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다.'

굳이 상대성 이론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인간의 시간 관념을 얘기하면서 꺼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되는 말이다. 그리고 앤은 요즘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됐나..."

프레이야가 함께 살기 시작한 지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를 만들고 있는 프레이야의 모습을 보며 앤은 시간이 참 빨리 간다고 생각했다.
프레이야가 원래 낯을 별로 가리지 않는 아이이기는 했지만, 의외로 이곳 생활에 별 어려움없이 녹아들었다. 알아본 바로는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고, 카페에서는 어느샌가 마스코트 비슷한 위치가 되어 있었다. 프레이야가 오기 전에는 A-10이 마스코트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적어도 앤은 그렇게 할 생각이었지만─, A-10은 입에 반쯤 붙은 독설 때문에 마냥 가까워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밝고 명랑한, 거기다 귀엽기까지 한 프레이야가 오자 손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개중에는 프레이야만 눈에 들어오면 눈이 충혈되고 콧김을 거칠게 내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프레이야가 없을 때 A-10이 몇명을 공개적으로 '어루만져'주자 이후로는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저기, 앤."

"왜 그러니?"

"가끔 말이죠,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다 보면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곤 해요."

"이상한 시선?"

"뭐라고 할까, 누가 계속 쳐다보고 있는 느낌? 그런 느낌이 자꾸 들어요."

...만약을 위해서 프레이야에게 호신술을 가르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보는 앤이었다. 물론 앤이 가르쳤다간 호신술이 아니라 살인술 내지는 격투술이 될 테니, 정말로 가르친다면 어디 도장에라도 보내는 편이 좋았다. 한편, 새로 카페에 추가된 '프레이야 스페셜 메뉴' 시리즈로 말할 것 같으면,

"프레이야, 5번 테이블에 스페셜 2번 둘이에요."

"네, 금방 드릴게요~"

역시라고 해야 할지, 의외라고 해야 할지, 상당히 잘 나가는 편이었다. 생긴 건 이상해도 맛은 좋았고, 약점인 외양에 대해서도 만든 사람이 12살, 그것도 외모만으로는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라 차마 악평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 이 점에 대해서 A-10은 '미성년자 노동력 착취로도 모자라 앵벌이식 이용인가요'라고 말했지만 앤은 못 들은 척 했다. ─ 이렇게 해서 카페 프레이(PRAY)의 프레이야 스페셜 메뉴는 일대의 명물이 되었다. 더불어 카페의 매상도 올라, 이번 달에는 카페 개점 이후 최초로 적자를 면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만드는 사람이 아직 학생이다 보니, 학교에 가야 하는 평일에는 저녁에만 주문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설겆이─가사 중에서 앤이 거의 유일하게 평범한 결과를 낼 수 있는 항목. 청소는 청소기와 대걸레질만 하는 것이 고작─를 하고 있는 앤의 뒤에서 프레이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기, 앤."

"응? 왜 그러니?"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평소와는 다른 주저하는 말투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앤은 설겆이용 고무장갑을 벗어 옆에 두고는 몸을 돌려 프레이야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약간 숙인 프레이야는 양손으로 네모난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탁상용 액자 같았다.

"물어볼 거라는 게 그거니? 뭔데 그래?"

"방 청소하다가 침대랑 벽 사이의 공간에서 찾은 건데... 여기..."

그렇게 말하며 프레이야가 내민 사진을 본 앤은 순간 숨을 삼켰다. 액자에 들어있는 것은 빛이 약간 바랜 사진. 앤이 기사 교육생 시절, 프레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프레이는 앤에게 바짝 붙어서는, 앤의 반대편에 서 있는 다른 교육생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앤은 알겠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에요? 나랑 너무 닮아서... 원래는 A-10한테 물어봤는데, 앤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라고..."

"...사진 하나가 안 보인다 했는데 거기 빠져 있었나 보네."

프레이야에게서 사진을 건네받은 앤은 사진속 프레이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표정이 너무 애잔해서 프레이야는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용히 사진을 바라보던 앤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거기까지 말한 앤은 고개를 돌려 프레이야를 보고는 앗차 싶었다. 자신이 맡은 아이에게 다른 사람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프레이야는 부모님을 잃은지 길어야 두달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실제로 프레이야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어두워져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내가 프레이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그 왜, 프레이야도 부모님을 제일 사랑하고 있지? 그런 쪽이니까 너무 낙담하거나 하지는 마."

앤의 위로에 프레이야는 표정을 풀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도리어 앤을 걱정하는 말을 했다.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그런데 앤은 괜찮아요?"

"응? 내가 뭐?"

"그 사진 보면서 말할 때 표정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구요. 펑펑까지는 아니더라도 뚝뚝은 될 정도로."

"어... 그 정도였나?"

앤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 얼굴을 매만졌고,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에 손을 떼고 바라보았다. 손가락 끝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묻어있었다.

"저기... 앤..."

"미안,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가게 뒷문으로 나가는 앤의 뒷모습을 보며, 프레이야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침 손님이 일어난 테이블을 정리하고 빈 그릇을 가져온 A-10이 그런 프레이야를 보고는 걱정스레 말을 걸었다.

"왜 그래요, 프레이야?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그게, 아까 그 사진을 앤에게 보여줬는데..."

프레이야의 얘기를 들은 A-10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빈 그릇을 싱크대에 놓고 설겆이를 하기 시작했다. 무심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태도에 프레이야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A-10이 입을 열었다.

"괜찮을 거에요. 마스터는 가끔 저러다가도 곧 웃는 얼굴로 돌아오니까. 그리고 예전에 비하면 많이 얌전해진 거기도 하고."

"얌전해져요?"

"전에는 그분 사진이나 그런 것만 보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주룩주룩 쏟았거든요. 그에 비하면야... 그리고 4번 테이블에 스페셜 1번 하나 주문 들어왔어요."

"아, 네. 알았어요. 금방 만들게요."




그날 밤, 앤은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이고, 청승맞다면 청승맞은 모습이었지만 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프레이..."

앤이 중얼거리며 맥주를 한모금 마신 직후,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앤은 흠칫했다. 붉은 눈동자, 긴 금발, 작은 몸집. 순간 프레이가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프레이야였다. 달빛 아래인데다 술기운이 약간 오른 것도 있어서 잠시 착각한 모양이었다.

"프레이야구나. 어쩐 일이니, 아직까지 안 자고?"

"얘기 좀 하고 싶어서요."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앤의 옆에 다가와 섰다. 그 손에 컵이 들려있는 것을 본 앤은 순간적으로 설마 했지만, 곧 오렌지 주스가 담겨 있다는 걸 알고는 안심했다. 그런 앤의 표정을 본 프레이야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뭐에요, 같이 술 마시자고 하는 건 줄 알았어요?"

"미안, 미안. 아니, 그래도 말이지. 이런 분위기인데 얘기 나누자면서 손에 마실 걸 들고 나오면 다들 좀 움찔 하지 않겠니? 물론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만 말이야."

"사람을 좀 믿으라구요."

프레이야가 뾰로통한 얼굴로 오렌지 주스를 입에 대는 모습을 본 앤은 쿡 하며 웃었고, 그 반응에 프레이야가 또 한번 발끈할 뻔 했지만 앤이 잘 달래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나란히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얘기란 건 뭐니? 그냥 잡담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 나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게 말이죠..."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운지, 프레이야는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망설였다.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몇번 반복하던 프레이야는 결심한 듯 남은 주스를 한번에 들이킨 다음, 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기사가 되고 싶어요."

"...뭐?"

뜬금없이 나온 얘기에 앤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앞뒤 설명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니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레니 기사님이 말해준 적이 있어요. 앤이 은퇴하긴 했지만 일류 기사였다고. 그리고 아까 저녁에... 그 사진, 입고 있는 옷이 기사 교육생들의 제복이죠. 예전에 자료를 봐서 알고 있었어요."

"그래,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는 거니까. 교육생 제복은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정도고. 그런데 그게 네가 기사가 되고 싶은 거하고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난 잘 모르겠는걸."

"상관이 있다고 할까, 없다고 할까. 기사가 되고 싶은 건 예전부터였어요. 여기 오기 전, 그러니까 레니 기사님이 살려줬을 때부터."

"아..."

이해할 수 있었다. 앤이 아는 사람만 해도, (레니는 둘째치고) 레오는 앤이 구해준 것을 마음에 품고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앤 자신도 마일로에 이끌려 기사가 되고자 결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 밖에도 기사에 의해 구조된 아이들 중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예외없이 기사단에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검술을 가르쳐 줘요."

"......뭐?"

또 한번 당황했다. 앤은 프레이야가 중앙 기사단의 교육시설에 보내달라고 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프레이야는 그게 아니라 앤에게 직접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한 것이다. 이건 정말로, 완전히 예상 외였다.

"아니, 잠깐만. 프레이야, 기사가 되고 싶다면 나한테 배우는 것보다 중앙에 가서 정식 교육을 받는 편이 좋을 거야."

"반대는 안 하는 거에요?"

"반대한다고 안 할 것 같지도 않거든. 타 성계에서 혼자 여기까지 올 정도니까, 안된다고 하면 가출이라도 해서 중앙에 갈 것 같아, 넌. 실제로 그 비슷한 경우를 알고 있기도 하고."

앤은 자신을 쫓아 중앙의 교육시설에 입교했던 프레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반은 맞아요. 안된다고 해도 포기 안 할 거니까. 그리고 나머지 반은 틀렸는데, 난 지금은 중앙 기사단에 가고 싶지 않거든요. 난 앤의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중앙에는 우선 앤의 검술을 익힌 다음에 갈 생각이에요."

프레이야의 말에 앤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프레이야의 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기사단의 교육시설에 들어가는 교육생들 중 상당수는 전부터 검술이나 기타 전투기술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서 입교하고 있었다.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중앙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했지만, 입교 전에 다른 곳에서 검술을 배워와선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앤이 신경쓰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앤이 기사라는 건 프레이야가 오기 전부터 이미 꽤 알려진 상태였고, 레니가 프레이야를 보내면서 아무 말 안 했을 리는 없으니 프레이야가 알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과 검술 스승의 자질은 별개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검증 안 된 개인교육과 수많은 결과를 낸 단체교육을 비교하면 당연히 단체교육 쪽이 믿음직스럽고, 앤도 지금까지 누구를 가르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잘 가르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안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프레이야는 굳이 자신에게 배우겠다고 하니 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곰곰히 생각해보면 짐작가는 게 하나 있기는 했다.

"혹시, '그' 검술을 배우고 싶은 거니?"

"네."

그렇구나, 하면서 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프레이식 검술. 청색과 적색의 이색(二色) 파동기를 중심으로 한, 대 괴수전에 특화되어 있는 검술. 그리고 창안자인 프레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사실상 사멸하다시피 한 일류 전투기술.

"기껏 만들었는데 쓰는 사람이 없으면 아깝잖아요. 게다가 자료들에 따르면 위력도 뛰어났다고 하니까 더더욱. 부탁할게요. 그 검술을 가르쳐줘요."

"확실히 뛰어난 검술이긴 하지... 그런데 어디서 알았니? 프레이식 검술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 괴수가 만들어낸 검술이라는 사실 때문에 프레이식 검술은 기사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았고, 그에 대한 자료도 거의 공개되지 않아 지금은 존재 자체가 희미해진 검술이었다. 알아보려고 하면 못 찾을 것도 없지만 관심을 두지 않으면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말하자면 버려진 검술이 된 것이다. 현재 기사들 중 프레이식 검술을 쓰는 사람은 예비역과 현역을 통틀어 앤이 유일했다.

"저녁에 집에 와서 앤의 기사 시절에 대해서 검색해 봤어요. 찾아보니까 정말 어마어마하던데요? 영식 루시퍼와 싸운 기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 SS급에 사상병기까지 쓰던 쌍둥이 영식 크로스아이 알파와 베타 격파, 영식 블루비틀 격파. 그리고 사상 최악의 여왕종이라는 엘리스 타입, 그 중에서도 정말 최악이라고 불리는..."

거기까지 말한 프레이야는 앗차 싶었다. 찾아봤던 자료 중에는 E-34, 프레이와 앤의 관계에 대한 내용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앤의 표정은 다시금 침울해져 있었다. 그나마 말을 끝까지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프레이야는 얘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공개된 영상 자료 중에 전투 장면도 있었어요. 앤이 검을 휘두를 때 붉은 빛이 번쩍거리더라구요. 자료에 앤이 초상능력자라는 얘기는 없어서, 대체 뭘까 하고 더 검색해보니까 프레이식 검술에 대한 설명도 나왔어요. 초상능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인간에게 잠재된 기(氣)를 이용해서 괴수의 배리어를 무력화시키는 파동기를 발현하는 검술이라고."

"기사단에서 굳이 검술 자체를 매장해버릴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네... 뭐, 좋아. 그런데 미리 말해두겠는데, 이 검술은 기본적으로 쌍검술이야. 여타 검술보다 몇배는 더 익히기 힘들고, 거기다 난 누굴 가르쳐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아마 중앙에서 배우는 것보다 몇배는 더 힘들 거야.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걸. 괜찮겠니?"

"네, 물론이에요."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레이야를 마주 보며, 앤은 그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표정과 눈빛은 결코 한때 지나가는 흥미로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앤은 자신이 중앙 기사단 교육시설에 입교하던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그만 자렴. 본격적인 수련은 내일부터 할 테니까 오늘밤은 푹 자둬."

"알았어요. 그럼 내일부터 잘 부탁합니다, 앤 스승님."

"아하하, 그래. 내일부터 잘 부탁해, 제자."

들뜬 기분에 통통 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들어가는 프레이야의 뒷모습을 보며, 앤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프레이, 적어도 네가 있었다는 증거는 계속 남아있을 것 같아. 다행...이지?"




다음날 아침, 앤은 학교에 가려고 준비하는 프레이야를 불러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금속제 파이프를 잘라낸 것 같은 모양의 물건이 넷, 그리고 벨트처럼 생긴 것이 하나였다. 특이한 점은 파이프를 잘라낸 모양의 물건은 경첩이 달려서 여닫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건네받은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프레이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에요? 꽤 무거운데요."

"체력 단련용 덤벨. 운동 선수들이 쓰는 모래주머니 같은 용도야. 오늘부터 손목과 발목, 그리고 허리에 항상 차고 다녀. 씻을 때 말고는 절대 빼서는 안 돼."

"네에?"

"기사는 몸을 쓰는 직업이야. 당연히 체력은 기본이지. 네 몸 상태를 보건대 여태까지 변변한 운동도 안 했을 테고, 그렇다면 먼저 체력과 근력부터 길러야 해."

"잠깐만요, 앤. 그 말은 이해하겠는데요, 이거 무게가 얼마나 되는 거에요?"

"손발에 차는 건 개당 5kg, 허리에 차는 건 10kg."

"다 합쳐서 30kg이라구요?! 내 몸무게보다 조금 가벼운 수준이잖아요!"

프레이야는 황당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앤은 태연한 표정, 아니 정확히는 안 들린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익숙해지면 점차 무게를 늘려갈 거야. 그리고 카페 문 닫고 나면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 3시간, 그 뒤에 취침. 아직 학생이고 성장기니까 이 이상은 부담이 클 거야. 앞으로는 이 생활 반복이니까 잊지 마."

"저기, 잠깐만요. 그러면 검술은 언제 배워요?"

"체력도 제대로 안 되는 애가 검술은 무슨 검술? 말했지, 체력이 기본이라고. 검술은 그 다음. 검술 배우고 싶으면 체력 단련부터 열심히 해야 해."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난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했다구요! 어젠 분명히 오늘부터 가르쳐 준다면서요!"

"난 오늘부터 수련을 시작한다고 했지, 오늘부터 검술을 가르쳐 준다고는 안 했어. 그리고 갓난 아기가 걸음마도 하기 전에 뛸 수는 없는 법이야. 세번째 말하지만 기사는 체력이 기본이라고. 그리고 애초에 지금 네 체력은 검술을 실전에 쓰기는커녕 검술을 배우는데 필요한 수준조차 안 돼."

악을 쓰며 항의하는 프레이야와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단련 방침을 말하는 앤. 도무지 진전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을 바라보던 A-10이 결국 기다리다 못해 말을 걸었다.

"프레이야, 슬슬 학교 갈 시간입니다. 지금 안 가면 지각할 텐데요. 그리고 마스터, 가게 오픈 준비 해야 하지 않나요?"

"아앗, 그러고보니 시간이! ...으윽, 알았어요! 차고 다니면 되죠?! ...정말이지, 계속 차고 다니게 할 거면 모양이라도 좀 예쁘게 만들어 주면 좋잖아요."

궁시렁거리며, 낑낑거리며 앤이 건넨 체력 단련용 덤벨을 착용한 프레이야는 서둘러 달려나가...려고 했지만, 역시 무게가 무게인지라 달리는 건 무리였다. 프레이야는 한 걸음 한걸음을 무겁게 옮기면서 3교시가 체육이라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앤은 프레이야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

"절대 벗으면 안 돼! 집에 와서도 계속 차고 있어!"

앤의 당부에도 프레이야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걸어갔다. 아마도 꽤나 삐진 모양이었다. 프레이야의 모습이 골목 너머로 사라진 후, A-10은 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앤은 A-10을 마주 보며 말했다.

"왜 그래, A-10?"

"...마스터."

"왜?"

"교육생 시절에 고생하신 건 알겠지만 그걸 굳이 제자에게 대물림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악취미에요."

A-10의 말에 앤은 엉뚱한 방향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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