 어느새 차 문을 잠그고 공항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뭐하냐, 레니핀에 안 갈 거야?"
"아니, 갈 건데요... 그보다 짐은 꺼내 주셔야죠. 아직 차 트렁크에 들어 있는데요."
"아, 미안. 잊고 있었다."
마일로는 그렇게 말하며 키홀더를 눌러 차 트렁크를 열었고, 프레이야는 가방을 꺼낸 다음 다시 닫았다. 그리곤 마일로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런데 하실 얘기 있는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네? 하지만 아까 저 만나러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거. 너 만나서 같이 간다는 얘기였지."
"......네? 레니핀에요?"
프레이야는 놀라서 마일로를 쳐다보았고, 마일로는 왜 그리 놀라냐는 듯이 빤히 마주 보았다. 이쪽이 알면서도 기억을 못한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래, 앤이랑 만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그러니까 같이 좀 가자."
"그러신가요..."
"아, 잠깐만요. 탑승 티켓은 갖고 계세요?"
승강구로 향하던 프레이야는 문득 항공편 예약에 생각이 미쳤다. 프레이야는 임명식에서 기사로 임명받을 거라고 통보 받자마자 예약을 해뒀지만, 마일로는 준비를 했는지 어떤지 아직 못 들었던 것이다.
"당연하지. 그것도 준비 안 했을 것 같냐."
척 하고 마일로가 꺼내든 티켓에 인쇄된 우주선은 프레이야가 타기로 한 그 우주선에, 자리는 무려 바로 옆자리였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의심스러워진 프레이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일로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
"수상하잖아요. 제 일정을 다 알고 계시질 않나, 티켓은 노렸다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자리이질 않나."
"아, 그거. 네가 요번에 휴가 동안 레니핀에 간다는 거 듣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좀 알아봤지."
프레이야는 마일로가 썼다는 '이런저런 방법'이 뭔지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어쩐지 모르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참았다. 사실 방금 대답할 때 마일로가 지은 미묘한 표정도 프레이야가 묻지 않게 하는데 한몫 했다.
덧붙이자면, 공항 검색대에서 프레이야의 짐에 검이 있다는 것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긴 했지만, 프레이야가 ID를 제시해 기사라는 걸 밝히고 마일로가 보증을 서는 걸로 일단락 됐다. 예전에는 AB소드를 각 기사단 본부에서 보관하며 임무를 받았을 때 가져가도록 되어있었지만, E-34 사건 이후 모든 AB소드를 기사 개인이 보관하며 항시소지 하도록 규정이 변경되었다. 언제 어디서 괴수의 습격이 있더라도 즉각 대응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저 왔어요~"
"안녕, 오랜만이다. 오, A-10도 있었구나."
"어서 오세요, 프레이야. 오랜만입니다, 마일로 님."
"프레이야, 거기다 마일로 씨까지... 프레이야는 그렇다 쳐도, 마일로 씨는 어쩐 일이세요?"
프레이야와 마일로가 카페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A-10이었고, 카운터 앞에 한가로이 앉아있던 앤은 고개를 내밀어 보고는 마일로까지 왔다는 걸 알고 조금 놀랐다.
"이젠 교관님이라고 안 하는군. 좋아,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그거 갖고 통신할 때마다 30분 넘게 시달리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거라구요."
앤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두사람을 맞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직접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마침 손님도 없던 때라 앤은 바로 가게 앞의 팻말을 'CLOSED'로 바꿔 걸었고, 그 모습을 본 마일로는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손님이 없다지만 아직 해도 안 졌는데 폐점하기엔 좀 이르지 않냐?"
"뭐 어때요? 손님은 매일 오지만 친한 사람은 매일 오지 않잖아요."
"마스터, 매상을 생각해보면 이건 그다지 현명한 대처가..."
"적자만 안 나면 돼, 적자만 안 나면."
"아니, 그러니까 지금 적자나기 직전이거든요..."
앤은 A-10의 한숨섞인 말에도 아랑곳않고 마일로와 프레이야가 자리잡은 테이블에 다과를 차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A-10도 더 버티지 못하고 도왔다.
어디서든 대화는 일단 잡담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프레이야는 교육생들이 매년 두번씩 받는 정기휴가 때마다 레니핀에 왔기 때문에 이번 대화의 시작은 견습기사를 하면서 겪었던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 기사임명과 수여받은 AB소드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그러고보니 아직 넘버와 이름을 못 들었네. 몇번 검이니?"
"여기 이건데, 넘버는 1047번이고 이름은 '아방가르드'(Avant-garde)'예요."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여행용 가방에 꽂혀있던 긴 막대를 뽑아서 테이블에 올리더니 양쪽으로 잡아당겨 검을 뽑아보였다. 날길이 약 90cm의 직도(直刀)로, 검집과 손잡이 모두 푸른색이었다. 프레이야에게서 검을 건네받은 앤은 이리저리 움직여보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1047번이라... 아직도 AB소드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긴 한 모양이네요. 제가 현역일 때에는 1007번인가 1008번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괴수를 상대할 무기가 많아서 손해볼 건 없으니까. 오히려 요즘은 그걸 쓸 사람이 적어서 문제지.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키우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그만큼 희생도 많아져서 큰일이다."
"1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그 때의 여파가 남아있네요."
"일단 한번 무너지면 그걸 되돌리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나마 예전처럼 영식들이 판치는 일이 별로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그건 그렇고... 예의 그 건 말이다."
마일로는 편안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바꿔, 테이블 위로 상체를 내밀며 말했다. 반사적으로 앤과 프레이야도 상체를 내밀었고, 자연스럽게 세명의 머리가 모여서 무슨 비밀 논의를 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과 비슷했다.
"레니핀 정부와 돌 컴퍼니와 관련된 거 말인데..."
"잠깐만요, 프레이야가 있는 데서 말해도 괜찮아요?"
"괜찮아. 프레이야도 이제 기사고, 세상이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거 다 알 나이야. 과보호는 오히려 해롭다, 앤."
"...저기요, 두분. 좀 간단하게라도 설명 해주시고 시작하시면 안 될까요?"
"그럼 그럴까. 어차피 얘기를 한번 정리하려면 처음부터 간단하게 짚고 가야할 것 같으니까,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한번 종합해보자구."
마일로는 그렇게 말하며 한번 목을 좌우로 꺾으며 푸는 시늉을 했다. 조금 얘기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마일로가 주로 말하고 중간 중간에 앤이 별도로 모은 자료들을 조합해보면 이런 얘기였다. 약 4년전, 혹은 그 전에 레니핀 행성 정부와 토르 공방 사이에서 대 괴수용 전투 인형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 인형 시리즈─AMP(A-10 Mass Production) 시리즈─는 A-10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산 코스트와 성능을 낮춰서 양산이 가능하게 만든 모델로, 양산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고가를 자랑했다. 어쨌든 레니핀 정부는 AMP 시리즈의 구입을 결정했지만 조건을 내걸었고, 그 조건은 토르의 인형사로서의 자존심을 무시하는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결국 토르는 공방의 다른 사람들과 크게 싸운 후 공방을 그만뒀고, 토르가 떠난 공방은 업체명을 돌 컴퍼니로 변경한 다음 레니핀 정부와 계약을 완료했다. 그리고 레니핀 정부는 우주력 439년부터 현재까지 AMP시리즈 총 40기를 수령한 상태였다.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프레이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AE에 적극적인 전투 지원을 하지 않는 레니핀이 굳이 대 괴수용 전력을 갖출 필요가 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레니핀은 피어시나이트 생산 덕분에 AE 분담금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잖아요. 왜 대 괴수용 전력이 필요한 거죠?"
"글쎄다, 높으신 분들 생각을 누가 제대로 알겠냐만은... 아마도 역시 돈 때문이 아닐까 싶다."
""...네에?""
프레이야와 앤은 동시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앤은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프레이야를 위해 마일로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피어시나이트는 AB소자의 주원료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쓸모가 많아. 오히려 AB소자를 만드는데 쓰기보다 다른 용도의 재료들을 추출하는 게 더 돈이 되지. 같은 양의 피어시나이트에서 산출되는 양도 더 많고. 하지만 AB소자를 만들기 위해 기사단에게 피어시나이트를 제공하면 레니핀 쪽에는 남는 게 없지. 대신 그만큼 AE 분담금을 감면해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 게 아닐까? 실제로 피어시나이트를 기사단에 제공하지 않고 무역을 해버리면 AE 분담금 같은 건 무시해도 될 정도로 엄청난 부를 쌓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니, 정말 그럴 수도 있어. 게다가 알아본 바로는, 레니핀은 연합 탈퇴도 불사할 모양이에요."
앤이 한 말의 앞부분은 프레이야, 뒷부분은 마일로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 말에 대한 반응은 프레이야가 더 컸다. 프레이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네?! 말도 안 돼요, 정말이에요?!"
"연합 탈퇴라니, 설마... 아니, 그랬나. 그래서 그랬을 수도 있겠군."
마일로도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짐작가는 바가 있는 것같았다. 앤과 마일로의 반응을 본 프레이야는 설명 좀 해달라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앤이 설명해주었다.
"그 AMP시리즈라는 인형 말이야, 대 괴수용 전력이라잖니. 그렇다면 괴수를 상대로 싸울 수단이 있는데, 굳이 연합에 가입해서 AE와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며 여러 지원을 해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 적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커."
"맙소사,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프레이야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행성 주민들의 안전을 도박에 건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프레이야를 보며 마일로가 입을 열었다.
"뭐,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레니핀은 피어시나이트 외에는 특별난 무역대상품목이 없으니까. 아마 레니핀 행성 정부의 자금 상황은 지금 이 카페의 장부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마지막 말은 나름대로 익살을 떤 것이었지만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심지어 익살을 떤 본인조차도 얼굴이 굳은 채였다. 침묵 속에서, A-10이 식어버린 차를 치우고 새로 끓여오는 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후, 프레이야가 마일로를 보며 말했다.
"보고하실 거죠?"
"보고? 어디다?"
"당연히 원로원과 마더 나이트죠. 연합 정부와 AE 사령부에도 얘기해줘야 할 테고요."
"왜 얘기해줘야 하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니잖아요!"
"그래, 보통 큰일이 아니지. 그런데 그걸 왜 우리가 나서야 하냐?"
"이대로는 레니핀이 연합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면서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레니핀이 연합에서 탈퇴하면, 뭐가 문제가 되지?"
"그건..."
대답을 하려던 프레이야는 말문이 막혔다. 레니핀이 연합에서 탈퇴한다고 해도 당장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레니핀이 피어시나이트 최대 생산지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 우주에서 유일한 산출지인 것도 아니고, 레니핀의 목적은 피어시나이트의 독점이 아니니 무역을 통해 반출할 것이다. 이전과는 조금 방식이 달라지기는 할 테지만 피어시나이트의 유통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아, 그래요! 행성 주민들의 안전이요!"
"그래? 레니핀은 절대방어선 한참 안쪽인데?"
"절대방어선이라고 반드시 괴수가 통과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잖아요! 이미 전례도 두 번이나 있었고!"
"그렇게 따지면 어느 별이든 안전하지 않아. 오히려 대 괴수 전력을 갖추고 있는 레니핀이 더 나을 거라고 보는데?"
마일로의 냉정한 말에 프레이야는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든 반박을 하려고 애를 쓰는 프레이야를 보던 앤이 조용히, 타이르듯이 말했다.
"진정해, 프레이야. 정말 레니핀이 연합에서 탈퇴한다고 해도, 그리고 만일 괴수가 침공한다고 해도 AE나 기사단이 레니핀을 포기하지는 않아. 어쨌든 일단 AB소자의 주원료 최대 생산지니까. 대신 협상을 한다고 좀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AMP 시리즈라는 것도 있으니 시간벌이 정도는 될 거야. 아, 맞다. A-10, 네 '동생들'의 성능은 어때?"
"전투력은 리미터 해제시 저의 30%예요. 단독으로 싱글넘버와 싸울 수는 있지만, 2형쯤 되면 승패는 장담할 수 없겠네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A-10은 앤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앤은 프레이야와 다시 눈을 마주치며 '들었지?'하는 눈짓을 했다. 확실히 2형쯤 되면 어지간한 베테랑 기사가 아니면 1:1은 무리인데, AMP시리즈는 승패는 장담할 수 없지만 1:1은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거기다 지금까지 40기가 확보되었다고 하니, 이건 기사단에서 작정하고 파견하는 규모보다 조금 작은 수준의 전력이었다.
"뭐, 걱정을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호들갑 떨 일도 아니라는 거다. 이게 큰 문제로 발전하게 되면 또 거기에 맞춰서 무슨 해결책이 나올 테니까. 설마 전쟁까지 갈 정도로 양쪽 높으신 분들이 정신줄 놓고 있지는 않겠지."
5일 후, 프레이야의 휴가가 끝나 두 사람은 중앙기사단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휴가기간 중 마일로에게 몇번이나 메일로 연락이 왔지만, 마일로는 내용을 한번씩 훑어본 다음 '돌아가서 처리해도 돼'라며 전부 무시해버렸다. 프레이야는 그 모습을 보며 정말 괜찮을지 걱정했지만, 앤은 고생하는 건 어차피 마일로니까 상관없는 일이라며 프레이야에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말했다.(덧붙이자면 마일로는 복귀한 다음 일주일간 결재서류에 파묻혀 지냈다.)
"그럼 갈게요. 몸조심해요, 앤."
"걱정하지 마, 아직 팔팔하다구."
"밤마다 어깨 주물러라, 허리 두들겨라 하시는 건 어디 사는 누구신가요, 마스터."
"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설마 A-10하고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겠지?"
"'거기'는 뭐에요, '거기'는! 아니, 그보다 명색이 성직자 겸임이신 분이 그런 말 막 해도 되는 거에요?!"
앤에게 농담(?)을 건넨 마일로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앤은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더니 오른손을 내밀어 잡았고, 악수를 끝낸 마일로가 다시 말했다.
"그럼 이번엔 이만 가마.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 조심해라. 정기 진료 같은 거 빼먹지 말고. A-10 너도 신경 좀 써주고."
"걱정마세요. 제가 있는 한 절대 못 빼먹으니까."
"제가 무슨 어린애냐구요..."
앤은 프레이야와 마일로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게 문앞에서 두사람을 보았고,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간단하게 가게 정리를 끝내고 나온 A-10이 말을 걸 때까지.
"마스터."
"응... 그래, 들어갈게."
"곧 다시 만날 거에요."
"그래."
앤은 A-10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로 들어갔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떠들썩했다가 사람 수가 확 줄어들자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헤어진 것도 아니니 한편으로는 다음에 만날 일이 기대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A-10의 말은 확실히,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우주력 443년 11월, 레니핀 행성 정부는 AMP시리즈 10기를 추가로 수령하여 총 50기를 보유하게 된다. 그 직후 공식적으로 연합 탈퇴 및 AE 분담금 납부 중단을 선언하고, 이 발표에 기사단과 AE 사령부는 유감과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고 피어시나이트 공급과 관련하여 레니핀과 기사단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지만, 양측의 이해가 엇갈리며 몇달간 별다른 소득없이 시간만 보내게 된다.
그리고, 해를 넘긴 우주력 444년.
레니핀 행성계에 여왕괴수가 둥지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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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시나이트(Piercinite)
AB소자의 주원료가 되는 희귀 광석으로, 피어시나이트 100만톤에서 AB소자 1나노그램이 나오면 많이 나온다고 본다. 그나마도 피어시나이트가 존재하는 항성계는 가뭄에 콩나는 수준도 안 될 정도로 드물다.
사실 AB소자 제조 외에도 용도가 다양해서, 광물이 아닌 광석 상태에서도 우주 최고가를 자랑하는 품목. 현재 레니핀 행성계가 최대 산출지이다.
AMP 시리즈
토르 공방에서 개발된 A-10의 양산형.(A-10 Mass Production) 오리지널 노심이 아닌 유사노심 탑재로, 성능은 A-10의 30%가 한계이지만 싱글넘버 상위괴수와 1:1이 가능하다. 레니핀 정부의 요구로 감정 프로그램은 제거되어 있는데, 이 문제로 토르와 조수들이 크게 싸웠고 결국엔 토르가 공방을 때려 치웠다.
1047번 기사검 '아방가르드'(Avant-garde)
날길이 약 90cm의 직도(直刀). 특별한 능력은 없으며, 강도는 11번검 먼데이와 12번검 튜스데이에 버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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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참 간사하지요. 정말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극한 상황이 아니면 금방이라도 머리를 쳐드는 게 탐욕입니다.
하지만 레니핀 입장에선 몇십년째 고가의 희귀광석을 수탈당하고 있는 상황이니 열받을 만도 하지요. 게다가 실제로 괴수의 위협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지역에 있다면 더더욱...
그리고 기사단이라는 단체 자체가 초법적인 위치에 있다보니 은근히 각 성계 정부로서는 반발심이 조금씩은 있을 겁니다.
그럼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뭐가?"
우주력 443년, 리아드 중앙 우주공항. 한쌍의 남녀가 막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긴 금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성과 회색 머리에 안대를 한 초로의 남자로, 아무리 봐도 연인이나 가족은 아니었다. 짐은 그리 크지 않은 여행용 가방 하나씩이 전부였고, 거기에 더해 여성의 가방에는 기다란 파란색 막대기 같은 것이 하나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여성은 며칠 전 기사로 임명된 프레이야, 남성은 프레이야를 따라온 마일로였다.
"기사단 교육부 총장이 이렇게 가볍게 자리를 비우셔도 되냐구요."
"아, 그거? 괜찮아, 어차피 총장이라고 해봤자 하는 일은 자리 지키고 앉아서 서류에 도장찍는 일밖에 없는걸. 심심하니까 가끔 이렇게 기분전환이라도 해줘야지."
"기분전환이라는 말은 피곤에 찌든 사람들이 써야하지 않나요..."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마라."
대화 내용만 들어선 두 사람 사이에 30년에 가까운 나이차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친근하게 보였다. 사실 마일로의 그런 허물없는 태도 덕분에 교육생들 사이에서는 마일로에 대한 평가가 제법 괜찮았지만, 기사들 중에서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 물론 교육생들도 한동안 마일로와 가깝게 지내고 나면 그 성격에 질려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사람이 많았다.
프레이야는 어제부터 기사에 임명된 기념으로 주어지는 포상 휴가 중이었고, 휴가를 이용해서 오랜만에 앤을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거의 반년만에 만나는 거라 기대하면서 숙소를 나왔더니, 눈앞에 마일로가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총장님. 아침부터 여기는 웬일이세요?"
"누구 좀 만나려고."
"그럼 제가 가서 불러올까요? 누군데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자, 타라."
"네? 누구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거 너거든."
"......네?"
"얘기는 가면서 하자. 일단 타. 우주선 놓치면 안 되잖아?"
마일로는 그렇게 얘기하면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일단 공항까지는 같이 가야 할 모양이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못 찾고─'없는' 게 아니라 '못 찾은' 거다─ 해서 프레이야는 마일로의 차에 올라탔고, 곧 자신의 기억력을 저주했다.
마일로는 규정속도 이하로 운전하면서도 동승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잊었던 것이다.(사실 입단할 때 탔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기억하는 게 무리이긴 했다.)
"왜 그러냐? 얼굴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아뇨, 괜찮으니까 좀 서둘러 주세요."
"OK."
어차피 불안한 거라면 차라리 차를 타고 있는 시간이라도 줄이는 게 낫다는 생각에 프레이야는 마일로를 재촉했고, 그 덕에 공항에는 예상보다 10분 이상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며 한숨돌린 프레이야는 그제야 마일로의 용건이 뭔지 아직까지 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건을 물어보려고 돌아보니 마일로는 어느새 차 문을 잠그고 공항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뭐하냐, 레니핀에 안 갈 거야?"
"아니, 갈 건데요... 그보다 짐은 꺼내 주셔야죠. 아직 차 트렁크에 들어 있는데요."
"아, 미안. 잊고 있었다."
마일로는 그렇게 말하며 키홀더를 눌러 차 트렁크를 열었고, 프레이야는 가방을 꺼낸 다음 다시 닫았다. 그리곤 마일로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런데 하실 얘기 있는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네? 하지만 아까 저 만나러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거. 너 만나서 같이 간다는 얘기였지."
"......네? 레니핀에요?"
프레이야는 놀라서 마일로를 쳐다보았고, 마일로는 왜 그리 놀라냐는 듯이 빤히 마주 보았다. 이쪽이 알면서도 기억을 못한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래, 앤이랑 만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그러니까 같이 좀 가자."
"그러신가요..."
"아, 잠깐만요. 탑승 티켓은 갖고 계세요?"
승강구로 향하던 프레이야는 문득 항공편 예약에 생각이 미쳤다. 프레이야는 임명식에서 기사로 임명받을 거라고 통보 받자마자 예약을 해뒀지만, 마일로는 준비를 했는지 어떤지 아직 못 들었던 것이다.
"당연하지. 그것도 준비 안 했을 것 같냐."
척 하고 마일로가 꺼내든 티켓에 인쇄된 우주선은 프레이야가 타기로 한 그 우주선에, 자리는 무려 바로 옆자리였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의심스러워진 프레이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일로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
"수상하잖아요. 제 일정을 다 알고 계시질 않나, 티켓은 노렸다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자리이질 않나."
"아, 그거. 네가 요번에 휴가 동안 레니핀에 간다는 거 듣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좀 알아봤지."
프레이야는 마일로가 썼다는 '이런저런 방법'이 뭔지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어쩐지 모르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참았다. 사실 방금 대답할 때 마일로가 지은 미묘한 표정도 프레이야가 묻지 않게 하는데 한몫 했다.
덧붙이자면, 공항 검색대에서 프레이야의 짐에 검이 있다는 것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긴 했지만, 프레이야가 ID를 제시해 기사라는 걸 밝히고 마일로가 보증을 서는 걸로 일단락 됐다. 예전에는 AB소드를 각 기사단 본부에서 보관하며 임무를 받았을 때 가져가도록 되어있었지만, E-34 사건 이후 모든 AB소드를 기사 개인이 보관하며 항시소지 하도록 규정이 변경되었다. 언제 어디서 괴수의 습격이 있더라도 즉각 대응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저 왔어요~"
"안녕, 오랜만이다. 오, A-10도 있었구나."
"어서 오세요, 프레이야. 오랜만입니다, 마일로 님."
"프레이야, 거기다 마일로 씨까지... 프레이야는 그렇다 쳐도, 마일로 씨는 어쩐 일이세요?"
프레이야와 마일로가 카페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A-10이었고, 카운터 앞에 한가로이 앉아있던 앤은 고개를 내밀어 보고는 마일로까지 왔다는 걸 알고 조금 놀랐다.
"이젠 교관님이라고 안 하는군. 좋아,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그거 갖고 통신할 때마다 30분 넘게 시달리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거라구요."
앤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두사람을 맞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직접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마침 손님도 없던 때라 앤은 바로 가게 앞의 팻말을 'CLOSED'로 바꿔 걸었고, 그 모습을 본 마일로는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손님이 없다지만 아직 해도 안 졌는데 폐점하기엔 좀 이르지 않냐?"
"뭐 어때요? 손님은 매일 오지만 친한 사람은 매일 오지 않잖아요."
"마스터, 매상을 생각해보면 이건 그다지 현명한 대처가..."
"적자만 안 나면 돼, 적자만 안 나면."
"아니, 그러니까 지금 적자나기 직전이거든요..."
앤은 A-10의 한숨섞인 말에도 아랑곳않고 마일로와 프레이야가 자리잡은 테이블에 다과를 차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A-10도 더 버티지 못하고 도왔다.
어디서든 대화는 일단 잡담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프레이야는 교육생들이 매년 두번씩 받는 정기휴가 때마다 레니핀에 왔기 때문에 이번 대화의 시작은 견습기사를 하면서 겪었던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 기사임명과 수여받은 AB소드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그러고보니 아직 넘버와 이름을 못 들었네. 몇번 검이니?"
"여기 이건데, 넘버는 1047번이고 이름은 '아방가르드'(Avant-garde)'예요."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여행용 가방에 꽂혀있던 긴 막대를 뽑아서 테이블에 올리더니 양쪽으로 잡아당겨 검을 뽑아보였다. 날길이 약 90cm의 직도(直刀)로, 검집과 손잡이 모두 푸른색이었다. 프레이야에게서 검을 건네받은 앤은 이리저리 움직여보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1047번이라... 아직도 AB소드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긴 한 모양이네요. 제가 현역일 때에는 1007번인가 1008번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괴수를 상대할 무기가 많아서 손해볼 건 없으니까. 오히려 요즘은 그걸 쓸 사람이 적어서 문제지.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키우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그만큼 희생도 많아져서 큰일이다."
"1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그 때의 여파가 남아있네요."
"일단 한번 무너지면 그걸 되돌리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나마 예전처럼 영식들이 판치는 일이 별로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그건 그렇고... 예의 그 건 말이다."
마일로는 편안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바꿔, 테이블 위로 상체를 내밀며 말했다. 반사적으로 앤과 프레이야도 상체를 내밀었고, 자연스럽게 세명의 머리가 모여서 무슨 비밀 논의를 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과 비슷했다.
"레니핀 정부와 돌 컴퍼니와 관련된 거 말인데..."
"잠깐만요, 프레이야가 있는 데서 말해도 괜찮아요?"
"괜찮아. 프레이야도 이제 기사고, 세상이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거 다 알 나이야. 과보호는 오히려 해롭다, 앤."
"...저기요, 두분. 좀 간단하게라도 설명 해주시고 시작하시면 안 될까요?"
"그럼 그럴까. 어차피 얘기를 한번 정리하려면 처음부터 간단하게 짚고 가야할 것 같으니까,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한번 종합해보자구."
마일로는 그렇게 말하며 한번 목을 좌우로 꺾으며 푸는 시늉을 했다. 조금 얘기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마일로가 주로 말하고 중간 중간에 앤이 별도로 모은 자료들을 조합해보면 이런 얘기였다. 약 4년전, 혹은 그 전에 레니핀 행성 정부와 토르 공방 사이에서 대 괴수용 전투 인형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 인형 시리즈─AMP(A-10 Mass Production) 시리즈─는 A-10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산 코스트와 성능을 낮춰서 양산이 가능하게 만든 모델로, 양산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고가를 자랑했다. 어쨌든 레니핀 정부는 AMP 시리즈의 구입을 결정했지만 조건을 내걸었고, 그 조건은 토르의 인형사로서의 자존심을 무시하는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결국 토르는 공방의 다른 사람들과 크게 싸운 후 공방을 그만뒀고, 토르가 떠난 공방은 업체명을 돌 컴퍼니로 변경한 다음 레니핀 정부와 계약을 완료했다. 그리고 레니핀 정부는 우주력 439년부터 현재까지 AMP시리즈 총 40기를 수령한 상태였다.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프레이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AE에 적극적인 전투 지원을 하지 않는 레니핀이 굳이 대 괴수용 전력을 갖출 필요가 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레니핀은 피어시나이트 생산 덕분에 AE 분담금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잖아요. 왜 대 괴수용 전력이 필요한 거죠?"
"글쎄다, 높으신 분들 생각을 누가 제대로 알겠냐만은... 아마도 역시 돈 때문이 아닐까 싶다."
""...네에?""
프레이야와 앤은 동시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앤은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프레이야를 위해 마일로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피어시나이트는 AB소자의 주원료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쓸모가 많아. 오히려 AB소자를 만드는데 쓰기보다 다른 용도의 재료들을 추출하는 게 더 돈이 되지. 같은 양의 피어시나이트에서 산출되는 양도 더 많고. 하지만 AB소자를 만들기 위해 기사단에게 피어시나이트를 제공하면 레니핀 쪽에는 남는 게 없지. 대신 그만큼 AE 분담금을 감면해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 게 아닐까? 실제로 피어시나이트를 기사단에 제공하지 않고 무역을 해버리면 AE 분담금 같은 건 무시해도 될 정도로 엄청난 부를 쌓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니, 정말 그럴 수도 있어. 게다가 알아본 바로는, 레니핀은 연합 탈퇴도 불사할 모양이에요."
앤이 한 말의 앞부분은 프레이야, 뒷부분은 마일로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 말에 대한 반응은 프레이야가 더 컸다. 프레이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네?! 말도 안 돼요, 정말이에요?!"
"연합 탈퇴라니, 설마... 아니, 그랬나. 그래서 그랬을 수도 있겠군."
마일로도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짐작가는 바가 있는 것같았다. 앤과 마일로의 반응을 본 프레이야는 설명 좀 해달라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앤이 설명해주었다.
"그 AMP시리즈라는 인형 말이야, 대 괴수용 전력이라잖니. 그렇다면 괴수를 상대로 싸울 수단이 있는데, 굳이 연합에 가입해서 AE와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며 여러 지원을 해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 적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커."
"맙소사,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프레이야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행성 주민들의 안전을 도박에 건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프레이야를 보며 마일로가 입을 열었다.
"뭐,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레니핀은 피어시나이트 외에는 특별난 무역대상품목이 없으니까. 아마 레니핀 행성 정부의 자금 상황은 지금 이 카페의 장부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마지막 말은 나름대로 익살을 떤 것이었지만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심지어 익살을 떤 본인조차도 얼굴이 굳은 채였다. 침묵 속에서, A-10이 식어버린 차를 치우고 새로 끓여오는 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후, 프레이야가 마일로를 보며 말했다.
"보고하실 거죠?"
"보고? 어디다?"
"당연히 원로원과 마더 나이트죠. 연합 정부와 AE 사령부에도 얘기해줘야 할 테고요."
"왜 얘기해줘야 하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니잖아요!"
"그래, 보통 큰일이 아니지. 그런데 그걸 왜 우리가 나서야 하냐?"
"이대로는 레니핀이 연합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면서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레니핀이 연합에서 탈퇴하면, 뭐가 문제가 되지?"
"그건..."
대답을 하려던 프레이야는 말문이 막혔다. 레니핀이 연합에서 탈퇴한다고 해도 당장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레니핀이 피어시나이트 최대 생산지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 우주에서 유일한 산출지인 것도 아니고, 레니핀의 목적은 피어시나이트의 독점이 아니니 무역을 통해 반출할 것이다. 이전과는 조금 방식이 달라지기는 할 테지만 피어시나이트의 유통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아, 그래요! 행성 주민들의 안전이요!"
"그래? 레니핀은 절대방어선 한참 안쪽인데?"
"절대방어선이라고 반드시 괴수가 통과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잖아요! 이미 전례도 두 번이나 있었고!"
"그렇게 따지면 어느 별이든 안전하지 않아. 오히려 대 괴수 전력을 갖추고 있는 레니핀이 더 나을 거라고 보는데?"
마일로의 냉정한 말에 프레이야는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든 반박을 하려고 애를 쓰는 프레이야를 보던 앤이 조용히, 타이르듯이 말했다.
"진정해, 프레이야. 정말 레니핀이 연합에서 탈퇴한다고 해도, 그리고 만일 괴수가 침공한다고 해도 AE나 기사단이 레니핀을 포기하지는 않아. 어쨌든 일단 AB소자의 주원료 최대 생산지니까. 대신 협상을 한다고 좀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AMP 시리즈라는 것도 있으니 시간벌이 정도는 될 거야. 아, 맞다. A-10, 네 '동생들'의 성능은 어때?"
"전투력은 리미터 해제시 저의 30%예요. 단독으로 싱글넘버와 싸울 수는 있지만, 2형쯤 되면 승패는 장담할 수 없겠네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A-10은 앤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앤은 프레이야와 다시 눈을 마주치며 '들었지?'하는 눈짓을 했다. 확실히 2형쯤 되면 어지간한 베테랑 기사가 아니면 1:1은 무리인데, AMP시리즈는 승패는 장담할 수 없지만 1:1은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거기다 지금까지 40기가 확보되었다고 하니, 이건 기사단에서 작정하고 파견하는 규모보다 조금 작은 수준의 전력이었다.
"뭐, 걱정을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호들갑 떨 일도 아니라는 거다. 이게 큰 문제로 발전하게 되면 또 거기에 맞춰서 무슨 해결책이 나올 테니까. 설마 전쟁까지 갈 정도로 양쪽 높으신 분들이 정신줄 놓고 있지는 않겠지."
5일 후, 프레이야의 휴가가 끝나 두 사람은 중앙기사단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휴가기간 중 마일로에게 몇번이나 메일로 연락이 왔지만, 마일로는 내용을 한번씩 훑어본 다음 '돌아가서 처리해도 돼'라며 전부 무시해버렸다. 프레이야는 그 모습을 보며 정말 괜찮을지 걱정했지만, 앤은 고생하는 건 어차피 마일로니까 상관없는 일이라며 프레이야에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말했다.(덧붙이자면 마일로는 복귀한 다음 일주일간 결재서류에 파묻혀 지냈다.)
"그럼 갈게요. 몸조심해요, 앤."
"걱정하지 마, 아직 팔팔하다구."
"밤마다 어깨 주물러라, 허리 두들겨라 하시는 건 어디 사는 누구신가요, 마스터."
"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설마 A-10하고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겠지?"
"'거기'는 뭐에요, '거기'는! 아니, 그보다 명색이 성직자 겸임이신 분이 그런 말 막 해도 되는 거에요?!"
앤에게 농담(?)을 건넨 마일로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앤은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더니 오른손을 내밀어 잡았고, 악수를 끝낸 마일로가 다시 말했다.
"그럼 이번엔 이만 가마.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 조심해라. 정기 진료 같은 거 빼먹지 말고. A-10 너도 신경 좀 써주고."
"걱정마세요. 제가 있는 한 절대 못 빼먹으니까."
"제가 무슨 어린애냐구요..."
앤은 프레이야와 마일로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게 문앞에서 두사람을 보았고,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간단하게 가게 정리를 끝내고 나온 A-10이 말을 걸 때까지.
"마스터."
"응... 그래, 들어갈게."
"곧 다시 만날 거에요."
"그래."
앤은 A-10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로 들어갔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떠들썩했다가 사람 수가 확 줄어들자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헤어진 것도 아니니 한편으로는 다음에 만날 일이 기대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A-10의 말은 확실히,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우주력 443년 11월, 레니핀 행성 정부는 AMP시리즈 10기를 추가로 수령하여 총 50기를 보유하게 된다. 그 직후 공식적으로 연합 탈퇴 및 AE 분담금 납부 중단을 선언하고, 이 발표에 기사단과 AE 사령부는 유감과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고 피어시나이트 공급과 관련하여 레니핀과 기사단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지만, 양측의 이해가 엇갈리며 몇달간 별다른 소득없이 시간만 보내게 된다.
그리고, 해를 넘긴 우주력 444년.
레니핀 행성계에 여왕괴수가 둥지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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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시나이트(Piercinite)
AB소자의 주원료가 되는 희귀 광석으로, 피어시나이트 100만톤에서 AB소자 1나노그램이 나오면 많이 나온다고 본다. 그나마도 피어시나이트가 존재하는 항성계는 가뭄에 콩나는 수준도 안 될 정도로 드물다.
사실 AB소자 제조 외에도 용도가 다양해서, 광물이 아닌 광석 상태에서도 우주 최고가를 자랑하는 품목. 현재 레니핀 행성계가 최대 산출지이다.
AMP 시리즈
토르 공방에서 개발된 A-10의 양산형.(A-10 Mass Production) 오리지널 노심이 아닌 유사노심 탑재로, 성능은 A-10의 30%가 한계이지만 싱글넘버 상위괴수와 1:1이 가능하다. 레니핀 정부의 요구로 감정 프로그램은 제거되어 있는데, 이 문제로 토르와 조수들이 크게 싸웠고 결국엔 토르가 공방을 때려 치웠다.
1047번 기사검 '아방가르드'(Avant-garde)
날길이 약 90cm의 직도(直刀). 특별한 능력은 없으며, 강도는 11번검 먼데이와 12번검 튜스데이에 버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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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참 간사하지요. 정말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극한 상황이 아니면 금방이라도 머리를 쳐드는 게 탐욕입니다.
하지만 레니핀 입장에선 몇십년째 고가의 희귀광석을 수탈당하고 있는 상황이니 열받을 만도 하지요. 게다가 실제로 괴수의 위협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지역에 있다면 더더욱...
그리고 기사단이라는 단체 자체가 초법적인 위치에 있다보니 은근히 각 성계 정부로서는 반발심이 조금씩은 있을 겁니다.
그럼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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