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합니다, 앨버트로스 일렉트로닉스입니다.
"413번으로 연결 부탁합니다."
- 네, 알겠습니다. 곧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삐-) 그래, 별일은 없나?
"네, 이쪽은 평소와 같습니다. 여전히 긴장감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 학교를 표방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커리큘럼도 일반적인 고등학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건 그렇고, 드디어 타케미카즈치와 덴드로븀이 완성됐다.
"정말입니까?!"
- 기쁜 건 알겠다만 흥분하지 마라.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리 없다.
"아, 네. 죄송합니다."
- 그래서 말인데, 테스트도 해야하니 잠시 돌아왔으면 한다. 적당한 이유는 이쪽에서 만들지.
"알겠습니다."
- 그리고 '녀석'은 어떤가? 뭔가 좀 변화가 있나?
"아니요, 여전합니다. 오히려 방학 전보다 실력은 더 떨어진 것 같아 보이지만..."
- 뭔가 이상한가?
"제가 알기로는 그 녀석은 원래 올라운더이지만 근접전에 조금 더 우수했습니다. 하지만 1학기 때에는 원거리에 더 치중했고, 얼마 전 있었던 모의전에서는 오로지 원거리 공격만 했습니다. 어쩌면 무언가 기억해내고 일부러 근접전을 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확인된 것은 아니겠지?
"예. 아직은 예상입니다."
- 좋아.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라. 테스트 준비가 끝나는 대로 스쿨에 연락을 넣을 테니 준비하도록. 아마도 10월 초가 될 것 같다.
"알겠습니다."
IS 스쿨에서는 축제 준비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들떠 있었다. 운동장과 아레나 여기저기에는 야외에서 설치할 물건들이 차츰 모양을 갖춰갔고, 수업 중에도 학생들은 교사의 말은 듣는둥 마는둥 하며 온통 축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떤 반은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서 교실 뒤편과 복도까지 점거하고 있었고, 연극 공연 같은 것을 준비하는 동아리의 학생들은 눈 밑에 슬슬 다크 서클이 생기고있었다. 반면 C반은 부피가 큰 준비물품이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고, 의상이 조금 문제였지만 그것도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우리 이모가 그런 쪽 의상 전문점 하시는데, 거기다 부탁해볼까?"
반 친구 중 한명인 타마키 카나코(玉城 香奈子)의 친척이 이른바 그쪽 업계 종사자였 던 것이다. 덕분에 일반적인 여성 의복부터 OL 슈트, 고딕 드레스, 치파오, 아오자이, 심지어 웨딩 드레스까지 준비할 수 있었다. 참고로 전신에 착 달라붙는 가죽계열 의상(그것도 속칭 본디지 타입)도 있었지만 반 인원 상당수의 반대와 시우 본인의 극력 거부-그걸 입느니 차라리 IS 무단 기동하고 탈주할 테다!-로 겨우 그 의상은 피할 수 있었다. 덤으로 웨딩드레스와 OL 슈트에 맞춘 건지 턱시도와 양복 정장까지 몇벌 준비되어 왔고, 그것을 본 시우는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카나짱, 그런데 이건 왜 온 거야?"
차곡차곡 도착하는 의상들을 정리하던 후지노가 턱시도와 양복을 보고 묻자, 카나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뻔하잖아. 시우와 함께 사진 찍을 용도야."
"사진?"
"그래, 그냥 옷 입혀보고 끝내기엔 아쉬우니까 우리들도 같이 포즈 좀 취하고 사진도 찍어둬야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거 해보겠니?"
"그러고보니 그렇네."
"과연, 업계인 이모님을 헛으로 둔 게 아니구나."
"이모님이 업계인인 것하곤 상관없는 거 아냐?"
"그런데 공짜로 찍게 할 건 아니지? 장당 얼마로 할 거야?"
그런 대화를 들으며 시우가 속으로 한탄하고 있으려니, 리자가 시우에게 다가왔다. 그 손에는 원피스가 들려있었고, 시우는 또다시 온몸을 감싸는 불길한 예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리자는 옷을 내밀면서 말했다.
"한번 갈아입어 볼래?"
"...나중에 그냥 축제 때 입으면 안 돼?"
이미 지칠대로 지친 시우는 힘없는 목소리로 반항해 보았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그랬다가 그때 가서 사이즈 안 맞으면 어쩌려고. 여기서 입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다니깐. 옷단이 안 맞으면 조정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얼른 갈아입어."
처음에 말할 때에는 분명히 부탁 내지는 권유였는데 마지막에는 거의 강제사항으로 바뀌었다. 시우는 마지못해 옷을 받아들고는 리자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디서 갈아입지?"
"음... 여기?"
"교실에서?"
"간이 탈의실용 칸막이도 준비해 놨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전혀 고맙지 않은 배려와 쓸데없는 철두철미함에 시우는 속으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순식간에 설치된 간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간 시우는 우선 교복을 벗은 다음 원피스를 입으려고 했지만, 이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시우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개만 탈의실 칸막이 밖으로 내밀고 리자를 불렀다.
"저기... 리자."
"응? 벌써 다 갈아입은 거야? 빠르네."
"아니, 그게 아니라..."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더 말하긴 뭔가 부끄러운 듯 우물쭈물 거렸고, 그 모습을 본 여학생들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느꼈다. 시우가 이렇게 대놓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게다가 평소에 어필을 안 해서 그렇지 얼굴도 귀여운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런 여학생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우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고, 기다리다 못한 리자가 다그쳤다.
"무슨 일인데 그래? 옷이 상하기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 옷을, 그러니까... 잠글 수가 없어..."
뒷부분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교실은 시우가 고개를 내민 순간부터 정적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듣기에는 충분했다. 듣기는 들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모두들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잠깐의 시간동안 망상까지 발전한 사람도 몇명 있었다.
"등짝..."
"세, 세미 누드?"
"내가 옷 입혀줄게!"
"아, 치사해! 내가 해줄 거야!"
"아니, 내가...!"
반쯤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버린 교실의 분위기를 본 시우는 놀라서 간이 탈의실 안으로 숨었고, 그 곁에 있던 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여러모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축제 당일이 되었다. 일단은 학교 축제이니만큼 외부인도 입장은 가능하지만 학생 1인당 3장씩 주어진 입장권이 있어야만 했고, 때문에 학교 밖에서는 입장권이 암거래가 된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그런 행위는 적발되는 즉시 입장권 압수에 해당 입장권에 이름이 기입된 학생의 학생회 호출로 이어졌다. 이젠 없어질만도 했지만 어째 매년 한두번씩은 꼭 벌어지는 일이었다.
"자, 그러면... 이걸로 준비 끝. 그런데 역시 조금 샘 나네."
"남자한테 샘 내서 어쩌려고..."
1학년 C반의 '인간 마네킹 한시우' 행사는 이제 거의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시우는 대기시 복장으로 지정된 원피스를 입고 카나코에게 가벼운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막 메이크업을 끝낸 카나코는 시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서 보며 솔직한 감상을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귀여운 여자아이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체격도 작고 호리호리한 데다 얼굴도 나이보다 어려보이고, 결정적으로 지금은 가발까지 써서 어디로 보나 여자아이였다.(그것도 원래 나이보다 2~3살 어려보이는 수준이었다.)
"우웅, 역시 아깝네... 저기, 시우. 오늘 행사 끝나고 우리반만 따로 좀 시간 내지 않을래?"
"기각."
"에이, 그러지 말고. 응?"
"적당히 해라... 준비한다는 핑계로 이런저런 옷들 죄다 입혀보고 사진 찍었던 걸로 모자라냐?"
지금까지 준비하면서 시달려왔던 시우는 그동안 쌓인 정신적 피로에 당일 행사의 부담감까지 더해지면서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귀여운 여자아이가 날카롭게 말한다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상은 오히려 보는 사람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하아, 하아..."
"잠깐, 누가 거기 메릴 좀 말려 봐."
"아, 안 돼... 너무 자극이 강해..."
"정신 차려. 손님들 상대하고 통제하는 건 우리들 몫이라고. 그런데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니?"
"참자, 참자... 참아야 하는데에엣...!"
벌써부터 위험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한 C반의 모습을 본 시우는 옆에 서 있는 리자를 슬쩍 돌아보았고, 리자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마주 볼 뿐이었다. 그때, 스피커로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지금부터 IS 스쿨 축제를 시작합니다. 외부 관람객 여러분은 교문에서 배부되는 안내지를 받으신 후 주의사항을 반드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은 모두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리고 오늘의 교내 메인 이벤트에 대해서는 시작 직전에 관련 사항을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방송이 종료되는 것과 동시에 스쿨의 교문이 개방되었고,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초대권을 보이며 입장하기 시작했다. 축제 실행위원들은 바쁘게 초대권을 확인하며 안내지를 나누어주었고, 사람들은 곧 안내지를 보며 자신들이 가려고 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교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눈치챈 시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정한 지옥의 시작인가..."
"어떤 의상을 원하세요?"
"으음~ 몸에 안 맞게 큰 옷. 정확히는 소매가 좀 길어서 손등까지 가려지는 옷으로 해주세요. 안경도 써주시면 좋겠는데요. 약간 흘러내리는 듯한 포즈로."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문사항을 확인한 메릴은 그 내용을 카나코에게 전달했고, 카나코는 의상과 소품을 찾아 의자에 앉아있던 시우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세명째였지만 시우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자, 힘내. 시우만 믿고 있으니까."
"...기대를 배신해버리고 싶어지는데."
"전교생을 적으로 돌리고 싶다면야 말리진 않을게?"
생긋 웃는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 카나코의 얼굴을 보며 시우는 잠자코 간이 탈의실로 들어갔고, 주문사항이 적힌 쪽지의 내용대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포즈를 취했다. '흘러내리는 안경을 두 손으로 살짝 받쳐 올리는 듯한 포즈'를 취하며 손님-3학년 여학생-을 살짝 올려다보자 3학년 여학생은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더니 고개를 뒤쪽으로 휙 돌렸다.
'뭔가 잘못했나? 원했던 게 지금 이 포즈가 아니었나?'
당황한 시우가 포즈를 바꿔보려는데 고개를 돌린 채인 3학년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 포즈 그대로 사진 찍어주세요."
"같이 안 찍으셔도 되겠어요?"
"네, 그냥 그대로."
"알겠습니다. 시우, 한번만 더 포즈 취해봐."
시우는 영문을 모른 채 한번 더 아까처럼 포즈를 잡았고, 그 모습을 찍은 리자는 즉석에서 사진으로 인화해서 여학생에게 건넸다. 물론 사진값과 감상료(...)를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한명 한명한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지 않아? 특히 옷 갈아입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이대로라면 오늘 축제 끝나기 전에 손님은 많아봤자 30명 정도가 한계일 거야. 이래선 의상 대여비도 안 나오지 않을까?"
또 한번 촬영이 끝나자 시우는 의자에 앉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매번 손님이 올 때마다 옷을 갈아입다보니 시간이 만만찮게 오래 걸렸고, 그러다보니 일부 손님들은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가기까지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매상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시작한 주제였지만 이래서는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시우의 걱정은 괜한 생각이었다.
"걱정 마, 카나코네 이모님이 의상이나 소품 대여비는 안 받겠다고 하셨거든. 프린트 인화비용도 그다지 비싼 건 아니니까 괜찮아."
"대여비를 안 받겠다고 하셨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시래..."
"나중에 시우 사진 찍은 것 전부 하나씩 보내달라고 하시던걸. 그걸로 OK 라시더라."
"......"
오후 3시, 식사도 마치고 식곤증도 물러갈 무렵이었다.
- 1학년 C반 한시우 학생, 1학년 C반 한시우 학생. 지금 즉시 학생회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1학년 C반 한시우 학생, 1학년 C반 한시우 학생. 지금 즉시 학생회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막 또 한번 사진 촬영을 끝내고 쉬려던 시우는 방송에서 자신을 부르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교실에 설치된 스피커를 바라보았지만, 교내 방송은 일방적으로 호출을 하고는 끝나버렸다.
"아무래도 그 '메인 이벤트' 때문에 부르는 것 같은데? 시우, 얼른 가 봐."
"어, 응. 근데 그래도 괜찮겠어? 나 없으면 우리 반은 아무것도 못 하잖아."
"괜찮아, 괜찮아. 그동안 찍은 사진들 진열해놓고 원하는 사진 판매하는 걸로 전환해도 되니까."
"...아, 그러세요.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잘 다녀와~."
반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교실을 나선 시우는 계단까지 오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여자 옷, 그것도 고딕 드레스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주 가까운 시간동안 입어본 데다 하루종일 입고 벗고를 반복했더니 자신의 옷차림에 무서울 정도로 무감각해져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머리까지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 가발에 헤드 드레스까지 쓴 상태라서 주변 사람들도 정면에서 보지 않으면 시우라는 걸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우는 반으로 돌아가서 교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갈까 생각도 했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 같아 그냥 가기로 했다. 계단 첫 단에 막 발을 올려놓으려는 참에, 스피커에서 학생회장인 마리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학생회에서 알려드립니다. 지금부터 IS 스쿨 축제 메인 이벤트, '한시우 군 추격전'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 룰은 간단합니다. 기본적으로 IS 전개는 금지. 미전개 상태에서 하이퍼 센서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입니다. 특히 전용기 소유자 여러분은 IS의 기동 상태를 항상 스쿨의 메인 컴퓨터에서 체크하고 있으니 절대로 쓸 생각하지 마세요. 목적은 한시우 군을 포획해서 학생회실로 데려오는 것. 물론 부상을 입히는 것은 안 됩니다. 한시우 군이 부상을 입을 경우 이벤트는 중지, 포상도 무효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한시우 군을 포획해서 성공적으로 학생회실까지 데려오면 우승하는 룰입니다. 시간 내에 붙잡아도 학생회실까지 함께 오지 못하면 무효예요. 개인전을 벌여도 좋고, 팀을 짜서 행동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한시우 군의 인상착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리야가 말을 잠시 멈추자 교내에 설치된 모든 영상 설비에서 시우의 지금 모습을 찍어둔 -마지막으로 왔던 손님이 받아간- 사진이 떠올랐다. 그 직후 계단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시우에게 모아졌다.
- 이벤트 시작은 이 방송이 끝나는 순간부터, 종료는 앞으로 1시간 후인 오후 4시 정각입니다. 이벤트 구역은 교내 전역입니다. 교사(校舍)뿐만 아니라 아레나나 기타 모든 구역에서 진행되니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 힘내주세요. 시~작~!
다음 순간, 시우는 바람이 되었다.
'젠장, 이렇게 느닷없이 시작하기냐고!'
시우는 정말 미친듯이 복도를 내달렸다. 우선은 교사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학생들로 가득찬 교사에 남아있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곳곳에서 여학생들이 튀어나오며 시우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저기 있다!"
"거기! 앞에서 막아!"
"아무 교실이나 좋으니 몰아넣어!"
"무슨 토끼몰이 하냐, 이것들아!"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시우는 반사적으로 소리쳤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짓이었다. 덕분에 근처 교실에서 손님맞이나 행사 준비에 바쁘던 학생들마저도 무슨 일인가 싶어 복도를 내다보았고, 결과적으로 추격자만 늘려주는 꼴이 되었다.
"아우, 진짜 미치겠네! 두고보자, 학생회장!"
이를 바득바득 갈며 복도를 질주하던 시우는 계단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여학생 한 무리를 보았다. 현재 시우가 있는 장소에서 교사 입구까지 가는데 가장 가까운 계단이니 여학생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은 당연했고, 시우는 알지 못했지만 교사 내의 거의 모든 계단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시우다!"
"잡아!"
서둘러 몸을 숨기려고 했지만 옷이 거추장스러워서 행동이 평소보다 굼떠진데다 옷 자체도 눈에 확 띄는 모양이다보니 시우가 달아나는 것보다 여학생들이 시우를 발견하는 것이 빨랐다. 시우는 결단을 내렸다.
"이판사판이다앗!"
복도의 창문을 열어젖힌 시우는 치마를 살짝 걷어올리고는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치마를 걷어올리는 순간 근처에 있던 몇몇이 얼굴을 가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시우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거기 아래 비켜요오오!"
정말로 만화나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시추에이션-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채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을 연출한 시우에게 주변의 시선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착지한 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여러모로(?) 안도한 시우였지만 이내 주변에서 달려오는 여학생들이 보이자 지체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착지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시우는 드레스를 펄럭이며 중앙 정원을 가로질렀다.
시우는 교사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몇번인가 붙잡힐 뻔했지만 그때마다 간발의 차로 도망칠 수 있었고, 지금은 인적이 드문 곳을 이용해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우선 기숙사에서 옷부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에 돌아다니는 것이 그나마 잡힐 가능성을 낮춰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사에서 기숙사까지의 거리를 절반 정도 갔을 무렵 퍼뜩 깨달은 것이 있었다.
'...기숙사에도 학생들 있으면? 게다가 지금 이벤트 타임이라는 거 기숙사에까지 다 방송되어 있을 텐데, 그럼 지금 나 호랑이 입에 머리 들이밀고 있는 거 아냐?'
사실 이벤트가 시작된 시점에서 이미 눈치챘어야 하는 사실이었지만, 그 때에는 그저 도망치는데 바빴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라도 떠올렸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이제 정말로 숨을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움직이기 힘들고 눈에 엄청 띄는 옷차림도 포함해서.
"생각같아서는 치맛단을 뜯어내든가, 아니면 가운데를 찢어서 바지처럼 다리에 묶고 싶지만..."
자기 옷도 아닌데 그랬다간 카나코의 이모님께 이만저만 죄송한 일이 아니었기에 포기했다. 그렇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시우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은황이 말을 걸어왔다.
'시우, 왼쪽 뒤편에서 사람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인원은 4명입니다.'
은황의 말에 시우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은황이 말한 방향을 바라보았고, 기숙사 쪽에서 다가오는 여학생 네명을 볼 수 있었다. 여학생들은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어때, 좀 보여?"
"아니, 전혀 안 보여."
"꼭꼭 잘도 숨었네. 대체 어디 숨은 거람?"
"너무 초조해 하지 마. 아직 시작한지 20분도 안 지났으니까 시간은 있어."
멀리서 언뜻 보았을 때 소매의 색이라든가 그런 걸 보면 여학생들은 아마도 3학년인 것 같았다. 시우는 여학생들이 이 자리를 떠나길 기다리면서 은황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은황, 저 선배들이 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혹시 하이퍼 센서로?'
'아니오. 하이퍼 센서 사용 역시 금지 사항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반 집음 센서를 이용했습니다. 방송에서는 전개 금지와 하이퍼 센서 사용 금지만 말했기 때문에 문제 없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그래... 뭐, 규칙에 어긋나는 건 없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규칙 위반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한 시우가 아레나 쪽으로 가서 숨어볼까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여학생들의 말소리 톤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는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들리던 대화가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불안한 예감에 다시한번 고개를 살짝 내밀던 시우는 조심스레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여학생들을 발견했다. 맨앞의 여학생이 시우와 눈이 마주치자 다른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눈치챘다! 잡아!"
"이런 젠장!"
시우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레나는 지금 여학생들이 있는 자리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야?!"
"1층 복도! 계단쪽 봉쇄해!"
"봉쇄 완료! 창문도 걸어 잠궜어!"
"O.K! 이제 정해진 장소로 몰아넣어!"
"제기랄! 이젠 진짜로 토끼몰이구만!"
쫒기다보니 시우는 어느새 교사로 돌아와있었고, 시우가 보이자 여학생들은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시우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특정 장소로 몰아가고 있었다. 결국 시우는 몰리고 몰린 끝에 교사 벽을 등지고 여학생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으으으..."
완전히 궁지에 몰린 시우는 억울함과 난처함과 화남과 당혹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여학생들을 노려보았고, 그러자 여학생들 중 몇몇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시우, 위쪽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은황의 알림과 동시에 시우의 머리 위로 갑자기 밧줄 하나가 늘어트려졌다. 시우는 물론 여학생들로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위쪽, 정확히는 옥상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 밧줄 잡아!"
낯익은 목소리의 지시에 시우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밧줄을 잡았고, 시우의 몸무게로 밧줄이 팽팽해지자 위쪽에서 "좋아, 끌어올려! 하나, 둘, 으이야아압!!"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시우의 몸이 죽죽 끌어올려졌다. 시우를 포위하고 있던 여학생들은 문자 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였고, 뒤늦게 교사 계단으로 달려가느라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밧줄 채로 끌어올려진 시우는 옥상에 도착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자신을 잡아 올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위기일발이었지, 시우?"
"그래,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사브리나."
시우의 앞에는 사브리나를 포함한 G반 학생들 십여명이 방금 시우를 끌어올린 밧줄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시우는 당연히 감사를 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브리나는 시우의 곁에서 함께 걸으며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고생이 많네. 여장도 여장인데 이런 식의 이벤트까지 하려니 정말 피곤하겠다."
"육체적으로 피곤한 건 그나마 나아. 정신적 피로가 아주 쌓이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라는 게 문제지."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갑자기 바닥을 박차며 사브리나와 거리를 벌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려 G반 학생들을 마주 보았다. 바로 뒤에서 시우를 따라오던 학생들은 순간적으로 멈칫했고, 여학생들의 손에 아까 사용한 밧줄이 여전히 쥐어져 있는 것을 시우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는 건가."
"아핫, 그게 우승자 포상이 꽤나 동하니까."
"아니, 그래도 상식적으로 룸메이트는 한명일 거 아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붙잡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걱정하지 마. 일단 포상부터 얻고 나서 그 다음에 공정하게 결정할 거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분을 유도해볼 생각으로 던진 말도 간단하게 받아넘기는 G반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시우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벤트 종료까지는 아직 5분 정도 남아있었으니 서둘러 움직인다면 시간 내에 시우를 붙잡은 후 학생회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시우는 문득 떠오른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말이지, 날 붙잡는다고 해도 학생회실까지는 어떻게 갈 거야?"
"어떻게라니..."
"우승은 분명히 날 데리고 '학생회실에 들어서는 것'이었지? 도중에 저항이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가로채려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여학생들은 순간 동요했다. 시우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고, 실제로 G반 여학생들이 옥상으로 올라올 때 창문 너머 반대편으로 보이는 학생회실 앞에는 학년을 막론하고 여학생들이 바글바글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시우와 G반 학생들이 있는 위치와 학생회실은 완전히 마주보는 자리라서 중앙정원을 가로지르거나 중앙 복도를 지나야만 했기에 시우의 말은 학생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사브리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걱정할 일이니까 시우는 신경 안 써도 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얌전히 잡혀주시지?"
"너 같으면 그럴 수 있겠냐?!"
"어쩔 수 없네. 얘들아, 덮쳐!"
제3자가 들으면 오해하기에 딱 좋은 사브리나의 말과 함께 G반 여학생들이 한꺼번에 시우에게 덤벼들었다.
"그런데 꼭 이렇게 묶어놔야만 해?"
"하지만 풀어주면 도망칠 거잖아. 조금만 있으면 끝나니까 참아."
"그래, 끝나겠지. 여러가지 의미로..."
손발이 묶인 시우의 탄식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서 G반 학생들은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사브리나 일행은 시우를 붙잡자마자 곧장 옥상을 달려서 건물 반대편의 옥상 출입구로 뛰어들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방금 전까지 시우와 G반 학생들이 있던 곳 근처의 옥상 문이 열리며 1층에서 시우를 놓쳤던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G반 학생들은 방금 자신들이 들어온 문을 걸어잠그고 근처에 있던 책상과 의자, 밧줄까지 이용해 문 손잡이를 묶은 다음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간도 없고 다른 학생들이 몰려올 경우 버티기 어렵다는 이유로 미끼를 쓰거나 하는 계획은 쓰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지 않았어? 이대로라면 도착하기 전에 끝날 것 같은데."
시우가 말한대로, 이벤트 종료까지는 이제 3분이 남아 있었다. 현재 G반의 위치는 5층, 학생회실은 3층. 평소라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1분이면 도착할 거리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찾았다! 한시우가 여기 있어!"
"여기는 서관 5층! 한시우 발견!"
"잡혀 있잖아! 탈환해!"
소형 무전기를 쓰는 여학생들까지 보이는 상황에서 G반은 1개 층을 내려가기도 전에 들키고 말았고, 그 뒤의 전개는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계단을 막아! 돌아 올라가게 하면 안 돼!"
"둘러싸!"
"밀지 마! 애들을 한명씩 잡아 빼! 양파처럼 하나씩 벗겨내는 거야!"
이리저리 밀리고 밀쳐지는 상황 속에서 시우는 이제 완전히 체념한 채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도망칠 방법이 완전히 막힌 마당에 자포자기한 감도 있고, 시간적으로 봤을 때 우승자가 나오기에는 글렀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교내 방송으로 알람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마리야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자, 여러분. 이제 행동을 멈추세요. 시간 초과입니다. 학생회실에 설치된 1시간짜리 타이머가 방금 울렸어요. 지금까지 학생회실로 들어오기는커녕 학생회실 근처에도 오지 못했으므로 우승자는 없습니다. 다들 안 되셨네요. 그러면 거기, 5층에서 지금 한시우군 붙잡고 있는 학생들. 이제 그만 풀어주세요. C반 학생들이 애타게 한시우군 기다리고 있어요.
모여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탄식이 퍼졌다.
"다녀왔어..."
"어서와. ...우와, 진짜 엄청 고생했나 보다."
"수고했어. 그래도 용케 살아 돌아왔네?"
"그래도 대단하다. 어떻게 전교생 상대로 1시간 동안 도망다닐 수가 있니? 나라면 10분만에 잡혀버렸을 거야."
"남자잖아, 남자."
"마니, 그건 대답이 안 되잖아."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시우를 맞이한 C반 학생들은 시우의 모습을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반별 행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시우는 자신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죽는 게 나을까."
시우의 넋두리 아닌 넋두리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황도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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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부분의 앨버트로스 일렉트로닉스. 약자로 쓰면 AE죠. 아시는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애너하임 일렉트로닉스의 패러디입니다.
"413번으로 연결 부탁합니다."
- 네, 알겠습니다. 곧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삐-) 그래, 별일은 없나?
"네, 이쪽은 평소와 같습니다. 여전히 긴장감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 학교를 표방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커리큘럼도 일반적인 고등학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건 그렇고, 드디어 타케미카즈치와 덴드로븀이 완성됐다.
"정말입니까?!"
- 기쁜 건 알겠다만 흥분하지 마라.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리 없다.
"아, 네. 죄송합니다."
- 그래서 말인데, 테스트도 해야하니 잠시 돌아왔으면 한다. 적당한 이유는 이쪽에서 만들지.
"알겠습니다."
- 그리고 '녀석'은 어떤가? 뭔가 좀 변화가 있나?
"아니요, 여전합니다. 오히려 방학 전보다 실력은 더 떨어진 것 같아 보이지만..."
- 뭔가 이상한가?
"제가 알기로는 그 녀석은 원래 올라운더이지만 근접전에 조금 더 우수했습니다. 하지만 1학기 때에는 원거리에 더 치중했고, 얼마 전 있었던 모의전에서는 오로지 원거리 공격만 했습니다. 어쩌면 무언가 기억해내고 일부러 근접전을 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확인된 것은 아니겠지?
"예. 아직은 예상입니다."
- 좋아.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라. 테스트 준비가 끝나는 대로 스쿨에 연락을 넣을 테니 준비하도록. 아마도 10월 초가 될 것 같다.
"알겠습니다."
IS 스쿨에서는 축제 준비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들떠 있었다. 운동장과 아레나 여기저기에는 야외에서 설치할 물건들이 차츰 모양을 갖춰갔고, 수업 중에도 학생들은 교사의 말은 듣는둥 마는둥 하며 온통 축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떤 반은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서 교실 뒤편과 복도까지 점거하고 있었고, 연극 공연 같은 것을 준비하는 동아리의 학생들은 눈 밑에 슬슬 다크 서클이 생기고있었다. 반면 C반은 부피가 큰 준비물품이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고, 의상이 조금 문제였지만 그것도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우리 이모가 그런 쪽 의상 전문점 하시는데, 거기다 부탁해볼까?"
반 친구 중 한명인 타마키 카나코(玉城 香奈子)의 친척이 이른바 그쪽 업계 종사자였 던 것이다. 덕분에 일반적인 여성 의복부터 OL 슈트, 고딕 드레스, 치파오, 아오자이, 심지어 웨딩 드레스까지 준비할 수 있었다. 참고로 전신에 착 달라붙는 가죽계열 의상(그것도 속칭 본디지 타입)도 있었지만 반 인원 상당수의 반대와 시우 본인의 극력 거부-그걸 입느니 차라리 IS 무단 기동하고 탈주할 테다!-로 겨우 그 의상은 피할 수 있었다. 덤으로 웨딩드레스와 OL 슈트에 맞춘 건지 턱시도와 양복 정장까지 몇벌 준비되어 왔고, 그것을 본 시우는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카나짱, 그런데 이건 왜 온 거야?"
차곡차곡 도착하는 의상들을 정리하던 후지노가 턱시도와 양복을 보고 묻자, 카나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뻔하잖아. 시우와 함께 사진 찍을 용도야."
"사진?"
"그래, 그냥 옷 입혀보고 끝내기엔 아쉬우니까 우리들도 같이 포즈 좀 취하고 사진도 찍어둬야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거 해보겠니?"
"그러고보니 그렇네."
"과연, 업계인 이모님을 헛으로 둔 게 아니구나."
"이모님이 업계인인 것하곤 상관없는 거 아냐?"
"그런데 공짜로 찍게 할 건 아니지? 장당 얼마로 할 거야?"
그런 대화를 들으며 시우가 속으로 한탄하고 있으려니, 리자가 시우에게 다가왔다. 그 손에는 원피스가 들려있었고, 시우는 또다시 온몸을 감싸는 불길한 예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리자는 옷을 내밀면서 말했다.
"한번 갈아입어 볼래?"
"...나중에 그냥 축제 때 입으면 안 돼?"
이미 지칠대로 지친 시우는 힘없는 목소리로 반항해 보았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그랬다가 그때 가서 사이즈 안 맞으면 어쩌려고. 여기서 입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다니깐. 옷단이 안 맞으면 조정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얼른 갈아입어."
처음에 말할 때에는 분명히 부탁 내지는 권유였는데 마지막에는 거의 강제사항으로 바뀌었다. 시우는 마지못해 옷을 받아들고는 리자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디서 갈아입지?"
"음... 여기?"
"교실에서?"
"간이 탈의실용 칸막이도 준비해 놨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전혀 고맙지 않은 배려와 쓸데없는 철두철미함에 시우는 속으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순식간에 설치된 간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간 시우는 우선 교복을 벗은 다음 원피스를 입으려고 했지만, 이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시우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개만 탈의실 칸막이 밖으로 내밀고 리자를 불렀다.
"저기... 리자."
"응? 벌써 다 갈아입은 거야? 빠르네."
"아니, 그게 아니라..."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더 말하긴 뭔가 부끄러운 듯 우물쭈물 거렸고, 그 모습을 본 여학생들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느꼈다. 시우가 이렇게 대놓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게다가 평소에 어필을 안 해서 그렇지 얼굴도 귀여운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런 여학생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우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고, 기다리다 못한 리자가 다그쳤다.
"무슨 일인데 그래? 옷이 상하기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 옷을, 그러니까... 잠글 수가 없어..."
뒷부분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교실은 시우가 고개를 내민 순간부터 정적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듣기에는 충분했다. 듣기는 들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모두들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잠깐의 시간동안 망상까지 발전한 사람도 몇명 있었다.
"등짝..."
"세, 세미 누드?"
"내가 옷 입혀줄게!"
"아, 치사해! 내가 해줄 거야!"
"아니, 내가...!"
반쯤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버린 교실의 분위기를 본 시우는 놀라서 간이 탈의실 안으로 숨었고, 그 곁에 있던 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여러모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축제 당일이 되었다. 일단은 학교 축제이니만큼 외부인도 입장은 가능하지만 학생 1인당 3장씩 주어진 입장권이 있어야만 했고, 때문에 학교 밖에서는 입장권이 암거래가 된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그런 행위는 적발되는 즉시 입장권 압수에 해당 입장권에 이름이 기입된 학생의 학생회 호출로 이어졌다. 이젠 없어질만도 했지만 어째 매년 한두번씩은 꼭 벌어지는 일이었다.
"자, 그러면... 이걸로 준비 끝. 그런데 역시 조금 샘 나네."
"남자한테 샘 내서 어쩌려고..."
1학년 C반의 '인간 마네킹 한시우' 행사는 이제 거의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시우는 대기시 복장으로 지정된 원피스를 입고 카나코에게 가벼운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막 메이크업을 끝낸 카나코는 시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서 보며 솔직한 감상을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귀여운 여자아이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체격도 작고 호리호리한 데다 얼굴도 나이보다 어려보이고, 결정적으로 지금은 가발까지 써서 어디로 보나 여자아이였다.(그것도 원래 나이보다 2~3살 어려보이는 수준이었다.)
"우웅, 역시 아깝네... 저기, 시우. 오늘 행사 끝나고 우리반만 따로 좀 시간 내지 않을래?"
"기각."
"에이, 그러지 말고. 응?"
"적당히 해라... 준비한다는 핑계로 이런저런 옷들 죄다 입혀보고 사진 찍었던 걸로 모자라냐?"
지금까지 준비하면서 시달려왔던 시우는 그동안 쌓인 정신적 피로에 당일 행사의 부담감까지 더해지면서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귀여운 여자아이가 날카롭게 말한다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상은 오히려 보는 사람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하아, 하아..."
"잠깐, 누가 거기 메릴 좀 말려 봐."
"아, 안 돼... 너무 자극이 강해..."
"정신 차려. 손님들 상대하고 통제하는 건 우리들 몫이라고. 그런데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니?"
"참자, 참자... 참아야 하는데에엣...!"
벌써부터 위험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한 C반의 모습을 본 시우는 옆에 서 있는 리자를 슬쩍 돌아보았고, 리자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마주 볼 뿐이었다. 그때, 스피커로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지금부터 IS 스쿨 축제를 시작합니다. 외부 관람객 여러분은 교문에서 배부되는 안내지를 받으신 후 주의사항을 반드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은 모두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리고 오늘의 교내 메인 이벤트에 대해서는 시작 직전에 관련 사항을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방송이 종료되는 것과 동시에 스쿨의 교문이 개방되었고,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초대권을 보이며 입장하기 시작했다. 축제 실행위원들은 바쁘게 초대권을 확인하며 안내지를 나누어주었고, 사람들은 곧 안내지를 보며 자신들이 가려고 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교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눈치챈 시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정한 지옥의 시작인가..."
"어떤 의상을 원하세요?"
"으음~ 몸에 안 맞게 큰 옷. 정확히는 소매가 좀 길어서 손등까지 가려지는 옷으로 해주세요. 안경도 써주시면 좋겠는데요. 약간 흘러내리는 듯한 포즈로."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문사항을 확인한 메릴은 그 내용을 카나코에게 전달했고, 카나코는 의상과 소품을 찾아 의자에 앉아있던 시우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세명째였지만 시우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자, 힘내. 시우만 믿고 있으니까."
"...기대를 배신해버리고 싶어지는데."
"전교생을 적으로 돌리고 싶다면야 말리진 않을게?"
생긋 웃는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 카나코의 얼굴을 보며 시우는 잠자코 간이 탈의실로 들어갔고, 주문사항이 적힌 쪽지의 내용대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포즈를 취했다. '흘러내리는 안경을 두 손으로 살짝 받쳐 올리는 듯한 포즈'를 취하며 손님-3학년 여학생-을 살짝 올려다보자 3학년 여학생은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더니 고개를 뒤쪽으로 휙 돌렸다.
'뭔가 잘못했나? 원했던 게 지금 이 포즈가 아니었나?'
당황한 시우가 포즈를 바꿔보려는데 고개를 돌린 채인 3학년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 포즈 그대로 사진 찍어주세요."
"같이 안 찍으셔도 되겠어요?"
"네, 그냥 그대로."
"알겠습니다. 시우, 한번만 더 포즈 취해봐."
시우는 영문을 모른 채 한번 더 아까처럼 포즈를 잡았고, 그 모습을 찍은 리자는 즉석에서 사진으로 인화해서 여학생에게 건넸다. 물론 사진값과 감상료(...)를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한명 한명한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지 않아? 특히 옷 갈아입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이대로라면 오늘 축제 끝나기 전에 손님은 많아봤자 30명 정도가 한계일 거야. 이래선 의상 대여비도 안 나오지 않을까?"
또 한번 촬영이 끝나자 시우는 의자에 앉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매번 손님이 올 때마다 옷을 갈아입다보니 시간이 만만찮게 오래 걸렸고, 그러다보니 일부 손님들은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가기까지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매상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시작한 주제였지만 이래서는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시우의 걱정은 괜한 생각이었다.
"걱정 마, 카나코네 이모님이 의상이나 소품 대여비는 안 받겠다고 하셨거든. 프린트 인화비용도 그다지 비싼 건 아니니까 괜찮아."
"대여비를 안 받겠다고 하셨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시래..."
"나중에 시우 사진 찍은 것 전부 하나씩 보내달라고 하시던걸. 그걸로 OK 라시더라."
"......"
오후 3시, 식사도 마치고 식곤증도 물러갈 무렵이었다.
- 1학년 C반 한시우 학생, 1학년 C반 한시우 학생. 지금 즉시 학생회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1학년 C반 한시우 학생, 1학년 C반 한시우 학생. 지금 즉시 학생회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막 또 한번 사진 촬영을 끝내고 쉬려던 시우는 방송에서 자신을 부르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교실에 설치된 스피커를 바라보았지만, 교내 방송은 일방적으로 호출을 하고는 끝나버렸다.
"아무래도 그 '메인 이벤트' 때문에 부르는 것 같은데? 시우, 얼른 가 봐."
"어, 응. 근데 그래도 괜찮겠어? 나 없으면 우리 반은 아무것도 못 하잖아."
"괜찮아, 괜찮아. 그동안 찍은 사진들 진열해놓고 원하는 사진 판매하는 걸로 전환해도 되니까."
"...아, 그러세요.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잘 다녀와~."
반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교실을 나선 시우는 계단까지 오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여자 옷, 그것도 고딕 드레스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주 가까운 시간동안 입어본 데다 하루종일 입고 벗고를 반복했더니 자신의 옷차림에 무서울 정도로 무감각해져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머리까지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 가발에 헤드 드레스까지 쓴 상태라서 주변 사람들도 정면에서 보지 않으면 시우라는 걸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우는 반으로 돌아가서 교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갈까 생각도 했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 같아 그냥 가기로 했다. 계단 첫 단에 막 발을 올려놓으려는 참에, 스피커에서 학생회장인 마리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학생회에서 알려드립니다. 지금부터 IS 스쿨 축제 메인 이벤트, '한시우 군 추격전'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 룰은 간단합니다. 기본적으로 IS 전개는 금지. 미전개 상태에서 하이퍼 센서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입니다. 특히 전용기 소유자 여러분은 IS의 기동 상태를 항상 스쿨의 메인 컴퓨터에서 체크하고 있으니 절대로 쓸 생각하지 마세요. 목적은 한시우 군을 포획해서 학생회실로 데려오는 것. 물론 부상을 입히는 것은 안 됩니다. 한시우 군이 부상을 입을 경우 이벤트는 중지, 포상도 무효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한시우 군을 포획해서 성공적으로 학생회실까지 데려오면 우승하는 룰입니다. 시간 내에 붙잡아도 학생회실까지 함께 오지 못하면 무효예요. 개인전을 벌여도 좋고, 팀을 짜서 행동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한시우 군의 인상착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리야가 말을 잠시 멈추자 교내에 설치된 모든 영상 설비에서 시우의 지금 모습을 찍어둔 -마지막으로 왔던 손님이 받아간- 사진이 떠올랐다. 그 직후 계단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시우에게 모아졌다.
- 이벤트 시작은 이 방송이 끝나는 순간부터, 종료는 앞으로 1시간 후인 오후 4시 정각입니다. 이벤트 구역은 교내 전역입니다. 교사(校舍)뿐만 아니라 아레나나 기타 모든 구역에서 진행되니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 힘내주세요. 시~작~!
다음 순간, 시우는 바람이 되었다.
'젠장, 이렇게 느닷없이 시작하기냐고!'
시우는 정말 미친듯이 복도를 내달렸다. 우선은 교사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학생들로 가득찬 교사에 남아있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곳곳에서 여학생들이 튀어나오며 시우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저기 있다!"
"거기! 앞에서 막아!"
"아무 교실이나 좋으니 몰아넣어!"
"무슨 토끼몰이 하냐, 이것들아!"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시우는 반사적으로 소리쳤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짓이었다. 덕분에 근처 교실에서 손님맞이나 행사 준비에 바쁘던 학생들마저도 무슨 일인가 싶어 복도를 내다보았고, 결과적으로 추격자만 늘려주는 꼴이 되었다.
"아우, 진짜 미치겠네! 두고보자, 학생회장!"
이를 바득바득 갈며 복도를 질주하던 시우는 계단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여학생 한 무리를 보았다. 현재 시우가 있는 장소에서 교사 입구까지 가는데 가장 가까운 계단이니 여학생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은 당연했고, 시우는 알지 못했지만 교사 내의 거의 모든 계단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시우다!"
"잡아!"
서둘러 몸을 숨기려고 했지만 옷이 거추장스러워서 행동이 평소보다 굼떠진데다 옷 자체도 눈에 확 띄는 모양이다보니 시우가 달아나는 것보다 여학생들이 시우를 발견하는 것이 빨랐다. 시우는 결단을 내렸다.
"이판사판이다앗!"
복도의 창문을 열어젖힌 시우는 치마를 살짝 걷어올리고는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치마를 걷어올리는 순간 근처에 있던 몇몇이 얼굴을 가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시우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거기 아래 비켜요오오!"
정말로 만화나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시추에이션-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채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을 연출한 시우에게 주변의 시선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착지한 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여러모로(?) 안도한 시우였지만 이내 주변에서 달려오는 여학생들이 보이자 지체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착지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시우는 드레스를 펄럭이며 중앙 정원을 가로질렀다.
시우는 교사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몇번인가 붙잡힐 뻔했지만 그때마다 간발의 차로 도망칠 수 있었고, 지금은 인적이 드문 곳을 이용해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우선 기숙사에서 옷부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에 돌아다니는 것이 그나마 잡힐 가능성을 낮춰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사에서 기숙사까지의 거리를 절반 정도 갔을 무렵 퍼뜩 깨달은 것이 있었다.
'...기숙사에도 학생들 있으면? 게다가 지금 이벤트 타임이라는 거 기숙사에까지 다 방송되어 있을 텐데, 그럼 지금 나 호랑이 입에 머리 들이밀고 있는 거 아냐?'
사실 이벤트가 시작된 시점에서 이미 눈치챘어야 하는 사실이었지만, 그 때에는 그저 도망치는데 바빴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라도 떠올렸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이제 정말로 숨을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움직이기 힘들고 눈에 엄청 띄는 옷차림도 포함해서.
"생각같아서는 치맛단을 뜯어내든가, 아니면 가운데를 찢어서 바지처럼 다리에 묶고 싶지만..."
자기 옷도 아닌데 그랬다간 카나코의 이모님께 이만저만 죄송한 일이 아니었기에 포기했다. 그렇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시우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은황이 말을 걸어왔다.
'시우, 왼쪽 뒤편에서 사람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인원은 4명입니다.'
은황의 말에 시우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은황이 말한 방향을 바라보았고, 기숙사 쪽에서 다가오는 여학생 네명을 볼 수 있었다. 여학생들은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어때, 좀 보여?"
"아니, 전혀 안 보여."
"꼭꼭 잘도 숨었네. 대체 어디 숨은 거람?"
"너무 초조해 하지 마. 아직 시작한지 20분도 안 지났으니까 시간은 있어."
멀리서 언뜻 보았을 때 소매의 색이라든가 그런 걸 보면 여학생들은 아마도 3학년인 것 같았다. 시우는 여학생들이 이 자리를 떠나길 기다리면서 은황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은황, 저 선배들이 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혹시 하이퍼 센서로?'
'아니오. 하이퍼 센서 사용 역시 금지 사항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반 집음 센서를 이용했습니다. 방송에서는 전개 금지와 하이퍼 센서 사용 금지만 말했기 때문에 문제 없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그래... 뭐, 규칙에 어긋나는 건 없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규칙 위반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한 시우가 아레나 쪽으로 가서 숨어볼까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여학생들의 말소리 톤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는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들리던 대화가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불안한 예감에 다시한번 고개를 살짝 내밀던 시우는 조심스레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여학생들을 발견했다. 맨앞의 여학생이 시우와 눈이 마주치자 다른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눈치챘다! 잡아!"
"이런 젠장!"
시우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레나는 지금 여학생들이 있는 자리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야?!"
"1층 복도! 계단쪽 봉쇄해!"
"봉쇄 완료! 창문도 걸어 잠궜어!"
"O.K! 이제 정해진 장소로 몰아넣어!"
"제기랄! 이젠 진짜로 토끼몰이구만!"
쫒기다보니 시우는 어느새 교사로 돌아와있었고, 시우가 보이자 여학생들은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시우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특정 장소로 몰아가고 있었다. 결국 시우는 몰리고 몰린 끝에 교사 벽을 등지고 여학생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으으으..."
완전히 궁지에 몰린 시우는 억울함과 난처함과 화남과 당혹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여학생들을 노려보았고, 그러자 여학생들 중 몇몇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시우, 위쪽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은황의 알림과 동시에 시우의 머리 위로 갑자기 밧줄 하나가 늘어트려졌다. 시우는 물론 여학생들로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위쪽, 정확히는 옥상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 밧줄 잡아!"
낯익은 목소리의 지시에 시우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밧줄을 잡았고, 시우의 몸무게로 밧줄이 팽팽해지자 위쪽에서 "좋아, 끌어올려! 하나, 둘, 으이야아압!!"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시우의 몸이 죽죽 끌어올려졌다. 시우를 포위하고 있던 여학생들은 문자 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였고, 뒤늦게 교사 계단으로 달려가느라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밧줄 채로 끌어올려진 시우는 옥상에 도착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자신을 잡아 올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위기일발이었지, 시우?"
"그래,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사브리나."
시우의 앞에는 사브리나를 포함한 G반 학생들 십여명이 방금 시우를 끌어올린 밧줄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시우는 당연히 감사를 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브리나는 시우의 곁에서 함께 걸으며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고생이 많네. 여장도 여장인데 이런 식의 이벤트까지 하려니 정말 피곤하겠다."
"육체적으로 피곤한 건 그나마 나아. 정신적 피로가 아주 쌓이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라는 게 문제지."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갑자기 바닥을 박차며 사브리나와 거리를 벌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려 G반 학생들을 마주 보았다. 바로 뒤에서 시우를 따라오던 학생들은 순간적으로 멈칫했고, 여학생들의 손에 아까 사용한 밧줄이 여전히 쥐어져 있는 것을 시우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는 건가."
"아핫, 그게 우승자 포상이 꽤나 동하니까."
"아니, 그래도 상식적으로 룸메이트는 한명일 거 아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붙잡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걱정하지 마. 일단 포상부터 얻고 나서 그 다음에 공정하게 결정할 거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분을 유도해볼 생각으로 던진 말도 간단하게 받아넘기는 G반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시우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벤트 종료까지는 아직 5분 정도 남아있었으니 서둘러 움직인다면 시간 내에 시우를 붙잡은 후 학생회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시우는 문득 떠오른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말이지, 날 붙잡는다고 해도 학생회실까지는 어떻게 갈 거야?"
"어떻게라니..."
"우승은 분명히 날 데리고 '학생회실에 들어서는 것'이었지? 도중에 저항이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가로채려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여학생들은 순간 동요했다. 시우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고, 실제로 G반 여학생들이 옥상으로 올라올 때 창문 너머 반대편으로 보이는 학생회실 앞에는 학년을 막론하고 여학생들이 바글바글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시우와 G반 학생들이 있는 위치와 학생회실은 완전히 마주보는 자리라서 중앙정원을 가로지르거나 중앙 복도를 지나야만 했기에 시우의 말은 학생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사브리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걱정할 일이니까 시우는 신경 안 써도 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얌전히 잡혀주시지?"
"너 같으면 그럴 수 있겠냐?!"
"어쩔 수 없네. 얘들아, 덮쳐!"
제3자가 들으면 오해하기에 딱 좋은 사브리나의 말과 함께 G반 여학생들이 한꺼번에 시우에게 덤벼들었다.
"그런데 꼭 이렇게 묶어놔야만 해?"
"하지만 풀어주면 도망칠 거잖아. 조금만 있으면 끝나니까 참아."
"그래, 끝나겠지. 여러가지 의미로..."
손발이 묶인 시우의 탄식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서 G반 학생들은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사브리나 일행은 시우를 붙잡자마자 곧장 옥상을 달려서 건물 반대편의 옥상 출입구로 뛰어들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방금 전까지 시우와 G반 학생들이 있던 곳 근처의 옥상 문이 열리며 1층에서 시우를 놓쳤던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G반 학생들은 방금 자신들이 들어온 문을 걸어잠그고 근처에 있던 책상과 의자, 밧줄까지 이용해 문 손잡이를 묶은 다음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간도 없고 다른 학생들이 몰려올 경우 버티기 어렵다는 이유로 미끼를 쓰거나 하는 계획은 쓰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지 않았어? 이대로라면 도착하기 전에 끝날 것 같은데."
시우가 말한대로, 이벤트 종료까지는 이제 3분이 남아 있었다. 현재 G반의 위치는 5층, 학생회실은 3층. 평소라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1분이면 도착할 거리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찾았다! 한시우가 여기 있어!"
"여기는 서관 5층! 한시우 발견!"
"잡혀 있잖아! 탈환해!"
소형 무전기를 쓰는 여학생들까지 보이는 상황에서 G반은 1개 층을 내려가기도 전에 들키고 말았고, 그 뒤의 전개는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계단을 막아! 돌아 올라가게 하면 안 돼!"
"둘러싸!"
"밀지 마! 애들을 한명씩 잡아 빼! 양파처럼 하나씩 벗겨내는 거야!"
이리저리 밀리고 밀쳐지는 상황 속에서 시우는 이제 완전히 체념한 채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도망칠 방법이 완전히 막힌 마당에 자포자기한 감도 있고, 시간적으로 봤을 때 우승자가 나오기에는 글렀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교내 방송으로 알람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마리야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자, 여러분. 이제 행동을 멈추세요. 시간 초과입니다. 학생회실에 설치된 1시간짜리 타이머가 방금 울렸어요. 지금까지 학생회실로 들어오기는커녕 학생회실 근처에도 오지 못했으므로 우승자는 없습니다. 다들 안 되셨네요. 그러면 거기, 5층에서 지금 한시우군 붙잡고 있는 학생들. 이제 그만 풀어주세요. C반 학생들이 애타게 한시우군 기다리고 있어요.
모여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탄식이 퍼졌다.
"다녀왔어..."
"어서와. ...우와, 진짜 엄청 고생했나 보다."
"수고했어. 그래도 용케 살아 돌아왔네?"
"그래도 대단하다. 어떻게 전교생 상대로 1시간 동안 도망다닐 수가 있니? 나라면 10분만에 잡혀버렸을 거야."
"남자잖아, 남자."
"마니, 그건 대답이 안 되잖아."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시우를 맞이한 C반 학생들은 시우의 모습을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반별 행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시우는 자신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죽는 게 나을까."
시우의 넋두리 아닌 넋두리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황도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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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부분의 앨버트로스 일렉트로닉스. 약자로 쓰면 AE죠. 아시는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애너하임 일렉트로닉스의 패러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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