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건담 중 하나, 그러나 특별한 건담
'건담'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애니메이션은 상당히 많다. 그에 따라 각 작품의 특성도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V 건담처럼, 눈앞에서 온몸이 으스러져 사망한 어머니의 머리가 들어있는 헬맷을 안고 귀환하는 13살짜리 꼬마가 나오는 작품도 있는가 하면, 건담 X처럼 전 지구가 거의 폐허가 된 작품도 있다.
G 건담처럼 드래곤볼 식의 분위기를 가지는 작품도 있고, 08소대처럼 밀리터리물의 성격이 강한 작품(초반부 한정)도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작품, [기동전사 건담 0080 : 주머니 속의 전쟁]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그 수많은 건담 작품 중에서도, 서술 시점이 어린 아이이며, 이처럼 전쟁의 슬픔과 비극성을 드러낸 작품은 없었던 것이다.
줄거리 보기
(미리니름 주의, 스크롤 압박 주의)
[기동전사 건담 0080 : 주머니 속의 전쟁](이하 0080)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주인공이 11살에 불과한 어린 아이라는 점이다. 물론 바니나 크리스 역시 주인공이지만, 이 작품의 서술관점은 알의 시점에 가깝다.
대부분의 건담 시리즈 작품들은 '주인공이 뜻하지 않게 전쟁에 휘말리며 겪는 일'이 주 내용이다. 0080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알은 전투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다른 건담 시리즈의 주인공들이 '격추시키면 상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행동하는 반면, 알에게는 전쟁이란 그저 조금 거대한 오락거리일 뿐이다.
마치 오늘날의 아이들이 건달과 깡패들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처럼, 그 진실된 모습을 모른 채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어렴풋한 환상에 매료되어 있는 것이다.
이 0080이라는 작품은, 그런 아이들 중 한명이었던 알이라는 소년이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 하게 되는, 순수했던 어린 아이에서 세상에 짓눌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1년전쟁 전사(戰史)에도 기록되지 않을 만한 작은 사건, 그러나 너무나 큰 의미
0080의 서술 시기는 UC 0079년 12월, 약 한달 간이다. 이 시기, 전황은 이미 연방군의 승리로 굳어져가고 있었고, 지온군은 소량의 고성능 신형기 개발로 어떻게든 열세를 벗어나려하고 있었다. 사이클롭스 대(隊)에 의한 중립 콜로니 침투와 파괴 공작, 남극 조약을 위반하는 핵공격 시도 등은 지온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사실상 전쟁이 끝나가는 상황에서, 한 중립 콜로니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1년전쟁 전체에서 볼 때 아주 작은 사건이었다. 전장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었고, 뉴타입 전용MS인 알렉스는 결국 아무로 레이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지온의 거점 중 하나인 솔로몬이 연방군에게 함락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온은 전황을 뒤집지 못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사실상의 항복선언이었다.
분명 우주 콜로니 '사이드 6'에서 발생한 두 번에 걸친 MS 전투는 1년전쟁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하지만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기에는 충분한, 너무나도 거대한 사건이었다. 소년은 이 기간 동안 자신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기뻐했고,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며 즐거워했으며, 대원들의 죽음에 두려워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또다른 좋아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전쟁은 더 이상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었다. 있어서는 안되는 무섭고 슬픈 일, 전쟁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전쟁이란 대체 무엇인가?
(위 그림은 08소대 관련 그림)
건담 시리즈는 모두 '전쟁'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무로 레이는 전쟁과 싸움을 통해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했고, 0083에서는 서로의 신념이 충돌하는 현장이 전장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0080은 하나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건담 시리즈에서도 동료들이 죽는 모습은 항상 나온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첫째가 슬픔, 둘째가 투쟁심 또는 복수심이었다. 죽은 사람을 가슴에 품고, 계속 싸워나가는 식이었다.
0080은 다르다. 전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던 아이가 눈앞에서 죽는 사람을 보게 되면서, 슬픔과 공포를 느낀다. 그것이 진실인 것이다. 전쟁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전사들도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그들은 피로 피를 씻어내는 곳에서 살아가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피냄새를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솔직히 건담 시리즈는 전쟁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기동전사 건담'을 기획했을 당시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근래 들어서는 전쟁이 '부득이한 경우 사용하는 설득 수단'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요즘은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져, '내가 정의고, 상대가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서 따르게 만든다'는 행동 방식을 가지는 작품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선과 악의 구별이 불가능한, 혼돈으로 가득찬 현실적인 세계'라는 특징으로 '리얼 로봇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건담 시리즈가, 언제부터 '주인공은 절대선, 상대방은 무조건 악'이라는 정의가 통하게 되었는지 정말 의문이다.
하지만, 0080은 전쟁을 미화하지 않는다. 캠퍼와 알렉스가 교전했던 밤, 피해자는 사망 246명, 중경상 572명에 달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연방군의 공격에 학교가 무너지고, 격추된 MS의 추락지역에는 아이를 끌어안은 어머니가 있었다. 전쟁이라면 희생자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쟁을 하는 당사자의 논리이다. 가족을 잃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크리스와 바니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밤, 바니와 크리스는 서로에게 자신을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마주친 것은, 연방군 VS 지온군의 입장에서였다. 서로에게 마음을 두고, 똑같이 콜로니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웠다.
사람이 시덥잖은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 옆에서 애꿎은 사람이 그에 휘말리는 것, 그것이 좀 더 규모가 커진 것. 그 와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잃는 것. 그것이 전쟁이다.
건담의 의미, 0080의 의미
생각해보면 0080은 굳이 건담 시리즈로 제작될 필요는 없었다. 현대나 근대의 전쟁터로 배경을 바꾸어, MS 교전 대신 병사들의 교전 장면으로 대체했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건담이라는 이름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건담이기에 0080이 가지는 의미는 더욱 커진다. 작품 내에서 건담이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은, 현실에서 전쟁이라는 단어에 느끼는 환상과 같은 의미로 비춰진다.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그래서 막연히 동경하고 약간은 두려워하며, 그러면서 결코 호기심을 접을 수 없는 대상. 말하자면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손 안의 전쟁, 주머니 속의 전쟁
맨 위의 그림은 오프닝 화면이 아닌, 아이캣치의 캡쳐이다. 아이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실탄과 탄창, 주머니칼, 그리고 미사일 장식. 0080에서 아이들은 이러한 물건을 수집하며 전쟁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는다. 결코 전쟁의 슬픔과 추악함을 모른 채, 그 화려한 폭발과 멋진 외양에 환호한다. 자신의 손 안에, 자신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것이 전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그 아이들에게는 손에 쥐어진 것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이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비참하고 슬픈 모습을 모두 알게 된 알은 더 이상 전쟁을 동경하지 않는다. 알에게 있어, 주머니 속에서 잠자고 있던 전쟁은 이제 현실이 되어 견디기 힘든 짐이 되었다. 이제 알은 또 다른 주머니를 준비하여, 자신이 겪은 전쟁이라는 슬픔을 담아둘 것이다. 어른이라는 자신의 새로운 주머니에.
마지막 잡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담 기체는 V2 건담과 F 91이며, 가장 좋아하는 건담 작품은 V건담과 0083이다. 하지만,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0080을 꼽는다. 전 6화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제작진은 담고자 했던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었고, 그것은 슬픈 감동으로 시청자에게 다가온다. 여전히 건담이라는 환상에 젖어있는 팬이라면, 그리고 건담을 SEED나 SEED DETINY로 접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 봐야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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