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광이 달린다.
시리도록 푸른 빛의 잔상을 남기며 달리는 한명. 그리고 화려한 청색과 적색을 흩뿌리며 마주 달리는 또 한명. 직도와 쌍검이 충돌하며 발생한 충격파가 빠르게 퍼져나갔지만 그 충격파에 피해를 입은 생명은 하나도 없었다. 두명의 주변에 있는 것은 상처뿐인 대지와 그 위에 널려있는 수많은 시신들. 하늘 너머에는 무수한 빛줄기가 교차하며 섬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두명이 거리를 벌린다.
가쁜 숨을 내쉬며 상대를 노려보기를 몇분.
기합성도 없이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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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런 팬픽] 푸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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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력 437년.
여왕 E-34에 의해 아린 행성 침식 및 중앙기사단 붕괴, 그리고 복귀한 기사 앤 마이어에 의해 여왕 E-34가 쓰러진지 7년이 지났다.
당시 전투로 한쪽 팔을 잃고, 무리한 적파(赤波) 사용으로 인해 신체기능마저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진 앤은 A-10과 함께 변경 행성 레니핀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팔은 전자 의수로 대체했는데, 보통은 인조생체조직을 이용한 의체를 쓰지만 앤은 의체적합율이 현저히 낮아서 부득이하게 기계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인공피부 덕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팔로 보였다.
"A-10, 와인이 한 병 비는데?"
"어제 마스터께서 마신다면서 방에 들고 가셨는데요."
"설겆이 좀 제때 해줘. 싱크대가 넘치겠다."
"어제 마스터께서 직접 할 테니 두라고 하셨어요."
"...A-10? 출납기 안쪽이 좀 허전하지 않아?"
"이런 가게에서 장사가 잘 되는 편이 이상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랬다. 일단 조명은 어둑어둑하고, 일단 메뉴에 요리는 있지만 앤도 그렇고 A-10도 요리와는 인연이 없다. A-10은 인간이 아닌 만큼 레시피를 인스톨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후각과 미각이 인간과는 다르게 반응한다는 점. 도대체 맛있다는 것과 좋은 냄새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 요리는 만드는 것마다 대실패. 결국 가게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인스턴트 뿐이었다.
"으응~ 역시 요리사를 한명 고용하는 게 좋을까."
"고용하면 월급 주실 돈은 있으신 거겠죠?"
"...가끔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좀 헤아려 가며 말해주면 안 되겠니?"
"마스터가 똑 부러지게 행동하신다면 한번쯤 고려해겠습니다."
기동한지 8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A-10의 말투는 꽤나 신랄해져 있었다. 그야 매일같이 보고 듣고 지내는 앤이 도무지 야무지질 못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A-10이 바닥 걸레질, 앤이 열심히 밀린 설겆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시간은 오전 10시, 가게 오픈 시간은 11시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영업시간이..."
"여기 앤 마이어 기사님 계신가요?"
여자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가게에 퍼졌다. 의외의 목소리와 그 내용에 고개를 돌린 순간, 앤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레이!!"
소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앤은 카운터를 뛰어넘어 소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A-10은 그 상황을 보며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프레이... 프레이... 프레이...!"
"저, 저기, 잠시만요, 수, 숨이..."
"...아, 미, 미안! 너무 기뻐서 그만..."
"아,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저, 이름이 프레이가 아닌데요."
"어...?"
그 말에 앤은 끌어안고 있던 소녀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분명 소녀는 프레이와 같은 금발에 붉은 눈이었지만, 프레이가 약간 곱슬머리였던 것에 비해 소녀의 머리는 직모였다. 게다가 찬찬히 보면 얼굴 생김새도 약간 달랐다. 앤은 그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프레이가 여기 와 있을 리가 없지. 미안, 내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착각했어. 많이 놀랬니?"
"괜찮아요. 사실 이 비슷한 상황이 될 거라고 얘기 듣기도 했고."
"응? 누가 그랬는데?"
"레니 스탈리온 기사님이요."
"...레니? 혹시 검은머리에 오른쪽 눈에 안대 하고 있니?"
"네, 맞아요. 그리고 이거 전해드리라던데요."
소녀는 부스럭거리며 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서 앤에게 건넸다. 꺼내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안녕, 앤 기사님. 아, 이젠 완전히 은퇴했으니 기사님이란 호칭은 안 맞을까. 뭐, 그래도 익숙해진 호칭이니 계속 쓸게.
지금 간 애 보고 많이 놀랬지?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랬어. 거의 판박이더라구. 최근에 여왕을 퇴치한 바레이 행성에서 만난 아이인데, 고아인 것 같아. 골목에 숨어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는데, 조금만 늦었으면 괴수한테 당했을 걸.
나하고 같이 있는 기사들은 E-34에 대해서 꽤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다들 꺼림칙한 눈으로 보더라. 뭐, 1:1 면담 했더니 조용해졌지만. 덕분에 나도 <span id="POPS26920_42" class="pops">스트레스</span> 좀 풀었고 좋았지.
어쨌든 내가 계속 데리고 다니기에도 뭣하고, 레오하고 상의해봤더니 앤한테 보내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 어차피 은퇴했으니 걸릴 것도 없을 것 같아 보낸다. 이 아이도 보호자는 필요할 테고, 앤이라면 보호자 세월이 길었으니 괜찮을 것 같고 말이지?
그럼 애보기 잘 부탁해. 레니 스탈리온.(Rennie Stallion)
추신. 프레이랑 닮았다고 이런 짓 저런 짓 하면 안 된다?'
꾸깃.
나름대로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편지를 구기는 앤의 모습을 보고, 소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앤은 다시 표정을 풀고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별 것 아냐. 그건 그렇고, 이름이 뭐니?"
" '프레이야 샤텐니르'이에요, 올해 12살이구요. 잘 부탁드려요."
생긋 웃는 프레이야의 모습에서, 앤은 다시금 프레이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레이야는 가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A-10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A-10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여기 점원이세요?"
"아뇨, 정확히 말하면 직원이라기보다는 부점장에 가깝죠."
"부점장요?"
프레이야는 A-10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것이 자기와 별로 나이차도 안 나 보이는, 그것도 웨이트리스 복장에 대걸레를 들고 있는 소녀가 카페의 부점장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되는 게 당연했다. 그 대화를 들은 앤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부점장은 무슨 부점장이야. 애초에 일하는 사람이 딱 둘 뿐인데."
"정확히는 사람은 한 명인데요, 마스터."
"그런 부분에선 안 걸고 넘어져도 돼..."
"...?"
더더욱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프레이야를 보고, 앤은 그제야 A-10에 대한 소개가 아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얘기를 안 했구나. 이쪽은 A-10. 내 조수를 해주고 있는 인형이야."
"다시한번 인사드릴게요. 마스터의 뒤치닥꺼리를 도맡고 있는 A-10이에요. 마스터가 미덥지 않겠지만 제가 그만큼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마스터를 두고 할 말이냐..."
앤의 푸념을 듣는둥 마는둥, A-10과 프레이야는 서로 공손히 인사를 주고 받고 있었다. 금발의 미소녀 둘이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보기만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둘의 모습을 보고 있는 앤을 향해 A-10이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마스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어? 그래, 뭔데?"
"취향은 알지만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했다간 범죄라는 거, 알고 계시죠?"
"누굴 변태로 보냐!"
"취향? 범죄? 뭐에요, 그건?"
"그건 말이죠, 마스터의 취향이..."
"우와아앗! 하지 마! 남의 취향을 멋대로 왜곡하지 마!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오해받을 말 하지 마!!"
프레이야가 가져온 짐은 바퀴달린 여행용 짐<span id="POPS123_380" class="pops">가방</span> 하나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원래 쓰던 물건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레니가 데리고 있는 동안 사준 것들이었다. 사실 괴수가 침략한 행성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지니고 있는 물건이라면 간단한 소지품 외에는 있을 리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방이... 남는 게 있던가?"
"반쯤 창고로 쓰는 방이 두개 남아있습니다. 물론 안에 있는 물건들은 얼마 안 되고, 앞으로 쓸 일도 없어보이는 것들이구요."
"그렇다고 막 내다버리지는 마. 일단 그러면 방 하나에다 물건들 모아두면 되겠구나. 이 참에 정리...는 비운 방도 <span id="POPS3409_265" class="pops">청소</span>해야 하니 좀 무리일 것 같고, 나중에 하자. 오늘 하루는 바쁘겠네. 영업은 어렵겠는데."
"그럼 가게 뒷정리는 제가 하지요."
"그래, 부탁해... 아니, 그게 아니고! 물건 옮기는 걸 네가 해야지! 그게 이치에 맞잖아!"
생각해보면 명색이 인형인 A-10이 퇴역기사인 앤보다 완력이 좋은 건 당연했다. 그렇다면 힘쓰는 일에는 앤보다는 A-10이 적임인 것도 당연한 이치. 그런데 A-10은 은근슬쩍 그 일을 앤에게 떠넘기려고 한 것이다.
"눈치가 많이 빨라지셨군요, 마스터. 그 정도면 합격입니다."
"뭐가 또 합격이고 불합격이야... 됐으니까 프레이야한테 방 안내해주고 방에 쌓인 물건도 좀 옮겨줘. 난 정리하고 바로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방은 어느 걸로 할까요? 방 크기는 둘 다 비슷한데요."
"으음... 물건 덜 쌓여있는 쪽."
상당히 대강대강인 대답에 A-10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프레이야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앤과 A-10이 사는 집은 다소 낡아보이는 단독주택이었다. 변경 행성인데다 집 자체가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주변에 아파트는 없었고 대부분이 단독주택과 빌라였다. A-10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방은 1층에 두개, 2층에 두개가 있어요. 1층에 있는 방들은 지금 마스터와 제가 쓰고 있고, 2층의 방들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잡동사니가 들어차 있는데 치우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아, 그리고 가방은 이리 주세요. 들고 올라가기엔 무거울 테니까요."
"아뇨, 괜찮아요. 제 물건인걸요."
"무게도 그렇지만 그거 들고 계단 오르기에는 불편할 거에요. 그냥 이리 주세요."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프레이야는 A-10에게 짐가방을 넘기고 뒤따라 집에 들어섰다. 집은 넓지도 좁지도 않은 수준이었는데, 조금 삭막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장식이 없었다. 거실에는 흔한 사진 액자도 없이 <span id="POPS6341_232" class="pops">소파</span>와 작은 테이블, 다용도 콘솔과 대형 모니터가 전부였다.
2층으로 올라간 둘은 프레이야의 방으로 정해진 곳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가방을 내려놓은 A-10은 "잠깐 여기서 기다리세요" 하면서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후에 이런저런 청소도구들을 들고 왔다.
"정리하고 청소하고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뇨, 저도 도울게요. 이제 같이 살 건데 아무일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정리할 게 좀 많은데요. 게다가 무거운 것들도 있을 테고."
"할 수 있어요. 정 안 되면 청소만이라도 도울게요."
"그럼 제가 물건들 옮길 테니까 그 다음에 방 청소를 같이 하는 걸로 하죠. 옷이 상할 수도 있으니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 주세요. 전 그동안 먼저 짐 옮길게요."
"아, 네. 금방 갈아입고 올게요."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들고 내려가려 했지만, 금새 발을 멈추고 A-10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본 A-10은 방문을 열려다 말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빠진 게 있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옷 어디서 갈아입으면 되죠?"
"1층에서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이 제 방이에요. 거기서 갈아입으세요."
"네, 고마워요."
잠시 후 프레이야가 옷을 갈아입고 왔을 때, A-10은 맞은편 방으로 물건들을 거의 다 옮겨놓은 참이었다. 원래부터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근 4년간 청소는 커녕 들어가지도 않았던 방이니까, 청소하려면 아마 각오해야할 거에요."
실제로 물건을 옮기느라 방을 들락날락했던 A-10의 <span id="POPS27147_912" class="pops">슬리퍼</span>는 이미 새까맣게 더러워져 있었다. 암담한 눈으로 슬리퍼와 방 안쪽을 번갈아보는 프레이야를 향해 A-10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 마스터가 올 때까지 힘내봅시다."
그리고 6시간 후.
"나 왔어~ 정리는 다 됐어?"
참으로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앤이 집 안에 들어섰다. 거실에는 녹초가 되어 소파에 기대있는 프레이야와 막 홍차를 끓여온 A-10이 있었다. 샤워까지 끝마친 다음인지 둘 다 가운 차림에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오셨어요..."
"늦으셨군요, 마스터. 어디서 뭘 하시다 이제 오시는 건가요?"
"응? 아니, 그게 말이지. 정리를 하다보니까 재고 조사도 좀 해야할 것 같고 해서, 물품 수량 파악한 다음 주문 넣고, 이것저것 하다보니까 시간이 휙휙 가더라고."
비난의 기색이 섞인 A-10의 물음에 앤은 볼을 눈을 피하며 대답했고, 그 대답을 들은 A-10은 단언했다.
"농땡이 부리셨군요."
"윽."
아픈 곳을 찔린 앤은 더 변명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뭐, 상관없겠죠. 마스터의 가사능력은 괴멸적이라 만약 일찍 와서 도우셨다면 오히려 더 힘들어졌을 테니까요. 애초에 제가 그렇게 두지도 않겠지만 말이죠."
"A-10, 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마스터가 쏘세요."
"쏘고 자시고, 어차피 생활비는 가게 수입에서 나가잖아."
"기분 문제입니다, 기분 문제."
"...아, 그래. 알았다. 그럼 어디 보자..."
앤이 콘솔을 조작해 음식점과 메뉴를 확인하고 있자, 홍차를 마시고 어느 정도 기운이 난 프레이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켜 드시게요?"
"응. 사실 나 요리 잘 못하거든. 평소엔 A-10이 하지만 A-10도 잘하는 편은 아니고. 첫날부터 맛없는 음식을 먹여줄 수야 없잖니. 오늘은 세끼를 다 사먹게 되겠지만 이해해줘."
"저, 그럼 제가 해봐도 될까요?"
"응? 하다니, 뭘?"
"요리요."
""...요리??""
앤과 A-10의 말이 합창이 되어 나왔다. 둘의 반문에 프레이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집에서도 가끔 제가 직접 만들어 먹었거든요.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먹을만은 할 거에요."
"음... 하지만..."
앤은 팔짱을 끼며 프레이야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12살의 어린 아이. 실력에 대한 의문은 둘째치고, 애초에 키부터가 또래보다 작아서 찬장에 손이 닿지도 않을 것 같았다. 프레이야도 앤의 시선에서 그 생각을 읽었는지 곧바로 말했다.
"찬장에 있는 접시나 향신료같은 것들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하면 문제 없어요."
"아니 뭐, 맞는 말이긴 한데..."
"혹시 제 실력 의심하시는 거에요?"
"의심까지는 아니지만 말이지, 조금 미심쩍다고 할까, 내키지 않는다고 할까. 12살짜리 아이에게 요리를 시키는 건 어른으로서 자존심의 문제랄까..."
"마스터, 그런 자존심은 필요없어 보이는데요. 일단 식재료라면 있어요. 저도 도울 테니 같이 만들죠."
"그래요? 그럼 잘 부탁해요."
프레이야와 A-10은 어느샌가 앤을 무시한 채 주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것은 가사 무능력자의 초라한 모습 뿐이었다.
저녁식사 시간.
집에 있는 식재료는 정말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삶고 데우고 하면 되는, 반쯤 즉석식품에 가까운 종류들 뿐이었다. 냉장고를 열어본 프레이야는 그것들을 보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있는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해서 만든 요리들은, 상당히 개성 넘치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안 드세요?"
"아니, 먹어야지. 먹을 거야."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앤은 도무지 눈앞의 '음식'을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선 색상부터가 기묘한데다 원래 무슨 요리를 하려고 했던 건지 짐작조차 안 가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집에 남아있던 식재료들을 떠올리면 대강 후보는 예상이 되기는 하는데, 지금 테이블에 올라온 것들과는 21차원 8천만광년 이상의 거리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A-10을 보니 A-10은 이쪽을 완전히 무시한 채 데이터 갱신중이었다.
"그런데 프레이야."
"네? 왜요?"
"이 요리 이름이 뭐니?"
"이름 같은 거 없어요. 제가 만든 거니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프레이야 스페셜 Vol.1 정도?"
'Vol.1이냐!!'라고 영혼의 외침을 내지른 앤은 결국 마음을 굳히고 눈앞의 '음식'을 한숟가락 떴다. 프레이야가 맛있게 먹고 있으니 먹고 탈이 날 리는 없을 것 같았지만, 일단 눈으로 보고 생긴 선입견은 어쩔 수 없어서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망설이던 앤은 눈을 감고 잽싸게 음식을 입으로 밀어넣었다. 그러고서 입에서 씹어보기를 몇번.
'...어라?'
예상이 맞았다고 해야할지, 빗나갔다고 해야할지, 프레이야가 만든 요리는 상당히 맛있는 축이었다. 씹히는 감촉도 딱딱하지도 않고 흐물거리는 것도 아니고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앤은 이 날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건 사람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이디어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식사를 끝내고 다 같이 뉴스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는데, 앤이 프레이야에게 말을 걸었다.
"프레이야, 너 요리 맡지 않을래?"
"네?"
"마스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프레이야와 A-10이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자 앤은 설명을 계속했다. 아까 식사 중에 떠올랐던 아이디어였다.
"알다시피 우리 가게가 카페잖아. 식사 메뉴도 제공이 되는 쪽으로. 그런데 나나 A-10이나 요리 실력은 별로란 말이지."
"마스터의 경우에는 '별로'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프레이야 네가 가게의 요리를 담당해주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아. 게다가 평범한 요리하곤 다르니까 입소문이란 것도 꽤 탈 것 같고. 어때, 해보지 않을래?"
"마스터, 그거 아동 학대 내지는 노동력 착취..."
"응? 응? 어때?"
옆에서 걸고 넘어지는 A-10의 딴지조차 흘려들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프레이야에게 요리를 권유하는 앤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절박감과 기대감에 이성이 마비되셨군요'라는 A-10의 말에도 아랑곳않는 앤에게 프레이야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만세! 좋았어, 이제 적자는 면했다!"
프레이야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앤은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다녔고, A-10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앤이 좋아하는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상태였고, 그 모습을 본 A-10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사실 매달 가게 수입이 안 좋아서 적자만 났거든요.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가게 문 열고 흑자난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래도 운영이 돼요?"
"일단 마스터가 퇴역기사니까요. 기사 연금 나오는 걸로 적자 메꾸면서 살고 있었죠."
"...카페 안 하는 게 더 이득 아닌가요."
"마스터께서 고집이 워낙 심하셔서요."
말을 마친 프레이야와 A-10은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앤은 아직도 기쁨에 겨워 거실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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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사이트에 일주일에 한편 단위로 업로드했던 물건입니다. 어제...랄까, 오늘 새벽? 자정 조금 넘어서 마지막 편을 업로드한 기념으로, 블로그에도 하나씩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써가던 도중에 계속 본편의 설정이 공개되면서 설정이 충돌하는 부분도 좀 생겼지만, 그런 부분은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주시길 (...)
시리도록 푸른 빛의 잔상을 남기며 달리는 한명. 그리고 화려한 청색과 적색을 흩뿌리며 마주 달리는 또 한명. 직도와 쌍검이 충돌하며 발생한 충격파가 빠르게 퍼져나갔지만 그 충격파에 피해를 입은 생명은 하나도 없었다. 두명의 주변에 있는 것은 상처뿐인 대지와 그 위에 널려있는 수많은 시신들. 하늘 너머에는 무수한 빛줄기가 교차하며 섬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두명이 거리를 벌린다.
가쁜 숨을 내쉬며 상대를 노려보기를 몇분.
기합성도 없이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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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런 팬픽] 푸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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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력 437년.
여왕 E-34에 의해 아린 행성 침식 및 중앙기사단 붕괴, 그리고 복귀한 기사 앤 마이어에 의해 여왕 E-34가 쓰러진지 7년이 지났다.
당시 전투로 한쪽 팔을 잃고, 무리한 적파(赤波) 사용으로 인해 신체기능마저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진 앤은 A-10과 함께 변경 행성 레니핀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팔은 전자 의수로 대체했는데, 보통은 인조생체조직을 이용한 의체를 쓰지만 앤은 의체적합율이 현저히 낮아서 부득이하게 기계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인공피부 덕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팔로 보였다.
"A-10, 와인이 한 병 비는데?"
"어제 마스터께서 마신다면서 방에 들고 가셨는데요."
"설겆이 좀 제때 해줘. 싱크대가 넘치겠다."
"어제 마스터께서 직접 할 테니 두라고 하셨어요."
"...A-10? 출납기 안쪽이 좀 허전하지 않아?"
"이런 가게에서 장사가 잘 되는 편이 이상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랬다. 일단 조명은 어둑어둑하고, 일단 메뉴에 요리는 있지만 앤도 그렇고 A-10도 요리와는 인연이 없다. A-10은 인간이 아닌 만큼 레시피를 인스톨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후각과 미각이 인간과는 다르게 반응한다는 점. 도대체 맛있다는 것과 좋은 냄새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 요리는 만드는 것마다 대실패. 결국 가게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인스턴트 뿐이었다.
"으응~ 역시 요리사를 한명 고용하는 게 좋을까."
"고용하면 월급 주실 돈은 있으신 거겠죠?"
"...가끔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좀 헤아려 가며 말해주면 안 되겠니?"
"마스터가 똑 부러지게 행동하신다면 한번쯤 고려해겠습니다."
기동한지 8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A-10의 말투는 꽤나 신랄해져 있었다. 그야 매일같이 보고 듣고 지내는 앤이 도무지 야무지질 못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A-10이 바닥 걸레질, 앤이 열심히 밀린 설겆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시간은 오전 10시, 가게 오픈 시간은 11시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영업시간이..."
"여기 앤 마이어 기사님 계신가요?"
여자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가게에 퍼졌다. 의외의 목소리와 그 내용에 고개를 돌린 순간, 앤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레이!!"
소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앤은 카운터를 뛰어넘어 소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A-10은 그 상황을 보며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프레이... 프레이... 프레이...!"
"저, 저기, 잠시만요, 수, 숨이..."
"...아, 미, 미안! 너무 기뻐서 그만..."
"아,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저, 이름이 프레이가 아닌데요."
"어...?"
그 말에 앤은 끌어안고 있던 소녀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분명 소녀는 프레이와 같은 금발에 붉은 눈이었지만, 프레이가 약간 곱슬머리였던 것에 비해 소녀의 머리는 직모였다. 게다가 찬찬히 보면 얼굴 생김새도 약간 달랐다. 앤은 그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프레이가 여기 와 있을 리가 없지. 미안, 내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착각했어. 많이 놀랬니?"
"괜찮아요. 사실 이 비슷한 상황이 될 거라고 얘기 듣기도 했고."
"응? 누가 그랬는데?"
"레니 스탈리온 기사님이요."
"...레니? 혹시 검은머리에 오른쪽 눈에 안대 하고 있니?"
"네, 맞아요. 그리고 이거 전해드리라던데요."
소녀는 부스럭거리며 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서 앤에게 건넸다. 꺼내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안녕, 앤 기사님. 아, 이젠 완전히 은퇴했으니 기사님이란 호칭은 안 맞을까. 뭐, 그래도 익숙해진 호칭이니 계속 쓸게.
지금 간 애 보고 많이 놀랬지?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랬어. 거의 판박이더라구. 최근에 여왕을 퇴치한 바레이 행성에서 만난 아이인데, 고아인 것 같아. 골목에 숨어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는데, 조금만 늦었으면 괴수한테 당했을 걸.
나하고 같이 있는 기사들은 E-34에 대해서 꽤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다들 꺼림칙한 눈으로 보더라. 뭐, 1:1 면담 했더니 조용해졌지만. 덕분에 나도 <span id="POPS26920_42" class="pops">스트레스</span> 좀 풀었고 좋았지.
어쨌든 내가 계속 데리고 다니기에도 뭣하고, 레오하고 상의해봤더니 앤한테 보내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 어차피 은퇴했으니 걸릴 것도 없을 것 같아 보낸다. 이 아이도 보호자는 필요할 테고, 앤이라면 보호자 세월이 길었으니 괜찮을 것 같고 말이지?
그럼 애보기 잘 부탁해. 레니 스탈리온.(Rennie Stallion)
추신. 프레이랑 닮았다고 이런 짓 저런 짓 하면 안 된다?'
꾸깃.
나름대로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편지를 구기는 앤의 모습을 보고, 소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앤은 다시 표정을 풀고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별 것 아냐. 그건 그렇고, 이름이 뭐니?"
" '프레이야 샤텐니르'이에요, 올해 12살이구요. 잘 부탁드려요."
생긋 웃는 프레이야의 모습에서, 앤은 다시금 프레이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레이야는 가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A-10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A-10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여기 점원이세요?"
"아뇨, 정확히 말하면 직원이라기보다는 부점장에 가깝죠."
"부점장요?"
프레이야는 A-10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것이 자기와 별로 나이차도 안 나 보이는, 그것도 웨이트리스 복장에 대걸레를 들고 있는 소녀가 카페의 부점장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되는 게 당연했다. 그 대화를 들은 앤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부점장은 무슨 부점장이야. 애초에 일하는 사람이 딱 둘 뿐인데."
"정확히는 사람은 한 명인데요, 마스터."
"그런 부분에선 안 걸고 넘어져도 돼..."
"...?"
더더욱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프레이야를 보고, 앤은 그제야 A-10에 대한 소개가 아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얘기를 안 했구나. 이쪽은 A-10. 내 조수를 해주고 있는 인형이야."
"다시한번 인사드릴게요. 마스터의 뒤치닥꺼리를 도맡고 있는 A-10이에요. 마스터가 미덥지 않겠지만 제가 그만큼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마스터를 두고 할 말이냐..."
앤의 푸념을 듣는둥 마는둥, A-10과 프레이야는 서로 공손히 인사를 주고 받고 있었다. 금발의 미소녀 둘이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보기만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둘의 모습을 보고 있는 앤을 향해 A-10이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마스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어? 그래, 뭔데?"
"취향은 알지만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했다간 범죄라는 거, 알고 계시죠?"
"누굴 변태로 보냐!"
"취향? 범죄? 뭐에요, 그건?"
"그건 말이죠, 마스터의 취향이..."
"우와아앗! 하지 마! 남의 취향을 멋대로 왜곡하지 마!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오해받을 말 하지 마!!"
프레이야가 가져온 짐은 바퀴달린 여행용 짐<span id="POPS123_380" class="pops">가방</span> 하나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원래 쓰던 물건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레니가 데리고 있는 동안 사준 것들이었다. 사실 괴수가 침략한 행성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지니고 있는 물건이라면 간단한 소지품 외에는 있을 리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방이... 남는 게 있던가?"
"반쯤 창고로 쓰는 방이 두개 남아있습니다. 물론 안에 있는 물건들은 얼마 안 되고, 앞으로 쓸 일도 없어보이는 것들이구요."
"그렇다고 막 내다버리지는 마. 일단 그러면 방 하나에다 물건들 모아두면 되겠구나. 이 참에 정리...는 비운 방도 <span id="POPS3409_265" class="pops">청소</span>해야 하니 좀 무리일 것 같고, 나중에 하자. 오늘 하루는 바쁘겠네. 영업은 어렵겠는데."
"그럼 가게 뒷정리는 제가 하지요."
"그래, 부탁해... 아니, 그게 아니고! 물건 옮기는 걸 네가 해야지! 그게 이치에 맞잖아!"
생각해보면 명색이 인형인 A-10이 퇴역기사인 앤보다 완력이 좋은 건 당연했다. 그렇다면 힘쓰는 일에는 앤보다는 A-10이 적임인 것도 당연한 이치. 그런데 A-10은 은근슬쩍 그 일을 앤에게 떠넘기려고 한 것이다.
"눈치가 많이 빨라지셨군요, 마스터. 그 정도면 합격입니다."
"뭐가 또 합격이고 불합격이야... 됐으니까 프레이야한테 방 안내해주고 방에 쌓인 물건도 좀 옮겨줘. 난 정리하고 바로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방은 어느 걸로 할까요? 방 크기는 둘 다 비슷한데요."
"으음... 물건 덜 쌓여있는 쪽."
상당히 대강대강인 대답에 A-10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프레이야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앤과 A-10이 사는 집은 다소 낡아보이는 단독주택이었다. 변경 행성인데다 집 자체가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주변에 아파트는 없었고 대부분이 단독주택과 빌라였다. A-10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방은 1층에 두개, 2층에 두개가 있어요. 1층에 있는 방들은 지금 마스터와 제가 쓰고 있고, 2층의 방들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잡동사니가 들어차 있는데 치우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아, 그리고 가방은 이리 주세요. 들고 올라가기엔 무거울 테니까요."
"아뇨, 괜찮아요. 제 물건인걸요."
"무게도 그렇지만 그거 들고 계단 오르기에는 불편할 거에요. 그냥 이리 주세요."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프레이야는 A-10에게 짐가방을 넘기고 뒤따라 집에 들어섰다. 집은 넓지도 좁지도 않은 수준이었는데, 조금 삭막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장식이 없었다. 거실에는 흔한 사진 액자도 없이 <span id="POPS6341_232" class="pops">소파</span>와 작은 테이블, 다용도 콘솔과 대형 모니터가 전부였다.
2층으로 올라간 둘은 프레이야의 방으로 정해진 곳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가방을 내려놓은 A-10은 "잠깐 여기서 기다리세요" 하면서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후에 이런저런 청소도구들을 들고 왔다.
"정리하고 청소하고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뇨, 저도 도울게요. 이제 같이 살 건데 아무일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정리할 게 좀 많은데요. 게다가 무거운 것들도 있을 테고."
"할 수 있어요. 정 안 되면 청소만이라도 도울게요."
"그럼 제가 물건들 옮길 테니까 그 다음에 방 청소를 같이 하는 걸로 하죠. 옷이 상할 수도 있으니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 주세요. 전 그동안 먼저 짐 옮길게요."
"아, 네. 금방 갈아입고 올게요."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들고 내려가려 했지만, 금새 발을 멈추고 A-10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본 A-10은 방문을 열려다 말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빠진 게 있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옷 어디서 갈아입으면 되죠?"
"1층에서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이 제 방이에요. 거기서 갈아입으세요."
"네, 고마워요."
잠시 후 프레이야가 옷을 갈아입고 왔을 때, A-10은 맞은편 방으로 물건들을 거의 다 옮겨놓은 참이었다. 원래부터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근 4년간 청소는 커녕 들어가지도 않았던 방이니까, 청소하려면 아마 각오해야할 거에요."
실제로 물건을 옮기느라 방을 들락날락했던 A-10의 <span id="POPS27147_912" class="pops">슬리퍼</span>는 이미 새까맣게 더러워져 있었다. 암담한 눈으로 슬리퍼와 방 안쪽을 번갈아보는 프레이야를 향해 A-10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 마스터가 올 때까지 힘내봅시다."
그리고 6시간 후.
"나 왔어~ 정리는 다 됐어?"
참으로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앤이 집 안에 들어섰다. 거실에는 녹초가 되어 소파에 기대있는 프레이야와 막 홍차를 끓여온 A-10이 있었다. 샤워까지 끝마친 다음인지 둘 다 가운 차림에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오셨어요..."
"늦으셨군요, 마스터. 어디서 뭘 하시다 이제 오시는 건가요?"
"응? 아니, 그게 말이지. 정리를 하다보니까 재고 조사도 좀 해야할 것 같고 해서, 물품 수량 파악한 다음 주문 넣고, 이것저것 하다보니까 시간이 휙휙 가더라고."
비난의 기색이 섞인 A-10의 물음에 앤은 볼을 눈을 피하며 대답했고, 그 대답을 들은 A-10은 단언했다.
"농땡이 부리셨군요."
"윽."
아픈 곳을 찔린 앤은 더 변명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뭐, 상관없겠죠. 마스터의 가사능력은 괴멸적이라 만약 일찍 와서 도우셨다면 오히려 더 힘들어졌을 테니까요. 애초에 제가 그렇게 두지도 않겠지만 말이죠."
"A-10, 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마스터가 쏘세요."
"쏘고 자시고, 어차피 생활비는 가게 수입에서 나가잖아."
"기분 문제입니다, 기분 문제."
"...아, 그래. 알았다. 그럼 어디 보자..."
앤이 콘솔을 조작해 음식점과 메뉴를 확인하고 있자, 홍차를 마시고 어느 정도 기운이 난 프레이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켜 드시게요?"
"응. 사실 나 요리 잘 못하거든. 평소엔 A-10이 하지만 A-10도 잘하는 편은 아니고. 첫날부터 맛없는 음식을 먹여줄 수야 없잖니. 오늘은 세끼를 다 사먹게 되겠지만 이해해줘."
"저, 그럼 제가 해봐도 될까요?"
"응? 하다니, 뭘?"
"요리요."
""...요리??""
앤과 A-10의 말이 합창이 되어 나왔다. 둘의 반문에 프레이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집에서도 가끔 제가 직접 만들어 먹었거든요.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먹을만은 할 거에요."
"음... 하지만..."
앤은 팔짱을 끼며 프레이야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12살의 어린 아이. 실력에 대한 의문은 둘째치고, 애초에 키부터가 또래보다 작아서 찬장에 손이 닿지도 않을 것 같았다. 프레이야도 앤의 시선에서 그 생각을 읽었는지 곧바로 말했다.
"찬장에 있는 접시나 향신료같은 것들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하면 문제 없어요."
"아니 뭐, 맞는 말이긴 한데..."
"혹시 제 실력 의심하시는 거에요?"
"의심까지는 아니지만 말이지, 조금 미심쩍다고 할까, 내키지 않는다고 할까. 12살짜리 아이에게 요리를 시키는 건 어른으로서 자존심의 문제랄까..."
"마스터, 그런 자존심은 필요없어 보이는데요. 일단 식재료라면 있어요. 저도 도울 테니 같이 만들죠."
"그래요? 그럼 잘 부탁해요."
프레이야와 A-10은 어느샌가 앤을 무시한 채 주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것은 가사 무능력자의 초라한 모습 뿐이었다.
저녁식사 시간.
집에 있는 식재료는 정말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삶고 데우고 하면 되는, 반쯤 즉석식품에 가까운 종류들 뿐이었다. 냉장고를 열어본 프레이야는 그것들을 보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있는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해서 만든 요리들은, 상당히 개성 넘치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안 드세요?"
"아니, 먹어야지. 먹을 거야."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앤은 도무지 눈앞의 '음식'을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선 색상부터가 기묘한데다 원래 무슨 요리를 하려고 했던 건지 짐작조차 안 가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집에 남아있던 식재료들을 떠올리면 대강 후보는 예상이 되기는 하는데, 지금 테이블에 올라온 것들과는 21차원 8천만광년 이상의 거리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A-10을 보니 A-10은 이쪽을 완전히 무시한 채 데이터 갱신중이었다.
"그런데 프레이야."
"네? 왜요?"
"이 요리 이름이 뭐니?"
"이름 같은 거 없어요. 제가 만든 거니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프레이야 스페셜 Vol.1 정도?"
'Vol.1이냐!!'라고 영혼의 외침을 내지른 앤은 결국 마음을 굳히고 눈앞의 '음식'을 한숟가락 떴다. 프레이야가 맛있게 먹고 있으니 먹고 탈이 날 리는 없을 것 같았지만, 일단 눈으로 보고 생긴 선입견은 어쩔 수 없어서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망설이던 앤은 눈을 감고 잽싸게 음식을 입으로 밀어넣었다. 그러고서 입에서 씹어보기를 몇번.
'...어라?'
예상이 맞았다고 해야할지, 빗나갔다고 해야할지, 프레이야가 만든 요리는 상당히 맛있는 축이었다. 씹히는 감촉도 딱딱하지도 않고 흐물거리는 것도 아니고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앤은 이 날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건 사람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이디어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식사를 끝내고 다 같이 뉴스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는데, 앤이 프레이야에게 말을 걸었다.
"프레이야, 너 요리 맡지 않을래?"
"네?"
"마스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프레이야와 A-10이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자 앤은 설명을 계속했다. 아까 식사 중에 떠올랐던 아이디어였다.
"알다시피 우리 가게가 카페잖아. 식사 메뉴도 제공이 되는 쪽으로. 그런데 나나 A-10이나 요리 실력은 별로란 말이지."
"마스터의 경우에는 '별로'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프레이야 네가 가게의 요리를 담당해주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아. 게다가 평범한 요리하곤 다르니까 입소문이란 것도 꽤 탈 것 같고. 어때, 해보지 않을래?"
"마스터, 그거 아동 학대 내지는 노동력 착취..."
"응? 응? 어때?"
옆에서 걸고 넘어지는 A-10의 딴지조차 흘려들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프레이야에게 요리를 권유하는 앤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절박감과 기대감에 이성이 마비되셨군요'라는 A-10의 말에도 아랑곳않는 앤에게 프레이야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만세! 좋았어, 이제 적자는 면했다!"
프레이야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앤은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다녔고, A-10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앤이 좋아하는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상태였고, 그 모습을 본 A-10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사실 매달 가게 수입이 안 좋아서 적자만 났거든요.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가게 문 열고 흑자난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래도 운영이 돼요?"
"일단 마스터가 퇴역기사니까요. 기사 연금 나오는 걸로 적자 메꾸면서 살고 있었죠."
"...카페 안 하는 게 더 이득 아닌가요."
"마스터께서 고집이 워낙 심하셔서요."
말을 마친 프레이야와 A-10은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앤은 아직도 기쁨에 겨워 거실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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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사이트에 일주일에 한편 단위로 업로드했던 물건입니다. 어제...랄까, 오늘 새벽? 자정 조금 넘어서 마지막 편을 업로드한 기념으로, 블로그에도 하나씩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써가던 도중에 계속 본편의 설정이 공개되면서 설정이 충돌하는 부분도 좀 생겼지만, 그런 부분은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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