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 이 팬픽은 나노하 StS 이후 약 70년이 지난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요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틀이 지나, 에리나는 샤오롱에게서 레이징 하트를 건네 받았다.

"전부터 암드 디바이스 용 부품의 비율이 높긴 했지만, 이번엔 더 높아졌어. AI셋과 마력 회로만 제외하면 전부지. 덕분에 전체 내구도는 15% 증가, 마력 소모는 18% 증가다. 뭐, 엘즈리온을 사용하는 이상 마력 소모는 별로 상관없겠지만. 그리고 이것저것 달아..."

샤오롱은 자신의 말을 들으며 에리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장난꾸러기처럼 보이는 짓궂은 미소였다.

"...볼까 했다만 레이징 하트에 부담이 갈까봐 관뒀다. 안 그래도 주인한테 혹사당하고 있는데 나라도 좀 편하게 해줘야지."

"하아... 네, 고마워요."

"참고로 카트리지 시스템은 무탄피 방식으로 교체했다. 그렇게 미심쩍다는 표정 짓지 마. 이미 다른 녀석들에게 장착하고 시험 운용한지 3개월도 넘은 물건이라고. 안전성 검증은 사실상 끝난 상태니까 걱정하지 마. 탄피 배출구 슬라이드에 배기 덕트를 설치해놨으니까, 탄피 대신 열이 배출될 거야. 혹시라도 화상입지 않게 조심해라."

고개를 끄덕이던 에리나는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무탄피 방식이라면, 카트리지에 들어가는 마력탄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저기, 무탄피 방식이면 탄환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에르트에는 아직 무탄피 마력 카트리지 제조시설이 없다구요."

"아, 그 점은 걱정 마. 카트리지 자체를 마력 배터리 타입으로 교체했으니까. 마력탄환에 충전하듯이 카트리지 자체에 마력을 공급하면 충전돼."

"뭐랄까... 테이저 건 같네요."

"흠, 그쪽은 잘 모르지만 대강 비슷하려나... 아, 맞다. 여기 예비용 카트리지 10개. 이제 레이징 하트의 카트리지는 전에 쓰던 것과 호환 안 되니까 그 점 주의해라."

"고마워요. 그럼 다음에 또 신세 좀 질게요."

"그래, 그때는 좀 멀쩡한 상태로 보게 해다오."

"노력해 볼게요..."

샤오롱의 연구실을 나선 에리나는 우선 PA연구부에서 엘즈리온을 수령한 다음 데이터 빌딩의 정보 열람실로 향했다. 그간 타 도시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데이터를 카피해서 에르트로 가져가야 했다. 현재 네트워크를 비롯한 일반적인 정보 입수 방법은 관리국 에르트 본부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당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직접 본거지에서 데이터를 가져가 에르트의 동료들에게 보여주고 위기를 알려야만 했다. 일반적인 휴대용 기억 장치는 압수되거나 강제 포맷당할 가능성도 있으니 레이징 하트의 메모리 영역을 빌리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부탁할게, 레이징 하트."

『맡겨주세요, master.』

레이징 하트는 에리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호언장담 했지만, 실제로 데이터 카피가 완료된 것은 1시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나마도 원하는 양의 70%만 담을 수 있었는데, 그만큼 에르트를 제외한 도시들의 상황은 심각했다.

『죄송합니다, master. 제 예상보다 데이터가 많아서 더 이상은 담을 수가 없군요.』

"아니, 괜찮아. 나야말로 이렇게까지 많으리라곤 생각 못했으니까. 열흘동안 본 것조차 병아리 눈물 만큼 정도였다니..."

에리나는 그렇게 탄식하며 레이징 하트를 다시 손목에 걸었다. 시간을 더 들인다고 한들 데이터를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이젠 돌아갈 준비를 할 차례였다.

"음... 파리우드의 특산물이나 기념품이랄 게... 딱히 있던가?"

『예전의 파리우드라면 곳곳에 세워져있는 토템 폴의 미니어처 상품이 유명했습니다만, 현재의 파리우드는 완전히 새로 세워진 다른 도시라 특별히 그런 물품이 없을 겁니다.』

"역시 그렇구나. 그러면 대충 인형이나 열쇠고리 같은 걸로 해야겠네."




에르트로 돌아가기 위해 수송잠수함 나미야비로 다가가던 에리나는, 잠수함 승조원 제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사람 십여명이 나미야비에 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도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는 사람들인 듯 했는데, 나미야비에 탑승한 후 함내 휴게실에서 그 중 한명과 만날 수 있었다. 서글서글한 표정을 한 20대의 금발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에르트로 가는 에리나 레이벨이라고 해요."

"아, 반가워. 난 센 파리노. 플라크에 가."

"플라크라면... 에르트에서 좀 먼 곳으로 알고 있는데..."

"응, 차로 대충 대여섯 시간 걸릴걸. 제법 멀지."

"그렇군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일행이세요?"

"맞아. 전투반 2개조가 추가로 파견됐거든. 나까지 포함해서 12명이야."

"전투반이... 2개조요? 게다가 교대가 아니라 추가?"

에리나가 조금 놀라는 모습에 센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곤란하다는 말투였다.

"음, 그게 그러니까... 뭐. 동료니까 별로 숨길 필요는 없겠지. 플라크에서 관리국이 닥치는대로 민간주택을 급습해서는 16세 이상 40세 이하인 사람들을 무조건 체포하고 있어. 만약 마력 반응기에서 C랭크 이상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아예 연령 불문이고. 이유는 ELF 대원일 가능성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는데, 그건 아무리 봐도 핑계지. 그것 때문에 붙잡힌 사람들을 구하려고 투입되는 거야."

"12명 추가된다고 과연 가능할까요...?"

"현지에서 관리국의 그 행동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협력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게다가 한시가 급한 상황이고."

"한시가 급하다구요?"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체포된 사람 전원이 이달 중순에 변경 노역장으로 이송될 예정이래."

"잠깐, 변경 노역장? 그건 또 뭐에요? 궤도 구치소는 알지만 그런 건 처음 들었어요."

정말이었다. 대외적으로 관리국은 어디까지나 전 차원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범죄자에 대한 처분도 교화 또는 격리 뿐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교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중범죄자는 궤도 구치소, 교화의 가능성이 있는 자는 해상 교도소로 보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변경 노역장이라는 명칭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에리나의 말에 센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도부에서도 아주 최근에 알게 된 모양이야. 세워진 건 대략 50년 전, 각 차원에서 사람이 살 수 없지만 각종 자원물질이 풍부한 행성에 건설되었대. 그래서 체포된 사람들 중 일부를 그곳으로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켜 자원을 채취한다는 얘기지. 모든 생명 유지 수단을 놈들이 통제하고 있으니 거기선 복종 말고는 방법이 없어."

"말도 안 돼. 그래선, 그래선 마치..."

"그래. 완전히 노예 신세지. 그렇게 끌려가는 걸 막기 위해서 우리가 가는 거야."

말을 마친 센은 벽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살짝 올려다본 그 얼굴에서 붙임성 좋은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10월 14일, 에리나는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에 에르트에 도착했다. 센 일행은 에르트로 가는 도중에 먼저 내렸고, 에리나는 그 작전이 부디 성공하기를 빌었다. 그 작전과 관련된 사건들은 분명 관리국에 의해 철저히 차단될 테지만, 그래도 성공한다고 마음 속으로 믿기로 했다.
전송장치에서 나온 에리나는 시올이나 안나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히 건물을 나서서 OVL 본사로 향했다. 레이징 하트에 담긴 데이터를 넘겨야 한다는 생각에 한시가 급했기 때문이다. 사옥에 들어선 에리나는 그 즉시 사장실로 향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페이!!"

"응? 뭐야, 너냐. 노크 정도는 좀 하지 그러니."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는 페이의 모습을 보며 에리나는 반사적으로 태클을 걸었다.

"뻔뻔스럽게 대꾸하지 말아요. 실내에서 담배 피지 말아요. 창문 열어요. 그리고 책상에서 다리 내려요! 나이도 있는 사람이 부끄러운 것도 몰라요?"

"뭐 어떠니, 어차피 나 혼자인걸."

"사람이 들락날락 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노크하고 들어오니까 괜찮아. 그건 그렇고,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걸 보니 뭔가 일이 있나 보네?"

몇마디 더 쏘아주려던 에리나는 페이의 말에 왜 자신이 이렇게 급히 들이닥쳤는지 그 이유를 떠올렸다. 확실히 이렇게 사소한 문제로 으르렁 거릴 때가 아니었다.

"잠시만요, 단말기 연결 좀 할게요. 부탁해, 레이징 하트."

『알겠습니다, master.』

페이의 단말기와 무선 접속한 레이징 하트는 본거지에서 담아온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과 동시에 해당 내용들 중 일부를 공간모니터로 띄웠다. 뭔가 싶어 그 화면을 바라보던 페이는 갑자기 자세를 바로하고는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데이터 몇개를 확인한 페이는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담배를 꺼냈다.

"실내 금연이라니까요."

"저런 걸 보고 어떻게 참으란 거니, 지금. 넌 안 피우니까 상관없겠지만 난 못 참겠어."

페이의 말을 들은 에리나는 그렇기도 하겠다는 생각에 더 제지하지 않았고, 페이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깊게 한번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젠장, 이렇게까지 나오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럼 지금 이 도시는 태풍의 눈인가. 다른 곳이 박살나고 나면 여기에도 피바람이 몰아칠 테지."

페이는 담배의 필터 부분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에르트 시는 행성 에르트에서 가장 큰 대도시로, 이곳의 인구 중 1/4만 관리국에 반대한다고 해도 관리국 에르트 본부는 그 역할을 상실할 정도였다. 지금은 ELF나 마도사 협회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관리국에 순응하고 있어서 평온한 상태인 것인데, 관리국은 바로 그 점을 노려 다른 도시들을 먼저 제압하고 마지막에 에르트에 전력을 기울이려 하고 있었다.

"이를 어쩐다... 언론 통제가 이 정도라면 우리가 제보를 한다고 해도 당연히 기사가 잘릴 테고, 개인 웹 공간에 올린다고 해도 순식간에 블라인드 처리 되거나 하겠지. 입소문이라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간 허위사실 유포로 체포... 아니,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가능성도 있어. 제길, 방법이 없잖아, 방법이."

필터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담배를 물어뜯고 있던 페이는 문득 에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아해하는 그 모습이 꼭 '너 왜 여기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너 아직 안 나갔니? 그만 나가 봐. 난 대책 좀 세워봐야겠다."

"...그러고 싶어도 못 나가요. 저거 전송받는 데에만 1시간 걸렸다구요? 아직도 데이터 전송 중일걸요."

"뭐? 허, 정말이네.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전송 완료 예정 시간을 본 페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고, 에리나는 손님용 소파에 앉아 전송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막 앉으려던 에리나는 자기가 갖고 들어온 트렁크를 보고는 실비아의 선물에 생각이 미쳤다.

"아, 그러고보니 실비아..."

"응? 실비아가 왜?"

"선물 사다주겠다고 했거든요. 만나는 김에 한번 그쪽 문제 물어볼까 하구요."

"아서라, 괜히 물어봤다가 꼬리 밟힐라. 게다가 여기 온지 몇달 되지도 않았으니, 잘 모르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은데요."

"그만 둬. 명령이야."

돌연 엄격해진 페이의 말투에 에리나는 긴장했다. 저 말투는 ELF 에르트 지부의 지부장으로서 나설 때의 것이었다.

"지금 에르트의 상황은 예측이 극히 어렵다. 이런 마당에 단 하나라도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전혀 없어. 그보다는 차라리 전력을 온전하게 보존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편이 낫다. 빠른 시간 안에 대응책을 수립할 테니 그때까지 실비아와 관리국과 관련된 대화는 나누지 마라. 만나서 선물을 건네는 정도는 의심받을 이유가 없으니 허락하지만, 그 이상은 금지한다. 알았나?"

"네, 지부장님."

"좋아. 전송이 완료되는대로 레이징 하트를 갖고 나가도록."




그날 퇴근 시간, 짐을 챙기던 실비아는 휴대전화가 울리는 것을 눈치채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 에리나다. 돌아왔구나. - 안녕, 에리나. 오랜만이야."

- 그래, 2주 넘도록 전화 한번 안해서 미안.

"아니, 괜찮아. 바빴나 봐?"

실비아는 에리나와 통화를 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물론 나오기 전에 필리아에게 몸짓으로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응, 생각보다 이것저것 확인할 게 많더라구. 덕분에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완전히 녹초가 돼서 곯아떨어지는 통에 전화할 틈도 없었어.

"그랬구나, 고생했어."

- 어차피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걸.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같이 먹을 수 있을까?

"어, 별로 상관은 없는데. 왜?"

- 왜냐니, 선물 사온다고 했잖아. 그것도 줄 겸, 2주 넘게 못 봤으니 얼굴도 볼 겸.

"좋아, 만나자. 어디서 만날까?"

- 응, 장소는...




"...저기, 에리나."

"응? 왜?"

"여기 밖에 갈 곳이 없었어...?"

"전에 말 안 했어? 나 마땅히 아는 식당 없다고 한 것 같은데."

"아아, 맞다. 듣고보니 생각나네. 그랬지..."

실비아는 머리를 짚으며 나지막이 탄식했다. 지금 두사람은 재회했을 때 갔던 패스트푸드 점에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어쩐지 한심한 기분이 들어, 실비아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다음부터 식당이나 그런 건 내가 정할게. 그래도 괜찮겠지?"

"응, 괜찮아. 그런데, 여기 불만이야? 서비스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지... 하아..."

막 재회했을 때에도 느낀 거지만, 실비아는 다시한번 속으로 '왜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예전엔 안 이랬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이러쿵 저러쿵 하며 식사를 마친 후, 에리나는 손가방에서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내 실비아에게 건넸다.

"파리우드에는 특별히 관광상품이라고 할만한 게 없더라. 그래서 휴대전화 스트랩으로 샀어."

"고마워. 여기서 뜯어봐도 돼?"

"응, 상관없어."

에리나의 대답을 들은 실비아는 포장지를 뜯어보았다. 안에서 나온 것은 볼펜과 비슷한 굵기에 길이는 그 절반 정도 되는 막대 형태의 스트랩이었다. 1/3 정도가 금빛으로 빛나고 나머지 2/3 정도가 반투명한 파란 색으로 된 것이 꼭 영화 같은 데서 나오는 광선검 같았다.

"휴대용 기억 장치야. 무선 전송이 가능하고, 전력은 링크된 디바이스나 단말기에서 자동으로 공급받는대. 하나쯤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사실 실비아에게 바르디슈가 있는 이상 별로 쓸모있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비아는 성의를 생각해서 미소를 지으며 집어넣었다.

"고마워, 잘 쓸게."



결국 에리나는 실비아에게 현재 관리국과 에르트의 상황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묻거나 말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묻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뭘 어떻게 말해야 의심받지 않고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페이가 명령으로 단단히 못박아둔 것도 한몫했다.

"아아~ 정말이지, 이런 상황 싫은데. 이렇게 예측 불허인 건 찜찜해~"

『하지만 master, 어쩔 수 없지 않나요. 당분간은 페이 말대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알고는 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거랑 마음이 내키는 거랑은 다르잖아. 하우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대강 짐작은 됩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어두운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도 그대로인 것을 보니 페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신이 가져온 데이터를 보며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페이의 모습을 떠올린 에리나는 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거실로 나온 에리나는 페이가 간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발도 없고 침구류도 어제 자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아마 상황 분석과 대응책 수립 문제 때문에 회사에서 밤을 꼬박 샜을 것이다.

"나이도 있는 사람이 밤 새면 피부에도 안 좋을 텐데."

중얼거리며 아침 샤워를 위해 화장실로 가는 에리나의 귀에 휴대전화의 메시지 송신음이 들려왔다.

"아침부터 누구람... 아, 페이다. ...아침 식사 부탁해, 라... 도시락 싸오라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집에 있는 그릇이나 반찬통으로 도시락을 싸가는 것은 무리였다. 애초에 모조리 유리 그릇들인데다 그 그릇들을 담고 갈 가방도 마땅치 않고, 에리나는 100% 급식이 제공되는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도시락 통을 가지고 다닌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집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보온병에 담긴 커피나 차 정도가 고작.

"...출근 길에 적당한 가게에서 사 가자."




"......"

트론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공간 모니터에 떠오른 내용을 보고는 단말기를 조작했다. 그러자 반투명한 공간 모니터가 종료되면서 책상에 내장된 액정 모니터-후방에서 모니터 내용 확인이 불가능한 타입-가 돌출되었고, 트론은 방금 보았던 내용을 다시 액정 모니터에 띄웠다.

"...후후."

내용을 다 읽은 트론은 방금 읽은 것을 극비로 분류, 개인 저장 공간에 넣고 암호를 걸었다. 어차피 중요한 내용은 모두 머릿속에 들어가 있으니 지워도 상관없지만, 이것은 오래된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액정 모니터를 책상에 수납하고 공간 모니터를 작동시킨 트론은 비서를 시켜 어느 부서에 연락을 넣었다. 그 얼굴은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같았다.




에리나가 출근해서 사장실에 들어가보니, 페이는 눈에 다크 서클이 완연한 모습이 틀림없이 밤새 한숨도 못 잔 모습이었다. 그 상태에서도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공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 어쩐지 귀기(鬼氣)마저 풍겨나오는 것 같았다. 사장실에 들어선 에리나는 페이의 모습을 보고 순간 움찔했지만, 금방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자요, 일단 죽으로 좀 때워요."

"주욱...? 밥이 아니야아...?"

"밥으로 사오면 반찬에 국에, 그릇 수가 팍팍 늘어난다구요. 간단하게 죽으로 해결한 다음 나중에 따로 채워넣어요."

"아... 그래..."

"자, 여기 차도 있으니까 마셔요. 그리고 다 먹은 다음 잠깐 눈 좀 붙여요. 하루 종일 꾸벅꾸벅 조는 것보다 그게 낫겠어요."

더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페이는 천천히 죽 그릇의 뚜껑을 열고는 한술 한술 떠먹기 시작했다. 에리나가 보기에는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놓치고 고개를 처박을 것 같았는데, 용케도 다 먹을 때까지 버텼다. 게다가 식후 차까지 마시는 것을 보면 가히 초인의 의지력이었다. 하지만 그게 한계였는지, 빈 찻잔을 내려놓자 마자 페이의 고개가 옆으로 픽 꺾였다.

"저기, 페이?"

"......"

"자요? 의자에서 앉아서 자면 건강에 나빠요."

"......"

"할 수 없네, 그럼 3시간 후에 봐요."

에리나는 페이의 의자 등받이 각도를 조절해서 최대한으로 눕힌 다음 꺾인 고개를 바로 했다. 한결 자세가 편해보이는 것이 보는 사람의 마음도 편했다.
에리나가 사장실에서 나가고 2시간 후, 페이는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눈을 떴다. 페이가 깨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에리나를 호출한 것이었다.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에리나를 보는 페이의 시선은 날카롭고 굳건했다. OVL의 사장으로서의 페이가 아닌, ELF 에르트 지부장으로서의 페이의 모습이었다.

"결정된 거에요?"

"그래, 밤샘 회의를 거쳐 대응책이 결정됐어. 네가 출근하기 10분 전에 간신히 회의가 끝났지. 아주 다들 난리법석이더군. 당장 총궐기를 해야한다는 녀석, 다른 지부들과 연락을 취해 동시 봉기를 해야한다는 녀석, 아무 생각없이 앉아서 우왕좌왕하기만 하는 녀석. 정말 가관이더라. 그 자식들 타이르고 윽박지르느라 시간 낭비한 걸 생각하면... 망할 놈들. 그래도 어떻게 간신히 결론은 냈지."

잠시 말을 멈춘 페이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진지한 분위기 때문에 에리나는 제지할 생각을 못했고, 담배에 불을 붙인 페이는 연기를 내뱉었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담배 연기에 휩싸인 채, ELF 에르트 시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내년이 오기 전에 관리국 에르트 본부를 친다. 목표는 에르트 본부장 트론 서바이스. 놈을 잡아야 해. 그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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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을까 말까 하던 에피소드 하나, 그냥 빼기로 했습니다. 곁다리용 에피소드였으니 별로 상관 없기도 했고요.
자, 이제 클라이막스로 일직선 Go! G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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