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 이 팬픽은 나노하 StS 이후 약 70년이 지난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요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시공관리국 에르트 본부가 항복을 선언한지 석달이 지난 신력 146년 2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에르트 행성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고, 치안 유지를 위해 구(舊) ELF 전투반과 민간 마도사들이 경찰에 협력했다. ELF를 지원하던 차원들은 서둘러 우주전함과 교육인원을 에르트 임시 정부에 장기 임대 형식으로 제공했다. 비록 구형 함선이긴 했지만 항행과 차원 도약, 전투에서는 아직 쓸만한 수준이었기에 에르트 측에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시공관리국은 에르트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전투 과정에서 구속된 국원이나 에르트 측 마도사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단 본부장인 트론과 부본부장인 에밀리오를 비롯한 고위급 간부 일부는 여전히 에르트 측에 억류된 상태였는데, 이것은 궤도 구치소에 수감중인 에르트 관련 정치범들과의 맞교환 협상을 위한 것이었다. 관리국 일각에서는 에르트와의 협상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관리국의 처사에 대한 비난 여론과 에르트 본부의 상당한 인적·재정적 부담에 진저리를 치던 시공평의회는 이 참에 이미지 쇄신도 하고 실리도 챙길 겸 협상에 나섰다.
지루한 협상의 결과, 양측은 에르트의 독립을 인정하고 억류된 인원을 맞교환하기로 합의했고, 또한 같은 자리에서 에르트는 시공관리국에 적극 협조한다는 입장을 공표하기로 결정했다. 포로 교환과 에르트의 입장 공표가 있을, 조인식 예정일은 신력 146년 3월 1일이었다.




"예상대로인가, 어쩔 수 없는 늙은이들이로군."

젋은 남자는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어두운 공간에서 남자의 발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곧 눈앞에 특수 합금제 게이트가 나타났고, 남자는 게이트 옆에 달린 단말기에 암호와 신체 정보를 입력해 게이트를 열었다. 구웅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게이트 너머로, 반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관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 안에 무언가 담겨있는지, 흐릿한 그림자들이 비치고 있었다.

"만약을 위해 준비한 건데, 정말로 쓸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역시 유비무환이라는 건가."

남자는 중앙에 설치된 제어 컴퓨터로 다가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잠시 후, 삐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유리관에 담긴 액체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액체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은...




오버홀을 끝낸 엘즈리온을 수령한 에리나는 구(舊) 시공관리국 에르트 본부, 지금은 에르트 임시 정부 청사로 쓰이고 있는 건물로 향했다. 3개월 전 있었던 관리국과의 결전에서 에리나의 엘즈리온은 상당한 손상을 입었고, 에르트가 사실상 독립한 지금은 일부러 마력광을 속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게 마력 소모도만 높이는 마력광 변화 장치를 제거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단순한 수리가 어느 새 밸런스 재조정을 포함한 대대적인 개수 작업으로 이어졌고, 양산형이 아닌 프로토타입이다 보니 이런저런 시행착오까지 겹치며 오버홀 기간이 두달을 넘겼던 것이다. 담당 개발진은 이전보다 반응도 좋고 마력 소모도도 낮아졌을 거라며 가슴을 폈지만 에리나는 들은체만체 하며 연구소를 나섰다.
임시 정부 청사에 도착한 에리나는 신분증을 보이며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친 관리국 단체의 테러를 막기 위해 설치된 검색대였지만, 시행 초기에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뚫려서 정부 요인이 기습을 당하곤 했다. 그나마 기존 전투반원들이 제때 제압한 덕에 큰 부상을 입는 일은 없었고, 이후 보안이 강화되며 지금은 3주째 테러가 없었다.
에리나는 페이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ELF 에르트 지부장이자 ELF 전투반의 디바이스를 공급하던 페이는 이제 에르트 임시 정부의 국방차관을 맡고 있었다. 노크를 하고 집무실에 들어선 에리나는 페이가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았다.

"아, 어서 와라. 오랜만이네."

"다리 내려요, 창문 열어요, 창문 안 열리면 환기장치라도 켜요, 그리고 무엇보다 담배 좀 끊어요!"

페이는 이제 거의 인사가 되다시피 한 에리나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다리를 책상에서 내렸다. 하지만 에리나의 충고를 들어서는 아니고, 대화를 나누기에 좀 더 편한 자세로 바꾼 것 뿐이었다. 그 생각을 아는 에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방문자를 위해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왜 불렀어요? 나 휴가 중인데요."

"2주 후에 있을 조인식, 너도 간다."

"...뭐라구요?"

"조인식에 너도 간다고. 호위 자격이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러기에요!"

"상부 명령인데? 칠흑의 엘즈리온은 우리쪽 무력(武力)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니까."

"으... 그야 그렇지만..."

큰 소리로 항의하려던 에리나는 페이의 말에 말꼬리를 흐렸다. 확실히 관리국과 에르트의 최고 지도자들이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경호는 철저해야 할 테고, 동시에 상대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관리국에는 악명이긴 하지만 검은 마녀라는 이름으로 유명하고, 석달 전 전투에서 트론을 꺾기까지 한 에리나는 반드시 조인식에 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껄끄럽잖아요, 관리국에선 내가 좋게 보이지 않을 거라구요? 내가 가서 오히려 분위기만 이상하게 만드는 거 아니에요?"

"아니? 정보부에선 오히려 널 보면 관리국의 반감이 누그러질 가능성이 높다던데. 물론 맨 얼굴을 보였을 때."

"얼굴을 보이라구요?! 미쳤어요? 내가 지금까지 관리국이 원한 품을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아니, 그야 꼭 해야하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이 '예, 그렇습니다'하고 납득하고 넘어갈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만 관리국, 특히 고위 간부들은 기본적으로 재능있는 인물에 대해서 호의적이래. 너 같은 소녀가 오버 S랭크의 마도사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에 감탄할 거라더라."

"감탄이야 하겠죠, 그렇다고 그게 호의로 반드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건 가서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자, 여기 명령서."

"이미 준비 다 끝난 겁니까!"

에리나는 페이가 내미는, 결재란에 빠짐없이 서명이 끝난 협상단 호위 명령서를 보며 절규했다.




"실비아 테스타로사 디사이플 소위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실비아는 본국의 한 집무실에 들어섰다. 집중치료 덕에 한달 전에 퇴원한 실비아는 에르트 본부가 철수하면서 본국 근무로 전환되었고, 지금은 발령 대기 상태였다. 퇴원 후 열린 재판에서 실비아는 에르트 본부 공방전에서 트론을 공격한 것이 항명죄로 인정되었지만, 당시 트론의 명령이 관리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행동을 막은 것이 고려되어 1계급 강등에 그쳤다. 참고로 아직까지 에르트에 억류 중인 트론은 이미 불명예 퇴역이 확정된 상태였다.

"어서 오게, 소위. 무슨 일인가?"

집무실에 있던 남자는 공간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금발과 붉은 눈이 실비아와 꼭 닮은 모습. 실비아의 아버지인 장 T. 디사이플 준장이었다. 실비아든 장이든 공사를 확실히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제복을 입고 있을 때에는 항상 국원으로 상대를 대했다.

"2주 후에 에르트와의 조인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네. 시공평의회 의장님과 본국 사령관님을 포함해 고위층 분들이 참석하실 예정이지. 그런데 그게 무슨?"

"경호대에 저를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실비아의 요청에 장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더니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고, 부당한 요청도 아니었다. 그리고 경호대 인원 선발은 무장대 총지휘관인 장에게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실비아를 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은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를 들어도 될까, 소위?"

"석달 전의 공방전에서 보인 실태를 만회하기 위해서입니다."

"실태라 함은, 전(前) 에르트 본부장을 막은 일을 말하는 건가?"

"아니오, 좀 더 일찍 그를 막지 못해 희생자를 늘린 일을 말하는 겁니다."

"왜 그걸 실태라고 생각하나?"

"시공관리국원이라면 생명을 중시하고 정의와 질서를 수호해야 하는데, 저는 주저했습니다. 시공관리국의 존재의의와 상관의 명령, 그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라면 전자일 것입니다. 그것을 혼동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실비아의 말을 듣던 장은 양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손을 깍지끼며 계속 물었다.

"그러면, 왜 경호대 임무가 자네에게 만회의 기회가 되지?"

"이번 조인식은 관리국이 실수를 인정하고 존재의의를 재확인하는 곳입니다. 그 과정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이 제... 속죄입니다."

"속죄라... 국원답지 않은 말이군."

장의 말에 실비아는 움찔했다. 안 그래도 요즘 시공관리국 내에서는 실비아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오가고 있었고, 그 중 상당수는 실비아에게 국원의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하는 험담이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강경파 사람들이었지만, 피해를 줄이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진 실비아에게는 큰 상처를 주었다.

"좋다. 경호대 인원에 넣어주지. 단, 지휘관이 아닌 일반 대원 자격이다. 집무관이 아닌 소위로서 참가하도록."

주눅들어있던 실비아는 허락하는 장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장의 말 때문에 경호 참가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놀라는 실비아를 바라보던 장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올곧고 장래 유망한 부하에게서 기회를 빼앗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지. 그리고 이건 사적인 이야기지만, 딸이 계속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도 괴로운 법이다. ─가서 경호 임무를 완수하고 마음의 짐을 털어라. 그리고 앞으로 있을 귀관의 활약을 기대하지."

"감사합니다, 준장님!"

기쁨에 찬 실비아는 큰 소리로 경례를 올렸고, 장도 미소를 띤 채 그 경례를 받았다.




신력 146년 2월 하순. 정확히는 조인식 4일 전.
시공관리국 본국에서는 LS급 차원항행함선 '카산드라'가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 카산드라는 조인식에 참석할 관리국 고위 인사들과 경호대를 태우고 제27관리 세계 '로이트'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조인식 장소는 행성 로이트의 위성 궤도에 떠 있는 휴양 스테이션 '리에스'였다.
카산드라의 화물공간에 보급품을 적재하던 보급관은 리스트에 없던 대형 화물이 적재 물품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화물은 금속제 컨테이너였는데, 마법 투시가 불가능한 재질에 문에는 봉인까지 걸려있어 함부로 열어볼 수도 없었다. 난감해하는 보급관에게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시공관리국 정보부 제1실장, 바이즈 콜트론(Vize Coltron)이었다.

"무슨 일인가?"

"누구... 아, 콜트론 실장님. 갑자기 없던 화물 하나가 툭 하고 튀어나와서 말이죠. 어디 건지도 모르겠고, 내용물도 모르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열어볼 수도 없으니 난감하네요."

"아, 저건가? 저거 우리 정보부 물건이네. 이번 조인식에서 할 일이 있어서 장비 좀 챙겼지."

"그랬습니까? 그런 건 좀 진작에 말씀해주시면 좋았을 텐데요."

"정보부가 어떤 곳인지 잘 알면서 그러나. 그런 거니까,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 실장님."

보급관은 경례를 올리고 화물 적재 업무로 돌아갔다. 잠시 후 돌아본 보급관의 눈에 바이즈가 낯선 4인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여성 세명에 남성 한명, 그것도 여성 중 한명은 아직 10대 초반의 어린 아이라는 기묘한 조합이었다. 순간적으로 '로리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추측이 보급관의 뇌리를 스쳤지만 금방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리며 작업으로 돌아갔다.




조인식 전날, 시공관리국 표준시각 오후 5시. 관리국의 인원들을 태운 카산드라가 리에스에 입항했다. 그리고 3시간 뒤에는 에르트 측의 함선 '제이카'가 도착했다.
휴양 스테이션이라면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리에스는 아직 미완성 상태라 민간인에게 개방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동력시설이나 숙박시설등은 이미 완성되었고, 아직까지 공사중인 곳은 각종 위락시설이 들어설 구역이었기 때문에 조인식에는 지장이 없었다.
양측의 경호팀은 각각 둘로 나뉘어 2/3은 스테이션에서 경호에 임하고, 나머지 1/3은 함선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양쪽 모두 18명의 경호팀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스테이션에 들어온 인원은 각각 12명씩, 그리고 그 안에는 에리나와 실비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Master.』

회의실 중 한 곳에서 에르트 측 인사들이 마지막으로 협정문을 점검하고 있는 동안, 에리나의 조는 회의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 지루해질 무렵, 레이징 하트가 에리나를 불렀다. 특별히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해도 일단은 임무 수행 중이었기에, 에리나는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왜?"

『알려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흥미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되도록 짧게 말해줘."

『관리국 측 경호인원 중에서 실비아 T. 디사이플을 확인했습니다.』

"무...! ...진짜?"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 뻔한 에리나는 가까스로 말을 삼켰고, 다시 작은 목소리로 레이징 하트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재차 물었지만 레이징 하트의 대답은 변함없었다.

『스테이션 내의 보안 카메라를 검색하던 도중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현재 근무 중인 것 같군요.』

에리나는 스테이션에 도착하면서 레이징 하트에게 스테이션의 보안 체계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물론 로이트의 사람들도 충분히 신경쓰고 있겠지만, 사람이란 모름지기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사실상의 해킹이지만 레이징 하트는 리에스의 보안 시스템에 접속해서 그 데이터를 확인했고, 그러다 실비아가 스테이션에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 나중에 실비아가 근무 교대하면 알려줘. 어디로 가는지도."

『만날 생각이신가요?』

"응. 레이징 하트도 그러라고 알려준 거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알겠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부탁해."

몇시간 후, 근무를 교대하고 배정받은 방에서 쉬고 있던 실비아는 누군가 인터폰을 누르는 소리를 들었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일어난 실비아는 인터폰 화면에 비치는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에, 에리나?"

- 저기, 좀 들어가도 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어, 응. 잠깐만."

실비아는 서둘러 문을 열었고, 에리나가 들어오자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실비아였다.

"여기 왔을 줄은 몰랐어. 협상단...은 아닐 테고, 호위 자격?"

"응, 싫다는데 억지로 집어넣더라. 넌?"

"난 자원했어. 이걸 해야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래..."

에리나는 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 실비아는 스스로 가진 국원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 트론을 막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관리국에 맞선 것이기도 했다. 정체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생각이 혼란스러운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관리국에서 대우가 변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1계급 강등당하고 집무관 지위 무기한 발령 대기 상태인 거 빼면 없어."

"...그거 변해도 엄청 변한 거잖아. 일종의 보복 조치 같은 거 아냐?"

"그래도 강제 퇴역 아닌 게 어디야. 요새 관리국 전체 분위기도 부드러워지는 것 같으니까 대기도 곧 풀리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아, 맞다. 정 안 되면 우리쪽으로 올래? 실력 있으니까 금방 자리 잡을 수 있을 텐데."

에리나의 말에 실비아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마주 보았다. 얼마 전까지 적대하던 집단의 사람들끼리 주고 받기에는 조금 위험한 말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비아가 본 에리나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금세 에리나의 의도를 파악한 실비아는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말을 받았다.

"지금 그거 스카웃 제의야, 아니면 포섭이야? 어느 쪽이든 쉽게 넘어가리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걸."

"그런가? 그럼 내 상관으로 올지도 모르겠네. 마주치면 경례 해야 되나?"

조금씩 농담을 주고 받던 두 사람은 이내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에리나와 웃으며 시간을 보내던 실비아는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 오후 1시, 휴양 스테이션 리에스의 제1 리셉션 룸에서 시공관리국과 에르트의 협정 조인식이 열렸다. 시공관리국 측에선 시공평의회 의장과 본국 사령관, 차원함대 사령관이 참석했고, 에르트 측에선 임시 정부 대통령과 총리, 국방장관이 참석했다. 양측의 경호인원 중 스테이션에 들어온 인원들은 절반으로 나뉘어 12명은 리셉션 룸 내부 경호, 또다른 12명은 내부 순찰을 맡고 있었고, 에리나와 실비아는 순찰조였다.
협정문 서명을 하려던 평의회 의장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수행 차 따라온 바이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콜트론 실장이 안 보이는군. 어디 갔나?"

"바이즈 콜트론 실장이라면 분석할 게 있다고 함선으로 돌아갔습니다."

비서의 대답에 의장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아무리 정보부 일이 중요하다지만 이런 자리에서 말도 없이 빠지다니, 사람이 그래선 안 되지. 게다가 자원하길래 참석을 허가했는데, 대체 그 친구는 무슨 생각인지..."

의장 기분이야 어쨌든 조인식은 협정문 서명까지 탈 없이 진행되었고, 의장과 대통령이 협정문을 교환하려고 일어섰다. 그 때였다. 돌연 폭음과 함께 진동이 생기더니 리셉션 룸의 정문이 날아갔다. 에르트 경호원들과 국원들은 순식간에 배리어 재킷을 착용하며 요인들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요인들 중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관리국 차원함대 사령관이 부서진 문 너머를 향해 소리쳤지만,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여러 발의 마력탄이었다.




에리나와 실비아가 속한 순찰조는 순조롭게 스테이션 내부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호원들끼리 연락을 주고 받기 위한 통신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폭음이 들려오더니 곧이어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통신망에 퍼진 것이다.

"1조, 무슨 일인가. 대답하라. 1조, 여기는 3조다. 대답하라!"

"댄, 세이드다. 무슨 일이 생겼나? 댄, 댄! 무슨 일이야!"

- 여기는... 2조. 1조장은 당했다. 경호인원은 전원... 전투 불능... 크헉!

- 세이드, 저... 적이...

관리국과 에르트 측의 경호인원 중 리셉션 룸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당한 것 같았다. 위험한 상황임을 직감한 순찰조는 서둘러 리셉션 룸으로 향했지만, 얼마 못 가 발이 묶였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여덟 명이 그들을 공격해온 것이다.

"이 녀석들, 대체 뭐야!"

"제길, 빠르... 커헉!"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네 명의 공격에 벌써 순찰조 인원 중 셋이 전투불능 상태가 되었다. 손에 들고 있는 무기 외에도 손목과 발목에 작은 날개를 닮은 마력 칼날이 돋아있어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다행히 장소가 복도인데다 급격한 방향 전환은 어려운 모양이라 사방에서 공격당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만만찮은 상대들이라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한편, 한시가 급한 상황이긴 했지만 순찰조 인원들은 눈앞의 여덟 명을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들이 마주한 여덟 명의 구성은 굉장히 기묘했다. 포니 테일의 여성 검사와 붉은 옷에 해머를 휘두르는 10대 소녀, 멀리서 보조 마법을 사용하는 푸른 색 옷을 입은 남자와 녹색 옷의 여자. 이 네 명을 정확하게 둘로 늘린 모습이었던 것이다.
초조한 마음을 간신히 다스리고 있는 순찰조의 통신기에 또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우주항에 정박중인 카산드라와 제이카의 통신이었다.

- 여기는 제이카, 고성능 해킹 탐지! 함선 제어권을 빼앗기고 있다!

- 카산드라, 함선 조종은 방어했지만 마력 반응로와 게이트 제어권을 빼앗겼다. 마력 반응로 반응 속도, 옐로우 존!

통신을 들은 실비아는 고개를 들어 멀리 서 있는 녹색 옷의 여자 둘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눈을 반쯤 감고 허공에 떠오른 공간 키보드를 무서운 속도로 두들기는 모습을 보건데, 분명 그 둘이 함선을 해킹하고 있을 터였다.
실비아는 통신기를 이용해 에르트 측 경호인원을 포함한 순찰조 전원에게 말을 전했다.

"여러분, 제 말 잘 들으세요. 상황을 보니 저기 있는 녹색 옷 여자 둘이 함선을 해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윽! 일단 저 둘만 제압하면 함선에서 대기 중인 아군들을 ─디펜서! 부를 수 있을 거에요. 나와 에리나가 어떻게든 ─라이트닝 스매셔! 해볼 테니, 견제 좀 해주실래요?"

에르트 사람들은 물론 국원들도 실비아의 제안에 어리둥절했지만, 역시 전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에리나는 예외지만-이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복도를 울리는 함성과 함께 십여발의 마력탄이 적들을 향해 날아갔고, 허를 찔린 전방의 네 명이 공격을 받아내느라 주춤하는 사이 에리나와 실비아가 전선을 돌파했다. 그 둘은 어느 새 검고 하얀 PA를 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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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최종전에 돌입합니다. 이제는 사정이 있어서 주말에 올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일단 쓴 건 마지막편, 혹은 그 앞 내용 정도까지 쓰긴 했지만요.

이번에 '...어?' 싶은 4인조 역시 후반에 급조 투입했습니다. 기본 설정은 살아있지만 모티브를 대폭 변경한 쪽이죠.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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