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자작소설] 용사, 마왕

몽상 2008. 9. 18. 09:21 by ZeX
"헉... 헉... 헉... 헉..."

무참히 파괴된 거대한 홀, 그곳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두 남자가 있었다. 한 사람이 쓰러진 다른 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형태로.
쓰러진 남자의 모습은 처참했다. 오른팔은 팔꿈치 위에서 사라졌고, 왼팔도 손가락 세개가 없어진 상태. 얼굴도 한쪽 눈을 감고 있고, 몸에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이어지는 커다란 자상이 있었다. 하지만 서 있는 남자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전신을 감싸고 있었을 금속 갑옷은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찌그러지고 군데군데 녹아있었다. 왼팔에 붙어있었을 방패는 이미 조각조각 나서 흩뿌려진 상태고, 들고 있는 검 역시 이가 빠진 모습이었다.

검을 들고 서있는 남자─용사는 쓰러진 남자─마왕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후우... 자, 이제 심판을 받을 시간이다. 마왕."

"...크, 크후, 크크큭... 크하하, 쿠헉, 쿨럭, 쿨럭!"

자신의 처지가 우스운 것일까, 마왕은 큰 소리로 웃으려다 피가 섞인 기침을 토했다. 입과 코와 몸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마왕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 심판이라... 후우... 그것 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그래..."

꾸욱. 마왕의 말에 검을 쥐고 있는 용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농담? 네놈은 이 상황이 농담으로 보이나? 현실도피도 정도껏 해라, 마왕. 넌 내게 패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지른 네 죄를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죄? 죄, 죄라... 후우... 내 죄를 목숨으로 갚는다면, 놈들의 죄는 영혼으로 갚아야 하나...? 큭큭, 쿨럭, 쿨럭."

"...'놈들'이라니? 설마 네놈 말고 더 있다는 말인가?"

마왕의 말에 용사는 정신을 다잡았다. 만약 지금 쓰러트린 마왕과 같은 무리가 더 있다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눈앞의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대마법주문과 온갖 강화마법이 빼곡하게 새겨진 갑옷과 방패와 마법검으로 무장하고 왔는데도, 그 결과는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마왕의 말이 정말이라면 대책이 필요했다.

"대답해라!"

"응? 아아... 있지, 있어. 나보다 수천, 수만배는 더 악마같고 끔찍하고 증오스러운 놈들이."

그렇게 말하는 마왕의 눈은 증오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육신은 분명 죽어가고 있건만 그의 영혼을 보여주는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지어 용사와 대결하던 순간보다도 더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은 생기의 빛이 아닌, 복수와 파멸의 증오를 담은 빛이었다.
용사는 내심 당황했다. '어떻게 된 거지? 마왕이 말한 녀석들은 한패가 아니었나? 왜 저런 눈을 하는 거지?' 잠시 머뭇거리던 용사는 속으로 고개를 내젓고는 검을 고쳐쥐며 말했다.

"누구냐, 말해라. 말한다면..."

거기까지 말한 용사는 말을 멈췄다. 이을 말이 없었던 것이다. 말한다고 살려줄 수야 없는 노릇이고, 실제로 지금 마왕의 상태는 부활주문이라도 쓰지 않는 한 소생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편안하게 보내준다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말문이 막힌 용사의 모습을 본 마왕은, 그 모습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크, 네놈도 고생이군. 좋다, 말해주마. 크큭... 그러자면 우선 내 소개부터 해야겠군, 후배."

"...후배라고?"

"그래, 내가 네놈의 선배다. 바로 네놈 전대의 용사지."

"허튼 소리 마라!!"

당장이라도 손에 든 검을 내리칠 것같은 용사의 모습에, 마왕은 얼굴에 비릿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믿든 말든 네놈의 자유다. 난 그저 네놈이 말하라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네놈이 말을 끊으면 내가 말을 다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니 그 입 닥치고 있어라."

이 때 마왕은 호흡도 고르게 되고 얼굴빛도 조금 나아진 상태였지만 용사는 그것이 실제로 몸이 회복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죽기 직전에 몸 상태가 약간 호전된다는 '회광반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용사는 잠자코 마왕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 17년 전인가, 나는 돌연 이 세계로 '소환'됐다. 자고 일어나보니 내가 누운 곳은 내 방 침대가 아닌 낯선 공원, 거기다 처음보는 옷차림의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더군. 그 상황은 너도 알겠지?"

용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마을 공원에서 시행된 소환의식에 의해 불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의심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낯선 곳에 떨어져 당황하고 있는데, 나를 소환했다는 작자들이 그러더군. '마왕을 퇴치할 용사'를 소환했고, 거기에 불려온 게 나라고. 난 당황했던 것만큼 또 황당했다. 이상한 곳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서 싸우라고? 싸우다 죽으면 나만 손해 아닌가. 그래서 못하겠다고 난리를 피웠지. 그랬더니 놈들은 일이 끝나면 돌려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소환 과정에서 내 몸은 마왕과 겨룰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고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바위를 주먹 한방에 부수고 도움닫기 한번으로 거대한 강을 뛰어건넌 다음에는 믿을 수밖에 없더군."

마왕이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용사는 점점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겪었던 과정과 너무나도 흡사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소환된 직후부터 자신을 관찰해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만약 그랬다면 소환 직후에 공격해왔을 것이다. 마왕도 자신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용사의 그런 복잡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왕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나오는 진수성찬에, 여자들을 시켜 밤시중까지. 결국 난 며칠 못 가서 놈들의 말에 따르게 됐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놈들의 대응은 능숙했는데도, 난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 정말이지 멍청하기 그지 없었다. 심지어 마을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으니, 말 다했지. 마왕 퇴치와 그 직후의 일은 지금 네녀석과 나의 상황과 거의 똑같으니 넘어가고,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찰칵. 용사는 검을 고쳐쥐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마을로 돌아오니 놈들은 엄청나게 환영을 해주더군. 하지만 그 눈빛이 뭔가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실망한 듯한 그 눈빛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환영을 해주니 받았지. 그날은 다른 때보다도 더 대단한 연회를 열기로 했다."

거기까지 말한 마왕은 다시금 눈에 증오를 불태우며 말을 이었다.

"그날 밤, 나는 날 소환한 놈들에게 죽을 예정이었다."

용사의 검이 흔들렸다.

"놈들은 용사를 그저 마왕을 퇴치하기 위한 도구로 보았을 뿐이었다. 원래 살던 세계로 돌려보낼 방법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용사? 그건 기르는 투견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마법 무구? 그건 기르는 투견을 단련시키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목적은 단 하나. 마왕을 죽이는 것. 물론 둘이 함께 죽으면 금상첨화. 하지만 나는 살아 돌아왔다."

뿌드득, 이가 부서져라 이를 간다.

"놈들의 어딘가 실망스러워하는 눈빛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함께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굳이 자신들이 죽이게 되어 '귀찮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미안하다거나, 불쌍하다거나 한 것이 아닌, 그저 번거로움 뿐이었다."

우드득, 손가락이 부러져라 주먹을 쥔다.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 마을 여자가 날 불렀다. 내가 이 곳에 와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내게 진실을 말하고 도망치라고 했다. 난 함께 가자고 했지. 그녀에게 가족이라곤 남동생 하나 뿐이라 마을에 얽매일 필요도 없었으니까. 내 설득에 그녀와 남동생은 나와 함께 도망쳤다. 그리고 열흘 후, 우리는 마을 놈들에게 붙잡혔다."

상체를 일으킨다. 후두둑,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쏟아진다.

"다름아닌 그녀의 동생이, 우리 위치를 알린 것이다. 마을을 빠져나오기 전, 연락 방법을 남기고 따라왔던 것이다! 고작 열흘간의 도주는 그렇게 끝났고, 그녀는 내 눈앞에서 사지를 잘린 채, 윤간당해 죽었다! 그 동생놈조차 웃고 즐겼단 말이다!"

왼팔로 땅을 짚고 일어선다. 후들후들, 기운이 빠진 다리를 꼿꼿이 세운다.

"그곳에서 나는 맹세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란 존재를 없애기로! 내가 마왕의 자리를 잇기로! 마왕이 죽으며 남긴 '너도 마왕이 될 거다'라는 말을 코웃음치며 무시했던 내가! 전혀 아는 바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강제로 불려온 내가! 단 하나의 호의마저 짓밟히고 절망해버린 내가! 이 땅을 지옥으로 바꾸겠다고!!"

쿨럭, 피를 토한다. 바닥에 흥건한 피는 상처에서 흐른 것인지, 방금 토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잠시 바닥의 피를 바라보던 마왕은 고개를 들어 용사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분노와, 안타까움과, 동정과, 슬픔이 담겨있었다.

"...내 말은 이게 끝이다. 믿고 안 믿고는 네놈의 자유겠지. 그리고... 내 목숨도 여기서 끝이다."

다음 순간, 마왕은 왼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마력을 방출했다. 강력한 마력탄이 마왕의 심장을 꿰뚫었고, 마왕은 그대로 절명했다. 용사는, 심장이 부서진 마왕이 마지막으로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중얼거렸던 것일까.

철컥, 용사는 검을 검집에 꽂고 몸을 돌렸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놈을 비웃어주자. 그리고 잠시나마 놈에게 현혹되었던 자신을, 그 마음을 씻어내자.

그래야한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

라이트노벨 중 이코노클라스트를 살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문득 그 주인공의 처지가 꽤나 매력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해서 탁탁 키보드를 두들겨 나온 물건.

...머릿속에서 조금 다듬고 30분만에 두들겨 나온 물건이라 역시 부족한 부분이 좀 보이는군요 -_-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 85 86 87 88 89 90 91 92 93 ··· 130 
BLOG main image
Chaotic Blue Hole
마비노기 하프 서버 : 실피리트 데레스테 : Sylphirit 소녀전선(中) : Sylphirit 소라히메(日) : Sylphirit 퍼즐 앤 드래곤(한) : 569,733,350
by ZeX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004)
게임 (104)
잡담 (269)
영상 (226)
독설 (168)
몽상 (130)
활자 (87)
드래곤 케이브 (12)

달력

«   2022/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08-11 20:47
tistory!get rss Tistory Tistory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