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 이 팬픽은 나노하 StS 이후 약 70년이 지난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요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약 20분 후, 모의전을 끝낸 에리나와 제나르는 PA를 디바이스에 수납하고 대련장을 나왔다. 과연 ELF라고 할까, 꽤나 큰 진동을 일으킨 공격과 충돌이 몇번 더 있었지만 대련장에는 큰 손상이 없었다. 그 사실에 감탄하며 물품 반납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공간 모니터로 대련을 지켜보던 대원 몇몇이 에리나를 보더니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이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기분이 상한 에리나가 살짝 눈쌀을 찌푸리자 제나르가 에리나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축하한다, 이제 너도 공인 괴물이구나."

"안 그래도 찜찜한 사람한테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모르긴 몰라도 저 녀석들, 지금 아마 너랑 나랑 동급으로 놓고 있을걸? 다들 나보고 괴물 괴물 하니까 너도 괴물 대우겠지."

"네에?! 그럴 수가!"

에리나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대련을 거의 대등-어디까지나 '거의'다. 완전히 대등하게 맞서는 건 무리였다-하게 했다고는 해도 아직 10대 중반인 소녀에게 그런 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황당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데, 제나르의 한마디가 더해졌다.

"억울하면 그냥 대련에서 적당히 패배선언 하지 그랬냐. 그랬으면 괜찮았을텐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화를 참지 못한 에리나는 제나르의 정강이를 걷어찼고, 채인 곳을 붙잡고 쩔쩔매는 제나르의 모습을 본 대원들은 역시라는 표정을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나가 대련장 시설에 갖춰진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나왔을 때, 제나르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나와 다른 대원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표정이 약간 굳어있는 것이 좋은 화제는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일까 싶었을 때 제나르가 에리나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이 친구 담당지역 얘기 좀 듣고 있었어.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아."

"심각하다구요?"

"그래, 이대로라면...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지?"

대원의 물음에 에리나는 자기 소개가 아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리나가 검은 마녀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고 해도, ELF라는 조직 자체가 결코 소규모가 아니기 때문에 에리나의 본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에리나 레이벨입니다. 에르트 시에서 활동하는데 디바이스 오버홀 때문에 들렀어요."

"아, 그런가. 난 인딜 미탈릭. 세르나크 시 담당이지."

"세르나크라면... 파리우드 인근이었죠?"

"맞아, 세르나크도 파리우드도, 상당히 위험해."

이어지는 인딜의 설명은 에리나에겐 충격적이었다. 관리국은 에르트나 파리우드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에르트의 거의 모든 중소 도시에 계엄령을 발령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중소 도시에서는 관리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때문에 반 관리국 시위도 에르트 시보다 빈번했고 규모도 컸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못한 에르트 본부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해서 준 전시 체제로 전환했고, 이 대처가 또다시 역효과를 불러 일으켜 각지에서 관리국 관련 시설이 습격받거나 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지금 에르트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러니까 한 20년 쯤 전이지, 전쟁이 막 끝났을 때와 굉장히 비슷해. 난 아직 어렸을 때지만, 그 때에도 에르트 곳곳에 있는 관리국 임시 시설이나 국원들이 습격받는 일이 많았지. 하지만 그 때와 또 상황이 다른 건, 계엄령 선포나 각지의 반 관리국 집단 행동을 언론이 일절 보도하지 않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관리국이 언론을 쥐고 흔드는 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잖아요..."

에리나의 말에 인딜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더욱 큰 문제가 되지. 관리국이 언론을 완전히 틀어막고 있는 동안, 도시 하나가 초토화될 수도 있어."

"예? 서, 설마..."

에리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그런 일까지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딜의 표정은 진지했다.

"굳이 지금처럼 꽁꽁 묶어놓을 필요도 없어. 정보 조작만 조금 하면 다른 도시들의 시위나 폭력 진압은 시민들의 폭동과 관리국의 질서 회복이라고 알려질 수도 있지. 충분히 가능해. 실제로, 세나르크에서 조금 떨어진 헤파일이라는 소도시가 지금 딱 그 모양이다. 테러리스트의 본거지라고 공표된 직후 관리국의 집중 공격으로 그곳은 지금 폐허가 됐어. 간신히 탈출한 대원 몇명도 지금 중상이라 저승 문턱에서 오락가락 하는 상황이야."

"맙소사..."

에리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자신은 에르트에서만 활동했기에 행성 전체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오직 언론과 정보 검색만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에르트 시 자체는 제법 안정된 모습이었고, 공식 발표되는 타 도시의 소식은 에르트 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에리나는 지금까지 관리국과 ELF의 산발적이고 장기적인 대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인딜의 말은 그 생각을 산산이 부수었다. 에르트 행성 전체는 현재 사실상의 전쟁 상태이고, 오직 에르트 시만이 고립되어 온실 속의 낙원과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에리나의 표정을 본 인딜은 작게 혀를 찼다.

"지금 네 반응을 보니 에르트 시의 상황이 대충은 짐작이 되는군.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테지. 이번에 돌아가면서 데이터 좀 모아서 가져가라. 에르트 쪽 녀석들도 그렇게 정보를 차단당해서는..."

인딜은 뒷말을 흐렸지만 에리나는 인딜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후로 열흘 동안 에리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정보 열람실을 들러 에르트 전역의 사회 데이터를 찾아보았고, 그 결과에 몸서리를 쳤다.

"파리우드에서 대 테러 작전을 빌미로 1개 거주구 완전 소개, 3시간 후 거주구 붕괴 - 비보도. 나이리드에서 검문을 빙자하여 여성을 성추행하던 국원을 민간 마도사가 제압, 이후 해당 마도사가 소속된 마도사 단체는 불법 행위 적발로 해체, 해당 마도사는 리미터가 걸려 F랭크로 하락 - 비보도. 관리국, 헤파일에서 테러 집단 본거지 발견 공표, 교전 결과 헤파일 초토화 - 일부 보도. 세나르크와 헤스턴에서 디바이스 소지법 및 마도사 등록법 반대 시위, 관리국 무력 진압으로 7명 사망, 30여명 중경상, 현재 세나르크는 시민 봉기 상태, 관리국은 모든 운송수단을 차단하고 전송 탐지 결계 설치 - 시위 및 중경상자만 보도..."

상상 이상이었다. 인딜이 말한 것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불과했던 것이다. 에르트 행성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관리국과 에르트 인-ELF와는 관련없는 사람들-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결과는 매번 관리국의 진압과 엄청난 민간 피해, 그리고 정보 통제로 이어졌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정보를 검색하던 에리나의 손이 멈췄다.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동시에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어느샌가 빠드득 하고 이까지 갈고 있었다. 지금 에리나가 보는 기사는 오살이라는 소도시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저녁무렵,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너던 모녀가 뺑소니 차량에 치어 어머니는 현장에서 즉사, 딸은 중상. 사고 당시 딸이 목격한 자동차 번호를 이용해 자동차 수리점을 탐문 수사한 결과 용의자 발견. 하지만 뺑소니 사고는 돌연 보험금을 노린 가족 자해 협박단의 사건으로 바뀌고, 살아남은 딸은 뺑소니 피해자에서 협박 가해자로 낙인찍힘. 사고 차량 운전자가 관리국 고위 인사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딸은 법정에서 운전자를 공격, 중상을 입히고 살인 미수 현행범으로 체포. 며칠 후 딸은 임시 수감중이던 감옥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자살로 공식 발표됨. 그러나 시신의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와 골절이 있었고 성폭행 흔적까지 발견되었다는 부검 결과가 알려지며 시민 봉기 촉발. 관리국에서는 무장 국원 투입 및 강경 진압으로 대처, 현재까지 대치 상태. 추정 사망자 70여명, 부상자 800여명...]

에리나의 머릿속에서, 두터운 검은 커튼을 걷어내며 낫지 않는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3년전, 신력 142년 10월.

에리나는 할머니인 비비오 T. 스크라이어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서 미드칠더로 향했다. 아버지는 이미 9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회사 업무가 잔뜩 밀려있는데다 직계 존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휴가도 얻지 못해서 함께 갈 수 없었다.
미드칠더 북부의 임해 제9공항에 도착한 에리나는 곧장 비비오의 장례식이 치뤄지는 베르카 자치령으로 향했다. 원래는 좀 여유를 두고 도착할 생각이었지만, 에르트 인이라는 점 때문에 여권 준비와 출국 수속에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장례식날 당일에 도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라고 해도..."

사실 에리나는 비비오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었다. 물론 차원간 통신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있지만 그나마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몇번 한 게 전부였고, 아버지 사후에는 연락이 사실상 끊긴 상태였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에는 연락해도 안 받았으면서... 지금 와서..."

베르카 자치령의 공동 묘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에리나는 작게 투덜거렸다. 또래보다 좀 야무지다고는 해도 아직 13살, 이런저런 불평이 많을 나이였다.
장례식이 막 끝난 집안이 있는지, 묘역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 남자들을 지나쳐 연락받은 장소로 가자, 상복인지 수도복인지 잘 분간가지 않는 옷을 입은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구덩이 앞을 차례로 지나가며 꽃을 던지고 있었다. 벌써 관까지 다 내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소원하다고는 해도 손녀인 자신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장례식을 진행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진 에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꽃을 다 던지고 제자리에 선 사람들 중 한 여성이 가까이 다가온 에리나를 보고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 혹시... 에리나 레이벨 양인가요?"

"네, 그런데요? 어떻게 아셨어요?"

에리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직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지도 않았고, 10년 가까이 연락이 없었으니 비비오가 아는 사람 중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때문이었다. 에리나의 반문에 그 여성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렇군요. 비비오 님께서 손녀분이 비비오 님의 어머님을 쏙 빼닮았다고 하셨거든요. 마지막으로 본 게 오래 전이라 확신은 못하지만, 아마 지금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똑같을 거라며 웃곤 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에리나 양을 보고 싶어 하셨는데..."

"할머니...가요?"

눈앞의 여성이 말하는 내용에 에리나는 멍해졌다. 그간 통신은 커녕 메일 한통 없어서 틀림없이 자신과 어머니를 내친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며칠 전까지 만나고 싶어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면 왜..."

"잠시만요. 궁금하신 건 나중에. 지금은 할머님을 보내드려야죠."

"아, 네..."

급히 오느라 비비오에게 바칠 꽃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에리나는 가장 먼저 흙을 관에 뿌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돌아가며 흙을 한번씩 뿌린 후, 에리나는 여성과 함께 비비오의 묘를 등졌다. 마음이 복잡해진 에리나의 표정이 어두웠는지, 여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마 지난 10여년간 왜 비비오 님이 에리나 양과 연락을 끊고 사셨는지, 그게 제일 궁금하겠죠. 우선 그것부터 설명드릴게요."

거기서 일단 숨을 고른 여성은 표정을 약간 굳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결코 놀라선 안 돼요. 적어도 표정으로 드러내선 안 돼요. 주변을 돌아봐도 안 돼요. 내게 묻는 것도 안 돼요. 할 수 있겠어요?"

"네? 갑자기 무슨..."

"네, 아니오. 둘 중 하나만 말하세요."

"으... 네. 장담은 못하지만..."

"좋아요. 그럼 잘 들어야 해요. 비비오 님은 그간 연금 상태였어요. 에리나 양의 증조부이자 비비오 님의 아버님 되시는 유노 스크라이어 님께서 돌아가신 후 계속. 베르카 자치령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는 게 금지됐죠. 그렇게 지시한 건 당시 시공평의회 의장인 페르즈 콜틴이에요. 오늘 여기 오면서 묘역 안에서 검은 양복의 남자들 여럿 봤죠? 그들이 관리국에서 파견된 감시원들이에요."

아직 어린 에리나에게 너무나도 낯선 세상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듣고는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는 있을지, 에리나 스스로도 의문이었지만 여성은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콜틴 당시 의장이 이끌던 파벌과 유노 님의 입장이 대립되는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비비오 님은 유노 님을 무척 존경했고, 그 사고방식도 흡사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 베르카의 성왕 폐하이시기도 하니, 정치적 영향력도 굉장해서 관리국으로서는 껄끄러운 상대였겠죠."

복잡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비비오 님께서는 평범하게 살길 바라셨고, 우리도 그 의견을 존중해서 직접적으로 관리국과 대립하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관리국에선 불안했는지 비비오 님께 족쇄를 채운 거죠. 베르카 자치령에서 나오지만 않으면 상관없지만, 나오면 자치령의 안위는 책임질 수 없다고. 아무리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비비오 님은 혼자, 베르카 마도사는 실력은 뛰어나지만 미드칠더 마도사에 비하면 그 수가 절대적으로 열세에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그나마 양자로 들이신 에리나 양의 아버님, 에른스트 씨와의 연락은 허용받았지만, 그마저도 에른스트 씨가 돌아가시면서 끊어진 거에요."

거기까지 말한 여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에리나와 여성은 어느새 묘역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뺀 여성은 에리나를 향해 돌아섰다.

"자, 이제 왜 그간 연락이 없었는지 알게 됐나요?"

"그건 그런데요... 뭔가 다른 것들이 또 여러가지가..."

에리나의 반응을 본 여성은 다시 살짝 웃더니, 에리나의 손을 잡고는 그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뭔가 싶어 손을 펴보니, 거기에 있는 것은 붉게 빛나는 구슬이었다.

"이게 뭐에요?"

"비비오 님께서 갖고 계시던 인텔리전트 디바이스, '레이징 하트·피어싱'이에요. 에리나 양께 드리라고 하셨거든요."

"저한테요?"

"네, 마스터 등록은 어렸을 때 에른스트 씨가 보내온 마력 패턴을 이용해서 마치셨대요."

"그, 그럴 수도 있어요?"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시는 건 어때요?"

"네?"

당황해서 에리나가 반문하는데, 붉은 구슬에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가능합니다. 미리 입력된 마력 패턴과 실제 접촉으로 분석된 마력 패턴을 대조, 방금 마스터 등록 과정을 마쳤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master.』

"...와아, 정말 되는구나."

놀랄 일이 자꾸만 이어져서인지, 에리나의 어조는 어쩐지 무덤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때, 에리나는 감시원들의 존재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이거 주셔도 되는 거에요? 감시원들도 볼 텐데?"

"상관없어요. 비비오 님도 돌아가신 마당에 유품을 유족에게 전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런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리나를 보며, 여성은 살짝 거리를 벌렸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해요. 사실은 저한테도 감시원이 한둘 쯤 붙어있거든요. 비비오 님과 가깝게 지낸다고."

"아, 저기,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아, 아직까지 이름도 안 여쭤봤네요. 괜찮으시면..."

"세림. 베르카 성왕 교회의 기사 세림 그라시아에요."




세림과 헤어진 에리나는 그대로 공항으로 직행했다. 원래 예정은 1박 2일이었지만 출발이 하루 늦어지는 바람에 당장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학교에 제출한 결석계도 이틀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부랴부랴 돌아온 에리나가 에르트 우주공항에 도착한 건 밤 9시가 넘어서였다.

"에리나!"

"아, 엄마!"

공항 정문을 나오던 에리나는 주차장과 공항 건물 사이의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는 어머니,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회사 일이 끝나고 바로 왔는지 정장 차림이었다. 하루도 채 떨어져있지 않았지만 크리스티나는 정말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고, 잠시 후 보행자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자 얼른 횡단보도를 뛰어왔다. 어머니의 미소를 보며 에리나도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그 때였다, 횡단보도가 새하얀 빛으로 물든 것은.


<strong>부아아아앙쾅털썩툭</strong>


에리나는 방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똑똑히 보았다/이해하지 못했다/머릿속에 새겼다/부인하려 했다.
조금 전까지 밝게 웃으며 뛰어오던 크리스티나는 지금 붉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는 비싸보이는 스포츠 카가 범퍼와 보닛이 무참히 찌그러진 채 서 있었다. 헤드라이트의 빛에 눈이 부셔 운전자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에리나의 귀는 신기하게도 운전자가 내는 소리를 똑똑히 알아들었다.

'칫.'

다음 순간, 스포츠 카는 뒤로 조금 후진하는가 싶더니 방향을 약간 틀어 그대로 전진했다. 아직 바닥에 쓰러져 있던 크리스티나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차의 범퍼 밑으로, 바퀴에.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 없었다. 에리나 자신의 것인지, 짓밟힌 크리스티나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에게 달려가 안아 일으킨 에리나는 어머니가 살 수 없다는 것, 아니 이미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습은...

"으으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에리나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믿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날 보고 웃고 있었는데, 왜? 웃으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는데, 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 차에 치어 쓰러졌는데, 왜?


<font size="4"><span style="font-weight: bold;">왜, 엄마를 밟고/죽이고/부수고/찢고/터뜨리고/없애고 가는 거야?</span></font>


"죽어버려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엇!!!"

증오에 찬 눈빛이 멀어져가는 스포츠 카를 향했다. 순간, 에리나의 손가방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며 에리나의 주위에 붉은 광구 몇개가 떠오르더니 쏜살같이 스포츠 카를 쫓아 날아갔다. 날아간 광구는 스포츠 카의 타이어와 엔진을 맞췄고, 스포츠 카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그 모습을 본 에리나의 발밑에 마법진이 구성되더니 전방에 포격 마법진이 떠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에리나의 외침과 동시에 피처럼 붉은 포격이 스포츠 카를 향해 날아갔다. 폭음, 진동, 연기. 그 연기 속에서 실드 마법에 둘러 싸인 스포츠 카가 모습을 드러냈고, 운전석에서 젊은 남자가 내렸다. 관리국원이었다.

"나 참, 별 미친 꼬마 다 보겠네. 야, 이 미친 꼬맹아. 너 제정신이냐? 달리는 차에다 공격 마법이라고? 대형사고 났으면 어쩌려고 개짓거리야!"

적반하장이었다. 에리나의 품에 안긴 크리스티나의 시신은 안중에도 없는지, 남자는 부서진 자기 차만 자꾸 돌아보며 에리나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붓더니 급기야 에리나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렸다. 지지대를 잃은 크리스티나의 시신이 털썩 하며 땅에 떨어졌지만, 남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에리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아악! 꺅! 아아! 큭!"

13살에 불과한 에리나가 비명을 지르는데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계속 주먹을 휘두르더니, 그래도 성에 안 차는지 땅에 내팽개치고는 발길질까지 시작했다.

"악! 으으... 커헉!"

"하여간 이래서 에르트 새끼들은 안 된다니까. 뭐든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들어. 야, 이 또라이 꼬맹아. 억울하면 변호사를 불러. 괜히 애꿎은 사람 잡지 말고! 재수가 없으려니까. 퉤."

절망감과 고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에리나는, 침을 뱉고 뒤돌아서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남자가 떠나고 잠시 후, 아픔을 참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에리나의 눈에 주변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크리스티나의 시신이 비춰졌다.

"엄마......"




사건은 '규정 속도 이하로 운전 중이던 국원의 차량 앞으로 무단 횡단을 한 크리스티나가 튀어나와 치인 것'으로 정식 공표되었고, 남자가 에리나를 폭행한 것은 은폐된 반면 에리나가 국원을 공격한 것은 그대로 공개되었다. 당시 목격자도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관리국에게 입막음 당했다. 에리나는 살인 미수로 기소되었지만,  초범인데다 우발적이었고 당시 어머니를 잃은 에리나의 정신 상태가 극히 불안정했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인 국원이 관대하게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 인정되어 '법적 후견인이 붙은 상태에서 1년간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쪽의 친척도 얼마 없는데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후견인 지정을 꺼렸다. 관리국에 밉보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진해서 후견인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 페이였고, 이후 페이의 권유를 받은 에리나는 ELF에 입단하게 된다. 그것이 2년 전의 일이다.




쓰라린 기억을 떠올린 에리나는 입술을 깨물다가 문득 짭짤한 맛이 입안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만져보니 너무 심하게 깨물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에리나는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으며 단말기를 종료했다. 낡은 손수건의 구석에는 To Erina, From Christina 라는 자수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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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쓰려고 했던 에리나의 과거 편입니다. 어떻게 레이징 하트를 얻게 되었나, 어째서 ELF에 입단하게 되었나에 대한 이야기지요. 물론 여기서도 레이징 하트가 오리지널인지 레플리카인지는 안 나왔습니다. 엔딩까지 가면 밝혀지려나 아니려나 (...)

쓰다보니 약간 억지성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초기 구상도 저거였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만큼 분노를 일으키는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요.

이제 슬슬 클라이막스 돌입합니다. 중간에 에피소드 하나 정도 더 넣을까 말까 아직 생각중.


그건 그렇고, 이번 이야기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써지더군요. 다른 편들은 자꾸만 쓰다 멈추다 쓰다 멈추다 하다보니, 한편 완성하는데 며칠씩-보통 일주일- 걸립니다만 이 녀석은 하루만에 주르륵...
역시 글쟁이도 자신의 글뭉치 안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따로 있다 이거겠죠.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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