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얼마나 울었을까, 세환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이윽고 울음을 완전히 멈춘 세환은 얼굴을 한번 스윽 닦고는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니까, 멋대로 날 여기로 끌어들여서, 묻지도 않고 파일럿으로 만들고, 싸우고 죽어라 이거야? 웃기지 마. 몰라. 안 해. 안 싸워. 까짓거 전 인류를 저승 길동무 삼아서 다 같이 죽지 뭐."

「마가스테르, 스페투브는 제르누르인(人)의 유산입니다. 스페투브 개발진은 마가스테르에게 카라타스 격멸의 수단을 제공한 것입니다.」

"시끄러, 누가 달라고 했어?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마가스테르, 마가스테르 하는데. 웃기지 마, 뭐가 '주인된 자'야? 멋대로 골라놓고는 생색내지 말라구. 주인이 아니라 노예잖아. 아니, 이건 그냥 기계의 부속품 신세구만."

세환은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내었다. 모든 것을 거부하려는 그 말에도 파우스는 물러서지 않고 세환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마가스테르...」

"닥쳐, 그렇게 부르지 마.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을 시한부 인생으로 만들어놓고 뻔뻔하게 잘도 말하네. 알 게 뭐야?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면 되는 거 아냐! 그러면 지구도 공해와 파괴에서 구원받고 좋잖아!"

세환은 무의식중에 자신이 이따금 생각하던 것을 내뱉었다. 인류의 멸종은 인류를 제외한 모든 생명과 지구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그 말은 곧바로 부정되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카라타스는 행성을 황폐화시킵니다.」

"...뭐?"

「마지막 전투에서 제르누르가 패배한 후, 카라타스는 제르누르 각지에 전투용 병기와 더불어 자원채취용 기계도 강하시켰습니다. 그 기계들은 제르누르의 기술력으로도 자원 채취를 시도할 수 없었던 지점과 물질까지 채취했으나 그에 따른 행성의 피해는 방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르누르의 환경은 급속히 파괴되었고, 저와 스페투브가 제르누르를 탈출할 시점에서는 이미 행성 생태계가 상당비율 붕괴, 자연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도 카라타스는 계속해서 채취기계를 강하시키고 있었습니다.」

"하, 알 게 뭐야. 나 죽으면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데, 인류가 멸망하든 지구가 박살나든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렇다면 마가스테르, 마가스테르의 가족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라고?"

「인간은 자신 말고도 그 가족도 소중히 생각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가스테르가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환은 당황했다.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무조건 논리적인 말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감정쪽으로 호소할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류나 지구를 지킨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족을 지킨다고 생각하라고?"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젠장, 너 진짜 인공지능이냐?"

「저는 확실히 인공지능입니다.」

파우스의 말에 세환은 가만히 생각해봤다. 어차피 침공은 피할 수 없고, 지구까지 통째로 저승길동무를 삼고 죽느냐 아니면 가족을 살리느냐의 문제였다. (세환에게 있어 가족을 구할 때 인류가 살아남는 건 덤에 불과했다.)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가족이 살 가능성이 있다면 그쪽이 나을 것 같았다. 일단 부모님이라도 살아있다면 자신을 기억해줄 사람들은 남게 되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세환은 문득 다른 데 생각이 미쳤다. 싸우긴 싸우더라도 꼭 내가 나서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을까, 나노머신이 신경접속의 수단이 된다면 다른 사람도 충분히 가능할 텐데, 하는 생각으로 물어보았다.

"좀 묻자, 다른 사람에게도 나노머신을 주입할 수 있겠지? 교대 가능한 파일럿이 있다면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데."

「준비된 나노머신은 접속에 필요한 최소치의 1.2배의 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엔 양이 부족합니다.」

"그럼 내 몸에 있는 나노머신을 다시 빼내서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는 방법은?"

「한번 주입된 나노머신은 회수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너나 이 물건을 공개해서 대량생산을 시도해보는 건 어때?"

「제가 확인한 바로는, 지구의 기술력은 아직 스페투브와 저를 해석해 재현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지난번 카라타스의 강하에서 큰 피해를 입고 광역섬멸병기를 사용해야 했다는 사실에서 입증되었습니다. 또한, 일정수준 이상의 지성을 갖춘 생명들의 특성상 인류의 지식을 뛰어넘는 기술과 접촉하는 것은 인류와 지구와 저희 모두에게 있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부정할 수가 없네. 결국 빼도 박도 못하고 완전히 걸려든 거냐, 나는."

여러가지로 진이 완전히 빠져버린 세환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젠 정말 다른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어차피 언젠가 끝날 인생, 한번 비극의 영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어쭙잖은 생각까지 들었다.

"젠장, 그래 좋아. 사람이 한번 죽지 두번 죽겠냐. 이름은 못 날리겠지만 스스로 만족하고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세환은 몸을 일으키고 파우스에게 말을 걸었다. 기왕 마음을 잡았으니, 모든 걸 확실히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카라타스라고 했나? 그 녀석들의 강하 주기는 대강 얼마나 되지?"

「일정하지 않습니다. 제르누르에서는 짧게는 지구시간으로 6일, 길게는 59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 단위는 지구 기준으로 대답해. 길이는 미터법, 무게는 킬로그램과 톤 단위로."

「죄송하지만 지구의 길이와 무게 단위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뭐? 하지만 시간 단위는 알고 있잖아?"

「낮과 밤을 하루로 기준을 잡았을 때만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의 단위는 알지 못합니다.」

세환은 엉뚱한 곳에서 벽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외계문명의 소산이 지구의 기준 단위를 몰라서 제대로 대답을 못한다니, 누가 들었다면 당장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을 거다. 사실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세환은 한숨부터 나왔다.

"후우... 지구보다 훨씬 앞선 문명의 인공지능이라고 했으니 해킹 정도는 가능하겠지? 전파 수신도. 세계 각지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그럼 이 녀석의 스펙은 조금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이름부터 정해야겠네."

「이름입니까?」

"그래, 아무리 그래도 스페투브와... 아까 너 뭐라고 소개했지?"

「파우스입니다.」

"아, 그래, 파우스. 그 둘은 어째 너무 개발명칭 느낌이 강하단 말이야. 좀 더 그럴 듯한 이름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 이 녀석은 '지크프리트', 넌 '브룬힐데'로 하자."

「'지크프리트'와 '브룬힐데'입니까?」

"응, 그 편이 멋있으니까."

세환은 그렇게 말했지만, 세상에 대놓고 공표할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이름을 짓는 것은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게다가 지크프리트와 브룬힐데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결코 네이밍 센스가 좋다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파우스-이제는 브룬힐데-는 그저 그 말에 따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마가스테르.」

"아, 그리고 그 마가스테르라는 말도 바꾸자. 영 낯설어서 말이지, '마스터'라고 불러. 의미는 비슷하니까."

「알겠습니다, 마스터.」

"대충 일단락된 건가... 그럼 이제 나 좀 밖으로 내보내줄래? 여기 있다간 싸우다 죽기 전에 굶어죽겠는데."

「알겠습니다. 조종실에 들어가 앉아주십시오. 원하시는 곳으로 이동시켜 드리겠습니다.」

기잉 하는 소리와 함께, 아까 세환이 기대어 있던 부분이 열리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켜 안쪽을 보자, 머리받침부터 팔걸이, 다리받침, 발받침까지 달린 조종석이 보였다. 팔걸이의 끝부분에는 손을 올려놓는 듯한 반구형의 물체도 보였는데, 아마도 그게 접속장치인 듯 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앉자마자 대뜸 신경접속 시키거나 하지는 않겠지?"

「카라타스가 나타났을 때 외에는 신경을 접속시키지 않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세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종석으로 들어갔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지만 좁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좌석에 앉으려던 세환은 모니터가 안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니터가 없네. 혹시 조종실 내벽 전체가 모니터가 되는 거야?"

「아닙니다, 신경 접속을 통해 뇌에 직접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지크프리트와 접속했을 때에는 지크프리드가 마스터의 육체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냥 내 몸 움직이듯 하면 된다는 건가... 뭐 그건 됐고, 나 좀 내보내줘."

「알겠습니다. 어느 곳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브룬힐데의 물음에 세환은 시계를 보았다. 등반 투어를 온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다면 큰 문제 없이 합류해서 숙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직 투어가 끝나 돌아갈 시간은 아니었다.

"아까 내가 빠진 구멍 옆으로... 아, 그러고보니 그 구멍은 대체 뭐야?"

「활동을 재개한 후, 외부와의 접촉을 위해 공작기계들을 이용해 만든 통로입니다.」

"세상에 통로를 위로 뚫는 녀석이 어디 있어... 옆으로 뚫는 게 상식 아니야?"

「하지만 위로 향하는 것이 외부와 연결되기 위해 작업해야 하는 거리가 짧았습니다.」

"...그랬냐. 그러면 이동시켜줘."

「알겠습니다. 그러면 마스터, 몸조심하십시오.」

"...그래, 고마워. 너도 확실히 준비해놓고 있어."

인공지능에게 격려랄지, 염려랄지, 아무튼 자신을 신경써주는 말을 들은 세환은 복잡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병주고 약준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하기로 한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었기에 반발심은 그다지 없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세환은 아까 자신이 빠졌던 골짜기의 구멍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구멍 막아놓으란 소리를 깜빡했네."

「이제 막아두겠습니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대답이 돌아와서 세환은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통신용 나노머신을 통해 뇌에 직접 의사를 전달한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랬지, 그러면 지구 어디에 있든 대화가 가능한 거네."

「그렇습니다. 굳이 말로 안 하시고 생각만 하셔도 통신이 가능합니다.」

"...잠깐? 그 말은 내가 생각만 해도 그게 전달된다는 말이야?"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세환은 얼굴을 굳혔다. 이건 중요한 문제다. 말이 좋아 통신이지, 생각이 전달된다는 건 완전히 독심술에 가깝지 않은가. 아니, 이 경우에는 마음을 읽힌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드러난다는 게 문제였다.

" 지금부터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로 내 생각 읽지 마. 아, 카라타스 녀석들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먼저 말 걸어도 돼. 그 외에는 내가 말 걸 때까지 절대로 먼저 말 걸지 말고, 내가 묻기 전에 대답하지 마. 내가 네 이름 부를 때까지는 내 생각 읽지 마."

「...그렇게 하겠습니다.」

브룬힐데가 대답할 때까지 묘하게 공백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넘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사생활까지 낱낱이 드러난다는 건 견딜 수 없으니까.




"야 임마, 이세환! 너 이 자식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정말이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냐."

"미안해, 그게 말이야, 사실 발을 헛디뎌서..."

세환이 갑자기 사라져서 한동안 안 보인 통에 친구들, 진석과 민우는 투어 가이드와 함께 세환을 찾느라 엄청 고생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세환은 친구들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게다가 거짓말도 서툴러서 둘러대느라 머릿속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어쨌든 가이드는 별 문제없이 돌아왔으니 됐다며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아, 정말 고역이야."

간신히 가이드의 압박에서 벗어난 세환은 고개를 내저었다. 장소가 워낙 탁 트인 곳이다보니 길을 잃었다는 말도 안 통했고, 옷이 지저분해진 것을 핑계삼아 '에어즈락 위의 조그만 골짜기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해있었다'고 말하긴 했지만 가이드는 그래도 의심스러운지 수시로 세환을 쳐다봤다. 어쩌면 옷에 묻은 흙먼지가 미니버스 의자에 묻을까봐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너, 머리는 괜찮아? 부딪혔다며. 뇌진탕이나 그런 거 오는 거 아냐?"

"아니 뭐, 혹이 좀 난 것 같지만 괜찮은 것 같아."

"그래도 조심해라. 다친 곳이 머리니까 백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혹시라도 갑자기 어지러워지거나 하면 바로 말해."

"응, 고마워."

친구들의 걱정에 세환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으로서는, 이런 작은 관심 하나하나가 기쁘게 느껴졌다. 그리고 본의는 아니더라도 친구들을 속여야한다는 사실에 작은 죄책감도 느꼈다.




"일단 좀 씻을게."

"그래, 어지럽거나 하면 바로 얘기해."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었지만, 세환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놓고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동굴 아닌 동굴에서 데굴데굴 굴렀으니 온통 흙먼지 투성이였고, 덕분에 오는 내내 버스기사와 가이드한테 눈총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스스로도 굉장히 기분이 찝찝했고.
세환은 몸을 씻으면서 에어즈락에서 겪었던 일을 돌이켜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식밖의 일이었다. 아마 누구한테 얘기를 하더라도 웃어넘기거나 놀림만 받을 것 같았다. NASA나 정체모를 비밀결사 같은 곳에서 알게 되면 엄청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당할지도 모르지만. 예전에 본 외계인 해부 동영상을 떠올린 세환은 갑자기 느껴진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문득 브룬힐데에게 중요한 걸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브룬힐데."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깜빡하고 안 물어본 게 있는데 말이지, 신경접속을 하면 지크프리트의 몸체가 곧 내 몸이 되는 거라고 했지?"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말이야, 만약 싸우다가 지크프리트가 부서지면 통증도 내게 전달되나? 예를 들어 팔이 잘린다든가, 목이 잘린다든가 하는 경우."

세환이 떠올린 것은, 신경이 연결된다면 로봇이 받는 타격도 자신에게 전달되는가의 문제였다. 사실 지금껏 세환이 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로봇과 파일럿이 연결되어있을 경우, 로봇이 부서질 때 파일럿도 고통스러워하는 연출이 꼭 나오곤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세환은 자신이 팔이 잘리거나 했을 때의 고통을 참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목이 잘렸을 때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진다면 세환은 그 자리에서 사망 확정이었다.

「지크프리트의 전신에는 인간의 신경계와 유사한 인조신경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인조신경은 지크프리트가 받는 충격량과 피해를 마스터에게 전달합니다. 결과적으로 지크프리트가 타격을 받는다면 마스터에게도 그 통증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통각 전달 허용치가 정해져있기에, 날카로운 물건에 베이거나 주먹으로 맞는 경우보다 큰 고통은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건 목이 잘린 경우에도 적용되는 거겠지?"

「어느 부위에 타격을 받더라도 허용 수준 이상의 통증은 마스터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다행이네... 아, 그런데 목이 잘리면 시각은 어떻게 되지? 눈이 없어지잖아."

「시각센서는 두부(頭部) 외에도 동체 각부에 분포되어 있으니 머리를 잃더라도 시각은 유지됩니다.」

"어지간히도 철저하게 갖춰놨네. 한 행성의 유산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세환은 안도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싸우는 도중에 통증을 못 이겨 꼼짝도 못하다가 어이없게 죽게 되는 상황은 면하게 된 것이다. 자세히 알게 될수록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말이 점점 현실로 다가온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맞닥뜨리게 되면 싫어도 싸우게 될 테니, 일부러 지금부터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스터.」

"응? 뭐야, 아직 통신 안 끊었어?"

「용건이 끝났다는 말을 듣지 못해서 연결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아... 내 실수냐.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뭔데?"

「훈련은 언제 시작하시겠습니까?」

"...훈련?"

세환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훈련이라면, 전투 훈련 말인가? 신경접속이라면서 조작 훈련까지 해야하는 건가? 아니면 기체 적응 훈련인가?

「지크프리트의 반응속도는 인간 신체의 반응속도보다 빠릅니다. 또한 카라타스의 전투병기나 전투방식도 다양하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그것도 신경접속을 해야하는 거야?"

「아닙니다. 통신용 나노머신을 통해 시뮬레이션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통각과 촉각의 경우는 재현할 수 없으므로 실제 전투와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참 별 걸 다 하는군.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있다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 그 때 훈련하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브룬힐데와 대화를 끝낸 후, 세환은 샤워를 끝냈다. 사실 몸을 씻는 건 브룬힐데와 대화하는 중에 이미 마친 상태였다. 물기를 닦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문앞에서 진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진지한 눈빛이었다.

"응? 왜 그래?"

"너 진짜 괜찮은 거냐?"

"무슨 소리야? 그냥 머리에 혹 조금 난 것 뿐이라니까."

"아니, 욕실에서 혼자서 중얼중얼대는 게 말이지, 꼭 머리 부딪혀서 어디 잘못된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서..."

"꼭 그렇게 사람을 환자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그냥 내가 한심해서 혼잣말 한 거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한심하고 답답한 것 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수록 자신을 걱정해주는 친구들의 마음이 더 고맙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그냥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진석아, 그만 몰아붙여라. 그리고 지금 여기서 병원에 간다고 해도, 우리 중에 여기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 잘 하는 녀석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정곡을 찌르는 민우의 말에 세환과 진석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에어즈락 투어도 셋이서 짧은 영어에 손짓발짓 다 섞어가며 간신히 참가했는데, 의사에게 어디가 아프네 무슨 일이 있었네 하는 설명을 영어로 납득시킬 자신감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그나마 내일이 귀국일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라도 무슨 증상이 나올지 모르니까 조심해."

민우의 신신당부에 세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진석은 짐짓 쾌활하게 외쳤다.

"자,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난 이 녀석 걱정하느라 배가 다 꺼졌어."

"배고픈 걸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애초에 넌 뭘 먹어도 배가 금방 고파지잖아."

"그러고보니 점심시간이긴 했지. 자, 그럼 배부터 좀 채우자. 오후에 뭘 하든 배는 일단 든든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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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올립니다. 그동안은 귀찮았달까... 사실 까먹었어요 (...)

초반부는 설명조가 강합니다. 이런저런 스펙이나 외형묘사 같은 걸 하고 넘어가야 할 테니까요.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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