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그로부터 약 2주간, 세환의 삶은 사는 게 아니었다. 눈감고 잠들만 하면 브룬힐데가 다짜고짜, 그야말로 납치하듯이 시뮬레이션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세환으로서는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반강제로 훈련을 받고 피로에 쩔어 간신히 서너시간 잠드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맑은 정신으로 지내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방학이었으니 다행이지, 만약 학기중이었다면 몇과목은 낙제수준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세환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아들이 매일같이 다크서클을 눈밑에 달고 살고, 하루에도 서너병씩 피로회복 드링크를 마시고, 수시로 쓰러져 기절하다시피 잠드는 모습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묻지는 않았다. 가풍이 좋게 말하면 대범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신경해서, 먼저 도와달라고 말하거나 고민상담을 해오기 전까지는 관여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세환으로서도 말해봤자 해결 방법이 없으니 말을 하든 안 하든 결과야 같았겠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말을 안하는 게 부모님 마음이 편할 거라는 생각에 말을 안 하고 있었다.
한편, 세환의 전투력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적에게 지는 일은 거의 없었고, 브룬힐데가 설정한 목표도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자릿수 이상 싸워보면 싫어도 몸이 기억한다고. 아니, 이 경우에는 몸이 아니라 정신에 새겨졌다고 해야하나."

그렇긴 했다. 세환의 시뮬레이션 횟수는 벌써 100회를 넘어 150회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 정도로 싸워보면 어지간한 운동치가 아닌 이상에야 실력이 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어느 소설에서도 이런 식으로 백몇십번 반복한 끝에 전투의 달인이 되는 주인공이 나왔던 것 같은데... 거기서는 실전이었지만."

「이번 시뮬레이션은 이것으로 종료하겠습니다.」

한밤중 자기 방, 세환이 그 날의 5번째 전투에서 적을 쓰러트리고 중얼거리고 있으니 브룬힐데가 훈련을 마친다고 말해왔다. 솔직히 이제는 슬슬 지겨워지려는 감도 있어, 세환은 브룬힐데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제 슬슬 훈련량 줄여도 괜찮지 않을까? 매일밤 5번씩 싸우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데."

「안 됩니다. 카라타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마스터의 기본대응능력이 일반인의 수준인 이상 훈련을 지속하여 긴장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출격에서 성공적으로 적을 격파하신다면 훈련량의 조정을 고려해보겠습니다.」

"...네, 그러셔요."

「그럼 다음번 시뮬레이션에서 뵙겠습니다.」

세환은 브룬힐데의 말에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끌려다니고만 있었다. 정말 인공지능인지를 의심하는 수준을 넘어서, 세환은 요즘 브룬힐데를 한명의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날카로운 눈초리를 한 깐깐한 얼굴의 아가씨로.

"목소리만 들으면 상당히 미인일 것 같은데 말이지."

「지금 뭔가 상당히 실례되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히익?!"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지를 뻔 하다가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쿵쾅대는 것이 꼭 금방이라도 터져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더불어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싸우다 죽거나 신체기능 마비로 죽기 전에 심장 마비로 죽는 게 더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인간의 신체 기능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이런 정도로 생명유지활동에 지장이 가지는 않습니다.」

"...저기, 부탁인데 제발 내 생각 읽고 멋대로 대답하지 마. 기분 나쁜 건 둘째치고 정말 정신 건강에 안 좋다구.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안 될까?"

「참고하겠습니다.」

...순순히 따를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세환은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무슨 인공지능이 이렇게 고집불통에 막무가내인지, 학습능력을 없애고 교관형으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브룬힐데 자체로는 로봇이 아닌 이상 굳이 로봇3원칙에 구애될 이유도 없는데다 애초에 지구의 물건이 아니니 그런 게 있는지도 조금 의심스럽긴 했다.




며칠 후, 20XX년 2월 어느 날.

"그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약 5분전에 대기권 상층부에서 관측되었습니다."

"크기는? 예상 낙하 지점도 나왔소?"

"크기는 직경이 약 50m, 높이가 70m 정도로 예상됩니다. 대기권에 돌입하기 직전에 순간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는 아닙니다. 예상 낙하 지점은 바로..."




지난번 괴로봇의 공격이 있고 약 20일 후, 두번째로 나타난 괴물체는 대기권에 돌입할 때가 되어서야 NASA에 탐지되었다. 국방성을 비롯한 미국의 고관들은 탐지 시기가 너무 늦은데 대해 NASA의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했지만, 그보다 괴물체에 대한 대응책을 수립하는 것이 먼저라는 대통령의 말에 추궁을 멈추었다. 사실 NASA로서도 억울한 것이, 괴물체는 지구에서 탐지할 수 있는 어떠한 전파나 에너지도 발산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어떠한 파장을 방출했겠지만, 지구의 기술력으로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결과적으로, 괴물체는 어떤 감시나 저항 없이 대기권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면 당장 대피령을 내려야 하지 않소!"

"대피령을 내리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오! 애초에 5분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대피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소! 그렇지, 주 방위군은? 지금 얼마나 동원할 수 있소?"

"연방군도 동원해야합니다! 지상군은 물론 인근에 있는 함대까지 가능한 모든 병력을..."




예상 낙하 지점은 샌프란시스코, 현재 시간은 샌프란시스코 현지 시각으로 새벽 1시 경. 낙하 지점과 예상 시각을 들은 정부 고관들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경찰력은 처음부터 고려하지도 않았고, 가장 가까운 기지에서 주 방위군과 연방군을 가리지 않고 출동시키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지금쯤 괴물체는 이미 샌프란시스코 상공에 나타나 있을 터였다.




약 20분 전, 한국시각으로는 같은 날 오후 5시 40분경, 대한민국 서울.

「마스터, 왔습니다.」

거실에 앉아 TV를 보던 세환은 브룬힐데의 말에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세환은 혹시나 해서 TV 채널을 돌려보았지만, 아직 어느 채널에서도 괴로봇과 관련된 속보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정보가 통제되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인류의 기술로는 카라타스를 탐지할 능력이 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장소는 어디지?'

「현재는 대기권 밖에서 접근 중입니다. 약 20분 후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낙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분이라... 어떻게든 그 안에 핑계를 만들어서 자리를 비워야되나.'

세환은 뭔가 그럴 듯한 핑계거리를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진석이나 민우를 만나러 나간다고 하는 게 가장 무난하긴 했지만, 만의 하나라도 그 둘 중 하나가 집에 전화라도 걸어오는 날에는 일이 꼬여버린다. 머리를 짜내서 가장 뒷탈이 없을만한 말을 생각하고 있자니, 다시금 브룬힐데가 말을 걸어왔다.

「샌프란시스코 상공에 출현했습니다. 지금 출격하셔야합니다.」

'뭐? 너무 빠르잖아.'

「이미 20분 지났습니다. 너무 생각을 골똘히 하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정말 6시였다. 아직까지 쓸만한 핑계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세환은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외투를 걸쳐입기 시작했다. 자연히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물어보셨다.

"어디 가니? 벌써 저녁 때인데."

"아, 저기, 집에만 있으려니 왠지 좀 갑갑해서 산책 좀 하고 들어오려구요."

"밖에 아직 추울 텐데."

"괜찮아요, 이제 곧 3월이고. 저녁 먹기 전까지는 들어올게요."

"그러렴, 감기 걸리지 않게 제대로 입고 나가라."

말씀을 마친 어머니는 다시 잡지로 시선을 돌렸고, 세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외출준비를 했다. 그렇게 무사히 집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이번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동할 장소가 문제였다.

"어디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 없나... 아, 계단."

고층 아파트의 계단이라면 오르내리는 사람도 별로 없고, 보안 카메라도 설치되어있지 않으니 이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2개층의 중간참에서 세환은 브룬힐데에게 이동을 지시했다.

'브룬힐데, 지금 이동시켜줘.'

「알겠습니다. 이동합니다.」

다음 순간, 세환은 지크프리트의 콕핏 시트에 앉아있었다. 입고 있던 겨울용 외투를 벗어서 시트 아래에 내려놓고, 다리와 몸통부분의 시트 벨트를 조여맸다. 팔부분의 시트 벨트는 브룬힐데가 자동으로 조절하는 모양인지 세환이 잡아당겨 고정시킬만한 부분이 안 보였다.

"이제 접속장치에 손만 올리면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나노머신에 의해 마스터의 신경이 지크프리트의 유사신경과 접속되어 가동 상태에 들어갑니다.」

세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땀이 밴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아무래도 긴장되었다. 첫 출격, 첫 싸움,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첫 걸음. 이 작은 반구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게 시작되는 것이었다. 세환이 머뭇거리자 브룬힐데가 재촉했다.

「현재 카라타스의 기동병기가 착륙선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젠장, 나도 마음의 준비 좀 하자."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세환은 조심스레 양손을 팔걸이 끝에 달린 반구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약간 따끔한 느낌과 함께 반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젖혀져 있던 덮개 같은 것이 올라와 손등을 마저 덮었다. 그러는 사이에 양팔은 팔걸이의 시트 벨트에 의해 완전히 고정되었다.
이 모든 동작이 완료된 순간, 세환의 눈은 콕핏 내벽이 아니라 에어즈락 속의 격납고를 보고 있었다. 신경접속이 완료된 것이다.

"연결됐나..."

「신경접속 완료, 싱크로율 98.7%. 전투시 필요 최저 싱크로율은 97%이므로 안전범위 내입니다.」

"...그래. 그러면 일단 움직여볼까."

세환은 지크프리트의 상체를 서서히 일으키기 시작했다. 격납고는 지크프리트가 일어서도 충분할 정도의 높이여서 천장에 부딪히거나 할 걱정은 없었지만, 움직일 때의 진동이 밖으로 전해진다면 관광객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조심조심 움직였다.

"확실히 감촉까지 전해지네. 하, 정말 내 몸이나 다름없는 건가..."

「서둘러야합니다. 지금 현장으로 워프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잠시후, 세환은 지크프리트가 공중에 살짝 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약간의 진동과 함께 지크프리트의 양발이 땅에 닿았다. 이동이 끝나자마자 세환은 일단 주변을 살펴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 대충 100m 쯤 되는 거리에 알 모양의 착륙선과 적기가 보였다.

"...정말 악취미군."

적기의 모습을 본 세환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이번 적기의 모습은 인간형, 그것도 거대한 창 모양의 무기를 들고 있는 형태였다. 게다가 전체가 하얀 색으로 칠해져있는 것은 마치 성기사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에 비해 지크프리트는 형태는 기사의 모습이지만 색이 회색빛이라 지금 마주치 적기와 비교하면 악역의 느낌이 강했다.

"이래서야 이쪽이 나쁜 놈입니다 하는 것 같잖아. 젠장, 이거 기분 나쁘네."

「외형과 행동목적과는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때, 적기가 세환이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잠시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던 적기는 왼팔을 들어올리더니, 갑자기 팔에서 총구같은 것이 4개나 튀어나옴과 동시에 빔인지 레이저인지 모를 빛줄기를 날렸다.

"헉?!"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세환은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주춤하며 눈을 감을 뿐이었다. 최소한 어디 한군데에는 구멍이 뚫렸겠다 하는 생각을 하던 세환은, 그런 것치고는 아픈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뜨고 앞을 보니, 적기가 막 두번째 사격을 날리는 참이었다.
이번엔 세환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적이 쏜 빛줄기는 지크프리트의 앞에서 어떤 투명한 막에 흡수되듯이 사라져버렸다.

"광학병기인지 에너지병기인지는 안 통한다더니 진짜였구나..."

「분명히 설명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쩐지 좀 불만스럽게 들리는 브룬힐데의 말을 흘려들으며, 세환은 적기의 행동을 주시했다. 광학병기가 통하지 않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동급의 로봇에 경계심을 품었는지, 적기는 방금 전까지 여유있게 한손으로 세워잡고 있던 창을 양손으로 쥐고는 지크프리트를 겨냥했다. 명백한 전투 자세였다.

"역시 이렇게 되나... 정말,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걸까."

세환은 신세 한탄을 하면서도 지크프리트를 움직여 살짝 허리를 낮추며 방패를 앞으로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검은 머리 옆으로 들어올려 언제라도 휘두를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렇게 잠시 대치하고 있는데, 브룬힐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시간이 없습니다. 적의 소형 로봇들이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서둘러 격파해야 합니다.」

"뭐? 망할, 도무지 여유를 안 주는구만."

적기 주변을 슬쩍 쳐다보니 브룬힐데의 말대로 거미를 닮은 소형 로봇들이 재빠르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그마한-적어도 지금 세환에게는 그렇게 들리는- 폭발 소리도 섞여 있었다. 브룬힐데가 말한대로, 이렇게 대치하면서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좋아, 간다!"

세환은 방패를 들어올린 채 적기를 향해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본 적기도 자세를 한층 더 굳히는 기색이 느껴졌다. 적이 창대로 방패를 쳐낼지, 아니면 방패를 향해 창을 내지를지, 옆으로 피하며 틈을 공격할지, 그리고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세환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윽?!"

세환의 공격을 받아내리라고 생각했던 적기가 돌연 마주 달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마주 달리는 것이 아닌, 메인 스러스터의 추력을 이용한 가속 돌격이었다. 저 정도의 돌격력이라면 방패로 막아낸다고 해도 그 충격이 상당할 것이다.

"멋대로 될 것 같냐!"

세환은 순간적으로 허리를 낮추면서 어깨로 적의 복부를 들이받았다. 상대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하는 바람에 왼쪽 어깨 뒤쪽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어깨로 들이받는 것과 동시에 양 다리로 기체를 받쳤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의 건물 유리창들이 모조리 깨져나갔다. 엄청난 충격이 온몸에 전해져왔고, 세환은 비틀거리며 몇걸음 뒤로 밀려났지만 넘어지지 않고 버텨냈다.

"크윽, 이거 꽤나 충격이 상당한데?"

슬쩍 보니 왼쪽 어깨는 보호 장갑판이 완전히 고철 수준으로 우그러져 있었지만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적기가 받았을 충격을 기대하면서 앞을 바라본 세환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적기는 복부가 선명하게 움푹 파이긴 했지만 움직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이번 대응으로 쉽지 않은 상대라고 판단했는지, 섣불리 덤벼들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가능한 빨리 처리해야하는 세환으로서는 복장터질 노릇이었다.

"저 자식이..."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주변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게다가 점차 잦아드는 느낌까지 들었다. 시간이 없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앗!"




"저 로봇은 또 뭐요? 어디서 나타난 거요?"

" '알'에서 나온 로봇과 싸우고 있는 걸 보면, 아군이라고 봐도 되지 않겠소?"

"그걸 어떻게 믿소! 먹이를 앞에 두고 싸우는 두마리 맹수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거요."

미 정부 각료회의는 지금 혼란에 빠져있었다. 손쓸 틈도 없이 샌프란시스코에 낙하한 외계물체 문제만도 기절할 노릇인데, 또 다른 로봇이 불쑥 나타나더니 두대의 로봇이 다짜고짜 전투를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두 로봇의 단순한 충돌만으로 주변에 피해가 생기고 있으니, 어느 한쪽이 이길 때까지 도시의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가장 좋은 건 둘이 싸우다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에서 한쪽이 쓰러지는 것이지만, 그때까지 기다렸다간 샌프란시스코는 남아나지 않겠지..."

대통령의 한숨섞인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세환은 다시 한번 방패로 몸을 가리며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녀석을 쓰러트려야만 했고, 그러자면 일단 접근해야 했다. 어떻게 쓰러트릴지는 그 다음이었다.
창의 공격거리 안으로 들어서자 적은 창대를 휘둘러 방패를 쳐올렸다. 방패 표면을 치지 않고 테두리를 밀어올렸기 때문에 팔만 들어올려진 게 아니라 자세 전체가 흐트러졌고, 그 틈을 타서 창날이 휘둘러져 들어왔다.

"아직이다!"

세환은 재빨리 검을 내리그으며 창날을 막아내고, 밀어올려진 방패를 아래로 힘껏 내리쳤다. 방패의 옆테두리가 적의 어깨를 두들겼고, 그 충격에 적기의 무릎이 살짝 굽혀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환은 크게 한걸음 더 파고들어가, 창날이 아닌 창대를 옆구리에 끼면서 검을 앞으로 내찔렀다. 검날이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우왓?!"

생각지도 못한 대응이었다. 지크프리트의 검날이 찔러들어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적이 발로 지크프리트를 걷어찬 것이다. 그 반동으로 거리를 벌리면서 휘두른 창에 세환은 옆구리가 찢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크윽, 제법이잖아..."

전투훈련을 시작한지 한달도 채 안 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세환은 이상하게 투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묘하게도, 흥분이 되면서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맛이 간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세환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똑같은 방법이 여러번 통하리라는 볼 수 없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써야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세환은 왼팔을 크게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방패와 왼팔의 접속을 해제했다. 캉 하는 금속음과 함께, 원심력이 실린 방패는 적을 향해 날아갔다. 세환이 기대한 것은 방패를 쳐내거나 피하면서 틈이 생기는 것이었지만, 녀석의 대응은 또 한번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적기는 날아오는 방패를 피해 날아올랐다.

"뭐?!"

앗차 싶었다. 첫번째 충돌 때에도 적기는 메인 스러스터를 이용해 돌진해왔었다. 그렇다면 고공도약도 가능할 테고, 출력만 충분하다면 비행까지 가능한 게 당연했다. 어쩌면 허공에서 돌격하는 것도...
세환의 우려대로, 날아오른 적기는 정점에서 자세를 바꾸더니 세환을 향해, 지크프리트를 향해 내리꽂혔다.

"이런 젠장!"

방패를 내던진 이상 받아내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격돌하기에는 무기의 길이 차이가 심했다. 일단은 피해야만 했다.
세환은 뒤가 아니라 앞으로 달려나갔다. 등 뒤로 스치듯이 내리꽂힌 적은 굉음과 함께 지면과 충돌했고, 근처의 작은 건물이 충격 때문에 무너져내렸다.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세환은 지체없이 뒤로 돌며 검을 휘둘렀다.
카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창대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세환은 멈추지않고 마저 한바퀴를 돌았다. 그리고는 적과 마주보기 직전에 다리를 들어올려 옆구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종아리에 달린 보조 스러스터까지 가동시킨 채로.

"아자아아아아아아!!"

회전력에 추진력까지 실린 발차기를 맞은 적은 그대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작은 건물들을 부수고 밀려나가면서도 그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자세가 무너질 것 같자 적은 다시금 메인 스러스터를 이용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세환 역시 걷어차자마자 달려들었고, 적기가 위로 떠오르자 자신도 그 정면으로 날아올랐다.

"!!"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지크프리트의 모습에 놀랐는지 순간 적기가 머뭇거렸고, 세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날렸다. 원래는 검으로 두동강을 내려는 생각이었지만, 출력 조절을 잘못해서 너무 가까이 붙어버리자 세환은 검을 쥔 오른손을 그대로 적의 복부에 꽂아넣었다. 그 충격으로 거리가 벌어지자 세환은 두손으로 검을 틀어쥐고는 풀 스윙으로 휘둘렀다.

"죽어어어어!!"

창이 찔러들어오는 것보다 조금 빠르게, 지크프리트의 검이 적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묵직한 느낌이 손에 전해지다가 곧 사라졌다. 눈앞에서는 두조각난 적기가 동작을 멈춘 채 서서히 추락하고 있었다. 첫 승리였다.

"후우..."

세환은 기분이 묘했다. 정말 이긴 건지, 자신이 쓰러트린 게 맞는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 하하,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이기고 나면 상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세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지만, 상황은 그렇게 여유있지만은 않았다.
떨어져내리는 적을 바라보던 세환은 흠칫했다. 적이 떨어지는 자리에 보이는 구조물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 아, 아아아아아앗!"

세환의 외침도 허무하게, 두조각난 적기는 장대한 구조물 위로 정확하게 낙하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금문교가 단순한 고철덩이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 이거 어쩌지? 도망칠까?"

「죄송하지만 마스터,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응? 저 거대 로봇만 잡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세환은 당황하면서 의문을 표했다. 설마 그 조그만-어디까지나 지크프리트 기준이지만- 거미로봇들까지 일일이 때려잡으라는 소리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브룬힐데가 말을 이었다.

「소형 로봇을 하나하나 파괴할 필요는 없습니다. 카라타스의 병기들은 모두 착륙선에서 에너지를 무선으로 공급받으므로, 착륙선의 에너지 전송 장치를 파괴한다면 소형 로봇들도 작동을 멈출 것입니다.」

"그런가... 어? 잠깐만. 그러면 시작하자마자 저 착륙선부터 부수면 되는 거 아니었어?"

당 연한 의문이었다. 병기와 그 에너지 공급원이 따로 있다면 에너지원을 부수는 게 병기와 싸우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월하다. 그런데 브룬힐데는 왜 그걸 여태 말하지 않고 싸우게 만들었는지, 세환은 약간 불만을 느꼈다. 하지만 브룬힐데의 말을 듣고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착륙선을 공격하려 하면 뒤에서 대형 병기의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방비로 등이 노출된다면 패배할 것이 확실하기에 대형 병기를 쓰러트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됩니다.」

"...네에. 생각이 짧았습니다아."

세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지크프리트를 지면에 내려서게 했다. 등 뒤에 무너진 금문교의 참상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게 착륙선으로 접근하는데, 갑자기 폭음과 함께 무언가가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뭐, 뭐야? ...전투기? 미국 공군인가?"

자세히 보려고 생각하자 갑자기 시야가 줌인 되는 것에 한번 더 놀라긴 했지만, 전투기는 분명 F-15계열의 미국 공군기였다.

"이글인지 스트라이크 이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상관도 없지만, 너무 늦게 나왔잖아... 어엇?!"

푸념을 하고 있으려니 한바퀴 선회해서 접근하던 전투기 편대에서 무언가가-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누가 봐도 분명히 미사일인 물건이-지크프리트를 향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야 이 미친 자식들아! 기껏 도와주니까 이딴 대접이냐! 우왁!"

세환이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미사일이 지크프리트의 동체에 명중했다. 폭발의 충격이 제법 있었지만 손상된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어쨌든 빨리 착륙선을 처리하고 이 자리를 떠야만 했다.

"대체로 이런 전개가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야, 꼭 이럴 필요는 없잖아! 왜 이런 식이냐고!!"

울분섞인 외침과 함께 세환은 착륙선까지 전력질주로 뛰어갔다. 등뒤에서는 다시 선회해온 전투기 편대가 공격 코스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환은 다급한 마음에 스러스터까지 작동시키며 착륙선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으랏차아아아!!"

착륙선 상공에 도착하자마자 지크프리트를 움직여 그대로 수직하강, 추진력에 지크프리트의 자체중량까지 실어 검을 내리긋자 착륙선이 깨끗하게 두동강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지크프리트와 착륙선의 주변에 다시한번 미사일이 작렬했다.

"브룬힐데! 빨리 이동!"

「아직 안 됩니다.」

"뭐? 왜?!"

「방패를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예비품이 없으니 회수해야만 합니다.」

"이런 젠장, 어디 있어!"

세환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갑자기 시야 한구석에 역삼각형 모양의 표시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꼭 게임에서 등장하는 목적지 표시 같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표시가 보이자마자 세환은 냅다 달렸다. 간간이 몸에 느껴지는 진동은 아무래도 전투기의 기총 사격 같았다.

"이 자식들이, 완전히 적으로 본 거냐!"

기총 사격까지 받아가며 방패를 집어든 세환은 다시한번 이동을 명령했다. 이젠 한순간도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이동! 빨리!"

「알겠습니다.」

브룬힐데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주변의 모습이 변했다. 방금전까지 탁 트인 시야에, 반쯤 무너진 금문교가 있던 광경은 사방이 막힌 격납고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내심 불안했던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세환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후아... 살았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공격해올 줄이야."

「손상부는 왼쪽 어깨장갑, 오른쪽 옆구리입니다. 수리에는 5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 외의 경미한 손상은 하루 안에 수리 완료됩니다.」

"...아 그래."

세환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대고 있는데 냉정하게 분석만 하는 브룬힐데가 조금 야속했다. 난데없이 공격까지 받았는데 신경 좀 써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대해온 방식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 맞다. 방패는 예비품이 없다고 했지. 그러면 검이나 단검도 일일이 회수한 다음 이동해야하는 거야?"

「말씀대로입니다. 무장은 예비품이 존재하지 않으니 전투 후에는 반드시 회수해야만 합니다. 파괴되었다면 그 잔해라도 회수해야 복구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재사용 정신 한번 투철하군... 접속이나 좀 끊어줘."

「알겠습니다. 신경접속 종료합니다.」

잠시 후, 세환은 자신이 지크프리트의 콕핏 시트에 앉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싸우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신경접속이 되어있는 동안에 몸이 가수면 상태에 들어간다고 해도 발열이나 발한(發汗) 능력은 제대로 기능하는 모양이었다. 세환은 시트 벨트를 하나하나 풀어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묘하게 몸이 무겁네. 설마, 벌써부터 몸에 이상이 오는 건 아니겠지?"

「지크프리트의 유사신경이 실제 인간의 신경보다 반응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체감 반응속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정말로 몸의 반응이 늦어질 수도 있겠지?"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신경 손상의 증상은 무척 다양하기에 어떠한 증상도 신경 손상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역시 그런가..."

세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놓인 외투를 집어들었다. 땀에 살짝 젖은 상태에서 외투까지 입으려니 기분이 영 찝찝했지만, 겨울에 산책을 한 사람이 외투도 안 입고 다녔다면 의심을 받을 게 뻔하니 어쩔 수 없었다. 외투를 입고 지퍼까지 올려 잠근 세환은 브룬힐데를 불렀다.

"그럼 아까 내가 있던 장소로 보내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파트 계단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세환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셨는지, 어머니 혼자 TV 뉴스를 보고 계셨다.

"왔니? 이것 좀 봐. 샌프란시스코에 괴로봇이 둘이나 나타나서 금문교가 무너졌대."

"어, 그, 그래요? 큰일이었겠네요."

"그러게. 그런데 나중에 나타난 로봇은 뭐였을까? 미군은 적으로 본 모양인데."

"글세요... 아, 저 일단 좀 씻을게요."

"그러렴. 난 저녁 준비 시작하마."

세환은 대충 대답하고는 서둘러 씻을 준비를 했다. 아무래도 전투 장면이 실시간 생중계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미국 공군기한테 공격받는 장면까지. 이러다 완전히 적으로 낙인찍히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에 세환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날 밤, 세환의 방.
자리에 누운 세환은 조용히 손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고 있었다. 나름대로는 신경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별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처음이라 아직 증상이 없나...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겠지. 죽음을 향한 일방통행이... 후우, 브룬힐데?"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접속을 반복할수록 나노머신이 신경을 침식한다는 거 말인데. 접속할 때마다 침식된다는 거야, 아니면 평소에도 약간씩 침식되고 접속하면 그게 더 가속된다는 거야?"

「전자입니다만, 접속을 반복할수록 침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가... 후우..."

세환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이제야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말로만 들었지만, 실제 전투를 경험한 지금은 자신이 점차 죽음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전투에 져서 죽든, 나노머신 때문에 죽든, 자신의 인생은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애초에 인간의 삶이라는 게 되돌릴 수 없긴 하지..."

세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첫 전투에서 생긴 긴장과 그로 인한 피로가 상당히 컸던 모양이었다. 브룬힐데도 이때만큼은 세환이 조용히 자도록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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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챕터 끝났습니다.

카라타스의 병기들의 동력은 전부 무선 공급받는 방식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착륙선에서 전송하고, 모선에서도 전송되기 때문에 모선이 도착했을 때에는 착륙선을 별도로 내려보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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