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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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으아아아아..."

기숙사 전체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기상 멜로디에 눈을 뜬 시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하품을 했다. 입학한지 사흘째, 첫날 저녁에 마음을 다잡아서인지 어제 하루 동안은 별 스트레스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피로가 채 안 풀린 걸 보면 아무래도 미처 자각하지 못한 스트레스가 은근히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뭐, 스트레스 안 받고 싶다고 해서 안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어쩔 수 없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시우는 우선 침대 시트를 정돈하고는 욕실로 향했다. 남자들만 있다면야 속 편하게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도 상관없겠지만, 지금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말하자면 호랑이 굴에 떠밀려 들어간 꼴-이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누가 대놓고 적의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흠 잡힐 일은 최대한 안 하는 편이 좋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실상 대한민국 대표, 인류 남자 대표이니까.'

한국의 IS 보유대수는 현재 3대이고, 기동 가능한 코어는 4개라서 하나가 남은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가동결에 들어가 있어서손을 못대고 있었던 게 시우에게만 반응을 하는 바람에 시우 전용기에 쓰기로 암묵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할까. 거기까지 생각한 시우는 동결중이던 코어가 자신에게 반응해서 재기동했을 때 연구원들이 보여준 모습이 떠올라 무심코 피식 웃고 말았다. 한달 전 일인데도, 마치 죽은 줄 알았던 딸내미가 살아돌아온 듯한 분위기에 얼떨떨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드디어 움직였어! 만세!' (양 손을 번쩍 들고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움직이다니... 연구소 안 그만 두길 잘했어...' (이 연구원은 아예 울고 있었다.)

'시우 널 오늘부로 행운의 여... 아니, 복덩이로 임명한다!' (함박 웃음을 지으며 시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고마워! 네 덕에 저 애가 다시 눈을 떴어! 다 네 덕이다!' (시우의 손을 붙잡고는 연신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 전까지는 사무적이라고 할까, 이따금 매드 사이언티스트 기질이 드러나는 연구원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왠지 모를 묘한 친근감이 들었다. 실제로 연구원들도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시우의 편의를 봐주며 스케줄을 조정해주곤 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우는 문득 연구원들이 그리워졌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시우는 IS 스쿨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고 있었다.
IS 스쿨의 한 학년은 8개 반에 약 250명으로, 현재 IS를 보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매년 학생들을 선발해서 보내고 있었다. 물론 입학시험장에는 IS 교관이 최소 한명씩 있어서 테스트를 현장에서 평가했고, 서류 심사와 현장 테스트 결과를 종합해서 최종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학생을 보내는 나라들은 우선 자체적으로 학생들을 어느 정도 추려낸 다음 최종 시험으로 IS 스쿨 입학시험을 보게 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응시학생들은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단, IS 보유국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모든 IS에 담당 파일럿이 있고 이미 교육중인, 또는 교육을 마친 파일럿이 있다면 굳이 입학시험을 더 보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모든 IS 보유국은 매년 응시학생을 보내야 한다는 의무사항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현재 IS 스쿨에 재학중인 한국인은 시우 혼자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꼭 한가지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왜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IS 스쿨 입학시험장에 시우 본인이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선 IS는 여성만 조종할 수 있다. 지금이야 시우라는 특이 케이스가 나타나긴 했지만 그날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여자들만 움직일 수 있었으니 남자인 시우가 시험장에 갈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소설에서 이치카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장을 착각해서 아이에츠 고교 시험장으로 간다는 게 IS(아이에스) 입학 시험장으로 들어갔지만, 현재 이 세계에서 시우의 나이는 16세. 한국 교육체계에서는 중3이 되는 나이이니 고교 시험장을 착각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나인 시영이 IS 교관 자격이 있으니 따라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시우가 이쪽 세계에서 시영과 만난 것은 연구소로 끌려간 다음이었다. 즉, 그 소동이 벌어졌는데도 시험장에선 마주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험장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 와선 달리 확인할 길이 없으니 물어본들 소용없겠지만.

"뭐, 상관없나. 이미 지난 일이고."

배식구 앞의 줄은 어느새 시우의 바로 앞까지 줄어있었다. 식판을 받고 빈 자리를 찾아 앉은 시우가 밥을 한 술 뜨려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여학생 둘이 식판을 든 채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시우를 보고 있었다. 같은 반 여학생들이었는데, 아직까지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모습을 본 시우는 무슨 말을 건네려고 하는지 짐작이 갔다.

'원작에서도 있었던 일이지, 아마. 같이 아침 먹자는 그거. 그러고보니 이쪽엔 노호혼 씨가 없네. 당연한가?'

시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옆자리의 빈 의자를 살짝 뒤로 잡아당겨줄까 생각했지만, 만약 그렇게 했는데 저쪽은 사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하면 이만저만 망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 두고 대신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응? 왜?"

"아, 아니. 괜찮다면 옆에서 같이 먹어도 될까 싶어서..."

"응, 괜찮아."

"정말?! 고마워!"

두 여학생은 시우가 좋다고 하자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아마 식판만 들고 있지 않았으면 만화처럼 만세 포즈를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고보면 시우가 대답한 직후에 주변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수를 빼앗겼다느니,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시도해볼걸 이라느니, 그럼 점심시간엔 나도 라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우는 애써 무시했다. 일일이 신경썼다간 정말 신경이 쇠심줄보다 굵어도 못 견딜 것 같았다.

"한군은 방 혼자 쓰지? 좋겠다~"

"뭐, 다른 사람 눈치 볼 일 없다는 점은 좋긴 해. 쓸데없이 넓다는 건 좀 부담스럽지만. 그리고 '시우'라고 불러주면 좋겠는데."

"에? 초면인데 벌써 이름...?"

"아니, 아니. 한국에선 초면이든 아니든 상대를 성으로 지칭하는 일이 별로 없어. 오히려 사무적인 관계에서나 그러는 편이라서 말이지. 초면에 굳이 부른다면 성과 이름을 한꺼번에 부르는 편이랄까."

"헤에~ 그렇구나. 알았어, 그럼 시우도 그냥 후지노라고 불러. 그건 그렇고, 아까 방이 넓어서 부담스럽다고 했지? 왜?"

"뭐라고 할까... 공간 낭비? 그런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두 여학생 중 한명-검은색 생머리의 동양계 여학생-이 시우의 방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자 그 뒤는 그럭저럭 이야기가 이어져 나갔다. 솔직히 시우도 뭘 화제거리 삼아서 말을 꺼내야할지 난감한 차여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또다른 여학생-긴 금발이 약간 뻗친 듯한 느낌이 드는 백인 여학생-이 불쑥 말했다.

"흐응~ 시우는 구두쇠 타입이구나."

"...어? 구두쇠?"

난데없이 튀어나온 말에 시우는 반쯤 어리둥절했고, 반쯤은 당황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느 정도 자린고비랄까, 구두쇠랄까, 그런 기질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잖아. 뭔가 남아도는 걸 못 보는 타입인 것 같으니까, 낭비하는 것도 두고 보지 못할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 그 말이 맞아."

"그것 봐."

금발 여학생은 여보란 듯이 씨익 웃었고, 그 미소는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기 보다는 멋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우는 문득 두 사람의이름을 기억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그런데 미안하지만 두 사람 이름이 어떻게 돼?"

"뭐? 잠깐, 우리 어제 다들 자기 소개 했잖아. 게다가 방금도 이름 말해줬는데?"

동양계 여학생의 반문에 시우는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부족한 면을 얘기하는데 자랑스럽게 털어놓을 사람은 없었다.

"그게 말이지, 내가 사람 얼굴이랑 이름을 잘 매칭시키질 못해서... 지금도 이름만 알지, 풀네임은 기억 못 하고 있거든. 미안. 한번만 더 알려줘."

"어쩔 수 없네. 난 토모리 후지노(友利 藤乃).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인이야. 7월에 16세가 되고, 부활동은 검도부야."

"난 스칼렛 노베인(Scarlett Novane). 이름만으론 모르겠지만 미국인이고, 역시 7월에 16세. 부활동은 궁도부."

"그럼 나도 자기소개 다시 할게. 한시우(韓翅羽). 한국인이고 올해, 그러니까... 아직 생일 안 지났으니까 14세. 부활동은 현재 없고 생각중이야."

시우의 나이는 우리식, 그러니까 양력 1월 1일 기준으로 하면 16세였지만 생일 기준, 다시 말해 만으로 세면 14세였다. 말하고보니 엄청 어려졌다는 생각에 시우는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통성명이 끝나자 후지노는 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제대로 자기 소개 서로 주고 받았으니까 잊으면 안 돼. 만약 또 물어보면 베어버릴 거야?"

"으, 응..."

후지노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시우는 그 얼굴에서 농담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한기까지 느껴져서 자기도 모르게 살짝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그 때 사키가 식당으로 들어왔고, 시우는 사키가 기숙사 사감도 맡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식당 한복판까지 온 사키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손뼉을 몇번 치고 외쳤다.

"자, 자. 시간이 많지 않다. 식사 끝마친 사람은 어서 일어나고, 도중인 사람들도 서둘러 끝내도록. 조회시간에 늦는 사람은 아레나 50바퀴다."

그 말에 학생들의 손놀림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수업도 빡빡한데 아레나 50바퀴 돌고나서 멀쩡한 상태로 수업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우와 후지노, 스칼렛도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식사부터 끝내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수업 전 조회시간. 대충 조회를 끝낸 사키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얘기를 꺼냈다.

"이번달 말에 학급 대항전이 있다. 정확한 일정은 2주 뒤, 23일부터 28일까지다. 학급 대항전이라고 해도 학년별 수준차가 있으니 1학년은 1학년끼리, 2학년은 2학년끼리, 3학년은 3학년끼리 치르니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된다. 설마 너희들을 3학년하고 붙일 리야 없잖냐."

'대항전'이라는 말에 움찔했던 학생들은 사키의 설명에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IS 파일럿을 위해 모였다고는 해도 실제로는 IS를 입학시험장에서 처음 움직여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미 1년이상 다뤄본 상급생들과 겨룬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대항전에 나갈 학급 대표를 뽑아야겠다. 누구 해보고 싶은 사람?"

사키의 말에 몇몇 여학생이 천천히 손을 들려는데, 후지노가 재빨리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선생님, 저요!"

"그래, 토모리."

후지노가 손을 들자 사키는 칠판에 후지노의 이름을 적으려고 했지만, 후지노는 학급 대표를 하고 싶어서 손을 든 것이 아니었다.

"한시우 군을 추천합니다!"

...'뭐?'하는 말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뜻밖의 상황에 시우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고, 다른 여학생들 대부분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반 친구들이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고는 당황했다.

"응, 괜찮겠네."

"일단 어필은 확실하고."

"튀니까 좋잖아?"

"재미있겠다~"

심지어 사키마저도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이자 시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선생님!"

"응? 왜, 그렇게도 해보고 싶나? 좋아, 반 대표는 시우로 결정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이런 식으로 대표를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뭐가 어때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방법으로 뽑힌 거니까 자랑스러워 해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황당해진 시우는 사키가 교사라는 것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어제까지 본 사키는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느낌이었는데, 지금 보니 장난기도 많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쪽이 원래 성격이든가.

"학급 대항전이라면서요? 나가면 IS 장착하고 대결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저같은 생 초짜를 내보내서 뭘 어쩌시려구요?! 이 중에 국가대표 후보라든가, 그런 사람 한명은 있을 거 아니에요?"

"아, 우리 반엔 국가대표 후보생 없다."

휘청.

"국가대표라는 게 그렇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반에나 다 있을 리가 없잖냐. 더구나 어느 나라에서 기동 성공할지도 모르는 게 코어인데, 어지간한 나라라면 3년에 한명 정도 보내는 걸로 충분할걸."

그만 둬, 나의 라이프는 이미 제로야! 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시우에게 사키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러니 누가 나가든 그게 그거라는 거지. 고로 결정. 이번 학급 대항전 대표는 한시우. 다들 이의 없지?"

"""""네에~"""""

"좋아, 조회 끝. 다들 오늘 수업 잘 받도록."

낭랑하기까지 한 여학생 일동의 대답을 들은 사키는 만족스런 얼굴로 교실을 나섰고, 그 반대로 시우는 시체같은 얼굴로 책상 위에 엎어졌다. 여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두명이 시우에게 다가왔다. 후지노와 스칼렛이었다.

"축하해. 만장일치로 학급 대표 됐네."

"놀리는 거지, 지금..."

"어머, 눈치챘어?"

"표정이 축하하는 게 아니라 재미있어 하는 모습이라고..."

"아핫, 표정관리가 잘 안 됐나 보네."

"1회전 탈락이라... 어느 의미로는 기록이겠군."

"벌써 1회전 탈락 확정?!"

후지노의 말에 이어진 스칼렛의 중얼거림에 시우는 발끈했지만, 스칼렛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거기다 상대에게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해보고 토끼몰이 당하듯 쫓겨다닌 끝에 패배... 미리 위로해줄게."

"하다못해 불의의 일격 정도는 할 거라고 해줘."

"할 수 있어?"

"......"

스칼렛의 물음에 시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처음 IS를 움직여본 게 고작 두달 전인데 가능하다면 그게 놀랄 일이니까.

"뭐, 힘내. 한국 속담에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쓸 말은 아니야..."

시우는 후지노의 위로 아닌 위로에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후지노는 듣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한달도 안 남았는데, 미리미리 훈련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 도와줄래?"

"응? 아니, 나도 IS 움직여본 건 입학시험 때가 처음이라..."

시우의 부탁에 후지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고, 고개를 돌려 바라본 스칼렛도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후지노와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았다.

"알아서 해야 되나... 가만 있자, 우치가네 쓰려면 먼저 사용신청서부터 작성해야 했지?"

"응. 이번달에는 학급 대항전이 있으니까 반 대표 우선으로 허가해주지 않을까?"

"그러면 좋겠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 예비종이 울렸다. 후지노와 스칼렛이 자리로 돌아간 후, 시우는 왜 자신에게만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5일 동안(일요일에는 사용 신청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했다.), 시우는 거의 매일 IS 조종을 몸에 익혔다. IS의 기본 조작은 머리에 쓰는 서클릿을 통해 사용자의 뇌파를 감지, 그에 따라 각부 관절을 기동하는 식이었다. IS의 장착 후 크기는 대체로 전고 2m를 넘고, 착용자의 손은 IS의 팔꿈치와 손목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비슷하게 착용자의 발도 기껏해야 IS의 무릎 위치 정도가 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용자가 근육을 써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뇌파를 통해 전신을 움직이는 시스템을 채용하게 된 것이다. 이런 기술은 의료계에도 전파되어 현재는 IS의 구동원리를 이용한 의지(義肢)가 거의 실용화 단계에 와 있었다. 이런 점들을 알았을 때 시우가 엔X릭 레X어를 떠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IS가 움직이는 원리를 확실히 파악한 시우가 이번에 익힌 것은 IS를 자기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었다. IS는 옷이나 갑옷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장착하면 본래보다 팔다리가 길어지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균형을 잡는 것부터가 급선무였다. 실제로 시험장에서 처음 IS를 움직였을 때에는 걸음을 옮기는 것이 고작이었고, 이번에도 처음 이틀 동안은 아기가 걸음마 배우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지상에서 균형을 잡는 연습을 얼추 끝낸 다음에는 비행 연습이었다. 그리고 그게 제일 문제였다.
차라리 무장 소환은 손쉬운 편이었다. 물론 그것도 어렵다는 사실은 변함없었지만, 비행 연습에 비하면 -소설이나 만화를 많이 본 덕에 무언가가 나타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쉬워서 그랬는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하지만 비행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떠오른다는 이미지를 그리면 대책없이 공중으로 치솟고, 하강한다는 이미지를 그리면 갑자기 추진력이 사라지고 추락하든가 아니면 아예 지면에 다이빙하는 자세로 내리꽂히든가 둘 중 하나였다. 공중에서 선회하거나 좌우 이동하는 건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콰아아앙----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반 여학생 몇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우는 이번에도 시원하게 지면에 다이빙하고 말았다.

"젠장, 인간은 땅 위를 걷는 동물이라고! 왜 하늘을 달아다녀야 하는 건데!!"

다시 태어나면 새가 되고 싶다고 종종 생각했던 자신을 반쯤 부정하는 발언을 내뱉는 시우를 지켜보던 후지노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한동안 땅 위에 드러누워서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악담을 퍼붓던 시우는 분이 좀 가라앉았는지 일어섰고,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막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려던 때, IS의 공용 통신창이 열리며 사키의 얼굴이 나타났다.

- 자, 한시우. 오늘은 거기까지다. 피트로 돌아와서 반납하도록.

"네? 저, 선생님. 아직 1시간도 안 지났는데요? 1번 사용할 때 2시간 가능한 거 아니었나요?"

- 아직 1시간 안 지났으니 하는 소리다. 얼른 들어와. 1분 1초가 아깝다.

거기까지 말한 사키는 일방적으로 통신을 종료했고, 시우의 호출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시우는 우치가네를 움직여 피트로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용 신청이 밀려서 다른 사람에게 내줘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간 피트에서, 시우는 IS 거치대에 올려져 있는 낯선 IS를 보았다.

우치가네와는 확인히 다른, 은색으로 빛나는 기체였다.

"한국에서 네 전용기를 보내왔다. 이름은 '은황(銀凰)'이라고 한다는군. 오늘부터 이 녀석을 써서 훈련해라."

"그럼 절 부르신 게..."

시우의 질문에 사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평소의 늠름한 모습에서는 떠올릴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1초라도 더 빨리 친해져야지. 이 녀석은 앞으로 네 동반자가 될 테니까."

"...네, 네!"

사키가 보여준 의외의 모습에 시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우치가네의 장착을 해제했다. 그리고는 두근거림을 안고 은황의 동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이 장갑에 닿는 순간, 대량의 정보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며 장착 시퀀스가 시작되었다.

[파일럿 신체 정보 체크 - 데이터와 일치, 확인.]

[장갑 전개 - 장착 개시.]

푸쉭 하는 소리와 함께 은색 장갑이 시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시우의 시야가 서서히 높아졌다.

[각부(脚部) 장갑 장착 종료. 완부(腕部) 장갑 장착 종료. 동체 장갑 장착 종료. 헤드 기어 장착 종료.]

[에너지 공급 라인 작동 정상. 하이퍼 센서 동작 정상. 실드 배리어 전개 정상. 윙 바인더 및 역장 발생기 작동 정상. 확장영역 연결 정상. 시스템 최적화 개시.]

연속으로 여러 개의 메시지가 휙휙 지나갔지만 적어도 은황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변형과 장착이 일단락된 것을 확인한 사키는 시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좋아, 일단 기본 장착은 끝난 모양이군. 그러면 다시 아레나에 가서 연습을 해봐라. 아직 최적화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지금 네 움직임이 기체의 최적화에 도움이 될 거다. 터무니없는 움직임을 했다간 안 좋은 버릇이 들 테니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갔다 와라."

게이트를 통과해 아레나로 나온 시우는 우치가네와는 움직임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걸음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움직이는 것이 편해지는 것이 아까까지 우치가네를 움직이며 느꼈던 어색함이 거짓말 같았다.

"이게 전용기의 장점인가... 확실히 최대 성능을 발휘하려면 최적화를 시킬 수밖에 없겠네."

피트로 들어갔던 시우가 처음 보는 IS를 장착하고 아레나로 나오자 구경하던 여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시우는 아랑곳않고 아레나 안을 이리저리 걷고 뛰어 다녔다. 우선 움직임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몇분 지나지 않아 멈췄다. 최적화가 진행되면서 더 적응해야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멈춰 선 시우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가볼까. 함께 날아보자, 은황."

시우의 말에 반응하듯이 은황의 비행용 역장 발생기가 출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중력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던 시우는 이윽고 은황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질 정도가 되자 일순간에 날아올랐다. 등에 달린 윙 바인더를 펼친 은황이 날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은빛 화살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차단 실드 코앞까지 고속 상승한 시우는 실드에 부딪히기 직전 과격하게 방향을 꺾었고, 은황은 그대로 거의 90˚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식으로 UFO 기동을 몇번 반복한 시우는 지금까지 계속 실패했던 하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단, 자신감이 있는대로 붙은 지금 시도하는 것은 급강하 후 연착륙이었다.

"좋아... 가자!!"

아레나에서 허용된 최고 높이까지 올라간 시우는 쏜살같이 지면을 향해 내리꽂혔다. 여학생 몇몇이 작게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지만 무시한 채, 은황이 충돌 경고를 알릴 때까지. 그리고 충돌 경고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또다른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최적화 종료. 퍼스트 페이즈 이행. 폼 체인지 - 퍼스트 폼.]

그와 동시에 시우는 몸을 돌려 역추진을 실시했다. 내려오던 가속력과 중력, 그리고 그 반대 방향으로 걸린 역추진이 서로를 상쇄하며 은황은 연착륙에 성공했고, 외형은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변해 있었다. 로봇을 연상시키던 곳곳의 각이 진 부분들은 곡선으로 변해 있었고, 가슴 부분만을 가리던 동체 장갑과 팔꿈치 아래, 무릎 아래만을 가리던 팔과 다리의 장갑도 늘어나 목 아래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헤드 기어는 머리 전체를 가리는 풀페이스 헬멧으로 변해 있었고, 방금 전 역추진을 실시한 윙 바인더는 두장에서 여섯장으로 늘어나 있었다.
시우가 안면 바이저를 열고 싶다고 생각하자 헬멧은 초기의 헤드 기어 형태로 돌아갔다. 바이저를 올리고 내리는 대신 형태 자체를 바꾸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 그대로 관객석을 바라본 시우는 구경하던 여학생들 상당수가 놀란 표정으로 차단 실드에 달라 붙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시우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IS 파일럿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네. 앞으로 잘 부탁해, 은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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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입니다. 모 커뮤니티에 올렸던 물건을 띄어쓰기만 조금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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