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공항에서 내린 시우 일행은 리무진 버스를 타고 시우의 집으로 향했다. 시영에게 돌아간다고 연락은 했지만 지금은 평일이고, IS 연구소는 어느 나라든 정신없이 바쁘기에 공항에서 마중하는 것은 시영이나 시우나 서로 생각도 안 하고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사브리나나 리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야, 거의 반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는데 왜 마중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어쩔 수 없잖아. 누나는 바쁜걸. 지금도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텐데 불러낼 수는 없다구."

"그래도 다른 가족도 있지 않아? 아버님은 그렇다 치고, 어머님도 시우가 보고 싶으실 텐데."

"아... 뭐, 그렇긴 하시겠지만, 상황이 안 되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

시우의 대답을 들은 리자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브리나는 아직도 불만인지 다시 한번 시우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막 시우를 부르려는 사브리나의 옆구리를 나알리아가 스리슬쩍 찔렀고,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돌아보는 사브리나에게 나알리아는 그만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브리나는 그제야 불평하는 걸 그만두고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그렇다고 표정까지 완전히 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불평불만을 늘어놓은들 상황이 바뀔 리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일행이 리무진 버스에서 내리고 약 20분 정도 걸은 다음에야 시우네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뚝 솟은 아파트 건물을 본 사브리나는 표정이 또 안 좋아졌다.

"어째서 또 이런 상자곽 같은 집에서 사는 거야..."

"너야말로 대체 나한테 뭘 바란 건지 묻고 싶어진다, 정말. 자, 올라가자구."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린 시우는 오른쪽 집 현관의 키패드를 열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세명은 왜 그러나 싶었고, 시우는 잠시 후 느릿느릿한 손길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는 문을 열었다. 시우가 어딘지 모르게 안도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리자는 생각한 내용을 그대로 말했다.

"혹시 비밀번호 잊고 있었어?"

"...아니, 완전히 잊은 건 아니고 기억이 가물가물했어. 하도 오랜만에 누르려니까 갑자기 탁 막히네."

시우는 문을 열고 여성진을 먼저 들여보내며 멋쩍게 웃었고, 리자와 사브리나, 나알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넓지는 않았지만 정돈된 느낌이었다. 다만 약간 묘한 점이 있다면 묘하게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사는 집이라는 느낌이 희박했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온 시우는 어색하게 서 있는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일단 짐은 내 방... 그러니까 방 중에서 왼쪽에 있는 방에 넣어 놔. 오른쪽 방은 누나 방이니까 가능하면 피해줘. 일단 뭣 좀 마실래?"

"아니, 난 됐어."

"혹시 주스 있어?"

"난 아무거나..."

자신의 가방도 방에다 가져다 놓은 뒤 시우는 주스도 꺼낼 겸 냉장고를 열어 안을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냉장고 안은 음료수와 군것질거리 외에는 들어있지 않았고 그나마도 반 이상의 공간은 비어있었다. 시우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컵에 따르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연구소에서 삼시 세끼 다 해결하나 보네. 젊은 건 알지만 건강 좀 생각하라구, 누나야..."

시우가 쟁반에 주스가 담긴 컵을 받쳐 들고 거실로 갔을 때, 세명은 어쩐지 다소 불편해보이는 자세(쉽게 말해서 무릎꿇은 자세)로 탁자 주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우는 각자의 앞에 컵을 내려놓으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다들 왜 그렇게 앉아있어? 지금은 다도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정좌할 필요는 없어."

"왠지 동양에서 맨바닥이라면 이렇게 앉아야 할 것 같아서..."

"어머? 의자가 아닌 곳에선 이렇게 앉아야 하는 거 아니었니?"

"이게 예의가... 아니었어...?"

"대체 어디서 동양식 예의범절에 대해서 배웠는지는 모르겠다만 여기서까지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앉아. ...아니 잠깐, 그렇다고 치마 입은 상태에서 다리 뻗고 앉지 마! 예의는 둘째치고 보기 흉해!"

시우의 지적에 저려오는 다리를 쭉 펴고 앉으려던 사브리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다리를 옆으로 모아 뻗고 앉았다. 다리는 안 저릴 테지만 오래 앉아있으면 허리가 아파올 것 같아서 시우는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차라리 바지로 갈아입고 편하게 앉아. 그 편이 낫겠다."

시우의 말에 사브리나도 그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고, 가방을 놔둔 시우의 방으로 가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시우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시우, 왜 집에 아무도 없어? 어머님도 안 계시네."

사브리나의 말에 리자와 나알리아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우를 바라보았고, 시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우리 부모님 나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누나랑 나 둘만 살아. 지금은 나도 스쿨에 들어가는 바람에 누나 혼자 살지만."

시우의 말에 사브리나는 아차 싶었고, 리자와 나알리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한 시우는 별 감흥 없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었다.

"신경 안 써도 돼. 나야 뭐 부모님 직접 본 일도 없어서 그다지 슬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모님이 일부러 떠나시거나 한 것도 아니라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좀 아쉽달까, 서운하달까, 그런 느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아, 누나 앞에서는 우리 부모님 얘기 하지 않기다? 누나는 중학생 때 겪은 거라고 하니까, 기억하고 있을 거야."

"응, 알았어."

"조심할게."

"그렇게 할게. 그리고... 미안."

"응? 뭐가?"

리자와 나알리아가 알겠다며 대답하고, 마지막으로 사브리나가 사과를 하자 시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얼굴을 본 사브리나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까 버스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자꾸 부모님 얘기 하게 만들어서."

"신경쓰지 말라니까. 나보단 누나 앞에서 신경써 줘. 그보다 옷 갈아입으려던 거 아니었어? 자, 자."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브리나를 방으로 들여보냈고, 문을 닫은 사브리나는 한숨을 쉬고는 가방을 열어 바지를 꺼냈다. 바지로 갈아입기 전에 사브리나는 이 방이 시우의 방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고는 한번 빙 둘러보았다. PC가 놓인 책상 하나와 이런저런 소설과 만화책이 꽂힌 책꽂이, 그리고 한쪽 구석에 접힌 채로 놓인 이부자리가 전부였지만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시우가 없는 동안에도 시영이 신경을 써온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여러 물건들이 담긴 바구니와 연필꽂이 등이 있었고, 그 중에서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건물 안에서 10살쯤 되어 보이는 시우와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여성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사브리나는 여성의 얼굴이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지난번에 본 시우의 누나인가 보네."

사진 속의 시영은 웃고 있었지만 시우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바지로 갈아입고 나오려던 사브리나는 시우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진동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집어들었다. 한번 진동하고 끝난 것을 보면 부재중 전화 알림이거나 문자 메시지인 것 같았다. 호기심에 화면을 연 사브리나는 시영이 보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물론 한글로 쓰여있으니 사브리나는 누가 보냈는지,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그대로 휴대전화를 들고 방을 나왔다. 방문이 열리자 시우는 고개를 돌려 사브리나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옷 다 갈아입었어? 바지도 잘 어울리네."

"고, 고마워. 그리고 시우, 문자 왔어."

"응, 고마워. 어디 보자..."

사브리나에게서 휴대전화를 건네받은 시우는 메시지 화면을 띄웠고, 액정에는 시영이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도착했니? 마중 못 가서 미안. 오늘 저녁은 일찍 들어갈 거니까 밖에서 먹자. 내일부터 먹을 찬거리는 미리 챙겨줘.'

"누나구나. 흐음, 저녁은 아무래도 밖에서 먹어야 할 것 같네. 일단 그러면 내일부터 먹을 찬거리 좀 사러 나가볼까. 같이 갈래?"

점심은 공항에서 간단하게 해결했고 저녁은 외식으로 결정됐지만 내일부터는 집에서 먹어야 했다. 하지만 아까 본 것처럼 냉장고에서 식재료는 찾아볼 수 없었고(시영의 생활 패턴으로 보아서는 있다고 해도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테고), 그렇다면 시영의 문자 내용대로 일단 장을 봐둬야만 했다. 하지만 손님들만 집에 두고 장을 보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시우는 그렇게 말했고, 세명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갈래, 갈래."

"응, 갈게."

"...미리 말해두는데 식재료 사러 가는 거니까 재미는 없을 거야. 별로 기대는 하지 마."




대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시우는 엘리베이터가 오는 것을 기다리며 시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영은 아직 시우가 돌아온다는 것만 알고 있지, 손님이 셋이나 붙어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로 저녁식사 장소에서 만난다면 상당히 놀랄 테고, 게다가 앞으로 한동안 시우네 집에서 신세를 져야하니 미리 시영에게 이야기 해두는 편이 좋았다.

'찬거리 사러 나가. 스쿨 친구 세명도 같이 왔어. 우리집에서 묵을 거야.'

문자를 보낸 다음 아파트를 나선 시우 일행은 근처의 대형 마트로 향했다. 리자와 나알리아는 별 말이 없었지만 사브리나는 한국 고유의 시장을 보고 싶었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브리나, 그런 시장에서 사면 배달이 안 된다고. 다섯명이 먹을 걸 사야되는데 그걸 그냥 들고 다닐 수는 없고 말이지."

"나눠들면 되잖아."

"야, 그래도 명색이 집주인인데 손님한테 짐 들고 다니게 해서야 되겠어? 그리고 시장 구경은 내일 해도 되니까 오늘은 좀 참아."

"그래? 그럼 약속한 거다?"

"그래, 그래. 내일은 꼭 한국 시장에 데려다줄게."

그렇게 마트를 2시간 정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식재료와 생필품을 산 시우 일행은 계산대로 향했다. 평일 낮이라서 그런지 계산대는 물론 마트 전체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덕분에 머리와 피부색이 총천연색으로 이루어진 시우 일행은 어디를 가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안 그런 것 같이 보여도 은근히 사람들 시선에 신경을 쓰는 시우로서는 눈에 띄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지만, 리자나 사브리나는 마트 이곳저곳을 살펴보느라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얌전한 나알리아까지도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거리고 있으니 시우는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고, 그나마 이제 장보기가 끝났으니 돌아갈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계산대 앞에 카트를 막 대려는 찰나, 시우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눈치챘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우는 한손으로 카트에서 물건을 들어 카운터에 올리며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액정에 표시된 상대방은 시영이었다. 아마도 일 때문에 한창 바빠서 문자를 못 봤다가 지금에야 여유가 생겨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어, 누나."

- 그래, 시우야. 문자 지금 봤어. 그런데 친구들도 같이 왔다고?

"응, 세명. 아마 저번에 임해학교 때 언뜻 봤을걸? 다들 전용기 소유자거든."

- 그래? 으음... 아아, 그 애들. 그런데 어쩐 일이래?

"그게... 뭐시냐... 전화로 얘기하긴 좀 그렇고..."

시영으로서는 동생의 친구들이, 그것도 여자 친구들이, 더구나 외국인 여자 친구들이 동생을 따라 우리나라까지 온 이유가 상당히 신경 쓰일만 했지만, 시우는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제대로 된 이유는 알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본인들이 말한 '상견례'라는 이유를 전화로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시우야.

"어? 왜?"

- 누나는 널 믿지만 말이야... 너도 남자아이고... 한창 나이고...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는 하지만...

어쩐지 시우는 시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시영의 말은 그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 설마하니 사고 친 건 아니지?

"누나는 동생을 대체 뭘로 보고 있는 겁니까!!"

시우는 자기도 모르게 발끈해서 큰소리를 쳤고, 덕분에 리자, 사브리나, 나알리아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시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눈쌀을 찌푸리며 노려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우는 당황해서 휴대전화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가리며 나지막히 말했다.

"아니, 그리고 누나. 스쿨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도 아니잖아. 그럴 생각도 없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는 거, 스쿨 졸업생인 누나가 더 잘 알지 않아?"

- 그야 그렇지만, 시우 너는 여러모로 전례가 없는 아이니까. 게다가 나 스쿨 시절에는 소등 이후에 친구 방에 가서 놀다가 잔 적도 있고.

"......여보쇼."

- 농담이야, 농담. 그러면 저녁 먹을 곳은 내가 잡아놓을게. 있다가 퇴근할 때 전화할 테니까 그쪽으로 와.

"하아... 알았어. 그러면 있다 저녁에 봐."

- 그래, 끊는다.

시우가 전화를 끊고 다시 카운터에서 계산 준비를 하기 시작하자 옆에서 기다리던 리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통화 상대나, 아까 소리를 지른 이유가 궁금한 것 같았다.

"누구였어? 무슨 일인데?"

"아, 누나. 갑자기 황당한 농담을 해서 말이야."

"시우 누나는 꽤 재미있는 사람인가 보네."

"재미있다고 할까, 짓궃다고 할까... 가끔씩 사람 놀려먹는 걸 즐기는 것 같아."

리자의 말에 대답하며 시우는 시영의 성격을 떠올려보았다. 평소에는 차분하고 착실하지만, 이따금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장난을 치곤 해서 그럴 때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고보면 얌전하기만 한 것도 아니어서 당하고는 못 사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연구소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전부터 있던 연구원이 이유없이 시비를 걸고 괴롭히는 일이 있었고 그동안에는 집에 와서 자주 푸념을 하거나 이따금 섬뜩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연구원은 자진해서 연구소를 그만두었는데, 당시 그 연구원의 표정은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벌써 4년이나 지난 이야기였지만 아직도 연구소에서 거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였다.

"뭐, 그래도 어지간한 일 아니면 실력행사로 나가진 않으니까... 그나저나 누나, 과연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로 걱정스럽네..."

후반부는 한국어로 했기 때문에 리자는 알아듣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저녁.

"오랜만이야, 누나."

"""안녕하세요."""

"응, 안녕. 시우도."

연구소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식당 중 괜찮은 곳을 하나 정한 시영은 시우에게 문자로 장소를 알려준 다음 예약을 잡았다. 다행히 월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어렵지 않게 좌석을 확보할 수 있었고, 간만에 정시 퇴근에 성공한 시영은 먼저 도착해서 시우 일행을 기다릴 수 있었다. 시영이 동생인 자신보다 여학생들의 인사를 먼저 받아주자 시우는 장난스레 말했다.

"뭐야, 동생은 뒷전이야?"

"넌 동생이지만 얘들은 그 동생의 친구들이잖니. 누가 데려갈지 몰라도 잘 대해줘야하지 않겠어?"

"......"

한 번 찔러보았다가 본전도 못 찾은 시우는 그냥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역시 한국어로 오간 대화여서 리자와 사브리나, 나알리아는 무슨 얘길 한 건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영이 이번엔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일행이 있단 얘기는 안 했잖아."

"그거라면 본인들에게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시우 역시 영어로 대답하며 리자가 앉은 쪽을 돌아보았다. 지금 자리는 시영이 가장 안쪽, 그 옆이 나알리아였고, 시영의 맞은편이 리자, 그 옆이 사브리나, 바깥쪽이 시우였다. 시우와 시영의 시선을 받은 리자는 사브리나, 나알리아와 잠깐 눈빛을 주고 받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시우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 한번 직접 보고 싶었고, 견문도 넓힐 겸..."

"흐음~~."

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영은 콧소리를 내며 리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쩐지 재미있는 상대를 찾았다는 느낌이라, 시우는 마음속으로 리자에게 애도를 표했다. 저런 태도를 보인 시영은 상대가 어쩔 줄 몰라 할 때까지 몰아붙이곤 하기 때문이었다.

"부탁이니까 이번엔 적당히 끝내줘, 누나..."

"걱정 마, 걱정 마. 설마 내가 잡아먹기야 하겠니?"

"정신적으로는 잡아먹고도 남을 것 같아 보여서 문제라고."

시우가 그렇게 말하자 시영은 갑자기 상체를 쑥 내밀더니 팔을 뻗어 시우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워낙 순식간에 한 행동이라 시우는 미처 피할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았고, 맞자마자 이마를 감싸쥐고 몸을 웅크렸다.

"쓰~읍, 뭐하는 거야!"

"요 녀석이 한동안 못 봤다고 많이 컸네. 간만에 대련이나 좀 해볼까?"

"아니, 그건 사양할게요."

시영이 웃으며 말하자 시우는 냉큼 꼬리를 내렸고 그 모습을 본 리자와 사브리나, 나알리아는 무심코 작게 웃었다. 낮에 부모님 얘기를 했을 때 시우가 신경쓰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정말로 본인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먼저 들어가 있을래? 난 얘들하고 하고싶은 얘기가 좀 있어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시영은 시우에게 말했다. 끝맺음은 분명히 의문형이었지만 느껴지는 뉘앙스는 '그렇게 됐으니까 먼저 돌아가 있어라' 였고, 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리자, 사브리나, 나알리아를 돌아본 다음 시영에게 말했다.

"너무 괴롭히지 마."

"누가 들으면 항상 동생들 괴롭히며 사는 줄 알겠네."

"전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잖아? ...미안, 미안! 안 그럴게!"

반쯤 습관으로 말꼬리를 잡았던 시우는 앗 하는 사이에 걸려온 시영의 헤드락에 팔을 허우적거리며 항복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시우는 사선을 넘나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누나. 이런 건 이제 그만 하는 편이 누나 연애사에 있어서도 좋... 아, 알았어. 먼저 가 있을게."

한마디 덧붙이려던 시우는 시영이 웃으면서 다시 손을 뻗으려하자 황급히 말을 멈추고는 뒷걸음질쳤고, 시영은 여전히 웃으면서 그만 가라는 손짓을 했다. 결국 시우는 먼저 자리를 떴다.

"자, 그럼 우리는 어디 카페에 좀 들어가볼까?"

시영은 세명을 데리고 근처에 있던 커피샵으로 들어갔고, 창가에 비어있던 테이블에 여학생들을 앉히고는 마시고 싶은 커피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저는 생과일 주스로 부탁드릴게요."

"저는 코코아요."

"저도 주스로..."

그런 대답을 듣고 나서야 시영은 눈앞의 세명이 미성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성년자가 커피를 마셔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페인을 어릴 때부터 마셔서 좋을리도 없었다. 여학생들이 착실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영은 자기 몫의 커피까지 총 네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 다들 마셔."

"""고맙습니다."""

잔을 나누어준 후 자리에 앉은 시영은 다들 한모금씩 음료를 마신 것을 확인한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영이나 여학생들이나 피해갈 수 없는 주제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우리 시우가 어디가 좋은 거야?"

아마 입에 음료를 물고 있는 채였다면 그대로 뿜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알리아는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옆에 앉은 사브리나가 등을 두드려주는 동안, 이번에도 리자가 대표로 말했다.

"정말 단도직입적인데다 단정적이시네요."

"그야 당연하지. 한창나이 여자애 셋이 남자애 하나 따라서 아는 사람도 없고 마땅히 묵을 곳도 없는 나라에 온다면 뻔할 뻔자 아니겠니? 게다가 저번에 임해학교 때 너희들 모습도 뭔가 좀 있어 보이긴 했는데, 이번에 모습을 보니 더 확실해보이더라. 그래서, 어디가 좋은 거야?"

시영의 눈은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리자는 그 안에서 또다른 느낌을 받았다. 경계하는 듯한, 적으로 간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목이 마르는 기분이 든 리자는 다시 주스를 한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글쎄요... 어디가 좋은 거냐고 물으셔도 마땅히 대답할 게 없어요. 깨닫고 보니 어느샌가 좋아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래도 굳이 호감이 가는 이유를 찾자면, 상냥한 점이네요. 본인은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당연하다고 하지만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 하지만 저 녀석은 정말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와주는 거야. 자기한테 무리라고 생각되면 아예 나서지를 않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먼저 나서서 도와주니까요. 그렇게 나서주는 게 좋아요."

리자의 대답을 들은 시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번에는 시선을 사브리나에게로 향했고, 나알리아의 등을 쓸어주던 사브리나는 나알리아가 진정된 것 같자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귀엽잖아요."

사브리나의 대답에 시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이어 시원스럽게 웃었다. 손뼉까지 치며 웃는 그 모습에 주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흘겨보았지만 시영은 개의치 않고 한동안 웃었고, 웃음이 사그러든 다음에야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하하, 미안. 너무 솔직한 대답이라서. 그래, 확실히 귀엽지. 하지만 그건 처음에 호감이 간 이유 아니니? 난 지금 저 녀석을 따라서 우리나라까지 오게 된 이유,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묻는 거야."

시영이 재차 묻자 사브리나는 팔짱을 끼더니 잠시 생각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앞뒤가 안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주시기에요."

"알았어. 말해보렴."

"하나하나 꼽자면 귀여움, 배려심, 현실적인 면, 도전적인 면이에요. 귀여운 건 아실 테니 패스. 배려심은, 전 시우가 누가 무언가를 부탁했을 때 거절하는 걸 거의 못 봤어요. 정말 자신에게 힘든 일이 아니라면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주더라구요. 그래서 가끔은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게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인 면은, 오기를 부리지 않는다는 거에요. 대련이나 다른 경쟁이 있을 때, 상대방에게 지더라도 시우는 아쉽다는 말은 하지만 분하다는 말은 안 했어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어서 가능한 거죠, 그런 태도는. 처음에는 쉽게 포기하는 성격인가 싶었지만, 계속 지내다보니 그것도 아니었어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그 결과에 승복한다는 느낌에 가깝더라구요. 그리고 도전적인 면은..."

거기까지 말한 사브리나는 목이 말랐는지 코코아를 한입 마신 다음 말을 이었다. 시영은 잠자코 사브리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말한 현실적인 면과 맞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인정한 다음 시우는 그걸 극복하거나 할 방법을 찾아요. 그런 면에선 오기가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아무튼, 이런 점들 전부가 좋아요."

"세세하게도 분석했구나."

시영은 사브리나가 한 말을 다 들은 다음 솔직한 감상을 말했고, 사브리나는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헤헷, 실은 아까 언니가 리자에게 물어봤을 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음은 내 차례겠구나, 하고."

"그래?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자세하게 말하던데... 그러면, 나알리아는 왜?"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은 나알리아는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도 때문인지 시영보다 큰 키임에도 불구하고 더 작게 느껴졌다.

"그게... 상냥함이라고 해야할지, 희생정신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점이에요."

"...희생정신?"

나알리아의 말에 시영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리자와 사브리나는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았다. 나알리아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리자나 사브리나, 그리고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시우는 다른 사람들을 잘 도와줘요. 심지어는 그 사람이 직접 도와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서서 도와주기도 해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시우는 자기 시간을 쪼개서 도와줘요. 그리고, 마음이... 평소에는 아까 사브리나가 말한 것처럼 현실적이고, 어떻게 보면 냉정해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굉장히 격정적이고 또 여려요."

그 말을 듣자 이번에는 반대로 시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리자와 사브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알리아가 시우의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토너먼트를 대비해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잡담까지 주제가 번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덕분이었다. 그 기간동안 나알리아는 시우와 이야기를 하며 시우에 대해 리자나 사브리나는 모르는 여러가지 면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냉정을 가장하지만 실은 감정적이라고 해야겠네요. 자신은 희생양으로 내세울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건 하지 못하는 성미에요. 물론 스스로는 그런다는 자각도 없겠지만요."

그 말을 하며 나알리아는 아직도 생생한 그 기억을 떠올렸다. 임해학교에서 해안까지 침입한 홀리 저지먼트가 숙소를 공격하려 할 때, 시우가 달려들어 홀리 저지먼트와 함께 먼 바다로 날아가는 모습.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홀리 저지먼트의 파일럿을 안고 돌아온 시우의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던 얼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진 건."

'그때'가 언제인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영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시영은 자리에 편하게 앉은 다음 커피를 입에 댔고, 다시금 긴장한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난 그저 너희들이 어떻게 시우를 좋아하게 됐는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이 내용으로 우선순위를 가리거나 할 생각은 없어?"

"우선순위라뇨..."

사브리나의 어이없어하는 말에 시영은 싱긋 웃었다. 안심한 듯한, 하지만 어쩐지 걱정이 배어나오는 느낌의 미소였다.

"앞으로도 시우를 잘 부탁할게.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고생길이 훤한 아이니까."

"네."

"걱정마세요."

"네..."

세명의 대답을 들은 시영은 마지막으로 짓궂게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여난도 추가될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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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입니다.
...금요일에 올렸지만 딱히 불길하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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