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하아..."

오늘도 제독 업무용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본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이니, 이것은 틀림없는 서류로구나. 그런데 의미를 모르겠다는 것은 대체 어찌 된 일인고...

"...제독."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반쯤 정신줄을 놓고 현실도피를 시전하고 있으려니, 옆에 있는 비서용 책상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올린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던 카가씨가 나를 불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른 게 아니라 주의를 환기시켰달까, 죄송합니다농땡이피웠습니다잠시내가처한상황을잊고싶었을뿐이에요그러니그런차갑다못해심해서함조차도망칠것같고절대영도마저뚫고내려갈듯한눈빛은참아주 세요.

그렇게 내가 식은 땀을 흘리며 다시 알아먹지 못할 서류와 악전고투를 재개하자, 카가씨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찻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물이 끓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들은 카가씨가 홍차를 타서 내 손 옆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첫번째는 현재 자원 현황 보고네요. 각 자원 재고량은 연료 68712, 탄약 54572, 강재 206771, 보크사이트 128546, 개발자재 949, 개수자재 22, 고속수복재 1491, 고속건조재 1820이군요. 자원 불균형이 약간 심하긴 하지만 진수부 운영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아, 으, 응. 그렇구나..."

"그리고 두번째는 이번주에 진행중인 임무들의 진행상황에 대한 보고서로군요. 완수 목록은 주간 30회 출격, 주간 15회 개수, 주간 30회 원정, 주간 도쿄 급행 원정 및 반복 7회네요. 그 외에 진행중인 주간 임무는 없는 모양입니다. 세번째는..."

카가씨는 내가 계속 붙잡고 씨름하고 있던 서류의 내용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야 1시간동안 첫번째 보고서의 첫번째장조차 못 넘어가고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화를 내지 않고-적어도 내색은 안 하면서- 최대한 나를 보좌해주려는 것이 카가씨다. 매번 고마울 따름이다.

"제독, 다 들으셨나요?"

"어, 응. 알았어. 일단 순조롭다고 할까, 큰 문제는 없구나."

"그런 것 같네요. 그럼 저는 다시 대본영에 올릴 보고서를 검토하겠습니다."

"부탁할게. 나한테는 역시 어려워서."

내 말에 카가씨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보고서를 훑어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나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까, 시작은 그놈의 항공사였다. 대체 왜 굳이 악천후 속을 돌파하려고 하느냔 말이다. 아, 그러고보면 예전에 굳이 악천후를 뚫고 가려다 벼락맞고 레이돔 날려먹은 일이 있기도 했지. 아니, 그건 다른 회사였나?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문제는 비행기가 폭풍우 지역을 지나가려다 뭔가 일이 생겼고, 나는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곳의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빙의를 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내 옷차림과 육신은 본래 내 것 그대로였으니까. 쉽게 말해 이세계 트립이라는 상황이다. 무슨 환생 트럭도 아니고 트립 플레인이냐. 어쨌거나 그렇게 눈을 뜬 곳은 함대 컬렉션, 줄여서 칸코레라는 웹 게임의 세계관과 굉장히 비슷한 세계, 그곳에서도 제독이 부임하지 않고 반쯤 버려진 진수부의 의무실이었다. 그리고 눈을 떠서 제일 먼저 만난 칸무스는 이나즈마였다. ...의무대도 따로 없이 칸무스들이 다 역할을 나눠 맡았더라. 얼마나 버려진 거야, 여기.

아무튼 말은 통했기에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게임 세계와는 여러가지로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1. 칸무스는 인간은 인간이지만, 말하자면 인조인간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몸이 기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자연적으로 출산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공 배양기 등을 통해 생산된다고 한다. 때문에 동일 타입의 칸무스가 여럿 존재할 수 있다고 하고, 자신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듣는 순간 속으로 G★M이냐! 하고 태클을 걸었다.)

2. 칸무스들은 평상시에는 인간과 다를 바 없지만, 출격하려면 특수 용액이 담긴 전용 탱크에서 거대화를 거친 후 의장을 장착한다고 한다. 반대로 복귀하면 의장을 해제한 다음 역시 전용 탱크에서 소인화를 거쳐 인간 크기로 돌아온다고.(이번에는 듣는 순간 속으로 마X로스!를 외쳤다.)

3. 의장은 전투용 장비인 동시에 방어구 역할도 겸해서, 장착한 동안에는 모든 대미지가 의장에 집중된다고 한다. 다만 한계 이상의 대미지가 누적되면 의장이 파손되고, 그 후에는 충격이 고스란히 칸무스 본인에게 들어간다고 한다.(여기서 이니셜로 S를 9개 쓰는 작품의 안티x팩트 슈트를 떠올린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다른 데서 본 듯한 것들이 섞여있는 세계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왜 이 세계에 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일단 제독 대리를 맡고 있던 콩고양이 내 대우를 파견자에 준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대본영에 처우를 묻기로 했다고 했을 때는 약간이나마 안심하면서 불안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조인간을 대량생산(그것도 여자아이 모습으로)하면서 전쟁터로 내모는 작자들이 모여있는 곳이 대본영이니 그 판단이 제대로 된 것일지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천하에 둘도 없는 미치광이 같은 결정이 내려왔다.

마침 잘 됐으니 나를 제독으로 삼아서 진수부를 운영하란다.

제정신이야? 생판 모르는 나를 덜커덕 제독으로 임명? 그렇게 막 맡겨도 되는 거야? 그 정도로 인재가 없는 거냐? 아니면 그 정도로 여기는 내버린 곳이야? 아니, 잠깐, 대본영 너네 그러고보니 마지막 제독이 떠난 이후로 지원도 끊었댔지? 정말로 버린 거냐?!




분노를 토해도 결정은 변할 리가 없었다. 적응하는 수밖에.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리하여 상상도 못했던 실제 제독 생활이 막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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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주 전에 끄적거렸던 글입니다.)
얼마 전부터 칸코레에 어울릴 듯한 이런 저런 설정들이 자꾸 다른 작품에서 밟혀서 말이죠. -_-a

중간에 카가씨가 읽어주는 보고서 내용은 작성당시 실제 제 진수부 상황입니다. 그리고 여기 등장하는 제독은 비교적 간단한 한문은 좀 읽어도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완전 꽝이라서, 게임에서 자주 사용해본 메뉴의 글자들은 좀 때려맞춰 사용해도 보고서쯤 되면 멘붕.

그리고 늘 그렇듯이 대본영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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