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크으윽...!"

본래 상정했던 속력을 훨씬 뛰어넘는 움직임은 PIC의 관성 상쇄 능력으로도 완전히 상쇄할 수 없을 정도의 부하를 일으켰고, 한주는 급격히 방향을 바꿀 때마다 내장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적은 표도르를 격추한 사상 최강의 상대였고, 무엇보다 이 싸움에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20년 넘게 기다려온 꿈이 겨우 이루어졌는데 이제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야아아아아아아압!"

다시금 초고속으로 접근하는 은색의 IS가 보였다. 자신의 US 수르트와 마찬가지로 은색 IS도 이미 곳곳의 장갑이 깨져나가 일반적으로는 전투를 속행하기 힘든 상태였지만, 상대도 한주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서로는 서로에게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다시 한번 공중에서 교차하며 주먹을 주고받은 후, 재격돌을 위해 선회하던 한주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극심한 두통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으윽... 하필이면 지금...!"

이전과는 수준이 다른 엄청난 두통에 한주는 자신도 모르게 속력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런 한주의 눈앞이 갑자기 환하게 빛나며 무언가 비치기 시작했다.




"와아, 아빠, 저거 뭐야?"

한주가 6살 때인 2108년, 백기사 사건이 일어났다. 한주와 함께 TV를 보고 있던 한주의 아버지는 백기사의 흐릿한 모습이 영상에 나타나자 몸을 굳혔지만 한주는 알지 못했다. 그저 예쁘고 멋진 기사가 수많은 미사일을 떨어트리고, 전투기의 날개를 베고, 군함의 함미를 파괴하는 모습에 순수하게 감탄할 뿐이었다. 6살짜리 여자아이가 IS의 파급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한주의 아버지는 군인, 그것도 공군의 전투기 파일럿이었다. 하늘을 나는 것을 자랑으로 삼던 한주의 아버지는 IS의 존재가 공군의 입지를 흔들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것은 빗나가지 않았다. IS는 그 수가 적은 것만이 문제일 뿐, 단신으로 1개 국가의 무력을 동시에상대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재래식 병력끼리 치고 받는다고 한들 IS가 나타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소리였다. 시노노노 타바네 박사에 의해 IS 코어가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하자 그것을 계기로 각국은 군축에 들어갔고,운용이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드는 병기부터 골라내다보니 첫번째 대상은 공군의 전투기들이었다.
전투기 파일럿은 양성이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탑승할 기체가 없다고 함부로 퇴역시키는 것은 군 전체에 있어 큰 손실이었다. 그 때문에 가능한 많은 수를 수송기 담당으로 돌리고 그래도 자리가 안 나는 파일럿들은 대기명령을 내렸지만, 대기를 명령받은 파일럿들의 대다수는 자신들의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퇴역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주의 아버지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다녀오셨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 된 한주는 며칠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마중하며 일어섰다. 한주의 아버지는 피곤한 얼굴로 작게 미소를 짓고는 한주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고 욕실로 향했고, 그 모습을 본 한주의 어머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주의 아버지는 퇴역한 후 어느 항공사의 여객기 기장이 되었다.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지만 한주의 아버지는 아직 전투기의조종간이 주는 느낌, 자신이 날고 있다는 그 실감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한주가 잠든 후, 거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한주의 아버지 곁에 한주의 어머니가 다가와 앉더니 안주를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한주의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손을 멈췄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자신도 안주를 하나 집어먹었다. 잠시 후, 한주의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보, 이제 그런 표정은 그만 지을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런 표정이라... 어떤 표정인데?"

"굳이 말하자면 '나는 패배자입니다'하는 표정."

"...하아, 역시 당신은 가차없네."

한주의 아버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고, 한주의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표정도 안 돼. 아빠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애들이 불안해한다구. 당신 볼 때마다 한주가 얼마나 걱정하는 줄 알아?"

"걱정이라... 난 딸내미한테도 걱정을 사는 건가. 역시 글렀군..."

"그런 뜻이 아니고... 아아, 정말이지."

한주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고, 한주의 아버지는 반사적으로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게 뭐야?"

"한주가 오늘 학교 숙제로 받은 글짓기야. 장래희망에 대해서 쓰라고 했대."

대답을 들은 한주의 아버지는 천천히 한주가 쓴 글짓기 숙제를 읽기 시작했다. 문장을 하나 하나 읽어내려갈 때마다 그의 표정은 조금씩 변해갔고, 끝까지 다 읽었을 무렵에는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 변화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한주의 어머니는 술잔을 비우고는 새로 술을 따라 한주의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한주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겠어?"

아내의 물음에 한주의 아버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한주의 어머니도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잘해. 더 이상 애한테 약한 모습 보여주지 말고. 같이 하늘을 날려면 멋진 모습으로 날아줘야지."

"...응. 그래."

그렇게 대답한 한주의 아버지는 다시 한주의 글짓기 숙제로 눈을 돌렸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제 꿈은 IS 조종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IS를 타면 하늘을 날 수 있고, 그러면 아빠와 같이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하지만 요즘 기분이 안 좋으십니다. 그래서 나는 아빠랑 같이 재미있게 날고 싶습니다. 그러면...'




12살이 되던 해, 한주는 IS 적성 테스트를 보았다. IS 적성 테스트는 정부에서 무료로 실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희망자라면 누구나 응시가 가능했지만, 기본적으로 연령 제한이 있어서 응시가능 최저 연령은 12세였다. 그보다 어린 나이의 경우 반사신경이나 신체의 발달 차이로 인해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2세도 어디까지나 최저한의 나이이기 때문에 12세부터 15세까지는 간이 적성 테스트만 실시했다.

'드디어 테스트구나. 어쩐지 두근두근하네.'

시험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한주는 설레이는 기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기실에는 자신처럼 긴장한 얼굴의 소녀들이 여럿 있었고, 그 중에는 친구들끼리 온 무리도 있는지 모여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친구들끼리 온 학생들은 잡담을 주고받으며 긴장이 서서히 풀려가는 모습이어서 한주는 자신도 친구들과 함께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응시번호 41번부터 60번까지 나오세요."

대기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진행요원의 말에 여학생들이 분주해졌고, 차례가 돌아온 한주도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한달 후.

"아, 한주야. 등기 왔다."

"등기요? 뭔데요?"

"식탁 위에 있는데, IS 연구소에서 보낸 거더라. 저번에 너 테스트 본 거... 어머, 얘?"

학교에서 돌아온 한주는 연구소에서 보낸 등기가 있다는 말에 즉시 집어들고는 곧장 방으로 돌진했다. 밖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지금 한주에겐 이 등기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주는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천천히 등기의 한쪽을 뜯어낸 후 내용물을 꺼냈다.
몇시간 후, 비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한주의 아버지는 한주가 학교에서 돌아온 뒤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일 있었어?"

"IS 연구소에서 등기가 왔는데, 그거 들고 들어간 다음부터 안 나오네."

"...그런가."

한주의 부모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침울해졌다. 한주가 이렇게까지 조용하다면 그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적성 랭크가 현저히 낮은 것. 그래서 IS 파일럿으로는 부적합하다는 것. 그 외에는 한주가 방에서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한주의 아버지는 한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주야, 아빠다. 들어가도 되겠니?"

대답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한주의 아버지는 한번 더 문을 두드리며 말했지만, 한주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한주의 아버지는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문 을 열고 들어가자, 한주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왼손에는 구겨진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내용까지는 보이지않았지만 한주의 아버지는 그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주의 아버지는 침대 곁에 앉으며 한주에게 말을 걸었다.

"한주야, 그만 기분 풀어. 어쩔 수 없는 거잖니. 적성이라는 건 사람이 노력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니, 경우에 따라선 어떻게 할 수 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지금 이 일로 좌절하기엔 좀 그렇지 않니?"

하지만 아버지의 말을 들은 한주는 종이를 더 힘껏 움켜쥘 뿐 여전히 엎드려 있었고, 그 모습에 한주의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IS 적성 랭크가 높게 나온다고 해도 모두가 IS를 타는 것도 아니잖아. 코어의 수량은 한정되어 있고, 그 수는 여성의 수에 비해서도 턱없이 적어. 그러니 적성 랭크가 높게 나왔다고 해도 반드시 타게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고. 그러니까..."

"하지만 이러면 시도조차 못하게 되잖아!"

한주는 아버지의 말을 끊으며 벌떡 일어났다. 한주의 눈은 눈물 때문에 퉁퉁 부어있었고,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내 꿈은 어떻게 되는 건데! 하늘을 날겠다는 꿈은 어떻게 되는 건데!"

"IS 파일럿만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건 아니잖니? 봐, 아빠도..."

"내꿈은 아빠랑 같이 하늘을 나는 거였다구! 아빠에게 내 힘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야! 아빠가 더 이상 IS 때문에 슬퍼하지 않게 하고 싶었단 말이야!!"

한주의 외침에 아버지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윽고 한주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딸을 지켜 보던 아버지는 천천히 딸을 껴안아주었고, 딸은 아버지에게 매달려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 후로 한주는 매년 IS 적성 테스트를 보았다. 물론 그 도중에도 IS에 대한 공부나 자체 트레이닝은 계속했다. 하지만 시험 결과는 늘 똑같았고, 한주의 적성 랭크는 E랭크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학교 3학년 겨울에 치른, IS 스쿨 입학에서 참고하게 되는 마지막 IS 적성 테스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주의 부모님은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한주의 아버지는 내심 많이 실망한 눈치였고, 그런 아버지에게 미안해서 한주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달 뒤, 한주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공중지원은 아직인가?"

"곧 올 겁니다. 아, 저기 옵니다!"

"전원 충격에 대비! 아군의 지원 폭격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주는 단신으로 외국의 한 PMC(Private Military Company, 민간 군사 기업)에 지원 입사했다. 어린 나이인데다 여자라는 점 때문에 다들 탐탁치 않아 했지만 한주는 우수한 성적으로 테스트를 통과했고, 실전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올려 31살에 중대급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피해는?"

"에릭과 링이 후송됐습니다. 나머지는 찰과상이나 타박상 정도라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은 놈은 없는 건가? 그나마 다행이군."

"대장님, 본사에서 연락이 와 있습니다. 베이스 캠프로 귀환하는대로 전화 달라는데요?"

"나 참, 또 뭐야. 철수명령이라도 내리나?"

투덜거리며 캠프로 귀환한 한주는 본사 임원으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게 된다.

"정말입니까?"

- 그렇소, 중대장. 이번에 계약을 맺게 된 상대는 군수산업체들의 연합이라서 말이지, 최고의 인재를 원한다더군. IS를 능가할 물건을 만드는데 테스트 파일럿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들을 쓸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이런 데로 흘러들어오는 녀석들이 IS에 대해서 잘 알 리도 없어서 확인하느라 좀 힘들었소. 아무튼, 본사에서는 모든 자료를 검토한 결과 채한주 중대장이 우리쪽에서 파견하는 인원들의 리더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소. 중대장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소?

"물론입니다. 다만 한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 말해보시오.

"이번 임무는 기존 팀과는 다른 구성이 될 텐데요. 멤버를 선발하는데 저도 참여하게 해주십시오."

- 리더가 멤버를 고르는 것은 당연한 권리요. 본사로 돌아오는대로 그동안 추려놓은 멤버 후보들의 자료를 넘겨주리다. 곧 후속 부대가 도착할 예정이니 임무를 교대하고 귀환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자네는?"

"PMC '레드 라이언'에서 파견나온 표도르 유리예비치 메드베데프(Fyodr Yurievich Medvedev), 팀 라그나뢰크의 서브 리더가 되었다. 리더에게 인사를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왔는데, 실례였나?"

군산연에서 조직한 팀 라그나뢰크에 합류한 직후, 개인실에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한주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와 마주쳤다. 건장한 남성과 반라의 여성, 일반적으로는 이럴 때 비명과 함께 남자가 도망치듯 방에서 뛰쳐나오는 상황이 벌어지지만 한주나 표도르나 보통은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샤워중이면 도로 나가줬으면 좋겠군."

"막 나가려던 참인데 샤워실에서 나오더군. 아무튼 내 실수다. 미안해."

표도르의 말에 한주는 웃으면서 응수했다.

"미안하다면 됐어. 나는 채한주(蔡翰朱), 원래 소속은 PMC 크로우(CROW, 鴉)지만 지금은 팀 라그나뢰크의 리더다. 인사는 이만하면 됐나?"

"뭐, 그런 것 같군. 그럼 난 그만 돌아가지."

"잠깐, 이렇게 일부러 찾아왔는데 한잔 하고 가지?"

한주는 냉장고를 열어 꺼낸 맥주캔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고, 표도르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대답했다.

"...우선 옷부터 제대로 입어라."




표도르와 이야기를 나눈 한주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이번에 팀 라그나뢰크에 모인 용병들이 모두 IS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우는 조금씩 달랐지만 다들 IS 때문에 꿈을 잃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표도르는 어렸을 때 전투기 파일럿이 꿈이었지만, IS가 등장하며 공군의 주 임무가 수송과 정찰로 변하며 그 꿈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꿈을 잃은 표도르는 거리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살았고, 그러다 만난 것이 레드 라이언의 용병이어서 그 때 스카웃되었다는 것이다.

"뭔가 기분 참 묘한데.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한 곳에 모일 수도 있나?"

"누군가의 인도가 아닐까? 아니면 농간이라든가."

"인도든 농간이든 솔직히 별로 상관없잖아? 이제 하늘을 IS에게서 되찾을 수 있게 됐다는 게 중요하지."

"이런, 이제 겨우 실험기가 나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성공 확신이야? 너무 빠르다고. 동양 속담에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지 않아?"

"이럴 땐 그것보다 '우물에서 숭늉 찾기'가 더 어울리는 속담이라고."

표도르의 핀잔에 한주는 적절한 속담을 다시 일러주며 맥주캔을 들어올렸고, 표도르도 자신의 앞에 있는 캔을 집어 건배를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년후인 2135년, 개발진과 테스트 파일럿들의 노력으로 1세대 US인 바이킹이 최종 완성되고 2세대 에인헤야르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팀 라그나뢰크의 주요 멤버들에게는 원오프 커스텀 기체들이 주어지게 됨에 따라 각자의 요구사항도전달되었다. 다들 개성적인 요구사항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표도르와 한주의 경우는 특별해서, 표도르는 일정 범위 내에서 확장영역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를 요구했고 한주는 역시 일정 범위 내에서 다른 기체들의 실드를 무효화시키는 장치를 요구했다. 둘 다 상당히 터무니 없는 요구였지만 개발진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그 두 장치를 모두 완성해서 펜리르와 수르트에 각각 장착하는데 성공했다.
2136년 8월, 수르트와 펜리르를 수령한 한주와 표도르는 각자의 US를 타고 시험 비행을 시작했다.

"바이킹이나 에인헤야르와는 반응이 확실히 다르군. 훨씬 부드러워."

- 그 녀석들은 미조정 상태였고, 이 기체들에는 우리들의 모션 데이터만 들어갔으니 확실히 반응이 좋겠지. ...이봐, 한주.

"왜, 표도르?"

- 우리들, 겨우 하늘로 날아올랐구나.

"...응, 그렇네."

어쩐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표도르의 이야기에 한주는 조용히 수긍했다. US를 타고 비행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몇번이나 해왔지만, 이렇게 자신들만의 기체를 타고 날아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미조정 기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불편이 전혀 없는,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나는 것같은 편안함에 한주는 자신의 꿈이 반이나마 이루어졌다는 실감을 느꼈다. 한주는 불현듯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고, 표도르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IS는 도태되겠지. 병기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결함품이니까."

비행을 마치고 내려온 한주는 격납고로 실려가는 수르트와 펜리르를 보며 중얼거렸다.

" 그렇겠지. 생산성도 최악인 주제에 성별에 적성까지 따진다면, 동급의 물건이 나오는 순간 우위성이 사라지니까. 아니, 오히려 US가 약간 성능이 부족하다고 쳐도 생산성으로 밀어붙이면 충분할 거야. 비싸긴 하지만 적어도 만들면 틀림없이 움직이니까."

"그래, 그 쓸데없는 오만을 키워주는 물건이 쓸려나가는 걸 볼 수 있겠지."




하지만 한주는 몇달 후 절망에 빠졌다. 뇌종양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의사는 그동안 간간이 느껴지던 두통, 이따금 눈앞이 흐려지는 일이 모두 뇌종양의 증세였다고 했다. 길어야 6개월일 것이라는 말을 들은 한주는, 그래도 그 전에 IS가 본격적으로 밀려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하지만 같은 달인 2136년 11월, US가 IS를 무단으로 적성체로 판정하는 사고가 발생하며 US에 대한 발주가 취소되고 US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한주는 초조해졌다. 이미 냉정한 사고가 불가능해진 한주는 결국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힘으로 IS를 없애버린다는 결정을 내렸고, 표도르는 그 결정에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137년 2월, 생산된 US의 총 대수가 팀 라그나뢰크의 멤버들 수를 능가하게 되자 한주는 멤버들을 이끌고 봉기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미국의 IS와 연구소를 파괴하고, 남미와 진주만의 시설을 파괴하는 것까지도. 하지만 일본에서부터 계획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스쿨에 잠입해있던 둘이 사고를 친 것부터 시작해서 시간에 쫓겨 스쿨의 훈련용 IS를 파괴하지 못한 것, 그리고 중국 시닝에서 IS들의 대규모 반격까지. 일방적인 파괴로 이어질 예정이던 계획이 전면전으로 변하며 한주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초조해졌고, 결국 표도르가 격추되자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한주는 문득 두통이 사라지고 눈앞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어있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보인 과거의 모습에 한주는 주마등이라는 말을 떠올렸고, 입에서 넘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미소를 지었다. 환한 빛 너머에서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인지, 표도르인지, 이미 흐려진 시야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한주는 그 사람이 자신을 맞이하러나온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주는 해방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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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본편을 끝내고 외전을 썼습니다만, 지금 보니 외전을 최종편보다 먼저 올리는 게 낫겠더군요. 그래서 순서를 바꿨습니다.
다음편이 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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