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후우, 적응 안 되네."

대문을 열고 들어선 시영은 아직도 낯선 집을 둘러보곤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전에 살던 아파트는 시우와 후지노, 스칼렛의 싸움 때문에 완전히 박살이 났고 다른 동도 정밀진단 결과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판단이 나와서 재건축에 들어가 있었다. 게다가 천재지변으로 보기도 어려우므로 보험회사도 규정상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시영은 물론이고 애꿎은 주민들까지 날벼락을 맞는 꼴이 되었고, 비난의 화살은 고스란히 시영과 정부에게로 돌아갔다. 시영은 IS 파일럿이자 그 가족이라는 이유, 정부는 IS가 국가 소유라는 이유였다. 결국 정부는 해당 아파트 단지를 재건축하기로 결정했고, 주민들에게는 그동안 지낼 비슷한 수준의 주택을 마련해주거나 아예 새 집을 구해서 이사를 가도록 해주기로 했다. 그 덕분에 시영은 주민들의 원망섞인 눈총을 받는 일 없이 새로운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어지간한 건 다 갖춰졌나?"

갓 퇴원해서 집에 왔을 때에는 기본적인 살림살이도 없었다. 애초에 집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에어컨이고 침대고 냉장고고 남아난 게 없었고, 대신 물건들을 사줄 사람도 없고 사준다고 한들 시영의 마음에 든다는 보장도 없어서 아무한테도 부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영은 퇴원한 당일부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구와 생필품을 구입해야만 했다. 시닝으로 가던 당시 집에 남아있던 물건들은 거의 다 박살나고 없어졌지만 그나마 휴대전화와 지갑, 그 안에 든 카드는 IS의 데이터 영역에 보관되어서 무사했고, 그 덕에시영은 별다른 문제 없이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점심때구나. 해먹기는 귀찮은데... 시켜 먹을까."

며칠 전까지 환자였으면서도 건강에 무심한 발언을 입에 담은 시영은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집어든 전화기의 액정을 본 시영은 낯선 번호에 의아해 하면서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한시영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 IS 스쿨 교사인 야마모토 사키입니다. 한시우의 담임이기도 하지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하셨나요?"

-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사키의 말에 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영은 사키와는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작년 스쿨 임해학교에서 잠깐 만난 것 외에는 친분이 없었고, 그래서 지금 사키가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시영은 승낙하기로 했다.

"네, 괜찮아요. 지금 나가면 되나요?"

- 아니요, 지금은 아닙니다. 내일 오후 1시쯤에 괜찮으신가요?

"상관없어요. 어디로 가면 되죠?"




다음날 오후 1시, 서울 명동의 어느 카페. 근처의 지하철 역 출입구에서 사키와 만난 시영은 카페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커피를 한모금 마신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사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닝 전투에서 부상이 심하셨던 걸로 아는데, 이젠 괜찮으신가요?"

"겉으론 그럭저럭이요. 옷 아래로는 아직도 붕대 투성이에요. 뼈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금 간 곳이 하도 많아서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죠?"

"저도 시닝 전투에 참가했거든요. 시우가 시영 씨를 안은 채 이리저리 피하는 걸 보고는 임해학교에서 시영 씨를 본 기억이 났죠."

"아, 그랬군요. 야마모토 씨는..."

"사키로 괜찮습니다."

"네, 사키 씨는 괜찮으신 건가요?"

"저도 실은 비슷한 처지에요. 덕분에 지금은 병가 중이라서 학기 중에 대놓고 놀고 있습니다."

사키의 농담에 시영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둘은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웃음이 지나간 후, 두 사람의 사이에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말을 이은 것은 역시 사키였다.

"오늘 제가 뵙자고 한 건 시우 때문입니다."

사키의 말을 듣고도 시영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고, 사키는 그런 시영의 기색을 살피며 계속 말했다.

"시닝 전투에서 시우가 마지막에... 그렇게 된 것은 저도 직접 봤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시우의 흔적은 발견되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은황의 파편은 일부가 확인되었지만 그게 전투중 떨어져나간 것인지 폭발에 의해 생긴 것인지 구분은 어렵다고 들었고요. 그래서, 시영 씨는 혹시 알고 계시나 싶어서요."

"...저도 알고 싶어요."

사키의 말에 시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시우는 그 후로 계속 행방불명이에요. 갖은 수를 다 썼지만 시우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얻을 수 없었어요. 만의 하나라는 가능성을 걸고 IS 코어의 위치를 탐색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어요. 저도... 저도 시우가 보고 싶어요."

시영의 목소리는 갈수록 떨리더니 마지막에는 울음섞인 목소리가 되어 있었고, 결국 시영은 말을 멈추고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사키는 아무말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잠시 후 약간 진정이 된 시영은 사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걱정해주시니 고마워요. 이렇게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고 순수하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고맙네요."

"아뇨, 저도 실은 이해관계에 얽혀있어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 녀석은 제 학생이니까요. 오히려 아무런 사심없이 걱정해주는 아이들이 따로 있어서 전 그 등쌀에 떠밀렸다고 할까요."

"그래요? 그 애들이 누군데요? ...아."

장난스런 사키의 대답에 역시 미소를 지으며 되묻던 시영은 말하고 나서야 그 아이들이 누군지 짐작이 갔고, 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하시는 그 애들이 맞을 거에요. 스쿨 학생인 엘리자베스 키르히아이스와 사브리나 에인세, 나알리아 다마리스입니다. 듣기로는 지난 여름방학 때 만나셨다면서요?"

"네, 그랬죠. 그렇군요, 그 애들이... 정말 고마운 아이들이네요."

"정말, 착해빠졌다니까요."

"글쎄요, 꼭 그것만일까요?"

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대화의 주제는 시우와 관련된 것을 벗어나지 않았고, 때때로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했지만 금방 다시 회복되곤 했다. 시영은 사키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쌓여있던 무거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키와 만나고 며칠 후, 시영은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직 몸이 완전회 회복된 것도 아니고 집에 들여놓은 세간살이도 모두 새것이어서 특별히 정리할 것은 없었지만 시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지지 않도록 틈날 때마다 몸을 움직이곤 했다. 덕분에 집안에 있는 물건들의 배치는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고 있었다.

"하아..."

거실의 정리를 대강 끝낸 시영은 고개를 돌려 방을 보았다. 자신의 방은 처음 시작할 때 이미 해버렸기에 오늘은 더 할 필요가 없었지만, 다른 한 방은 이사를 오고 난 후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청소는 제때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방은 쓰이는 일 없이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주인이 없는 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그 방을 쓰고 있어야 할 사람을 떠올린 시영은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 나도 참 주책이네. 괜히 혼자서 울기나 하고. 샤워나 하자."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시영은 더 우울해지기 전에 씻으면서 기분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땀이 조금 나기도 했고, 마음속으로는 씻으면서 마음놓고 울어보자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시영이 갈아입을 속옷을 가지러 방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

"어? 이상하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세요?"

갑 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시영은 현관으로 다가갔고, 인터폰을 드는 대신 현관문 너머로 직접 말을 걸었다. 시영은 인터폰을 드는 것이 귀찮아 종종 이렇게 찾아온 사람에게 말을 걸곤 했고, 시우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물건은 쓰라고 있는 거다'라며 타박을 했지만 시영은 고칠 생각이 없었다. 현관문 너머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그나뢰크의 봉기가 진압된 지 3일이 지난 후, 시우는 낯선 침대에서 눈을 떴다.

"...하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멍한 머리로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이 어디 있고 왜 누워있는지 천천히 생각하던 시우는 의식을 잃기 전 후지노와 스칼렛이 자신을 붙잡고 자폭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큭! 끄으으윽..."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려던 시우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상체를 채 반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할수만 있다면 몸을 웅크린 상태로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그것도 힘들 정도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통증이가라앉자 시우는 그대로 침대에 축 늘어졌고, 그런 시우에게 은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시우?'

'아, 은황. 너야말로 무사했구나.'

'무사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현재 전체 기능의 73%가 정지되어 IS 모드 전환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자가 복구까지는 짧아야 1개월, 길어지면 2개월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 역시 피해가 컸구나. 전투는 어떻게 됐어?'

'시우가 폭발에 휘말리고 약 40분 뒤, CPR 긴급 정지 코드에 의해 모든 US의 기동이 강제 중지되며 전투가 끝났습니다. 현재 보도된 사항에 따르면 라그나뢰크가 봉기에 사용한 US는 전기 회수되어 마지막으로 전장이 된 국가의 국가기지에 보관중이라고 합니다.'

'뭐? 그러다 그거 그 나라가 먹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 때문에 UN에서 감시단도 파견되었습니다. 현재 UN에서 US의 처리를 위해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시우는 싸움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그제야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큰 부상을 입고 누워있다고는 해도 아직 라그나뢰크가 설치고 다니는 중이라면 또 언제 습격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편해진 시우는 뒤늦게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병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링거도 없고 침대도 병원 침대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신이 환자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온몸이 붕대투성이에 왼팔은 아예 팔꿈치 위부터 손끝까지 빈틈없이 붕대로 감싸여 있었지만 그것도 전문가의 솜씨는 아닌 듯 어딘지 모르게 어설펐다.

'그런데 은황, 여기는 어디지? 병원은 아닌 것 같은데.'

'중국 칭하이 성의 칭하이 호(湖) 인근 민간 주택입니다.'

'...민간 주택? 그것도 중국?'

'네, 누군가의 별장으로 생각됩니다.'

은황의 대답을 듣고도 시우는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 있었다. 때마침이라고 할까, 그 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평상복을 입은 초로의 동양인 남성이었다. 남자는 구급함을 가지고 방에 들어서다가 시우가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고, 방 구석에 있는 책상에 구급함을 내려놓고는 밝은 표정으로 시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물론 중국어를 모르는 시우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고, 그저 애매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남자는 웃으며 시우의 어깨를 두들겼고, 시우는 마주 웃어주려고 했지만 남자의 손이 어깨를 치는 순간 느껴지는 통증에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엎어졌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미안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지은 채 서둘러 구급함을 가져왔다. 어쨌든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시우는 안심하며 은황에게 부탁했다.

'은황,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통역 좀 해줄래? 내 말을 전달은 못해도 알아듣긴 해야 의사 표현을 하지.'

'알겠습니다. 젊은이, 말을 못하나? 알아들으면 얘기 좀 해보게. 에휴, 젊은 사람이 이게 무슨 꼴인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호숫가에 떠내려올 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처음엔 송장 치우는 줄 알고 아주 기겁했단 말이네. 아, 아니 그렇다고 자네가 송장이길 바랐다는 말은 아니고.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가? 저 호수 건너편 멀리 있는 연구소 근처에서 IS랑 US인지 뭔지가 크게 한판 붙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혹시 거기에 있었나? 그러길래 남자가 그런 곳에 가는 게 아닐세.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자, 그럼 붕대 좀 바꾸게 팔 좀 내밀어보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약과 붕대를 들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고, 시우는 미안한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왼팔을 내밀었다. 시우가 전혀 못 알아듣는 줄 알았던 남자는 그 행동을 보고 조금 놀라며 말했다.

'허? 자네 말 못 알아듣는 게 아니었나? 응? 아니라고? 말만 못한다는 겐가? 아, 미안허이. 내가 괜한 걸 물었구먼. 자, 어쨌든 팔 좀 내밀어보게. 신경쓰지 말게. 이미 알고 있으니까 감출 필요는 없어.'

남자의 말에 시우는 이상한 느낌을 받고도 별 생각없이 붕대를 풀게 내버려 두었지만, 이윽고 드러난 왼팔의 모습에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우의 왼팔은 팔꿈치 바로 위부터 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은황이 내 왼팔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US 2대가 자폭하며 발생한 폭발력은 절대방어를 발동시킬 수준이었지만, 그대로 절대방어를 발동할 경우 시우가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실드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며 절대방어의 발동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실드가 파괴되어 시우가 큰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우.]

"어... 아니, 됐어. 사과 안 해도 돼. 그런 상황에서 절대방어가 발동됐으면 난 진짜로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시우는 아직도 낯선 은색의 왼팔을 움직이며 그렇게 말했다. 움직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 신체의 다른 부분과 닿았을 때 느껴지는 금속의 촉감이 익숙하지 않아서 계속 붕대를 감아둔 상태였다.
눈 을 뜨고나서 3일간 시우는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었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 남자-어떤 부자의 별장 관리인이었고, 시우가 누워있던 방은 별장의 관리인 주택에 있는 방 중 하나였다. 별장 관리인에게 전용 주택이 주어진데다 그게 어지간한 일반 주택에 맞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우가 세상의 불공평함에 눈물을 흘린 것은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였다-에게 부탁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시우는 자신이 쓰러트린 한주가 라그나뢰크의 리더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주가 쓰러진 직후에 폭발에 휘말렸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대로 전투가 속행되었으면 시우는 다른 라그나뢰크 멤버들에게 집중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십여 대의 US에게 동시 공격을 받는 상상을 한 시우는 몸서리를 치고는, 이윽고 찾아온 통증에 또다시 온몸을 웅크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시우, 괜찮습니까?]

"으...응, 괜찮아. 아, 역시 몸이 정상이 아니니까 영 안 좋네."

[시우가 완전히 회복하려면 최소 6개월은 필요합니다. 지금 이렇게 밖에 나오는 것도 치료 면에서나 신분 노출 면에서나 좋지 않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그래, 슬슬 들어갈까. 그건 그런데, 대기 모드가 이렇게 크게 변할 수도 있는 거야?"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대기 모드의 디자인을 재설정한 후, 초기 설정과 차이가 생긴 부분은 데이터 영역에 보관된 기존 기체의 질량과 부피를 늘리거나 줄여서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거 코어에 부담은 없고? 원래 초기화 할 때마다 코어에 부담가서 수명이 깎인다며."

[완전한 초기화보다는 부담이 적습니다.]

"있기는 있단 얘기네. 그래서 정확히 얼마나 수명이 줄었지?"

[...활동 가능 기간이 약 3년 감소했습니다.]

은황의 말을 들은 시우는 말없이 관리인 주택으로 걸음을 옮겼고, 대문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시우는 천천히 왼팔을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

은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시우는 은황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도 세상은 빠르게 변해서, 3월 말에 군수 산업체 연합은 US의 AI를 재설계하여 IS 공격 명령을 제거했음을 공표했고 실제로 2주간의 IS-US 합동 훈련에서도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전에 US를 발주했던 각국은 기존 주문량 그대로 US를 재발주했고, IS는 서서히 도태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군산연은 라그나뢰크의 반란과 CPR 긴급 정지 코드의 건으로 상당히 신용을 잃었지만 US 발주 국가에 한해서 AI 프로그램을 공개함으로써 어느 정도 회복하는데에 성공했다. 물론 시우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들이었다.
별장 관리인과 지내는 생활은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관리인은 시우를 늦둥이 아들이나 친구 아들처럼 대해주었고, 시우도 여러가지로 자신을 돌봐주는 관리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의사 소통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적어도 관리인의 말을 알아듣고 좋고 싫은 것 정도는 표현할 수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시우의 몸도 상당히 좋아졌고, 은황도 전투는 무리이지만 통상기동은 가능할 정도로 기능이 회복되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겠지?"

[가능하다면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쉬는 걸 추천합니다만, 제 의견은 안 들으시겠죠.]

"미안, 미안. 그래도 이 이상 신세를 질 수도 없잖아. 계속 숨겨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근처에서 있었던 IS와 US의 대규모 전투 때문인지, 시우는 자신이 머무는 동안 중국 공안이 수시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공안이 관리인 주택에 접근할 때 시우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세계 유일의 IS 남자 파일럿이고, 지금은 공식적으로 행방불명 상태이니 무슨 짓을 당해도 알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은황도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저항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위기일발이었다. 하지만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시우의 모습을 본 관리인은 공안에게 시우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안이 돌아간 후에 관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공안 놈들 알고 보면 전부 세금 도둑이라고. 하라는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쓸데없이 사람만 괴롭히고 귀찮게 한단 말이야. 지금 온 저 놈도 뒷소문이 아주 무성해. 그런 놈들을 내가 왜 도와줘야 하겠나?"

이후에도 몇번이나 공안이 들렀지만 그때마다 관리인은 모르는 척 하며 시우를 숨겨주었다. 덕분에 시우는 지금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시우는 떠날 결심을 하고 막 별장에서 돌아온 관리인을 찾아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손짓 발짓을 섞어 이제 떠나려고 한다는 것을 밝혔고, 어떻게든 대충 알아들은 관리인은 시우의 손을 끌어 돈을 조금 쥐어주었다.

"떠나는 마당에 긴 말은 않겠네. 조심해서 가게. 앞으론 험한 일에 끼어들지 말고."

서운한 기색이 가득한 관리인을 뒤로 한 시우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황을 기동하고 날아올랐다. 외부 장갑은 엉망이었지만 적어도 에너지 전달 계통과 기동 계통, 스텔스 계통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여서 그 후로는 들키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개월동안 은황이 그쪽에만 회복 기능을 집중시킨 덕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은황, 지금 누나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

[코어 네트워크를 경유해서 홍천의 위치를 파악하면 가능합니다.]

"그럼 부탁할게."

2시간 뒤, 시우는 은황이 알아낸 시영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시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            
          누구세요 하고 묻는다.
아아, 하고 이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누구일까, 하고 의문과 기대가 동시에 든다.
나야 누나 하고 대답한다.             
              나야 누나 하는 대답이 들린다.
급하게 문을 여는 소리.            
            급하게 달려가 문을 연다.
벌컥 열린 현관문 너머에 보이는 그리운 얼굴.                      
                      열어젖힌 현관문 너머에 있는 꿈에 그리던 얼굴.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한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다녀왔어.     
    어서와.




품안에 느껴지는 따뜻함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행복과 절망이 뒤섞인, 두 사람이 꾸어오던 꿈은 이제야 끝이 났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

엔딩입니다.
제가 쓴 것들 중에서는 그래도 나름대로 해피 엔딩으로 끝난 편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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