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나뢰크는 봉기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탈취한 US들의 스텔스 기능을 이용해 위성 감시망에서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성명을 발표한 이상 가만히 있을리는 없었기에 UN에서는 안보리를 긴급 소집했고, 대응 방법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냥 두고
볼수는 없다는 의견들 만큼은 상임 이사국이나 비상임 이사국이나 모두 같았지만,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대응할 것인지였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US와 싸울 수 있는 것은 같은 US나 IS 뿐이었지만, 문제는 그 수량이었다. 이번에 라그나뢰크가 탈취한 US는 약
600여기로 전세계에 존재하는 IS의 총 대수와 거의 같았다. 여기에 각국이 이미 납품받은 US 100여기까지 포함한다면 숫자상
우위는 점할 수 있었지만 US의 AI에 들어있는 IS 적대 명령은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둘을 동시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명백히 숫적열세인 US를 투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IS를 동원해야 했지만, 이것은 또 각국의 이해 관계가
얽히기 때문에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부대 하나를 해외파병하는 것보다 더욱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회의만 길어지고 있는 동안, 라그나뢰크가 행동을 개시했다.
"제기랄, 관측반은 뭐하고 있었던 거야!"
"스텔스 뻔히 알면서 그러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쏴, 쏘라구!"
"쏘고 있잖아! 그런데 저자식들 멀쩡하다구! 애초에 실드가 있는데 통하기는 하는 거야?!"
"백발 천발 맞추다보면 언젠간 뚫리겠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라그나뢰크가 US를 탈취하고 약 18시간이 지난 후, 아직 날짜가 바뀌기 전. US의 스텔스 기능을 최대로 활용한 라그나뢰크는 확보한 모든 US를 미국 본토에 집결시켜 미국 최대의 IS 연구소를 습격했다. 만약을 위해 파견나와 있던 연방군은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US의 화력, 그리고 무슨 공격을 해도 끄떡도 안 하는 무지막지한 방어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 제2 아레나 차단 실드 파손! 제길, 최고 레벨로 올려도 이 정도 버티는 게 고작인가?!
- 아레나에 있는 연구원들과 장비 모두 대피시켜!
- 적 집단 제2 아레나에 침입! 이미 늦었어!
라그나뢰크가 공격을 개시하자마자 소장은 연구소의 모든 전력(電力)을 제2 아레나에 집중시키고 차단 실드 레벨을 최대로 올렸다. 다른 곳으로 피난하기에는 늦었으니 정부에 구원 요청을 하고 인원과 장비를 제2 아레나에 대피시킨 상태에서 버티며 시간을 벌겠다는 생각이지만, 수백기의 US가 일제히 퍼붓는 공격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 홀리 저지먼트, 교전 개시합니다.
- 뭐? 멈춰! 그 녀석은 동결 중이야!
- 지금 이 상황에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최소한 시간이라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니 대피나 서두르십시오!
- 저 녀석들 목표가 뭔지는 자네도 알지 않나!
- 스트라이크 썬더, 교전 개시합니다.
- 섀도우 스나이퍼도 교전 개시합니다.
- 자네들까지 이럴 건가!
소장은 일부러 대피시켰던 IS와 그 파일럿들이 하나둘씩 전투에 나서자 비명같은 고함을 쳤지만 파일럿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테스트 파일럿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군인이었고, 자국민을 보호하고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장이 만류하는데도 파일럿들은 US를 막기 위해 날아올랐고, 결국 소장도 눈물을 머금고 파일럿들을 내버려둔 채 연구원들을 대피시키기로 했다.
- 적 IS 기동확인. 조준 자동 변경으로 확인했습니다.
- 좋아, IS를 우선적으로 박살낸다. 코어까지 부순 다음 연구소와 연구원들도 마무리하지.
-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성능이 엇비슷한 상황에서 숫적 열세는 치명적이었고, 하물며 그 규모가 10배 넘게 차이가 난다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IS 파일럿들은 가슴에 품었던 사명감이 무색하게 날아오르자마자 격추당했고, 단 1분도 지나지 않아 연구소에 있던 10기의 IS는 코어까지 완전히 파괴되었다. IS를 모두 파괴한 것을 확인한 라그나뢰크는 연구소의 시설과 연구원들까지 처리한 다음 유유히 사라졌고, 그러면서도 연방군에 대해서는 전차나 로켓포같은 무기만 공격했을 뿐 병사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폐허가 된 연구소와 부서진 장비들의 잔해 속에서 군인들은 멀어져가는 라그나뢰크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30분 후, 라그나뢰크는 미국 서부의 공군 기지에 출현하여 대공 시설과 전투기를 무력화시키고 기지를 점령했다. 그런 다음 통신 시설을 부수고 군인들을 지하 방공호에 가둔 채 기지를 떠났고, 기지 요원들은 1시간이 훨씬 더 지난 후에야 방공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온 기지 사령관은 신형 수송기 8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했다.
"수송기 8대라... 탈취당한 US의 수량과 비교하면 얼추 맞는군요."
"하지만 수송기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다행 아닙니까? 속도도 느릴 테고 무엇보다 스텔스 기능도 없으니 잘 잡힐 것 아닙니까."
UN 안보리에 라그나뢰크의 미국 IS 연구소 습격과 수송기 탈취 소식이 전해지자 각국 대표들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중 상당수는 라그나뢰크가 수송기를 탈취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보였다. US의 완벽한 스텔스 성능과 고속 이동력을 포기하고 수송기를 사용한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미국 대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탈취된 수송기는 공군에서 개발한 최신형 수송기입니다. 수송 인원은 승무원을 제외하고 최대 98명에, 최고 속력은 만재 상태에서 마하 1.1이고, 레이더 스텔스 기능과 상부 한정... 그러니까 위성 촬영 각도 한정으로 광학 스텔스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로선... 수송기를 추적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미국 대표가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속력과 스텔스 기능에 대해서 말을 꺼냈을 때 이미 회의장은 반쯤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묻는 대표, 벌떡 일어서서 미국을 성토하는 대표, 급히 일어서서 회의장을 나가는 대표 등으로 회의 진행이 어려워지자 의장인 필리핀 대표는 결국 30분간 정회를 선포했다. 대부분의 대표들은 정회시간 동안 자국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반면 몇몇 대표들은 회의장에 남아 의견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남아있는 대표들은 어떠한 경로로든 미국의 최신 수송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기에 새삼스러울 게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송기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현재 상황을 호전시켜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대충 마하1로 계산하면 속력이 어느 정도가 됩니까?"
"어림잡아 초속 340미터로 잡으면...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어디 보자... 시속 1,224km 정도 나오는군요."
"어마어마한 속도로군요. 만약 미국에서 직통으로 일본으로 온다면... 8,500km 쯤 되니까... 맙소사, 7시간이면 도착하는 겁니까?"
일본 대표는 계산을 해보고는 그 결과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라그나뢰크가 반드시 일본으로 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일본에는 IS스쿨과 연구소가 모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공격대상이 될 이유가 충분했다. 게다가, 이 경우 대권항로는 벗어나게 되지만 중간에 진주만을 거쳐서 올 경우 미국의 잔존 IS 전력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 이점까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일본 대표는 한번 더 거리를 확인해 보았고, 약간이지만 더 늘어나는 시간을 보고 안심을 해야할지 그게 그거라며 한숨을 내쉬어야 할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회 시간이 끝나고 회의가 재개되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라그나뢰크의 다음 목표로 예상되는 시설 몇군데가 거론되고 그곳의 방비를 강화하거나 반대로 대피시킨다는 의견만 나왔을 뿐, 방비를 강화한다면 그 병력은 어디서 끌어올지, 대피시킨다면 어떤 곳이 안전해서 그곳으로 대피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회의 진행 상황을 보며 한국 대표는 고개를 내저었다.
IS 스쿨은 라그나뢰크의 봉기가 알려진 후 경계 레벨이 최대로 올라가 있었다.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점, IS 기동에 대한 데이터를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 교관들이 여느 군인 못지 않은 IS 베테랑이라는 점, 전용기 보유 학생들의 기체는 최신 실험기가 대다수라는 점 등이 라그나뢰크 습격의 예상을 더욱 높이고 있었다.
"하아..."
취침 시간,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쓰러졌다. 항상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매일매일'이 삶의 모토였던 시우에게는 너무 벅찬 사건이었다. '이쪽 세계로 넘어오면서부터' 비일상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대부분 웃어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홀리 저지먼트 폭주 사건이 가장 위험하긴 했지만 그 사건도 어찌어찌 해서 나름대로 수습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규모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전 세계의 IS와 그 기록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라니, 이 정도로 스케일이 커지면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진짜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닥쳐오는 싸움의 예감에 시우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IS 스쿨에 오기 전에는 총 한번 쏴본 적 없는 사람에게 난데없이 전쟁에 나가라고 해도 그렇게 쉽게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US는 절대방어가 없기 때문에 교전이 시작되면 사망자가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이 쏜 탄환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시우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 진짜!"
결국 답답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시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섀시의 보온 효과는 확실하기 때문에 커튼을 치웠다고 해서 냉기가 확 밀려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창밖의 서늘한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시우는 그대로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파랗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시우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현실 도피일 뿐이라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얼마쯤 앉아있었을까, 시우는 누군가 방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 전에는 당연히 잠그고 자기 때문에 열릴리는 없었지만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을 열려고 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누구지?'
시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방바닥에서 일어나는 순간, 굉음과 함께 문과 방 맞은 편에 있던 유리창이 한꺼번에 박살났다. 그 순간 기숙사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퍼졌고, 폭음에 놀란 시우는 급히 몸을 숨겼지만 곧이어 눈에 들어온 인영을 보고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칼렛?"
부서진 문을 넘어 들어온 두 사람 중 한명은 Full-body Armor 타입의 IS를 장착하고 있어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다른 한명은 맨몸으로 들어왔고,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시우가 이름을 부르자 스칼렛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시우를 노려보았고, 그 표정을 본 시우는 예전에도 저런 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1학기 학년별 토너먼트에서 자신을 몰아붙일 때, 후지노가 지었던 표정이었다.
"그럼... 후지노?"
시우가 그렇게 물었지만 IS 파일럿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블레이드를 쥔 손에 힘을 주더니 곧바로 시우에게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IS의 덩치에 블레이드의 길이까지 더해지자 기숙사 방 안에서는 피할 거리가 나오지 않았고, 시우는 급히 깨진 창문으로 몸을 날리며 은황을 장착했다. 지면에 무사히 착지한 시우가 고개를 들자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두대의 IS가 눈에 보였다. 방에서 봤을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스칼렛과 후지노의 기체는 절대로 양산기가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스칼렛!"
"닥쳐! 그냥 얌전히 죽으면 되는 거다! 이 빌어먹을 놈!"
시우의 외침에 돌아온 대답은 후지노의 폭언과 블레이드였다. 시우는 구미호를 스피어 모드로 변형시켜 후지노의 블레이드를 막아냈지만 바로 이어 들어오는 킥은 피하지 못하고 복부에 정통으로 맞았다.
"큭...!"
시우는 곧장 거리를 벌렸지만 이번에는 상공에서 스칼렛이 사격을 가했다. 급히 공격을 피하며 올려다보자 스칼렛이 어설트 라이플2정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시우를 조준하는 모습이 보였고, 거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이번에는 정면에서 후지노가 양손에 블레이드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만 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 것 같나!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후지노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시우를 공격했고, 스칼렛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후지노와 비슷하면 비슷했지 결코 약하지는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시우는 방어에 급급했지만 2:1, 그것도 콤비네이션이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두 사람을 상대로 오래 버티는 것은 힘들었다. 결국 시우는 턱에 후지노의 무릎찍기를 허용하고 말았다.
"...!"
뇌가 뒤흔들리는 충격 속에서 시우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고, 시우가 휘청거리는 것을 본 후지노는 틈을 놓치지 않고 블레이드를 찔러넣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시우는 구미호를 수납하는 동시에 몸을 비틀어 후지노의 공격을 스쳐 보내며 그 오른손목을 붙잡았다. 후지노가 당황하는 사이 시우는 왼손을 손날처럼 펴서 후지노의 목을 치려고 했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내리 꽂힌 스칼렛의 공격에 후지노를 놓아주고 뒤로 물러섰다. 겨우 한숨 돌린 후지노는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사나운 사자같은 기세는 사라지고 오히려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드디어 제 실력이 나오는군, 피험체 No.04."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나온 위협적인 공격에 시우가 정신을 추슬러 자제하려는 때, 후지노는 기다려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시우는 후지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잠깐, 피험체라니 무슨 소리야? 내가 생체 실험 소체였다는 말이야?"
"아직도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아니면 이 상황에서도 기억 상실을 연기하는 건가? 후자라면 네놈은 차라리 연기자를 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그 빌어먹을 IS를 벗고 말이야. 아니, 방금 한 말은 취소하지. 만약 네녀석이 TV에서 보인다면 더 못참을 것 같으니까. 역시 여기서 죽여버리는 게 낫겠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건가, 피험체 No.04? 형제처럼 자랐던 우리들도 완전히 잊어버렸나? 피험체 No.13, No.66을? 그리고 네오 아담 프로젝트도?!"
비웃듯이 대답하던 후지노의 말은 어느샌가 노기가 잔뜩 담긴 외침으로 변해있었고, 그 말을 들은 시우는 무언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상자에 넣어 자물쇠를 채우고 창고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물건을 누군가가 꺼내와 눈앞에 들이미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오 아담... IS 적성... 추정 인자... 불량... 파기... 유일한 성공... ......윽!'
"기억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냥 여기서 죽으면 되니까!"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뭉클뭉클 떠오르는 기억들도 기분 나빴지만 그걸 미처 정리할 새도 없이 공격해오는 스칼렛과 후지노 때문에 시우는 기분은 더더욱 최악으로 달려갔다. 사격을 회피하고 검격을 막아내는 것도 오래 가지 못해서 결국 후지노의 다리 후리기에 걸려 쓰러졌고, 시우가 고개를 들자 블레이드를 머리위로 치켜올린 후지노의 모습이 보였다. 그 표정은 철천지 원수를 베기 직전의 모습, 예전 학년별 토너먼트에서 보았던 그 표정 그대로였다. 블레이드가 내리쳐지려는 순간, 후지노의 코앞을 탄환이 지나갔다.
"?! 칫, 시간을 너무 끌었나."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IS 전개 상태의 교사들이 라이플을 겨누고 있었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기숙사 사감도 맡고 있는 사키였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IS 스쿨에 들키지 않고 잠입한 것은 칭찬해주마. 그러니 얌전히 투항해라. 저항하면..."
"저항하면 어쩔 거지, 선생?"
후지노가 말을 중간에 끊으며 반문하자 사키는 눈쌀을 찌푸렸지만, 그와 동시에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헬맷에 가려져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약간 바뀌어 들리기는 했지만 낯익은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사키를 보며 후지노가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 목표는 딱 하나 뿐이고 그걸 이루는 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어."
"누구 마음대로!"
사키를 비롯한 교사들은 서둘러 사격 자세를 잡았지만 후지노의 바로 옆에 시우가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고, 뒤늦게 눈치를 챈 시우가 사선(射線)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이미 후지노와 스칼렛이 스텔스 모드로 들어가 도주한 뒤였다.
"분석실, 녀석들의 위치는?!"
- 잡히지 않습니다. 스텔스 기능을 최대로 올린 것 같아요. 찾는 건 무리입니다.
"젠장, 두눈 뻔히 뜨고 놓쳤군. 다른 교사들은 혹시 모르니 경계를 서 주세요. 기숙사 쪽은 다른 교사들이 학생들과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시우, 괜찮으냐?"
"네... 괜찮아요."
"그래,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정말 괜찮은 거냐?"
"...네."
상황을 대강 정리하고 시우를 살펴보던 사키는 시우의 태도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던 것이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신적인 충격이 큰 것 같았다.
"알았다, 지금 일은 내일 얘기하자. 어떻게 된 건지 우리도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일어설 수 있겠냐?"
"네."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시우의 모습에 사키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이상 마땅한 조치를 취하기도 어려웠다. 생각한 끝에 사키는 시우를 하룻밤만 양호실에서 재우기로 했다. 어차피 방도 며칠은 쓸 수 없을 만큼 박살이 나 있어서 잘 곳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시우, 교복하고 세면도구는 내가 챙겨다 줄 테니 오늘은 양호실에서 자라. 난방도 되니까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거다."
"네."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시우는 기숙사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사키는 시우를 뒤쫓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게 아닌 듯 했다. 사키는 걱정스런 마음에 시우의 얼굴을 붙잡고는 정면으로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시우, 양호실로 간 말이다. 교사(校舍)에 있는 양호실. 알아듣겠냐?"
"아... 네, 선생님."
"내가 뭐라고 했지?"
"양호실로... 가라고요."
"그래, 시우 네 방은 지금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으니까 오늘은 양호실에서 자라. 아침에 입을 교복이나 세면도구는 내가 찾아서 가져다 줄 테니까 걱정말고."
"네, 고맙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만 억지로라도 자 둬라. 그게 서로에게 좋으니까."
사키와 헤어진 시우는 교사에 들어오고나서 은황을 대기 모드로 되돌렸고, 잠옷 차림이 되자 그제야 추위에 몸을 떨며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양호실에 들어선 시우는 얼른 난방을 올리고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사키는 눈을 붙이라고 했고 시우도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기억과 생각들이 시우를 내버려두지 않고 있었다. 시우는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
조금 뜬금없는 전개일지도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내용입니다. 사실 반 대항전 할 때에도 복선 비슷한 거 깔아둔 적 있었고 -_-a
"제기랄, 관측반은 뭐하고 있었던 거야!"
"스텔스 뻔히 알면서 그러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쏴, 쏘라구!"
"쏘고 있잖아! 그런데 저자식들 멀쩡하다구! 애초에 실드가 있는데 통하기는 하는 거야?!"
"백발 천발 맞추다보면 언젠간 뚫리겠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라그나뢰크가 US를 탈취하고 약 18시간이 지난 후, 아직 날짜가 바뀌기 전. US의 스텔스 기능을 최대로 활용한 라그나뢰크는 확보한 모든 US를 미국 본토에 집결시켜 미국 최대의 IS 연구소를 습격했다. 만약을 위해 파견나와 있던 연방군은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US의 화력, 그리고 무슨 공격을 해도 끄떡도 안 하는 무지막지한 방어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 제2 아레나 차단 실드 파손! 제길, 최고 레벨로 올려도 이 정도 버티는 게 고작인가?!
- 아레나에 있는 연구원들과 장비 모두 대피시켜!
- 적 집단 제2 아레나에 침입! 이미 늦었어!
라그나뢰크가 공격을 개시하자마자 소장은 연구소의 모든 전력(電力)을 제2 아레나에 집중시키고 차단 실드 레벨을 최대로 올렸다. 다른 곳으로 피난하기에는 늦었으니 정부에 구원 요청을 하고 인원과 장비를 제2 아레나에 대피시킨 상태에서 버티며 시간을 벌겠다는 생각이지만, 수백기의 US가 일제히 퍼붓는 공격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 홀리 저지먼트, 교전 개시합니다.
- 뭐? 멈춰! 그 녀석은 동결 중이야!
- 지금 이 상황에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최소한 시간이라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니 대피나 서두르십시오!
- 저 녀석들 목표가 뭔지는 자네도 알지 않나!
- 스트라이크 썬더, 교전 개시합니다.
- 섀도우 스나이퍼도 교전 개시합니다.
- 자네들까지 이럴 건가!
소장은 일부러 대피시켰던 IS와 그 파일럿들이 하나둘씩 전투에 나서자 비명같은 고함을 쳤지만 파일럿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테스트 파일럿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군인이었고, 자국민을 보호하고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장이 만류하는데도 파일럿들은 US를 막기 위해 날아올랐고, 결국 소장도 눈물을 머금고 파일럿들을 내버려둔 채 연구원들을 대피시키기로 했다.
- 적 IS 기동확인. 조준 자동 변경으로 확인했습니다.
- 좋아, IS를 우선적으로 박살낸다. 코어까지 부순 다음 연구소와 연구원들도 마무리하지.
-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성능이 엇비슷한 상황에서 숫적 열세는 치명적이었고, 하물며 그 규모가 10배 넘게 차이가 난다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IS 파일럿들은 가슴에 품었던 사명감이 무색하게 날아오르자마자 격추당했고, 단 1분도 지나지 않아 연구소에 있던 10기의 IS는 코어까지 완전히 파괴되었다. IS를 모두 파괴한 것을 확인한 라그나뢰크는 연구소의 시설과 연구원들까지 처리한 다음 유유히 사라졌고, 그러면서도 연방군에 대해서는 전차나 로켓포같은 무기만 공격했을 뿐 병사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폐허가 된 연구소와 부서진 장비들의 잔해 속에서 군인들은 멀어져가는 라그나뢰크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30분 후, 라그나뢰크는 미국 서부의 공군 기지에 출현하여 대공 시설과 전투기를 무력화시키고 기지를 점령했다. 그런 다음 통신 시설을 부수고 군인들을 지하 방공호에 가둔 채 기지를 떠났고, 기지 요원들은 1시간이 훨씬 더 지난 후에야 방공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온 기지 사령관은 신형 수송기 8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했다.
"수송기 8대라... 탈취당한 US의 수량과 비교하면 얼추 맞는군요."
"하지만 수송기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다행 아닙니까? 속도도 느릴 테고 무엇보다 스텔스 기능도 없으니 잘 잡힐 것 아닙니까."
UN 안보리에 라그나뢰크의 미국 IS 연구소 습격과 수송기 탈취 소식이 전해지자 각국 대표들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중 상당수는 라그나뢰크가 수송기를 탈취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보였다. US의 완벽한 스텔스 성능과 고속 이동력을 포기하고 수송기를 사용한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미국 대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탈취된 수송기는 공군에서 개발한 최신형 수송기입니다. 수송 인원은 승무원을 제외하고 최대 98명에, 최고 속력은 만재 상태에서 마하 1.1이고, 레이더 스텔스 기능과 상부 한정... 그러니까 위성 촬영 각도 한정으로 광학 스텔스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로선... 수송기를 추적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미국 대표가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속력과 스텔스 기능에 대해서 말을 꺼냈을 때 이미 회의장은 반쯤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묻는 대표, 벌떡 일어서서 미국을 성토하는 대표, 급히 일어서서 회의장을 나가는 대표 등으로 회의 진행이 어려워지자 의장인 필리핀 대표는 결국 30분간 정회를 선포했다. 대부분의 대표들은 정회시간 동안 자국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반면 몇몇 대표들은 회의장에 남아 의견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남아있는 대표들은 어떠한 경로로든 미국의 최신 수송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기에 새삼스러울 게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송기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현재 상황을 호전시켜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대충 마하1로 계산하면 속력이 어느 정도가 됩니까?"
"어림잡아 초속 340미터로 잡으면...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어디 보자... 시속 1,224km 정도 나오는군요."
"어마어마한 속도로군요. 만약 미국에서 직통으로 일본으로 온다면... 8,500km 쯤 되니까... 맙소사, 7시간이면 도착하는 겁니까?"
일본 대표는 계산을 해보고는 그 결과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라그나뢰크가 반드시 일본으로 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일본에는 IS스쿨과 연구소가 모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공격대상이 될 이유가 충분했다. 게다가, 이 경우 대권항로는 벗어나게 되지만 중간에 진주만을 거쳐서 올 경우 미국의 잔존 IS 전력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 이점까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일본 대표는 한번 더 거리를 확인해 보았고, 약간이지만 더 늘어나는 시간을 보고 안심을 해야할지 그게 그거라며 한숨을 내쉬어야 할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회 시간이 끝나고 회의가 재개되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라그나뢰크의 다음 목표로 예상되는 시설 몇군데가 거론되고 그곳의 방비를 강화하거나 반대로 대피시킨다는 의견만 나왔을 뿐, 방비를 강화한다면 그 병력은 어디서 끌어올지, 대피시킨다면 어떤 곳이 안전해서 그곳으로 대피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회의 진행 상황을 보며 한국 대표는 고개를 내저었다.
IS 스쿨은 라그나뢰크의 봉기가 알려진 후 경계 레벨이 최대로 올라가 있었다.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점, IS 기동에 대한 데이터를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 교관들이 여느 군인 못지 않은 IS 베테랑이라는 점, 전용기 보유 학생들의 기체는 최신 실험기가 대다수라는 점 등이 라그나뢰크 습격의 예상을 더욱 높이고 있었다.
"하아..."
취침 시간,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쓰러졌다. 항상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매일매일'이 삶의 모토였던 시우에게는 너무 벅찬 사건이었다. '이쪽 세계로 넘어오면서부터' 비일상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대부분 웃어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홀리 저지먼트 폭주 사건이 가장 위험하긴 했지만 그 사건도 어찌어찌 해서 나름대로 수습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규모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전 세계의 IS와 그 기록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라니, 이 정도로 스케일이 커지면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진짜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닥쳐오는 싸움의 예감에 시우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IS 스쿨에 오기 전에는 총 한번 쏴본 적 없는 사람에게 난데없이 전쟁에 나가라고 해도 그렇게 쉽게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US는 절대방어가 없기 때문에 교전이 시작되면 사망자가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이 쏜 탄환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시우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 진짜!"
결국 답답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시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섀시의 보온 효과는 확실하기 때문에 커튼을 치웠다고 해서 냉기가 확 밀려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창밖의 서늘한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시우는 그대로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파랗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시우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현실 도피일 뿐이라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얼마쯤 앉아있었을까, 시우는 누군가 방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 전에는 당연히 잠그고 자기 때문에 열릴리는 없었지만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을 열려고 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누구지?'
시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방바닥에서 일어나는 순간, 굉음과 함께 문과 방 맞은 편에 있던 유리창이 한꺼번에 박살났다. 그 순간 기숙사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퍼졌고, 폭음에 놀란 시우는 급히 몸을 숨겼지만 곧이어 눈에 들어온 인영을 보고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칼렛?"
부서진 문을 넘어 들어온 두 사람 중 한명은 Full-body Armor 타입의 IS를 장착하고 있어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다른 한명은 맨몸으로 들어왔고,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시우가 이름을 부르자 스칼렛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시우를 노려보았고, 그 표정을 본 시우는 예전에도 저런 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1학기 학년별 토너먼트에서 자신을 몰아붙일 때, 후지노가 지었던 표정이었다.
"그럼... 후지노?"
시우가 그렇게 물었지만 IS 파일럿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블레이드를 쥔 손에 힘을 주더니 곧바로 시우에게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IS의 덩치에 블레이드의 길이까지 더해지자 기숙사 방 안에서는 피할 거리가 나오지 않았고, 시우는 급히 깨진 창문으로 몸을 날리며 은황을 장착했다. 지면에 무사히 착지한 시우가 고개를 들자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두대의 IS가 눈에 보였다. 방에서 봤을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스칼렛과 후지노의 기체는 절대로 양산기가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스칼렛!"
"닥쳐! 그냥 얌전히 죽으면 되는 거다! 이 빌어먹을 놈!"
시우의 외침에 돌아온 대답은 후지노의 폭언과 블레이드였다. 시우는 구미호를 스피어 모드로 변형시켜 후지노의 블레이드를 막아냈지만 바로 이어 들어오는 킥은 피하지 못하고 복부에 정통으로 맞았다.
"큭...!"
시우는 곧장 거리를 벌렸지만 이번에는 상공에서 스칼렛이 사격을 가했다. 급히 공격을 피하며 올려다보자 스칼렛이 어설트 라이플2정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시우를 조준하는 모습이 보였고, 거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이번에는 정면에서 후지노가 양손에 블레이드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만 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 것 같나!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후지노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시우를 공격했고, 스칼렛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후지노와 비슷하면 비슷했지 결코 약하지는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시우는 방어에 급급했지만 2:1, 그것도 콤비네이션이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두 사람을 상대로 오래 버티는 것은 힘들었다. 결국 시우는 턱에 후지노의 무릎찍기를 허용하고 말았다.
"...!"
뇌가 뒤흔들리는 충격 속에서 시우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고, 시우가 휘청거리는 것을 본 후지노는 틈을 놓치지 않고 블레이드를 찔러넣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시우는 구미호를 수납하는 동시에 몸을 비틀어 후지노의 공격을 스쳐 보내며 그 오른손목을 붙잡았다. 후지노가 당황하는 사이 시우는 왼손을 손날처럼 펴서 후지노의 목을 치려고 했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내리 꽂힌 스칼렛의 공격에 후지노를 놓아주고 뒤로 물러섰다. 겨우 한숨 돌린 후지노는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사나운 사자같은 기세는 사라지고 오히려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드디어 제 실력이 나오는군, 피험체 No.04."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나온 위협적인 공격에 시우가 정신을 추슬러 자제하려는 때, 후지노는 기다려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시우는 후지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잠깐, 피험체라니 무슨 소리야? 내가 생체 실험 소체였다는 말이야?"
"아직도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아니면 이 상황에서도 기억 상실을 연기하는 건가? 후자라면 네놈은 차라리 연기자를 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그 빌어먹을 IS를 벗고 말이야. 아니, 방금 한 말은 취소하지. 만약 네녀석이 TV에서 보인다면 더 못참을 것 같으니까. 역시 여기서 죽여버리는 게 낫겠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건가, 피험체 No.04? 형제처럼 자랐던 우리들도 완전히 잊어버렸나? 피험체 No.13, No.66을? 그리고 네오 아담 프로젝트도?!"
비웃듯이 대답하던 후지노의 말은 어느샌가 노기가 잔뜩 담긴 외침으로 변해있었고, 그 말을 들은 시우는 무언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상자에 넣어 자물쇠를 채우고 창고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물건을 누군가가 꺼내와 눈앞에 들이미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오 아담... IS 적성... 추정 인자... 불량... 파기... 유일한 성공... ......윽!'
"기억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냥 여기서 죽으면 되니까!"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뭉클뭉클 떠오르는 기억들도 기분 나빴지만 그걸 미처 정리할 새도 없이 공격해오는 스칼렛과 후지노 때문에 시우는 기분은 더더욱 최악으로 달려갔다. 사격을 회피하고 검격을 막아내는 것도 오래 가지 못해서 결국 후지노의 다리 후리기에 걸려 쓰러졌고, 시우가 고개를 들자 블레이드를 머리위로 치켜올린 후지노의 모습이 보였다. 그 표정은 철천지 원수를 베기 직전의 모습, 예전 학년별 토너먼트에서 보았던 그 표정 그대로였다. 블레이드가 내리쳐지려는 순간, 후지노의 코앞을 탄환이 지나갔다.
"?! 칫, 시간을 너무 끌었나."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IS 전개 상태의 교사들이 라이플을 겨누고 있었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기숙사 사감도 맡고 있는 사키였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IS 스쿨에 들키지 않고 잠입한 것은 칭찬해주마. 그러니 얌전히 투항해라. 저항하면..."
"저항하면 어쩔 거지, 선생?"
후지노가 말을 중간에 끊으며 반문하자 사키는 눈쌀을 찌푸렸지만, 그와 동시에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헬맷에 가려져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약간 바뀌어 들리기는 했지만 낯익은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사키를 보며 후지노가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 목표는 딱 하나 뿐이고 그걸 이루는 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어."
"누구 마음대로!"
사키를 비롯한 교사들은 서둘러 사격 자세를 잡았지만 후지노의 바로 옆에 시우가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고, 뒤늦게 눈치를 챈 시우가 사선(射線)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이미 후지노와 스칼렛이 스텔스 모드로 들어가 도주한 뒤였다.
"분석실, 녀석들의 위치는?!"
- 잡히지 않습니다. 스텔스 기능을 최대로 올린 것 같아요. 찾는 건 무리입니다.
"젠장, 두눈 뻔히 뜨고 놓쳤군. 다른 교사들은 혹시 모르니 경계를 서 주세요. 기숙사 쪽은 다른 교사들이 학생들과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시우, 괜찮으냐?"
"네... 괜찮아요."
"그래,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정말 괜찮은 거냐?"
"...네."
상황을 대강 정리하고 시우를 살펴보던 사키는 시우의 태도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던 것이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신적인 충격이 큰 것 같았다.
"알았다, 지금 일은 내일 얘기하자. 어떻게 된 건지 우리도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일어설 수 있겠냐?"
"네."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시우의 모습에 사키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이상 마땅한 조치를 취하기도 어려웠다. 생각한 끝에 사키는 시우를 하룻밤만 양호실에서 재우기로 했다. 어차피 방도 며칠은 쓸 수 없을 만큼 박살이 나 있어서 잘 곳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시우, 교복하고 세면도구는 내가 챙겨다 줄 테니 오늘은 양호실에서 자라. 난방도 되니까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거다."
"네."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시우는 기숙사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사키는 시우를 뒤쫓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게 아닌 듯 했다. 사키는 걱정스런 마음에 시우의 얼굴을 붙잡고는 정면으로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시우, 양호실로 간 말이다. 교사(校舍)에 있는 양호실. 알아듣겠냐?"
"아... 네, 선생님."
"내가 뭐라고 했지?"
"양호실로... 가라고요."
"그래, 시우 네 방은 지금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으니까 오늘은 양호실에서 자라. 아침에 입을 교복이나 세면도구는 내가 찾아서 가져다 줄 테니까 걱정말고."
"네, 고맙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만 억지로라도 자 둬라. 그게 서로에게 좋으니까."
사키와 헤어진 시우는 교사에 들어오고나서 은황을 대기 모드로 되돌렸고, 잠옷 차림이 되자 그제야 추위에 몸을 떨며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양호실에 들어선 시우는 얼른 난방을 올리고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사키는 눈을 붙이라고 했고 시우도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기억과 생각들이 시우를 내버려두지 않고 있었다. 시우는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
조금 뜬금없는 전개일지도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내용입니다. 사실 반 대항전 할 때에도 복선 비슷한 거 깔아둔 적 있었고 -_-a
'몽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피니트 스트라토스] Infinite Dream - 22. 악몽, 그리고 꿈 (0) | 2011.11.05 |
---|---|
[인피니트 스트라토스] Infinite Dream - 21. 뒤흔드는 악몽 (0) | 2011.11.01 |
[인피니트 스트라토스] Infinite Dream - 19. 시작되는 악몽 (0) | 2011.10.16 |
[인피니트 스트라토스] Infinite Dream - 18. 사라져가는 꿈 (0) | 2011.10.14 |
[인피니트 스트라토스] Infinite Dream - 17. 흔들리는 꿈 (0) | 2011.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