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다녀왔습니다."

세환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인사를 했다.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것이, 어머니께서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세환의 인사를 들은 어머니는 마침 바쁘신지 부엌에서 나오지는 않고 목소리로만 대답을 했다.

"어서 오렴. 아, 세환아. 편지 왔다."

"편지요? 편지 보낼 사람이 없는데..."

세환으로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그다지 많은 편도 아니고, 게다가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대중화된 요즘 세상에 고색창연하게 편지를 쓰는 사람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세환은 어깨의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징병검사 통지서야."

"......신검이었군요."




《그래도 살아간다》 - 4. 아무도 모른다




통지서에 적힌 신검 날짜는 한달 정도 후였는데, 하필이면 수업 시간과 겹친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 날은 오전 10시 30분부터 1시간 30분짜리 수업이 있는 날이었고, 징병검사는 오전은 8시, 오후는 12시(정오)에 시작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래저래 수업은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세환은 한숨을 내쉬며 교수님께 양해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 내용은 민우한테 필기 좀 보여달라고 해야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통지서를 다시 접는 세환에게, 저녁 준비를 마친 어머니가 다가왔다. 찌개는 한창 끓인 다음이라, 아버지가 오셨을 때 한번 더 살짝 끓이기만 하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신검 받는 날에 너 수업있지 않았니?"

"뭐, 어쩔 수 없죠. 평일에만 한다니까 어차피 한번은 빠져야하니까요. 교수님한테 말씀드리고, 필기는 친구한테 빌릴 거예요."

"그래, 나중에 검사 받는 날 잊지 말고."

"걱정마세요, 어린애도 아니고."

세환은 웃으며 방에 들어가 통지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환은 자신의 기억력에 그다지 자신이 없는 편이어서 최대한 눈에 잘 띄도록 책상 한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거기에 더해서 핸드폰의 일정 관리에도 추가시켜놓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사소한 일에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단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환은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날 이후, 왼손으로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손으로 드는 것들도 음식이 놓인 식판이나 찌개가 담긴 냄비 같은 것까지는 가능했지만 그 이상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은 항상 왼손이 놓치는 바람에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직 무거운 물건을 들 일이 많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앞으로 증상이 더 심해진다면 들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만약 들키게 되면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들키게 될 무렵에는 자신의 몸이 이미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브룬힐데의 설명으로는 귀가 잘 안 들리거나, 눈이 잘 안 보이거나, 제대로 걸을 수 없다거나, 그 외 여러가지로 장애가 나타난다고 했다. 더불어 치료는 제르누르의 기술력으로도 불가능했다고도.

"뭐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보자."

어차피 지금 고민한다고 특별히 좋은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환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속옷을 챙기며 씻을 준비를 했다.




"나 신검 통지 나왔다."

다음주 월요일. 통지를 받은 것이 금요일이었고 주말에 만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세환이 친구들을 만난 건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날 첫 강의가 있는 강의실에서 진석과 민우와 인사를 주고받은 세환은 곧장 신검 얘기를 꺼냈다.

"오, 드디어 나왔냐? 축하한다. 너도 이제 사나이구나."

"언제는 아니었냐..."

"기분 좀 묘하겠다. 그래봤자 어차피 검사만 하는 거니까 별로 문제될 것 없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 날짜라는 게 수업을 빼먹을 수밖에 없단 말이야."

"...그건 좀 신경쓰이겠네."

"그래서 말인데 민우야, 나중에 노트 필기한 것 좀 보여주라."

"싫다면?"

"야아아아!"

너무도 빠르게, 너무도 간단하게 거절 의사를 입에 담는 민우의 모습에 세환은 당황했다. 매번 민우에게 신세를 지는 진석은 처음부터 논외였고, 믿을 사람은 민우 밖에 없는데 그 구세주가 이렇게 나오면 세환으로서는 기댈 곳이 하나도 없었다. 반쯤 절박한 심정이 된 세환의 눈에 민우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는 모습이 비쳤다.

"농담한 건데, 반응이 너무 과하다. 어차피 나중에 진석이 녀석한테도 보여줘야 하니까, 먼저 너한테 보여주고 넘겨주지 뭐. 시험 공부 할 때 보여주면 되지?"

"그런 걸로 농담하지 마... 어쨌든 빌려준다니까 고맙다."

"잠깐, 잠깐. 왜 내가 나중인데?"

"넌 빌려가면 옮겨 적느라 하루 넘게 걸리잖아. 세환이가 빠지는 부분은 어차피 하루 강의분량이니 많지도 않고. 분량이 적은 사람한테 먼저 빌려주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

"OK, 넌 이제 노트 대여 없다."

"무릎꿇고 사죄할 테니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형님."

민우의 절대거절권 행사에 맥없이 무너지는 진석의 모습에 세환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아는 두 사람도 얼굴을 마주치곤 씨익 웃었다. 그렇게 노트 대여 문제가 일단락된 후, 셋이 화제로 삼은 것은 카라타스였다. 아니, 정확히는 지크프리트였다.

"로마쪽은 건물들이 전부 보수에 들어갔다며?"

"진동의 여파가 너무 커서 거의 로마 시(市) 전역에 걸쳐 보수 작업을 한다더라. 일부 유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던데."

"...그 정도였어?"

"세환이 넌 뉴스도 안 보냐? 그거 완전 대지진 수준이었다구."

"아니, 진석아. 그건 좀 오버다. 그래도 상당히 진동이 심했다던데. 리히터 규모로 진도 4는 나왔다던가. 진원지라고 할 장소가 도심이라 피해가 더 컸대."

"그랬구나...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세환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사실 지난 며칠 동안 의식적으로 로마의 피해 보도를 접하지 않으려 했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도 있고,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로마는 도시 전체가 유적지라고 봐도 좋을만큼 문화 유산으로 가득 찬 도시였던 것이다. 그런 곳에서 그 난리를 피워댔으니 피해가 보통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겁을 먹고 일부러 피해 규모를 모른 채 지내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되자 충격이 더 컸다.

"이번 일 때문에 고고학이나 인류학 분야는 발칵 뒤집힌 모양이더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세계의 미연구 유적지를 당장이라도 발굴 연구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나봐."

"...그런데 넌 그런 건 어디서 다 알아보냐?"

"자주 가는 사이트의 회원 중에 그쪽으로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거든. 글을 올렸더라고. 아주 난리도 아닌 모양이던데.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야. 어차피 물질로 이루어진 이상 유한한 게 당연한데, 그게 망가졌다고 난리법석이라니. 시간과 과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사라질 팔자잖아."

"그렇다고 일부러 때려부수는 건 좀 아니라고 봐."

"아니, 일부러 때려부수자는 게 아니지. 자연파괴는 서슴없이 저지르면서 유적파괴에만 열 올리는 게 웃긴다는 얘기야."

바로 곁에서 진석과 민우가 계속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세환은 더 이상 그 대화를 듣고 있지 않았다. 민우가 꺼낸 '시간과 과정이 다르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팔자'라는 말이 꼭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시각이라면 민우의 말이 맞을 테지만, 세환은 이제 자신의 일이 되어버린 상황이라 도저히 그렇게만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저 답답하고 씁쓸할 뿐이었다.




20XX년 6월초의 어느 날, 한밤중의 어느 시각.
버지니아 주 미국 국방성 지하, 비밀 회의실.


비밀 회의는 어느새 2주마다 한번씩 열리는 것이 정례화되어가고 있었고, 이번 회의에서도 보고하는 역할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트레이닝 복을 대충 입은 모습의 과학자였다. 과학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정부 고관들을 돌아보았다.

"2주 전에 회수한 URG-06에 대한 1차 분석이 끝났습니다. 이번엔 형태가 사람과 달라서 조금 낯설더군요. 지금까지 인간과 비슷한 형태만 보다보니 어째 좀 흥미롭기도 하고요. 이 애벌레 형태라는 게 말입니다..."

과학자는 나름대로 분위기를 조금 풀어보고 시작하자는 생각에 사설을 넣으려 했지만 각료들 중 몇명은 어서 본론을 듣고 싶다는 표정이었고, 그 중 일부는 헛기침 따위로 자신의 심기를 드러냈으며, 개중 한명은 기어이 입을 열어 과학자의 말을 끊었다.

"분석 결과와 관련된 것만 말해주시오. 개인의 의견은 그냥 담아 두시고."

그 래도 과학자를 완전히 무시하는 뉘앙스는 아니었기에 과학자도 잡담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콘솔을 조작하자 저고도 정찰 위성에서 촬영한 로마의 야경과 두 거대 병기의 대치 모습이 여러 신문사의 사진들과 함께 떠올랐다. 그 중 한 사진에서 애벌레의 모습을 확대시키고 그 옆에 분석도나 개념도 같은 도면을 띄운 후 과학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URG-06은 여러가지 의미로 특별합니다. 우선 형태가 그렇고, 내장된 무장의 위력이 그렇습니다. 우선 애벌레의 모습은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리가 짧고 느려서 도주도 용이하지 못하고, 공격수단도 마땅치 않죠. 때문에 실제 자연의 애벌레는 보호색을 취하거나 악취를 내뿜거나 해서 자신을 보호합니다. 하지만 URG-06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서 만들어진 모양입니다."

다시 콘솔을 조작하자 분석도가 애벌레 로봇의 측면을 비추었다. 애벌레의 측면에는 다리 윗쪽에 동그란 표시가 다리 하나에 하나씩 붙어 있었다.

"분석도에 보이는, 다리 위에 표시되어있는 원형은 추진 장치입니다. 속도보다는 부양력에 중점을 두었다고 생각됩니다.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는 달리, 도약시 다리의 힘을 이용할 수 없거든요. 그리고 좌우측에 모두 달려 있기에 이동 중 정지와 정지 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행동이 다른 로봇들보다 훨씬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로마에서는 이 점을 이용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급속 낙하하는 공격 방식을 썼더군요. 또한 약간이긴 하지만 노즐의 각도를 변경해서 이동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자 아래쪽에 스러스터 노즐이, 그 윗쪽에 부채꼴의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최대 변경 각도는 수직점을 기준으로 60˚까지입니다. 방향에는 상하좌우 제한이 없어서, 구체 표면에 스러스터 노즐이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는 애벌레 로봇의 정면을 띄웠는데, 분석량이 다른 부위에 비해 현저하게 적었다. 거의 외형만 분석되어 있는 수준이었다. 각료들 중 몇몇이 의아한 표정으로 과학자를 바라보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머리 부분은 URG-03이 목 부위에서 절단한 다음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외형 이상의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정황으로 보건대 입에 해당하는 부분에 사격형 무장이 내장되어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회의실에 갑자기 한숨소리가 가득 찼다. 자신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에 실망해서 다들 이심전심으로 한숨이 나온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과학자는 설명을 계속했다.

"정확한 위력은 알 수 없지만, URG-06에 내장되었던 무장의 위력은 여태까지 URG 시리즈가 지녔던 무장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 물론 광학 병기로 생각되는 것들은 제외했을 때입니다."

화면에 정찰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이 어마어마한 배율로 확대되어 나타났다. 지크프리트가 적 병기의 금속침 공격을 막았을 때의 모습이었다. 화면은 다시 지크프리트의 방패를 클로즈업했다.

"자세히 보시면, URG-03이 지닌 방패의 앞뒷면에 무언가 길쭉하게 튀어나와있는 것이 보일 겁니다. 여기와, 여기죠. 애벌레형 로봇의 공격 수단이 방패를 뚫은 겁니다."

회의실이 갑자기 술렁였다.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를 가라앉힌 다음, 대통령이 과학자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저 애벌레의 무장을 분석하면 우리도 녀석들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뜻이오?"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 무장이 장착되어있던 머리부분은 URG-03이 가져가 버려서요. 분석을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사실 우리가 회수했다고 해서 정말 분석이 가능했을지도 의문이지만요."

과학자의 대답에 각료들 몇명이 노골적으로 김샜다는 표정을 지었고, 과학자는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런 과학자에게 대통령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예의 '그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대통령의 물음에 과학자는 또 한번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며칠 후, 일본 도쿄. 오전 11시 10분경.

맑은 하늘에 갑자기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런 사람들을 경찰이 나서서 도심에서 외곽지역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처음엔 당황하던 사람들도 어찌된 일인지 하나둘씩 깨닫고는 서둘러 도심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덕에 민간인 소개는 생각보다 수월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약 10분후, 도쿄 도청 인근에 카라타스의 착륙선이 낙하했다.
낙하한 착륙선은 지체없이 해치를 열고 로봇들을 내보냈다. 먼저 거미형의 소형 로봇들이 빠른 속도로 시내로 퍼져나갔고, 잠시 후 거대 로봇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의 형태는 인간형이었지만 특이하게도 양손과 팔에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고, 다만 동체에 무언가 둘둘 감겨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라타스의 거대 로봇이 착륙선을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크프리트가 현장에 나타났다.

"인간형태인가, 이번에도 이상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환은 적 병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말투에는 여유가 있어보였지만 사실은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징병검사를 받으러 병무청으로 가는 도중에 적이 나타나는 바람에 오게 되었기 때문에, 빨리 해치우고 검사 받으러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결말 뻔한 거 징병검사 뭣하러 받나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일단 통지 온 마당에 검사를 받기는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가 나타나자 적 병기는 허리 뒷쪽으로 양손을 가져가더니 무언가 손잡이처럼 보이는 것을 잡아 올렸다. 그러자 허리에 감겨있는 것들이 주르륵 풀어져 땅으로 흘러내렸고, 그것들은 곧 거대한 채찍의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땅에 떨어지면서 주변 건물들이 부서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엔 채찍이냐... SM여왕님 컨셉? 하지만 여성형은 아닌 것 같은데."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알고 있어. 그럼, 시작해 볼까."

그 때, 세환이 자세를 잡기도 전에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날아들었다. 채찍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지크프리트의 다리에 휘감겼고, 곧이어 강하게 당기는 힘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윽! 이 자식이!"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적기는 왼손에 쥐고 있는 또다른 채찍을 휘둘러 지크프리트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세환은 일어설 생각도 못하고 방패로 막기에 급급했다. 공격 하나 하나가 전신을 울리게 만드는 것이, 막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간 충격이 보통이 아닐 것 같았다. 실제로 방패에 채찍이 한번 떨어질 때마다 방패가 조금씩 찌그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공격을 막아내자, 적기가 방법을 바꿨다. 왼손의 채찍으로 지크프리트의 오른팔을 휘감고 잡아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오른팔만 감은 게 아니라 검의 손잡이와 손에도 감겨들었기 때문에 검을 놓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환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걸려들어 주는구나. 고맙다!"

세환의 외침과 함께 지크프리트의 오른 팔등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와 적기를 향했다. 한달 사이에 브룬힐데가 만들어 장착해놓은 금속침 발사장치였다. 총신의 길이 때문에 본래 위력 만큼은 나오지 않지만 동체의 장갑을 뚫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순식간에 세 발의 금속침이 적기의 왼쪽 반신에 박혔다.

"어때! 어, 엇?"

세환은 이 공격으로 위협을 느낀 적기가 채찍을 풀고 물러설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적기가 채찍을 풀기는 했지만, 팔을 감은 것이 아닌 다리를 감은 것을 풀었던 것이다. 세환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적기는 풀어낸 채찍을 휘둘렀고, 그 채찍은 지크프리트의 왼팔에 걸리며 안쪽으로 90˚ 방향을 꺾어 오른쪽 팔꿈치에 정확하게 감겨들었다. 그제야 적의 의도를 파악한 세환은 오른팔을 틀어 검날로 채찍을 끊어보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적기는 지크프리트의 팔꿈치에 감긴 채찍을 강하게 잡아당겼고, 그 힘에 지크프리트의 오른팔은 너무나 간단하게 꺾여버렸다.

"으아아아악!!"

「오른팔 제2관절 파손, 하박 이하 운동 불능. 사격 제어는 가능합니다.」

세환은 팔이 부러진 고통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었지만 팔을 부여잡고 뒹굴 틈도 없었다. 오른팔을 부러트린 채찍이 풀려 돌아가더니 다시 지크프리트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익! 큭!"

세환은 급히 방패를 들어올리면서 스러스터를 이용해 거리를 벌린 다음 일어섰다. 일어난 지크프리트의 오른팔은 팔꿈치부터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지만 손을 묶고 있는 채찍 때문에 그 상태에서도 검은 그대로 쥐어져있었다. 덕분에 오른팔이 자꾸만 이상한 각도로 꺾이려 해서 그 통증에 세환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브룬힐데! 오른팔 제2관절부터 통각 차단!"

「하박 이하의 사격 병기를 포함한 모든 제어가 불가능해집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 어차피 이 상태라면 통증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세환은 오른팔의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시험삼아 팔을 들어올리자 팔꿈치 밑부분이 아래로 축 늘어지며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각도로 꺾이는 것이 보였지만 통증은 전혀 없었다. 통증이 사라져서 좋은 건지 사격 병기를 잃어 나쁜 건지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던 중 오른손을 휘감은 채찍이 여전히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적기와 지크프리트의 거리는 채찍이 닿을 거리가 아니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던 세환은 적기의 왼팔 역시 힘없이 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발사했던 금속침이 적기의 왼팔 어깨 관절을 손상시켜 제어 불능 상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세환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피장파장인가. 아니, 이 상태라면 오히려 내가 불리한데."

사실이었다. 적기는 두개의 무기 중 하나를 잃었지만, 지크프리트는 유일한 사격 병기와 주 병기인 장검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남아있는 왼팔은 방패가 달려있어 방어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고, 방패를 떼어내고 공격에 들어가면 적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누구 하난 죽는 거다!"

세환은 크게 외치며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달려들었다. 돌격하는 지크프리트의 왼손에는 어느새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브룬힐데가 지크프리트의 장비를 개조·장착하면서 단검도 양 팔목 안쪽에서 사출되어 쥐어지는 방식으로 변경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적기가 다가오는 지크프리트를 향해 채찍을 휘둘러 댔지만, 방패에 부딪히며 타격을 전혀 주지 못했다. 적기의 코앞까지 접근한 세환은 왼손에 쥔 단검을 휘둘렀다. 방패가 눕혀지며 방어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정도는 이미 감수하고 있었고, 자신이 쓰러지기 전에 적을 파괴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환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적기는 로봇이고, 지크프리트처럼 대출력의 스러스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엇?!"

단검을 휘두른 순간 적기는 스러스터를 이용해 뒤쪽으로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고, 지크프리트의 단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직후, 적기의 채찍이 재차 지크프리트의 다리를 휘감았다.

"우와아앗!"

적기는 아직도 스러스터를 이용해 이동하는 중이었고, 채찍에 묶인 지크프리트는 손쓸 틈도 없이 끌려갔다. 잠시 그렇게 지크프리트를 끌고 가던 적기는 돌연 이동을 멈추더니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손에는 지크프리트를 묶은 채찍을 쥔 채로.
자연히 지크프리트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려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몇바퀴 회전하자 적기는 가차없이 지크프리트의 다리에 감긴 채찍을 회수했다. 90톤에 가까운 중량에 회전까지 더해진 지크프리트가 굉음과 함께 도쿄 도청 건물에 처박혔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등을 타고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 거기에 더해 무너져 쏟아지는 도청 건물의 잔해에 세환은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100톤이 넘는 충격이 한점에 집중되자 도청 건물의 한편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고, 높이 240m가 넘는 건물이 무너지자 40m 남짓한 지크프리트는 흔적도 없이 파묻혀 버렸다.

돌더미에 완전히 묻혀버린 세환은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했지만 한쪽팔을 쓸 수 없는데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무게가 상상외로 무거워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제길, 이런 곳에서 압사당하다니. 우습지도 않다구."

「지크프리트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마스터의 호흡에는 지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일일이 지적하지 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하던 중, 세환은 갑자기 궁금해진 것을 브룬힐데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녀석, 그러니까 적은 지금 뭘 어쩌고 있지?"

「이쪽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빠져나올 거라 판단한 듯 합니다.」

"방심한 뒤를 치는 건 안 되겠군..."

세환은 중얼거리며 스러스터의 출력을 올리기 시작했고, 서서히 스러스터가 고주파음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러스터 노즐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크프리트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세환은 분사를 억제한 상태에서 출력을 최대로 올린 다음 다시 한번 질문했다.

"녀석의 방향은?"

「마스터의 정면, 거리는 241m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럼 간다앗!!"

고함과 함께 세환은 스러스터 노즐을 개방했다. 폭발적인 추력에 의해 지크프리트가 자신을 짓누르던 바위더미들을 헤치고 포탄처럼 튀어나갔다. 눈앞에 적기가 보인 것도 잠시, 적기를 보았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지크프리트와 적기가 충돌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의 스러스터에서 발산된 고주파음을 포착한 적기도 미리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돌격해오리라는 판단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기와 충돌하고서도 세환이 스러스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지크프리트와 적기는 함께 수백미터를 돌파했다. 그 경로의 주변에 있던 건물들의 유리창이 충격파로 박살나고 자동차가 돌풍에 휘말려 날아갔다. 그렇게 몇백미터를 돌진한 세환은 메인 스러스터를 정지시키는 것과 동시에 보조 스러스터를 이용해 기체를 급정거시켰고, 적기는 관성에 의해 다시 백미터 가량을 혼자서 굴러갔다. 굴러가던 적기가 멈추자 세환은 왼손의 단검을 앞으로 내민 채 다시 한번 스러스터를 이용해 돌격했다. 방패는 도청 잔해에서 빠져나올 때 이미 분리시킨 후였다. 그 모습을 본 적기가 서둘러 채찍을 휘둘렀지만, 세환은 날아오는 채찍을 향해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맞휘둘렀다. 적기의 채찍은 지크프리트의 장검에 얽혔고, 판단이 어긋난 적기가 주춤하는 사이 지크프리트의 단검이 적기의 동체에 꽂혔다.
세환은 적기에 꽂아넣은 단검을 반바퀴 비틀어 밀어넣으며 말했다.

"이걸로 끝이다..."

세환이 단검을 뽑아내자 적기는 힘없이 지면에 쓰러졌다. 육중한 덩치가 무방비하게 쓰러지자 건물이 부서지며 돌가루가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세환은 몸을 돌려 착륙선을 향해 걸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저 돌더미 속에서 언제 방패를 꺼내나..."




같은 날 오후 4시경. XX 병무청 앞.

세환의 손에는 징병검사 등급이 적힌 종이와 여비 지급 확인서가 들려있었다. 그 종이를 바라보며 세환은 허탈한 듯 웃었다. 어이없게도 징병검사 결과가 현역 입영 대상으로 나온 것이다. 왼손에서 벌써 신경 침식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 마당에 현역 입영 대상이라니, 황당해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신의 몸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나노머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돌아다니고 있는데.

「지구 인류의 현재 기술로는 제르누르에서 개발한 나노머신의 존재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시끄러워.'

브룬힐데의 첨언에 세환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맑게 갠 하늘이 유난히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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