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글세... 넌 왜 라고 생각하나?"

"인간에 대한 기대감과 그것을 부정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 그리고 증오... 맞나?"

"잘 아는군. 그렇다면 너도 이해하고 있겠는걸. 그러면 막지 말라고."

"아니, 난 막아야겠어. 아무리 수많은 절망이 있다고 해도 단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파괴해서는 안 돼."

"하, 하하핫, 희망? 그런 게 있기는 한가?"

"없다고 할 셈인가?"

"없어. 적어도 내가 겪어온 바에 의하면, 인간에겐 희망 따윈 존재하지 않아. 존재할 이유도 없어. 희망이 있다면 지구 그 자체에 있겠지."

"인간도 지구의 자식이다."

"아아, 그래. 어머니를 죽여 그 살을 먹고 뼈를 갈아 보약으로 마시는 배은망덕하기 이를 데 없는 불효자식이지."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절대 다수가 그렇다. 또한 그렇지 않은 인간은 영향력이 없지. 인간은 지구에게 있어, 생태계에 있어 불필요해. 아니, 오히려 없는 게 낫지."

"너 또한 인간이 아닌가?"

"풉, 푸하하하하하! 인간? 너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이거 정말 웃기는군. 천년을 넘게 '존재'해오면서 이렇게 웃기는 상황은 처음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도 아니고 네가 우리를 인간이라 지칭하다니, 정말 황당한데."

"...그래, 분명 지금 우리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지. 하지만 한때는 인간이었어."

"그래, 그래. '한때'는 그랬지. 그리고 지금은 인간만도 못한, 무가치한 존재다."

"왜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고 인간을 증오하게 된 거지?"

"이유라면 몇가지가 있지만 우선 세가지만 들어볼까. 첫째가 우리들의 존재 의의. 둘째가 인간의 생활 방식. 셋째가 인간의 사고 방식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배경을 떠올려 봐. 인간들의 문명과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기계도 생명도 아닌, 인과에서 벗어나버린 존재가 우리다. 우습지도 않지. 도대체 인간의 문명과 역사가 뭐기에? 그런 건 별의 역사,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해. 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에게만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들이 인정한 것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그 생각의 극단이 바로 우리란 말이야.
두번째로 넘어가서, 인간의 생활 방식을 볼까. 오직 파괴, 파괴, 파괴 뿐이야. 생산성이나 순환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아.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자르고, 돌을 깨고, 땅을 판다. 강의 범람을 막는다며 강의 흐름을 바꿔 생태계를 파괴한다. 심지어 예전에는 길을 낸다며 산을 뚫고 멀쩡한 땅에 쓰잘데기 없는 물길까지 만들었지. 그저 자기들 편하자고 무조건 부수고 보는 게 인간이다. 효용?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효용이 더 클까, 지구에게 가져다주는 손실이 더 클까?
셋째, 이게 제일 문제야. 이미 언급했지만, 모든 걸 자기 위주로만 보지. 무조건 인간지상주의야. 아까 말했던 강의 흐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걸 되돌린답시고 또 한번 뒤집어 엎어서는 완전히 관상용으로 만들어놓는 일도 있었지. 그래놓고는 자랑해. 세계 평화를 외치면서, 자신들은 항상 상대보다 강해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어야만 해. 우방국이라고 하면서 서로 스파이를 심거나 속국으로 삼기 바쁘지. 남을 위하는 척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게 우선이야. 이걸 지구만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별에서도 반복하겠다고 우주로 나가려는 게 인간이다. 안 그런가?"

"하지만... 난 아직 인간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어. 인간을 포기할 수 없어."

"하, 웃기지 마! 우린 이미 천년도 더 전에 인간 이하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했어! 우리의 몸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에너지 전달 용액이고, 우리의 몸을 움직이는 건 근육이 아니라 금속 섬유이고, 우리의 몸을 지탱하는 건 뼈가 아니라 특수 금속이고, 우리의 가슴에 있는 건 심장이 아니라 영력(靈力) 집결체다! 심지어 유일하게 본래 우리의 육체였던 뇌에도 초 대용량 저장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헛소리 하지 마! 우리는 무의미한 존재다! 무가치한 존재야! 나의 이 증오와 배신감과 절망을 담아, 인간에게 멸종이라는 최대의 선물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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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어느 쪽인지는 대충 감이 잡히실 거라고 봅니다. (...)

저 대화 부분은 구상한지 몇년이 지났지만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그 소설의 시발점이 바로 저 대화 부분이기 때문에... 문제는 정작 본편이 진행되질 않고 있다는 거지요. 아아, 이놈의 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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