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력 91년. 시공관리국 본국, 차원함대 사령관실.
시공관리국 차원함대 총사령관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죄송합니다, 의장님.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방금 소레이지에 파견될 함선의 숫자를 제가 착각한 것 같습니다만."
- 제대로 들은 것이 맞네. 의회에서는 제37관리세계 소레이지의 과민 반응을 우려하여 파견 함대를 1척으로 제한하기로 했네. 더불어 파견 무장대 3개 소대의 지휘관으로 나노하 T. 스크라이어 중령, 야가미 하야테 대령, 페이트 T. 디사이플 집무관을 임명했네.
평의회 의장의 말은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말 투성이였다. 아무리 시공관리국의 최고 의결기관이 평의회라고 해도, 파견 인원을 선정하는 권한은 일선 지휘관에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 평의회의 결정은 그것을 무시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하고 있었다.
"의장님,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파견 인원 선정은 무장대 사령관과 함대 사령관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인원을 지정하시는 것은..."
- 그만큼 평의회에서도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일세. 수를 늘릴 수 없으면 질을 높여야 하지 않겠나?
의장의 말에 크로노는 말을 잃었다. 사실 크로노도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소레이지의 상황은 섣불리 자극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행성 통합 정부와 반 통합 연합 간의 내전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고 시공관리국의 질량병기 사용금지 권고마저 무시당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물론 관리국에서는 대규모의 질량병기 사용을 문제삼아 무력 개입할 수도 있었지만, 역시나 만성적인 관리국의 인력 부족이 발목을 잡고 있기에 마땅한 방도가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평의회에서는 일종의 시위를 위해 함선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함대'가 아니라 '함선'인 이유는, 만약 파견된 함대를 소레이지 측─통합정부 측이든 반 통합 측이든─에서 위협으로 여겨 공격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함선과 무장대 선발을 끝내고 파견하겠습니다."
- 믿고 있겠네, 사령관.
차원 항행중인 XV급 순항함 클로디아의 브릿지에서, 카렐 하라오운 함장은 아버지이자 차원함대 총사령관인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과 통신 중이었다. 그 옆에는 나노하와 페이트의 모습도 있었다.
- 별 탈은 없어 보이는구나, 카렐.
"예,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니까요."
-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소레이지의 현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까. 통상공간으로 복귀할 때에는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너무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웃으며 대답하는 카렐의 모습에 크로노는 쓴웃음을 지었고, 나노하와 페이트는 염화로 '크로노는 여전하네', '성격이니까'하는 잡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 그런데, 하야테는 어디 갔지?
"아, 무장대 인원들 좀 다독여준다고 갔어.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던가 해서."
- 그런가, 역시 볼켄리터도 보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노하의 대답에 크로노는 표정을 흐리며 말했다. 샤멀은 본국의 의료시설을 담당하고 있어서 나올 수 없었고, 시그넘과 비타, 자피라 역시 각각 다른 차원에서 임무 수행중인 상태라 불러들일 수가 없었다. 기왕 파견인력의 질을 높이려면 그들까지 함께 보내는 것이 좋았을 테지만 이번에도 인력 부족이 문제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 함선 1척을 상대로 과민반응을 보이지는 않겠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들도 아니잖아?"
- 그건 그렇다만...
"함장님, 곧 목표 차원에 도착합니다. 통상공간 복귀까지 앞으로 300초."
페이트의 말에 크로노가 뭔가 대답하려는 순간, 오퍼레이터가 소레이지에 거의 다 왔음을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카렐이 크로노에게 말했다.
"이제 곧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통상공간으로 복귀할 때까지 통신은 종료하겠습니다."
- 그래, 행운을 빈다.
"예, 걱정마십시오."
핏 하는 소리와 함께 클로디아와 연결된 통신 화면이 자동으로 종료되었고, 크로노는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통신이었다. 하지만 크로노는 왠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매사에 정확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크로노는 '감'이라든가 '느낌'이라는 이름의 추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 파견은 자꾸만 결과가 좋지 않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약 15분 후, 클로디아가 통상공간으로 복귀한 다음 상황 파악이 끝났을 만큼의 여유를 둔 크로노는 재차 클로디아와 통신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신은 연결되지 않았다. 두번 세번 시도해도 통신화면은 연결되지 않고, 신호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크로노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약 10분 전, 통상공간으로 복귀한 직후의 클로디아.
"차원 이동 종료. 현재 차원 및 통상공간 좌표 확인합니다. 차원, 제37관리세계. 통상공간, 행성 소레이지 위성 궤도상.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좋아, 전 승조원 2급 경계 태세. 혹시라도 공격받을지 모르니 레이더 요원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계 지시를 내리는 카렐의 모습을 보며 나노하와 페이트도 움직였다. 어차피 함내에서 나노하 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 파견부대 대기실로 돌아가 당장이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그러면 우리도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을게."
"문제 생기면 바로 바로 연락줘."
"알겠습니다, 중령님, 집무관님. 그럼 부탁드..."
카렐이 나노하와 페이트에게 인사를 하려 한 것과, 클로디아가 알 수 없는 충격에 흔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쿠웅 하는 진동과 함께 브릿지가 비상등의 붉은 빛으로 물들고 각종 기기가 비명과도 같은 경고음을 울려댔다. 가장 먼저 사태를 수습한 것은 카렐의 고함이었다.
"상황 보고하라!"
"하, 함선 좌측면 500m 거리에서 공간 왜곡 반응 발생! 함 자체에 피해는 없습니다!"
"동일 방향에서 접근하는 대규모 물체 발견! 이건... 미사일입니다! 궤도상의 공격 위성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
"요격하라! 중령님들은 어서 트랜스포터로 가주십시오!"
카렐의 외침에 나노하와 페이트는 순간 멈칫했다. 카렐은 클로디아가 당할 경우에도 나노하 일행을 구하기 위해 전송장치에 가 있으라고 말한 것이었고, 두 사람은 그 의미를 바로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함 우측과 후방에서도 미사일 군 접근! 숫자는 각각 50이 넘습니다!"
"함 하방에서 접근하는 대형 물체! 위성궤도 요격 미사일입니다! 숫자 약 20!"
"배리어 생성기 부하치 80%! 오래 못 버팁니다!"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미안해, 카렐 짱!"
"...미안!"
나노하와 페이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브릿지에서 뛰쳐나갔고, 카렐은 그 뒷모습을 슬쩍 보고는 다시 함선 지휘에 집중했다. 상황은 매우 나빴다. 클로디아의 요격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숫자의 미사일이 전방위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그나마 그것들이 일반적인 수준의 질량병기라면 클로디아가 지닌 배리어로 막아낼 수 있을 터였지만, 그 공간왜곡 반응이 문제였다.
화약을 쓰는 질량병기로는 공간왜곡 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 그리고 카렐이 읽은 소레이지 관련 보고서에는 얼마 전 소레이지에서 물질-반물질 간의 쌍소멸 반응을 이용한 공격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카렐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그건가...!"
반물질 병기라면 차원항행을 이용해 이탈하는 것도 위험하다. 만약 차원항행에 반물질 병기가 영향을 줄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냥 소멸할 수도 있고, 동일 차원의 다른 공간으로 날려질 수도 있고, 미지의 차원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사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지금은 차원항행도 불가능하다. 차원항행 엔진은 한번 사용하려면 최소 5분은 마력을 충전해야만 했다.
"배리어 생성기 오버히트! 배리어가 걷힙니다!"
오퍼레이터의 비명과 함께 반물질 미사일들이 클로디아의 함체를 노리고 날아들기 시작했다.
몇분 후, 소레이지 행성 지표면.
"으... 일단 전송은 성공했나..."
긴급 전송의 충격에 멍해진 머리를 흔들며 나노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함께 전송된 무장대원 20여명, 그리고 페이트와 하야테가 보였다. 만약 클로디아가 무사하다면 잠시 후에 2차 전송으로 나머지 병력들이 올 테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워낙 급히 전송하느라 도착 좌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곳이 친 관리국 성향을 지닌 통합 정부 측 지역인지, 반 관리국 성향의 반 통합 연합 측 지역인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일단 통합 정부측과 통신을 해야겠는데..."
피융, 퍼석.
나노하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묻히듯이, 기묘한 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나노하의 시야에, 머리가 반쯤 사라진 채 바닥으로 쓰러지는 하야테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나노하는 자신이 본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땅 위로 퍼져가는 선혈은 하야테의 죽음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나노하와 페이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하야테!!"
두 사람의 외침이 방아쇠라도 된 듯, 그와 동시에 무수한 대구경 탄환이 나노하 일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AMF 처리라도 되어 있는지 실드와 배리어, 배리어 재킷을 가리지 않고 관통되는 탄환에 파견부대원 전원이 쓰러지는 데에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는 오직 바닥에 흥건한 피와 산산조각난 육편, 그리고 디바이스 조각들 뿐이었다. 그 조각들 중에는 황금색과 검은색의 금속조각과 찢어진 책으로 보이는 조각들도 섞여 있었다.
며칠 후, 시공관리국은 온통 충격에 휩싸였다. 소레이지의 반 통합 연합 측에서 공개한 영상이 원인이었다.
그 영상은 두개의 다른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전반부는 클로디아의 통상공간 복귀부터 소멸까지의 모습을 공격위성에서 촬영한 것이었고 후반부는 지상으로 대피한 나노하 일행이 살해되는 모습을 반 통합 측 종군기자가 촬영한 영상이었다. 이 영상을 본 린디 하라오운은 그대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미드칠더와 시공관리국에는 소레이지에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가하자는 의견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그 의견은 얼마 안 가 실제로 이루어졌다.
다름아닌 시공관리국 차원함대 총사령관,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에 의해서.
"...괜찮은 겁니까?"
"뭐가 말인가?"
"아무리 녀석들이 반물질 병기를 쓴다지만, 이 방법은 조금 지나친 게 아닐까요?"
"다른 쓸만한 방법이 있나? 순항함이 지닌 배리어도 순식간에 한계에 달하게 만드는 물건인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질서는 힘과 결단이 있어야만 유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 관리국의 행동은 너무 유약했어. 힘을 가지고도 제 때 행사하지 않았기에 녀석들이 얕잡아 본 거고, 그 결과가 바로 지난번 사건이다. 이제... 두번 다시 망설이지 않을 거다. '적'에게 자비는 필요없어."
소레이지 행성, 위성 궤도.
며칠 전 클로디아를 격침시킨 반 통합 연합 측의 공격위성들은 또다른 물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탐지했다. 이번에는 차원도약이 아닌, 통상공간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아군이 아니라는 점은 같았기에 공격위성들은 물체에 조준을 맞추고 일제히 미사일을 발사했다. 목표는 지름 30km에 달하는 소행성이었고, 지상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위성들은 아낌없이 탄약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소행성이 대기권에서 마찰열로 타서 사라질 정도의 크기가 되었을 무렵, 비슷한 크기의 소행성이 또 하나 접근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번에도 위성들은 공격을 가했고, 충분히 크기가 줄어들자 다른 소행성이 나타나고 위성이 공격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 전개는 위성들의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 자네가 소레이지에 소행성을 낙하시키라고 지시했나?"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위험한 작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위험도는 분명히 높습니다만, 또한 그만큼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유효한 방식이었지요. 반물질 병기에 대한 방어는 마법으로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XV급 순항함 클로디아의 배리어도 오래 버티지 못 했을 정도의 위력이니, 그대로 두고 함대를 파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 자네가 실행한 그 작전에 의해 소레이지의 반물질 공격 위성들은 모두 파괴되었네. 하지만 소행성 몇개가 그대로 지상으로 낙하했고, 결과적으로 소레이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이 되고 말았잖나. 이건 큰 문제네."
"작전을 세우는 도중 그 위성의 대응력에 대한 예상이 조금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애초에 부족한 자료를 가지고 분석했는데 그 정도 피해로 끝난 것이 다행이라고 봅니다만."
"그 정도 피해? 소행성 낙하의 직접적인 충격으로 사망한 사람만 1억, 대피 중 사망자 및 미처 대피하지 못해 사망한 사람이 5억일세. 이런데도 '그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나?"
"소레이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의 양상을 보건대, 그대로 뒀으면 분명 행성 전체 인구의 2/3은 사라졌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가 아닙니까? 또한 이 작전으로 미드칠더와 관리국 내부에 퍼져있던 전면침공의 의견마저 가라앉혔습니다. 전 일석 이조라고 봅니다,"
시공관리국 평의회가 개최한 크로노 하라오운에 대한 사문회에서, 크로노는 무혐의 판결을 받고 직위를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대응─소레이지에 대한 공격적인 대응을 포함해서─이 관리국원 사이에서 화제가 되며 크로노에 대한 국원들의 지지도가 대폭 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신력 92년, 시공관리국은 새로운 차원세계 관리방침을 발표했다. '관리국에 대한 어떠한 무력 반발도 용납하지 않으며, 만약 무력 반발이 있을 경우 관리국에서도 무력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방침이 발표되는 것과 함께 12개의 아르크 앙 시엘이 함선에 상시 장착되었다. 관리국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아직 소레이지에서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시기였기에, 크로노가 제안한 이 방침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신력 93년, 린디 하라오운이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지만, 크로노는 임종조차 지키지 않고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라오운. 지금은 극비 임무 수행중인데."
"알고 있어, 내가 내린 명령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너희들 볼켄리터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지."
"...무장국원들을 대동한 걸 보니 좋은 용건은 아닌 모양이군."
"과연 볼켄리터의 리더, 열화의 장. 눈치가 빠른걸."
"분위기를 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짐작이 가는 법이다. 그런데 이유가 뭐지?"
"그건 당신이 구속되면 알려주지."
"과정은 어찌 됐든 날 체포하겠다는 뜻인가."
"아니, 조금 달라. 체포가 아니라 손에 넣는다고 봐야겠지."
"...제정신인가, 하라오운?"
"물론 제정신이야. 뭔가 이상한 쪽으로 받아들인 모양인데,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말도록. 하지만 어쩌면 나중에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고 할 지도 모르겠는걸."
"...임무 수행보다 친구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우선이겠지.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마!"
"아까도 말했지만 난 제정신이다. 넌 이해 못하겠지만...!"
신력 93년 2월, 시그넘 극비 임무 수행중 실종. 동년 9월, 비타 극비 임무 수행중 실종. 이듬해인 신력 94년 7월, 의료 파견 중이던 샤멀 실종. 동년 11월, 자피라 극비 임무 수행중 실종. 그 해 12월, 크로노는 원수로 진급하는 것과 동시에 시공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신력 97년, 시공관리국 평의회 의장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르크 앙 시엘의 제작과 관련된 정보가 모조리 사라지다니!"
- 그게... 오늘 아침 데이터베이스 정기 점검을 하는데 데이터 변경 로그와 다른 부분이 발견되었어. 확인해본 결과 아르크 앙 시엘의 데이터, 그것도 신규 제작 방식에 대한 데이터만 완전히 소멸되어 있더군. 물론 지금도 아르크 앙 시엘의 정비는 가능하지만, 더 이상 새로 만드는 것은...
"제길, 당장 데이터를 복원해! 동시에 어떤 녀석이 벌인 일인지도 알아내고!"
- 글세, 일단 시도는 해보겠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무 깔끔하게 데이터가 지워져 있더라고. 게다가 어디서 침입한 건지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
"유노! 그게 정보부 장관이라는 자가 입에 담을 소리냐!"
크로노의 호통에 유노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항상 사람좋은 미소를 짓던 유노였지만, 근래 들어 크로노 앞에서는 거의 미소를 짓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노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직위가 문제가 아니라 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크로노, 좀 자중하는 게 어떨까 싶다. 아르크 앙 시엘은 분명 강력한 병기이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야. 너무 그렇게 얽매일 필요까지는...
더 듣기 싫다는 듯, 크로노는 유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통신화면을 닫아버렸다. 한달 후, 시공관리국은 본국 데이터베이스가 해킹당했다는 것과 이 일의 책임을 지고 정보부 장관인 유노 스크라이어가 사임했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관리국은 앞으로도 관리국에 거스르는 행동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자택에서 그 뉴스를 보던 유노는 술잔을 기울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데이터를 없애는 정도로는 너를 막을 수 없었구나, 크로노. 어떻게 해야 네 폭주를 멈출 수 있을까..."
크로노는 신력 106년에 평의회 의장직에서 퇴임했지만 그 후로도 사실상 관리국을 좌지우지했다. 크로노의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고, 크로노와 크로노가 세운 공격적인 관리방침은 날이 갈수록 확고해져갔다. 신력 116년, 소레이지 사건 이후 24년간 별거중이던 아내 에이미 하라오운이 사망했지만 크로노는 이번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에이미의 장례식에는 에이미의 친구들과 딸인 디에라, 그리고 디에라의 가족들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구웅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특수 금속제 게이트가 열리자, 크로노는 천천히 게이트 너머의 공간으로 걸어들어갔다. 어지간한 대강당 이상의 규모를 갖춘 공간에는 각종 기계장치들과 함께 반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관 같은 것들이 있었다. 액체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가 비쳐보였지만 무엇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연결된 장치들이 표시하는 정보로 보아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크로노는 길게 늘어선 유리관들을 지나, 따로 세워져 있는 세 개의 유리관을 바라보았다. 각각의 유리관 밑에는 'Perz Coltin', 'Tron Surbise', 'Vize Coltron'이라고 적힌 금속판이 붙어있었다.
신력 120년, 크로노 하라오운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는 시공관리국의 고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의 유언은 "질서는 오직 힘과 결단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힘을 가지고도 행사하지 않아 혼란을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죄악이다."였다.
=================================================
The Age of Revolution 외전입니다. 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말이죠 (...)
크로노가 그렇게 변하게 된 과정을 좀 쓰고 싶었는데... 으음... 역시 부족해요... 이놈의 필력이 하여튼 --;;
원래는 0083과 Z의 관계처럼 '어떻게 될 줄 뻔히 알고 있기에 씁쓸한 느낌이 드는 전개'를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는군요. 역시 이상은 높고 실력은 없으니... (홀짝)
제목인 '흑의 맹세'에서 '흑'은 크로노를 의미하는 동시에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타락했다는 의미로 보셔도 되겠지만, 솔직히 여기서 크로노의 방식이 바뀐 걸 타락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럼 재미있게 읽으셨기를 바라며 이만 씁니다.
시공관리국 차원함대 총사령관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죄송합니다, 의장님.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방금 소레이지에 파견될 함선의 숫자를 제가 착각한 것 같습니다만."
- 제대로 들은 것이 맞네. 의회에서는 제37관리세계 소레이지의 과민 반응을 우려하여 파견 함대를 1척으로 제한하기로 했네. 더불어 파견 무장대 3개 소대의 지휘관으로 나노하 T. 스크라이어 중령, 야가미 하야테 대령, 페이트 T. 디사이플 집무관을 임명했네.
평의회 의장의 말은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말 투성이였다. 아무리 시공관리국의 최고 의결기관이 평의회라고 해도, 파견 인원을 선정하는 권한은 일선 지휘관에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 평의회의 결정은 그것을 무시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하고 있었다.
"의장님,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파견 인원 선정은 무장대 사령관과 함대 사령관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인원을 지정하시는 것은..."
- 그만큼 평의회에서도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일세. 수를 늘릴 수 없으면 질을 높여야 하지 않겠나?
의장의 말에 크로노는 말을 잃었다. 사실 크로노도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소레이지의 상황은 섣불리 자극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행성 통합 정부와 반 통합 연합 간의 내전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고 시공관리국의 질량병기 사용금지 권고마저 무시당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물론 관리국에서는 대규모의 질량병기 사용을 문제삼아 무력 개입할 수도 있었지만, 역시나 만성적인 관리국의 인력 부족이 발목을 잡고 있기에 마땅한 방도가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평의회에서는 일종의 시위를 위해 함선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함대'가 아니라 '함선'인 이유는, 만약 파견된 함대를 소레이지 측─통합정부 측이든 반 통합 측이든─에서 위협으로 여겨 공격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함선과 무장대 선발을 끝내고 파견하겠습니다."
- 믿고 있겠네, 사령관.
차원 항행중인 XV급 순항함 클로디아의 브릿지에서, 카렐 하라오운 함장은 아버지이자 차원함대 총사령관인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과 통신 중이었다. 그 옆에는 나노하와 페이트의 모습도 있었다.
- 별 탈은 없어 보이는구나, 카렐.
"예,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니까요."
-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소레이지의 현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까. 통상공간으로 복귀할 때에는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너무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웃으며 대답하는 카렐의 모습에 크로노는 쓴웃음을 지었고, 나노하와 페이트는 염화로 '크로노는 여전하네', '성격이니까'하는 잡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 그런데, 하야테는 어디 갔지?
"아, 무장대 인원들 좀 다독여준다고 갔어.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던가 해서."
- 그런가, 역시 볼켄리터도 보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노하의 대답에 크로노는 표정을 흐리며 말했다. 샤멀은 본국의 의료시설을 담당하고 있어서 나올 수 없었고, 시그넘과 비타, 자피라 역시 각각 다른 차원에서 임무 수행중인 상태라 불러들일 수가 없었다. 기왕 파견인력의 질을 높이려면 그들까지 함께 보내는 것이 좋았을 테지만 이번에도 인력 부족이 문제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 함선 1척을 상대로 과민반응을 보이지는 않겠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들도 아니잖아?"
- 그건 그렇다만...
"함장님, 곧 목표 차원에 도착합니다. 통상공간 복귀까지 앞으로 300초."
페이트의 말에 크로노가 뭔가 대답하려는 순간, 오퍼레이터가 소레이지에 거의 다 왔음을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카렐이 크로노에게 말했다.
"이제 곧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통상공간으로 복귀할 때까지 통신은 종료하겠습니다."
- 그래, 행운을 빈다.
"예, 걱정마십시오."
핏 하는 소리와 함께 클로디아와 연결된 통신 화면이 자동으로 종료되었고, 크로노는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통신이었다. 하지만 크로노는 왠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매사에 정확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크로노는 '감'이라든가 '느낌'이라는 이름의 추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 파견은 자꾸만 결과가 좋지 않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약 15분 후, 클로디아가 통상공간으로 복귀한 다음 상황 파악이 끝났을 만큼의 여유를 둔 크로노는 재차 클로디아와 통신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신은 연결되지 않았다. 두번 세번 시도해도 통신화면은 연결되지 않고, 신호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크로노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약 10분 전, 통상공간으로 복귀한 직후의 클로디아.
"차원 이동 종료. 현재 차원 및 통상공간 좌표 확인합니다. 차원, 제37관리세계. 통상공간, 행성 소레이지 위성 궤도상.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좋아, 전 승조원 2급 경계 태세. 혹시라도 공격받을지 모르니 레이더 요원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계 지시를 내리는 카렐의 모습을 보며 나노하와 페이트도 움직였다. 어차피 함내에서 나노하 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 파견부대 대기실로 돌아가 당장이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그러면 우리도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을게."
"문제 생기면 바로 바로 연락줘."
"알겠습니다, 중령님, 집무관님. 그럼 부탁드..."
카렐이 나노하와 페이트에게 인사를 하려 한 것과, 클로디아가 알 수 없는 충격에 흔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쿠웅 하는 진동과 함께 브릿지가 비상등의 붉은 빛으로 물들고 각종 기기가 비명과도 같은 경고음을 울려댔다. 가장 먼저 사태를 수습한 것은 카렐의 고함이었다.
"상황 보고하라!"
"하, 함선 좌측면 500m 거리에서 공간 왜곡 반응 발생! 함 자체에 피해는 없습니다!"
"동일 방향에서 접근하는 대규모 물체 발견! 이건... 미사일입니다! 궤도상의 공격 위성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
"요격하라! 중령님들은 어서 트랜스포터로 가주십시오!"
카렐의 외침에 나노하와 페이트는 순간 멈칫했다. 카렐은 클로디아가 당할 경우에도 나노하 일행을 구하기 위해 전송장치에 가 있으라고 말한 것이었고, 두 사람은 그 의미를 바로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함 우측과 후방에서도 미사일 군 접근! 숫자는 각각 50이 넘습니다!"
"함 하방에서 접근하는 대형 물체! 위성궤도 요격 미사일입니다! 숫자 약 20!"
"배리어 생성기 부하치 80%! 오래 못 버팁니다!"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미안해, 카렐 짱!"
"...미안!"
나노하와 페이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브릿지에서 뛰쳐나갔고, 카렐은 그 뒷모습을 슬쩍 보고는 다시 함선 지휘에 집중했다. 상황은 매우 나빴다. 클로디아의 요격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숫자의 미사일이 전방위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그나마 그것들이 일반적인 수준의 질량병기라면 클로디아가 지닌 배리어로 막아낼 수 있을 터였지만, 그 공간왜곡 반응이 문제였다.
화약을 쓰는 질량병기로는 공간왜곡 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 그리고 카렐이 읽은 소레이지 관련 보고서에는 얼마 전 소레이지에서 물질-반물질 간의 쌍소멸 반응을 이용한 공격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카렐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그건가...!"
반물질 병기라면 차원항행을 이용해 이탈하는 것도 위험하다. 만약 차원항행에 반물질 병기가 영향을 줄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냥 소멸할 수도 있고, 동일 차원의 다른 공간으로 날려질 수도 있고, 미지의 차원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사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지금은 차원항행도 불가능하다. 차원항행 엔진은 한번 사용하려면 최소 5분은 마력을 충전해야만 했다.
"배리어 생성기 오버히트! 배리어가 걷힙니다!"
오퍼레이터의 비명과 함께 반물질 미사일들이 클로디아의 함체를 노리고 날아들기 시작했다.
몇분 후, 소레이지 행성 지표면.
"으... 일단 전송은 성공했나..."
긴급 전송의 충격에 멍해진 머리를 흔들며 나노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함께 전송된 무장대원 20여명, 그리고 페이트와 하야테가 보였다. 만약 클로디아가 무사하다면 잠시 후에 2차 전송으로 나머지 병력들이 올 테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워낙 급히 전송하느라 도착 좌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곳이 친 관리국 성향을 지닌 통합 정부 측 지역인지, 반 관리국 성향의 반 통합 연합 측 지역인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일단 통합 정부측과 통신을 해야겠는데..."
피융, 퍼석.
나노하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묻히듯이, 기묘한 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나노하의 시야에, 머리가 반쯤 사라진 채 바닥으로 쓰러지는 하야테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나노하는 자신이 본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땅 위로 퍼져가는 선혈은 하야테의 죽음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나노하와 페이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하야테!!"
두 사람의 외침이 방아쇠라도 된 듯, 그와 동시에 무수한 대구경 탄환이 나노하 일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AMF 처리라도 되어 있는지 실드와 배리어, 배리어 재킷을 가리지 않고 관통되는 탄환에 파견부대원 전원이 쓰러지는 데에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는 오직 바닥에 흥건한 피와 산산조각난 육편, 그리고 디바이스 조각들 뿐이었다. 그 조각들 중에는 황금색과 검은색의 금속조각과 찢어진 책으로 보이는 조각들도 섞여 있었다.
며칠 후, 시공관리국은 온통 충격에 휩싸였다. 소레이지의 반 통합 연합 측에서 공개한 영상이 원인이었다.
그 영상은 두개의 다른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전반부는 클로디아의 통상공간 복귀부터 소멸까지의 모습을 공격위성에서 촬영한 것이었고 후반부는 지상으로 대피한 나노하 일행이 살해되는 모습을 반 통합 측 종군기자가 촬영한 영상이었다. 이 영상을 본 린디 하라오운은 그대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미드칠더와 시공관리국에는 소레이지에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가하자는 의견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그 의견은 얼마 안 가 실제로 이루어졌다.
다름아닌 시공관리국 차원함대 총사령관,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에 의해서.
"...괜찮은 겁니까?"
"뭐가 말인가?"
"아무리 녀석들이 반물질 병기를 쓴다지만, 이 방법은 조금 지나친 게 아닐까요?"
"다른 쓸만한 방법이 있나? 순항함이 지닌 배리어도 순식간에 한계에 달하게 만드는 물건인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질서는 힘과 결단이 있어야만 유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 관리국의 행동은 너무 유약했어. 힘을 가지고도 제 때 행사하지 않았기에 녀석들이 얕잡아 본 거고, 그 결과가 바로 지난번 사건이다. 이제... 두번 다시 망설이지 않을 거다. '적'에게 자비는 필요없어."
소레이지 행성, 위성 궤도.
며칠 전 클로디아를 격침시킨 반 통합 연합 측의 공격위성들은 또다른 물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탐지했다. 이번에는 차원도약이 아닌, 통상공간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아군이 아니라는 점은 같았기에 공격위성들은 물체에 조준을 맞추고 일제히 미사일을 발사했다. 목표는 지름 30km에 달하는 소행성이었고, 지상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위성들은 아낌없이 탄약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소행성이 대기권에서 마찰열로 타서 사라질 정도의 크기가 되었을 무렵, 비슷한 크기의 소행성이 또 하나 접근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번에도 위성들은 공격을 가했고, 충분히 크기가 줄어들자 다른 소행성이 나타나고 위성이 공격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 전개는 위성들의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크로노 하라오운 대장, 자네가 소레이지에 소행성을 낙하시키라고 지시했나?"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위험한 작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위험도는 분명히 높습니다만, 또한 그만큼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유효한 방식이었지요. 반물질 병기에 대한 방어는 마법으로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XV급 순항함 클로디아의 배리어도 오래 버티지 못 했을 정도의 위력이니, 그대로 두고 함대를 파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 자네가 실행한 그 작전에 의해 소레이지의 반물질 공격 위성들은 모두 파괴되었네. 하지만 소행성 몇개가 그대로 지상으로 낙하했고, 결과적으로 소레이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이 되고 말았잖나. 이건 큰 문제네."
"작전을 세우는 도중 그 위성의 대응력에 대한 예상이 조금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애초에 부족한 자료를 가지고 분석했는데 그 정도 피해로 끝난 것이 다행이라고 봅니다만."
"그 정도 피해? 소행성 낙하의 직접적인 충격으로 사망한 사람만 1억, 대피 중 사망자 및 미처 대피하지 못해 사망한 사람이 5억일세. 이런데도 '그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나?"
"소레이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의 양상을 보건대, 그대로 뒀으면 분명 행성 전체 인구의 2/3은 사라졌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가 아닙니까? 또한 이 작전으로 미드칠더와 관리국 내부에 퍼져있던 전면침공의 의견마저 가라앉혔습니다. 전 일석 이조라고 봅니다,"
시공관리국 평의회가 개최한 크로노 하라오운에 대한 사문회에서, 크로노는 무혐의 판결을 받고 직위를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대응─소레이지에 대한 공격적인 대응을 포함해서─이 관리국원 사이에서 화제가 되며 크로노에 대한 국원들의 지지도가 대폭 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신력 92년, 시공관리국은 새로운 차원세계 관리방침을 발표했다. '관리국에 대한 어떠한 무력 반발도 용납하지 않으며, 만약 무력 반발이 있을 경우 관리국에서도 무력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방침이 발표되는 것과 함께 12개의 아르크 앙 시엘이 함선에 상시 장착되었다. 관리국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아직 소레이지에서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시기였기에, 크로노가 제안한 이 방침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신력 93년, 린디 하라오운이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지만, 크로노는 임종조차 지키지 않고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라오운. 지금은 극비 임무 수행중인데."
"알고 있어, 내가 내린 명령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너희들 볼켄리터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지."
"...무장국원들을 대동한 걸 보니 좋은 용건은 아닌 모양이군."
"과연 볼켄리터의 리더, 열화의 장. 눈치가 빠른걸."
"분위기를 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짐작이 가는 법이다. 그런데 이유가 뭐지?"
"그건 당신이 구속되면 알려주지."
"과정은 어찌 됐든 날 체포하겠다는 뜻인가."
"아니, 조금 달라. 체포가 아니라 손에 넣는다고 봐야겠지."
"...제정신인가, 하라오운?"
"물론 제정신이야. 뭔가 이상한 쪽으로 받아들인 모양인데,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말도록. 하지만 어쩌면 나중에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고 할 지도 모르겠는걸."
"...임무 수행보다 친구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우선이겠지.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마!"
"아까도 말했지만 난 제정신이다. 넌 이해 못하겠지만...!"
신력 93년 2월, 시그넘 극비 임무 수행중 실종. 동년 9월, 비타 극비 임무 수행중 실종. 이듬해인 신력 94년 7월, 의료 파견 중이던 샤멀 실종. 동년 11월, 자피라 극비 임무 수행중 실종. 그 해 12월, 크로노는 원수로 진급하는 것과 동시에 시공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신력 97년, 시공관리국 평의회 의장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르크 앙 시엘의 제작과 관련된 정보가 모조리 사라지다니!"
- 그게... 오늘 아침 데이터베이스 정기 점검을 하는데 데이터 변경 로그와 다른 부분이 발견되었어. 확인해본 결과 아르크 앙 시엘의 데이터, 그것도 신규 제작 방식에 대한 데이터만 완전히 소멸되어 있더군. 물론 지금도 아르크 앙 시엘의 정비는 가능하지만, 더 이상 새로 만드는 것은...
"제길, 당장 데이터를 복원해! 동시에 어떤 녀석이 벌인 일인지도 알아내고!"
- 글세, 일단 시도는 해보겠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무 깔끔하게 데이터가 지워져 있더라고. 게다가 어디서 침입한 건지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
"유노! 그게 정보부 장관이라는 자가 입에 담을 소리냐!"
크로노의 호통에 유노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항상 사람좋은 미소를 짓던 유노였지만, 근래 들어 크로노 앞에서는 거의 미소를 짓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노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직위가 문제가 아니라 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크로노, 좀 자중하는 게 어떨까 싶다. 아르크 앙 시엘은 분명 강력한 병기이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야. 너무 그렇게 얽매일 필요까지는...
더 듣기 싫다는 듯, 크로노는 유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통신화면을 닫아버렸다. 한달 후, 시공관리국은 본국 데이터베이스가 해킹당했다는 것과 이 일의 책임을 지고 정보부 장관인 유노 스크라이어가 사임했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관리국은 앞으로도 관리국에 거스르는 행동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자택에서 그 뉴스를 보던 유노는 술잔을 기울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데이터를 없애는 정도로는 너를 막을 수 없었구나, 크로노. 어떻게 해야 네 폭주를 멈출 수 있을까..."
크로노는 신력 106년에 평의회 의장직에서 퇴임했지만 그 후로도 사실상 관리국을 좌지우지했다. 크로노의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고, 크로노와 크로노가 세운 공격적인 관리방침은 날이 갈수록 확고해져갔다. 신력 116년, 소레이지 사건 이후 24년간 별거중이던 아내 에이미 하라오운이 사망했지만 크로노는 이번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에이미의 장례식에는 에이미의 친구들과 딸인 디에라, 그리고 디에라의 가족들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구웅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특수 금속제 게이트가 열리자, 크로노는 천천히 게이트 너머의 공간으로 걸어들어갔다. 어지간한 대강당 이상의 규모를 갖춘 공간에는 각종 기계장치들과 함께 반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관 같은 것들이 있었다. 액체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가 비쳐보였지만 무엇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연결된 장치들이 표시하는 정보로 보아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크로노는 길게 늘어선 유리관들을 지나, 따로 세워져 있는 세 개의 유리관을 바라보았다. 각각의 유리관 밑에는 'Perz Coltin', 'Tron Surbise', 'Vize Coltron'이라고 적힌 금속판이 붙어있었다.
신력 120년, 크로노 하라오운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는 시공관리국의 고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의 유언은 "질서는 오직 힘과 결단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힘을 가지고도 행사하지 않아 혼란을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죄악이다."였다.
=================================================
The Age of Revolution 외전입니다. 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말이죠 (...)
크로노가 그렇게 변하게 된 과정을 좀 쓰고 싶었는데... 으음... 역시 부족해요... 이놈의 필력이 하여튼 --;;
원래는 0083과 Z의 관계처럼 '어떻게 될 줄 뻔히 알고 있기에 씁쓸한 느낌이 드는 전개'를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는군요. 역시 이상은 높고 실력은 없으니... (홀짝)
제목인 '흑의 맹세'에서 '흑'은 크로노를 의미하는 동시에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타락했다는 의미로 보셔도 되겠지만, 솔직히 여기서 크로노의 방식이 바뀐 걸 타락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럼 재미있게 읽으셨기를 바라며 이만 씁니다.
'몽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죽박죽 패러디 (0) | 2009.06.12 |
---|---|
아스트랄로피테쿠스 아스트랄루스 (Astralopithecus Astralus) (2) | 2009.03.07 |
2009년 모에 토정비결? (0) | 2009.01.25 |
[나노하 팬픽] The Age of Revolution (16) 소녀, 소녀와 재회하다 [終] (0) | 2009.01.21 |
[나노하 팬픽] The Age of Revolution (15) 소녀, 섬광에 휩싸이다 (0) | 2009.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