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무장 점검 개시. 구미호 - 이상 없음. 암 머신 건 - 이상 없음. 암 블레이드 - 이상 없음. 삭풍도 - 이상 없음.]

은황의 무기 점검이 끝나자 시우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양손을 뻗어 총을 잡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잠시 후 빛덩어리가 모여들더니 시우의 손 위에 어설트 라이플 한정이 나타났다. 은황의 주무장인 다기능 라이플 구미호(九尾狐)였다.
구 미호를 쥐고 이리저리 움직여본 시우는 이내 정면을 보고 자세를 잡았다.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곳에는 사격 연습용 과녁이 떠올라 있었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댄 상태에서 총구를 아래쪽으로 늘어뜨리고 있던 시우는 어느 순간 갑자기 총구를 들어 단발로 연속 사격을 가했다. 순간적인 사격 실력을 높이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었지만, 효과는 아직 미지수였다. 애초에 사격 병기를 들면 IS의 록온 사이트가 자동으로 총구의 방향과 각도, 목표물과의 거리, 풍향 등 각종 요건을 파악하여 착탄점을 사용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사격 연습의 필요성도 조금 의문이었다.

'사격 연습 같은 거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그 얘기를 했더니 후지노는 그렇게 의문을 표했고, 스칼렛도 그에 동의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시우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조준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연습이 필요했다. 아무리 착탄점을 계산해서 보여준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움직이지 않고 사용자가 정확히 조준해서 쏘았을 때 맞는다는 뜻이고, 실전에서는 저쪽은 저쪽대로 회피기동을 할 테고, 이쪽도 이쪽대로 이리저리 움직일 테니 록온 사이트만 믿고 놀고 있었다간 큰코 다칠 것이 뻔했다.

"저, 선생님. 과녁 조건 좀 바꿔주실래요? 이번엔 움직이는 걸로요."

- 그래. 그러면 움직임과 속력은 어느 정도로 할까?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데요?"

- 움직임은 2차원 기동과 3차원 기동을 정할 수 있는데, 2차원 기동은 상하와 좌우, 전후 방향 중에서 정할 수 있어. 3차원 기동은 말 그대로 상하전후좌우에 대각선까지 다 움직이는 거고, 대신 움직임의 패턴이 초급, 중급, 고급의 3단계로 나뉘어지지. 속력 설정은 총 10단계까지 설정할 수 있고. 어떻게 할래?

"그러면 움직임은 3차원 기동에 패턴은 초급으로 해주세요. 속력은 일단 3단계로 해주시구요."

- O.K. 그럼 지금 바로 적용한다.

방금 사격이 과녁에 모두 명중한 것을 확인한 시우는 피트에 있는 아레나 담당 교사에게 연락해서 과녁의 조건을 변경했다. 교사가 조건을 변경하자 가만히 공중에 떠있기만 하던 과녁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 5개의 과녁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자 시우는 정신이 사나워지는 느낌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어렵겠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5개의 목표를 연속으로 명중시키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아레나 사용 허가시간이 끝날 때까지 성공한 것은 3개 연속이 최고였다. 과녁의 속도는 그럭저럭이었지만 하나의 움직임을 따라가다보면 다른 하나의 움직임을 놓쳐서 다시 조준하는 데까지 3초 이상 시간이 걸리는 일이 많았다.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면서 시우는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학급 대항전 시작까지는 이제 보름도 채 안 남았는데 도무지 자신의실력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자니, 공교롭게도 시우의 반 아이들은 모두 입학시험장에서 처음으로 IS를 움직여본 초보들. 어제 처음으로 IS 조종 실습을 했을 때 여학생들이 보여준 뻣뻣한 움직임을 떠올린 시우는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선생님한테 도와달라고 해볼... 아니, 관두자. 왠지 자폭하는 것 같아.'

사키가 얼음장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호랑이 선생님에 호랑이 교관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어제 실습 시간에도 끝날 때까지 움직임이 개선되지 않은 몇명은 아레나를 20바퀴 돌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사키의 감시 하에 전력질주로.
물론 그에 비례해서 실력도 확실하게 늘겠지만, 적어도 학급대항전에 목숨 걸고 지옥에 발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냥 이번에는 좋은 공부하는 셈 치고 나가자. 에휴..."




다음날 아침 조회 시간.

"오늘은 별다른 전달 사항은 없다만, 그 대신 전학생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편입생인가. 들어오도록."

학생들이 미처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할 말을 끝내버린 사키는 그대로 교문 너머를 향해 말했고, 그러자 교실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붉은 머리를 목 뒤에서 묶은 쾌활해 보이는 소녀였다.

"엘리자베스 키르히아이스(Elisabeth Kircheis)입니다. 리자라고 불러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순간 시우는 속으로 뿜었다. 키르히아이스라니, 스페이스 오페라를 표방했던 모 소설의 등장인물의 성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성, 실존하는 성이었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키가 엘리자베스에 대해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키르히아이스는 얼마 전 독일 국가대표 후보생으로 선발됐지만, 개인 사정 때문에 입학이 늦어져서 오늘에야 스쿨에 올 수 있게 됐다. 뭐, 이걸로 우리반도 겨우 후보생 하나 생겼군. 그리고 한시우."

"네?"

"모처럼 전용기 보유 동지가 생겼으니 잘 지내라. 경력상으로 보면 선배가 되니까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물어봐도 좋을 거다."

"당사자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정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키르히아이스의 자리는 저기가 되겠군. 들어가 앉아라."

"네."

창가에서 두번째 줄-다시 말해 시우가 앉은 줄- 중간의 빈 자리로 다가간 리자가 의자에 앉는 것을 확인한 사키는 그 날의 전달 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크게 별다를 것도 없었고, 그렇게 조회는 끝나는 듯 했다.

"그런데 한시우, 준비는 잘 되어가나?"

"준비요?"

"대항전 말이다. 움직임은 많이 좋아진 모양이던데."

"네, 뭐... 노력중이에요."

"그런가. 별로 큰 기대는 안 하니까 부담 갖지 마라. 패배의 경험도 소중한 거다."

"선생님도 패배 확정으로 보시는 겁니까..."

"저기,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그래, 말해봐라."

사키와 시우가 학급 대항전 준비에 대해서 말을 주고 받자 리자가 관심을 가졌다. 학급 대항전이 무엇인지는 입학 안내서에 대강 쓰여 있었으니 알고 있을 테고, 전용기 보유자이니만큼 관심도 있을 터였다.

"우리반 학급대항전 대표, 저 시우라는 남학생인가요?"

"그래. 만장일치로 그렇게 됐지."

"그러면 혹시 도전도 받아주나요?"

'...응? 도전? 설마 이 애도 원작의 세실리아처럼 '남자가 대표라니 인정할 수 없어요!' 하는 부류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다른 여학생들도 약간 놀란 표정으로 리자를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리자의 표정에는 불쾌감 같은 건 나타나 있지 않았고 그저 흥미로워하는 기색만이 엿보였다. 순수하게 실력을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흐음, 도전이라. 그것도 괜찮겠군. 그러면 3일 후 수업 끝나고 제3 아레나에서 모의전을 하는 것으로 한다. 시간은 오늘 종례할 때 알려주지."

"잠깐만요?! 아직 제 얘기는 듣지도 않았잖아요!"

"디펜딩 챔피언에게 거부권은 없다."

"이게 무슨 복싱입니까! 애초에 전용기 받은지 1주일도 채 안 지난 사람하고 국가대표 후보생하고 상대가 될 리가 없잖아요!"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문득 원작의 이치카가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그 녀석은 처음 전용기를 탄 주제에 대표 후보생인 세실리아를 패배 일보직전까지 몰고 갔다. 결과적으로는 이치카가 졌지만, 뱌쿠시키의 원오프 어빌리티인 영락백야는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은황은 영락백야는커녕 원오프 어빌리티의 근처에도 못 가고 있었다. 사실 애초에 퍼스트 폼에서 원오프 어빌리티가 발현된 뱌쿠시키와 아카츠바키가 상식 밖의 물건들이긴 했다.
그런 시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키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해보기 전에는 모르잖아? 또 모르지, 이번 모의전에서 뭔가 터닝 포인트가 생길지도."

"터닝 포인트는 또 무슨..."

"자, 그럼 이걸로 확정. 조회 끝. 다들 오늘은 IS 훈련이 없으니 수업 끝나고 보자."

할 말을 끝낸 사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나섰고, 여학생들은 또 화제거리가 하나 생겼다는 생각에 삼삼오오 모여서 모의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전부터 기력이 빠져버린 시우가 책상 위에 엎어져 있으려니,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잠깐 시간 괜찮니?"

"응?"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리자가 다가와 있었다. 적의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반가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시우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네가 한시우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난 엘리자베스 키르히아이스. 리자라고 부르면 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래, 나도 그냥 시우라고 불러줘."

"독일에서도 얘기는 들었어. 남성 중에서 최초로 IS 기동에 성공했다며? 어떻게 한 거야?"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있겠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을 억지로 누르고, 시우는 침착을 가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상대라고 해도 악의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니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도 어쩐지 미안했다. 전부터 친구였다면 반쯤 장난으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글쎄, 나도 알고 싶은데 말이지. 연구원들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흐응~ 그렇구나. 그럼 한번 독일에서도 조사 받아볼래? 거기선 결과가 또 다를지도 모르잖아."

리자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주변 공기가 쩡 하고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싶어 슬쩍 주변을 살펴보니 반 여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뭐야, 방금 뭔가 문제 발언이라도 있었나?'라는 생각을 하자 여학생들이 수근거리는 내용이 조금씩 들려왔다.

'들었어. 들었어? 지금 쟤가 슈짱을 모국에 초대했어!'(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는 시우의 통칭이 슈짱으로 굳어져가고 있었다.)

'들었어, 들었어. 대담하네. 편입 첫날인데 벌써...'

'잠깐!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이쪽은 아직 퍼스트 콘택트도 아직이라고!'

'이렇게 되면 오늘밤에라도...'

...뭔가 어수선하고 불순한 대사들이 오가는 것 같았지만 시우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기 전에 은황을 경계태세로 대기시키기로 다짐했다. (여러가지 방면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무의식중에 터득해가고 있는 시우였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왠지 거기 가면 또 희귀 샘플 취급받을 것 같아."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미안. 그러면 오늘부터 같이 연습해보는 건 어때?"

주변의 공기가 또 굳었다. 적어도 시우는 그렇게 느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감에 시우는 속으로 식은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아니, 그것도 사양할게. 사흘 후에 모의전인데 벌써부터 실력을 들키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미안."

"괜찮아. 내가 생각이 짧았네. 그러면 모의전 하고 나서는 상관없지?"

"그렇긴 한데... 그런데 왜 그렇게 같이 연습하려는 건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밀어붙여오는 리자의 언동에 시우는 머릿속에서 떠오른 의문을 그대로 말했다. 말해놓고서 너무 직설적이었나 싶었지만 리자는 그다지 신경쓰는 기색 없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야, 우리 반에서 전용기 보유자는 우리 둘뿐이잖아. 친하게 지내면 좋을 테고, 서로 도움도 될 것 같아서. 혹시 거부감 들었니?"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뭐랄까, 놀랐다고 할까."

시우가 머뭇거리며 한 대답에 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당황하지 마. 이제 같은 반 친구잖아. 앞으로 잘 지내자."

"그래, 나도 잘 부탁해."

악수를 하는 두 사람을 보고 여학생들이 또 한번 얼어붙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후 이틀 동안, 시우는 사격 연습을 반복해서 5개의 이동 과녁을 전부 맞추는 수준까지는 도달했다. 문제는 그 속도가 여전히 3단계라서 5살짜리 꼬마들이 뛰어다니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체술에 자신이 없는 시우로서는 어떻게든 사격으로 해결을 해야하는데, 지금 같아서는 몇분 버티지도 못하고 K.O패 확정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도망갈 수도 없잖아... 이봐요, 거기 위에서 내려보고 있을 누군가. 진짜 이러기요? 기왕 보내주는 거 재능이나 기연 같은 것도 주면 좋잖아?"

시우는 탈의실에서 IS 슈트로 갈아입고 피트로 들어오며 중얼거렸다. 투덜거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처지에 자신을 떨어트린 어디있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속으로 연신 투덜거리며 피트에 들어선 시우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이제부턴 단순한 시뮬레이터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다른 IS와 무기를 맞댈 때였다.
시우는 왼손을 편 채로 천천히 들어 가슴 앞까지 들어올린 다음, 한순간 힘껏 쥐었다. 그러자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은빛 반지가 빛을 발하더니 이내 시우의 전신을 뒤덮는가 싶더니 곧 사라지며 은황의 장갑이 나타났다. 구미호까지 동시전개 완료된 상태였다.

[맥박 및 심박 상승 확인. 정상치 이내이나 안정 요망.]

아레나로 통하는 게이트로 향하는 시우의 눈앞에 은황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시우는 곧 사라지겠거니 하고 무시했지만 그 창은 점멸을 반복하며 계속 떠 있었고, 창을 닫으려고 시선을 돌렸을 때 시우는 그 창에 확인 버튼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설마 음성인식인가 싶어 시우는 한번 시험해보기로 했다.

"확인 완료."

무반응.

"윈도우 종료."

무반응... 아니, 창이 점멸할 때 밝기의 변화가 조금 더 심해졌다. 이게 아닌가 싶어 시우는 다시 시도했다.

"메시지 확인. 윈도우 종료."

이제는 창의 점멸 강도가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심해졌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네온 사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아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설마 사람처럼 대해야 하는 건가...?"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시우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대로 메시지 창을 띄운 채로 모의전을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숨을 내쉰 시우는 속는 셈 치고 말해보기로 했다.

"괜찮아. 조금 긴장한 거니까. 모의전만 끝나면 쉴 테니까 걱정 마."

반신반의하며 해본 말이었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시지 창이 종료되었다. 그 반응에 시우는 얼떨떨했다.

'뭐야, 설마 정말로 의식이 있는 건가? 단순히 인격 비슷한 거 있는 게 아니고? 아니, 소설 3권에서 뱌쿠시키나 백기사의 의식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닌데?'

그러고보면 대기 모드가 왼손 약지의 반지인 것도 조금 수상하긴 했다. 사실 반지형태이니 빼서 다른 손가락-오른손 검지라든가, 오른손 중지라든가-에 끼울 생각도 해봤지만, 그냥 끼고 다녀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아서 그대로 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일을 겪고 보자 시우는 은황이 자신에게 흑심이라도 품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우가 머뭇거리고 있자 관제실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키가 재촉했다.

- 뭐하는 거냐. 키르히아이스는 이미 밖에서 대기 중이다.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례야. 얼른 나가라.

"네, 알겠습니다."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시우는 게이트 정면에 섰다. 게이트가 서서히 열리는 것을 보며 시우는 다시금 심장이 쿵쾅대는것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은황도 조용했다. 그리고 게이트가 열리자 시우는 몇걸음 옮긴 후 날아서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아레나 상공에는 사키가 말한대로 리자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

- 괜찮아, 그렇게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니고. 이제 시작해도 되겠지?

"물론. 시작하자."

그렇게 대화를 마친 뒤, 시우는 경계를 유지하며 리자의 IS를 살펴보았다. 플로팅 유닛은 어깨 옆이 아니라 허리 옆쪽에 있었고, 형태는 전투기의 날개를 닯은 윙이 달려있는 기다란 모양이었다. 보조 추진기 비슷하게 보이기도 했다. IS 본체의 디자인은 각과 곡선이 적당히 사용된 모습에 메탈릭 레드의 컬러링이 어우러져 보기에도 상당히 멋있었다. 그리고 무장은...

[상대 IS 확인 종료. 3세대 프로토타입 IS, 퍼스널 네임 '프레이르(Freyr)'. 파일럿 엘리자베스 키르히아이스. 근거리 및 중거리 교전 능력 보유. 특수장비 확인되지 않음.]

'근거리와 중거리라... 아마도 검과 라이플이겠...' "뭐?!"

마음속으로 프레이르의 장비를 추측하던 시우는 막상 프레이르가 돌격해들어오며 소환한 장비에 당황했다. 검도, 창도, 도끼도 아니라 대형 해머였던 것이다. 그것도 자루는 두손으로 잡아야 하고 해머 머리 부분은 사람 몸뚱이 만한 크기였다.

"리얼 그라프 아이젠이냐?! 우왁!!"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첫 공격을 급강하로 간신히 피한 시우를 쫓아 리자는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크게 해머를 휘둘렀다. 아직 채 거리를 벌리지 못한 시우는 그 공격에 등을 얻어맞고는 그대로 지상으로 낙하, 지면에 충돌했다. 흙먼지 속에서 고개를 들어올리던 시우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해머의 그림자에 순간 식은땀을 흘렸다. 간신히 해머를 피한 다음 거리를 벌린 시우는 리자를 향해 외쳤다.

"기, 기다려! 진짜로 죽일 셈이야?!"

"무슨 소리야? 이런 거 맞는다고 죽을 리가 없잖아."

"죽어! 그런 걸 머리에 정통으로 맞으면 죽는다고!"

고개를 갸웃하며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리자를 보며 시우는 순간 울컥했다. 어쩌면 실수를 가장해 자신을 죽이려고 파견된 암살자가 아닌가 망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리자의 말에 앗차 싶었다.

"그 전에 절대방어든 뭐든 발동될 텐데? IS가 기동 정지된다면 몰라도 파일럿 생명에는 지장없어. 아까도 실드 덕분에 다치지 않았잖아."

그제야 시우는 방금 등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는데도 특별한 통증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자는 IS가 어떤 상황에서 파일럿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놓고 해머를 휘둘렀던 것이다. 시우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체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계속할까? 간다앗!"

"이익!"

시우는 다시금 돌진해오는 리자를 피해 날아올랐지만 리자는 능숙하게 방향을 전환하며 시우를 추적해왔다. 은황의 근접 무장은 양팔등에 전개되는 암 블레이드와 등에 부착된 삭풍도였지만 둘 다 저런 무식한 질량 덩어리를 상대할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결국 해답은 사격전 뿐이었다. 시우는 쫓아오는 리자를 향해 구미호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리자는 속도를 거의 유지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으로 탄환을 피해냈다.

"다 보인다고!"

"네가 무슨 뉴타입이냐!"

그렇게 떠드는 사이 시우의 바로 뒤까지 따라잡은 리자는 한순간 자신의 옆에 떠 있던 플로팅 유닛을 허벅지에 부착시켰다. 곧이어 플로팅 유닛의 후방 장갑이 열리더니 스러스터가 나오며 리자에게 추진력을 더해주었고, 그 덕에 시우와 리자의 거리는 순식간에 O으로 줄어들었다.

"잡았다!"

"으헉?!"

또 한번 가해진 해머 타격. 이번에는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기 때문에 시우는 그대로 공중으로 치솟았고, 리자는 시우보다 앞서 날아오른 다음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시우는 또다시 지면에 충돌했고,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시우는 실드 에너지가 어느새 1/3으로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방 한방이 가하는 타격도 강력했고, 그에 더해 지면에 충돌하며 깎여 나간 에너지도 만만찮았던 것이다. 고개를 들자 바로 머리 위에서 해머를 들고 내리꽂히는 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시우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빠르게 하강하던 리자는 시우의 미소를 보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우가 겨눈 구미호의 총구를 보고 완전히 방향을 꺾으면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어설트 라이플 형태였던 구미호가 대구경 캐논 형태로 변형해 있었던 것이다. 리자가 피하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폭음과 함께 에너지와 충격파가 방금 전까지 리자가 있던 자리를 휩쓸며 지나갔다. 재장전 시간을이용해 반격을 가하려던 리자에게 이번에는 머신건의 탄환이 날아들었다. 시우가 오른팔로 캐논을 지탱한 채로 왼팔등에 내장된 머신건으로 견제 공격을 날린 것이다. 리자는 탄환을 일부는 받아내고 일부는 무시하면서 다시 시우에게 날아들었고, 아직 캐논의 에너지 전환이 끝나지 않은 시우는 서둘러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반격은 괜찮았어!"

"실패한 마당이라 칭찬으로 안 들려!"

"그런데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알려줄게!"

리자는 시우에게 그렇게 외치더니 해머를 왼편에 거꾸로 세워놓더니 또다른 무장을 소환했고, 그것을 본 시우는 기겁했다. IS용 개틀링 건이었던 것이다. 리자는 소환이 끝나자마자 방아쇠를 당겼고, 분당 8000발의 탄환이 시우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탄환들이 자신을 덮치는 듯한 광경 속에서 시우는 피하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걸로 끝났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우의 눈앞에 어떤 메시지가 떠올랐다.

[퍼펙트 컴버스천 시스템(Perfect Combustion System) 발동. 전(全) 역장 발생기 최대 출력. 풀 드라이브.]

그와 동시에 시우는 자신이 바라보는 광경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는 지면에서 아레나의 방벽을 등지고 서 있었는데, 지금은 아레나의 차단 실드 바로 아래까지 날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시우가 사라지자 어리둥절해진 리자가 한순간 늦게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도 보았다. 시우 자신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당황했지만 곧 방금 떠올랐던 메시지 창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PCS 작동중. 임계점까지 54.32초.]

숫자가 쓰인 부분은 카운트다운을 의미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고, 시우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대강 알겠어. 그러니까 이 시간 안에 결론을 내라 이거겠지? 고마워, 은황."

시우는 그대로 공중에 뜬 채로 캐논 형태인 구미호를 발사했지만, 그 위력은 어째서인지 아까 쏘았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시우가 여유를 부려서인지 리자는 손쉽게 피해버렸다.

"어라? 이거 트란잠하고는 다른 건가? 설마 그냥 운동성과 속력만 증가시켜주는 거?"

마침 시우의 의문을 해결해주려는 듯이 타이밍 좋게 해설 창이 떠올랐다. 그걸 읽은 시우는 이런 시스템을 고안한 연구원들의 사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PCS - Perfect Combustion System. 완전연소 시스템. 기체의 에너지를 한계 이상으로 압축, 각부에 과잉 공급함으로써 기체의 반응속도와 비행능력, 최대 속력을 250% 이상 향상시키는 시스템. 단, 무장의 위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며 지속시간은 최대 1분. 제한시간 경과 후에는 실드 에너지 잔량 0, 기체 구동 에너지 잔량 10%가 됨.]

"이건 무슨 내일의 죠 시스템이냐!! 이거 만든 사람 누구야?!"

그렇게 시우가 외치는 사이 리자는 다시 해머를 든 채 시우를 향해 날아들었고, 방심하고 있던 시우는 은황이 띄운 경고 메시지를 보고서 가까스로 피해낼 수 있었다.

"칫, 어쩔 수 없나...!"

다시금 거리를 벌린 시우는 구미호의 소환을 해제하고는 대신 양팔등에 암 블레이드를 전개했다. 속도를 살리려면 사격보다는 근접전이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그 판단은,

"우와악!"

"크윽!"

"켁!"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분명 PCS는 뛰어난 시스템이었지만, 이번에 처음 작동시킨 시우로서는 적응할 시간이 너무 없었다. 덕분에 시우는 리자를 공격하려다 제풀에 아레나의 방벽과 지면, 차단실드에 스스로 기체를 가져다 처박는(...) 상황을 몇번이고 연출했고, 끝내는 1분이 지나서 그대로 패배하고 말았다.
리자가 승자임을 알리는 장내 방송이 나오고 나서, 리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시우에게로 다가왔다.

"나 참, 어떻게 된 거니? 설마 그 IS 처음 다루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대신 방금 그 시스템을 처음 다루는 거야."

"시스템?"

"그 왜, 방금 갑자기 빨라졌던 그거."

"아, 그거. 어머? 그거 원 오프 어빌리티가 아니었어?"

"그건 아니고 내장된 프로그램 중 하나 같은데, 그동안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나 봐."

"'있었나 봐'라니... 아직 기체에 대한 파악도 다 못한 거야?"

"어, 응..."

시우의 대답을 들은 리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지간히도 황당한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앞날이 참 걱정되는구나."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남 일이 아니라 네 일이잖니."

"뭐,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자, 일어서."

"아, 고마워."

리자는 시우를 일으킨 다음 한번 더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허리에 얹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대항전 있을 때까지 내가 좀 도와줄게."

"어? 괜찮아? 아니, 그보다 도와준다니. 설마 매일같이 모의전 하자고?"

"뭐어? 내가 무슨 초인도 아니고, 그런 건 못해. 그냥 요령을 익히는 걸 도와준다는 얘기야. 대항전에서도 이런 꼴 보이면 안 되니까."

"그야 그런데... 학급 대표로 나가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이번에 지면 꼼짝없이 학급 대표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감 반 기대감 반이었던 시우는 '대표는 그대로 시우'라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리자의 말에 의문을 표했고, 리자는 미소를 지으며 긍정했다.

"아니야, 그냥 도전해도 되냐고 물어봤던 것 뿐이잖아. 그럼 내일부터 열심히 하자."

저녁 노을에 물든 그 미소는 여태까지 시우가 본 미소 중에서 가장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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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으로 글을 옮기면 어째서인지 문단 첫 글자 뒤에 강제로 띄어쓰기가 생기더군요. 그런데 또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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