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끄으으으응~~~~~."

의자에 앉아 서류업무에만 매달린지 몇 시간째, 겨우 마무리가 되어가는 상황이 되자 한숨 돌릴 겸 기지개를 좀 켰더니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와 함께 허리와 어깨에서 뚜두둑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이거, 정말 제 명에 못 죽는 거 아닐까. 남들은 어떤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책상 위에서 퍼질러 누워 자고 있는 요정들뿐이었다. 아, 맞다. 아카시는 지금 공창에서 새 장비 개발하느라 며칠째 두문불출하고 있었지.

나는 쉽게 말하면 트립퍼다. 그렇다고 무슨 트립물 주인공들처럼 어느 한 분야에 박식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지금 이 세계와 비슷한 어느 게임을 즐기던 평범한 민간인 공대생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배를 타고 가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배가 가라앉는 바람에... 뭐, 사고 경위야 어쨌든간에, 그 때문인이 무엇 때문인지 눈을 떠보니 알 수 없는 지역의 어느 병실 침대 위였다는 거다. 더더욱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분명 일본 같은데 말은 통하고(나 일본어 못 하는데?), 문병인지 심문인지 모를 과정에서 얻은 정보로는 내가 살던 세계와는 2차대전 무렵부터 완전히 달라진 일종의 평행세계 같은 상황이라는 점만 알아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가 공학도라는 사실을 알아내자마자 이 인간들이 날 그냥 다짜고짜 끌고가서 일을 시키더라고. 뭔데 이거. 너네들 제정신이냐고. 일손이 없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너네 말은 들어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냐.

아무튼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대본영 직속의 공창, 그 중에서도 무기 개발 및 개량쪽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집안에 있는 걸 좋아하고, 무기를 쓰는 것보다는 만지작거리는 걸 좋아하는 나로써는 더할 나위 없는 직장이다. 다만 근무 여건이 월화수목금금금을 넘어서 월월월월월월금 수준인 건 좀 어떤가 싶다. 숙소는 제공되고 있지만 숙소에 들어가서 편히 자는 건 1주일에 하루라도 있으면 감지덕지한 상황이다. 도대체 저 위에 있는 인간들은 무조건 신병기 신병기 타령만 하고 개량은 할 생각을 안 한다니까. 그나마 최근에는 간신히 개수공창의 효용을 인정한 덕에 기존 장비 업그레이드도 가능해졌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서류에 적혀있던 내용이 떠올라서 시선을 내렸다. 그 서류에는 수거한 심해서함의 장비와 아군 장비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마 이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뭔가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나처럼 이쪽으로 끌려오거나,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처분당할 것이다. 어라? 이거, 나한테 이 사람 운명이 달렸나? 이런 일에 얽히는 거 싫은데...

"에휴...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 매번 귀찮다니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요정들을 깨웠다. 그리고는 서류를 보여주며 그 보고서의 작성자가 소속한 요정들을 통해서 '해당 보고서는 지극히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담당자가 임의 처분. 또한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하지 말 것. 쌍방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 이라고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벌써 이런 게 몇번째인지 이젠 기억도 안 난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선에서 올라가서 커버하지 못한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와 그 작성자들은...
뭐, 지금 이 부서가 인원부족은 절대로 겪지 않는다는 사실만 말해두고 싶다. 대신 그만큼 사람들을 혹사시킬 뿐이지. 아니, 사람이 늘어나면 업무는 그 제곱으로 늘어나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공밀레 하지 말라고. 시간과 자금과 장비를 충분히 지원하면서 성과를 요구하라고. 우린 ★니 ☆타◎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진짜로.

그리고 나는 한층 더 생각을 깊게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머릿속 한켠으로는 이럴 시간 없고 이래서도 안 된다고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한번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무슨 위키질하는 니트도 아니고 대체 뭔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저절로 지금은 없는 이 부서의 선배, 내가 영감님이라 부르며 따랐던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떠올려갔다.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는 대부분의 칸무스와 제독들 역시 심해서함이 갑자기 나타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인류가 칸무스 시스템을 개발하고 영격에 나서 현재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 대본영에서도 어지간한 장교들 역시 그렇게 알고 있고. 하지만 영감님이 알려준 진실은 달랐다.

영감님이 내게 조심스레 건네준 사진. 지금 내가 남들 몰래 간직하고 있는 한 장의 사진. 내 지갑 안에 고이 숨겨진 낡고 빛바랜 사진. 그 사진에 있는 인물은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이미 이름도 잊혀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존재 자체가 부정된 최초의 칸무스.

본래 최초의 칸무스라면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실제로 그렇다. 특형 구축함 후부키. 그 아이가 최초의 칸무스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상당히 낡고 빛이 바랜 사진이라 얼굴을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체격 등을 보면 구축함 내지는 경순양함으로 생각되는 이 사진의 소녀가 최초의 칸무스다. 아니, 최초의 칸무스였다.

영감님은 사진과 함께 진실을 내게 물려주었다. 그 다음날 퇴역한 영감님이 어찌 되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그 후 연락이 끊긴 점, 이 부서의 인원이 갑자기 대폭 감축되어 인간은 나 하나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른 부서로 강제 이동된 점, 그리고 상호간의 연락이 자유롭지 못한 점을 생각해보면... 물론 누군가가 대놓고 내 짐을 뒤지거나 심문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랬다간 오히려 거꾸로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의혹과 확신을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다시 영감님이 들려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최초의 칸무스가 탄생한 것은 심해서함이 출몰하기 약 10여 년 전이었다. 갈수록 벌어지는 전력의 차를 말도 안 되는 발상으로 타개하려는, 과거에나 지금에나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사상으로만 가득한 광기의 산물이었다고 영감님은 회고했다. 그 계획을 처음 세운 자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도 자신들이 과거에 지녔다고 망상해온 영광을 재현하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계획을 실행할 만한 권력과 자금이 있었다. 기술과 인력은 그 권력과 자금으로 확보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계획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국 결실을 맺어 최초의 칸무스를 탄생시켰다.

처음 탄생한 그 아이는 굉장히 밝고 쾌활한, 많은 사람들이 반기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본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부르기 시작한 그들은 그 아이의 내면이 어떤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훈련과 학대, 또다른 칸무스의 탄생과 실패, 폐기 처분... 칸무스는 그 수가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그 수가 부족했고, 윤리적인 문제도 있었기에 아이들은 언제나 격리되어 지내고 있었다. 모두가 기운을 잃고 어두워져 가는 와중에도 그 아이만은 자신의 동생들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아이들을 다독이고 격려했지만, 그 아이의 얼굴에도 서서히 피로와 함께 절망의 기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영감님은 마찬가지로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요구 성능에 못 미치는 구축함 아이들 상당수가 한꺼번에 해체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전에도 폐기 처분은 있어왔지만 적어도 한번에 십여 명의 해체를, 그것도 병력 보충은 없는 상태에서 실시한 적은 없었다. 결국 불안과 공포, 절망에 가득 찬 아이들을 이끌고 그 아이는 탈영했다.

대본영은 발칵 뒤집혀서 발견 즉시 발포, 대파 상태라도 상관없으니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일반 함선으로 칸무스를 추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애초에 레이더로 인간 사이즈의 물체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더군다나 여차하면 잠수도 일단은 가능한 아이들이고.

아무튼 그 일로 부서 전체가 풍비박산이 났고, 많은 사람들이 비밀 유지 각서에 사인을 하고 떠나야 했다고 한다. 그래도 핵심인력이랄 수 있는 몇명만은 대본영에서 강제로 묶어두는 통에 계속 연구를 이어가야 했고, 영감님도 그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칸무스 개발 자체는 가능해도 그 이상의 진전은 없는 채로 약 10년이 지났고, 마침내 심해서함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필두에는, 모습은 변했지만 틀림없는 그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조우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생존자가 제출한 사진에서, 정확히는 그 사진에 찍힌 인간형 적의 모습에서 영감님은 그 아이의 특징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본영에도 있어서, 그 즉시 부서에는 함구령이 내려왔고 또다시 비밀 유지 각서에 사인을 해야했다. 거기까지 말한 영감님은 씁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결국은 인과응보인 게지.




음... 뭐, 인과응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말이지. 정작 피해를 보는 건 그 망할 녀석들이 아니라 애꿎은 병사와 민간인들이니까. 결국엔 싸워야 할 상대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게 참 그때나 지금이나 기분이 묘하다. 심정적으로는 그 아이쪽이지만, 입장상 어쩔 수 없다고나 할까.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심해서함 쪽으로 전향하는 건 어떨까 하는 망상도 가끔 할 정도니까.

아, 물론 이거 말로 한 적은 없다. 그랬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어떻게 알아.

"...뭐, 일하자, 일. 애초에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뭘."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고, 나는 눈앞에 남아있는 서류와 전투를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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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코레 게임의 설정에서는 아직도 심해서함과 칸무스에 대한 설정이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죠. 그래서 2차 창작에서는 이런저런 설들이 나옵니다. 개중에는 꽤나 논리적? 체계적?으로 정리된 경우도 있지요. '함선 소녀가 없는 만화'라든가.
하지만 공통적으로는 심해서함이 먼저 출몰하고, 인류가 마련한 대항책이 칸무스라는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잖아요? 오히려 그 반대인데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두들겨봤습니다.

처음 구상할 때에는 화자가 최초의 칸무스를 좋아하는, 연인이었거나 적어도 짝사랑 상대였다는 식으로 하려고 했는데, 중간의 토☆ 스★크 드립을 넣는 바람에 전생자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본말전도도 아니고 이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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