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시그리드가 어깨를 잡고 흔드는 바람에 시선이 흐트러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니, 세민이와 닮아 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다른 아이였다. 무엇보다, 벌써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눈앞의 저 아이는 세민이와 헤어질 때의 그 나이 또래로 보였다. 그래, 세민이일 리가 없지. 애초에 살아있을 리도 없고. 후후, 나도 많이 약해진 모양이네. 닮은 아이를 봤다고 이렇게 정신을 놓을 뻔하다니 말이야.
“이봐, 세연. 괜찮아? 응?”
“아, 괜찮아. 잠시 헛것을 봤나 봐.”
다급한 표정으로 묻는 시그리드에겐 대충 둘러댔는데, 이런 상황에서 헛것을 봤다고 하니 표정이 아주 묘해졌다. 너무 건성으로 대답했나? 그건 그렇고 마법사들이 우글대는 진리의 탑에서 생체실험이라, 이쯤 되면 후대에 전설로 남을 수 있겠군. 무모함의 전설. 나는 다시 한 번 아이를 바라본 후, 이 연구실의 주인인 마법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설마 설마 하면서 반쯤 끌려오긴 했지만, 이렇게 보니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름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으니 묻는 말에만 대답해주시죠. 저 아이에게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죠?”
“질문을 할 권한은 내게 먼저 있네. 자네들은 내 연구실에 무단으로 침입한 무뢰한들이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저 마법사는 당당하군. 이상할 정도로 거리낌 없는 태도의 그 마법사는 50대쯤으로 보이는 제법 나이든 얼굴의 남자였다. 저 사람, 양심이라는 게 아예 없는 부류인가. 마법사들이 아무리 연구에 미친 족속들이라고는 해도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물이나 인간과 관련된 연구는 특히나 더욱 조심스러워서, 인간의 경우에는 시신을 실험에 이용하는 것조차도 꺼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눈앞의 연구실에서는 살아있는 인간을 거대한 시험관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추출하는 것 같았다.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도 자네들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겠네. 왜 함부로 남의 연구실에 무단 침입했나? 이런 시각에 탑에 있는 사람이라면 연구를 방해한 대가가 크다는 것은 알 텐데!”
“그 전에 내가 먼저 질문했어요. 대답부터 하시죠. 지금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질문할 권리는 내게 있다고 말했네!”
“금기시되는 인체실험까지 몰래몰래 하고 있는 주제에 권리 찾지 말아요! 무슨 실험 중인지 대답이나 해요!”
나와 마법사는 서로 노려본 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 인간, 정말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는 한편, 영력의 격류는 잠잠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연구실 안에 모여 있다가 쓸려나간 영력의 수준과 남아있는 영력의 수준이 비슷해서 그렇겠지. 시그리드도 그걸 느꼈는지, 다시 내 앞으로 나서면서 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음, 일단 허락도 없이 연구실에 들어온 것은 죄송합니다. 저는 205호실을 쓰는 시그리드 바렐이고, 여기 이 사람은 제 친구인 한세연입니다. 아, 성이 ‘한’이고 이름이 ‘세연’입니다. 이름이 시아난 식이거든요.”
“자기소개는 됐네. 난 어째서 쳐들어왔느냐고 물었네.”
“그게 말이죠, 실은 얼마 전부터 자정만 되면 뭔가 음산한 느낌의 영력이 어디선가 느껴져서 말입니다. 실력 좋은 친구도 온 김에 무슨 일인가 알아볼까 해서 찾아보다가 이렇게 됐네요.”
“음산하다니, 그다지 기분 좋은 표현은 아니군 그래.”
마법사는 살짝 표정을 찡그리더니 팔짱을 끼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말을 고르는 듯 했는데, 금방 정리가 됐는지 입을 열었다.
“애초에 영혼에 관한 연구니까 음산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내가 진행하는 연구는 혼(魂)에 대한 분석일세. 인간의 혼이 구성되는 방식과 혼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방법, 특정한 사람에게 혼이 스스로 모여드는 이유를 연구하고 있지.”
“혼이라… 잠깐만요. 그러면 저 아이가 혼이 스스로 모여드는 그런 아이입니까?”
“잘 봤네. 어렵사리 찾아냈지. 게다가 혼이 모여드는 수준도 지금까지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많다네.”
자랑스레 말하는 얼굴.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 당당한 몸짓.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그래요? 그럼 저 아이를 어떻게 찾았고 어떻게 데려왔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내가 한 말을 듣자, 마법사는 갑자기 표정을 구기더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겠지, 정상적인 방법을 통했을 리가 없지.
“대답을 못하시는 걸 보니 제 생각이 맞나 보네요. 인신매매. 인간시장에서 데려오셨겠죠?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서 말이에요. 저 아이를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저런 방식의 실험은 결코 하지 못할 테니까요.”
“닥치게!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네! 알 수 없는 이유로 영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터. 물론 영매(靈媒)를 부른다면 대부분 해결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대책이 없지. 더군다나 만약 영매조차 힘들 정도로 강력한 사령(邪靈)에 의한 것일 경우에는 순수하게 영력의 충돌로 밀어내는 수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자칫하면 피시술자가 영력의 충돌에 의한 쇼크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 일도 있어. 하지만 만약 내 연구가 성공해서 영이 특정한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와 영을 다룰 수 있는 법이 밝혀진다면, 그래서 그 내용이 널리 퍼진다면 더 이상 그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어질 거란 말이네!”
제법 거창한 논리다. 사실, 체질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영들에게 둘러싸여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경우 영매로 살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죽거나 미쳐버리게 된다. 이른바 ‘Sinænrim’이라는 것도 이런 것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실례가 될 것 같습니다만, 혹시 가까운 사람 중에 그런 일을 겪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내 손자일세.”
불쑥 나선 시그리드가 한 질문에, 마법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이 그런 고통을 겪고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해주고 싶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고쳐주고 싶겠지. 그런 게 인간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손자를 위해서 다른 아이를 희생시키는 거군요. 그럼 저 아이의 고통은 누가 보상해주죠? 당신의 연구에 이용되면서 겪은 고통은 어떻게 보상받죠? 만약 당신이 성공해서 저 아이가 앞으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된다고 해도, 이미 겪은 괴로운 기억이 사라져요? 기억 봉인이라도 할 건가요? 그리고 만약 이 아이 한명으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쩔 거죠? 또 다른 아이를 구해서 다시 반복할 건가요? 자신의 손자를 위해서라면 다른 아이들은 무슨 짓을 당해도 좋다는 거예요?!”
난 시험관에 들어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마법사에게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당신이 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 그것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의도는 좋지만 과정이 그릇된 이상, 이 연구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연구실에서 행해지고 있던 연구는 더 이상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의 방식대로는 안 된다.
내 말을 듣고 입을 다물고 있는 마법사에게,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 아이, 데려가겠어요.”
=================================================================================================== 지난 내용의 일부분은 낚시였습니다. 죄송합니다. (...)
오늘 학교를 갔더니, 단 하루 사이에 벚꽃이 만발했더군요. 그야말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정말 예뻤습니다. 꽃나들이(?) 나온 근처 주민 여러분 덕분에 교내가 많이 붐비더군요. 가족들과 같이 나온 아이들도 꽤 보이고.
벚꽃이 예쁜 건 사실인데,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죠. 일제시대 때 반강제...아니 사실상 강제로 심은 일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 아니지요. 정확히 말하면 아예 국화(國花)로 제정된 꽃도 없습니다. 벚꽃은 일반적으로 많이 좋아하는 꽃일 뿐이고, 국화(菊花)는 일본 황실의 상징으로 채택된 꽃일 뿐이죠.
역사적 이유 때문에 애꿎은 꽃이 매도당하는 걸 보면 참 마음이 복잡합니다. 꽃이나 사물에겐 죄가 없는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