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연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걷는다고 하기 보다는 달리는 것에 가까운 속도였다.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세연에겐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라면 오히려 세연의 품 안에 있는 아이였다. 이제 봄이라고는 해도 한밤중에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아이에게 좋을 리도 없거니와, 지금 아이의 몸에 걸쳐진 것은 세연이 입힌 외투 하나뿐이었다. 되도록 빨리 숙소를 잡는 편이 좋았다.
“그렇긴 한데, 이 시간에 손님을 받을 여관이 있을지…….”
그게 문제였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느 정도 거리에 어떤 마을과 어떤 도시가 있는지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시점에서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대륙 전체에 세연이 안 다녀본 곳이 거의 없었으니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만.
세연의 기억대로라면 지금 속도로 20분 정도만 더 가면 중소도시가 하나 있었다. 명색이 도시이니 만큼 여관이 없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과연 새벽 3시가 가까워오는 이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이 있을지, 그건 조금 의심스러웠다. 투숙객 중에 술고래가 있어 지금까지 술판을 벌이고 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런 상황이 형편 좋게 벌어지고 있을 리도 없고.
“어쨌든 일단 가보긴 해야겠지. 정 안 되면 민가에 폐를 끼칠 수밖에.”
그렇게 한 10분쯤 달리는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제야 세연은 한밤중에 벌판을 지나가는데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발소리와 품속의 아이가 숨 쉬는 소리뿐, 동물의 울음소리는커녕 풀벌레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떤 기운이 계속 두 사람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하던 세연은, 아이가 저절로 영(靈)이 모여드는 체질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하도 서두르느라 미처 생각 못했네.”
지금은 자신이 함께 있어서 별 문제 없지만, 이대로 도시에 들어선다면 몰려서 따라다니는 영들이 주변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이곳에서 영들을 떼어놓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다.
세연은 걸음을 멈추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를 무릎 위에 살짝 앉히고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주위의 영력을 끌어 모아 자신의 몸을 거쳐 아이의 몸을 둘러싸게 했다. 이렇게 한다면 세연의 기운을 머금은 영력이 아이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영들이 아이에게 이끌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다만 지속시간이 만 하루가 안 되고 누군가 영력 탐지를 시도한다면 두 사람의 영적 기운이 완전히 동일하게 보이기에 의심을 살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솔직히 영력 탐지 같은 주문은 마법사나 마법 물품을 추적하는 것 외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 마법이니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의 몸에 자신의 기운을 두른 세연은 다시 일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영들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것은 도시에 도착하는 것뿐이다.
10분 후, 세연은 도시 앞에서 난감해하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성문은 닫혀있고, 원칙상 아침 6시가 되기 전까지는 성문이 열리지 않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떠올린 것이다. 경비대에 사정한다면 통과 못할 것도 없지만, ‘알몸에 외투 하나만 걸치고 있는 아이’를 보고 경비대에서 그냥 넘어갈 리가 없기에 아이에 대해 설명하기가 골치 아파질 것이다. 게다가 여행용 가방도 안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시그리드의 연구실에서 나올 때 단순히 둘러보기만 할 요량이었기 때문에 몸만 나왔고, 그 덕에 옷과 노숙 도구는 물론 여행 경비까지 전부 두고 나온 것이다. 다행히 돈은 반씩 나눠서 나머지 반은 몸에 지니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에 빠진 세연이었다.
“어쩔 수 없네. 경비대에게는 미안하지만 월장해야겠어.”
세연은 다시 아이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Toomyung, Dduollara.”
세연은 자신과 아이에게 투명화와 부유 마법을 걸고, 땅을 살짝 차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성벽을 넘어가면서 보자, 성벽 위 망루에는 횃불을 켠 병사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제법 성실하게 보초를 서고 있기는 했지만, 애초에 누군가가 자신들 머리위로 날아서 지나가리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투명화까지 건 상태라면 보초는 의미가 없다. 세연은 성벽을 넘으면서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병사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래봤자 어차피 안 보이니 무의미한 동작이었지만. 아니, 보인다면 오히려 그게 문제이긴 했다.
그렇게 성벽을 넘은 다음, 세연은 눈에 잘 안 띄는 구석진 곳을 찾아서 마법을 풀었다. 이제는 숙소를 찾을 차례였다.
“…그다지 기대는 안 했는데, 이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몇 골목 지나지 않아, 아직까지 불이 켜진 채 떠들썩한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시간에 왁자지껄 한 걸 보면, 꽤나 대인원이 묵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꽤 오랫동안 여행한 사람들이 묵고 있거나. 어쨌든 일부러 자는 사람을 깨울 필요가 없다는 점은 좋았고, 이제 누군가 주정을 부리며 시비만 걸어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언제나 희망’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청 기분이 좋아 보이는 중년 남자가 세연을 맞이했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있는 것을 보니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종업원 같은데 술 마시면서 일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세연은 입을 열었다.
“빈방 있나요? 1인실이라도 상관없어요.”
세연이 입을 열자, 시끌시끌하던 1층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테이블 세 개를 차지하고 기분 좋게 술을 퍼마시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한밤중에 여자 목소리가 들려서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젊은 여자가 남자 아이를 안고 여관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흥미를 돋운 모양이었다. 이런 경우 나오는 말은…….
“어이 누님! 그 녀석은 너무 어리지 않아?”
“맞아 맞아! 너무 작아서 느낌도 안 올 텐데 말이야!”
“아직 솜털도 안 가신 꼬맹이잖아! 하하하하!”
…백이면 백 음담패설이다.
무시하면서 종업원을 바라보자, 종업원도 뭔가 묘한 표정으로 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남자라 이거냐 하는 생각에 무심코 얼굴을 찌푸리자, 종업원은 그제야 서둘러 빈방을 체크했다.
“음, 203호실이 비어있네요. 1인실, 하룻밤에 20프룸입니다.”
돈을 건네고 열쇠를 받는 동안 세연의 등 뒤에서는 휘파람소리와 함께 별의별 음담패설이 다 튀어나왔고, 세연은 이성의 끈을 간신히 유지하며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만 없었다면 아마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어놨겠지만, 당장은 아이를 안정시키는 게 중요했다.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다음,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물론 외투는 다시 벗겨서 옆에 내려놓았다. 잠든 아이의 표정은 평온해보였다. 나이는 대충 열 살 정도에, 얼굴은 제법 귀엽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가에 짙게 끼어있는 다크 서클이 어쩐지 측은한 느낌이 들게 했다.
처음 봤을 때에는 동생으로 착각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여러모로 다르다는 것을 다시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대체 왜 그때 동생으로 착각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달라 보였다.
챕터2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여자이다 보면 이런저런 불합리한 경우도 많이 당할 수밖에 없겠죠. 특히 판타지의 경우는 대부분 중세풍 배경이고, 그 중에서도 암흑기라고 불리기까지 하던 시기 여성의 지위는 남자와 노예 사이의 수준이라고 볼 정도였으니까요. ...참으로 지저분한 시대입니다. 여기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남성 우월주의의 상황입니다. ...사실 현대도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만, 근래 들어서는 역차별 소리가 나올 정도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단순무식한 사람들이 많아서 입맛이 참 씁니다. 여성 인권 주장하면서 '군인은 모두 잠재적 성범죄자'로 몰아버리는 건 대체 어떤 사고회로에서 나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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