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램프(CLAMP)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도쿄 바빌론(이하 '바빌론').
우리나라에는 동경 바빌론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죠.
위의 그림은 최근에 나온 애장판의 3권 표지입니다만, 제가 본 것은 그 훨씬 전에 나온, 그것도 해적판이었습니다.
해적판인 덕분에 번역 센스는 아스트랄하다 못해 안드로메다를 넘어 사상의 지평선까지 지나갈 듯했죠.
(아직도 기억나는 게 '사쿠라즈카모리'를 '장도사'라고 번역한 것. ...아아 이 센스를 어찌하면 좋을꼬.)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생활 터전이 된 도시, 삭막하고 쓸쓸하며 비정한 도시를 배경으로 스바루, 세이시로, 호쿠토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 이 '바빌론'입니다.
제목부터 인간의 어리석음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한 바빌론이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정확히 역사상의 바빌론은 인간의 오만함이라든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바벨탑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바벨, 바빌론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오만함, 신에 대한 도전, 파멸을 향한 전주곡' 같은 이미지로 연결되지요.
'바빌론'에서 스바루는 도쿄에서 음양사 일을 하면서 여러 사건을 겪습니다. 그런대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사건들도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는 씁쓸한 기운을 지울 수 없는 일들도 많았죠.
제게 가장 인상깊었던 사건은, '아이의 복수를 위해 강아지를 죽여 저주의 주술을 걸려던 어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흉악범에 의해 목숨을 잃은, 단 하나뿐인 어린 딸아이의 복수를 위해 그 어머니는 예전같았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을 합니다. 바로 딸아이가 너무나도 좋아하던 강아지를 죽여, 그것을 매개로 강력한 저주를 범인에게 걸려던 것이죠.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스바루는 그 광경을 보고 기겁해서 그 아주머니를 말립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범인을 증오하느냐고.
그 아주머니는 대답합니다. 범인은 분명히 체포되었지만, 변호사가 정신이상을 주장하여 마지막까지 끌고 간 끝에 사형이 아닌 정신병원 수용에 그쳤다고. 그는 전혀 죄값을 치루지 않았다고. 재판정에서 그가 웃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저주를 걸어 범인을 죽이려 한다고 말입니다.
스바루는 저주는 너무나 악한 주술이기 때문에, 그 반동이 돌아오면 아주머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자신의 목숨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딸아이의 복수만이 중요했지요.
결국 스바루는 아주머니를 말리기 위해 소혼술(招魂術)을 써서 아이의 영혼을 불러냅니다. 아이는 분명 복수를 원하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말이죠.
하지만, 아이의 영혼은 스바루의 기대를 배신했습니다. 아니, 스바루의 마음이 너무 순진했다고 봐야겠죠.
나타난 아이의 영혼은, 어머니에게 애처롭게 매달리며, 오직 복수만을 원했습니다.
'아파요, 그 아저씨 미워요. 혼내줘요' 라며.
차마 그 말을 전할 수 없었던 스바루는 아주머니에게 아이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음성은 차단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말을 들려달라는 말에 '아이가 복수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도망치듯 떠납니다. 아이의 영혼의 원망섞인 눈동자에서 도망치듯이.
다른 어떤 에피소드보다도, 저는 이 에피소드가 인상깊었습니다.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더군요.
도쿄 바빌론 하면 저 에피소드가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저에겐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X'를 먼저 보고 '바빌론'을 본 탓에 세이시로의 배신이 쇼크가 덜했다는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
클램프의 작품은 그저 순수하게 웃으며 보기가 어려운 게 대부분이더군요. 그나마 사쿠라나 쵸비츠 정도가 좀 밝은 느낌이었달까... 엔젤릭 레이어는 안 봤으니 제외하고요.
뭐 그래도 성전-R.G Veda 처럼 무시무시하게 막 가는 전개는 이제 잘 안 보이는 걸 보면, 이분들도 생각이 많이 부드러워졌나 봅니다.
엉망진창에 공포스러운 번역 센스를 자랑하던 해적판이지만, 엔딩 멘트 만큼은 원판보다 해적판이 더 좋게 생각되더군요.
당신은 도시를 싫어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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