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그러면 이제 PCS를 발동해 봐."

"알았어."

리자의 말을 듣고 시우는 의식을 집중했다. PCS는 별도의 명령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무장을 전개하거나 IS를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을 하면 발동되는 식이었지만 그 발동하는 방법이 영 까다로웠다.

'차라리 더블오에서처럼 '트란잠!'하고 외치면 발동되는 거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 거긴 스위치도 있었구나.'

"시우? 아직이야?"

"아, 미안. 잠깐만 기다려줘."

시우는 리자의 재촉을 듣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고, 잠시 후 PCS 발동을 알리는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PCS 발동. 임계점까지 59.48초.]

PCS가 발동되는 것과 동시에 두 장으로 보이도록 접혀있던 윙 바인더가 벌어지며 6장이 모두 펼쳐졌고, 기체 각부 관절에서 미처 처리되지 못한 에너지들이 흘러넘치며 작은 빛의 입자들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꼭 요정의 가루 같단 말이야."

"지금 거기 신경 쓸 때가 아니잖니. 조금이라도 더 익숙해져야지. 그럼 어제 하던 걸 계속해보자.. 여기서 저쪽 방벽 바로 앞까지 전력 질주 해봐."

"알았어. ...우와앗!"

리자의 지시대로 전속력을 낸 시우는 움직이자마자 코앞까지 다가온 방벽에 기겁했고, 충돌하기 직전 한쪽 다리를 들어 방벽을 반쯤 걷어차듯 버팀으로써 간신히 부딪히는 건 면했다. 이그니션 부스터도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가속력, PIC의 관성제어 능력도 상회하는 기동성까지 실감하면서 시우는 속으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사실 IS라면 기본적으로 파일럿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뛰어난 대 G 상쇄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PCS 발동 상태에서 나타나는 능력은 그 이상이었다.

- 부딪히진 않는 걸 보니까 많이 나아진 것 같네. 자, 시간 없으니까 그대로 반복. 그대로 반대편 방벽까지 왔다 갔다 하는 걸 연습하는 거야. 오늘 목표는 10cm 앞에서 멈추기. 시작!

"O.K!"

리자와 모의전을 벌인 다음날부터 시우는 리자의 도움을 받아 PCS 발동 상태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은황의 모든 스펙은 2세대 기체 중에서도 상위권 수준이었고, 무장도 제법 견실한 편이었다. 게다가 사격 훈련과 근접전 훈련은 정규 수업 내용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 훈련을 한다면 그보다는 은황만의 특별한 점을 살릴 수 있는 내용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방과 후 훈련의 내용은 PCS에 대한 적응 훈련이 되어 있었다. 어제까지는 아레나 양쪽 끝을 전속력으로 왕복하며 방벽 앞 30cm에서 멈추기였다.

[임계점 도달. PCS 정지. 실드 에너지 잔량 0. 기체 구동 에너지 잔량 10%. 대기 상태 전환 요망.]

1분이 지나자 경고 메시지와 함께 관절에서 흩날리던 입자가 사라졌고, 이윽고 은황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평소보다 배는 뻣뻣해진 은황을 움직이며 시우는 리자의 곁으로 걸어왔다.

"역시 아직 10cm 간격 유지는 힘들구나."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 그런 급가속과 급정지를 하면서도 20cm 간격이라면 괜찮은 거라고. 지상에서의 움직임이 그 정도면 공중에서도 꽤 잘 되지 않을까?"

"그럴까? 난 아직 걱정인데."

"뭐든지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거야. 그보다 대기 상태로 되돌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렇구나."

시우가 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대기 상태 전환을 요청하는 메시지가 다시 떠오르더니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멸의 강도가 강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시우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는 은황을 대기 모드로 전환했다. 은황이 사라지자 공중에 뜬 모습이 된 시우는 착지하면서 갑자기 느껴지는 신체의 중량감에 살짝 비틀거렸다. IS는 장착하면 자동으로 소규모 반중력 역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대기 상태가 되고 나면 가끔 움직임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엇차, 아무래도 역시 체력단련도 해두는 편이 좋을까."

"해둬서 나쁠 건 없어. 대(對) IS 전에서 중요한 게 기체의 성능과 능숙한 조작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걸 움직이는 건 사람이니까. 하지만 학급 대항전 때까지 체력을 끌어올리는 건 안 될 걸. 당장 다음주라구."

"뭐 그야 그렇지만, 앞날을 위해서라도 말이지."

그렇게 대답한 시우는 은황의 에너지 충전 상황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러자 시우의 얼굴 앞에 현재 은황의 에너지 상태를 알려주는 창이 떠올랐다.

[자체 에너지 충전중. 실드 에너지 완전 회복까지 58분. 구동 에너지 완전 회복까지 47분.]

피트에 돌아가면 구비되어 있는 에너지 충전 장치로 10분 안에 급속 충전시킬 수도 있었지만 시우는 피로해진 몸을 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그대로 메시지 윈도우를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리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까 그 메시지 윈도우, 시우가 띄운 거지?"

"응, 그런데 왜?"

시우의 대답을 들은 리자는 프레이르를 대기 상태로 되돌리고는 손가락을 뺨에 대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표정이었다.

"그게 말이지, 내가 알기로는 IS가 파일럿에게 메시지 윈도우를 띄워서 무언가를 알리는 건 장착중일 때만 가능한 걸로 알고 있었거든. 실제로 나도 대기 상태일 때에는 그런 메시지 띄워본 적 없고. 그리고 지금도..."

거기까지 말한 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아마도 뭔가를 강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방금 프레이르에게 기체 상황을 표시하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거 전혀 안 뜨거든. 은황은 뭔가 특별한가 보네."

'그런가? 하긴, 그러고보면 소설에서도 대기 상태의 IS가 뭔가 하는 듯한 모습은 안 나왔던 것 같네. 하이퍼 센서 동작도 없었고.'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시우 본인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하는 파트네가 특별하다고 말해주는데 기분이 나쁠 리도 없어서, 그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왜 그래?"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그렇고 오늘은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피곤해서 쉬고 싶어."

"그러자, 그럼. 벌써 아레나 이용 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내일 수업에 지장을 주면 안 되니까."




피트의 탈의실에서 교복을 다시 입고-거기서 씻으면 좋겠지만 바로 다음에 다른반 여학생들 사용 일정이 잡혀있어서 빨리 나와야했다.- 방으로 돌아온 시우는 방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뜻 보이는 리본색이 파란 색인 걸 보면 동급생인 것 같았는데, 얼굴이 완전히 낯선 걸 보면 아마도 다른 반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른 반 여학생이 내 방에는 어쩐 일이람?'

"저기, 무슨 일이야?"

"어? 아, 네가 한시우구나. 안녕, 나는 G반의 사브리나 에인세(Sabrina Heinze)야. 학급 대항전 대표로 나오게 됐는데, 상대가 너더라. 그래서 한번 얼굴도 볼 겸 와 봤어."

사브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내밀었고, 시우도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지금 보니 사브리나는 키도 시우보다 크고-사실 시우의 지금 키가 160cm라 작은 편이긴 하지만- 교복도 맵시입게 입어서 모델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살짝 그을린 듯한 피부색도 왠지 잘 어우러져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했다. 시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사브리나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 나한테 관심있니?"

"어? 글쎄, 관심이랄까. 모델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 푸훗, 아하핫."

시우가 생각한 그대로 대답하자 사브리나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보기에도 좋은 시원스런 웃음이었다. 방금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에는 순간적으로 사브리나에 대한 평가가 낮아졌지만, 웃는 모습을 보며 시우는 사브리나가 그렇게 잘난 척 하는 아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동안 웃던 사브리나는 눈가를 닦으며 다시 시우를 보았다.

"아, 미안. 누가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한 적은 별로 없어서. 게다가 너같은 남자아이에게 그런 말 들으니까 색다르네. 시우 너 꽤 귀엽다."

"귀, 귀여워?"

"응, 귀여워."

"그래..."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었지만 역시 시우가 낙담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청소년기의 남자가 자신이 귀여워보인다는데 솔직하게 기뻐할 사람은...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시우는 아니었다.

"에이, 그런 표정 짓지 마. 안 어울려. 어쨌든 앞으로 내 용건은 이걸로 끝. 좋은 아이인 것 같아서 다행이네."

"어... 그런데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랑 학급대항전하고는 상관 없는 거 아니야?"

"뭐,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기분나쁜 상대랑 싸우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랬다간 괜히 뒷맛만 더 찝찝해지니까."

"그럴 땐 오히려 더 확실하게 승부를 지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나중에 그쪽에서 원한 가지고 재도전해온다고. 얼마나 지겨운데."

"이미 해본 경험 있구나... 아, 맞다. 그런데 내가 상대인 걸 알았다면 대진표 나온 거지?"

사브리나와 얘기하던 시우는 문득 대진표에 생각이 미쳤다. 이렇게 상대쪽이 찾아왔다는 것은 대진표가 이미 공개되었다는 뜻일 텐데, 시우는 아직 대진표가 나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방금 막 공개가 되었는지, 아니면 공개되어 있었는데 시우가 모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 응. 어제 나왔어. 아직 몰랐니?"

"그래? 어디서 확인하면 돼?"

"컴퓨터에서 스쿨 일정 확인해보면 돼. 월별 행사에서 학급대항전 항목 열면 대진표도 나와."

"그렇구나, 모르고 있었어. 고마워."

"별말씀을. 그럼 난 갈게. 나중에 대항전할 때 보자."

"응, 그래. 잘 가."

사브리나는 손을 흔들며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모퉁이 저편으로 사브리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시우도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서는 방에 설치되어있는 컴퓨터를 켜고 스쿨 일정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확실히 학급대항전 일정과 대진표가 업로드되어 있었다.

"진짜네. 나만 몰랐나...?"

시우는 앞으로 매일 일정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대진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IS 스쿨은 각 학년이 총 8개반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학급대항전에서는 첫날 4개조의 대전이 있고, 둘째날에 4강전, 셋째날이 우승학급 결정전이었다. 대진표의 각 반 자리 옆에는 학급 대표의 이름도 적혀있었고, 1, 2학년은 월~수요일 동안, 그리고 3학년만 목~토요일에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3학년은 2년 넘게 스쿨에 다닌만큼 실력도 있으니 보면서 보고 배우라는 의미로 그렇게 시합일을 결정한 것 같았다. 우승한다고 특별히 뭔가 주어지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시우는 자신의 첫날 상대인 G반의 자리를 보았다. 반 이름 옆에는 확실하게 '사브리나 에인세(Sabrina Heinze)'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보며 생각을 정리할 즈음에야 의식 한구석에서 뭔가 알람 같은 게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은황이 알리는 메시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응? 뭐지? IS에 이런 기능도 있었나? 소설에서는 못 봤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우는 메시지를 띄우려고 했지만, 그 직전 알람의 느낌은 사라졌다. 시우는 도대체 뭐였나 싶었지만 은황에게 물어본다는 것도 어쩐지 이상해서-기계를 상대로 말을 건다는 것이 아직까지 어색했다- 그냥 샤워나 하기로 했다. 원래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사브리나와 마주치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다.




"자, 오늘 종례 끝. 그런데 한시우."

학급대항전이 있기 전 마지막 토요일, 사키는 종례를 마치며 시우를 불렀다.

"네?"

"학급대항전 준비는 잘 하고 있나?"

"뭐... 그럭저럭요?"

"그럭저럭...? 할 수 없군. 키르히아이스, 저 녀석 상태는 어떻지?"

자신의 질문에 시우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자 사키는 한숨을 내쉬며 리자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리고 리자는 지금까지 보고 느낀 그대로 대답했다.

"계속해서 나아지고 있어요. 그 시스템에도 상당히 익숙해졌고요. 하지만 다음주는 글쎄요... 요행이 있다면 또 모르겠네요."

"그런가. 알았다, 포기하지."

"포기가 너무 빠르십니다, 선생님!"

"시끄럽다. 억울하면 결승까지 진출해 봐. 두번만 이기면 되니까."

"그렇게 나오시는 겁니까..."

"자, 그럼 다들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보자."

시우가 으르렁 대는 것을 듣지도 않고 사키는 그대로 교실 문을 나섰고, 노려볼 대상을 잃은 시우는 그 화살을 리자에게 돌리려다 그만 뒀다. 어차피 사키나 리자가 자신에게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란 것도 알고 있고, 실제로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럴 거면 그냥 리자가 학급 대표 하는 게 낫지 않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서려는 시우에게 후지노와 스칼렛이 다가왔다.

"슈짱, 오늘도 훈련 할 거야?"

"아니, 오늘하고 내일은 좀 쉬려고. 괜히 피로가 쌓이거나 하면 좋을 거 없으니까."

"누가 들으면 세계규모 대회라도 나가는 줄 알겠군."

시우는 비수같은 스칼렛의 말을 애써 무시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런 시우에게 후지노가 재차 말을 걸었다.

"그러면 있다가 오후에 시뮬레이터 대전 좀 도와주지 않을래? 스칼렛하고만 하니까 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따지면 나도 사실상 초보니까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차라리 선생님들이나 리자한테 부탁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응? 내가 뭘?"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딱 맞춰 리자가 등장하는 바람에 시우와 후지노는 순간 덜컥 했다. 스칼렛은 알고 있었는지 눈 하나 깜짝안 했지만.

"별 거 아냐. 시뮬레이터 대전 상대가 되어달라는데, 나보단 네가 적임일 것 같아서. 아무래도 대전 경험도 나보다 많을 테고. 안 그래?"

"그렇긴 한데, 직접 부탁 받은 거잖아. 그런 거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면 나중에 미움받아."

"어? 아니 그래도, 나같은 선무당한테 도움받는 것보단 경험자가 봐주는 게 낫잖아."

"그런 의미가 아닌데... 하아, 알았어. 후지노, 스칼렛, 가자. 내가 도와줄게. 시우한테는 아무래도 아직 안 통하는 것 같아."

한숨을 섞으며 얘기하는 리자, 쓴웃음 짓는 후지노, 어쩐지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의 스칼렛. 세 여학생의 태도에서 왠지 모를 불만을 느꼈지만 시우는 그게 뭣 때문인지 몰랐기에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IS 스쿨의 장점 중 하나는, 등록금 뿐만 아니라 부대시설 이용 비용도 대부분 학교에서 부담한다는 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등록금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대부분의 학생들은 IS 관련 분야 육성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입학시킨 아이들이기 때문에 모든 비용을 각국 정부에서 부담하고 있었다. 가끔 예외로, 정부에서 입학시킨 경우가 아니라 관련 기업에서 추천해서 입학한 경우도 있지만 이 때에는 정부가 아니라 해당 기업에서 등록금을 납부해주기 때문에 역시 학생들에게 금전적인 부담은 돌아가지 않았다. 물론 매점에서 쓰는 돈이라든가, 외출 때 쓰는 비용 같은 것은 각자 내야 했지만 그 정도는 어차피 일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덕분에 시우는 부담없이 매주 한국으로 국제 전화를 걸었고, 이번주에도 마찬가지였다. 연결음이 10번 넘게 울린 후에야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누나? 나야, 시우."

- 아, 시우구나. 전화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긴 했어.

"그런 것치고는 좀 받는 게 늦네."

- 샤워하는 중이었거든. 그 정도는 좀 봐줘.

"샤워라... 방금 막 들어온 거야?"

- 응. 신형 프레임 테스트 중이라서 말이야. 그나마 오늘은 일찍 끝났네.

"일요일이고 뭐고 없네... 누나도 참 고생이다."

-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니까. 그러고보니까 다음주에 학급대항전이라고 했지? 어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어. IS란 거, 본격적으로 써보기 시작한 게 한달도 안 됐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지만 다른 반에서는 전부 전용기 쓰는 애들이 나올 텐데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시우의 말에 시영-시우의 누나-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쓴웃음을 지었는지, 아니면 뭔가 생각을 한 것인지 시우는 알 수 없었다.

- 너무 신경쓰지 마. 네 말대로 아직은 서투를 테니까. 경험이라고 생각하면서 나가면 그걸로 충분해. 단, 처음부터 무조건 기죽어서도망만 다니거나 하지는 말 것. 회피기동도 중요하지만 무작정 도망다니기만 해서는 모처럼 돌아온 기회도 날아가버리니까.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누나."

- ...세상에 단 둘뿐인 남매인데 걱정해주는 건 당연하지.

말하기 전에 어쩐지 한숨이라고 할까, 의미모를 간격이 있었지만 시우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마도 걱정되는 게 어쩔 수 없어서 그럴 것이다.

"그럼 이만 끊을게. 누나도 피곤할 텐데, 푹 쉬어."

- 그래, 너도 내일 대항전 힘내고. 우승하라고는 안 하겠지만 있는 힘껏 힘내라.

"응. 그럼 잘 자, 누나."

- 너도.

시영과 통화를 끝낸 시우는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전화기에서 물러섰고, 방으로 돌아가려다 등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던 여학생 몇명을 보고 움찔했다. 우리말-한국어-로 통화를 했기 때문에 그 여학생들은 시우가 누구와 통화했는지는 몰랐지만, 대화하면서 시우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였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게다가 복도에 놓인 공용 전화기라서 영상 통화는 안 되고 음성 통화만 되는 타입이었고, 그 점이 통화 상대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누구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여학생들은 그저 관심도 MAX의 눈초리로 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

그리고 시우는 서둘러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말없이 꽂히는 시선은 그것이 호의가 담겼든 적의가 담겼든 부담스러운 법이다.




다음날 오후 4시, 제 4 아레나의 관중석에는 C반과 G반 학생들이 거의 모두 와 있었다. 스쿨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있는 공식 대전이니 관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피트에서 준비를 하며 아레나 내 영상을 본 시우는 지난번보다 더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보면 이번에는 은황이 안정 요망이라는 메시지를 띄우지 않고 있네. 상황을 이해한... 아니, 그러면 진짜 사람 같잖아.'

- 한시우. 준비 끝났나? 곧 시합 시작이다.

"아, 네. 준비 됐어요."

- 좋아, 그럼 게이트를 열겠다. 열심히 하도록.

"네. 그럼, 갑니다!"

게이트가 열리는 것과 동시에 시우는 고속으로 통로를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 게이트에서도 사브리나의 IS가 튀어나왔고, 두명은 허공에서 엇갈리며 상대를 확인했다. 사브리나의 기체는 전체적으로 흰색의 컬러링에 스러스터나 플로팅 유닛 등의 눈에 띄는 장비들이 회색으로 되어 있었다.

[상대 IS 확인 종료. 3세대 프로토타입 IS, 퍼스널 네임 '아즈라엘(Azrael)'. 파일럿 사브리나 에인세. 근거리 및 중장거리 교전 능력 보유. 특수장비 확인, 디코이 메이커.]

"디코이 메이커라... 환영을 만들어서 빈틈을 노리는 건가.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걸."

은황이 파악한 사브리나의 기체의 데이터를 보고 시우가 중얼거린 직후 사브리나에게서 통신이 연결되었다.

- 안녕, 시우? 둘다 IS 스쿨에서 정식 대전은 처음이니까 잘 해보자.

"그래, 나도 잘 부탁해. 시작하자."

- 그럼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할게!

통신이 종료되는 것과 동시에 사브리나에게서 탄환이 날아들었고, 시우는 기겁하며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총격은 멈추지 않고 따라붙었고 시우는 재빨리 사브리나의 아래쪽으로 향했다. 위에서 바로 아래쪽으로 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일반적인 전법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IS간의 전투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전법이었다. 애초에 IS가 무중력 상황에서 기동하는 것을 전제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공중에서 자세를 바꾸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사브리나는 시우를 쫓으며 그대로 기체를 눕혀 조준을 맞출 뿐이었다. 지면에 수평이 될 정도로 누워서 자신을 조준하는 사브리나의 모습을 본 시우는 그제야 앗차 싶었다.
한번 더 실드로 총격을 받아내며 자리를 피한 시우는 바로 구미호를 겨누며 응사를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공격받으며 도망만 다녀서는 대책이 없고, 반격을 가해야 상대의 공격의 맥도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브리나는 시우의 공격을 대부분 피해내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도중에 탄환이 다 떨어지자 재빨리 확장영역에서 탄창만 전개하여 교체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물론 그 틈에 시우가 반격했지만 그것도 몇 발만 실드로 막고 나머지는 거의 다 회피했다.

'사브리나도 대표 후보생이었나? 실력 차가 너무 심하잖아!'

시우는 초조한 마음에 시야 한구석에 떠 있는 실드 게이지를 확인했다. 10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사브리나의 공격을 쉴새없이 받아낸 실드 에너지는 어느새 최대치의 60%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길어야 10분이야.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하는데...'

시우는 PCS를 써서 근접전을 노려볼까 하는 생각도 떠올렸지만 이내 포기했다. PCS가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1분 후에는 실드 에너지는 물론 구동 에너지까지 바닥나기 때문에 그 안에 결판을 내지 않으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게다가 지금 아즈라엘의 실드 게이지는 분명히 80% 이상, 어쩌면 90% 이상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1분 안에 승부를 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진짜 이런 상황 되고 나니까 영락백야가 얼마나 치트 스킬인지 뼈저리게 느껴지네. 하지만 난 주인공 보정이 없잖아!'

게다가 소설에서는 뱌쿠시키와 아카츠바키, 단 둘만이 퍼스트 폼에서 원 오프 어빌리티가 발현되었으니 지금 여기서 그런 게 일어나길 바라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시우의 얼굴 바로 옆으로 또 한발의 탄환이 핑 하고 지나갔다.

[경고. 본체에 가해진 대미지 20% 돌파. 현재 대미지 레벨 D.]

실드 에너지 소모뿐만 아니라 누적된 대미지 역시 착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대미지 40%부터는 레벨 C로 취급되어 한동안은 대기 상태로 유지해야만 했다. 서둘러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스나이퍼 라이플? 안 돼, 조준하는 동안 실드만 더 깎일 거야. 캐논도 안 돼. 애초에 캐논은 맞춘다는 보장도 없어. 총검은 아예 논외. 하지만 어설트 라이플도 저렇게 잘 피해다니는데... 아, 진짜 어쩌란 거야!'

시우가 타개책을 찾느라 정신없는 사이, 사브리나는 어설트 라이플을 오른손에 들고 사격을 유지하는 동시에 왼쪽 어깨 위로 레일 캐논까지 전개했다. 시우가 그것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레일 캐논이 시우를 사선 위에 놓은 상황이었다.

"큭!"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충격파에 휩쓸린 시우는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고, 고개를 들자 레일 캐논이 제2탄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우는 이를 악물었다.

[PCS 발동. 임계점까지 59.54초.]

윙 바인더 전개. 헤드기어, 풀 페이스 헬멧으로 변형. 레일 캐논이 직격하기 직전 시우는 그 자리를 이탈했다. 사브리나의 공격을 피해낸 시우는 구미호를 수납하고 양 팔등의 암 블레이드를 전개했다. PCS는 무장의 위력까지 증강시켜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속도를 살릴 수 있는 근접 공격이 좀 더 유리하리라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PCS에 익숙해졌기에 지난번과는 다를 거라는 약간의 자신감도 있었다.

"...!"

지나칠 정도의 급가속 때문에 시우 본인도 말을 하기 힘들 정도의 부담이 가해졌지만 그 덕택에 시우는 아즈라엘의 레일 캐논이 움직이기 전에 베어낼 수 있었다. 그 다음 다시 공중에서 급정지 후 아즈라엘을 향해 재가속. 이번 목표는 어설트 라이플. 사브리나는 서둘러 시우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자리에서 얼마 움직이지 못한 채 어설트 라이플도 두동강이 났다. 또다시 급정지 후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재가속. 등뒤를 아즈라엘의 머신건 탄환이 지나갔다. 이번에는 아즈라엘의 후방 스러스터가 목표. 공중에서 궤도를 꺾어 지면을 찬 다음 아즈라엘을 향해 돌진, 스쳐 지나가며 두 장의 대형 스러스터 중 왼쪽 스러스터를 베어냈다. 머신건 탄환 몇발이 발 뒤꿈치를 스치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목표는 아즈라엘의 오른쪽 후방 스러스터. 사브리나도 다급해졌는지 머신건과 피스톨을 꺼내서 시우를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시우는 아즈라엘을 중심으로 선회를 하는 동시에 상하로 급기동을 하며 전탄 회피. PCS 타임 리미터는 한계에 가까워져 있었다. 공중으로 급상승 후 태양을 등지고 급강하. 머신건과 피스톨의 탄환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실드를 뚫고 은황의 외부장갑을 두들겼다. 마침내 아즈라엘의 두번째 스러스터도 베어내는데 성공.

"꺄아아아아아아악!!"

사브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지상에 추락한 것과 시우가 지면에 착지한 것, PCS가 정지된 것은 거의 동시였다.

[PCS 시스템 정지. 에너지 압축 순환 중단. 각부 구동계 강제 냉각 개시. 실드 에너지 잔량 5%. 구동 에너지 잔량 14%. 본체 대미지 40% 돌파. 대미지 레벨 C.]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후우..."

숨을 몰아쉬며 은황의 메시지를 확인한 시우는 에너지 잔량이 0이 아닌 것을 보고 안도했다. 실드 에너지가 0%가 되는 것은 실전에서나 모의전에서나 너무 위험한 것 같아서 조정을 부탁했는데 제대로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PCS를 발동하는 도중 받은 타격과, PCS를 써서 기동하면서 기체에 가해진 부담이 대미지를 높여서 결국 레벨 C까지 올라간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좀 더 신경을 써야할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시우가 몸을 일으킬 때였다. 사브리나가 추락하면서 생긴 흙먼지를 뚫고 탄환이 날아들었다.

"우왁?!"

은황의 동체에 탄환이 명중한 직후, 멍해진 시우의 귀에 아레나 장내 방송이 들렸다.

- 제4 아레나 시합 종료. 1학년 C반 대 1학년 G반 학급 대항전. 승자, G반 대표 사브리나 에인세.

흙먼지가 걷히기 시작하자, 그 너머로 몸을 반쯤 일으키고 머신건을 시우에게 겨눈 사브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IS간의 대전은 기본적으로 실드 에너지를 0으로 만드는 시점에서 승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스러스터를 베어낸다고 끝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방송이 나오자 관중석에 있던 여학생들이 반으로 나뉘어 각자 기뻐하거나 낙담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본 시우는 피곤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 사브리나에게 다가갔고, 마침 일으서려던 사브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굉장하더라."

"그러는 시우 너도 대단하던데. 마지막에 그건 뭐였어? 설마 원 오프 어빌리티?"

"아니야. 우리나라에서 이 녀서... 아니, 이 아이 만들 때 집어넣은 시스템인데 적응하기 힘들어서 애먹는 중이라고. 쓰고나면 뒤가 없는 시스템이라서 말이지."

"그렇구나. 난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여유 부렸네. 역시 처음부터 제대로 할 걸 그랬나?"

사브리나의 말에 시우는 속으로 식은 땀을 흘렸다. 시작하자마자 그렇게나 몰아붙였던 게 제대로 한 게 아니라면, 대체 진심으로 했다면 무슨 꼴을 당했을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시종일관 밀어붙이고 결국엔 이겼으면서 무슨 소리야."

"그야 마지막에 시우 네가 방심해서 그런 거고. 아니었다면 내가 졌을 거야.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공부도 됐고, 교훈도 얻었네. 역시 상대가 좋았나 봐."

사브리나의 말에 시우는 쑥쓰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이후의 학급대항전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브리나는 이틀째의 4강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IS가 대미지 레벨 C 이상의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재기동하면 각종 시스템이 대미지 입은 상태를 기준으로 재구축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대기 상태에서 복구에만 전념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사브리나의 아즈라엘은 동체 대미지는 크지 않았지만 스러스터가 완전히 파괴되는 상당한 피해를 입어 대미지 레벨 C가 되었고, 시우의 은황도 마찬가지로 대미지 레벨이 C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 휴식해야 했다. 그 덕에 C반 대 G반의 승자와 시합을 할 예정이던 D반 대표는 부전승으로 결승전에 올라갔다. 결과적으로는 B반한테 졌지만.

학급대항전 마지막 날, 3학년 결승전 시합을 보며 시우는 손가락에 끼워진 은황의 반지를 내려다 보았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완전히 못 갈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호응하듯이 반지가 약간 따듯해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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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4편입니다.

전에 다 쓴 물건을 단순히 옮겨 적는 것뿐인데도 벌써 귀찮아지고 있습니다. 큰일이네요(...)

요즘 장마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면서 기운이 쏙 빠져서 아주 죽겠습니다. 다들 건강에 신경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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