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팬픽은 나노하 StS 이후 약 70년이 지난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요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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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에리나는 트렁크를 들고 집을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파리우드에 있는 협력사 본사를 방문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ELF의 본거지로 가서 레이징 하트의 오버홀을 받기 위해서였고, 일단 파리우드 행 비행기 표는 끊어뒀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LF에서는 이럴 때마다 두 사람분의 비행기 표를 준비한 다음, 한 사람은 본거지로 오고 다른 한 사람만 탑승한다. 그런 다음 공항의 비행기 탑승 기록을 조작해서 탄 사람과 안 탄 사람의 기록을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비행기 사고만 나지 않으면 들키는 일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방법이었다.
집을 나선 에리나는 에르트 시에 위치한 은신처 중 한곳을 들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이동했다. 그 다음 도착한 곳에서는 사람들이 에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와, 에리나. 오랜만에 보네."
"안녕하세요, 시올 씨. 반년만에 뵙네요."
"가끔은 연락 좀 주라구, 응?"
은신처의 책임자인 시올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자주 연락하라는 말은 농담이다. 명색이 저항조직이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하는 것이 기본이니 말이다. 에리나는 농담을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러고 싶지만 바빠서요. 그건 그렇고, '점프'는 가능하죠?"
"점프 자체는 가능하지만 기다려야 해. 나미야비에서 연락이 아직이거든. 다른 곳을 들렀다 오는 게 좀 늦어지는 모양이야."
시올의 대답에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의 의자에 앉았고, 시올은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나미야비는 ELF에서 보유한 수송 잠수함으로, 주로 대외적으로 알려진 위치의 사람들이 본거지를 오갈 때 이용되는 이동 수단이다. 그리고 ELF의 주 활동지역에는 이런 수송 잠수함으로 대원이나 물자를 전송하거나 반대로 전송받는 시설이 있는데, 지금 에리나가 온 곳이 바로 그런 시설이었다. 에리나와 시올이 말한 '점프'라는 것은 잠수함과 시설 간의 전송을 지칭하는 말이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니 한 사람이 커피를 타서 에리나에게 건네주었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기다리기 지루하지? 자, 여기 커피."
"아, 고마워요. 음, 그러니까..."
"안나야, 안나 레프노스카. 한달 전에 여기로 오게 됐어."
"고마워요, 안나 씨."
에리나의 인사에 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10대 중반인 에리나가 ELF 단원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 모양이었다. 자꾸만 흘끔 흘끔 쳐다보는 시선에 에리나는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저,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 궁금하신 건 대답해드릴게요."
"어? 아, 아니, 너무 빤히 봐서 미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왜 여기 들어왔나 싶어서..."
"으... 죄송하지만 그건 별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데요..."
에리나의 대답에 안나는 작게 응, 하고 말하며 커피잔을 기울였다. 무안해서 그런지 일부러 시선을 돌리는 기색이 눈에 보였다. 어쩐지 보는 사람이 답답해지는 모습이라 에리나는 자기가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그런데 안나 씨는 왜 이쪽으로 오게 되셨어요? 한달 전에 왔다고 하셨죠?"
"아, 응. 입단한 건 몇년 됐고, 그동안에는 은신처에서 갈아입을 옷이나 차량을 준비하는 일을 맡았어. 그랬는데 한달 전에 여기 사람 한명이 사고를 당해서 입원했대. 그래서 이쪽으로 전환 배치된 거지."
"그랬군요. 그런데 그 사고당하셨다는 분은 괜찮으시대요?"
"글쎄, 내가 올 때 시올 씨한테 들었을 때에는 일단 목숨은 건졌다던데..."
에리나의 물음에 안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책임자가 아니니 그 이상의 정보는 접할 일이 없으니 알 리가 없었다. 마침 안쪽 방에서 나오던 시올이 말을 받았다.
"그 녀석, 교통사고였는데 중상이야. 전치 15주 나왔는데, 이제 석달 정도 남았군 그래."
"그냥 우연한 사고였겠죠?"
"그래, 음주운전자한테 당한 정말 우연한 사고였어. 가해자는 뺑소니쳤다가 나중에 잡혀서 지금 구속 상태지. 그건 그렇고, 연락이 왔다. 곧 전송 위치에 도달한다는데."
"그래요?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네요. 안나 씨, 커피 고마웠어요."
"천만에. 잘 다녀오렴."
안나의 배웅에 에리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시올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원형의 두툼한 판 형태의 장치와 그 주위의 바닥과 천장에 박힌 링 형태의 장비들이 있었다. 트랜스포터와 공간이동마법의 기척을 지우는 결계 생성기였다. 방에 들어선 에리나는 콘솔을 조작하는 사람들에게 목례를 하고는 트랜스포터 위로 올라섰고, 그 모습을 본 시올은 결계 담당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결계 작동, 출력 올립니다. 현재 출력 60%."
"트랜스포터 동력 연결, 전송 좌표점은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좌표 피드백 시스템 작동 중, 나미야비는 아직 이동 중입니다. 현재 감속 중. 아, 방금 이동 완료 했습니다. 미세 조정 개시."
"좌표점 안정됩니다. 고정 완료. 전송 준비 완료됐습니다."
"결계 출력 98%. 안정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대원들의 말이 끝나자 시올은 에리나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손을 들었다. 언제나 하는 배웅이었다.
"그럼 잘 다녀와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에리나가 대답한 직후, 눈앞의 광경이 변했다. 장비가 들어차있긴 하지만 제법 넓었던 방이 아닌, 상대적으로 비좁은 느낌이 나고 사방이 금속 벽으로 막혀있는 잠수함 내부였다. 전송이 완료되자 나미야비의 승조원들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전송 완료. 트랜스포터 시스템 동력 차단."
"좌표 피드백 시스템 종료."
"결계가 걷혔습니다. 아직까지 전송이 탐지당한 기미는 없습니다."
승조원들의 말이 끝나자 그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서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40대 중반 정도에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좋아, 다들 수고했다. 이제 쉬도록. 에리나도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부함장님."
에리나는 고개숙여 인사했고, 부함장은 웃으며 다가왔다. 나미야비는 본거지에 갈 때마다 신세를 졌기 때문에 에리나도 승조원들과 제법 안면이 트여있었다. 그 중에서도 부함장은 에리나가 딸처럼 느껴진다며 잘 대해주는 편이었다.
"그래, 이번엔 무슨 일이지?"
"레이징 하트의 오버홀이에요. 거기에 겸해서 PA 점검도 받아보려구요."
"너도 참 고생이구나. 디바이스 오버홀이라니. 넌 다친데 없고?"
"물론이죠, 보시다시피 말짱해요."
웃으며 양팔을 들어보이는 에리나의 모습에 부함장은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래도 조심해라. 다친 다음 후회해도 소용 없으니까."
"네."
이틀 후, 에르트 근처의 도시에서 두명을 더 태운 나미야비는 남극 지하에 위치한 본거지에 입항했다. 에리나를 제외한 두명은 접선을 위해 나갔다가 복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입항하자마자 정보부로 향했고, 에리나는 먼저 숙소에 들러 짐을 놓은 다음 디바이스 담당 구역을 찾았다. 디바이스 담당 빌딩 로비에 설치된 단말기에 '리 샤오롱'을 입력하고 통신 연결을 요청하고 기다리는데, 10분이 지나도록 대기한 다음에야 화면이 전환되었다. 연결된 통신 화면에는 부스스한 머리를 한 30대쯤 되어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 끈질기네, 대체 누구야? 지금 신형 디바이스 개발 중이라구. 변변찮은 일이면...
"샤오롱, 나에요. 잘 지냈어요?"
에리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마음을 누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래보여도 실력은 알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레이징 하트의 전담 디바이스 마이스터로 배정된 것이다. 원래 전담 마이스터 같은 건 상당한 고위 마도사나 둘 수 있지만, 에리나는 그 실력과 레이징 하트의 까다로운 특성을 감안하여 특별히 일선 대원임에도 전담 마이스터가 배정되었다. 다만 역시라고 할까, 뛰어난 디바이스 마이스터인 만큼 괴짜라는 점 때문에 이래저래 고생시키는 사람이었다.
- 오? 에리나잖아. 오랜만이네. 얼마만이더라?
"반년 전에 레이징 하트 오버홀 받고 처음이에요."
- 아, 그래 그래. 이렇게 직접 온 걸 보니 오버홀 받으려고 왔나 보지?
"역시 금방 알아보네요. 지금 시간 있어요?"
- 그럼, 그럼. 에리나와 레이징 하트라면 언제든지 와도 돼. 연구실 위치는 알지? 얼른 오라구.
그렇게 말한 샤오롱은 에리나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통신을 끊었다. 알았다고 말하려던 에리나는 종료된 통신 화면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너무 일방적이라니까..."
『하지만 master, 실력은 확실한 사람입니다.』
"그래, 그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널 맡기는 거지. 하지만 뭐랄까, 너무 마이 페이스 타입이라 대하기가 조금 어려워."
『...그 점은 부정할 수 없군요.』
"어디 보자... 우와, 정말 험하게도 휘둘렀구나. 어떻게 쓰면 인텔리전트 디바이스가 이렇게까지 손상되는 거야? 어지간한 암드 디바이스 이상으로 충격이 누적되어 있잖아. AI셋만 제외하고 전부 바꾸는 게 낫겠어."
"그 정도에요?"
"설명해주랴?"
"아, 아니에요..."
눈을 번뜩이며 돌아보는 샤오롱의 모습에 에리나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어쩐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지옥문을 여는 주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나가 설명을 사양하자 샤오롱은 입술을 살짝 삐죽이고는 다시 레이징 하트의 상태를 나타내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디바이스 모드의 상태창에서 거의 모든 부위가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살다살다 이렇게까지 디바이스 혹사시키는 녀석은 처음 봤다. 게다가 어떻게 된 게 매번 올 때마다 더 심해지냐? 응?"
"죄, 죄송합니다아..."
샤오롱이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내뱉는 말에 에리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스스로도 레이징 하트를 심하게 다룬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지적당하면 할 말이 없었다. 샤오롱도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은 추궁하지 않았고, 잠시 후 결과가 나오자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만 돌려 에리나를 쳐다보았다.
"오버홀 완료까지 최소 열흘. 길어지면 최대 2주. 다 되면 숙소로 연락 넣지. 나가 봐."
"네... 아, 저기..."
"응? 뭐야?"
"저... 수납된 PA도 이번에 정비맡길 생각이었는데요..."
주저하며 에리나가 대답하자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던 샤오롱의 손가락이 딱 멈췄다. 기분나쁠 정도의 침묵 속에서, 샤오롱은 천천히 분석기에 걸려있는 레이징 하트를 집어 들더니 에리나에게 냅다 집어 던졌다.
"꺅!"
기겁한 에리나가 레이징 하트를 두손으로 받아내기가 무섭게 샤오롱이 호통을 쳤다.
"그럴 거면 먼저 PA연구부부터 들렀어야 할 것 아냐! 당장 가! 그리고 PA 넘겨주고 냉큼 돌아와! 늦어지면 늦어지는 만큼 네 손해다!"
"네, 네!"
PA연구부에 엘즈리온을 맡기는 것은 그간 전투로 인한 손상 및 마모도 분석, 내장된 전투 기록의 분석을 위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엘즈리온 자체가 신형인데다 아직 프로토타입에 가깝기 때문에 해당 부서에게는 한번 한번의 전투 기록이 매우 중요했고, 그렇다고 전투 정보를 통신으로 전송하는 것은 노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넘겨주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엘즈리온의 손상은 그리 큰 편이 아니라 일주일 정도면 끝난다는 말을 들은 에리나는 다시 샤오롱을 찾아가 레이징 하트를 건넸다. 물론 또 한바탕 싫은 소리를 들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아... 겨우 나왔네. 그럼, 이제 어쩐다..."
샤오롱의 연구실에서 빠져나온-그냥 나온 게 아니라 정말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나는 앞으로 열흘간 할 일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마땅히 용무랄 게 없어서 난감했다. 사실 이번만이 아니라, 본거지에 올 때마다 이런 상황이긴 했다.
"우선 정보 열람실부터 가볼까?"
데이터 빌딩에 갖춰진 정보 열람실은 도서관 구역부터 언론매체 열람구역, 미게재 기사 열람구역 등으로 나뉘어 있는데, 에리나가 가려는 곳은 미게재 기사 구역이었다. 관리국에서 통제해서 실리지 못한 기사들은 보통 그대로 묻히게 되지만, ELF의 본거지에서는 인쇄 전 한번이라도 전산 입력이 된 내용이라면 거의 완벽하게 수집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나는 정보 열람실은커녕 빌딩 로비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오랜만이다, 에리나."
"윽, 제나르 씨?"
"이봐, 사람을 보고 '윽'이 뭐냐, '윽'이. 나 상처 받았어."
28세에 190cm가 넘는 건장한 남자가 상처 받았다는 말에 에리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제나르 세이지오는 ELF 행동부대에서 터프함의 대명사로 통하는 남자였고, 실제로 어지간한 거친 말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용건으로 넘어가죠. 이번에도, 에요?"
"물론이지. 내가 널 찾을 이유가 그것 말고 있겠냐?"
"제나르 씨, 혹시 동료들한테 싸움꾼이란 소리 듣지 않아요?"
"자주 듣지. 나한텐 칭찬이야."
"그러신가요..."
제나르는 어린 나이에 ELF 행동부대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로 자리매김한 에리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강자로서의 이야기로, 에리나가 본거지에 올 때마다 쫓아와 대련장으로 끌고 가곤 했다. 지난 두세번은 어떻게 잘 도망쳐다녔기 때문에 에리나도 조금 방심하고 있었는데, 데이터 빌딩 앞에서 기다린 것을 보면 아무래도 행동 패턴을 읽힌 모양이었다.
"자, 그럼 가자구. 일년도 더 지났으니 그동안 실력은 많이 늘었겠지? 기대되는데."
혼자서 싱글벙글하고 있는 제나르의 모습을 보고, 에리나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저기 말이죠, 죄송하지만 저 지금 디바이스랑 PA랑 전부 정비중이에요. 마법 장비는 아무것도 없다구요."
"뭐가 걱정이야? 대련장 가면 차고 넘치는 게 디바이스와 PA라구. 아무거나 빌려서 하면 되잖아?"
"다른 녀석들은 손에 안 익어요. 제나르 씨도 전용 장비 아니면 조금쯤은 위화감 있을 텐데요. 전 레이징 하트도 엘즈리온도 일반적인 쪽이 아니라 더 심한 편이라구요."
"괜찮아, 괜찮아. 나도 빌려서 하면 되니까. 똑같이 핸디캡 짊어지면 되잖아?"
"사람 말을 좀 들어요..."
결국 여차저차해서-라고 해도 사실상 끌려왔지만- 에리나는 대련장에서 제나르와 마주하게 되었다. 장비는 대련용 디바이스와 PA 디베즈. 제나르는 검형 암드 디바이스를, 에리나는 창형 암드 디바이스를 들었다.
"준비는 됐지? 시작한다."
"네, 언제든지요."
대련실 밖에는 둘의 모의전을 구경하기 위해 상당수의 행동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제나르는 AAA+랭크, 에리나는 AA랭크이지만 둘 다 S랭커까지 쓰러트린 경험이 있었다. 다만 에리나는 엘즈리온의 증폭 능력 덕을 본 상태였기에, 이번 모의전에서는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준비를 모두 끝내고 자세까지 잡은 두 사람이지만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둘 모두 근접전을 주로 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파고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주 보던 중, 제나르가 먼저 움직였다.
"합!"
자신의 각력에 PA의 근력 증폭까지 더해 제나르는 10여m의 거리를 한순간에 좁혔다.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제나르의 모습에 에리나는 황급히 디바이스를 틀었다. 그 순간 깡 하는 쇳소리와 함께 에리나의 발이 떠올랐다. 검형 디바이스에 실린 힘, PA에 의한 근력 증폭, 거기에 돌격력까지 더해지자 에리나의 힘과 체중으로는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읏?!"
에리나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으며 땅을 디뎠지만 곧바로 제나르가 추격해왔다. 이어진 공격에서는 공중에 띄워지지는 않았지만, 에리나는 공격할 틈을 잡을 수가 없어 계속 수세에 몰렸다.
'힘도 좋은데다 속도도 느리지 않아. 게다가 쉬지 않고 몰아 붙이니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어! 전보다 더 어려워졌는데.'
한편 제나르도 에리나의 방어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그간 고성능 PA에 의존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몸놀림도 좋았던 것이다.
'제법이군. 이젠 전처럼 방어할 때 밀려나지 않는 건가? 격돌시의 충격을 잘 분산시키고 있어. 이거...'
멈추지 않고 에리나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제나르는 웃었다. 난폭해보이는 미소였다.
"정말 재미있겠는데!"
다음 순간, 제나르는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몸을 낮췄다. 뭔가 있다는 생각에 에리나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보다 제나르의 행동이 빨랐다. 마치 뛰어오르듯이 바닥을 박차며 에리나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두른 것이다.
"꺄악!"
순간적으로 스러스터까지 개방해 들어온 일격을 받은 에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디바이스로 막아내긴 했지만 몸이 떠오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고, 그 틈을 노려 또다시 제나르가 달려들고 있었다.
검형 디바이스가 횡으로 날아들었다. 절체절명이었다.
"뭣?!"
승리를 예감하며 검을 휘두르던 제나르는 기겁했다. 에리나가 몸을 한껏 뒤로 젖히며 옆구리로 날아드는 검을 가슴 위로 통과시키더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뒤로 재주를 넘으며 발차기까지 날린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돌격을 멈춘 제나르는 턱을 스쳐 지나간 에리나의 킥에 식은 땀을 흘렸다. 만약 그 발차기를 맞았다면 자신의 돌격력까지 더해져 완벽한 크로스 카운터가 나올 뻔 했다. 하지만 제나르는 더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다. 재주를 몇번 더 넘으며 거리를 더 벌리려는 에리나를 향해 제나르는 디바이스를 한번 더 휘둘렀다.
"루프트메서(Luftmesser)!"
제나르의 외침과 함께 압축 공기의 칼날이 에리나에게 날아왔고, 방어 술식을 구축할 여유가 없는 에리나는 다시 한번 몸을 굴리며 피해낼 수밖에 없었다.
"?! 칫!"
루프트메서를 피해낸 에리나는 갑자기 혀를 차며 재빨리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방금 에리나가 서 있던 지면이 하늘색으로 빛나며 몇개의 고리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트랩형으로 설치된 바인드 마법이었다. 바인드가 발동되기 직전 자리를 피한 에리나는 왼손을 제나르 쪽으로 뻗으며 외쳤다.
"체인 샷(Chani Shot)!"
에리나의 손 앞에 붉은 색 마법진이 떠오르며 탁구공만한 마력탄이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하지만 제나르는 에리나가 손을 내밀 때 이미 뒤로 뛰어 물러서며 방어마법을 발동시킨 상태였고, 체인 샷은 고스란히 실드에 가로막혔다. 그런데도 에리나는 마법을 멈추지 않고 계속 쏘고 있었고, 제나르는 의아함을 느꼈다.
'뭐야, 어째서 계속 쏘는 거지? 막히고 있으면 다른 수를 써야... 그렇군!'
제나르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실드를 해제했고, 그순간 에리나의 체인 샷이 제나르의 후방에서 날아든 무언가와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체인 샷을 날리는 동안 에리나가 유도 조작탄을 만들어 제나르의 등 뒤로 움직였던 것이다. 허공에 몸을 띄운 제나르는 에리나가 어느새 포격 자세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튕겨 나오는 탄피. 형체를 천천히 갖춰가던 포격용 마법진이 카트리지 로드와 함께 완전한 형태를 드러냈다.
"디바인 버스터(Divine Buster)!"
붉디 붉은 마력기둥이 디바이스에서 쏘아져나갔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포격을 보며 제나르는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검을 한껏 등 뒤로 잡아당기며 카트리지 로드.
"슈베르트 슈니트(Schwert Schnitt)!"
"말도 안 돼!"
제나르의 대응법에 에리나는 경악했다. 카트리지를 로드했다고는 해도 참격용 마법으로 무려 포격을 '갈라'버린 것이다. 정확하게 가운데를 베인 디바인 버스터는 좌우로 나뉘어 대련실 벽면에 충돌했고, 그 충격은 약하게나마 대련실 전체를 흔들 정도였다. 에리나가 상상도 못한 상황에 멍해 있는 사이, 제나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리나 쪽으로 내리 꽂혔다.
"윽!"
에리나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피했지만, 이번엔 더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추격해 오는 제나르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카앙 하는 금속음과 함께 검과 창이 맞부딪쳤다. 원래대로라면 10살 가까이 어린데다 아직 10대 중반인 에리나가 밀려야 정상이겠지만, PA를 입으면 거의 동등한 힘을 낼 수 있기에 지금은 대치 상태였다. 헬멧과 바이저 너머로 에리나를 바라보던 제나르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 이거 정말 예상 밖인데?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어. 엘즈리온을 받고 그 성능에만 매달려서 실력이 줄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 기우였구만."
"후우, 그러는 제나르 씨는 여전하시네요. 한번 타이밍 놓치니까 도저히 빠져나올 틈이 없어요. 게다가 아까 그 참격은 대체 뭐에요?"
"아, 멋있었어? 그거 고안하느라 꽤나 머리 좀 썼는데 말이야."
"잠시지만 내가 상대하는 게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어요."
"하핫! 그거 칭찬으로 듣지. 그건 그렇고, 계속 할 거지?"
"가고 싶다고 해도 안 보내주실 거잖아요."
"잘 아는데!"
대련실에 또다시 충돌음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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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인물들... 명색이 마도사인데, 애들 전투법이 전투법이다보니 마법보다는 근접전 위주로 전개되는군요.
...이래서야 양판소 전투랑 다를 게 없잖아 OTL
그럼 다음 편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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