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아, 세환아. 다음주는 너 혼자 지내야겠는데, 괜찮지?"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일 있어요?"

막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던 세환은 어머니의 말에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세환의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있잖니, 재미삼아 라디오 프로그램에 응모했던 엽서가 당첨이 됐단다. 그것도 무려 1등. 상품이 부부 동반 파리 5일 여행권이라더구나."

"해외여행이라구요?! 그것도 바로 다음주?! 너무 빠르잖아요!"

"하지만 어쩌겠니. 그 다음주면 너 학교 개학하니까 시간이 안 나는 걸. 아버지 회사야 월차 내면 되니까 상관없지만, 우리 없는 동안 학교 다니게 두는 건 조금 불안해서 말이다."

"...어린애가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세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맥없이 대꾸했다. 그런 세환을 보면서, 어째선지 어머니는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러면 안심하고 갔다 와도 되겠구나. 다음주에 집 잘 보렴."

"다녀오시라고는 아직 말 안 했습니다!!"




《그래도 살아간다》 - 6. 무의미하다




시간은 흘러, 어느 새 세환의 부모님이 출국하는 날이 되었다. 세환은 공항까지 따라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갈 때는 셋이 가서 집으로는 혼자 돌아올 생각을 하니 급속도로 우울해져서 관두고 그냥 집에서 배웅하기로 했다.

"엄마 없다고 울거나 그러면 안 된다."

"안 웁니다요. 오히려 매일같이 안부전화라며 집에 전화걸지 마세요. 국제 전화비 비싸요."

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세환의 어머니는 세환에게 농담을 건넸고, 세환도 살짝 웃으며 받아넘겼다. 아버지도 옆에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다녀오마. 핸드폰은 로밍 서비스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라,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걱정마세요. 애초에 그런 일 안 생기게 할 테니까요. 여행 즐겁게 잘 다녀오세요."

"오냐, 닷새 후에 보자."

부모님을 배웅하고 집에 들어오자, 갑자기 집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집에 자신만 남아있는 경험이 드물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며칠동안이나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환은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20XX년 8월 말, 미국 항공우주국(NASA).

외계 로봇의 착륙선이 지구에 내려오기 시작한지 벌써 반년이 넘었지만, NASA에서는 아직도 착륙선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빨리 발견한 것이 지면 도달 40분 전이었다. 발견 시간이 빨라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낙하 1시간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야 겨우 발견한다는 것은 NASA의 명성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덕분에 천체 관측 담당반은 반년이 넘게 눈칫밥을 먹으며 지내오고 있었다. 지금도, 다른 팀이 반 이상 퇴근한 시간임에도 대부분의 인원이 관측과 분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렌즈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래? 뭐가 있어?"

분석반원 한명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리자, 옆에서 자기 일을 하던 동료 한명이 고개를 돌려 그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연구원의 모니터에 떠올라있는 것은 소행성대(小行星帶, Asteroid belt) 관측 사진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어보였기에 동료는 그 연구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내가 볼 땐 정상인 것 같은데. 뭐가 이상해보이는데 그래?"

"아니, 그게 말이야. 으음, 자, 이거랑 비교해보면 말이지."

연구원은 화면에 떠 있는 사진을 축소시킨 다음 자료를 뒤져 며칠전의 소행성대 관측 사진을 띄웠고, 다시 그 이전의 관측 사진 두세개를 더 띄웠다.

"자, 이건 모두 같은 주역을 찍은 거야. 자세히 보라구."

연구원의 말에 동료는 사진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확실히 동일한 지역의 사진이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점점 달라지는 과정이 찍혀있었다.

"...뭐지, 이건?"




다음 날, 세환은 안경점을 찾았다.

"안경은 안 되겠고, 콘택트 렌즈를 써야 하나. 관리하기 귀찮을 것 같은데..."

지난 번 전투 이후 나노머신의 침식 현상이 시력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는지, 세환은 갑자기 시력이 떨어진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글자를 읽으려면 코앞까지 들이밀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상생활에 약간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원래부터 안경을 쓰고 있었다면 렌즈만 바꿔도 될 일이지만 세환은 안경을 쓰지 않았고, 갑자기 안경을 쓰게 되면 부모님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콘택트 렌즈 밖에 방법이 없었다.

"별 수 없나, 쳇."

세환은 투덜거리며 안경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경점 주인의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후, 세환은 2주 착용 렌즈를 쓰기로 했다. 시력이 얼마나 더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래도 하드 렌즈를 사기는 아까웠고, 1회용은 정말 돈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지금 사용하는 것을 다 쓴 후에 더 사기로 하고, 세환은 렌즈 한 세트를 구입하고 안경점을 나섰다.

"아, 이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환은 몇번이나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고, 순간적으로 무릎이 꺾이는 정도였지만 평소에는 없는 일이었다. 카라카스 전투 이후 자주 이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것도 신경 접속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어때? 이것도 부작용 항목 중에 있어?'

「사례 중에 운동능력 저하가 있습니다. 마스터의 왼손 악력이 약해진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보시면 됩니다.」

'맞다는 얘기군. 나중엔 아예 걷는 것조차 못하게 되는 거 아닌가 이거...'




다음날 아침.
곤히 자고 있던 세환은 난데없이 울려대는 전화벨소리에 잠을 깼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시간은 아침 6시를 좀 넘긴 시간. 원래대로라면 한창 아침잠을 달게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대체 누가 전화질이야..."

엄밀히 말하면 꼭두새벽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지만, 어쨌든 세환은 거실로 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세환아, 엄마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하셨나요. 덕분에 잠 다 달아났습니다."

『으응? 하지만 지금 밤 10시인데?』

"시차를 생각하세요, 시차를... 여긴 아침 6시라구요. ...그런데, 술 드셨어요?"

『응, 마셨지, 마셨구말구. 정말 기분 조~오케 마셨지.』

세환은 전화 너머로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외출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부모님께서 술을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진 김에 시차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전화부터 거셨다는 얘기였다. 어투에서 상태를 짐작해보건대, 아무래도 정상적인 대화는 포기해야할 듯 싶었다.

"네에, 얼마나 기분 좋으신대요?"

『하늘만크음 땅만크음~』

"...그러십니까."

세환은 방금 그 말이 50을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뇌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자기 부모님의 발언이라도 닭살은 닭살인 법이다.
다행히 어머니의 주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신 아버지가 전화를 낚아채서는 안부를 전하고 서둘러 끊으신 것이다. 하긴, 그냥 뒀다간 국제전화비가 얼마나 나올지 모를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다만 끊기 직전에 아버지 뒤에서 '이잉~ 여보야는 심술쟁이~'하는, 뭔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느낌이 들었다.




20XX년 8월 말, 프랑스 수도 파리. 현지 시각 오후 4시 30분 경. (서울 시각 밤 12시 30분경.)
국영 천문대에서 프랑스 정부로 긴급 보고가 올라가고 약 10분 후, 파리 시경에 비상이 걸리며 모든 경찰이 동원되어 사람들을 시 외곽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에펠탑을 비롯한 모든 관광 명소가 텅 비게 되었고, 그로부터 약 20분 후에 카라타스의 착륙선이 파리 시내에 낙하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의 노력은 보답받지 못했다. 착륙선은 사람들의 대피행렬 위로 낙하했던 것이다.




「마스터, 적이 탐지되었습니다.」

'그래? 어디인데?'

「프랑스 파리입니다.」

예상 낙하지점을 들은 세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갑작스런 세환의 행동에 함께 술을 마시던 진석과 민우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세환에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젠장, 확실해? 다른 곳이랑 착각한 거 아니야?'

「틀림없습니다. 낙하 완료 예상 시각은 지금으로부터 30분 후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진석과 민우는 세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세환의 표정이 시시각각 험악하게 변해가는 통에 도무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주저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환이 벌떡 일어섰다.

"미안하다, 나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좀 가야겠어."

"어? 무슨 일인데?"

"미안, 정말 급해서 그래.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좀 이해해주라. 먼저 간다."

"어, 야! 컥!"

진석은 황급히 뛰어나가는 세환을 잡으려다 민우가 뒤통수를 때리는 통에 주의를 민우에게 돌렸고, 그 틈을 타서 세환은 가게를 빠져 나왔다.
일단은 술을 좀 깨야 했다. 세환은 편의점으로 들어가 숙취 해소 음료와 박하 사탕을 샀다. 생각같아서는 얼음을 뒤집어 쓰거나 얼음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었지만 편의점에서 얼음을 팔 리도 없고, 집으로 가면 도착하기도 전에 30분이 훌쩍 지날 게 뻔했다.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숙취 해소 음료를 마시고 박하 사탕을 입에 문 세환은 근처 건물의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하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초조했다.

「마스터, 10분 남았습니다.」

'...빌어먹을. 알았어.'

화장실의 개인실로 들어간 세환은 그 즉시 지크프리트의 콕핏으로 이동했다. 아직도 어질어질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 것이 상당히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출격 준비를 마치고 잠시 누워있자니 졸음이 느껴지는 게, 사람 환장할 지경이었다. 억지로 졸음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맑은 정신은 아니었다.

「적 착륙선 낙하 완료 확인. 이동합니다.」

다음 순간, 지크프리트는 파리에 서 있었다. 앞에는 막 착륙선에서 나오는 적기가 보였다. 이번 적기는 지크프리트와 유사한, 검과 방패를 하나씩 장비한 로봇이었다.

"...젠장, 비슷한 타입이 상대하기 제일 까다롭다는데."

세환은 자꾸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면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양쪽이 똑같은 장비를 갖추고 있다면 무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세환은 그 점에서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여러가지로 위험하네, 오늘은."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적기를 주시하던 세환은 문득 적기의 뒤쪽 지면에서 뭔가가 자꾸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세히 보고는 경악했다.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을 거미형 로봇들이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이번에도 대피령 안 내린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피난 경보가 발령되었지만, 피난 행렬 근처로 착륙선이 낙하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잖아! 제기랄!"

세환은 더 생각할 것 없이 지크프리트를 돌격시켰다. 아니, 돌격시키려다 멈췄다. 적기의 뒤쪽에 사람들이 몰려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만약 적기가 부딪혀 쓰러진다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몰살당할 테고, 돌격을 피해낸다면 이번엔 지크프리트가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가장 좋은 것은 둘이 맞부딪혀 힘겨루기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런 상황이 되었다간 언제 지크프리트가 당할지 몰라서 불안했다.

"썩을... 이래저래 난감하구만."

일단 세환은 자세를 잡은 뒤, 적기를 바라보는 상태로 반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적기와 지크프리트를 잇는 연장선상에 사람들이 최대한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원래 서 있던 곳에서 적기를 기준으로 90˚ 각도가 되는 곳에 도착해서 약간 안심한 순간, 적기가 달려들었다.

"우왓?!"

세환은 급히 방패를 들어올려 적기의 검을 막으려 했지만, 적기의 공격은 검이 아니었다. 달려오던 속도에 더해 방패를 휘둘러 지크프리트의 방패를 위쪽으로 쳐낸 것이다. 적기의 방패 테두리에는 안쪽으로 걸림쇠 같은 것이 나 있었고, 거기에 지크프리트의 방패 테두리가 걸리자 그대로 딸려 올라가며 지크프리트의 동체가 노출되었다. 당황한 세환이 몸을 빼려했지만, 적기의 공격이 더 빨랐다.

"큭!"

「동체 좌측부 손상, 외부 장갑 완파. 기동에는 지장 없습니다.」

몸을 완전히 빼내기 직전에 파고든 적기의 검이 지크프리트의 옆구리를 찢어놓았다. 치명상을 면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세환은, 갑자기 지크프리트가 뒤로 눕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찔러들어오는 검을 피하는 사이에 적기가 지크프리트의 발을 걸어 넘어트린 것이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진동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세환은 거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쓰러지자마자 위에서 검이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우와아앗!"

주변 피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몸을 굴려서 피해냈다. 몸을 일으킨 세환은 오른팔을 뻗어 니들 건을 쏘았지만 적기는 간단하게 회피해버렸다.

"이걸 어떻게 피하는 거야!"

「지금 마스터의 반응속도는 평소보다 0.5초 가량 늦습니다. 전투용 AI가 회피와 관련된 연산을 마치고 회피 기동을 개시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제길, 술 마시는 게 아니었어."

세환은 자세를 낮추며 왼팔을 적기를 향해 휘둘렀다. 몇번 사용했던 방패 던지기였다. 적기는 회전하며 날아드는 방패를 자신의 방패로 받아치며 돌격 자세를 취했지만, 방패를 날리자마자 돌격해온 지크프리트와 충돌하는 게 먼저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적기를 부둥켜안은 세환은 스러스터를 최대로 전개, 현장에서 멀어졌다. 가능한 지금 있는 자리에서 멀어지는 것이 사람들에게 피해가 덜 간다는 생각이었다.

「마스터! 등!」

브룬힐데의 다급한 외침. 고개를 들어 위를 보자 적기가 검을 거꾸로 쥐고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다. 세환은 즉시 메인 스러스터를 멈추며 보조 스러스터를 역분사, 지크프리트를 멈추며 적기에서 떨어졌지만 왼쪽 어깨가 베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크악!"

「좌측 어깨 관절부 손상. 좌완 기동률 80%로 저하.」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지크프리트를 향해 적기가 돌격해 들어왔다. 세환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적기의 방패가 지크프리트를 강타했고, 지크프리트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대로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내리꽂히는 적기의 검을 피해 세환은 다시 한번 지크프리트를 옆으로 굴렸다. 거리를 벌린 세환은 지크프리트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턱에 가해진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쫓아온 적기가 지크프리트의 턱을 걷어찬 것이다. 또다시 굉음과 함께 지크프리트가 지면에 쓰러졌다.

"이이익!"

메인 스러스터 최대 출력. 일단 태세를 가다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세환은 스러스터의 추진력을 이용해 지면을 미끄러지듯 거리를 벌렸다. 도중에 건물이 부딪히며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확보되었다고 생각한 세환은 스러스터를 멈추고 지크프리트를 일으켰다.

"젠장, 이래선 끝이 없겠는데."

술기운은, 적어도 머릿속에선 깨끗이 날아가 있었다. 흐릿한 정신이 계속 되었다면 아마 죽어도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지크프리트는 방패를 떼어냈기 때문에 이제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적기는 여전히 검과 방패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난타전으로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선 니들 건도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결국 일단 부딪쳐 보는 수 밖에 없나...!!"

세환은 지크프리트의 비어있는 왼손에 단검을 쥐고는 적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러스터를 쓰지 않고 순수하게 다리만을 이용한 돌진. 지크프리트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적기는 몸을 약간 옆으로 틀면서 다리를 들어올렸다. 지크프리트를 걷어차려는 동작. 세환은 멈추거나 막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앞으로 내던지며 앞구르기. 적기의 킥은 한껏 웅크린 지크프리트의 위를 지나갔다. 세환은 반바퀴 회전했을 때 지크프리트의 동체를 한껏 폈다. 등쪽으로 기울어진 물구나무 자세가 만들어지며 그 양 발꿈치에 적기의 턱이 적중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적기가 넘어졌다. 지크프리트는 구르던 힘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앞구르기 착지. 착지 지점은 적기의 동체 위. 장검을 고쳐잡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단검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지크프리트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스러스터를 이용해 지면 위를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적기. 세환은 완전히 넘어지기 전에 자세를 바로 잡고는 적기를 뒤쫓았다. 적기는 추진력을 살려 한바퀴 회전하며 다시 일어선 다음 지크프리트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방패를 앞세우고 장검을 뒤로 한껏 끌어당긴 자세. 아무리 봐도 방어구가 없어진 지크프리트가 불리했다.
격돌 직전, 세환은 단검을 적기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적기가 방패를 들어올려 단검을 막아내는 동안, 오른 손목에 있는 단검을 왼손으로 뽑아쥐는 것과 동시에 장검을 적기의 다리를 향해 베어갔다. 벤다고 확신한 순간, 적기의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잠깐의 스러스터 가동을 이용한 점프, 그리고 중량을 이용한 장검의 내려베기. 아니, 내려찍는 것에 더 가까운 공격. 두 기체가 부딪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환은 장검을 들어 적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적기가 내리찍는 힘에 중량이 더해지며 지크프리트의 팔이 밀렸고, 아래로 쳐진 지크프리트의 검이 지크프리트의 왼쪽 어깨 뒤편에 꽂혔다.

"!!"

「좌측 어깨 관절부 손상, 기동률 50%로 저하.」

기동률은 떨어졌지만 아직 움직일 수는 있었다. 세환은 왼손에 쥔 단검을 위로 내찔렀다. 적기는 장검을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찍기 위해 방패를 부착한 왼팔을 옆으로 뻗고 있었기 때문에 동체는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지크프리트의 단검은 적기의 동체, 명치 부분에 꽂혔다.
에너지 수신 장치를 공격당한 적기는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굉음과 함께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위치는 정확했지만 공격한 무기가 단검이어서 확실히 수신 장치를 부수지 못했기 때문인지, 적기는 아직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끄응, 작작 하고 좀 꺼져!"

세환은 어깨에 박힌 장검을 뽑아 적기의 명치에 내리꽂았다. 그제야 적기의 행동이 완전히 멈췄다. 적기의 동체에서 검을 뽑아든 세환은 서둘러 착륙선으로 향해 에너지 전송 장치를 파괴했지만, 대피 행렬은 벌써 절반 이하로 줄어든 후였다. 대피 행렬의 곳곳에 보이는 붉은 색을 보며 세환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전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세환은 서둘러 외교부에 전화를 해봤지만 새벽 시간대라서 그런지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급해진 세환은 외교부 홈페이지를 들어가보았지만, 파리 전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글은 단 하나도 올라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홈페이지 구성이 쓸데없이 복잡하기까지 해서 여기저기 헤맨 세환은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제발, 무사하시길, 무사하시길......"

초조하게 외교부 홈페이지의 게시판 여기저기를 들락날락 거리던 세환은 문득 인터넷 뉴스를 떠올렸다. 이럴 때에는 인터넷 뉴스가 정부 홈페이지보다 소식이 더 빠르다는 걸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세환은 급히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보았지만, 로봇들끼리의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만 적혀 있을 뿐 인명 피해에 대한 것은 아직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전투가 끝난지 채 1시간도 안 지난 상황에서 인명 피해가 파악되었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세환으로서는 잠자코 기다릴 수 없었다. 너무 불안했다. 전투가 끝난 후에 채 반도 안 남은 대피 행렬, 곳곳에 보였던 시신과 붉은 피. 단 일초라도 빨리 부모님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다. 세환은 그렇게 컴퓨터를 붙잡은 채 날을 새고 말았다.




"아, 떴다! 제발, 제발 이름 없어야 할 텐데..."

약 10시간 후, 인터넷 뉴스 사이트 중 한 곳에 한국인 피해자 명단이 올라왔다. 세환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목록을 읽어내려갔다. 한줄, 한줄, 한줄, 한줄............

"......"

마우스 휠을 돌리던 세환의 손이 멈췄다. 그와 함께 세환의 시선도 모니터의 한 곳에 고정되었다.
몇분 후, 세환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스르륵' 움직인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컴퓨터의 전원도 내리지 않은 채, 세환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찬장에 놓인 컵을 들고는 물을 따라 한모금 마신 세환은, 잠시 그 컵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이런 쓰레기 자식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컵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가,

"쓰잘데기 없는 쓰레기 새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싱크대에 내동댕이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깨진 조각에 뺨이 베인 것도,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 않은 채, 세환은 그렇게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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