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력 439년. 해가 바뀌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레니핀의 중앙 군항에 한대의 우주선이 착륙했다. 그리 크지 않은, 정확히 말하면 소형에 가까운 우주선은 군용함이 아닌 민간기의 외관을 하고 있었다.
우주선이 착륙을 끝내자 착륙장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걸음을 옮겼고, 그를 호위하듯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여러명이 함께 이동했다. 일행이 우주선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해치가 열리며 우주선에서 계단이 지면으로 뻗어 내려왔고, 곧이어 우주선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남자는 장교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DC(Doll Company)의 제럴드 에릭슨이라고 합니다."
"레니핀에 온 것을 환영하오. 중앙군의 폴 베이드 대령이오."
제럴드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던 폴은 상대가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싶었지만 짐작가는 것은 없었다.
"무슨 일이오? 뭔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소?"
"아, 아닙니다. 군인이라고 하셨는데 양복 차림으로 나오셔서 말이죠."
"우리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오. 그건 그렇고, 물품은 확실하오?"
"물론입니다. 품질에 있어선 저희 DC를 따라올 곳이 없으니까요. 자, 그럼 여기 양도 증서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폴은 제럴드가 내민 전자 증서 테이블에 서명을 하고는 돌려주었고, 서명 대조를 끝낸 제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용 콘솔을 조작했다. 그러자 우주선의 후방 해치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계약 내용대로 1차 양도는 10기입니다. 매번 10기씩, 총 4회 양도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5년 내 문제가 발생할 시에는 저희 DC로 연락을 주십시오."
제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폴은 완전히 열린 우주선의 후방 적재함을 주시했다. 잠시 후 20개의 인영이 질서정연하게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2년 후, 우주력 441년. 프레이야는 기사 교육부 4학년이 되어 있었다.
레나와 츠안이 목숨을 잃고 몇달 후, 프레이야는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3학년 때부터는 두세달에 한번씩 실전에 투입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그 이후로 프레이야가 속한 조에선 중상자는 나오더라도 사망자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교육생들의 실력이 늘고 경험이 쌓여간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2년 전부터 프레이야는 청적파를 개량하는데 고심하고 있었다. 본래 청적파는 파동기로, 앤과 프레이가 크로스 아이 시리즈와 싸우며 완성한 사상병기급의 전투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제어가 어렵고, 정신력과 체력의 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프레이야는 청적파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기(氣)의 소모를 줄이는 것은 위력이 감소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만, 입력량 감소율보다 출력량 감소율이 적다면 활동 시간을 늘릴 수 있고, 그것은 그만큼 더 많은 괴수를 상대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핫!"
기합과 함께 프레이야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대련장 벽면을 걷어차며 뛰어오르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대로 공중에서 반바퀴 회전한 후, 착지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다리에 기를 집중시켰다. 가벼운 몸이라고는 하지만 십여미터 공중에서 낙하하는 충격은 상당했기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프레이야는 다리에 감각이 살짝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프레이야가 개량하는 방향은 원거리 공격을 포기하는 대신 고속 이동을 중점으로 하는 것이었다. 육합 괴산과 같은 원거리 파동기는 분명 강력하지만 기의 소모가 극심했고, 전성기 시절의 앤이나 프레이라면 모를까 선천적으로 기 보유량이 평균 이하를 밑도는 프레이야에게는 써서 좋을 일이 없는 기술이었다.
"후우... 일단 이 정돈가... 그건 그렇고, 이 색은 좀..."
한차례 수련을 마친 프레이야는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는 그럭저럭 만족한 듯 말했지만, 자신이 개량한 기공(氣功)의 색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파동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프레이야의 기공은, 기를 집중시키면 탁하고 짙은 푸른색이 일렁이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차라리 아예 새카맣거나 한 게 낫지, 이 어중간한 색은 뭐람. 그렇다고 이 색을 어떻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동안 자신의 오른손과 거기에 모인 푸른 기운을 내려다 보던 프레이야는 이내 손을 털며 기운을 흩어버렸다. 그리고는 대련장을 걸어나가며 패널에 사용 종료를 입력했다. 이제 대기 순번에 따라 다음 예약자가 들어와 대련장을 이용할 테지만, 방금 전까지 쉴새없이 움직인 프레이야는 누가 들어오든 무엇을 하든 관심없었다.
"얼른 가서 씻고 잠이나 자자."
다음 날.
"일주일 후에 스트린 성계로 교육생 파견이 있을 예정이다."
종례 시간, 담임 교관인 알리노의 말에 4학년 B반의 교육생들은 또다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파견 횟수는 잦아졌고 임무의 위험도도 높아져 갔다. 그리고 이번에 파견 지역인 스트린 성계는 상위 괴수가 다수 출현하여 상당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일단 지원도 받지만, 먼저 우선 선정된 사람들부터 알려주마. 우리 반에선 길리엄 파렐, 프리드리히 하르트만, 타카야 미유키, 월터 비르겐, 한시훈, 프레이야 샤테니르. 이렇게 6명이다."
6명의 이름을 말한 알리노는 잠시 간격을 둔 다음 교육생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들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스트린은 지금 꽤나 치열하게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말인데, 지원하면 받아는 주겠지만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아둬라. 그리고 방금 부른 6명과 혹시 있을지 모를 지원자들은 장비 점검과 ABC 처리를 이번주 안에 끝내놓고, '준비'도 미리 해두도록. 질문 있나?"
교육생들 중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것을 확인한 알리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종례 끝. 다들 오늘도 수고했다."
알리노가 교실을 나선 후에도 평소와 같은 어수선함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말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설 뿐이었다.
교육생들의 실전 투입이 반복되면서 희생자는 계속해서 나왔다. 천만다행으로 단 한명도 죽지 않고 돌아오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프레이야가 입단한 후에 그런 일은 딱 한번 있었고, 그나마도 결과적으로는 중추신경계 손상으로 기사단을 그만 두는 사람이 둘이나 나왔다. 교육생들은 점차 실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오늘처럼 실전 투입이 결정되어 파견 대상자까지 확정된 날은 다들 조용히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프레이야도 슬슬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뒤쪽에 앉아있던 미유키가 다가왔다.
"프레이야, 가자."
"응, 그래."
미유키의 말에 프레이야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교실 문으로 향했다. 지금 프레이야는 미유키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3학년 들어서 파견이 한번 끝날 때마다 반 편성이 바뀌다 보니 그 때마다 거의 매번 룸메이트가 바뀌었고, 미유키와 프레이야가 한 방을 쓰게 된 것은 한달 전의 일이었다.
"그러고보니까 프레이야랑 같이 나가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네. 잘 부탁할게."
"...응."
프레이야의 조금 망설이는 듯한 대답에 미유키는 고개를 갸웃 했지만 금방 다시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고, 그런 미유키의 옆모습을 보며 프레이야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미유키의 시원시원한 성격, 또래보다 큰 편인 키 때문에 작은 편에 속하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점이 자꾸만 레나를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그동안 잊었던 것은 아니지만 프레이야는 되도록 레나와 누군가를 비교하는 것을 피해왔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때의 전투로 어머니와 관련된 트라우마는 사라졌지만, 또다른 것이 새로 생긴 것이다. 그나마 전투에 지장을 주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주일 후, 스트린 성계의 베일스트린 행성. 4-B의 교육생들은 파견 담당 교관인 벤과 함께 이동 중이었다. 고학년이 되었다고는 해도 교육생은 어디까지나 정식 기사가 아닌 '교육'생이기에 전장에 파견될 때에는 항상 기사가 교관으로 붙고 거기에 함께 임무를 수행할 AE 소속 부대가 배정되었다. 예전에는 AE 부대를 배정하는 이유가 임무 공동 수행이 아니라 교육생의 호위였지만, E-34와의 싸움으로 소모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생 인원을 이전의 몇배로 늘리다 보니 AE 측에서 호위를 위해 병력을 빼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상위괴수 상대로는 아직 햇병아리 수준도 안 되는 교육생들을 교관 한두명에게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AE 사령부에서는 호위가 아닌 공동 작전이라는 식으로 교육생들의 실전을 돕고 있었다.
"길리엄, 그쪽은 이상 없나?"
[예, 특별히 눈에 띄는 문제는 없습니다. 고글에 경고 메시지가 뜨는 것도 없고요.]
"그래, 알았다. 그리고 고글에 너무 의존하지는 마. 스스로 찾아내는 능력도 길러야 돼."
[네, 교관님.]
"월터, 그쪽은 괜찮나?"
[이상 없습니다. 조금 한가하게 느껴지는데요.]
"여유를 가지는 건 좋지만 긴장을 풀지 마라. 장거리 포격으로 기습이 시작될 수도 있어. 계속 경계해라."
[알겠습니다.]
전방과 후방에서 각각 경계를 맡은 길리엄과 프리드리히, 월터와 시훈의 조와 통신을 끝낸 벤은 미유키와 프레이야를 한번씩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통신을 하며 들려온 벤의 말에 두 사람은 알아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벤과 교육생들, 그리고 AE 부대는 교대를 위해 전선으로 이동 중이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는 해도 같은 부대가 장기간 전방을 맡게 되면 전력 소모도 심하고 정신적인 피로도 무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부대를 교대시켜야 했다. 지금 최전선에 나가 있는 부대는 3주째, 병력은 1/3을 잃은 상태였기에 재편성이 필요했다. 함께 나갔던 5-A 교육생들 중 몇명도 중상을 입었다고 했기에 가급적 교대를 서둘러야 했다.
몇시간 후, 4-B와 AE 부대는 아무 일 없이 주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명색이 최전선이라 거창한 교대식 같은 것은 생략하고 지휘관들끼리만 만나 인수인계를 끝냈다. 이런저런 내용을 전달한 후, 복귀할 부대의 지휘관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제야 한숨 좀 돌릴 수 있겠군."
"수고하셨습니다, 대령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니, 나보다 저놈들이 더 심했지. 괴수놈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구는지... 기사님도 주의하십시오. 생각보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들입니다."
"그래, 대령님 말대로야. 우리 애들도 1:1에선 싱글넘버만 아니면 그리 밀리지 않는 애들이었는데, 각개격파에 말렸어. 겨우 수습해서 밀어내고 보니 두 녀석이 전투 불능이 돼 있더라구."
"하지만 이렇게 교대하도록 내버려둔 걸 보면 저놈들도 이제 한계 아닐까? 곧 밀어버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야 모르지. 괴수놈들도 교대하고 있는지도."
"이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고."
5-A를 담당한 리네즈의 말에 벤은 덜덜 떠는 시늉을 하며 엄살을 피웠고, 그 모습에 사령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였다. 콰앙 하는 폭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리네즈와 벤은 즉시 사령실을 뛰쳐나갔고, 대령은 테이블의 공용 무선시설을 켜고 외쳤다.
"무슨 일인가! 방금 충격은 뭐지?!"
[괴수의 공격입니다. 장거리 포격, 테디베어 타입으로 추정! 아, 레이더에 괴수 접근 확인! 숫자... 이런 제길, 100 돌파! 계속 증가중! 속도도 빠릅니다!]
"전 대원 전투 배치! 교대를 끝낸 병력은 복귀하지 말고 투입 대기하라!"
"일부러 교대하는 타이밍을 노린 건가? 제법 머리 쓰는데?"
"그래서 머리 굴릴 줄 안다고 말했잖아."
"하지만 그래봤자 괴수 머리지. 전체 병력 수는 오히려 늘어있는 상태라고. 4-B 교육생들! 지금 괴수 집단이 접근 중이다! 전원 전투 준비! ...이런 제길, 어디서 몰려오고 있는지를 모르잖아!"
교육생들에게 각자 맡을 위치를 지정하려던 벤은 그제야 괴수들의 접근 방향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급하게 나오느라 AE 지휘관에게 미처 묻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리네즈가 막 레이더 실에 통신을 연결한 참이었다.
"레이더 실, 기사단의 리네즈다! 적의 숫자와 방위는?"
[숫자는 200에서 계속 증가 중! 방위는 남서쪽, 반원형으로 조여오듯 접근하고 있습니다!]
레이더 실의 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또 한 차례의 충격이 건물을 뒤흔들더니 이어서 그보다 작은 진동이 전해져 왔다. 사령부 근처 건물에 포격이 명중해서 무너진 모양이었다.
"일단 저 곰돌이 놈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쉽진 않을 거야. 저번에도 그럴 생각으로 뛰어들었다가 우리 애들이 당한 거거든. 레이더 실, 테디베어 타입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파악된 게 7기. 아, 방금 아군 포격으로 1기 줄었습니다. 이제 6기!]
보고를 들으며 건물을 나선 두 사람은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갈라졌다. 리네즈는 남쪽, 벤은 서쪽. 남서쪽에서 올라오는 괴수 집단을 측면에서 치고 들어가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막스와 레이나! 기지 남서쪽에서 괴수들을 상대해! 파인과 딜런은 기지 남쪽에서 나와 합류, 괴수들을 측면에서 공격한다!"
"길리엄과 프리드리히, 월터와 시훈은 기지 남서쪽으로! 몰려오는 괴수들을 막아라! 미유키와 프레이야는 기지 서쪽! 나와 합류해서 측면에서 놈들을 친다! 서둘러!"
"이야아앗!"
눈앞의 마지막 테디베어를 쓰러트린 프레이야는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몸을 옆으로 날렸다. 테디베어를 호위하던 양산형 괴수들은 숫자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자릿수에 달하고 있었고, 교육생 4명과 기사 두명은 지금 그 한복판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엔 상위괴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벤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수를 두동강내며 기지에 통신을 연결했다.
"여기는 기사단의 벤! 테디베어 타입 섬멸을 완료했다! 양산형이 아직 숫자가 있으니 여기서 놈들을 좀 더 정리하겠다!"
[알겠습니다. 계속 수고... 뭐라고? 이, 이런! 지금 즉시 복귀하십시오!]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다소 안심한 어조로 통신을 받던 병사가 다른 통신을 받다가 다급히 외치자 벤과 리네즈는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상위괴수 출현! 5형 2기! 교육생들이 분전하고 있지만 위험합니다!]
"뭐?! 이런 빌어먹을!"
아무리 병력이 2배 가까이 늘었다고는 해도 AE의 수단으로는 상위괴수의 배리어를 뚫을 수 없다. 상대할 수 있는 것은 AB소드를 가진 기사, 그리고 ABC 처리가 완료된 무장을 쓰는 교육생들뿐. 하지만 교육생들은 절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하다. 그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서 실전에 데리고 다니는데 벅찬 상대를 만나 목숨을 잃기라도 해서는 주객전도다.
"벤! 너네 학생들 데리고 얼른 복귀해! 여긴 우리가 맡겠어!"
"...부탁한다, 나중에 기지에서 보자! 프레이야, 미유키! 달려라! 기지로 간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부 기지로 달려가서 5형을 상대하는 것이지만, 그랬다간 100기 조금 안되는 숫자의 괴수들이 기지로 몰려올 것이다. 안 그래도 상위괴수가 난입해서 쑥대밭이 되어있을 방어선에 그런 숫자가 밀려들면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리네즈는 역할을 나눠 자신과 담당 교육생들이 눈앞의 양산형들을 맡겠다고 했고,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유키, 프레이야와 함께 기지로 달려갔다. 한시가 급했다.
기지 방어선에 도달했을 때,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을 넘어서 반쯤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조각난 전차와 장갑차, 중형 개인화기가 여기저기 널려있고, 지면은 온통 붉은색. 쓰러진 군인들 중 사지를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 한복판에 인간보다 조금 큰 몸집을 하고 양 팔에 칼날을 단 괴수가 하나 서 있었다.
삐빗-
살기 가득한 눈으로 괴수를 노려보는 벤의 고글이 괴수의 정보를 분석해서 표시했다. 각종 정보를 종합했을 때 눈앞의 괴수는 5형. 하지만 레이더 실의 보고로는 2기였는데 지금 벤 일행의 앞에는 1기 뿐이었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다른 5형의 위치를 찾고 있을 때, 뒤늦게 고글이 또다른 5형의 정보를 표시했다. 눈앞의 5형 뒤편에 있는 건물, 그 건너편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미유키, 프레이야! 여기서 월터, 시훈과 함께 저놈을 상대해라. 난 건물 뒤편의 녀석을 잡겠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 테니 놈을 막아내는 데에만 신경써!"
말을 마친 벤은 서둘러 달려갔고, 미유키와 프레이야는 5형과 대치 중이던 두명과 합류했다. 5형을 두고 좌우에 각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괴수나 교육생들 모두 섣불리 덤비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괜찮아?"
"하아, 하아. 뭐, 목숨은 붙어있어. 그나저나 과연 싱글넘버구만. 몇번이나 팔다리가 날아갈 뻔했어."
미유키의 말에 월터는 짐짓 너스레를 떨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한계까지 몰렸던 게 드러나고 있었다.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DC코트는 여기저기 찢어져 출혈이 계속 되고 있었고, 월터가 항상 10자루 이상 지니고 다니는 ABC 대거는 허리 뒤편의 두자루 남은 게 전부였다. 5형 건너편에 있는 시훈과 프레이야 쪽을 보니 그쪽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1이라면 대개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하게 생각되고, 실제로도 숫자가 많은 편이 빈틈을 노리거나 체력 비축 같은 면에서 좋다. 하지만 지금처럼 두사람이 리타이어 직전인 데다가 연대 전투는 아직 한달도 채 연습하지 못한 경우라면 오히려 1:1보다 안 좋을 수도 있다. 어지간한 눈썰미가 아니면 아군의 공격에 자신이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미유키는 프레이야와 눈을 마주쳤고, 프레이야도 같은 생각을 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미유키는 초상능력 '가속'을 개방했다.
"핫!"
통상적으로 가속 능력은 이미 이동중인 대상의 속력을 증가시키는 기능을 가지지만, 미유키의 가속은 제자리에서 로켓처럼 튀어나가는 것이 가능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단점이라면 속도를 유지한 채 방향전환하기가 어려워서, 아직까지는 방향을 바꾸려면 거의 멈추다시피 해야한다는 점이었지만 그 문제는 동료의 연계로 커버할 수 있었다. 미유키의 참격을 받아낸 5형이 등을 보인 미유키에게로 몸을 돌리는 순간, 프레이야가 5형에게 돌진했다.
기공에 의해 강화된 프레이야의 육체는 미유키에 비하면 느리지만 일반적인 기사보다는 몇배나 빠른 속도와 근력을 발휘했고, 미유키를 공격하려던 5형은 서둘러 프레이야의 공격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공에 의한 강화는 단순히 속도와 근력만이 아닌, 동체시력이나 반응속도 같은 것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프레이야가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가며 틈틈이 미유키가 초고속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패턴은 뻔하다면 뻔했지만, 그 속도가 함부로 파고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둘의 상대가 된 5형은 아까부터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시훈과 월터 역시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번째인가 미유키가 돌격하고 난 직후였다. 갑자기 5형이 자세를 한껏 낮췄다. 마침 5형의 상체를 공격하려던 프레이야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와 동시에 5형이 휘두른 팔에 프레이야가 맞아 공중을 날았다.
"프레이야!"
"이 자식!"
"아, 안돼! 피해!"
월터와 시훈이 달려들려던 때, 미유키가 다급히 외쳤다. 프레이야를 쳐 날린 5형이 어느새 월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미유키가 가속을 써서 5형에게 닿는 것보다 5형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빠를 것이 당연했다.
"그렇겐 안 되지!"
하지만 5형이 월터의 머리를 베기 직전, 시훈이 던진 검이 5형에게로 날아왔다. ABC 처리가 아직 상당히 유효한 상태였던 덕분에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 집어던진 검은 그대로 배리어를 무효화하고 5형의 오른쪽 어깨 뒤편에 꽂혔다. 월터는 순간적으로 5형의 행동이 멈춘 틈을 타 몸을 피했다.
"이것도 받아랏!"
월터의 외침과 함께 허리 뒤편에 있던 ABC 대거가 5형을 향해 탄환처럼 날아갔다. 월터의 염동력에 조종된 ABC 대거는 부상입은 5형의 검을 피해 왼쪽 어깨와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월터를 향해 달려들던 5형은 대거가 꽂힌 직후 다리가 꺾이며 지면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끄... 끝났나?"
월터가 미심쩍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방금 전까지 목숨이 왔다갔다 하게 만든 상대가 순식간에 땅에 쓰러졌으니 실감이 나지 않을 만도 했다. 다들 잠시동안 그렇게 5형을 바라보던 중, 시훈이 먼저 움직였다. 건물 건너편의 5형을 상대하러 간 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그렇다면 이쪽이 도우러 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5형의 어깨에 박힌 검의 손잡이를 시훈이 잡은 순간이었다.
"...어?"
시훈은 별안간 자신의 시선이 허공을 향해 있는 것을 느꼈다. 검을 뽑으려는 것과 동시에 5형이 팔에 달린 검을 휘둘러 시훈의 양 다리를 자른 것이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리에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땅에 부딪힌 뒤통수와 등의 충격이 더 크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시훈은 의식을 잃었다.
다시 일어선 5형이 시훈의 목을 벤 순간, 월터가 염동력을 실어 날린 검이 5형의 머리에 박혔다. 프레이야와 미유키의 검이 5형의 흉부 양쪽을 꿰뚫은 것도 동시였다. 그리고 길리엄과 프리드리히를 잃은 끝에 5형을 처리한 벤이 프레이야 일행에게 온 것은 겨우 몇십초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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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우수수 죽어나갔습니다. 이걸로 5, 6화의 프레이야 친구들은 전멸 (...)
그래도 명색이 싱글넘버인데 좀 어이없게 쓰러진 감이 있군요. 나이트런 본편에선 싱글넘버 하나 뜨면 부대 하나는 기본이고 전함도 끝장인데... 심지어 프레이의 싱글 쯤 되면 이건 어지간한 영식 이상이라...
...아, 이런. 자일 양 생각나버렸다 (......)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우주선이 착륙을 끝내자 착륙장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걸음을 옮겼고, 그를 호위하듯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여러명이 함께 이동했다. 일행이 우주선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해치가 열리며 우주선에서 계단이 지면으로 뻗어 내려왔고, 곧이어 우주선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남자는 장교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DC(Doll Company)의 제럴드 에릭슨이라고 합니다."
"레니핀에 온 것을 환영하오. 중앙군의 폴 베이드 대령이오."
제럴드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던 폴은 상대가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싶었지만 짐작가는 것은 없었다.
"무슨 일이오? 뭔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소?"
"아, 아닙니다. 군인이라고 하셨는데 양복 차림으로 나오셔서 말이죠."
"우리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오. 그건 그렇고, 물품은 확실하오?"
"물론입니다. 품질에 있어선 저희 DC를 따라올 곳이 없으니까요. 자, 그럼 여기 양도 증서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폴은 제럴드가 내민 전자 증서 테이블에 서명을 하고는 돌려주었고, 서명 대조를 끝낸 제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용 콘솔을 조작했다. 그러자 우주선의 후방 해치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계약 내용대로 1차 양도는 10기입니다. 매번 10기씩, 총 4회 양도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5년 내 문제가 발생할 시에는 저희 DC로 연락을 주십시오."
제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폴은 완전히 열린 우주선의 후방 적재함을 주시했다. 잠시 후 20개의 인영이 질서정연하게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2년 후, 우주력 441년. 프레이야는 기사 교육부 4학년이 되어 있었다.
레나와 츠안이 목숨을 잃고 몇달 후, 프레이야는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3학년 때부터는 두세달에 한번씩 실전에 투입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그 이후로 프레이야가 속한 조에선 중상자는 나오더라도 사망자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교육생들의 실력이 늘고 경험이 쌓여간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2년 전부터 프레이야는 청적파를 개량하는데 고심하고 있었다. 본래 청적파는 파동기로, 앤과 프레이가 크로스 아이 시리즈와 싸우며 완성한 사상병기급의 전투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제어가 어렵고, 정신력과 체력의 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프레이야는 청적파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기(氣)의 소모를 줄이는 것은 위력이 감소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만, 입력량 감소율보다 출력량 감소율이 적다면 활동 시간을 늘릴 수 있고, 그것은 그만큼 더 많은 괴수를 상대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핫!"
기합과 함께 프레이야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대련장 벽면을 걷어차며 뛰어오르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대로 공중에서 반바퀴 회전한 후, 착지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다리에 기를 집중시켰다. 가벼운 몸이라고는 하지만 십여미터 공중에서 낙하하는 충격은 상당했기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프레이야는 다리에 감각이 살짝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프레이야가 개량하는 방향은 원거리 공격을 포기하는 대신 고속 이동을 중점으로 하는 것이었다. 육합 괴산과 같은 원거리 파동기는 분명 강력하지만 기의 소모가 극심했고, 전성기 시절의 앤이나 프레이라면 모를까 선천적으로 기 보유량이 평균 이하를 밑도는 프레이야에게는 써서 좋을 일이 없는 기술이었다.
"후우... 일단 이 정돈가... 그건 그렇고, 이 색은 좀..."
한차례 수련을 마친 프레이야는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는 그럭저럭 만족한 듯 말했지만, 자신이 개량한 기공(氣功)의 색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파동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프레이야의 기공은, 기를 집중시키면 탁하고 짙은 푸른색이 일렁이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차라리 아예 새카맣거나 한 게 낫지, 이 어중간한 색은 뭐람. 그렇다고 이 색을 어떻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동안 자신의 오른손과 거기에 모인 푸른 기운을 내려다 보던 프레이야는 이내 손을 털며 기운을 흩어버렸다. 그리고는 대련장을 걸어나가며 패널에 사용 종료를 입력했다. 이제 대기 순번에 따라 다음 예약자가 들어와 대련장을 이용할 테지만, 방금 전까지 쉴새없이 움직인 프레이야는 누가 들어오든 무엇을 하든 관심없었다.
"얼른 가서 씻고 잠이나 자자."
다음 날.
"일주일 후에 스트린 성계로 교육생 파견이 있을 예정이다."
종례 시간, 담임 교관인 알리노의 말에 4학년 B반의 교육생들은 또다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파견 횟수는 잦아졌고 임무의 위험도도 높아져 갔다. 그리고 이번에 파견 지역인 스트린 성계는 상위 괴수가 다수 출현하여 상당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일단 지원도 받지만, 먼저 우선 선정된 사람들부터 알려주마. 우리 반에선 길리엄 파렐, 프리드리히 하르트만, 타카야 미유키, 월터 비르겐, 한시훈, 프레이야 샤테니르. 이렇게 6명이다."
6명의 이름을 말한 알리노는 잠시 간격을 둔 다음 교육생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들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스트린은 지금 꽤나 치열하게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말인데, 지원하면 받아는 주겠지만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아둬라. 그리고 방금 부른 6명과 혹시 있을지 모를 지원자들은 장비 점검과 ABC 처리를 이번주 안에 끝내놓고, '준비'도 미리 해두도록. 질문 있나?"
교육생들 중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것을 확인한 알리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종례 끝. 다들 오늘도 수고했다."
알리노가 교실을 나선 후에도 평소와 같은 어수선함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말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설 뿐이었다.
교육생들의 실전 투입이 반복되면서 희생자는 계속해서 나왔다. 천만다행으로 단 한명도 죽지 않고 돌아오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프레이야가 입단한 후에 그런 일은 딱 한번 있었고, 그나마도 결과적으로는 중추신경계 손상으로 기사단을 그만 두는 사람이 둘이나 나왔다. 교육생들은 점차 실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오늘처럼 실전 투입이 결정되어 파견 대상자까지 확정된 날은 다들 조용히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프레이야도 슬슬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뒤쪽에 앉아있던 미유키가 다가왔다.
"프레이야, 가자."
"응, 그래."
미유키의 말에 프레이야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교실 문으로 향했다. 지금 프레이야는 미유키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3학년 들어서 파견이 한번 끝날 때마다 반 편성이 바뀌다 보니 그 때마다 거의 매번 룸메이트가 바뀌었고, 미유키와 프레이야가 한 방을 쓰게 된 것은 한달 전의 일이었다.
"그러고보니까 프레이야랑 같이 나가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네. 잘 부탁할게."
"...응."
프레이야의 조금 망설이는 듯한 대답에 미유키는 고개를 갸웃 했지만 금방 다시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고, 그런 미유키의 옆모습을 보며 프레이야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미유키의 시원시원한 성격, 또래보다 큰 편인 키 때문에 작은 편에 속하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점이 자꾸만 레나를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그동안 잊었던 것은 아니지만 프레이야는 되도록 레나와 누군가를 비교하는 것을 피해왔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때의 전투로 어머니와 관련된 트라우마는 사라졌지만, 또다른 것이 새로 생긴 것이다. 그나마 전투에 지장을 주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주일 후, 스트린 성계의 베일스트린 행성. 4-B의 교육생들은 파견 담당 교관인 벤과 함께 이동 중이었다. 고학년이 되었다고는 해도 교육생은 어디까지나 정식 기사가 아닌 '교육'생이기에 전장에 파견될 때에는 항상 기사가 교관으로 붙고 거기에 함께 임무를 수행할 AE 소속 부대가 배정되었다. 예전에는 AE 부대를 배정하는 이유가 임무 공동 수행이 아니라 교육생의 호위였지만, E-34와의 싸움으로 소모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생 인원을 이전의 몇배로 늘리다 보니 AE 측에서 호위를 위해 병력을 빼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상위괴수 상대로는 아직 햇병아리 수준도 안 되는 교육생들을 교관 한두명에게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AE 사령부에서는 호위가 아닌 공동 작전이라는 식으로 교육생들의 실전을 돕고 있었다.
"길리엄, 그쪽은 이상 없나?"
[예, 특별히 눈에 띄는 문제는 없습니다. 고글에 경고 메시지가 뜨는 것도 없고요.]
"그래, 알았다. 그리고 고글에 너무 의존하지는 마. 스스로 찾아내는 능력도 길러야 돼."
[네, 교관님.]
"월터, 그쪽은 괜찮나?"
[이상 없습니다. 조금 한가하게 느껴지는데요.]
"여유를 가지는 건 좋지만 긴장을 풀지 마라. 장거리 포격으로 기습이 시작될 수도 있어. 계속 경계해라."
[알겠습니다.]
전방과 후방에서 각각 경계를 맡은 길리엄과 프리드리히, 월터와 시훈의 조와 통신을 끝낸 벤은 미유키와 프레이야를 한번씩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통신을 하며 들려온 벤의 말에 두 사람은 알아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벤과 교육생들, 그리고 AE 부대는 교대를 위해 전선으로 이동 중이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는 해도 같은 부대가 장기간 전방을 맡게 되면 전력 소모도 심하고 정신적인 피로도 무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부대를 교대시켜야 했다. 지금 최전선에 나가 있는 부대는 3주째, 병력은 1/3을 잃은 상태였기에 재편성이 필요했다. 함께 나갔던 5-A 교육생들 중 몇명도 중상을 입었다고 했기에 가급적 교대를 서둘러야 했다.
몇시간 후, 4-B와 AE 부대는 아무 일 없이 주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명색이 최전선이라 거창한 교대식 같은 것은 생략하고 지휘관들끼리만 만나 인수인계를 끝냈다. 이런저런 내용을 전달한 후, 복귀할 부대의 지휘관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제야 한숨 좀 돌릴 수 있겠군."
"수고하셨습니다, 대령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니, 나보다 저놈들이 더 심했지. 괴수놈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구는지... 기사님도 주의하십시오. 생각보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들입니다."
"그래, 대령님 말대로야. 우리 애들도 1:1에선 싱글넘버만 아니면 그리 밀리지 않는 애들이었는데, 각개격파에 말렸어. 겨우 수습해서 밀어내고 보니 두 녀석이 전투 불능이 돼 있더라구."
"하지만 이렇게 교대하도록 내버려둔 걸 보면 저놈들도 이제 한계 아닐까? 곧 밀어버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야 모르지. 괴수놈들도 교대하고 있는지도."
"이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고."
5-A를 담당한 리네즈의 말에 벤은 덜덜 떠는 시늉을 하며 엄살을 피웠고, 그 모습에 사령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였다. 콰앙 하는 폭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리네즈와 벤은 즉시 사령실을 뛰쳐나갔고, 대령은 테이블의 공용 무선시설을 켜고 외쳤다.
"무슨 일인가! 방금 충격은 뭐지?!"
[괴수의 공격입니다. 장거리 포격, 테디베어 타입으로 추정! 아, 레이더에 괴수 접근 확인! 숫자... 이런 제길, 100 돌파! 계속 증가중! 속도도 빠릅니다!]
"전 대원 전투 배치! 교대를 끝낸 병력은 복귀하지 말고 투입 대기하라!"
"일부러 교대하는 타이밍을 노린 건가? 제법 머리 쓰는데?"
"그래서 머리 굴릴 줄 안다고 말했잖아."
"하지만 그래봤자 괴수 머리지. 전체 병력 수는 오히려 늘어있는 상태라고. 4-B 교육생들! 지금 괴수 집단이 접근 중이다! 전원 전투 준비! ...이런 제길, 어디서 몰려오고 있는지를 모르잖아!"
교육생들에게 각자 맡을 위치를 지정하려던 벤은 그제야 괴수들의 접근 방향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급하게 나오느라 AE 지휘관에게 미처 묻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리네즈가 막 레이더 실에 통신을 연결한 참이었다.
"레이더 실, 기사단의 리네즈다! 적의 숫자와 방위는?"
[숫자는 200에서 계속 증가 중! 방위는 남서쪽, 반원형으로 조여오듯 접근하고 있습니다!]
레이더 실의 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또 한 차례의 충격이 건물을 뒤흔들더니 이어서 그보다 작은 진동이 전해져 왔다. 사령부 근처 건물에 포격이 명중해서 무너진 모양이었다.
"일단 저 곰돌이 놈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쉽진 않을 거야. 저번에도 그럴 생각으로 뛰어들었다가 우리 애들이 당한 거거든. 레이더 실, 테디베어 타입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파악된 게 7기. 아, 방금 아군 포격으로 1기 줄었습니다. 이제 6기!]
보고를 들으며 건물을 나선 두 사람은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갈라졌다. 리네즈는 남쪽, 벤은 서쪽. 남서쪽에서 올라오는 괴수 집단을 측면에서 치고 들어가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막스와 레이나! 기지 남서쪽에서 괴수들을 상대해! 파인과 딜런은 기지 남쪽에서 나와 합류, 괴수들을 측면에서 공격한다!"
"길리엄과 프리드리히, 월터와 시훈은 기지 남서쪽으로! 몰려오는 괴수들을 막아라! 미유키와 프레이야는 기지 서쪽! 나와 합류해서 측면에서 놈들을 친다! 서둘러!"
"이야아앗!"
눈앞의 마지막 테디베어를 쓰러트린 프레이야는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몸을 옆으로 날렸다. 테디베어를 호위하던 양산형 괴수들은 숫자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자릿수에 달하고 있었고, 교육생 4명과 기사 두명은 지금 그 한복판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엔 상위괴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벤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수를 두동강내며 기지에 통신을 연결했다.
"여기는 기사단의 벤! 테디베어 타입 섬멸을 완료했다! 양산형이 아직 숫자가 있으니 여기서 놈들을 좀 더 정리하겠다!"
[알겠습니다. 계속 수고... 뭐라고? 이, 이런! 지금 즉시 복귀하십시오!]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다소 안심한 어조로 통신을 받던 병사가 다른 통신을 받다가 다급히 외치자 벤과 리네즈는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상위괴수 출현! 5형 2기! 교육생들이 분전하고 있지만 위험합니다!]
"뭐?! 이런 빌어먹을!"
아무리 병력이 2배 가까이 늘었다고는 해도 AE의 수단으로는 상위괴수의 배리어를 뚫을 수 없다. 상대할 수 있는 것은 AB소드를 가진 기사, 그리고 ABC 처리가 완료된 무장을 쓰는 교육생들뿐. 하지만 교육생들은 절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하다. 그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서 실전에 데리고 다니는데 벅찬 상대를 만나 목숨을 잃기라도 해서는 주객전도다.
"벤! 너네 학생들 데리고 얼른 복귀해! 여긴 우리가 맡겠어!"
"...부탁한다, 나중에 기지에서 보자! 프레이야, 미유키! 달려라! 기지로 간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부 기지로 달려가서 5형을 상대하는 것이지만, 그랬다간 100기 조금 안되는 숫자의 괴수들이 기지로 몰려올 것이다. 안 그래도 상위괴수가 난입해서 쑥대밭이 되어있을 방어선에 그런 숫자가 밀려들면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리네즈는 역할을 나눠 자신과 담당 교육생들이 눈앞의 양산형들을 맡겠다고 했고,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유키, 프레이야와 함께 기지로 달려갔다. 한시가 급했다.
기지 방어선에 도달했을 때,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을 넘어서 반쯤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조각난 전차와 장갑차, 중형 개인화기가 여기저기 널려있고, 지면은 온통 붉은색. 쓰러진 군인들 중 사지를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 한복판에 인간보다 조금 큰 몸집을 하고 양 팔에 칼날을 단 괴수가 하나 서 있었다.
삐빗-
살기 가득한 눈으로 괴수를 노려보는 벤의 고글이 괴수의 정보를 분석해서 표시했다. 각종 정보를 종합했을 때 눈앞의 괴수는 5형. 하지만 레이더 실의 보고로는 2기였는데 지금 벤 일행의 앞에는 1기 뿐이었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다른 5형의 위치를 찾고 있을 때, 뒤늦게 고글이 또다른 5형의 정보를 표시했다. 눈앞의 5형 뒤편에 있는 건물, 그 건너편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미유키, 프레이야! 여기서 월터, 시훈과 함께 저놈을 상대해라. 난 건물 뒤편의 녀석을 잡겠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 테니 놈을 막아내는 데에만 신경써!"
말을 마친 벤은 서둘러 달려갔고, 미유키와 프레이야는 5형과 대치 중이던 두명과 합류했다. 5형을 두고 좌우에 각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괴수나 교육생들 모두 섣불리 덤비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괜찮아?"
"하아, 하아. 뭐, 목숨은 붙어있어. 그나저나 과연 싱글넘버구만. 몇번이나 팔다리가 날아갈 뻔했어."
미유키의 말에 월터는 짐짓 너스레를 떨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한계까지 몰렸던 게 드러나고 있었다.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DC코트는 여기저기 찢어져 출혈이 계속 되고 있었고, 월터가 항상 10자루 이상 지니고 다니는 ABC 대거는 허리 뒤편의 두자루 남은 게 전부였다. 5형 건너편에 있는 시훈과 프레이야 쪽을 보니 그쪽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1이라면 대개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하게 생각되고, 실제로도 숫자가 많은 편이 빈틈을 노리거나 체력 비축 같은 면에서 좋다. 하지만 지금처럼 두사람이 리타이어 직전인 데다가 연대 전투는 아직 한달도 채 연습하지 못한 경우라면 오히려 1:1보다 안 좋을 수도 있다. 어지간한 눈썰미가 아니면 아군의 공격에 자신이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미유키는 프레이야와 눈을 마주쳤고, 프레이야도 같은 생각을 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미유키는 초상능력 '가속'을 개방했다.
"핫!"
통상적으로 가속 능력은 이미 이동중인 대상의 속력을 증가시키는 기능을 가지지만, 미유키의 가속은 제자리에서 로켓처럼 튀어나가는 것이 가능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단점이라면 속도를 유지한 채 방향전환하기가 어려워서, 아직까지는 방향을 바꾸려면 거의 멈추다시피 해야한다는 점이었지만 그 문제는 동료의 연계로 커버할 수 있었다. 미유키의 참격을 받아낸 5형이 등을 보인 미유키에게로 몸을 돌리는 순간, 프레이야가 5형에게 돌진했다.
기공에 의해 강화된 프레이야의 육체는 미유키에 비하면 느리지만 일반적인 기사보다는 몇배나 빠른 속도와 근력을 발휘했고, 미유키를 공격하려던 5형은 서둘러 프레이야의 공격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공에 의한 강화는 단순히 속도와 근력만이 아닌, 동체시력이나 반응속도 같은 것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프레이야가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가며 틈틈이 미유키가 초고속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패턴은 뻔하다면 뻔했지만, 그 속도가 함부로 파고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둘의 상대가 된 5형은 아까부터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시훈과 월터 역시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번째인가 미유키가 돌격하고 난 직후였다. 갑자기 5형이 자세를 한껏 낮췄다. 마침 5형의 상체를 공격하려던 프레이야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와 동시에 5형이 휘두른 팔에 프레이야가 맞아 공중을 날았다.
"프레이야!"
"이 자식!"
"아, 안돼! 피해!"
월터와 시훈이 달려들려던 때, 미유키가 다급히 외쳤다. 프레이야를 쳐 날린 5형이 어느새 월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미유키가 가속을 써서 5형에게 닿는 것보다 5형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빠를 것이 당연했다.
"그렇겐 안 되지!"
하지만 5형이 월터의 머리를 베기 직전, 시훈이 던진 검이 5형에게로 날아왔다. ABC 처리가 아직 상당히 유효한 상태였던 덕분에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 집어던진 검은 그대로 배리어를 무효화하고 5형의 오른쪽 어깨 뒤편에 꽂혔다. 월터는 순간적으로 5형의 행동이 멈춘 틈을 타 몸을 피했다.
"이것도 받아랏!"
월터의 외침과 함께 허리 뒤편에 있던 ABC 대거가 5형을 향해 탄환처럼 날아갔다. 월터의 염동력에 조종된 ABC 대거는 부상입은 5형의 검을 피해 왼쪽 어깨와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월터를 향해 달려들던 5형은 대거가 꽂힌 직후 다리가 꺾이며 지면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끄... 끝났나?"
월터가 미심쩍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방금 전까지 목숨이 왔다갔다 하게 만든 상대가 순식간에 땅에 쓰러졌으니 실감이 나지 않을 만도 했다. 다들 잠시동안 그렇게 5형을 바라보던 중, 시훈이 먼저 움직였다. 건물 건너편의 5형을 상대하러 간 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그렇다면 이쪽이 도우러 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5형의 어깨에 박힌 검의 손잡이를 시훈이 잡은 순간이었다.
"...어?"
시훈은 별안간 자신의 시선이 허공을 향해 있는 것을 느꼈다. 검을 뽑으려는 것과 동시에 5형이 팔에 달린 검을 휘둘러 시훈의 양 다리를 자른 것이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리에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땅에 부딪힌 뒤통수와 등의 충격이 더 크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시훈은 의식을 잃었다.
다시 일어선 5형이 시훈의 목을 벤 순간, 월터가 염동력을 실어 날린 검이 5형의 머리에 박혔다. 프레이야와 미유키의 검이 5형의 흉부 양쪽을 꿰뚫은 것도 동시였다. 그리고 길리엄과 프리드리히를 잃은 끝에 5형을 처리한 벤이 프레이야 일행에게 온 것은 겨우 몇십초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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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우수수 죽어나갔습니다. 이걸로 5, 6화의 프레이야 친구들은 전멸 (...)
그래도 명색이 싱글넘버인데 좀 어이없게 쓰러진 감이 있군요. 나이트런 본편에선 싱글넘버 하나 뜨면 부대 하나는 기본이고 전함도 끝장인데... 심지어 프레이의 싱글 쯤 되면 이건 어지간한 영식 이상이라...
...아, 이런. 자일 양 생각나버렸다 (......)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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