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뒤, 시우의 토너먼트 파트너 결정전이 끝났다. 사실 아무리 IS 조종 실력을 겨룬다고 해도 고작 토너먼트 파트너 결정하는 것
하나 때문에 학교측에서 수십명에게 IS 사용 허가를 내준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이유로 실제 대결은 시뮬레이터를
이용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결승전(?) 날, 시우는 방과 후에 반 여학생들에게 붙잡혀 시뮬레이터 룸으로 끌려갔다. 우승자와
파트너가 되어야 하니 현장에서 직접 보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선택권이고 뭐고 없었다.
"...어라?"
시뮬레이터 룸에 도착한 시우는 한창 진행중이던 시합의 영상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명 다 설정 기체가 스쿨에서 사용하는 훈련기였던 것이다. 시뮬레이터에서도 원한다면 해당 IS를 접속해서 데이터를 준비할 수 있었고 전용기 보유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기 때문에, 훈련기의 데이터를 쓰고 있는 저 둘은 전용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시우는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관전중인 리자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말을 걸었다.
"리자."
"아, 시우 왔구나. 어서 와. 지금 결승전이니까 저 두명 중에서 네 파트너가 나올 거야."
"그러니까 내 의사는... 아니, 이젠 됐어. 그건 그렇고, 어째 둘 다 전용기가 아니네? 그리고 리자는 참가 안 한 거야?"
"아, 그거 말이지. 일종의 협정이라고 할까?"
"협정?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생각해 봐. 전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표 후보생이거나, 대기업에서 상당한 후원을 받고 있거나, 어떻게든 든든한 후원자가 있는 경우잖아. 그렇다면 그동안 연습해온 수준도 다른 학생들하고는 상당히 차이가 생기지. 그러면 전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참가하나마나 결과가 뻔해지니까, 이번에는 전용기 가진 사람들은 기권한 거야."
"그랬구나. 그런데, '이번에는'이라는 건 다음 번에는 전용기를 쓰는 사람들도 참가하겠다는 뜻이야?"
"그렇게 될 걸?"
"그래..."
시우는 맥없이 대답했고, 때마침 여학생들의 환호성이 들려와서 고개를 돌렸다. 시뮬레이터 화면에는 드디어 한 여학생이 상대에 대해 행동불능 판정을 받아내고 있었다. 시우는 화면에 비춰진 여학생의 모습을 보았고, 그 여학생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스쿨에 입학 조건에는 당연히 인종 제한 같은 것은 없었지만, 대부분 아시아인 아니면 백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IS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은 대부분 아시아 국가나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 IS를 보유한 국가는 상당히 드물었고, 그 때문에 시우는 여학생의 피부색에 살짝 놀랐던 것이다.
잠시 후 시뮬레이션이 완전히 종료되자 여학생은 시뮬레이터에서 내렸고, 자신을 둘러싼 다른 여학생들에게서 시우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머뭇거리다가 (반쯤 떠밀려서) 시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D반의 나알리아 다마리스(Naalia Damaris)야. 그러니까... 잘 부탁해."
"어, 응... 나도 잘 부탁해."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는 태도와는 다르게, 나알리아의 키는 180cm에 가까워보였다.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라도 시우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아야 했고, 165cm의 키에 새삼 좌절감이 들었다. 나알리아도 시우의 표정에서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자. 토너먼트에서 한 조가 되실 분들이 왜들 이러시나요. 이제 파트너도 결정되었겠다, 의논도 좀 해야지? 얘들아, 우리는 그만 자리 피해주자~"
리자의 옆에서 나알리아와 시우를 보고 있던 사브리나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려는 듯이 과하게 큰 목소리로 말했고, 다른 여학생들도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시뮬레이터 룸을 나섰다. 리자와 사브리나까지 나가고나자 방금 전까지 북적대던 시뮬레이터 룸에는 시우와 나알리아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시우였다.
"저기... 일단 자리를 옮기자. 어디로 갈까?"
"아, 글쎄..."
나알리아의 대답을 들은 시우는 얘기를 나눌만한 장소를 떠올려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식당에서 그냥 앉아서 이야기만 나누기에는 좀 이상하고, 도서관에서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가 될 테고, 옥상은 이제 방과 후니까 문을 걸어잠궜을 터였다. 그렇다고 매점에서 자리잡고 이야기하는 것도 좀 꺼려졌다.
"저... 밀크 홀은 어때?"
"아, 거기가 있었구나. 그래, 그럼 밀크 홀로 가자."
주저하는 태도로 꺼낸 나알리아의 제안에 시우는 바로 동의했다. 밀크 홀은, 말하자면 카페와 같은 곳이었다. 물론 학교 내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시설이니 실제로 판매 품목도 커피가 아니라 우유 종류였고, 그래서 명칭도 카페가 아니라 밀크 홀이었다. 명칭에서부터 뭔가 달달한 느낌이 들어서 시우는 별로 가본 일은 없었지만, 지나가면서 이따금 봤을 때 분위기는 조용하고 아늑해서 대화를 하기에는 좋은 곳 같았다.
밀크 홀로 걸어가면서 시우는 은황에게 말을 걸었다. 토너먼트에서 세울 전략에 대해서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은황, 나알리아의 실력은 어느 정도 같아?'
'방금 전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보았을 때 전반적인 실력은 시우의 약 70% 수준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단 1회의 대전만으로는 정확한 실력을 분석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고. 전투 방식은 근접인 것 같아, 원거리인 것 같아?'
'중거리 사격전 위주의 전투였습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은황에게서 분석을 들으며 걸음을 옮기던 시우는 문득 나알리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고, 몇걸음 뒤에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는 나알리아의 모습을 보았다. 시우가 돌아보자 흠칫 하는 것도 같았다. 왠지 이 타이밍에 말을 걸면 또 흠칫 할 것 같아서 시우는 그냥 걸음걸이를 늦춰 나란히 걷기로 했다. 그렇게 시우가 걷는 속도를 늦추자 이번에는 나알리아도 속도를 늦춰서 또다시 앞뒤로 걷는 모습이 되었다. 아무래도 시우와 함께 걷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 같아서, 시우는 그냥 그대로 밀크 홀로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 마주친 여학생들이 어쩐지 수근수근 대는 것 같았지만 그냥 무시했다.
"자, 여기 딸기 우유."
"응, 고마워..."
딸기우유와 빨대를 받아든 나알리아는 조심스레 우유팩에 빨대를 꽂고는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고, 시우도 우유에 빨대를 꽂아놓았다. 나알리아가 한모금 마신 뒤 입을 떼자 시우가 말을 걸었다.
" 그러면, 자기소개부터 확실히 하자. 나는 한시우. 보시다시피 남자이고, 반은 C반, 한국에서 왔어. 음... 취미는 독서? 순수문학 보다는 판타지 소설 같은 쪽이지만. 다른 건... 뭘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궁금한 부분 있으면 물어 봐."
"아니, 괜찮아. 나는... D반, 나알리아 다마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왔고... 독서하는 걸 좋아해."
"그래? 취미가 같네. 아, 그렇게 보긴 어렵나. 난 아무래도 흥미 위주로 읽는 편이니..."
"그래도, 책을 읽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지."
거기까지 말하고나자 또 두 사람은 공통된 주제가 없어져 조용해졌다. 아무 말 없이 계속 앉아만 있는 것도 이상해서, 결국 시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면 토너먼트 말인데."
"다, 다른 사람하고 파트너 해도 괜찮아."
"응?"
막 상의를 시작하려던 찰나에 나온 나알리아의 말에 시우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나알리아는 주저하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시우랑 파트너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해서 했던 거고, 난 전용기도 없으니까 나랑 파트너를 하게 되면 시우한테 짐만 될 테고, 그러니까..."
"잠깐, 거기까지."
"...어?"
나알리아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시우는 자신의 우유팩에서 빨대를 빼고는 그대로 우유를 한입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후우, 네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일단 한가지 확실하게 해둘게. 솔직히 말하면 난 누구랑 파트너가 되든 크게 상관은 없었어. 오히려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과 팀을 맺게 되면 내가 짐덩어리만 될 거라는 걱정도 했고, 나보다 부족한 사람하고 하게 되면 과연 팀웍을 잘 짤 수 있을까 걱정도 했고, 나랑 비슷한 수준인 사람이라면 의견이 어긋나지는 않을까도 걱정했고."
"아니, 오히려 내가..."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자기 비하하는 건 나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뭐 이것도 정상적인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지. 어쨌든, 난 파트너를 바꿀 생각이 없어. 마침 팀 신청서도 가지고 있고, 여기서 바로 기입한 다음 제출하자."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 넣어두었던 토너먼트 팀 신청서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사실 시우가 떠올려서 챙긴 것은 아니고 시뮬레이션 룸으로 데려가던 여학생 중 한명이 챙겨준 것이지만, 지금은 그때 그걸 받아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명의 이름을 넣는 공란 중 하나에 시우가 자신의 이름과 학년, 반을 적고 내밀자 나알리아는 그 종이를 내려다본 다음 말했다. 아직도 망설이는 느낌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더라도 상관없어. 정한 건 나 자신이고, 그 책임도 나 자신이 지는 거야. 당연하잖아, 내가 선택한 건데. 파트너를 정하기 위해 시합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잖아? 하지만 나알리아 너와 팀이 되겠다는 건 내가 정한 거야.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그런데 나알리아 너는 어때? 정말 싫다면 다른 사람과 팀을 해도 돼."
어쩐지 지리멸렬한 논리전개였지만 시우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말하다보니 선택의 결정을 나알리아에게 떠넘긴 듯한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처음 말을 할 때에는 자신이 강하게 밀고 나가서 그냥 팀을 결성할 생각이었는데,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 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말을 끝맺어 버린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말한 거냐며 속으로 머리를 쥐어 뜯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 시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알리아는 시우가 내민 신청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모습에 슬슬 시우가 초조해질 무렵, 나알리아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하자. 이번엔 진짜로... 잘 부탁해."
"그래, 앞으로 잘 해보자."
"지쳤어..."
나알리아와 이야기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시우는 침대에 몸을 내던지듯이 쓰러졌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이끌려 다니는 쪽인데, 이번에는 남을 이끌어가려니 보통 피곤해지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초반에 일부러 강하게 밀고 나가느라 억지를 썼더니 정신적인 피로가 시험 공부 할 때와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좀 씻고...는 싶은데 귀찮아지네..."
시우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았고,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걸 확인했다.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피로를 풀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은황, 듣고 있지?"
[듣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은황의 대사 패턴은 확실히 사람에 가까워져 있어서, 예전과 같은 딱딱한 말투와 고저없는 억양은 온데간데 없었다. 여전히 인간미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시우도 그 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속으로 생각하며 대화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서, 시우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는 직접 입으로 말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다.
"피곤해서 그러니까, 잠깐 눈 좀 붙일게. 대충 1시간 정도 있다가 깨워 줘."
[대충 1시간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 어디 보자, 그러니까... 그냥 1시간 후에 깨워줘."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해..."
말을 마친 시우는 정말 피곤했는지 이내 잠에 빠져들었고, 시우의 바이탈 사인을 파악해서 수면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은황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정말 할 건가?"
"내가 언제 이런 걸로 빈 말 하는 거 봤어?"
"...아니."
"이걸로 놈들의 반응도 살펴볼 수 있고, 방해만 되는 꼰대도 치워버릴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앞의 건 몰라도 뒤의 건 확실히 매력적이군."
"그렇지? 그러니까 하자고."
"...뭐, 좋아. 녀석들이 알아낸다고 해도 함부로 공표할 수는 없겠지. 한번쯤 뒤흔드는 것도 좋겠는걸."
IS 스쿨의 학년별 토너먼트가 시작되는 날, 종례 시간에 모든 학생들의 학습용 단말기에 동시에 대진표가 전송되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시우와 나알리아의 팀은 맨 첫 시합에 출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진표에서 확인된 상대 팀은 후지노와 스칼렛이었다.
"...누군가의 농간이냐?"
어떻게 첫시합부터 아는 사람들하고 시합을 하게 되는 건지, 정말로 진지하게 누군가에게 따져들고 싶었지만 정작 누구에게 그래야할지 모르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시우, 준비... 다 끝났는데."
"아, 미안."
묘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같은 상황들 때문에 누구한테인지 모를 저주를 중얼거리던 시우는 뒤에서 나알리아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나알리아는 예전 시뮬레이션 때처럼 라팔 리바이브를 착용한 상태였다. IS를 장착한 상태에서도 나알리아의 키가 자신보다 여전히 크다는 사실에 시우는 또 살짝 좌절했다.
"왜,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슬슬 나가자. 내가 먼저 나갈게."
"응, 부탁해."
지난 일주일 동안 함께 연습하고 전술을 짜면서 느낀 거지만, 나알리아는 부탁한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유난히 많이 쓰곤 했다. 아무래도 남들을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그러는 것 같았는데, 보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그나마 시우와는 시뮬레이션 연습도하고 아이디어도 주고 받으며 제법 친해져서 그런 말을 하는 일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이 쓰는 편이었다.
"그럼, 간다!"
게이트가 열리는 것과 동시에 시우는 피트를 빠져나와 아레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직후 반대쪽 피트에서 나온 상대편 IS가 시우를 향해 사격을 가했고, 시우는 급강하로 탄환을 피해냈다.
[상대 IS 확인 종료. 2세대 양산형 IS, 라팔 리바이브. 파일럿은 스칼렛 노베인. 동(同)세대 양산형 IS, 우치가네. 파일럿은 토모리 후지노.]
은황이 상대편을 분석하자마자 이번에는 후지노가 IS용 블레이드를 들고 돌격해왔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다.
"타아앗!"
시우는 자리를 이탈해서 후지노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때맞춰 날아온 스칼렛의 견제사격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고, 암 블레이드를 전개하기에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시우는 구미호를 총검 형태로 변형시켜 후지노의 블레이드를 받아냈다.
"뭐야, 이런 기능도 있었어? 한방 먹었네."
시우와 공중에서 검날을 맞댄 채 힘겨루기에 들어간 후지노는 구미호 총검 형태를 보고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고,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맞받아쳤다.
"그러는 후지노도 예상 밖인데. 차분해 보였는데, 이건 좀 많이 무대포 식 아냐?"
"일단 시우 너를 쓰러트리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돼서 말이...지!"
후지노는 말을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시우의 복부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고, 시우는 급히 몸을 뒤로 빼야 했다. 방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스칼렛의 견제가 날아오지 않았고, 재차 달려드는 후지노의 공격을 받아내며 아래를 내려다 본 시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우의 뒤를 따라 나온 나알리아와 스칼렛이 서로에게 사격을 하면서 바쁘게 회피기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서로 지원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빨리 상대를 쓰러트리고 도와주러 가면 되지. 시우도 같은 생각 하고 있지 않아?"
시우의 말에 후지노는 씨익 웃으며 말했고, 그 순간 시우는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보인 후지노의 눈빛에서 뭔지 모를 강렬한 빛, 그것도 부정적인 느낌이 가득한 빛을 보았던 것이다. 당황한 시우는 움직임이 둔해졌고 후지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빈 틈!"
"으헉!"
파고 들어온 후지노의 블레이드의 검광에 시우는 한순간 늦게 반응했고, 회피에는 성공했지만 윙 바인더 중 하나의 끝이 약간 잘려나갔다.
[좌측 1번 윙 바인더 손상. 전투 및 기동에 지장 없음.]
은황의 보고를 들으며 자세를 바로잡으려던 시우는 멈추지 않고 공격해오는 후지노의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방어했다. 그때부터는 완전히 후지노의 페이스였다. 시우는 차츰 뒤로 밀려가며 방어만 계속했고, 후지노는 검격과 발차기를 섞어가며 시우를 일방적으로몰아붙였다. 시우는 구미호를 변형시키거나 거리를 벌릴 타이밍조차 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기체 스펙은 이쪽이 훨씬 위일 텐데, 설마 실력이 그걸 뛰어넘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건가? 아무리 내가 IS 초짜라지만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실드 에너지 잔량 80%. 더 감소하기 전에 PCS 발동을 제안합니다.]
"칫...!"
은황의 제안을 들은 시우는 혀를 찼다. PCS는 종료된 후의 실드와 구동 에너지의 잔량이 발동 전의 에너지 량과 연관이 깊기 때문에 쓰려면 가급적 에너지가 많이 남아있을 때 사용하는 편이 좋았다. 만약 아슬아슬할 때 사용한다면 발동 시간도 짧아지고 종료 후의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아 표적 신세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PCS를 발동하기에도 불안한 것이, 후지노를 쓰러트린후 나알리아를 도와 스칼렛을 쓰러트릴 때까지 시간이 충분할지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시우 자신도 아직까지 PCS 발동 상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시간 안에 후지노를 쓰러트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걸로 끝이다!"
"윽?!"
시우가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하는 사이, 후지노는 어느새 시우를 아레나 실드 바로 앞까지 몰아붙여놓고 있었다. 시우가 물러설 곳이 더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지노는 그대로 시우의 머리 위에서 검을 내리꽂으려 했고, 반사적으로 뒤로 피하려던 시우는 실드에 가로막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당황했다. 검을 치켜든 후지노의 눈빛은 먹이를 코앞에 둔 맹수의 눈빛 이상으로 형형했다. 시우가 이를 악문 그 순간, 밑에서 솟구친 몇발의 탄환이 시우와 후지노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중요한 순간에...!"
사나운 표정으로 후지노가 바라본 그곳에는 라이플의 총구를 위쪽으로 향하고 있는 나알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스칼렛도 나알리아를 계속 몰아붙였는데, 우연히도 그 위치가 시우와 후지노가 있던 곳의 바로 아래쪽이었던 것이다. 정확한 타이밍에 견제를 날린 덕에 시우는 한숨 돌렸지만, 나알리아는 주의를 돌린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 했다. 스칼렛이 왼손에 들고 있던 머신건의 탄환을 쏟아 부은 것이다.
"이익!"
나알리아는 서둘러 스칼렛의 탄막에서 빠져나왔지만, 실드 에너지는 이미 2/3 넘게 깎여나간 뒤였다. 게다가 이제는 후지노까지 달려들고 있었다. 나알리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표 후보생이었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현재 단 한개의 IS만이 존재할 뿐이어서 나알리아가 IS를 직접 타고 모의전을 해본 것은 스쿨에 입학한 이후가 처음이었다. 경험부족과 소극적인 성격이 독이 되었는지, 나알리아는 당황해서 행동이 둔해졌다.
"더는 방해할 수 없게 해주겠어!"
"안 돼! 멈춰!"
마치 철천지원수를 베려는 순간 방해를 받은 사람처럼 후지노는 분노를 토해내며 나알리아를 향해 내리 꽂혔고, 시우는 서둘러 후지노를 쫓았다. 지금 후지노의 기색으로 보았을 때 나알리아의 IS만을 전투불능으로 만들고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하지만 시우의 움직임은 한발 늦어서, 시우가 후지노를 따라잡는 것보다 후지노가 나알리아에게 다다른 것이 더 빨랐다. 후지노는 스칼렛의 견제로 꼼짝 못하고 있는 나알리아의 머리 위로 블레이드를 치켜 들었다.
카아아아앙─────
왜애애애앵─────
막 후지노가 블레이드를 내려치려던 찰나,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레나에 비상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직후, 강렬한 폭음과 진동이 제3 아레나 전체에 울려퍼졌다.
"제3 아레나 실드 파손! 무언가가 침입했습니다!"
"차단실드 재구성! 레벨4로 올려요!"
"아레나 격벽 차단! 강제 개방 명령이 먹히지 않아요!"
"프로그래밍 계열 교사들을 불러요! 필요하다면 3학년도!"
"침입자 정보 분석 완료! 이건...!"
제3 아레나의 통제실과 교사(校舍)에 있는 중앙 분석실의 교사들은 비상사태에 바쁘게, 하지만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교사들은 우선적으로 관객석에 있던 학생들을 대피시키려 했지만, 갑자기 침입한 정체불명의 상대에 의해 아레나가 크래킹 당해 모든 격벽이 내려지는 바람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레나의 센서가 파악한 정보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제3 아레나 레벨2 실드 파손. 실드 재구성과 동시에 레벨4로 상향 조정. 현재 격벽을 포함한 아레나 제어 시스템 통제 불가. 침입 물체 분석 완료. 전고 2m 42cm, 유사인간형태, 확인된 무장은 빔 캐논 2문. 생체반응 없음. 코어 반응 없음.]
"뭐야, 저건?"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아레나에서 전투중이던 네명은 모두 행동을 멈춘 채 흙먼지를 피워올리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외부에서, 실드를 부수고, 난입하고, 아레나 지면에 거칠게 착지하는 모습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호의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은 전혀 없었다. 경계대상을 후지노와 스칼렛 팀에서 정체불명의 상대로 바꾼 시우에게 은황의 보고가 들려왔다.
[적기 분석 실패. 확인된 것은 방금 전 사용 무장이 빔 캐논이라는 점뿐.]
"분석 실패라고? 무슨 소리야?"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며 그 안에서 인간을 닮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직립보행 형태, 두개의 팔과 두개의 다리, 2m가 넘는 키는 IS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코어 반응 미검출. 상대는 IS가 아닙니다.]
"...뭐?"
은황의 말에 시우는 어이가 없어져서 되물어보았다. 어디로 보나 IS인데 IS가 아니라니, 아니 그 전에 코어 반응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황의 보고는 거짓이 아니었다.
[코 어 네트워크를 통한 모든 코어의 현 위치 파악 결과, 현재 IS 스쿨의 제3 아레나에서 장착 상태인 IS는 총 4기. 파일럿은 한시우, 나알리아 다마리스, 토모리 후지노, 스칼렛 노베인으로 확인. 위치 파악에 실패한 코어는 없습니다.]
"잠깐, 그럼 뭐야. 저건 진짜 로봇이라는 건가...? 그것도 무인기...?"
- 거기 네명! 어서 피해라! 곧 교사들이 도착할 거다!
통신으로 사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래도 자리를 뜨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둔중한 소음과 함께 구덩이에서 걸어나온 적기는 인간과 닮긴 했지만 양 팔이 다리보다 길어 유인원을 연상케 했다. 구덩이를 완전히 빠져나온 적기는 시우 일행이 있는 쪽을 보고는 양팔을 들어올렸고, 그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크윽!"
"꺄아악!"
시우 일행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행동이 늦은 스칼렛과 후지노는 빔 캐논에 휘말려 날아갔다. 다행히 IS의 절대방어가 작동한 덕에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에너지를 모두 사용한 둘의 IS는 대기 상태로 돌아가버렸고 두 사람은 그대로 아레나 벽에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 그 상태에서 또다시 공격을 받는다면 목숨이 위험했다.
"나알리아, 스칼렛과 후지노를 부탁해!"
"아, 알았어. 그런데 시우는 어쩌려고?"
"저 녀석을 잡아야지!"
"혼자서?! 안 돼! 나도..."
"그러다 나를 노렸다가 빗나간 빔이 쟤들한테 가면 어떡해? 부탁할게. 맡겨줘!"
"그래도 혼자선..."
나알리아는 뭔가 더 말하려했지만 그 때 적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고, 그 사선상에 후지노와 스칼렛이 있었기에 나알리아는 서둘러 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나알리아의 기체도 실드 에너지 잔량이 20%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서둘러! 둘을 데리고 피트로 피해!"
"...알았어, 금방 돌아올게!"
기절한 두 명을 양 옆구리에 끼고 나알리아가 날아오르자 적기는 다시금 빔 캐논을 그쪽으로 향했지만, 빔이 발사되는 것보다 시우가 구미호를 쏘는 것이 더 빨랐다.
"어딜 보시나! 네 상대는 나라구!"
플라즈마 에너지의 탄환이 적기 직격 코스로 날아갔지만 역시 실드에 의해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것은 적기의 실드 에너지를 확실히 감소시키고 있다는 의미였고, 시우는 불규칙한 회피기동으로 적기의 조준을 벗어나며 어설트 라이플 모드의 구미호를 연사했다. 적기는 한발 한발의 화력은 강해도 연사는 불가능한 듯, 시우를 정조준하려고 계속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기만 할 뿐이었다. 무인기의 한계인지 움직임이 둔하고 대응도 매끄럽지 못했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도... 윽?!"
조금씩 자신감을 가져가던 시우는 적기의 등뒤에서 무언가 막대뭉치 같은 것이 두개 튀어나오더니 양 어깨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움찔했다. 모양을 보면 꼭 소형 개틀링 건처럼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막대뭉치는 방향을 돌려 시우를 향하더니 회전하기 시작했다.
"진짜냐?!"
시우의 외침과 함께 개틀링 건이 탄환을 토해냈고, 사각을 찾아 움직이던 시우는 포신이 두개라 한쪽이 머리 때문에 회전이 불가능해도 다른 쪽이 조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회피기동을 하며 대응사격을 했지만 아무래도 적기보다는 시우가 입는 피해가 조금 더 컸다.
"제길, 그러고보니까 정체불명기 난입은 원래 학급대항전 때였잖아! 왜 지금 나오는 건데?! 게다가 IS가 아니라는 건 또 뭐냐고!"
여러가지로 자신의 지식과 어긋나는 상황에 시우는 불만을 토해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적기를 쓰러트려야만했지만, 문제는 시우와 은황에게는 이치카와 뱌쿠시키의 영락백야처럼 실드를 무시하고 본체를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착실하게 실드를 갉아먹은 다음 행동불능에 빠트릴 수밖에 없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이지속된다면 적기를 쓰러트리는 건 고사하고 교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방법은... PCS 뿐인가."
[현재 실드 에너지 잔량 40%, 구동 에너지 잔량 53%. PCS 유지시간 약 26초로 예상.]
"그 정도면 충분해! 누구씨는 1초만으로도 적을 잡아냈다고!"
"시우!"
시우가 막 PCS를 발동하려던 찰나, 피트로 돌아갔던 나알리아가 돌아왔다. 피트의 게이트도 개방이 안 되는 바람에 입구 안쪽의 구석진 곳에 둘을 내려놓고 돌아온 것이다. 나알리아는 돌아오자마자 적기에 사격을 가했고, 적기는 그 공격을 고스란히 맞았다. 그러자 어깨 위의 개틀링 건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더니 하나는 시우를, 하나는 나알리아를 조준하고 탄환을 쏟아냈고, 이제는 간간히 빔 캐논까지 섞여 발사했다.
"썩을, 아군이 늘었다 싶었더니 패턴이 더 복잡해졌잖아! 학습하는 건가?!"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상대가 단기일 경우와 복수일 경우의 대응책이 다를 가능성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 나알리아!"
"꺄아악!"
나알리아를 향해 발사된 개틀링 탄환이 실드를 뚫고 직격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아있던 실드 에너지가 적기의 공격에 결국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나알리아는 급히 몸을 웅크려 신체에 직격하는 것만은 피하고 있었지만 팔과 다리의 장갑도 차츰 부서져나가고 있어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사이에도 적기는 나알리아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막으려는 시우를 향해서는 계속해서 개틀링 건과 빔 캐논을 발사해서 접근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대로는 나알리아가 위험했다.
"은황! PCS!"
[PCS 발동. 시스템 정지까지 29.48초.]
"하아아앗!!"
급한 마음에 PCS를 발동시킨 시우는 암블레이드를 전개하고 적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격력 자체에는 변함이 없지만 스피드를 살려 적기의 실드를 깎아내려는 생각이었고, 처음 몇번의 공격은 적기에게 제대로 꽂혀들어갔다. 하지만 다섯번째 돌격에서, 적기는 돌연 제자리에서 양 팔을 옆으로 든 채 고속으로 회전했다. 이미 최고속으로 돌진하던 시우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적기의 팔과 충돌했다.
"크헉!"
[실드 에너지 잔량 20% 이하. PCS 정지까지 앞으로 12.27초.]
적기의 공격에 자신의 가속력까지 더해진 타격은 상당히 컸다. 반대편 아레나 벽까지 튕겨나간 시우는 고개를 들었고, 적기는 마침내 나알리아의 코앞에 도달해서 그 거대한 손을 맞잡아 치켜들고 있었다. 그대로 내리친다면 나알리아의 목숨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멈춰어어어엇!!"
기이이이이이이이이잉──────────
[세컨드 시프트 개시. PCS 강제 해제. 에너지 제어 프로그램 개변. 플렉시블 암과 윙 바인더의 연결 해제. 레이저 라이플 형성. 비행 역장 생성기 및 PIC 최대 활성화.]
시우의 외침, 은황의 동체에서 발생한 기이한 음향, 세컨드 폼 발동을 알리는 은황의 보고는 거의 동시였다.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세컨드 시프트를 마친 은황의 겉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여섯장의 윙 바인더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에너지로 구성된 반투명한 날개가 생겨 있었다. 그리고 윙 바인더는 어느틈엔가 적기를 포위하고 빔 공격을 가해 행동을 막고 있었다.
"떨어져, 이 빌어먹을 놈!"
쉴 새 없이 가해지는 공격에 적기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런 적기를 향해 시우는 스나이퍼 라이플 모드로 변형시킨 구미호를 겨냥했다. 비트 병기로 변화한 윙 바인더는 적기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공격만을 가했고, 6개의 방향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쏘아지는 레이저에 적기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물러선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구동 에너지의 무장 에너지 변환 한계. 구동 에너지 잔량 10%. 구미호 스나이퍼 모드, 에너지 압축량 400%.]
"꺼져버렷!"
은황의 보고와 함께 시우는 방아쇠를 당겼다. 고밀도로 압축된, 설정된 스나이퍼 라이플 모드의 출력을 훨씬 상회하는 위력으로 날아간 탄환은 적기의 실드를 관통한 다음 동체를 파고 들었고, 그대로 내부에서 폭발했다. 상체가 완전히 날아간 적기는 잠시 흔들거리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후우..."
완전히 부서진 적기를 노려보던 시우는 잠시 후 긴장이 풀리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은황은 아직 구동 에너지가 남아있어서 그런지 자동으로 대기 상태로 전환되지는 않고 있었고, 적기 주변에서 경계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윙 바인더도 되돌아와 플렉시블 암과 재결합하고 있었다.
"세컨드 폼...인가? 타이밍 좋다고 해야할지, 의외라고 해야할지..."
[통상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세컨드 페이즈가 개시되었습니다만, 미비한 점은 없다고 판단됩니다.]
"아니, 딱히 불만이라는 건 아냐. 덕분에 어떻게든 녀석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타이밍 좋게 사건이 벌어지면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확실히 적기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그렇지. 조사해보면 알 수 있으려나... 그런데, 저렇게 박살을 내놨는데 조사가 되긴 하려나?"
그제야 적기였던 물건이 지금은 절반도 안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우는 좀더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겨우 개방된 게이트를 통해 IS를 장착한 교사들이 진입하는 것을 본 시우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훗, 이거 재미있어졌는데. 그 꼬마, 흥미가 생겼어."
"그래봤자 단 1기다. 그다지 관심을 쏟을 상대는 아니야. 그것보다, 네가 바라던대로 된 것 같더군."
"아, 그 꼰대 말이지? 자기 조직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 인간이라면 잘리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 상황을 연출한 것은 우리들이지만."
"상관없잖아. 덕분에 앞으로 일은 더 쉬워지겠고. 다음 준비나 하자고."
"그럼 그럴까."
그 날 저녁, IS 스쿨의 정보 분석실은 평소보다 몇배는 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3 아레나에서 벌어진 사건의 뒤처리도 그렇지만, 그곳에서 회수된 정체불명의 IS에 대한 분석 때문이었다. 코어도 없는 그것을 IS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만, 마땅히 다른 표현도 없어서 교사들은 그저 '정체불명기'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분석 결과는 나왔습니까?"
"그게, 남은 부분이 많지도 않고 중요한 부분은 대부분 파손되어 있어서..."
"젠장. 한시우 그 자식, 일을 할 거면 좀 제대로 하든가. 이렇게 다 날려버려서야 뭘 알아낼 수가 없잖아."
"야마모토 선생, 너무 화내지 말아요. 한시우 학생이 아니었으면 일이 더 커졌을 수도 있으니까."
"으휴... 타마키 선생, 정말 뭔가 알아낸 거 없어?"
"조금 더 분석해봐야 알겠지만, 이 기체에 사용된 대부분의 기술은 이미 확인된 IS 관련기술들이에요. 즉, 아직까지 신기술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거죠. 하지만 침입 당시 센서의 분석 결과가 사실이라면, 이 기체는 코어 대신 별도의 동력원과 AI를 지녔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만약 양산까지 가능하다면, IS는 틀림없이 버려지겠지. 더구나 무인기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다면 두말할 것도 없고."
분석실에는 기분나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보낸 악의의 덩어리가 선전포고를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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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입니다.
...슬슬 블로그가 팬픽 연재용이 되어가는 느낌이군요.
"...어라?"
시뮬레이터 룸에 도착한 시우는 한창 진행중이던 시합의 영상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명 다 설정 기체가 스쿨에서 사용하는 훈련기였던 것이다. 시뮬레이터에서도 원한다면 해당 IS를 접속해서 데이터를 준비할 수 있었고 전용기 보유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기 때문에, 훈련기의 데이터를 쓰고 있는 저 둘은 전용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시우는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관전중인 리자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말을 걸었다.
"리자."
"아, 시우 왔구나. 어서 와. 지금 결승전이니까 저 두명 중에서 네 파트너가 나올 거야."
"그러니까 내 의사는... 아니, 이젠 됐어. 그건 그렇고, 어째 둘 다 전용기가 아니네? 그리고 리자는 참가 안 한 거야?"
"아, 그거 말이지. 일종의 협정이라고 할까?"
"협정?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생각해 봐. 전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표 후보생이거나, 대기업에서 상당한 후원을 받고 있거나, 어떻게든 든든한 후원자가 있는 경우잖아. 그렇다면 그동안 연습해온 수준도 다른 학생들하고는 상당히 차이가 생기지. 그러면 전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참가하나마나 결과가 뻔해지니까, 이번에는 전용기 가진 사람들은 기권한 거야."
"그랬구나. 그런데, '이번에는'이라는 건 다음 번에는 전용기를 쓰는 사람들도 참가하겠다는 뜻이야?"
"그렇게 될 걸?"
"그래..."
시우는 맥없이 대답했고, 때마침 여학생들의 환호성이 들려와서 고개를 돌렸다. 시뮬레이터 화면에는 드디어 한 여학생이 상대에 대해 행동불능 판정을 받아내고 있었다. 시우는 화면에 비춰진 여학생의 모습을 보았고, 그 여학생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스쿨에 입학 조건에는 당연히 인종 제한 같은 것은 없었지만, 대부분 아시아인 아니면 백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IS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은 대부분 아시아 국가나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 IS를 보유한 국가는 상당히 드물었고, 그 때문에 시우는 여학생의 피부색에 살짝 놀랐던 것이다.
잠시 후 시뮬레이션이 완전히 종료되자 여학생은 시뮬레이터에서 내렸고, 자신을 둘러싼 다른 여학생들에게서 시우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머뭇거리다가 (반쯤 떠밀려서) 시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D반의 나알리아 다마리스(Naalia Damaris)야. 그러니까... 잘 부탁해."
"어, 응... 나도 잘 부탁해."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는 태도와는 다르게, 나알리아의 키는 180cm에 가까워보였다.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라도 시우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아야 했고, 165cm의 키에 새삼 좌절감이 들었다. 나알리아도 시우의 표정에서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자. 토너먼트에서 한 조가 되실 분들이 왜들 이러시나요. 이제 파트너도 결정되었겠다, 의논도 좀 해야지? 얘들아, 우리는 그만 자리 피해주자~"
리자의 옆에서 나알리아와 시우를 보고 있던 사브리나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려는 듯이 과하게 큰 목소리로 말했고, 다른 여학생들도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시뮬레이터 룸을 나섰다. 리자와 사브리나까지 나가고나자 방금 전까지 북적대던 시뮬레이터 룸에는 시우와 나알리아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시우였다.
"저기... 일단 자리를 옮기자. 어디로 갈까?"
"아, 글쎄..."
나알리아의 대답을 들은 시우는 얘기를 나눌만한 장소를 떠올려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식당에서 그냥 앉아서 이야기만 나누기에는 좀 이상하고, 도서관에서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가 될 테고, 옥상은 이제 방과 후니까 문을 걸어잠궜을 터였다. 그렇다고 매점에서 자리잡고 이야기하는 것도 좀 꺼려졌다.
"저... 밀크 홀은 어때?"
"아, 거기가 있었구나. 그래, 그럼 밀크 홀로 가자."
주저하는 태도로 꺼낸 나알리아의 제안에 시우는 바로 동의했다. 밀크 홀은, 말하자면 카페와 같은 곳이었다. 물론 학교 내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시설이니 실제로 판매 품목도 커피가 아니라 우유 종류였고, 그래서 명칭도 카페가 아니라 밀크 홀이었다. 명칭에서부터 뭔가 달달한 느낌이 들어서 시우는 별로 가본 일은 없었지만, 지나가면서 이따금 봤을 때 분위기는 조용하고 아늑해서 대화를 하기에는 좋은 곳 같았다.
밀크 홀로 걸어가면서 시우는 은황에게 말을 걸었다. 토너먼트에서 세울 전략에 대해서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은황, 나알리아의 실력은 어느 정도 같아?'
'방금 전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보았을 때 전반적인 실력은 시우의 약 70% 수준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단 1회의 대전만으로는 정확한 실력을 분석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고. 전투 방식은 근접인 것 같아, 원거리인 것 같아?'
'중거리 사격전 위주의 전투였습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은황에게서 분석을 들으며 걸음을 옮기던 시우는 문득 나알리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고, 몇걸음 뒤에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는 나알리아의 모습을 보았다. 시우가 돌아보자 흠칫 하는 것도 같았다. 왠지 이 타이밍에 말을 걸면 또 흠칫 할 것 같아서 시우는 그냥 걸음걸이를 늦춰 나란히 걷기로 했다. 그렇게 시우가 걷는 속도를 늦추자 이번에는 나알리아도 속도를 늦춰서 또다시 앞뒤로 걷는 모습이 되었다. 아무래도 시우와 함께 걷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 같아서, 시우는 그냥 그대로 밀크 홀로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 마주친 여학생들이 어쩐지 수근수근 대는 것 같았지만 그냥 무시했다.
"자, 여기 딸기 우유."
"응, 고마워..."
딸기우유와 빨대를 받아든 나알리아는 조심스레 우유팩에 빨대를 꽂고는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고, 시우도 우유에 빨대를 꽂아놓았다. 나알리아가 한모금 마신 뒤 입을 떼자 시우가 말을 걸었다.
" 그러면, 자기소개부터 확실히 하자. 나는 한시우. 보시다시피 남자이고, 반은 C반, 한국에서 왔어. 음... 취미는 독서? 순수문학 보다는 판타지 소설 같은 쪽이지만. 다른 건... 뭘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궁금한 부분 있으면 물어 봐."
"아니, 괜찮아. 나는... D반, 나알리아 다마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왔고... 독서하는 걸 좋아해."
"그래? 취미가 같네. 아, 그렇게 보긴 어렵나. 난 아무래도 흥미 위주로 읽는 편이니..."
"그래도, 책을 읽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지."
거기까지 말하고나자 또 두 사람은 공통된 주제가 없어져 조용해졌다. 아무 말 없이 계속 앉아만 있는 것도 이상해서, 결국 시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면 토너먼트 말인데."
"다, 다른 사람하고 파트너 해도 괜찮아."
"응?"
막 상의를 시작하려던 찰나에 나온 나알리아의 말에 시우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나알리아는 주저하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시우랑 파트너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해서 했던 거고, 난 전용기도 없으니까 나랑 파트너를 하게 되면 시우한테 짐만 될 테고, 그러니까..."
"잠깐, 거기까지."
"...어?"
나알리아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시우는 자신의 우유팩에서 빨대를 빼고는 그대로 우유를 한입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후우, 네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일단 한가지 확실하게 해둘게. 솔직히 말하면 난 누구랑 파트너가 되든 크게 상관은 없었어. 오히려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과 팀을 맺게 되면 내가 짐덩어리만 될 거라는 걱정도 했고, 나보다 부족한 사람하고 하게 되면 과연 팀웍을 잘 짤 수 있을까 걱정도 했고, 나랑 비슷한 수준인 사람이라면 의견이 어긋나지는 않을까도 걱정했고."
"아니, 오히려 내가..."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자기 비하하는 건 나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뭐 이것도 정상적인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지. 어쨌든, 난 파트너를 바꿀 생각이 없어. 마침 팀 신청서도 가지고 있고, 여기서 바로 기입한 다음 제출하자."
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 넣어두었던 토너먼트 팀 신청서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사실 시우가 떠올려서 챙긴 것은 아니고 시뮬레이션 룸으로 데려가던 여학생 중 한명이 챙겨준 것이지만, 지금은 그때 그걸 받아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명의 이름을 넣는 공란 중 하나에 시우가 자신의 이름과 학년, 반을 적고 내밀자 나알리아는 그 종이를 내려다본 다음 말했다. 아직도 망설이는 느낌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더라도 상관없어. 정한 건 나 자신이고, 그 책임도 나 자신이 지는 거야. 당연하잖아, 내가 선택한 건데. 파트너를 정하기 위해 시합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잖아? 하지만 나알리아 너와 팀이 되겠다는 건 내가 정한 거야.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그런데 나알리아 너는 어때? 정말 싫다면 다른 사람과 팀을 해도 돼."
어쩐지 지리멸렬한 논리전개였지만 시우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말하다보니 선택의 결정을 나알리아에게 떠넘긴 듯한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처음 말을 할 때에는 자신이 강하게 밀고 나가서 그냥 팀을 결성할 생각이었는데,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 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말을 끝맺어 버린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말한 거냐며 속으로 머리를 쥐어 뜯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 시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알리아는 시우가 내민 신청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모습에 슬슬 시우가 초조해질 무렵, 나알리아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하자. 이번엔 진짜로... 잘 부탁해."
"그래, 앞으로 잘 해보자."
"지쳤어..."
나알리아와 이야기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시우는 침대에 몸을 내던지듯이 쓰러졌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이끌려 다니는 쪽인데, 이번에는 남을 이끌어가려니 보통 피곤해지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초반에 일부러 강하게 밀고 나가느라 억지를 썼더니 정신적인 피로가 시험 공부 할 때와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좀 씻고...는 싶은데 귀찮아지네..."
시우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았고,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걸 확인했다.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피로를 풀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은황, 듣고 있지?"
[듣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은황의 대사 패턴은 확실히 사람에 가까워져 있어서, 예전과 같은 딱딱한 말투와 고저없는 억양은 온데간데 없었다. 여전히 인간미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시우도 그 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속으로 생각하며 대화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서, 시우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는 직접 입으로 말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다.
"피곤해서 그러니까, 잠깐 눈 좀 붙일게. 대충 1시간 정도 있다가 깨워 줘."
[대충 1시간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 어디 보자, 그러니까... 그냥 1시간 후에 깨워줘."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해..."
말을 마친 시우는 정말 피곤했는지 이내 잠에 빠져들었고, 시우의 바이탈 사인을 파악해서 수면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은황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정말 할 건가?"
"내가 언제 이런 걸로 빈 말 하는 거 봤어?"
"...아니."
"이걸로 놈들의 반응도 살펴볼 수 있고, 방해만 되는 꼰대도 치워버릴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앞의 건 몰라도 뒤의 건 확실히 매력적이군."
"그렇지? 그러니까 하자고."
"...뭐, 좋아. 녀석들이 알아낸다고 해도 함부로 공표할 수는 없겠지. 한번쯤 뒤흔드는 것도 좋겠는걸."
IS 스쿨의 학년별 토너먼트가 시작되는 날, 종례 시간에 모든 학생들의 학습용 단말기에 동시에 대진표가 전송되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시우와 나알리아의 팀은 맨 첫 시합에 출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진표에서 확인된 상대 팀은 후지노와 스칼렛이었다.
"...누군가의 농간이냐?"
어떻게 첫시합부터 아는 사람들하고 시합을 하게 되는 건지, 정말로 진지하게 누군가에게 따져들고 싶었지만 정작 누구에게 그래야할지 모르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시우, 준비... 다 끝났는데."
"아, 미안."
묘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같은 상황들 때문에 누구한테인지 모를 저주를 중얼거리던 시우는 뒤에서 나알리아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나알리아는 예전 시뮬레이션 때처럼 라팔 리바이브를 착용한 상태였다. IS를 장착한 상태에서도 나알리아의 키가 자신보다 여전히 크다는 사실에 시우는 또 살짝 좌절했다.
"왜,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슬슬 나가자. 내가 먼저 나갈게."
"응, 부탁해."
지난 일주일 동안 함께 연습하고 전술을 짜면서 느낀 거지만, 나알리아는 부탁한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유난히 많이 쓰곤 했다. 아무래도 남들을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그러는 것 같았는데, 보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그나마 시우와는 시뮬레이션 연습도하고 아이디어도 주고 받으며 제법 친해져서 그런 말을 하는 일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이 쓰는 편이었다.
"그럼, 간다!"
게이트가 열리는 것과 동시에 시우는 피트를 빠져나와 아레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직후 반대쪽 피트에서 나온 상대편 IS가 시우를 향해 사격을 가했고, 시우는 급강하로 탄환을 피해냈다.
[상대 IS 확인 종료. 2세대 양산형 IS, 라팔 리바이브. 파일럿은 스칼렛 노베인. 동(同)세대 양산형 IS, 우치가네. 파일럿은 토모리 후지노.]
은황이 상대편을 분석하자마자 이번에는 후지노가 IS용 블레이드를 들고 돌격해왔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다.
"타아앗!"
시우는 자리를 이탈해서 후지노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때맞춰 날아온 스칼렛의 견제사격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고, 암 블레이드를 전개하기에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시우는 구미호를 총검 형태로 변형시켜 후지노의 블레이드를 받아냈다.
"뭐야, 이런 기능도 있었어? 한방 먹었네."
시우와 공중에서 검날을 맞댄 채 힘겨루기에 들어간 후지노는 구미호 총검 형태를 보고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고,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맞받아쳤다.
"그러는 후지노도 예상 밖인데. 차분해 보였는데, 이건 좀 많이 무대포 식 아냐?"
"일단 시우 너를 쓰러트리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돼서 말이...지!"
후지노는 말을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시우의 복부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고, 시우는 급히 몸을 뒤로 빼야 했다. 방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스칼렛의 견제가 날아오지 않았고, 재차 달려드는 후지노의 공격을 받아내며 아래를 내려다 본 시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우의 뒤를 따라 나온 나알리아와 스칼렛이 서로에게 사격을 하면서 바쁘게 회피기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서로 지원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빨리 상대를 쓰러트리고 도와주러 가면 되지. 시우도 같은 생각 하고 있지 않아?"
시우의 말에 후지노는 씨익 웃으며 말했고, 그 순간 시우는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보인 후지노의 눈빛에서 뭔지 모를 강렬한 빛, 그것도 부정적인 느낌이 가득한 빛을 보았던 것이다. 당황한 시우는 움직임이 둔해졌고 후지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빈 틈!"
"으헉!"
파고 들어온 후지노의 블레이드의 검광에 시우는 한순간 늦게 반응했고, 회피에는 성공했지만 윙 바인더 중 하나의 끝이 약간 잘려나갔다.
[좌측 1번 윙 바인더 손상. 전투 및 기동에 지장 없음.]
은황의 보고를 들으며 자세를 바로잡으려던 시우는 멈추지 않고 공격해오는 후지노의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방어했다. 그때부터는 완전히 후지노의 페이스였다. 시우는 차츰 뒤로 밀려가며 방어만 계속했고, 후지노는 검격과 발차기를 섞어가며 시우를 일방적으로몰아붙였다. 시우는 구미호를 변형시키거나 거리를 벌릴 타이밍조차 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기체 스펙은 이쪽이 훨씬 위일 텐데, 설마 실력이 그걸 뛰어넘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건가? 아무리 내가 IS 초짜라지만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실드 에너지 잔량 80%. 더 감소하기 전에 PCS 발동을 제안합니다.]
"칫...!"
은황의 제안을 들은 시우는 혀를 찼다. PCS는 종료된 후의 실드와 구동 에너지의 잔량이 발동 전의 에너지 량과 연관이 깊기 때문에 쓰려면 가급적 에너지가 많이 남아있을 때 사용하는 편이 좋았다. 만약 아슬아슬할 때 사용한다면 발동 시간도 짧아지고 종료 후의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아 표적 신세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PCS를 발동하기에도 불안한 것이, 후지노를 쓰러트린후 나알리아를 도와 스칼렛을 쓰러트릴 때까지 시간이 충분할지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시우 자신도 아직까지 PCS 발동 상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시간 안에 후지노를 쓰러트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걸로 끝이다!"
"윽?!"
시우가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하는 사이, 후지노는 어느새 시우를 아레나 실드 바로 앞까지 몰아붙여놓고 있었다. 시우가 물러설 곳이 더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지노는 그대로 시우의 머리 위에서 검을 내리꽂으려 했고, 반사적으로 뒤로 피하려던 시우는 실드에 가로막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당황했다. 검을 치켜든 후지노의 눈빛은 먹이를 코앞에 둔 맹수의 눈빛 이상으로 형형했다. 시우가 이를 악문 그 순간, 밑에서 솟구친 몇발의 탄환이 시우와 후지노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중요한 순간에...!"
사나운 표정으로 후지노가 바라본 그곳에는 라이플의 총구를 위쪽으로 향하고 있는 나알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스칼렛도 나알리아를 계속 몰아붙였는데, 우연히도 그 위치가 시우와 후지노가 있던 곳의 바로 아래쪽이었던 것이다. 정확한 타이밍에 견제를 날린 덕에 시우는 한숨 돌렸지만, 나알리아는 주의를 돌린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 했다. 스칼렛이 왼손에 들고 있던 머신건의 탄환을 쏟아 부은 것이다.
"이익!"
나알리아는 서둘러 스칼렛의 탄막에서 빠져나왔지만, 실드 에너지는 이미 2/3 넘게 깎여나간 뒤였다. 게다가 이제는 후지노까지 달려들고 있었다. 나알리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표 후보생이었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현재 단 한개의 IS만이 존재할 뿐이어서 나알리아가 IS를 직접 타고 모의전을 해본 것은 스쿨에 입학한 이후가 처음이었다. 경험부족과 소극적인 성격이 독이 되었는지, 나알리아는 당황해서 행동이 둔해졌다.
"더는 방해할 수 없게 해주겠어!"
"안 돼! 멈춰!"
마치 철천지원수를 베려는 순간 방해를 받은 사람처럼 후지노는 분노를 토해내며 나알리아를 향해 내리 꽂혔고, 시우는 서둘러 후지노를 쫓았다. 지금 후지노의 기색으로 보았을 때 나알리아의 IS만을 전투불능으로 만들고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하지만 시우의 움직임은 한발 늦어서, 시우가 후지노를 따라잡는 것보다 후지노가 나알리아에게 다다른 것이 더 빨랐다. 후지노는 스칼렛의 견제로 꼼짝 못하고 있는 나알리아의 머리 위로 블레이드를 치켜 들었다.
카아아아앙─────
왜애애애앵─────
막 후지노가 블레이드를 내려치려던 찰나,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레나에 비상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직후, 강렬한 폭음과 진동이 제3 아레나 전체에 울려퍼졌다.
"제3 아레나 실드 파손! 무언가가 침입했습니다!"
"차단실드 재구성! 레벨4로 올려요!"
"아레나 격벽 차단! 강제 개방 명령이 먹히지 않아요!"
"프로그래밍 계열 교사들을 불러요! 필요하다면 3학년도!"
"침입자 정보 분석 완료! 이건...!"
제3 아레나의 통제실과 교사(校舍)에 있는 중앙 분석실의 교사들은 비상사태에 바쁘게, 하지만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교사들은 우선적으로 관객석에 있던 학생들을 대피시키려 했지만, 갑자기 침입한 정체불명의 상대에 의해 아레나가 크래킹 당해 모든 격벽이 내려지는 바람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레나의 센서가 파악한 정보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제3 아레나 레벨2 실드 파손. 실드 재구성과 동시에 레벨4로 상향 조정. 현재 격벽을 포함한 아레나 제어 시스템 통제 불가. 침입 물체 분석 완료. 전고 2m 42cm, 유사인간형태, 확인된 무장은 빔 캐논 2문. 생체반응 없음. 코어 반응 없음.]
"뭐야, 저건?"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아레나에서 전투중이던 네명은 모두 행동을 멈춘 채 흙먼지를 피워올리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외부에서, 실드를 부수고, 난입하고, 아레나 지면에 거칠게 착지하는 모습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호의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은 전혀 없었다. 경계대상을 후지노와 스칼렛 팀에서 정체불명의 상대로 바꾼 시우에게 은황의 보고가 들려왔다.
[적기 분석 실패. 확인된 것은 방금 전 사용 무장이 빔 캐논이라는 점뿐.]
"분석 실패라고? 무슨 소리야?"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며 그 안에서 인간을 닮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직립보행 형태, 두개의 팔과 두개의 다리, 2m가 넘는 키는 IS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코어 반응 미검출. 상대는 IS가 아닙니다.]
"...뭐?"
은황의 말에 시우는 어이가 없어져서 되물어보았다. 어디로 보나 IS인데 IS가 아니라니, 아니 그 전에 코어 반응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황의 보고는 거짓이 아니었다.
[코 어 네트워크를 통한 모든 코어의 현 위치 파악 결과, 현재 IS 스쿨의 제3 아레나에서 장착 상태인 IS는 총 4기. 파일럿은 한시우, 나알리아 다마리스, 토모리 후지노, 스칼렛 노베인으로 확인. 위치 파악에 실패한 코어는 없습니다.]
"잠깐, 그럼 뭐야. 저건 진짜 로봇이라는 건가...? 그것도 무인기...?"
- 거기 네명! 어서 피해라! 곧 교사들이 도착할 거다!
통신으로 사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래도 자리를 뜨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둔중한 소음과 함께 구덩이에서 걸어나온 적기는 인간과 닮긴 했지만 양 팔이 다리보다 길어 유인원을 연상케 했다. 구덩이를 완전히 빠져나온 적기는 시우 일행이 있는 쪽을 보고는 양팔을 들어올렸고, 그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크윽!"
"꺄아악!"
시우 일행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행동이 늦은 스칼렛과 후지노는 빔 캐논에 휘말려 날아갔다. 다행히 IS의 절대방어가 작동한 덕에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에너지를 모두 사용한 둘의 IS는 대기 상태로 돌아가버렸고 두 사람은 그대로 아레나 벽에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 그 상태에서 또다시 공격을 받는다면 목숨이 위험했다.
"나알리아, 스칼렛과 후지노를 부탁해!"
"아, 알았어. 그런데 시우는 어쩌려고?"
"저 녀석을 잡아야지!"
"혼자서?! 안 돼! 나도..."
"그러다 나를 노렸다가 빗나간 빔이 쟤들한테 가면 어떡해? 부탁할게. 맡겨줘!"
"그래도 혼자선..."
나알리아는 뭔가 더 말하려했지만 그 때 적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고, 그 사선상에 후지노와 스칼렛이 있었기에 나알리아는 서둘러 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나알리아의 기체도 실드 에너지 잔량이 20%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서둘러! 둘을 데리고 피트로 피해!"
"...알았어, 금방 돌아올게!"
기절한 두 명을 양 옆구리에 끼고 나알리아가 날아오르자 적기는 다시금 빔 캐논을 그쪽으로 향했지만, 빔이 발사되는 것보다 시우가 구미호를 쏘는 것이 더 빨랐다.
"어딜 보시나! 네 상대는 나라구!"
플라즈마 에너지의 탄환이 적기 직격 코스로 날아갔지만 역시 실드에 의해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것은 적기의 실드 에너지를 확실히 감소시키고 있다는 의미였고, 시우는 불규칙한 회피기동으로 적기의 조준을 벗어나며 어설트 라이플 모드의 구미호를 연사했다. 적기는 한발 한발의 화력은 강해도 연사는 불가능한 듯, 시우를 정조준하려고 계속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기만 할 뿐이었다. 무인기의 한계인지 움직임이 둔하고 대응도 매끄럽지 못했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도... 윽?!"
조금씩 자신감을 가져가던 시우는 적기의 등뒤에서 무언가 막대뭉치 같은 것이 두개 튀어나오더니 양 어깨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움찔했다. 모양을 보면 꼭 소형 개틀링 건처럼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막대뭉치는 방향을 돌려 시우를 향하더니 회전하기 시작했다.
"진짜냐?!"
시우의 외침과 함께 개틀링 건이 탄환을 토해냈고, 사각을 찾아 움직이던 시우는 포신이 두개라 한쪽이 머리 때문에 회전이 불가능해도 다른 쪽이 조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회피기동을 하며 대응사격을 했지만 아무래도 적기보다는 시우가 입는 피해가 조금 더 컸다.
"제길, 그러고보니까 정체불명기 난입은 원래 학급대항전 때였잖아! 왜 지금 나오는 건데?! 게다가 IS가 아니라는 건 또 뭐냐고!"
여러가지로 자신의 지식과 어긋나는 상황에 시우는 불만을 토해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적기를 쓰러트려야만했지만, 문제는 시우와 은황에게는 이치카와 뱌쿠시키의 영락백야처럼 실드를 무시하고 본체를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착실하게 실드를 갉아먹은 다음 행동불능에 빠트릴 수밖에 없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이지속된다면 적기를 쓰러트리는 건 고사하고 교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방법은... PCS 뿐인가."
[현재 실드 에너지 잔량 40%, 구동 에너지 잔량 53%. PCS 유지시간 약 26초로 예상.]
"그 정도면 충분해! 누구씨는 1초만으로도 적을 잡아냈다고!"
"시우!"
시우가 막 PCS를 발동하려던 찰나, 피트로 돌아갔던 나알리아가 돌아왔다. 피트의 게이트도 개방이 안 되는 바람에 입구 안쪽의 구석진 곳에 둘을 내려놓고 돌아온 것이다. 나알리아는 돌아오자마자 적기에 사격을 가했고, 적기는 그 공격을 고스란히 맞았다. 그러자 어깨 위의 개틀링 건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더니 하나는 시우를, 하나는 나알리아를 조준하고 탄환을 쏟아냈고, 이제는 간간히 빔 캐논까지 섞여 발사했다.
"썩을, 아군이 늘었다 싶었더니 패턴이 더 복잡해졌잖아! 학습하는 건가?!"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상대가 단기일 경우와 복수일 경우의 대응책이 다를 가능성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 나알리아!"
"꺄아악!"
나알리아를 향해 발사된 개틀링 탄환이 실드를 뚫고 직격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아있던 실드 에너지가 적기의 공격에 결국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나알리아는 급히 몸을 웅크려 신체에 직격하는 것만은 피하고 있었지만 팔과 다리의 장갑도 차츰 부서져나가고 있어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사이에도 적기는 나알리아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막으려는 시우를 향해서는 계속해서 개틀링 건과 빔 캐논을 발사해서 접근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대로는 나알리아가 위험했다.
"은황! PCS!"
[PCS 발동. 시스템 정지까지 29.48초.]
"하아아앗!!"
급한 마음에 PCS를 발동시킨 시우는 암블레이드를 전개하고 적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격력 자체에는 변함이 없지만 스피드를 살려 적기의 실드를 깎아내려는 생각이었고, 처음 몇번의 공격은 적기에게 제대로 꽂혀들어갔다. 하지만 다섯번째 돌격에서, 적기는 돌연 제자리에서 양 팔을 옆으로 든 채 고속으로 회전했다. 이미 최고속으로 돌진하던 시우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적기의 팔과 충돌했다.
"크헉!"
[실드 에너지 잔량 20% 이하. PCS 정지까지 앞으로 12.27초.]
적기의 공격에 자신의 가속력까지 더해진 타격은 상당히 컸다. 반대편 아레나 벽까지 튕겨나간 시우는 고개를 들었고, 적기는 마침내 나알리아의 코앞에 도달해서 그 거대한 손을 맞잡아 치켜들고 있었다. 그대로 내리친다면 나알리아의 목숨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멈춰어어어엇!!"
기이이이이이이이이잉──────────
[세컨드 시프트 개시. PCS 강제 해제. 에너지 제어 프로그램 개변. 플렉시블 암과 윙 바인더의 연결 해제. 레이저 라이플 형성. 비행 역장 생성기 및 PIC 최대 활성화.]
시우의 외침, 은황의 동체에서 발생한 기이한 음향, 세컨드 폼 발동을 알리는 은황의 보고는 거의 동시였다.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세컨드 시프트를 마친 은황의 겉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여섯장의 윙 바인더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에너지로 구성된 반투명한 날개가 생겨 있었다. 그리고 윙 바인더는 어느틈엔가 적기를 포위하고 빔 공격을 가해 행동을 막고 있었다.
"떨어져, 이 빌어먹을 놈!"
쉴 새 없이 가해지는 공격에 적기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런 적기를 향해 시우는 스나이퍼 라이플 모드로 변형시킨 구미호를 겨냥했다. 비트 병기로 변화한 윙 바인더는 적기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공격만을 가했고, 6개의 방향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쏘아지는 레이저에 적기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물러선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구동 에너지의 무장 에너지 변환 한계. 구동 에너지 잔량 10%. 구미호 스나이퍼 모드, 에너지 압축량 400%.]
"꺼져버렷!"
은황의 보고와 함께 시우는 방아쇠를 당겼다. 고밀도로 압축된, 설정된 스나이퍼 라이플 모드의 출력을 훨씬 상회하는 위력으로 날아간 탄환은 적기의 실드를 관통한 다음 동체를 파고 들었고, 그대로 내부에서 폭발했다. 상체가 완전히 날아간 적기는 잠시 흔들거리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후우..."
완전히 부서진 적기를 노려보던 시우는 잠시 후 긴장이 풀리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은황은 아직 구동 에너지가 남아있어서 그런지 자동으로 대기 상태로 전환되지는 않고 있었고, 적기 주변에서 경계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윙 바인더도 되돌아와 플렉시블 암과 재결합하고 있었다.
"세컨드 폼...인가? 타이밍 좋다고 해야할지, 의외라고 해야할지..."
[통상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세컨드 페이즈가 개시되었습니다만, 미비한 점은 없다고 판단됩니다.]
"아니, 딱히 불만이라는 건 아냐. 덕분에 어떻게든 녀석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타이밍 좋게 사건이 벌어지면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확실히 적기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그렇지. 조사해보면 알 수 있으려나... 그런데, 저렇게 박살을 내놨는데 조사가 되긴 하려나?"
그제야 적기였던 물건이 지금은 절반도 안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우는 좀더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겨우 개방된 게이트를 통해 IS를 장착한 교사들이 진입하는 것을 본 시우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훗, 이거 재미있어졌는데. 그 꼬마, 흥미가 생겼어."
"그래봤자 단 1기다. 그다지 관심을 쏟을 상대는 아니야. 그것보다, 네가 바라던대로 된 것 같더군."
"아, 그 꼰대 말이지? 자기 조직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 인간이라면 잘리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 상황을 연출한 것은 우리들이지만."
"상관없잖아. 덕분에 앞으로 일은 더 쉬워지겠고. 다음 준비나 하자고."
"그럼 그럴까."
그 날 저녁, IS 스쿨의 정보 분석실은 평소보다 몇배는 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3 아레나에서 벌어진 사건의 뒤처리도 그렇지만, 그곳에서 회수된 정체불명의 IS에 대한 분석 때문이었다. 코어도 없는 그것을 IS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만, 마땅히 다른 표현도 없어서 교사들은 그저 '정체불명기'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분석 결과는 나왔습니까?"
"그게, 남은 부분이 많지도 않고 중요한 부분은 대부분 파손되어 있어서..."
"젠장. 한시우 그 자식, 일을 할 거면 좀 제대로 하든가. 이렇게 다 날려버려서야 뭘 알아낼 수가 없잖아."
"야마모토 선생, 너무 화내지 말아요. 한시우 학생이 아니었으면 일이 더 커졌을 수도 있으니까."
"으휴... 타마키 선생, 정말 뭔가 알아낸 거 없어?"
"조금 더 분석해봐야 알겠지만, 이 기체에 사용된 대부분의 기술은 이미 확인된 IS 관련기술들이에요. 즉, 아직까지 신기술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거죠. 하지만 침입 당시 센서의 분석 결과가 사실이라면, 이 기체는 코어 대신 별도의 동력원과 AI를 지녔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만약 양산까지 가능하다면, IS는 틀림없이 버려지겠지. 더구나 무인기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다면 두말할 것도 없고."
분석실에는 기분나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보낸 악의의 덩어리가 선전포고를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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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입니다.
...슬슬 블로그가 팬픽 연재용이 되어가는 느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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