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팬픽은 나노하 StS 이후 약 70년이 지난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요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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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력 146년 7월, 제 1018관리세계. 행성 에르트(Ert).
행성명과 같은 이름의 통합 수도 에르트 외곽에 위치한 우주공항 입구에서 한 소녀가 트렁크를 끌며 나왔다. 끝 부분에서 묶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과 붉은 눈동자가 아름다운 소녀였다. 몸에 걸친 시공관리국 제복으로 보아 국원인 듯 했는데,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 때문에 조금 언밸런스 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소녀는 곧 공항 앞에 줄지어 서있는 택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데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택시 기사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이윽고 소녀가 한 택시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기사 중 한명이 다가왔다.
"손님, 어디로 가시나요?"
"시공관리국 연락사무소로 가는데요. 얼마나 걸리죠?"
"어디 보자, 한 40분 정도 걸리겠군요."
"그런가요. 일단 트렁크 좀 열어주실래요?"
"예, 손님."
소녀의 짐을 차 트렁크에 넣은 기사는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택시는 곧 부드럽게 출발했다. 공항 지역을 벗어난 후, 기사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꽤 젊은 나이에 국원이 되셨군요."
"젊다기 보다는 어리다고 보이지 않나요?"
"아하하, 이런. 그렇게 들렸나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기사의 친근한 말투에 소녀는 살짝 미소를 띠었다. 1년 전, 집무관으로 돌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국원을 대하는 태도가 천양지차였다. 감개무량한 느낌을 받으며 실비아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 택시는 연락사무소 앞에 도착했고, 택시 기사는 웃는 얼굴로 실비아를 배웅했다. 기분 좋게 택시에서 내린 실비아는 정문을 지키는 무장국원들에게 국원증을 보여주고는 정문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어머, 국원이시네요. 그런데 누구신지..."
로비에서 접수 업무를 맡은 여성 국원이 실비아를 일반인으로 알고 맞으려다, 제복을 보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연락사무소 직원은 경비를 맡은 무장국원들까지 포함해도 50명이 넘지 않기 때문에 국원들은 모두들 누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낯선 얼굴인 실비아가 들어오자 여성 국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비아가 웃으며 대답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안쪽의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외쳤다.
"어머, 집무관님! 어서 오세요!"
실비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붉은 단발머리에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 국원이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실비아가 집무관 자격으로 에르트에 부임해왔을 때 보좌를 맡았던 필리아였다.
"오랜만이에요, 필리아. 잘 지냈어요?"
"물론이죠, 집무관님도 잘 지내신 모양이네요. 아, 맞다. 이젠 소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정식 부임일은 내일이니까 아직은 아니에요."
"변함없으시네요, 정말. 아, 리아. 이분은 우리 연락사무소장으로 부임해오신 실비아 T. 디사이플 대위님이세요. 인사 드려요."
필리아의 소개에 리아라고 불린 여성 국원은 의자에서 일어나 실비아에게 경례를 올렸다.
"로비에서 접수 및 연락 전파를 맡고 있는 셀리아나 노이텐스라고 합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괜찮아요, 처음 본 사람한테는 당연한 반응이니까."
실비아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웃으며 넘어갔고, 그 미소를 본 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연락사무소장 자리가 공석이라 어떤 사람이 올 지 굉장히 신경쓰였는데,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안심한 것이다.
"그럼 소장님, 일단 집무실로 들어가실래요?"
"그래요. 수고해요, 셀리아나."
"얘기는 들었어요. 자원해서 왔다면서요?"
집무실에 들어선 실비아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고, 필리아는 포트의 물을 끓이며 대답했다.
"네, 연락사무소는 세워야 되는데 선뜻 나서는 인물이 없다고 해서요. 한바탕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사람들 시선도 곱지 않을 테니 당연하지만요."
"그런데 왜 자원했어요?"
"어차피 누구든 하기는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전 에르트가 싫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대뜸 소위로 진급시켜주면서 부소장 자리 주더라구요. 덕분에 출세했죠, 뭐. 여기 홍차 드세요."
"고마워요. 그러고보니 축하가 늦었네요. 진급 축하해요, 어니스트 소위."
"천만에요. 그리고 저도 진급 축하드립니다, 디사이플 대위님."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아 조용히 차를 마셨다. 잠시 후 필리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어때요?"
"네? 뭐가요?"
"오시면서 대충은 보시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관리국이나 국원에 대한 반응 말이에요."
"아, 그거요... 잘은 모르겠지만 예전에 비하면 호의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적어도 노골적으로 피하거나 하는 모습은 안 보이던데요."
"그렇죠? 아, 다행이다. 자체 조사로 사람들의 관리국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제3자의 평가를 듣고 싶었어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필리아의 말에 따르면 지난 3월 중순에 세워진 연락사무소는 처음에 상당히 배척받았다고 했다. 트론에 의한 강압적인 통치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매일같이 건물 외벽에 욕설과 낙서가 가득 그려지고 며칠에 한번씩 창문으로 돌이 날아드는 상황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몇번이나 직원들 사이에서 연락사무소 철수 의견이 나왔지만, 그 때마다 필리아는 노력해서 사람들이 관리국을 이웃으로 생각하게 하면 된다며 직원들을 설득했다.
부소장으로 부임해 온 이후, 필리아는 일단 무장국원들의 행동을 굉장히 제약했다. 디바이스 셋업은 근무 중에만 허용했고, 비살상 설정이라도 공격마법은 일체 금지, 오직 방어마법만 사용하도록 했다. 한번이라도 사람들을 향해 디바이스를 들이댄다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는 한편 2주일에 한번씩 보육원 같은 곳으로 비번인 직원들과 함께 자원봉사활동을 나가고, 한달에 한번씩 사회단체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대형 사고가 벌어졌을 때에는 먼저 경찰이나 소방서에 협조하겠다고 연락을 넣기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테러를 가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무장국원들은 출퇴근 하는 사이에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나 깡통, 때로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화분 같은 것을 피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거기에 비하면 일반 사무를 보는 국원들이 길을 걷다 이따금 물 세례를 받는 것은 애교에 불과했다. 자원봉사활동이나 기부, 위급 현장에 대한 협조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렇게 두달이 지나자 에르트 사람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국원들을 괴롭히는 일도, 사무소 건물에 낙서가 그려지거나 창문에 돌이 날아드는 일도 줄어들었고, 관리국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단체와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7월 현재, 시공관리국 연락사무소는 예전처럼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에르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고생이 많았네요..."
"말도 마세요. 이것도 축약판이라구요. 아마 제대로 보고서 작성하면 3박4일 읽어도 부족할 걸요?"
"정말 수고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부소장."
"맡겨만 주세요, 소장님. 그런데, 부임 인사는 언제 하실 거에요?"
"일단 정식 부임일은 내일이니까, 내일 아침 10시로 하죠. 그때 모두에게 통신 좀 연결해주겠어요?"
"전원을 집합시키는 게 아니구요?"
뜻밖의 말에 필리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연락사무소 건물은 크지 않지만 부지 자체는 넓은 편이고, 지하에는 50명은 가뿐히 수용할 수 있는 강당도 있어 부임식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부임식 대신 통신으로 인사를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비번인 사람들을 일부러 나오게 하는 것도 미안하잖아요. 어차피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전하는 게 될 텐데 굳이 시간 빼앗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괜찮겠죠?"
"가능이야 한데요... 소장님, 많이 변하셨네요."
"그래요?"
"네, 예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하시기는 했지만 이렇게 드러내놓고 관례에서 벗어나신 일은 없으셨던 것 같은데..."
필리아의 말에 실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예전의 자신은 쓸데없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원칙에 매달리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변하기 마련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실비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르트 사람들이 관리국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처럼, 제 생각도 바뀐 거겠죠. 그럼 가서 짐 좀 풀게요. 다른 짐들은 와 있죠?"
"아, 네. 3층 생활공간에 모두 가져다 놨어요. 짐 푸는 거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들고 온 것만 갖다 놓고 금방 나갈 거니까요. 푸는 건 저녁에 할 거에요."
"어디 가세요?"
"네,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생활공간에 트렁크를 가져다 놓은 실비아는 그대로 연락사무소를 나섰고,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택시를 잡아타는데 성공했다. 이동하던 택시 안에서 실비아는 기사의 위로와 격려를 들으며 창 밖을 내다 보았다. 국립 묘지 입구가 보였다.
문득 실비아는 리에스 전투에서 마지막 순간, 바이즈가 자신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때 실비아는 완전히 체력과 마력이 고갈된 상태라서 PA를 입고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그래서 PA를 해제하자 바르디슈가 PA 밑에 생성시킨 배리어 재킷이 드러났고, 그 상태에서 바르디슈를 짚고 일어서던 참에 바이즈가 자신을 눈치챘다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 직후 실드 관통에 에리나의 마법 작렬, 대폭발에 후송까지 정말 정신없는 일의 연속이라서 그간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크로노 하라오운에 대해서 조사하던 중 실비아는 자신의 증조할머니인 페이트 T. 디사이플이 자기 또래였던 때, 아직 하라오운의 성을 쓰던 때의 사진을 보게 되었고, 그제야 그때 바이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페이트의 16, 17세 때 모습은 지금 실비아의 모습과 판박이였던 것이다. 머리 색과 머리 모양, 눈동자 색, 얼굴 생김새, 심지어는 배리어 재킷 디자인까지.
아마 그때 전투 중에는 시종일관 PA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냉정하게 대응했지만, 페이트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의 실비아가 부상을 입은 채 일어서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린 것이 아닐까. 실비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택시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고, 에리나는 택시에서 내려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국립 에르트 마도 병원.
마력 제어에 실패해서 마도신경이나 링커코어가 손상된 경우, 소실된 신체의 일부나 손상된 신경을 마법에 의해 복구할 수 있는 경우 등, 마법과 관련된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수용, 치료하는 병원이었다. 병원에 들어선 실비아는 로비의 간호사에게 만날 사람의 이름을 말한 다음 입원한 병실을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 면회 시간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병실 앞에 선 실비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 너머에서 '들어오세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실비아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병실 안에서 침대에 앉은 사람이 실비아를 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어서와, 실비아."
"오랜만이야, 에리나."
바이즈와의 싸움이 끝난 후 에리나는 바로 에르트 함선 제이카의 집중치료실에 수용되어 에르트로 보내졌고, 그 때부터 줄곧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바이즈에게 당한 것도 그렇지만 한계를 넘은 마력 증폭으로 입은 부상도 커서 아직까지 퇴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스팅거 블레이드의 폭격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실비아가 더 빨리 퇴원했다.
한동안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던 두사람의 이야기는 어느 새 바이즈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거야?"
에리나도 신문이나 각종 영상 매체를 통해 조인식이나 바이즈의 처우에 대해서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이즈가 크로노의 복제라는 사실이 공표되지 않은 것을 보면 감춰진 사실이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네 마지막 공격의 여파에 바이즈와 너, 둘 다 의식을 잃었어. 리셉션 룸은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갔고, 마지막 포격은 리에스의 외벽에까지 도달했대. 로이트 사람들에게 감사해야겠더라.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니까 그때까지 누적된 충격량을 견딘 게 기적에 가깝던걸."
"그러고보면 참 엄청나게 난리를 피웠지. 우주의 먼지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인가?"
"알면 자제 좀 하시죠?"
"자제했으면 이렇게 농담도 주고받지 못했을걸? 아무튼 얘기 계속, 계속."
"네, 네. 몇분 후에 순찰조와 함선에서 지원 온 사람들이 도착해서 바이즈와 그 부하들을 구속했고, 넌 그대로 후송. 나중에 재판에서 바이즈는 반역 혐의 유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궤도 구치소에 수감됐어. 나중에 확인해보니까 그 부하들, 12명 중 8명은 정보부 장비라며 적재한 컨테이너에 숨어서 들어왔다더라."
"뭐야, 검역도 안 한 거야?"
"정보부 위세가 좀 세잖아."
"어딜 가나 그건 똑같네... 그건 그렇고, 그 녀석 혐의는 반역 뿐이야?"
바이즈에 대한 얘기를 듣던 에리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반역도 분명 큰 죄이긴 하지만 인간 복제나 전투기인 제조도 중죄다. 하지만 실비아가 말한 바이즈의 죄목은 반역 뿐이었다.
"응, 그것 뿐이야. 사실 관리국의 간부가 인간을 복제했다거나, 전투기인을 만들었다거나, 백년 가까이 의식을 이어오며 관리국을 조종했다거나 하는 게 알려졌다간 관리국 위신이 말이 아니니까. 아니, 그 정도로 그치지 않고 뭇매를 맞겠지."
"그렇구나, 그러니 가장 만만한 죄목 하나로 집어넣었다는 거네. 만만하다고 해도 중죄라는 건 똑같지만."
"그렇지, 뭐. 그리고 트론은 살인 및 사회 혼란 조장, 권력 남용 혐의로 역시 궤도 구치소 종신형. 바이즈와는 다른 곳이고."
"페르즈 콜틴은?"
에리나는 리에스에서 바이즈가 입에 담았던 인물의 이름을 떠올렸다. 페르즈 콜틴은 크로노 하라오운의 1세대 복제이자 신력 125년 에르트 항복 당시 시공관리국 평의회 의장이던 초강경파였다.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의식을 유지하고 있던 의장이 구속구가 풀리자마자 미드칠더 지상본부에 연락을 넣어서 체포조가 출동했는데, 끝까지 저항하다가 탈출할 수 없게 되자 자살했어. 자택 지하에서 상황실 역할을 하는 방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바이즈나 전투기인들의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어지간히도 철저하네... 그쯤되면 공포다, 공포."
"그러게, 어쩌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비뚤어지게 됐는지... 아주 이해 못할 것도 아니긴 한데 말이야."
"뭐... 그건 그래. 하지만..."
실비아와 에리나는 나란히 창 밖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특히 어머니를 눈앞에서 살해당한 경험이 있는 에리나는 마음 한켠으로는 바이즈의, 아니 크로노의 그 생각을 이해하고 있었다. 크로노도 분명 처음에는 관리국을 올바르게 이끌어 전 차원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정의를 실현시키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꺾이고 친구와 가족을 잃었을 때, 자신의 무력함과 관리국의 우유부단함을 증오하게 된 크로노는 힘을 추구하게 되었다.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법 수련을 해온 크로노였기에 힘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어긋난 감정은 그 힘과 이상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맞아, 소레이지 사건과 크로노 하라오운 옛 의장에 대해서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잠깐만 기다려."
에리나의 말에 실비아는 바르디슈에게 부탁해 공간 모니터를 띄웠다. 원하는 자료를 찾은 실비아는 떠오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 일단 소레이지 사건부터 말해줄게. 신력 91년, 제37관리세계 소레이지에서 질량병기를 사용한 대규모 분쟁이 일어났어. 시작은 행성내 국가 통합에 반대하는 국가 연합체와 통합 정부의 충돌이었던 모양이야. 전력이 열세였던 소레이지 행성 정부는 관리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관리국은 카렐 하라오운 제독이 함장으로 있는 함선 클로디아를 급파하기로 결정했지. 당시 차원함대 총사령관이던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이
거기에, 평의회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나노하 T. 스크라이어 중령, 야가미 하야테 대령, 페이트 T. 디사이플 집무관을 클로디아와 함께 파견했어.
그리고 소레이지 궤도상에 도착한 클로디아는, 반 통합 국가 연합의 반물질 병기 공격에 의해 소실. 피격 직전 함선을 벗어난 인원들도 이어진 공격에 전원 사망, 결과적으로 카렐 하라오운 함장을 포함하여 파견인원 317명이 전멸했어. 기록에 따르면 이 소식을 들은 린디 하라오운 명예 제독이 심장 발작으로 쓰러졌대. 그 직후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이 독단으로 12척의 함선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추가 파견했고, 2차 파견대는 소레이지 행성에 지름 30km의 소행성을 낙하시켜 행성 전체를 불모지로 만들었지.
이후 있었던 사문회에서 크로노 하라오운은 [반물질 미사일은 마도병기로도 방어가 거의 불가능하기에 불가피하게 질량을 보유한 수단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응력 예상에 '약간의 오차'가 발생하여 소행성 몇개가 지상에 낙하했다]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이 때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오히려 상층부 상당수가 하라오운 대장을 지지하게 됐어.
소레이지 사건 다음해인 신력 92년, 시공관리국은 새로운 차원세계 관리방침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관리국에 대한 어떠한 무력 반발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무력 반발이 있을 경우 관리국에서도 무력으로 대응할 것.]이야. 발표와 함께 12개의 아르크 앙 시엘이 함선에 상시 장착되었는데, 관리국의 실세로 떠오른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아.
신력 93년에는 린디 하라오운 명예 제독이 결국 병상에서 사망했고, 신력 94년 12월에는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이 원수로 진급과 동시에 시공평의회 의장에 취임했어.
신력 97년에는 크래킹으로 관리국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아르크 앙 시엘의 제작에 관한 정보가 소멸되는 사건이 있었지. 무한서고에서도 해당 정보를 찾아내지 못하고, 이후 아르크 앙 시엘은 정비만 가능하고 제작이 불가능해져 현재까지 로스트로기아 취급이야. 당시 노발대발한 하라오운 의장에 의해 정보부에 대대적인 인사가 단행되고, 정보부 장관 유노 스크라이어가 해임됐어.
중간에 의장직을 연임한 크로노 하라오운은 신력 106년까지 평의회 의장직을 수행했고, 퇴임한 이후에도 관리국을 쥐락펴락했다는 건 유명하지. 그리고 신력 120년에 사망. ...이 정도야."
"파, 파란만장하네..."
실비아가 읽어내려간 분량과 그 내용에 에리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실비아가 알아온 크로노의 신력 91년 이후의 행보는 폭주기관차 그 자체였다. 쉬지않고 이상을 추구해온 사람이 현실에 절망했을 때 어떻게 될 수 있는가, 그 대답을 보여주는 듯했다.
"친구를 잃고, 동생을 잃고, 자식을 잃고, 어머니마저 쓰러졌다면... 그래도 이상을 추구할 수 있을까?"
실비아의 말이 끝나자 병실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아, 아.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네. 그 전투기인들은 어떻게 됐어?"
무겁게 가라앉은 병실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에리나가 화제를 바꿨다. 그래봤자 어차피 또 바이즈와 관련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덜 우울할 것 같아서였다. 실비아는 다시 자료를 뒤졌다.
"조사 결과, 과거 야가미 하야테 대령의 수호기사였던 볼켄리터의 데이터를 이용했다는 게 밝혀졌대. 그 외형도 그래서라더라. 전투기인을 위한 플랜트도 찾아냈는데, 오리지널 볼켄리터들은 거기에도 없었어. 데이터만 메인 컴퓨터에 남아 있었대."
"그러면 오리지널의 행방은 모르는 거야?"
"...지나칠 정도로 상세한 데이터를 봐선, 어쩌면..."
조사할 때부터 해온 불길한 추측을 떠올린 실비아는 애써 그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말했다.
"어쨌든, 체포된 전투기인들은 전부 해상 교도소에서 교정 교육 중이야. 세뇌가 상당히 강하게 걸려있긴 했지만, 오리지널이 올바른 인물들이었던 덕에 교화 속도도 빠르대. 관리국에 협조할 가능성도 보인다던데."
"그래? 그 정도 실력이라면 관리국에도 꽤 도움되겠네."
"그렇지, 그리고 요즘은 자기들 똑같이 생긴 걸 이용해서 교육하러 온 국원을 놀리는 일도 있다더라. 주로 비타 타입이."
"...뭐랄까, 애 답네. 그래도 장난까지 치는 걸 보면 꽤 희망적인걸."
그렇게 말하며 웃는 에리나였지만, 실비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실비아의 얼굴을 본 에리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실비아? 뭔가 안 좋은 일 있어?"
"...너 말이야."
"응? 나?"
"그래, 너."
"내가 뭘?"
"솔직히 말해봐."
"그러니까 뭘?"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에리나에게, 실비아는 내뱉듯이 말했다.
"마도신경과 링커코어, 완치 안 된다는 거. 정말이야?"
또다시 병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다가 병실 안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몇번 기울이고는 포르르 날아갔다.
"아~, 들켜버렸네. 가능하면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
멋쩍은 듯 웃으며 머리를 긁는 에리나를 보며 실비아는 기어이 벌컥 화를 냈다. 마도사에게 마도 신경과 링커 코어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칫하면 평생 마법을 쓸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에리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아, 괜찮아. 의사 선생님 말로는 마도신경은 대충 80% 수준까지는 복구할 수 있다고 하고, 링커코어도 B랭크까지는 돌아올 수 있다고 하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뭘."
"그게 무슨 소리야!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바이즈와의 싸움에서 에리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최종 리미터까지 해제했다. 본래 엘즈리온은 3단 리미터를 갖고 있었지만 그중 상위 2개는 사실상 봉인 상태였다. ELF의 기술력으로는 증폭되어 날뛰는 마력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고, 완전히 통제되지 않은 마력이 착용자의 신체는 물론 마도신경과 링커코어에까지 피해가 미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예상 가능한 최악의 결과는 엘즈리온이 착용자의 신체와 함께 붕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엘즈리온 개발진의 예상은 최종 리미터를 해제했던 에리나에게 현실로 드러났다. 에리나는 그때 마력이 폭주하며 손상된 신경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되어 재활 치료 중이었고, 마도신경과 링커코어는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다행히 몸은 완치 가능 판정을 받았고 실제로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어서 지금은 목발을 짚으면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마도사로서는 치명적인 후유증을 안게 된 것이다.
"그래, 마법을 쓸 수야 있겠지. 하지만 예전처럼 강력한 위력도 낼 수 없고, 장시간 사용하는 것도 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어?"
"저기 말이야, 실비아. 뭔가 잊고 있지 않아?"
화를 내는 건지 우는 건지 애매한 표정의 실비아를 향해 에리나가 반문했다. 무슨 말이냐는 듯이 쳐다보는 실비아를 보며 에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레이징 하트랑 엘즈리온은 이미 오버홀에 개량까지 다 끝났어. 마력 랭크 낮은 거야 엘즈리온의 보조를 받으면 되는 거고, 게다가 이젠 PA를 써야할 만큼 위험한 일도 별로 없을 거야. 무엇보다, 마법은 그냥 수단일 뿐이야. 안 그래?"
"그야, 그렇지만..."
"마도사에게도 마법은 그냥 수단일 뿐이야.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마법은 사람의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도구지. 아, 물론 마도 과학자들에게는 연구하고 추구해야할 대상이자 목표이기도 하겠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말해서 대체 가능한 도구 아니야? 염화는 통신기로, 공격마법은 휴대용 마력포로, 방어마법은 결계생성기로 대용할 수 있잖아. 아직 개선점이 많긴 하지만 밀이지. 어쨌든, 마법을 못 쓰게 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마법에 얽매이는 게 더 위험하다고 봐, 난."
"하지만, 에리나 넌 ELF의 마법 전투반원으로 자원할 정도였잖아."
"아까 말했지? 수단일 뿐이라고. 난 그 때 관리국에 대항하고 있었고, 마법은 그러기 위한 무기였어. 전쟁이 끝나면 무기는 잘 정비해서 보관해둘 뿐이지.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야 해두지만, 항상 무기를 휘두르고 다니지는 않잖아? 이제와서 내가 마법에 매달릴 필요는 없단 얘기지. 나로서는 여기저기 끌려다닐 일 없어져서 오히려 홀가분해. 그때 말했잖아, 조인식 경호 임무도 강제로 떠넘겨 받은 거라고. '이제야 해방이다~'라는 느낌이랄까."
실비아는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에리나의 표정에서 한조각의 거짓도 찾아낼 수 없었다. 에리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단순히 마법을 쓰고 싶어서 관리국에 들어간 건 아니잖아? 정의와 질서를 위해서였잖아.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정의와 질서를 수호할 수 있고, 못 쓰면 불가능한 거야?"
"아니... 그건, 확실히 아니야. 관리국에는 마법을 못 쓰는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도 분명히 시공관리국의 일원이지. ...그래, 그렇구나. 무슨 뜻인지 알았어."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타까운 마음은 여전했지만, 에리나가 바라왔고 살아갈 세상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소녀들은 조용히 웃으며 마주 보았다. 창 밖의 나무에 다시 새 두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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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입니다. 전반적으로 후일담 형식이긴 합니다만... 설마 이거 전체가 에필로그 취급되어 반칙 고시에 걸리진 않겠죠? --;;
저번 편 올릴 때 깜빡하고 안 적었습니다만, 15화 제목 후보 중에는 '빛이 되다'와 '섬광에 흩어지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어째 영원히 바이바이하는 느낌이 강해서 좀 고친 게 지금의 15화 제목이죠.
이번화는 제목과 초반부가 1화 재탕이랄까, 판박이입니다. 일부러 그런 거에요. 좀 대조적으로 보이게 하고 싶어서 -_-a
마지막에 에리나가 마법 따윈 못 써도 상관없다고 하는 말이 좀 이상하게 보이실 수도 있겠습니다. 여태껏 모든 걸 힘으로 헤쳐온 아이니까요. 하지만 사실 에리나가 살아온 걸 보면 ELF로 활동할 때 외에는 마법을 쓰는 일도 없었고, 본인도 마법을 쓰는 것에 특별히 애착이 있지도 않았죠. 마도사가 마법을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본다는 건 사실 굉장히 어렵...다기보다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저런 생각을 가진 마도사도 한명 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해서 적었습니다.
사람 나고 마법 났지, 마법 나고 사람 났나요 (...)
이번 이야기 쓰면서 한번 더 자각한 겁니다만, 정말 장편 쓰는 데에는 재주가 없네요. 스스로가 완결을 내고 싶어서 안달을 하니 이야기를 느긋하게 전개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중간에 에피소드 두세개 정도가 그대로 날아가 버렸어요.
그럼 기회가 된다면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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