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그 날 밤.
친구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세환은 브룬힐데와 지크프리트 적응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진석과 민우가 계속 함께 있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브룬힐데, 훈련 시작하자.'

「알겠습니다. 그럼 시뮬레이션에 돌입합니다.」

다음 순간, 세환은 황량하고 탁 트인 공간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들어 바라보니,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 팔과 오른손에 들린 바스타드 소드 쯤 되어보이는 검, 왼팔등에 달린 방패가 보였다. 세환은 한번 시험삼아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확인해봤다.

"확실히 촉감까지는 재현이 안 되는 모양이네. 적응하려면 조금 어렵겠는데. 어? 그런데 말해도 되나?"

「현재 마스터의 의식은 시뮬레이션 시스템과 연결되어있으므로 마스터의 반응은 시뮬레이션 내부로 한정됩니다. 실제로 말을 하거나 몸을 뒤척이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 꽤나 편리한걸. 그건 그렇고 장비는 검이랑 방패가 전부? 원거리 무기는 없어?"

「외부장갑과 에너지 방어막 때문에 적에게 원거리 병기는 거의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거리 병기는 장착되지 않았습니다. 보조무기로 방패 안쪽과 허리 뒤쪽에 단검이 각각 두자루 장비되어있습니다.」

방패를 뒤집어보자 그말대로 단검 두자루가 꽂혀 있었다. 고개를 돌려 허리 뒤편을 바라보자 그쪽에도 단검 손잡이가 튀어나와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부실한데... 그럼 시작해보자구."

「그러면 적기를 구현하겠습니다.」

브룬힐데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환의 정면, 조금 떨어진 거리에 또다른 로봇 하나가 나타났다. 생김새로 봐서는 지난번에 알렉산드리아를 박살내고 이집트 대통령을 하야시킨 그 녀석 같았다. 세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그 녀석들은 다 저런 모양의 물건 밖에 없는 거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스터의 적응을 위해서 지구에 강하했던 기체를 구현했습니다. 완전히 낯선 모습보다는 한번이라도 본 형태가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러면 어디..."

세환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보다 빠른 반응에 약간 당황했다. 커다란 몸집 때문에 움직임도 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원래 몸보다 가볍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적응하려면 신경 좀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적기가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우왓? 자, 잠깐! 이건 너무 빠르잖아!"

허를 찔린 세환은 피할 생각도 못한 채, 몸통박치기를 방패로 받아내려 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반응해서 방패로 막는 건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적기의 돌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뭐하는 거야, 적어도 시작한다는 말 정도는... 으힉?!"

몸을 일으키며 막 불평을 쏟아내려는 찰나, 뾰족한 팔-이라기 보다는 송곳이나 말뚝-이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걸 본 세환은 볼썽사납게 옆으로 굴러야만 했다. 쉬지않고 자신을 따라오며 바닥에 꽂히는 날카로운 팔을 보며 세환은 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실제 전투에서는 적기와 대면하는 즉시 교전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장에 투입되는 즉시 전투 태세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난 이번이 처음이라고... 아."

열심히 굴러서 도망다니며 외치던 세환은 문득 덜컥 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적의 팔 하나가 자신의 배에 꽂혀있었고, 다른 팔은 한껏 치켜올려져 금방이라도 내리꽂힐 기세였다. 어리둥절해있는 세환의, 정확히는 지크프리트의 명치를 향해, 적기의 팔이 떨어져내렸다.

「첫번째 시뮬레이션 종료. 교전시간 1분 미만, 결과는 패배입니다.」

브룬힐데의 보고를 듣던 세환은 자신이 어느 새 땅위에 두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정면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까 그 적 로봇이 서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까 시뮬레이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세환은 식은 땀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저기, 브룬힐데?"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혹시 이거, 내가 이길 때까지 계속 하는 거야?"

만약 그랬다간 오늘밤 잠은 다 잔 거다. 제대로 적응도 못하고 촉각도 없어서 움직임 파악도 제대로 안 되는 몸으로 어떻게 이기라는 건가? 세환은 정말 울고 싶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스터가 이기지 않더라도 교전시간이 30분에 도달한다면 이번 훈련은 종료입니다.」

"누굴 죽일 생각이냐! 아니, 잠깐! 잠깐 쉴 틈은 좀 주라고오오오오오!!"

...세환이 울부짖는 사이에 적기의 팔이 지크프리트의 동체를 관통해있었다.




"세환이 너 간밤에 잠 안 잤냐? 왜 그리 피곤에 쩔어보여?"

"...악몽을 꿨거든."

진석의 물음에 세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비유가 아니라, 세환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의 악몽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패배횟수가 두자릿수에 달했으니 나름대로 기록이라면 기록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텨, 간신히 교전시간 30분을 넘겼을 때에는 새벽 5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게다가 훈련을 끝낼 때에 브룬힐데가 한 말을 떠올리면 앞날이 캄캄했다.

'다음 훈련 목표는 교전시간 1시간 경과입니다. 물론 적기를 격파하신다면 그것으로 그 날의 훈련은 종료입니다.'

"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눈밑에 다크서클의 기운이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로 울상을 짓고있는 세환을 보며, 진석은 민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일어나자마자 상태가 영 안 좋아보이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야, 쟤 왜 저래? 뭐 아는 거 있냐?"

"어제 씻으면서도 자기가 한심해서 중얼거렸다잖아. 그 생각이 또 났나보지. 아마 돌아가면 괜찮아질 거야. 세환아, 아침부터 넋두리는 그만하고 세수부터 해라. 배는 채우고 집에 가야지."

"응..."

나지막이 대답하고 비척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서, 진석과 민우는 세환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사히 욕실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정도였다. 그나마 씻고 난 다음에는 제법 괜찮아진 것 같아보여 두 사람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
직항편이라면 10시간이지만, 대학생들에게는 돈 한푼이 아쉬운지라 셋은 홍콩을 경유하는 16시간짜리 노선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진석과 민우가 쌓인 여독 때문에 잠들어있는 동안, 세환은 또다시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번엔 몇분이야?"

「57분이었습니다. 점차 실력이 향상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니 조금만 더 분발하십시오.」

"말은 쉽다..."

비행기 안에서 적응훈련에 들어간지 4시간이 지난 시점, 이젠 슬슬 움직임에 익숙해진 덕에 버티는 시간은 많이 늘어있었지만 결국 진다는 점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계속 똑같은 적기만 상대하고 있었으니, 익숙해진 게 적기의 행동패턴인지 지크프리트의 움직임인지도 애매해서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두 기체가 재현되자마자 적기가 돌진해왔다.

"이젠 패턴 좀 바꿔봐라!"

이제 움직임도 제법 익숙해지고 행동패턴도 어느 정도 파악된 상황에, 피해만 다니다가 쓰러지는데 이골이 난 세환은 내친 김에 물러서지 않고 마주 달려나갔다. 어차피 시뮬레이션, 지더라도 죽지는 않는다는 생각에 무모하게 나가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생각없이 무턱대고 달려나간 것은 아니었다. 달리는 속도가 최고조에 이를 무렵, 세환은 지크프리트의 등에 부착된 메인 스러스터를 순간적으로 작동시켰다.

"우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적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방패를 들어 동체끼리의 충돌을 막으면서, 검을 수평으로 눕혀 방패 뒤에서 찌르기 준비 자세에 들어갔다. 그 직후 시야가 흔들리면서 돌진이 강제로 멈춰지는 것을 느낀 세환은 지체없이 방패를 휘둘렀다. 스러스터 출력을 이용해 부딪힌 충격에 방패로 얻어맞기까지 한 적기가 비틀거리는 것을 확인한 세환은 다시 한발 내딛으며 검을 내질렀다.

"젠장!"

적기는 비틀거리면서도 재빠르게 옆으로 몸을 피했고, 세환이 찌른 검은 옆구리 부분을 약간 찢어내는데 그쳤다. 순식간에 공격권에서 벗어난 적기는 잠시 지크프리트의 주변을 맴도는가 싶더니, 다시금 돌진해왔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세환은 살짝 몸을 낮추고 방패를 들어올려 방어자세를 취했다. 이번엔 거리가 가까워서 스러스터를 이용한 돌격은 할 수 없었지만 세환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다. 달려온 적기는 지크프리트의 코앞에서 갑자기 2개의 뒷다리 만으로 몸체를 곧추 세웠다. 앞발과 팔로 내리 찍으려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세환은 방패를 팔에서 떼어내면서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양손으로 잡은 검의 날끝을 아래로 향해 찔러넣는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메인 스러스터를 최대로 가동, 솟구쳐 오르면서 검을 위로 올려그었다. 메인 스러스터의 분사력을 이용해 적기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세환은 그대로 기체를 반바퀴 회전시키고 낙하, 적기의 말등 부분에 올라타고는 검을 풀스윙으로 휘둘렀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적기의 상반신이 잘려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하, 하하, 이겼다... ...왠지 이기고 나서도 성취감이 별로 안 느껴지는 게 조금 기분이 묘해지는데."

세환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은 녀석을 상대로 벌써 10시간 넘게 싸워 1번 이긴 것이다. 성취감이라는 것도 정도껏 반복해서 목표를 달성해야 느껴지는 것이지, 이 정도로 반복하다보면 성취감이 아니라 허탈감이 찾아온다. 게다가 세환의 경우에는 말하자면 겨우 'Lesson 01 통과'의 의미였다. 앞으로도 이 짓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할지, 그건 브룬힐데만이 알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 밤은 편히 잘 수 있겠어..."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음번에 주무시기 전에 다시 뵙겠습니다.」

"...뭐?"

천신만고 끝에 이긴 다음이라 맥이 풀려있어서 반응이 늦었다. 세환이 미처 되묻기도 전에 브룬힐데는 '잽싸게'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속도로 통신을 끝냈고, 당황한 세환이 되물었을 때에는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어 자신의 신체로 의식이 돌아온 다음이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자다가 잠꼬대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진석과 민우가 깨지는 않았나 싶어 옆을 본 세환은 둘이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좌석에 몸을 깊게 묻었다. 어쩐지 한방 먹은 느낌이었다.

"어째 점점 인공지능이라는 게 의심스러워지네..."




12시간 후, 셋은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호주 시간으로 저녁 6시 비행기를 타서 16시간 비행, 다시 시차로 2시간을 뒤로 돌리니 한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다음날 아침 8시였다.

"일단 뭣 좀 먹고 들어가자. 기내식으로는 역시 뭔가 부족했어."

"아무래도 그게 낫겠다. 그러면 어디 한식집 좀 찾아볼까?"

"한식집? 굳이 한식집 찾는 이유라도 있어?"

"늬들은 여행 내내 느끼한 걸로 배 채우고도 모자라서 여기서도 느끼하게 먹을래?"

민우의 말에 진석과 세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사람도 사실 기름진 음식, 밀가루 음식에 질려있던 차였기 때문에 민우가 한식집을 찾는 이유를 듣고는 그대로 따랐다. 터미널에서 발견한 한식당에서 설렁탕을 한그릇씩 시켜먹던 셋은 개학할 때까지의 일정을 물어보았다.

"대충 2월 한달 남았네. 너희들은 그동안 뭐할 거야?"

"아마 여행가기 전에 주문해둔 소설전집이 지금쯤 도착해있을걸. 아랫목에 배깔고 누워 읽을 거야. 그러는 진석이 넌?"

"뭐, 별 예정은 없고. 한달짜리 아르바이트 찾기도 어려울 테고. 아예 여름까지 할만한 아르바이트 좀 찾아볼 생각이야. 세환이는 뭐할 거냐?"

"글세, 그냥 이불 덮고 뒹굴거릴 생각인데."

사실 세환은 지크프리트를 움직이게 된 이후로 별다른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훈련을 하는 동안에는 가상 적기를 상대하는데 바빠 아무생각도 안 들지만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허망한 생각이 들곤 했다. 뭘 하든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세환은 억지로 희망적인 생각을 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나서서 할 의욕이 들지 않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세환이 너, 그제 아침에 그 일 있었던 이후로 뭔가 좀 이상해. 왠지 힘도 없어 보이고.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냐?"

"내가 봐도 그래. 아무래도 진찰 한번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해."

친구들의 걱정에 세환은 그저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녀왔습니다아~."

"어서 와라, 여행은 재미있었니?"

세환이 집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께서 책을 읽다 말고 일어나 세환을 맞아주셨다. 갑자기 세환은 어머니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라곤 자기 하나 뿐인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머니는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계시니 마음을 추스르실 수야 있겠지만 하나뿐인 자식을 잃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세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왜, 피곤하니? 표정이 좀 안 좋다."

"비행기를 오래 타서 그런가 봐요. 먼저 좀 씻을게요."

아무래도 표정에 생각이 조금 드러났던 것 같았다. 세환은 표정을 고치려다 그냥 피곤하다는 느낌을 드러내기로 했다. 원인이야 어쨌든 피로가 쌓인 것은 사실이니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환은 성격상 거짓말이 서툴러서, 거짓말을 할 것 같으면 아예 언급을 안 하는 편이었다.

"빨아야할 옷은 여기 따로 담아뒀으니까 여행가방은 그냥 두세요. 씻고 나와서 제가 정리할게요."

"그래, 그러면 어서 씻고 나오렴."

욕실에서 옷을 벗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세환은 앞일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생각해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브룬힐데의 말에 의하면 일단 사망은 거의 확정인 것 같은데, 죽음까지 이르는 시간도 천차만별인데다 지구의 인류도 똑같은 기간이 걸린다는 보장도 없으니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싸움에 져서 죽는다는 경우도 벌어질 수 있으니, 앞날이 정말 깜깜했다. 그저 허무할 뿐이었다.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싸우면서 죽어가는 삶을 살게 될 거라 생각하니, 새삼스레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죽을 생각은 안 하는 자신의 처지가 우습기도 했다.

"킥... 후, 후후..."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가족들이 눈치를 챈다면 둘러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세환은 최대한 평정을 가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흐르는 눈물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물에 섞여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저녁.

"나 왔어~."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어서 와요, 저녁부터 드실래요?"

"급하지 않으면 먼저 좀 씻었으면 좋겠어. 몸이 좀 얼어서 말이야. 세환이는 여행 잘 다녀왔냐?"

"예, 그런데 남반구여서 그런지 왔다갔다 할 때 계절이 완전히 바뀌어서 그게 좀 곤란했어요."

"그런가? 아, 남반구면 여기랑은 계절이 반대였지. 그래, 구경은 잘 했고? 선물은?"

"...열쇠고리나 핸드폰 스트랩으로 쓰시라고 사오긴 했는데, 꼭 그렇게 밝히셔야겠습니까."

세환은 미묘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 열쇠고리를 두개 들고 나왔다. 작고 납작한 원판의 한쪽 면에는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가, 반대쪽 면에는 캥거루와 코알라가 새겨진 물건이었다. 세환이 열쇠고리를 건네드리자 두분의 표정이 밝아졌다.

"코알라가 귀엽구나, 고맙다."

"으음, 난 좀 더 볼륨있는 물건을 받았으면 했는데... 예를 들면 지역 특산물이라든가 말이지."

"...학생에게 도대체 뭘 얼마나 받길 원하시는 건가요."

세환의 약간 어이없어하는 눈초리에 아버지는 하하 웃으시며 옷을 벗으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모습을 보며 살포시 웃으시던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시작하러 부엌에 가셨고, 세환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보았다. 시간대가 애매해서 그런지 관심을 끌만한 프로그램이 없어서, 그냥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있자니 괜시리 기분이 우울해졌다. 길지 않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낸다는 생각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얼마나 남았는지, 그동안 무얼 하면 좋을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답답했다. 이대로는 정말로 그냥저냥 살다가 어느날 뚝 하고 끝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어 불안했다.

"어디 안 좋으냐? 표정이 좀 굳었다."

욕실로 가시던 아버지가 건넨 말에, 세환은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역시 생각이 얼굴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세환은 적당히 둘러대었다.

"아직 여행 피로가 덜 풀려서 그런가 봐요. 내일 쯤이면 개운해지겠죠, 뭐."




『...사임한 대통령의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이집트의 XXXX 총리는 지난번 괴로봇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에 대하여 심심한 유감의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한편...』

저녁을 먹으며 뉴스를 보고 있으려니, 이집트는 아직도 뒤숭숭한 모양이었다. 난데없이 떨어진 로봇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대통령은 모가지에,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으니 그곳 사람들은 정말 정신이 아득할 것이다. 자칫하면 군부 쿠데타로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자니, 아버지가 불쑥 말씀을 하셨다.

"거 참, 이집트 대통령도 안 됐어.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야말로 천재지변이잖아."

"그러네요. 그 나라 사람들도 참 안됐어요."

"그러고보니 그 로봇 부서진 잔해랑 알처럼 생긴 착륙선은 어떻게 됐대요? 역시 미국이 가져갔대요?"

"글세다, 핵이 터진 이후로는 그 물건들에 대해서는 뉴스가 없던 걸 보면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CIA나 뭐 그런데서 시켜서 이집트 정부 압박하고 들고 갔겠지. 룰루랄라 신나게 연구하고 있지 않을까."

아버지의 비꼬는 말을 들으며 세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터였다. 그런데, 과연 미국이 그것들을 해석해낼 수 있을까? 브룬힐데가 말해준 바로는 현재 지구기술로는 절대로 해석 못할 거라던데, 실제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서 세환은 조금 불안했다.

'...잠깐? 해석하게 된다면 차라리 나은 거 아닌가? 만약 해석해서 재현할 수 있다면 굳이 내가 싸워야할 필요는...'

「인류라는 종족의 호전적인 특성상, 일부 집단이나 국가에 압도적인 기술력이 집중될 경우의 파급효과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읍?! 켁, 켁."

죽는 줄 알았다. 혼자서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브룬힐데가 끼어드는 바람에 세환은 먹던 밥이 숨구멍으로 들어갈 뻔 했다.

"얘, 괜찮니? 왜 그래?"

"괘, 괜찮아요. 잠시 다른 생각하다가 그만..."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둘러대는 게 서툴렀지만, 어머니는 더 캐묻지 않고 다시 숟가락을 드셨다. 세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브룬힐데에게 성을 냈다.

'멋대로 말 걸지 말랬지!'

「하지만 마스터의 생각이 위험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 막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세환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이기에 주인의 명령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자의적인 판단으로 말을 걸어오는지 제작자가 살아있다면 당장 쫓아가 두들겨패주고 싶었다. 물론 실현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저와 지크프리트의 제작자들은 약 4379년 전에 이미 사망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확인사살 당하면 아무래도 열 받게 마련이다.

'...알았으니까 그만 해라. 그런 생각 이제 안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뵙겠습니다.」

브룬힐데가 말을 끝마쳤을 무렵에는 이미 세환도 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모처럼 어머니께서 솜씨를 부리신 반찬이었는데, 중간에 브룬힐데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상황이었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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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올립니다. ...게으르다 보니 --;;

1챕터는 4회에서 끝납니다. 참고로 다른 챕터들은 대부분 1화 종료 (...)

지크프리트의 실드는 라운드 실드에, 표면은 장식이 일절 없이 매끄러운 형태입니다. 중앙부분이 왼팔에 고정되어 있고, 필요한 경우에 강제분리 시킬 수 있는 방식입니다. 대충 더블오에서 엑시아가 실드 달고다니는 모습에서 실드 모양만 라운드 실드로 바꾸시면 비슷할 듯...

지크프리트의 외형은 에스카플로네와 톨기스를 섞어놓은 모습 쯤 됩니다. 망토 대신 2개의 대형 스러스터가 부착되어 있는 형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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