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장님! 포격이 통하질 않습니다!"
"그래도 계속 쏴! 여기서 발을 묶어야 한다! 제길, 공군은 어떻게 됐나!"
"곧 도착한답니다! 아, 저기 왔습니다!"
서기 20XX년 1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맙소사, 저건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거야..."
"대대장님, 놈이 이쪽으로 옵니다!"
"일시후퇴! 물러서서 전열을 재정비한다! 통신병! 공군에다 기화폭탄 요청해!"
하늘에서 알렉산드리아 시내로 떨어진 정체불명의 '알' 형태의 거대한 물체. 인위적으로 보이는 그 형태와, 지면에 낙하하면서 감속했다는 사실에서 인류는 지구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극히 일부를 제외한 전 인류는 이른바 '외계인'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알'이 열릴 때까지 그 흥분은 계속되었다.
"기화폭탄 투하한답니다!"
"전 차량 포격 중지! 전속 후퇴!"
'알'에서 나온 것은 외계인도, 그렇다고 지구인도 아니었다. 처음 보인 것은 높이 40m쯤 되어보이는 거대한 로봇이었다. 4개의 다리와 2개의 팔을 가진, 말하자면 켄타우로스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손 대신 팔 끝에 달린 것은 송곳처럼 뾰족한 끝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온 것은 높이 1m 정도의, 다리 6개 달린 로봇이었다. 이것은 다리 숫자만 빼면 거미처럼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로봇 1대와 거미로봇 30대를 내보낸 '알'은 다시 문을 닫았고, 한동안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저 놈은 대체 뭐야! 왜 흠집도 안 나냐고!"
"이리로 옵니다!"
"제길, 전 차량 포격!"
도저히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처음에 가졌던 기대감과 흥분은 빠르게 식어갔고, 이집트 정부는 만일을 대비해 알렉산드리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알'과 로봇들을 포위했다. 얼마 후 '알'에서 어떤 전파가 인공위성을 통해 강제로 지구 전역에 송출되었다. 하지만 전파의 특징이 지구의 통신체계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전파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독자적인 장비를 갖춘 어느 아마추어 방송팀에서 영상의 일부를 간신히 확인했을 뿐이었다. 알아낸 영상에는 온통 새하얀 배경에 나이 지긋한 남자가 무어라 말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음성은 잡아낼 수 없었고, 노이즈가 심해 입모양도 확인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전파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막연한 추측으로 성명 비슷한 것을 하려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오고갔다.
"제압에 나섰던 전차부대와 공군이 전멸했습니다. 목표는 현재 카이로 방면으로 이동중입니다."
"포탄을 그렇게 많이 쏟아부었는데, 기화폭탄까지 맞았는데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단 말인가..."
"해안으로 유인한 다음 해군 전 함정의 함포까지 동원해서 포격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마저 통하지 않을 경우엔 완전히 끝장일세. 게다가 지금 상황을 봐서는 통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괴전파가 송출된지 4일째, 지구 시간으로 80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그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던 로봇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와 전차들을 향해 거미로봇들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눈-사실은 시각 센서-을 붉게 빛내며 접근하는 거미로봇들의 모습은 위협적이었고, 도중에 버려져있던 민간인 차량들과 건물을 거침없이 부수며 다가왔다.
최초발포가 명령에 의해서 행해졌는지, 겁에 질린 병사가 반사적으로 쏘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밝혀낼 수도 없었다. 발포가 시작되고 10분후, 처음으로 교전을 시작한 부대는 지휘관까지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명 백한 적대행위에 이집트 군은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할 뿐이었다. 거미형 로봇은 수류탄까지 막아내는 장갑에 전차포를 피해내는 민첩함까지 갖추고 있었고, 거대로봇은 미사일을 맞아도 흠집하나 안 나는 장갑을 두르고 있었다.
"UN에 지원을 요청하면..."
"너무 늦습니다. 이사회를 소집하고, 표결에 들어가고, 파견 규모와 파견국을 결정하는 사이에 카이로는 지도에서 지워질 겁니다."
"남은 건..."
막대한 희생을 낸 끝에 거미형 로봇을 모두 파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거대로봇은 전투기의 미사일과 기화폭탄까지 맞고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알렉산드리아는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은 채 황량한 폐허로 변해있었고, 살아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로봇은 카이로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나..."
"상심치 마십시오, 대통령님. 작전지역은 카이로에서 50km 넘게 떨어진 지역입니다. 카이로의 피해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자국 영토에 핵공격을 가한 나라는 역사상 없었지. 이건 악몽이야..."
이집트 정부는 자력으로 로봇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 비밀리에 몇몇 핵보유국과 긴급연락을 취했고, 결국 한 국가에게 모종의 대가를 치른 대신 전술핵탄두 2발을 제공받게 되었다. 그리고 '알'이 남아있는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70km 떨어진 지점에서 핵이 폭발했다.
『...이집트 대통령이 한국 시간으로 오늘 저녁 7시에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사임의 이유는 얼마전 발생한 괴로봇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실패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전문가들은...』
《그래도 살아간다》 - 1. 되돌릴 수 없다
20XX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 에어즈락(Ayers Rock).
얼마 전 우주에서 내려온 괴로봇에 의해 알렉산드리아가 폐허가 되고 이집트 대통령이 사임까지 하는 뒤숭숭한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한 동양인 청년이 에어즈락을 등반하고 있었다. 참고로 지금 시간은 밤. 시간이 시간인지라 등반객은 물론, 등반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는 애보리진들도 안 보였다. 그런 한밤중에, 소형 라이트를 하나 들고는 높이 300m가 넘는 암벽을 오르고 있다는 얘기다. 철제 가이드가 설치된 등반코스를 따라 오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아... 하아... 이, 이거... 힘드네..."
가이드가 설치되어 있다고 해도 일단 경사가 보통 가파른 게 아니다. 게다가 어두워서 앞이 잘 안 보이니 체력 소모는 더 크기 마련이다. 덕분에 청년은 반도 못 올라와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그냥... 해 뜨면... 같이... 올라... 올 걸... 그랬나?... 하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세환이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사실 에어즈락에서 일출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었다. 등반 투어 일정을 그대로 따른다면 해가 뜬 다음에나 에어즈락에 오를 테고, 주변에 사람이 바글바글...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게 뻔했다. 그래서 결국 오밤중에 도둑등반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모하다고 할까, 어이없다고 할까, 함께 온 친구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냥 해뜰 무렵에 오르라고 했지만, 세환은 굳이 위에서 일출을 봐야겠다며 지금 등반로를 오르고 있었다.
"하아... 다... 올라왔다... 하아... 하아..."
세환이 정상에 발을 디디고 숨을 고르고 있자 멀리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슬슬 등반객들이 에어즈락을 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등반코스 끝에서 잠시 쉬던 세환은 다시 에어즈락의 동쪽끝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면적이 면적이다보니 등반코스의 위치에선 일출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워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중간 중간에 있는 골짜기 같은 틈새들을 들락날락하며 지나가야했다.
"장관이네..."
높이 348m에서 평원을 내려다보며 바라본 일출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초라한 존재라는 느낌이었다. 세환은 넋을 잃고 일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거대하고 아름답구나... 거기에 비하면 인간은 핵 같은 쓸데없는 거나 만들어서 터뜨리고 말이야, 아니 뭐, 그 인간들도 재미삼아 터뜨린 건 아니겠지만 말이지, 그래도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냐구."
거기까지 말한 세환은 팔베개를 하며 벌렁 드러누웠다. 옷에 흙이 묻는 것 정도는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보면 그 로봇은 정말 외계인의 물건일까, 그렇다면 우주 어딘가에 지구 문명은 어린애 수준으로 보는 문명이 있다는 소리네... 참 세상은 대단해... 그런데 그걸 가지고 인류의 오만에 대한 심판이니 뭐니 하는 게 또 웃긴단 말이야. 아무리 그렇대도 '네, 그렇습니까'하고 곱게 죽어줄 수는 없는데."
혼자서 중얼거리던 세환은 인기척이 느껴지자 몸을 일으켰다. 어느샌가 등반객들이 올라와있었다. 친구들은 등반 대신 에어즈락 주변을 한바퀴 돌 예정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합류하려면 일단 내려가야했다.
"그럼 조금만 더 돌아보고 내려가보실까."
일어난 세환은 에어즈락 정상의 테두리를 따라 한바퀴 돌아보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볼 때엔 탁자처럼 평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올라와보니 정상 부분도 상당한 굴곡을 가지고 있었다. 골짜기 같은 부분도 아까 지나온 것들 말고도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그렇게 어느 작은 골짜기를 내려갔을 때였다.
"어? 우와앗!"
골짜기 가장 안쪽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발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당황해서 발을 빼려했지만 두 손은 허공을 가르고 있었고 체중은 발에 완전히 실려 있어, 날개가 없는 생물인 이상 중력의 법칙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낙하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런데 이건 또 뭐냐고."
세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앞에 있는 거대한 물체를 바라보았다. 언뜻 봐도 좌우 길이가 30m는 넘어보였다. 게다가 여기저기 굴곡지고 들어가고 튀어나오고, 둥글둥글해보이면서 묘하게 광택이 느껴지는 게 절대로 자연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이 공간. 세환이 있는 공간은 폭이 50m는 되지 않을까 싶은, 모퉁이가 정확하게 각이 져 있는 데다가 내부 표면이 반들반들한 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확실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금 여긴 에어즈락 내부, 아니면 밑의 땅 속이란 소리인데, 말이 되냔 말이야."
세환은 머리를 감싸쥐는 듯하더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달아 벌어진 탓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느낌이었다. 부딪힌 머리가 새삼스레 아파왔다.
"그러니까, 맨 처음에 갑자기 발이 골짜기를 뚫고 빠졌고, 밑으로 뚝 떨어졌는데 이런 공간이 나타났고, 게다가 수직으로 떨어지다가 갑자기 경사가 지질 않나, 척 봐도 누가 만들어낸 게 분명한 커다란 게 놓여있질 않나, 이건 완전히 '비상식의 세계에 어서 오세요'구만."
잠시 그렇게 앞의 거대한 물체를 바라보던 세환은 이윽고 자신이 있는 공간을 여기저기 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나갈 길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뒤져봤을까,
"...도로 기어 올라가라는 거야?"
나갈 수 있을만한 곳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아까 굴러나온 구멍을 제외하면 통로는 고사하고 환풍구로 쓰일만한 틈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만약 세환이 떨어진 곳도 그 후에 막히기라도 했다면 나가는 건 둘째치고 질식사를 걱정해야할 판국이었다. 세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이 굴러나온 구멍을 쏘아보다가, 문득 자신이 아직 확인해보지 않은 곳, 아니 확인해보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까 저 커다란 게 아직이구나."
공간의 중앙에 있는 품새가 꼭 손대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가능한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보니, 금속성의 차가운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진짜냐? 진짜로 인공물이냐?"
짐작은 했지만 그렇다고 사실로 밝혀졌을 때의 충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지금 상황이 하나부터 열까지 비상식의 열전인 덕에 충격이 좀 덜했을 뿐이었다. 놀람도 잠시, 세환은 곧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썩을, 계단이나 하다못해 사다리 정도는 만들어놓으란 말이야!"
거대한 물체는 온통 매끈매끈하고 반듯하게 만들어져 있는 통에 손으로 잡거나 발을 디딜만한 곳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잡고 올라갈만한 곳을 찾기 위해 빙 돌아봐야만 했다. 그렇게 반바퀴 쯤 돌았을 때에 겨우 그나마 울퉁불퉁한 곳을 찾아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쉽사리 올라갈 수 있는 곳은 아니라서 몇번이나 미끄러지고 땅에 처박힐뻔한 다음에야 올라갈 수 있었다.
"젠장... 에어즈락 등반이... 차라리 더 쉬웠어... 아, 배고파..."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 있었다. 게다가 두번이나 경사를 올랐으니 배가 고파질 만도 했다. 하지만 배를 채우려면 나가야 했고, 나가려면 뭔가 방법을 찾아야했다. 배고프다고 중얼대는 것보다 통로나 뭔가 쓸만한 것을 찾는 게 나았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로 인공물이라는 게 티가 나네."
세환이 올라온 물체는 거의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밑에서는 옆면만 볼 수 있어서 몰랐지만, 위에 올라와서는 평면을 보게 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물체의 형상은 어쩐지 인간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다만 왼팔에 해당하는 부분에 뭔가 큼지막한 게 위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아까 세환이 처음 다가갔던 자리 같았다.
"그렇게 보면 지금 여기가 다리, 저부분이 팔, 그럼 저기는 머리인가... 몸통 쪽으로 가보자."
원통을 눕힌듯한 형태의 다리 부분을 지나가느라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애초에 굵기가 상당히 굵은 편이라 발을 조금 잘못 디딘다고 떨어지거나 할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가슴 부분, 사람으로 치면 명치가 위치하는 곳 부근에 도달했다.
"흐음, 전체적으로 생긴 걸 보면 꼭 로봇 같은데 말이야... 정말 그렇다면 콕핏은 가슴이나 머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지. 그러면 해치가 이 부근인가..."
세환은 자신이 있는 곳 근처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여기저기 만져보기 시작했다. 명치 위치의 툭 튀어나온 부분 주변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아래쪽에서 콘솔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버튼의 두배쯤 되어보이는 크기의 버튼이 하나, 작은 버튼이 네개, 그리고 넓적한 스크린 비슷한 판이 하나 있었다.
"뭘 눌러야 하나... 엉뚱한 거 눌렀다가 대뜸 자폭이라도 하면 우습지도 않은데."
일단 위험한 장치를 작동시키는 버튼이 눈에 확 띄게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커다란 버튼을 눌러보았다. 그러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라고 생각되는 판에 빛이 들어왔다. 잠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자, 정체불명의 문자 비슷한 것이 몇줄 나왔다가는 사라지고 손모양 그림이 나타났다.
"손을 올리라는 건가.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런데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잖아, 젠장."
아마도 방금 보였다가 사라진 문장들이 경고문이나 지시문일 테지만, 세환의 지식으로는 그럴 거란 짐작만 가능할 뿐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나마 확실해보이는 건 스크린에 손을 올리라는 지시가 있었으리라는 점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인가. 에라, 모르겠다."
세환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오른손을 들어 스크린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마치 스캔하는 듯한 빛이 스크린의 위에서 아래로 한번 지나갔고,
"큭, 뜨앗!"
따끔하면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순간적으로 손바닥 전체에 퍼졌다.
"쓰... 아파라, 뭐야 대체? 화상은... 안 생겼나."
「방금 통증은 신경에 나노머신이 주입되며 발생한 것이므로 피부의 손상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손을 휘휘 내저으며 중얼거리고 있는 세환은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거대한 인간형 물체뿐이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목소리를 귀로 들은 것 같지도 않은 것이, 믿을 수 없게도 그냥 머릿속으로 전해져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밀폐공간에서 말을 할 때 울리는 현상도 방금 전 목소리에서는 없었다.
"...이젠 환청까지 들리나?"
「환청이 아닙니다. 저는 인공지능 '파우스'(Faus)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가스테르'(Magaster).」
"...뭐?"
「다시 한번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누군가 세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게다가 음성이 아닌 뭔가 다른 방법으로. 마치 머릿속에다 직접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꼭 텔레파시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세환은 상대의 말투가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든다든가, 여자 목소리라든가 하는 부분도 건너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반사적으로 외친 것에 가까웠지만.
"아니, 아니 잠깐! 당신 누구야! 어디서 말하는 거야!"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인공지능 '파우스'입니다. 스페투브(Spetuv)의 조종사로 결정된 마가스테르를 보조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인공지능? 스페투브? 마가스테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저는 인공적으로 제작된 두뇌에 설치된, 유기물로 구성된 육체를 가지지 않은 지능체입니다. 스페투브는 지금 마가스테르께서 올라가계신 2족 기동병기의 총칭으로, 제르누르(Zernur)어로 '평화의 기도자', '평화의 기원'이라는 뜻입니다.. 마가스테르는 '주인된 자'라는 뜻입니다.」
"제르누르는 또 뭐야..."
「스페투브와 제가 제작된 행성의 명칭입니다. 스페투브와 저는 이 행성의 낮밤을 1일로 기준했을 때 1,598,564일 전에 제르누르를 출발하여 1,128,753일 전에 이 행성에 낙하했습니다.」
"...미안한데, 일수가 너무 많아서 계산이 안 되거든? 365일을 1년으로 환산해서 말해줄래? 소숫점 아래는 버리고."
「제르누르를 출발한 것은 약 4,379년 전, 이곳에 도착한 것은 약 3,092년 전입니다.」
"까마득하게 옛날이네... 어? 잠깐, 그럼 너와 이 물건은 말하자면 외계 문명의 소산이라는 거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NASA 같은 데서 알면 아주 좋아 죽겠구만. 난데없이 외계 문명의 증거가 둘이나 나타났으니."
「그것 때문에 제가 활동을 재개한 것입니다.」
"응? 활동을 재개했다고?"
세환은 어느새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아있었다. 계속 황당한 일만 겪었더니 이젠 완전히 무덤덤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설령 그 상대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낙하했을 당시 이 행성의 문명은 극히 원시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제르누르의 문명 수준에 근접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혹은 '카라타스'(Caratas)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 상태로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카라타스라는 게 그 녀석들의 이름인가... 그런데 지구에 도착한 게 언제라고?"
「정확한 명칭은 아닙니다. 제르누르에서 부여한 가칭입니다. 그리고 지구에 제가 도착한 것은 약 3.092년 전입니다.」
"기원전 1천년 무렵이라, 제대로 된 문명이 발달했을 리가 없겠지. 그래서 지구 문명이 그 제르누르인가 하는 곳만큼 발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구 문명이 제르누르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보다 카라타스가 지구를 탐지한 것이 빨랐습니다.」
"지구도 재수 옴 붙었네... 아니, 재수 옴 붙은 건 인류인가. 남의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거기까지 말한 세환은 팔짱을 끼었다가, 손으로 턱을 괴었다가, 턱을 슬슬 긁었다가 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느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 거야? 너 우리말 할 줄 아는 거야?"
「아닙니다. 저는 마가스테르의 체내에 주입된 나노머신을 통해 의사(意思) 그 자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소통수단에 단어의 차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가, 과연 외계문명이군 그래. 어? 잠깐, 나노머신을 주입했다고? 언제?"
「방금 마가스테르가 손바닥을 접촉했을 때입니다.」
"순식간이구만. 그러면 나노머신의 기능은 통신 뿐이야? 그것만이라면 나노머신이 아까운데. 아, 그러고보니 아까 마가스테르가 뭐 주인이니 뭐니 하는 뜻이랬지. 그러면 내가 조종하게 되는 거야?"
「물론입니다. 체내에 주입된 나노머신은 의사전달 외에 다른 장소에서 스페투브 콕핏으로의 워프, 콕핏에서 다른 장소로의 워프, 스페투브 조종을 위한 신경접속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스페투브는 나노머신이 주입되어 신경접속이 가능한 사람만 조종할 수 있으므로 현시점에서 마가스테르만이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세환은 입을 떡 하고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이 워프할 수 있다니,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안 믿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상대-인공지능이긴 하지만-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 것 같고 말이다.
"우와, 아무리 외계문명이라지만 이건 너무 오버 테크놀러지잖아. 게다가 파일럿까지 식별하는 건가. 그런데 조종법은 신경접속이라고?"
「조종간 등을 이용한 중계 조종법의 경우, 조종자가 판단하고 기체를 조작할 때까지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전투중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것도 어렵다고 판단되어 스페투브의 기획단계에서 폐기되었습니다. 접속 부위는 손입니다.」
"손이 접속부위라, 꼭 어느 애니메이션 생각나게 하네. 이것도 무슨 부작용 같은 거 있지는 않겠지?"
세환은 슬쩍 웃으며 농담을 했다. 상황이 어쩐지 꽤나 낯익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있습니다. 신경접속을 반복할수록 체내의 신경계가 점차 마비, 혹은 손상됩니다.」
대답을 듣는 순간 세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세환은 편하게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신경이 손상된다고?"
「신경 손상의 정도는 개인차가 있으며, 제르누르인 기준으로 평균 16회, 최대 19회 접속까지 견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손상 부위 역시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 이 기록은 제르누르 기준이므로 마가스테르에게는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타면 탈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거야?"
「최종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노머신 주입은 아까 손을 댔을 때 이미 끝난 거라고?"
「그렇습니다.」
다시 침묵. 세환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움직임도 없이 그렇게 한동안 앉아있었다. 배고픔도 불안감도 싹 날아갔다.
당연하다. 앞날이 창창하던 사람이 난데없이 사형선고를 받은 꼴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선택되어 죽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황당해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킥..."
세환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소리, 아니 웃음처럼 들리는 울음이었다.
"킥, 킥킥... 큭큭... 크흣, 큭... 끅... 으... 우윽..."
눈물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어깨가 들썩이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잠시후, 오열과 함께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넓은 공간에 퍼져 나갔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왜! 왜 나야! 왜 하필 나야! 왜애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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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써서 모 커뮤니티에 올렸던 자작소설이 있는데, 이제 블로그에도 올리려고 합니다. 사실 '혹시 누가 이거 자기가 썼다고 사칭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라는 말도 안 되는 피해의식+자만심에 그동안 안 올렸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물건을 사칭하는데 쓸 일은 없겠더군요 (...)
해서 업로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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