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 여기는 A-2팀, 연구소 제압 완료. 코어와 시설은 모두 파괴했고, 연구원들도 대부분 처리했다. 지금부터 러시아 국립 IS 연구소로 향한다.

- A-1팀, 알았다. 이쪽도 스쿨 제압 완료. 설비 파괴는 완료했지만 인원은 전부 대피했고 코어는 핵 방공호 안에 있어서 손대지 못했다. 이놈들, 꽤나 제대로 대비했는데.

스쿨에 대한 공격을 거의 마무리해가던 한주는 표도르가 걸어온 통신에 응답했다. 한주의 A-1팀은 스쿨의 지상 시설을 거의 다 파괴했지만 지하 시설, 특히 방공호는 생각보다 깊은 곳인데다 전략핵에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이어서 그 안에 든 코어까지 처리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것 같았다. 오히려 일본 영해에 들어섰을 때 자신들을 막아서던 자위대를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이 더 짧을 지경이었다.

- 세계 최대의 IS 교육기관이라는 말이 헛것은 아니었나 보군. 수송기는 우리쪽이 가져다 썼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 상관없어. 이동 거리는 그쪽이 더 머니까. 그런데 이제는 수송기 안 써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 쓸 일 없다고 그냥 내버리는 것도 아깝잖아. 가져가서 연구소에다 박아버릴까 하고. 충돌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공포대의 주의를 돌리는 용도로는 쓸 수 있겠지.

- 나쁘지 않네. 그렇게 해.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고.

- 라저.

"A-1팀, 공격 중지. 스쿨에 대한 공격은 중지하고 지금부터 중국으로 향한다."

A-2 팀과 통신을 마친 한주는 여전히 방공호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멤버들을 제지한 뒤 2차 공격 지시를 내렸다. 거리로 봤을 때 중국으로 갈 때에는 US를 전개한 채로 고속 비행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일본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상 중국도 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지상 관측에 노출되는 수송기는 쓰기가 불편했다. 에너지 소모와 병력 상태를 점검하는 한주에게 두 대의 US가 다가왔다. 후지노와 스칼렛이었다. 시우는 두명의 기체가 IS라고 생각했고 은황도 부정하지 않았지만, 두명의 전용기인 타케미카즈치와 덴드로븀은 보조용으로 코어를 심어놓은 하이브리드 US였다.

"무슨 일이지?"

"여기서 바로 중국으로 향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칭하이성(靑海省) 시닝(西寧)에 있는 IS 연구소를 공격할 차례다."

"한국은 공격 목표에 넣지 않습니까?"

후지노의 물음에 한주는 두 사람이 왜 자신에게 다가왔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한주는 예전에 후지노와 스칼렛의 과거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고, 진주만을 습격하기 직전 A팀을 찾아온 두명의 합류를 한주가 인정한 것도 그런 두 사람의 심정을 대강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이번에는 공격 대상이 아니야. 그만한 가치도 없고."

"하지만 한국에도 IS 연구소가 있습니다."

"그래, 언제든 US 서너기만 보내면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연구소가 말이지."

스칼렛의 반박에 한주는 그렇게 말했고, 후지노와 스칼렛은 대답이 궁해졌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주가 말을 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한국에는 IS가 2기 뿐이야. 어쩌면 그동안 활성화된 코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봤자 한개 정도겠지. 게다가 최초 코어 기동은 20년도 안 됐고, 두번째도 10년이 안 됐어. 코어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하기에는 기간은 충분할지 몰라도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의 대부분은 프레임과 무장에 대한 내용들이겠지. 그건 나중에 US가 보편화되면 활용하게 만들 수도 있어. 그러니 굳이 공격할 필요까진 없지."

한주의 말에 스칼렛은 침묵했지만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후지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가만히 있던 후지노가 다시 한주에게 말했다.

"...한국이 대장님의 조국이라서 일부러 넘어가는 건 아닙니까?"

그 순간, 한주의 표정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냉정하게만 보이던 한주의 얼굴은 이제 차가운 얼음 칼날을 연상케 했다. 주변에 피를 머금은 눈보라를 몰아치게 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후지노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국? 하, 그딴 나라를 조국이라고 부를 거면 차라리 내 혀를 뽑아버릴 거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쳐들어가서 윗대가리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다음 그 뼈를 갈고 고기를 저며 자식 새끼들 머리 위에 흩뿌려도 시원치않아!"

한주가 터뜨린 분노는 엄청나서, 그 노성을 정면에서 받은 후지노와 스칼렛은 물론 근처에서 이동 준비를 하던 다른 대원들까지 움찔할 정도였다. 갑자기 끓어오른 분을 삭이지 못한 한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스스로를 진정시킨 다음에야 말을 계속했다.

"까불지 마라, 꼬맹이들. 분명 네년들의 고난은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것일지 몰라도,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은 여기 있는 누구도 네년들 못지 않다는 걸 알아둬라. ...한국으로 가고 싶다면 당장 꺼져라. 가서 연구소를 날려버리든 '그놈'을 갈아버리든 하고 싶은대로 해."

한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른 대원들의 이동 준비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후지노와 스칼렛은 그런 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곳을 떠났다. 대원들은 먼저 이동하는 두대의 US를 힐끗 보고는 이내 자신들의 준비에 몰두했다.




라그나뢰크 A팀이 일본을 공격하기 2시간 전인 오전 9시, 시우는 시영의 아파트에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이라 믿어 마지않던 기억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충격은 엄청났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났다든가, 예전부터 IS 조종을 위해 훈련을 받아왔다든가 하는 사실은 정체성이 완전히 부정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우야, 있니?"

급히 쫓아온 시영이 방문 밖에서 말을 걸었지만 시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이 잠겨있지는 않았지만 시영은 연구소에서 시우의 표정을 떠올라서 쉽사리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꾸 시간만 가고 있던 중, 두 사람의 IS에서-정확히는 IS에 내장된 통신 기능에서- 호출 신호가 울렸다. 시우는 그냥 무시했지만 시영은 거실로 자리를 옮긴 뒤 통신 스크린을 열었고, 그 즉시 화면에 소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 소장님. 왜 그러세요?"

- 방금 UN 안보리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협조 요청이 내려왔다. 현재 아시아에 체류중인 모든 IS 파일럿은 지금 즉시 중국 칭하이성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대기하다가 라그나뢰크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계획이 세워졌다고 하는구나.

"칭하이성... 중국 IS 연구소가 칭하이성 시닝에 있었죠? 규모로는 세계 3대 연구소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 그래. 언젠간 목표가 될 곳이니 기다리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얘기겠지. 유럽에서는 독일에, 아프리카에서는 수단에 집결한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다들 자기네 IS를 차출하는데 순순히 보낼까요?"

- 보유대수가 많은 나라라면 한두대 정도 빼돌릴지도 모르겠지만, 아예 안 보내는 나라는 없을 거야. 여기서 녀석들을 막지 못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으니까. 당장 훈련기도 뽑아와야 할 상황인데 발 빼기는 힘들겠지. 게다가 여기서 모른 척 한다면 그 나라는 라그나뢰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비난 꽤나 받을걸. 대놓고 비난은 못하더라도 은따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럴까요... 아무튼, 칭하이성으로 가면 되는 건가요?"

- 그래. 그리고 시우도 거기 있나?

"네, 지금 방에 있어요."

- 좀 어때 보이든?

소장의 말에 시영은 애매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걸 본 소장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에 안 보내는 나라는 왕따 신세이니 뭐니 소리를 했지만, 그렇다고 보내면 죽을 게 뻔한 아이에게 억지로 시킬 수는 없었다.

- 솔직히 IS가 하나라도 더 많은 편이 좋지만... 후우, 그렇다고 지금 저런 상태인 녀석을 억지로 내보냈다간 큰일 나겠지. 시영이 너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구나. ...미안하다. 그리고 꼭 무사히 돌아와라.

무표정한 얼굴로 시영과 말을 주고받던 소장은 마지막에 그 말을 하고는 바로 통신을 종료했고, 시영은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굳혔다. 아직 시우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시영은 다시 시우의 방문에 바짝 붙은 채 말을 걸었다.

"시우야, 얘기 들었니?"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영은 개의치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이게 마지막 대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변명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네 기억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챘을 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 전까지 너는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소장님을을 증오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고, 연구원들을 냉담하게 대하고, 나하고도 말을 안 나누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 그러니까 네가 스쿨 시험장에서 쇼크를 받고 기억이 바뀌었을 때, 나는 정말로 안심했어. 이제야 네가 겨우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 진심으로 행복해지는 건 어렵더라도 적어도 보통 아이들처럼 사소한 일로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기를 바랬어.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

시영은 얘기를 하며 시우가 스쿨 시험장에서 갓 돌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상황파악이 안 되어서 어리둥절한 얼굴, 평범한 소년처럼 농담에 웃고 시시한 이야기는 무시하던 모습, 기억이 바뀐 것을 숨기려 했지만 곳곳에서 미숙한 게 드러나 속으로 웃음짓게 했던 행동, 그 모두가 시영에겐 생소한 동시에 항상 바라오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시우가 기억을 되찾고-엄밀히 말하면 되찾은 게 아니라 들어서 알게 된 것뿐이지만- 라그나뢰크의 공격이 다가오는 지금,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난 이제 중국으로 갈 거야. 거기서 라그나뢰크의 공격을 저지하는 작전에 참가할 거고, 아마 운이 좋다면 돌아올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그 때는 정말로 가족이 되자. 그럼... 그만 가볼게."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시영은 거기서 얘기를 끝냈다. 시우의 방문에서 떨어져서 현관으로 향하려던 시영은, 신발을 신으려던 찰나에 시우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시우는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째서..."

"어?"

"어째서 싸우는 건데?"

"어째서라니... 지금 라그나뢰크의 목표는 모든 IS와 관련시설이잖아."

"그냥 IS를 포기하면 간단한 거 아니야?"

시우의 말에 시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지만 시우는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처음에는 자포자기한 음색이던 시우의 말은 말을 하면 할수록 열기를 띠었다.

"라그나뢰크가 노리는 건 누나가 말한대로 IS와 그 관련시설이니까, 그걸 포기하면 간단하잖아. 왜 꼭 싸우려고 해? 싸울 필요 없잖아. 그냥 포기하면 되잖아. 그냥 내버리면 되잖아. ...그냥 없어지면 되잖아!!"

주먹으로 바닥을 치는 쿵 소리와 함께 시우가 고함쳤다. 그때부터 시우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세상에 대한 규탄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애초에 IS를 왜 무기로 바꾼 건데! 원래는 우주복이었다며! 그걸 왜 사람을 죽이는 병기로 바꾼 건데! 절대방어? 전쟁이 애들 장난이야?! 게다가 전쟁터 한복판에선 절대방어고 뭐고 의미 없잖아! 그 다음에 파일럿을 죽여버리면 끝인데! 그리고 IS보다 US가 어디로 보나 더 낫잖아! 적어도 성별같은 말도 안 되는 차별은 없잖아! IS 때문에 꿈을 짓밟힌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 것 같아?! 남자들만이 아닐 거 아냐! 여자들도 적성 랭크 낮다는 이유로 시작도 못해보고 포기해야 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IS를 지키려고 싸우는 거냔 말이야! 왜 그런 것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야! 왜 그런 것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냐구! 왜! 왜!! 왜!!!"

시우의 외침은 마지막에는 반쯤 울음이 섞여 있었고, 잠시 후 방문을 열고 들어온 시영은 무릎을 꿇고 시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시우는 딱히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마주 끌어안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시우야, 그래도 난 갈 거야. 이건 내가 IS 파일럿이라서가 아니야. 내가 네 누나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왜..."

"지난 밤에 스쿨에서 습격을 당했다고 했지? 그 아이들은 아마 라그나뢰크와 접촉했을 거야. 절호의 기회니까. 그렇다면 함께 행동을 할 테고, 분명히 널 노리겠지. 그렇다면 널 지키기 위해서는 싸워서 쓰러트리는 수밖에 없어. 그들이, 그 아이들이 살아있는 한 널 계속 쫓아다닐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갈 거야. 누나는 동생을 지키는 법이니까."

거기까지 말한 시영은 다시 시우의 어깨를 붙잡고는 몸을 떼었다. 시우의 눈물이 가득한 눈을 본 시영은 이마를 한번 맞대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방을 나갔다. 그 등을 향해 시우는 손을 뻗었지만 차마 잡지는 못하고 허공을 쥘 뿐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이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우는 멍하니 방에 앉아있었다.

[시우.]

몇분이 지났을까, 시우는 은황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은황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이 들렸지만 시우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우가 어떤 생각을 하든, 저는 시우의 뜻을 따릅니다. 전에 저는 제가 움직이는 한 시우와 함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시우가 원하지 않는다면, 시우가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저는... 기꺼이 시우와 떨어질 것입니다. 저는 시우를 위해서 있으니까요. 그리고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저는 시우 당신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합니다.]

은황이 할 말을 끝낸 다음에도 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영의 집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라그나뢰크 A-1팀이 IS 스쿨을 제압한 시각은 도쿄 시각 오전 11시 20분경, 중국 시각으로는 오전 10시 20분경이었다. 그리고 약 30분 전부터 아시아의 IS들이 속속들이 시닝 인근에 있는 중국 IS 연구소로 집합하고 있었다. 시영이 도착한 것은 중국 시각 오전 10시10분경이었고, 이미 상당수의 IS 파일럿들이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우와..."

100기에 가까운 IS가 연구소 부근에 모여 에너지를 충전하는 모습은 상당히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도착하는 다른 IS들을 보며 시영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작전에 참가한 파일럿들은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잡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시영은 혹시 자신이 아는 파일럿이 없나 둘러보았지만 세자릿수에 달하는 IS의 리스트를 일일이 확인하기는 힘들었고, 덕분에 시영을 아는 파일럿들이 먼저 다가왔다.

"한시영, 오랜만이네."

"아... 누구시더라?"

"뭐야, 그 반응! 여기서 농담이 나와?"

"미안, 미안. 다들 너무 굳어있는 것 같아서 해본 건데... 괜히 했나?"

시영의 말에 중국 대표 리렌화(李蓮花)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고 시영은 곧바로 사과했다. 시영으로서는 분위기 좀 풀어볼 생각에 해본 말이었지만 그렇게 쉽사리 부드러워질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주변에 있던 다른 파일럿들의 눈총만 받을 뿐이었다. 렌화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넌 전부터 가끔 엉뚱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 그대로인 것 같아서 기쁘다고 할까, 아쉽다고 할까, 복잡하네."

"렌화가 예전 그대로라서 나는 좋은데."

"빈 말이라도 고마워. 그건 그렇고, 지난 회 몬도 그로소 이후로 실력은 좀 늘었어?"

"글쎄, 그 동안은 테스트 파일럿만 하고 대련은 거의 안 했으니까 어떨지 모르겠어. 조금 불안하긴 하네."

"말은 잘 한다, 준우승까지 했으면서."

"그러는 댁은 그 대회에서 우승하셨잖아요?"

그렇게 말을 주고 받은 두 사람은 쿡 하면서 살짝 웃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재개했다. 잡담은 여기까지였다.

"렌화,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 싸움을 걸어왔으면 맞받아쳐 줘야지. 난 맞고만 있을 정도로 호인이 아니야. 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온 거잖아?"

"......"

"게다가 지금 저 녀석들이 하고 있는 짓은 명백한 테러라고. 철저하게 응징해줘야 하지 않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은 렌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하는 말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자 일종의 자기최면이었고, 그 점은 시영도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시영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렌화가 걱정이 되어 말을 걸려고 했을 때, 연구소에서 외부 방송을 내보냈다. 라그나뢰크 관련 소식이었다.

- 방금 일본에 침입한 라그나뢰크 부대가 IS 스쿨과 연구소를 괴멸시킨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모든 파일럿들은 에너지 보급을 마친 후 전투에 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모든 파일럿들은 에너지 보급을 마친 후 전투에 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영이 중국으로 떠나고 나서도, 은황이 말을 끝낸 뒤에도 시우는 한동안 무릎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방에 앉아 있었다. 은황은 시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파일럿이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는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한 코어가 멋대로 파일럿의 심리를 읽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말을 걸기에도 주저되어서 은황도 아무말 없이 시우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만 지나고 있던 도중, 은황이 갑자기 하이퍼 센서로 파악한 정보를 알렸다.

[고속 접근 물체 2기 확인. 시속 500km 이상. 코어 반응 확인되었으나 네트워크상 응답 없음. 파일럿 미확인 코어입니다. 직선 코스로 이곳을 향해 비행중.]

그리고 잠시 후, 시우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력한 공격이 아파트의 일부분을 날려버렸다. 커다란 폭음과 진동이 시우가 있는 방까지 전해졌고, 시우는 놀라서 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왼쪽 위, 고도 93m!]

은황의 말에 시우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아파트를 공격한 두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도 시우를 발견했고, 방금 아파트를 공격한 무기를 시우를 향해 조준했다.

"...윽!"

[시우!]

시우는 대구경 캐논이 자신을 조준하는 것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은황을 전개해 날아올랐고, 그 직후 시영의 집은 문자 그대로 관통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벽과 천장의 일부 뿐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낸 시우는 눈앞의 두 사람, 후지노와 스칼렛을 노려보았다.

"역시 너희들이었나."

"달리 올 사람이라도 있나?"

"어째서 여기로 왔지? 그것도 단 둘이서."

"우리에겐 널 없애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널 없애는 데에는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해. 아니, 다른 녀석들은 끼어들 자격도 없지. 오직 우리만이 널 죽일 자격이 있다."

"...하."

후지노와 스칼렛의 말에 시우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안 그대로 복잡해 죽겠는데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 오히려 자신도 피해를입은 그 이유로 자신을 죽이려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지노와 스칼렛은 그 웃음이 자신들을 비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법 자신만만한 모양이군. 하지만 아직 기억을 못하는 모양인데, 시설에서 전투능력은 우리가 너보다 더 높았다."

"그런데도 단지 IS 적성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네가 선택받고 우리는 버려졌지. 거기다 버려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목숨까지 위험했다. 바로..."

"그래서?"

"뭐?"

한창 자신들의 울분을 토로하던 후지노와 스칼렛은 시우가 중간에 말을 끊고 물어보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둘의 반응을 본체 만체 하며 시우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 그게 내 탓이냐? IS 적성이 높고 낮은 게 나 때문이야? 너희들을 죽이려고 한 게 나였냐? 너희들을 시설에서 키운 게 나였냐? 너희들을 수술시킨 게 나였냐? 너희들을 라그나뢰크에 보낸 게 나였냐? 너희들을 유전자조작해서 만든 게 나였냐고! 젠장, 그 따위 피해자 의식 집어치워! 내가 대체 너희들에게 뭘 어쨌는데!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데 왜들 하나같이 날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데! 스쿨도! 라그나뢰크도! 너희들도! 그냥 조용히 하루하루 웃고 떠들며 살고 싶을 뿐인데 왜 가만히 안 놔두는 거냔 말이야! 아, 그래. 그거냐? 너희들이 그 후로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기억 못한 채 살고 있으니까 못 참게 된 거냐? 응? 열등감이야? 열등감 폭발이야? 그딴 거 신경 끄면 되잖아! 그냥 너희들도 너희들대로 살면 되잖아! 왜 남을 이용해서 자기 가치를 찾으려는 건데! 자기 가치는 자기가 만들란 말이야!"

"... 시끄러워! 태어날 때부터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키워진 끝에 결함품이라며 버려진 우리가 어떻게 가치를 찾는단 말이냐! 간신히 살아난 뒤에도 또다른 굴레가 씌여 결국엔 장기말에 불과한 우리가! 네놈이 그런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 같냐!"

"아, 그래! 그런 자격 없겠지! 그래서 그게 뭐가 어쨌는데! 너희들이 가진 자격이라는 것도 결국엔 너희들 스스로 있다고 생각한 것뿐이잖아! 애초에 그딴 게 어디 있어! 그러니까 그딴 거 신경쓰지 말고 각자 자기 식대로 살잔 말이야! 남 괴롭히지 말고!!"

"이...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이!"

"그 주둥아리를 영원히 닥치게 만들어주마!"

시우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후지노와 스칼렛은 시우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시우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사람들의 비명이 난무하고 건물이 무너져가는 가운데, 3명의 싸움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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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처음 연재했던 커뮤니티에서는 대부분 한주를 남자로 생각하고 계셨더군요.

미리...랄까, 좀 많이 늦긴 했습니다만, 한주는 여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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