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대항전이 끝난 다음날, 다시 말해 일요일부터는 골든위크였다. 대체 휴일 덕에 일주일, 정확히는 8일간(일요일부터 다음
일요일까지)을 통째로 놀게 된 스쿨은 단기 방학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고, 집이 가까운 학생들은 귀가 허가를 얻고 며칠간 기숙사를
비워두기도 했다. 일본 출신이 아닌 다른 학생들 중 일부도 고국에 다녀오기로 했지만 상당수는 계속 스쿨에 남아있으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 중에는 시우도 끼어 있었다. 스쿨에 조금 더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사실 한국에 돌아간들 매일같이 일에
쫓기는 시영에게 더 신경쓸 일이 늘어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귀국은 나중에 여름방학에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수요일, 시우는 모처럼 평일에 나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별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바람도 쐴 겸 도망도 다닐 겸(?) 일석이조라는 생각으로 나온 것이었다. 월요일에는 후지노와 스칼렛의 시뮬레이터 대전 상대를 해주었고, 화요일에는 리자와 사브리나와 대전을 해야 했다. 네명 다 원래는 모의전을 원했지만 스쿨이 단기 방학 상태라서 훈련기나 아레나의 사용 신청을 낼 수 없었고, 시뮬레이터만 사용할 수 있었다.(아레나는 달리기나 구기 종목과 같은 경우에는 휴일에도 개방되지만 IS 훈련을 위해서는 사용 신청을 얻어야만 했다.) 시우로서는 모처럼의 휴일이니 체력 단련도 틈틈이 하면서 푹 쉬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수요일인 오늘은 기숙사를 나와 시간을 때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왜 꼭 나냐고... 후지노나 스칼렛은 몰라도 리자하고 사브리나는 자기들끼리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고보면 리자와 사브리나가 시뮬레이터 룸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같은 게 감돌았다는 기억이 들었다. 시우는 대표 후보생끼리 가지는 라이벌 의식인가 하면서 넘어갔지만, 번지수를 미묘하게 잘못 짚은 판단이었다.
어쨌든 밖으로 나온 것까지는 좋은데, 정작 갈 곳이 없었다. 일본에 온 지는 이제 겨우 한달 조금 넘었으니 특별히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은 한국에 있고, 이렇다 보니 결론은 단순한 거리 배회 뿐이었다.
"계속 걷는 것도 힘들고, 일단 서점이나 한번 들러볼까... 응?"
서점을 찾아보려던 시우는 갑자기 떠오른 이상한 생각에 멈칫했다. 아까부터 왠지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더군다나 더 이상한 점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은 아직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마치 제6감이라도 발동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환청도 아니고 이건 또 뭐야..."
시우는 기분탓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감각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마침 근처에 거리 지도가 있어서 대형서점 한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점에서 책을 좀 살펴보던 시우는 계속 서서 읽는 것도 눈치가 보여 결국 밀리터리 잡지 하나를 구입했다. 밀리터리 잡지도 IS 개발이후 많이 변화하여, 전체 지면의 1/3은 IS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지금도 전투기나 전함, 전차와 같은 재래식 병기들은 계속해서 개발되고 있었지만 그 위력은 일단 IS에 크게 못미쳤고, 더구나 기본적으로 외형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에게 먹히고 들어가는 IS에비해 투박하기 이를데 없으니 잡지사들도 판매부수를 늘리고 싶으면 IS 관련지면의 양을 늘려야만 했다. 두세 달 전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지금 세상에 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기분이 자꾸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까 서점에 들어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느껴져온 누군가가 감시하는 듯한 감각이 우울해지는 것을 더욱 부채질했다. 시우가 말없이 계산을 끝내고 서점을 나섰을 때였다.
"아, 슈짱~."
"...응?"
갑자기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시우는 후지노와 스칼렛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고, 속으로 탄식했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거냐? 이건 운명이냐? 팔자소관이냐? 아니면 누군가의 농간?' 하면서. 그런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후지노는 생글생글 웃으며 시우에게 다가왔다.
"우연이네. 책 산 거야?"
"어, 응. 사지도 않고 보고만 나오는 건 좀 뭐해서."
"그렇구나~ 어떤 책인데?"
"그냥 잡지야. 밀리터리 쪽."
"흐응~ 시우도 남자였구나."
"...방금 그 발언, 어떤 생각에서 나왔는지 심히 궁금하고 또 짐작도 어느 정도 됩니다만."
"으응? 아냐, 아냐. 아무것도 아냐~"
웃으면서 손을 설레설레 내젓는 후지노와 한심하다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는 스칼렛. 시우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너희들은 웬일이야? 쇼핑?"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시우는 둘이 핸드백 외에는 들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았다.
"어머, 사주게? 시우는 마음도 넓구나~"
"아니, 사준다고는..."
"하지만 사양할게. 아무리 그래도 돈까지 뜯어내는 건 미안하니까."
"그 미안한 감정을 평소에 좀 표현해줘..."
"대신 물건만 들어줘. 알았지? 자, 그럼 가자~"
"응? 어? 자, 잠깐만? 나, 따라 간다고 한 적 없는데?"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
"그러니까 말한 적 없다고?!"
시우는 후지노와 스칼렛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외쳤지만 둘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으면서 후지노가 시우의 팔을 잡자 잽싸게 반대쪽 팔을 붙잡은 스칼렛의 모습은 어쩐지 무섭기까지 했다. 특정 부위가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아니었다. 남들이 보면 양쪽에서 팔짱낀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본인이 느기기에는 강제연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시우는 우울해진 기분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덧붙여 서점에 들어가기 전부터 느꼈던 정체모를 시선의 느낌까지도.
"C-03. '아담'은 현재 이동중.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 둘과 합류했다."
- HQ. 알았다. 상대의 영상이 있나?
"확보했다. 전송... 완료."
- 전송 확인. 식별 완료. 클래스메이트, 카테고리 B로 확인. 경계레벨 C로 상향 조정. 임무 속행하라.
"라저. 임무 속행."
결국 시우는 두사람에게 끌려다니며 오후 내내 짐을 들어주어야 했다. 사실 그렇게 많이 사지는 않아서 무겁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들어가는 곳들 대부분이 여성 의류 전문점, 심지어는 속옷 가게까지 가는 바람에 시우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때마다 후지노는 심술궂은 웃음을, 스칼렛은 어쩐지 비웃음이 느껴지는 무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쇼핑을 끝낸 세사람-정확히는 쇼핑은 둘이 하고 시우는 끌려다녔지만-은 카페 한곳에 앉아 쉬고 있었다.
"하아... 어쩐지 지치네."
"무슨 소리야. 남자가 벌써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
"보기만큼 약하구나."
무심코 나온 시우의 본심에 이어지는 후지노의 타박, 그리고 스칼렛의 역시 비수같은 한마디.
"피곤해지는 거랑 남자인 건 상관없잖아... 아."
"왜? 뭐 잊은 거 있어?"
"아니... 잊은 거라고 할까,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고 할까..."
시우의 애매모호한 표현에 후지노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스칼렛은 잠자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마 무슨 말을 할지 대강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후지노가 계속 재촉하자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다다음주, 우리 중간시험이잖아. 그런데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는 게 생각났어."
"...아."
"...역시 그랬군."
"여, 역시라니? 무슨 말이야?"
"아니, 됐어. 안 물어볼게. 적어도 혼자 죽지는 않겠구나."
시우는 조금 안심된다는 투로 몸을 의자에 기대며 중얼거렸고, 그 말을 들은 후지노는 정색을 했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시험공부를 따로 안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후지노가 약오른다는 듯이 시우를 노려보고 있자 스칼렛이 커피잔을 내려놓더니 후지노에게 말했다.
"걱정마. 내가 도와줄게."
"정말?! 고마워, 역시 스칼렛 뿐이구나."
후지노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시우를 흘겨보았고 시우는 당황해버렸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놀린 격이 되었고, 그 대가인지 뭔지로 시우는 아무래도 버림받을 분위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우는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보다 스칼렛과 후지노가 짐을 챙겨 일어나는 것이 빨랐다.
"아..."
시우를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재빨리 카페를 나가버렸고, 시우의 눈앞에 놓인 것은 반쯤 남은 커피잔 두개와 자신의 커피잔, 그리고 계산서 한장이었다. 시우는 한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확실하게 당하네... 내가 잘못한 거긴 하지만 말이야."
씁쓸하게 웃으며 시우는 계산서를 쥐고 카운터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신경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느껴지긴 했지만 정신건강을 위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C-03. 아담이 움직인다. 카테고리 B는 돌아오지 않았다."
- HQ. 카테고리 B는 에덴으로 이동중. 경계레벨 유지. 아담에 전념하라.
"라저. 아담에만 전념하겠다."
2136년 5월 7일,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사키가 중간시험 기간이 바로 다음주라는 사실을 전달하자 아니나 다를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잠시 반이 소란스러워졌다. 어쨌든 1주일이라는 유예 기간이 있었기에 모두들 수업과 복습에 집중할 수 있었고, 학급대항전과 골든 위크로 어수선해졌던 스쿨의 분위기는 빠른 속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실 그리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 IS 스쿨은 속칭 진학교라고 불리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 교과의 성적은 크게 문제삼지 않고 있었다. 물론 고등교육기관의 역할도 겸하고 있긴 하지만 IS 스쿨은 어디가지나 IS 파일럿 및 관련 기술자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기관이었고, 그 때문에 시험의 낙제점은 다른 학교들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었다. 물론 IS 관련 교과에 있어서는 80점이상을 획득해야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학교인 이상 시험은 봐야 했고, 낙제점은 면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했지만, 이제 IS를 접한지 석달째가 되는 시우가 그 내용들을 이해하는 건 어려웠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는 내용들과 씨름할 생각에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1교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우."
"아, 리자구나. 왜?"
"다음주 중간시험 말인데,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예전 같았으면 리자의 말에 반 분위기가 또 이상하게 변했겠지만, 리자가 특별히 자신을 어필하려 한다든가 하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모두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평범하게 넘어가곤 했다. 게다가 시우가 누가 말을 걸어도 워낙 무덤덤하게 -말하자면 별다른 특이 반응 없이- 대한 탓에 시우에 대한 관심도 예전만 못했다.
"어? 괜찮아? 나 모르는 게 많아서 내가 물어보기만 할 것 같은데."
"괜찮아.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는 것도 공부가 되는걸. 신경 안 써도 돼."
"그래? 리자가 괜찮다면야 뭐... 나야 도와주면 고맙지."
"그럼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기로 한 거다. 어디서 할까?"
리자의 말에 시우는 공부할 장소를 떠올렸다. 일단 리자의 방은 기각. 여학생들은 2인1실이라서 그 방에는 리자의 룸메이트도 있었다. 두번째로 떠올린 건 시우 자신의 방이었지만, 이것도 기각. 외간 남자의 방에 여자를 함부로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인 것도 있고, IS 스쿨은 특성상 사실상 여학교나 다름없다. 만약 여학생이 남학생 방에 혼자 들어갔다는 얘기가 돌기라도 하면... 소문이란 것은 확대 재생산되기 마련이고... 그 뒤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마지막 남은 후보는 교내 독서실. IS 스쿨에는 중앙 도서관 외에도 독서실을 따로 마련해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따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묻고 대답할 때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독서실이 제일 무난할 것 같았다.
"독서실에서 하자. 오늘 수업 끝나고 같이 갈까?"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있다가 봐."
...그리고 방과 후. 독서실 앞에는 리자, 시우, 사브리나, 이렇게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리자와 시우는 약속했던 대로 시험 공부를 하러 왔고, 사브리나도 공부를 하기 위해서 독서실에 왔다가 문 앞에서 만난 것이다.
"안녕, 사브리나."
"안녕, 시우. 그쪽은... 시우 반 친구?"
"응, 엘리자베스 키르히아이스라고 해. 사브리나 에인세지? 잘 부탁해."
"아아, 네가 엘리자베스였구나. 독일 대표 후보생.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나도 잘 부탁해."
"그러는 사브리나도 아르헨티나 대표 후보생이잖아?"
리자와 사브리나는 그렇게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고, 시우는 어쩐지 들러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서 있으려니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돌려 시우를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시우랑 공부하려고 왔는데 본의아니게 무시해버렸네."
"미안, 시우. 그런데 공부라면, 시험 공부?"
"어, 응. 아무래도 다음주에 시험이니까 공부는 해둬야 할 것 같아서."
"그럼 나도 같이 할까? 둘보다는 셋이 하는 게 서로 부족한 거 물어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시우의 대답을 들은 사브리나는 작게 손뼉을 치며 말했고, 시우는 리자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처음 이야기를 꺼낸 것은 리자였으니 결정도 리자가 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우가 자신을 바라보자 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같이 하자. 어차피 시험 범위는 다 똑같으니까 반이 달라도 상관없고."
"고마워~ 그러면 들어가서 자리 잡자. 다들 공부하러 와서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
그렇게 독서실에 들어가보니 과연이라고 할까, 벌써 학생들이 꽤 많이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 자리나 두 자리만 비어 있었다. 시우 일행은 좀 돌아다닌 후에야 빈 자리 셋을 찾아 앉을 수 있었고, 그때부터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 직전까지 틈틈이 쉬면서 공부를 했다. 도중에 시우가 몇번 물어보고 대답을 듣느라 소리가 나서 주변 학생들에게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다들 시험 보느라 수고들 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묻는데, 설마 낙제점 받는 사람은 없겠지?"
시험이 끝난 토요일 종례시간. 사키의 말에 몇몇이 살짝 몸이 굳히는 기색을 보였지만 정작 사키는 눈치 못 챈 척 하며 넘어갔다. 사실 혼낼 생각은 처음부터 없기도 했다.
"후우... 앞으로는 일반 학과 공부에도 좀 신경 써라. 여기가 아무리 IS 스쿨이라고 해도 학교이고, 너희들은 학생이니까. 그리고 전달할 사항이 있다. 아는 사람들은 아마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거기까지 말하자 교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대로 중얼거린 것이고, 모르는 사람들은모르는 사람들대로 근처 자리의 친구들에게 물어보느라 잠시 반이 소란스러워졌다. 사키는 다시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며 말을 이었다.
"주목해라. 아직 얘기 안 끝났잖냐. 앞으로 약 한달 뒤, 정확히 말하면 6월 25일부터 학년별 토너먼트가 있을 예정이다. 원래는 1:1로 진행되는데, 올해부터는 실전에 조금 더 가깝게 하기 위해서 2:2 팀 매치로 진행하기로 했다. 앞으로 대충 3주 동안, 그러니까 정확히 6월 8일까지 팀 편성 신청을 받으니까 파트너를 정한 사람들은 그때까지 신청서를 작성해서 내도록. 6월 8일까지 안 낸 사람은 무작위로 파트너가 결정되니까 나중에 불평해도 소용없다. 알겠지?"
""""""""""네에~""""""""""
"좋아. 그럼 오늘 종례는 이걸로 끝. 다들 주말 잘 보내라."
사키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교실은 시끌벅적해졌다. 아무래도 미리미리 파트너를 정해놓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시우는 자신을 둘러싼 십여명의 여학생들을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왜, 왜들 그래?"
"""""시우(슈짱)! 나랑 파트너 하자!!"""""
"......"
뜻밖의 상황이라고 할까, 시우는 자신과 파트너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 파트너를 하려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파트너에 대한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무작위로 파트너가 결정되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팀워크 문제는 조금 걱정이었지만.) 처음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여학생들이 가진 관심도 지금은 많이 줄어들어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시우는 남자였고 전원 여성 속에서 청일점(...)은 무척이나 희귀하면서 동시에 이런 기회를 노려야 공개적으로 가까이 할 수 있는 존재였다.(물론 드물게 리자나 사브리나처럼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대하는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시우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여학생들은 서서히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시우는 점점 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당황하게 되었다. 때마침 구세주처럼 리자가 다가오며 여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자, 자. 다들 그만 해. 시우가 곤란해하잖아. 게다가 그렇게 너무 들이대면 좋아하던 사람도 도망갈지도 몰라?"
리자의 말에 여학생들은 시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압박하는 것은 그만 뒀지만 그렇다고 금방 물러설 기세도 아니었다. 어떡해야 하나 시우가 고민하고 있는데 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너희들끼리 모의전을 해서 결정하는 건 어때?"
""""뭐?""""
그 말을 들은 여학생들은 물론 시우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쟁탈전도 아니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데 리자가 말을 이었다.
"응, 그러면 되겠네. 이름하여 'C반배 시우 파트너 쟁탈전. 우승자에게는 시우와 토너먼트 파트너 자격이 주어집니다.' 어때?"
"...그럴싸 한데?"
"그거 괜찮다."
"공정하기도 하고."
"이거라면 다들 수긍하겠는걸."
"나 찬성~"
"나도~"
"입후보는 언제까지 하면 돼?"
"일정은? 파트너 결정은 언제 되는 거야?"
여학생들은 어느새 시우를 내버려두고 리자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회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포위에서는 벗어났지만 자신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모습을 보고 시우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저기... 내 의사는...? 내 의사는 완전히 무시...?"
"그러면 입후보 기간은 이번주로..."
"모의전은 다음주부터..."
"한 5주 남았으니 2주안에만 결정되면..."
"그보다 다른 반 아이들..."
"일단 타이틀이 걸렸으니 공개..."
"하지만 그러면 경쟁..."
"저기... 저기요...? 아무도 안 들으시나요...?"
반쯤 애처롭게 여학생들에게 말을 거는 시우는 문득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후지노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고, 그 곁에는 언제나 그렇듯 스칼렛이 미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좀 말려달라는 심정을 담아 바라보는 시우에게 후지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포기하면 편해."
======================================================================
5편입니다. 그동안 휴가다 뭐다 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
그리고 수요일, 시우는 모처럼 평일에 나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별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바람도 쐴 겸 도망도 다닐 겸(?) 일석이조라는 생각으로 나온 것이었다. 월요일에는 후지노와 스칼렛의 시뮬레이터 대전 상대를 해주었고, 화요일에는 리자와 사브리나와 대전을 해야 했다. 네명 다 원래는 모의전을 원했지만 스쿨이 단기 방학 상태라서 훈련기나 아레나의 사용 신청을 낼 수 없었고, 시뮬레이터만 사용할 수 있었다.(아레나는 달리기나 구기 종목과 같은 경우에는 휴일에도 개방되지만 IS 훈련을 위해서는 사용 신청을 얻어야만 했다.) 시우로서는 모처럼의 휴일이니 체력 단련도 틈틈이 하면서 푹 쉬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수요일인 오늘은 기숙사를 나와 시간을 때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왜 꼭 나냐고... 후지노나 스칼렛은 몰라도 리자하고 사브리나는 자기들끼리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고보면 리자와 사브리나가 시뮬레이터 룸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같은 게 감돌았다는 기억이 들었다. 시우는 대표 후보생끼리 가지는 라이벌 의식인가 하면서 넘어갔지만, 번지수를 미묘하게 잘못 짚은 판단이었다.
어쨌든 밖으로 나온 것까지는 좋은데, 정작 갈 곳이 없었다. 일본에 온 지는 이제 겨우 한달 조금 넘었으니 특별히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은 한국에 있고, 이렇다 보니 결론은 단순한 거리 배회 뿐이었다.
"계속 걷는 것도 힘들고, 일단 서점이나 한번 들러볼까... 응?"
서점을 찾아보려던 시우는 갑자기 떠오른 이상한 생각에 멈칫했다. 아까부터 왠지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더군다나 더 이상한 점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은 아직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마치 제6감이라도 발동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환청도 아니고 이건 또 뭐야..."
시우는 기분탓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감각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마침 근처에 거리 지도가 있어서 대형서점 한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점에서 책을 좀 살펴보던 시우는 계속 서서 읽는 것도 눈치가 보여 결국 밀리터리 잡지 하나를 구입했다. 밀리터리 잡지도 IS 개발이후 많이 변화하여, 전체 지면의 1/3은 IS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지금도 전투기나 전함, 전차와 같은 재래식 병기들은 계속해서 개발되고 있었지만 그 위력은 일단 IS에 크게 못미쳤고, 더구나 기본적으로 외형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에게 먹히고 들어가는 IS에비해 투박하기 이를데 없으니 잡지사들도 판매부수를 늘리고 싶으면 IS 관련지면의 양을 늘려야만 했다. 두세 달 전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지금 세상에 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기분이 자꾸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까 서점에 들어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느껴져온 누군가가 감시하는 듯한 감각이 우울해지는 것을 더욱 부채질했다. 시우가 말없이 계산을 끝내고 서점을 나섰을 때였다.
"아, 슈짱~."
"...응?"
갑자기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시우는 후지노와 스칼렛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고, 속으로 탄식했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거냐? 이건 운명이냐? 팔자소관이냐? 아니면 누군가의 농간?' 하면서. 그런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후지노는 생글생글 웃으며 시우에게 다가왔다.
"우연이네. 책 산 거야?"
"어, 응. 사지도 않고 보고만 나오는 건 좀 뭐해서."
"그렇구나~ 어떤 책인데?"
"그냥 잡지야. 밀리터리 쪽."
"흐응~ 시우도 남자였구나."
"...방금 그 발언, 어떤 생각에서 나왔는지 심히 궁금하고 또 짐작도 어느 정도 됩니다만."
"으응? 아냐, 아냐. 아무것도 아냐~"
웃으면서 손을 설레설레 내젓는 후지노와 한심하다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는 스칼렛. 시우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너희들은 웬일이야? 쇼핑?"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시우는 둘이 핸드백 외에는 들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았다.
"어머, 사주게? 시우는 마음도 넓구나~"
"아니, 사준다고는..."
"하지만 사양할게. 아무리 그래도 돈까지 뜯어내는 건 미안하니까."
"그 미안한 감정을 평소에 좀 표현해줘..."
"대신 물건만 들어줘. 알았지? 자, 그럼 가자~"
"응? 어? 자, 잠깐만? 나, 따라 간다고 한 적 없는데?"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
"그러니까 말한 적 없다고?!"
시우는 후지노와 스칼렛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외쳤지만 둘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으면서 후지노가 시우의 팔을 잡자 잽싸게 반대쪽 팔을 붙잡은 스칼렛의 모습은 어쩐지 무섭기까지 했다. 특정 부위가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아니었다. 남들이 보면 양쪽에서 팔짱낀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본인이 느기기에는 강제연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시우는 우울해진 기분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덧붙여 서점에 들어가기 전부터 느꼈던 정체모를 시선의 느낌까지도.
"C-03. '아담'은 현재 이동중.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 둘과 합류했다."
- HQ. 알았다. 상대의 영상이 있나?
"확보했다. 전송... 완료."
- 전송 확인. 식별 완료. 클래스메이트, 카테고리 B로 확인. 경계레벨 C로 상향 조정. 임무 속행하라.
"라저. 임무 속행."
결국 시우는 두사람에게 끌려다니며 오후 내내 짐을 들어주어야 했다. 사실 그렇게 많이 사지는 않아서 무겁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들어가는 곳들 대부분이 여성 의류 전문점, 심지어는 속옷 가게까지 가는 바람에 시우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때마다 후지노는 심술궂은 웃음을, 스칼렛은 어쩐지 비웃음이 느껴지는 무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쇼핑을 끝낸 세사람-정확히는 쇼핑은 둘이 하고 시우는 끌려다녔지만-은 카페 한곳에 앉아 쉬고 있었다.
"하아... 어쩐지 지치네."
"무슨 소리야. 남자가 벌써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
"보기만큼 약하구나."
무심코 나온 시우의 본심에 이어지는 후지노의 타박, 그리고 스칼렛의 역시 비수같은 한마디.
"피곤해지는 거랑 남자인 건 상관없잖아... 아."
"왜? 뭐 잊은 거 있어?"
"아니... 잊은 거라고 할까,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고 할까..."
시우의 애매모호한 표현에 후지노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스칼렛은 잠자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마 무슨 말을 할지 대강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후지노가 계속 재촉하자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다다음주, 우리 중간시험이잖아. 그런데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는 게 생각났어."
"...아."
"...역시 그랬군."
"여, 역시라니? 무슨 말이야?"
"아니, 됐어. 안 물어볼게. 적어도 혼자 죽지는 않겠구나."
시우는 조금 안심된다는 투로 몸을 의자에 기대며 중얼거렸고, 그 말을 들은 후지노는 정색을 했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시험공부를 따로 안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후지노가 약오른다는 듯이 시우를 노려보고 있자 스칼렛이 커피잔을 내려놓더니 후지노에게 말했다.
"걱정마. 내가 도와줄게."
"정말?! 고마워, 역시 스칼렛 뿐이구나."
후지노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시우를 흘겨보았고 시우는 당황해버렸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놀린 격이 되었고, 그 대가인지 뭔지로 시우는 아무래도 버림받을 분위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우는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보다 스칼렛과 후지노가 짐을 챙겨 일어나는 것이 빨랐다.
"아..."
시우를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재빨리 카페를 나가버렸고, 시우의 눈앞에 놓인 것은 반쯤 남은 커피잔 두개와 자신의 커피잔, 그리고 계산서 한장이었다. 시우는 한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확실하게 당하네... 내가 잘못한 거긴 하지만 말이야."
씁쓸하게 웃으며 시우는 계산서를 쥐고 카운터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신경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느껴지긴 했지만 정신건강을 위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C-03. 아담이 움직인다. 카테고리 B는 돌아오지 않았다."
- HQ. 카테고리 B는 에덴으로 이동중. 경계레벨 유지. 아담에 전념하라.
"라저. 아담에만 전념하겠다."
2136년 5월 7일,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사키가 중간시험 기간이 바로 다음주라는 사실을 전달하자 아니나 다를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잠시 반이 소란스러워졌다. 어쨌든 1주일이라는 유예 기간이 있었기에 모두들 수업과 복습에 집중할 수 있었고, 학급대항전과 골든 위크로 어수선해졌던 스쿨의 분위기는 빠른 속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실 그리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 IS 스쿨은 속칭 진학교라고 불리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 교과의 성적은 크게 문제삼지 않고 있었다. 물론 고등교육기관의 역할도 겸하고 있긴 하지만 IS 스쿨은 어디가지나 IS 파일럿 및 관련 기술자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기관이었고, 그 때문에 시험의 낙제점은 다른 학교들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었다. 물론 IS 관련 교과에 있어서는 80점이상을 획득해야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학교인 이상 시험은 봐야 했고, 낙제점은 면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했지만, 이제 IS를 접한지 석달째가 되는 시우가 그 내용들을 이해하는 건 어려웠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는 내용들과 씨름할 생각에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1교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우."
"아, 리자구나. 왜?"
"다음주 중간시험 말인데,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예전 같았으면 리자의 말에 반 분위기가 또 이상하게 변했겠지만, 리자가 특별히 자신을 어필하려 한다든가 하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모두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평범하게 넘어가곤 했다. 게다가 시우가 누가 말을 걸어도 워낙 무덤덤하게 -말하자면 별다른 특이 반응 없이- 대한 탓에 시우에 대한 관심도 예전만 못했다.
"어? 괜찮아? 나 모르는 게 많아서 내가 물어보기만 할 것 같은데."
"괜찮아.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는 것도 공부가 되는걸. 신경 안 써도 돼."
"그래? 리자가 괜찮다면야 뭐... 나야 도와주면 고맙지."
"그럼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기로 한 거다. 어디서 할까?"
리자의 말에 시우는 공부할 장소를 떠올렸다. 일단 리자의 방은 기각. 여학생들은 2인1실이라서 그 방에는 리자의 룸메이트도 있었다. 두번째로 떠올린 건 시우 자신의 방이었지만, 이것도 기각. 외간 남자의 방에 여자를 함부로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인 것도 있고, IS 스쿨은 특성상 사실상 여학교나 다름없다. 만약 여학생이 남학생 방에 혼자 들어갔다는 얘기가 돌기라도 하면... 소문이란 것은 확대 재생산되기 마련이고... 그 뒤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마지막 남은 후보는 교내 독서실. IS 스쿨에는 중앙 도서관 외에도 독서실을 따로 마련해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따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묻고 대답할 때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독서실이 제일 무난할 것 같았다.
"독서실에서 하자. 오늘 수업 끝나고 같이 갈까?"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있다가 봐."
...그리고 방과 후. 독서실 앞에는 리자, 시우, 사브리나, 이렇게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리자와 시우는 약속했던 대로 시험 공부를 하러 왔고, 사브리나도 공부를 하기 위해서 독서실에 왔다가 문 앞에서 만난 것이다.
"안녕, 사브리나."
"안녕, 시우. 그쪽은... 시우 반 친구?"
"응, 엘리자베스 키르히아이스라고 해. 사브리나 에인세지? 잘 부탁해."
"아아, 네가 엘리자베스였구나. 독일 대표 후보생.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나도 잘 부탁해."
"그러는 사브리나도 아르헨티나 대표 후보생이잖아?"
리자와 사브리나는 그렇게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고, 시우는 어쩐지 들러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서 있으려니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돌려 시우를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시우랑 공부하려고 왔는데 본의아니게 무시해버렸네."
"미안, 시우. 그런데 공부라면, 시험 공부?"
"어, 응. 아무래도 다음주에 시험이니까 공부는 해둬야 할 것 같아서."
"그럼 나도 같이 할까? 둘보다는 셋이 하는 게 서로 부족한 거 물어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시우의 대답을 들은 사브리나는 작게 손뼉을 치며 말했고, 시우는 리자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처음 이야기를 꺼낸 것은 리자였으니 결정도 리자가 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우가 자신을 바라보자 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같이 하자. 어차피 시험 범위는 다 똑같으니까 반이 달라도 상관없고."
"고마워~ 그러면 들어가서 자리 잡자. 다들 공부하러 와서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
그렇게 독서실에 들어가보니 과연이라고 할까, 벌써 학생들이 꽤 많이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 자리나 두 자리만 비어 있었다. 시우 일행은 좀 돌아다닌 후에야 빈 자리 셋을 찾아 앉을 수 있었고, 그때부터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 직전까지 틈틈이 쉬면서 공부를 했다. 도중에 시우가 몇번 물어보고 대답을 듣느라 소리가 나서 주변 학생들에게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다들 시험 보느라 수고들 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묻는데, 설마 낙제점 받는 사람은 없겠지?"
시험이 끝난 토요일 종례시간. 사키의 말에 몇몇이 살짝 몸이 굳히는 기색을 보였지만 정작 사키는 눈치 못 챈 척 하며 넘어갔다. 사실 혼낼 생각은 처음부터 없기도 했다.
"후우... 앞으로는 일반 학과 공부에도 좀 신경 써라. 여기가 아무리 IS 스쿨이라고 해도 학교이고, 너희들은 학생이니까. 그리고 전달할 사항이 있다. 아는 사람들은 아마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거기까지 말하자 교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대로 중얼거린 것이고, 모르는 사람들은모르는 사람들대로 근처 자리의 친구들에게 물어보느라 잠시 반이 소란스러워졌다. 사키는 다시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며 말을 이었다.
"주목해라. 아직 얘기 안 끝났잖냐. 앞으로 약 한달 뒤, 정확히 말하면 6월 25일부터 학년별 토너먼트가 있을 예정이다. 원래는 1:1로 진행되는데, 올해부터는 실전에 조금 더 가깝게 하기 위해서 2:2 팀 매치로 진행하기로 했다. 앞으로 대충 3주 동안, 그러니까 정확히 6월 8일까지 팀 편성 신청을 받으니까 파트너를 정한 사람들은 그때까지 신청서를 작성해서 내도록. 6월 8일까지 안 낸 사람은 무작위로 파트너가 결정되니까 나중에 불평해도 소용없다. 알겠지?"
""""""""""네에~""""""""""
"좋아. 그럼 오늘 종례는 이걸로 끝. 다들 주말 잘 보내라."
사키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교실은 시끌벅적해졌다. 아무래도 미리미리 파트너를 정해놓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시우는 자신을 둘러싼 십여명의 여학생들을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왜, 왜들 그래?"
"""""시우(슈짱)! 나랑 파트너 하자!!"""""
"......"
뜻밖의 상황이라고 할까, 시우는 자신과 파트너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 파트너를 하려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파트너에 대한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무작위로 파트너가 결정되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팀워크 문제는 조금 걱정이었지만.) 처음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여학생들이 가진 관심도 지금은 많이 줄어들어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시우는 남자였고 전원 여성 속에서 청일점(...)은 무척이나 희귀하면서 동시에 이런 기회를 노려야 공개적으로 가까이 할 수 있는 존재였다.(물론 드물게 리자나 사브리나처럼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대하는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시우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여학생들은 서서히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시우는 점점 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당황하게 되었다. 때마침 구세주처럼 리자가 다가오며 여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자, 자. 다들 그만 해. 시우가 곤란해하잖아. 게다가 그렇게 너무 들이대면 좋아하던 사람도 도망갈지도 몰라?"
리자의 말에 여학생들은 시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압박하는 것은 그만 뒀지만 그렇다고 금방 물러설 기세도 아니었다. 어떡해야 하나 시우가 고민하고 있는데 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너희들끼리 모의전을 해서 결정하는 건 어때?"
""""뭐?""""
그 말을 들은 여학생들은 물론 시우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쟁탈전도 아니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데 리자가 말을 이었다.
"응, 그러면 되겠네. 이름하여 'C반배 시우 파트너 쟁탈전. 우승자에게는 시우와 토너먼트 파트너 자격이 주어집니다.' 어때?"
"...그럴싸 한데?"
"그거 괜찮다."
"공정하기도 하고."
"이거라면 다들 수긍하겠는걸."
"나 찬성~"
"나도~"
"입후보는 언제까지 하면 돼?"
"일정은? 파트너 결정은 언제 되는 거야?"
여학생들은 어느새 시우를 내버려두고 리자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회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포위에서는 벗어났지만 자신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모습을 보고 시우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저기... 내 의사는...? 내 의사는 완전히 무시...?"
"그러면 입후보 기간은 이번주로..."
"모의전은 다음주부터..."
"한 5주 남았으니 2주안에만 결정되면..."
"그보다 다른 반 아이들..."
"일단 타이틀이 걸렸으니 공개..."
"하지만 그러면 경쟁..."
"저기... 저기요...? 아무도 안 들으시나요...?"
반쯤 애처롭게 여학생들에게 말을 거는 시우는 문득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후지노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고, 그 곁에는 언제나 그렇듯 스칼렛이 미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좀 말려달라는 심정을 담아 바라보는 시우에게 후지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포기하면 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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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입니다. 그동안 휴가다 뭐다 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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